최근 한 국회의원 후보자가 껍데기 정치인은 가라고 일갈했다. 그는 “토착 왜구와 죽창가 같은 선동 정치, 적폐 청산과 같은 모호한 구호로 국가를 두 동강 내고 갈라치기” 하는 그런 정치를 껍데기라고 표현한 것이다. 신동엽 시인이 쓴 “껍데기는 가라”는 시를 가져와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빗대어 한 말처럼 보인다. 더욱이 4월 총선에 출마하는 변으로 한 연설이었으니 기발한 착안이긴 하다.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의 1연은 이렇게 시작한다.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종교와 신앙에도 껍데기가 있고 알맹이가 있다. 간혹 사람들은 알맹이는 놓치고 껍데기만 붙들고 유난스레 난리를 피우는 사람들이 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예수님은 껍데기 타령하는 저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마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 23:26) 눈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안과 겉은 도대체 무엇이며 알맹이와 껍데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선행절을 살펴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그 힌트를 이렇게 제공한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율법의 겉이라고 한다면 그 안 곧 알맹이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라는 것이다. 정신이 상실된 껍데기는 무의미할 뿐 아니라 가치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겉 곧 껍데기가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주님도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하셨다. 출애굽기 35장 서두에는 안식일 관련 기록이 나온다.
(출 35:3)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오늘날에도 안식일에 요리하면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어릴 때 어머니는 안식일에 구멍 난 양말을 깁기 위해 바느질하는 것을 금지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구멍이 난 양말을 신고 교회 갈지언정 바느질하지는 않았다. 이런 신앙은 겉을 보고 안을 보지 못하는 신앙이었다. “불을 피우지 말지나라”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이럴 경우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저지른 수많은 실수를 따라가게 된다. 안식일을 구별하려는 노력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방점을 잘못 찍으면 더 큰 실수를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그들의 시선으로는 안식일에 병원문을 열고 환자를 받아 영업하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안식일의 본질은 사랑이다. 그 사랑의 본질을 빼고 형식과 규칙만 난무한 건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광야에서 당시 불을 피우는 것은 오늘날같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 일은 불필요할 수도 있었고 정작 안식일에 해야 할 더 합당한 일들을 못 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단순히 불을 피우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면 극단적인 유대인들처럼 불도 켜면 안 되고 요리도 하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밥을 못 먹은 환자가 있다면 더 적극적으로 밥을 지어서 대접하는 것이 예수님의 안식일 준수 방법이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이것이 사랑인가?”라고 묻는다면 대답을 얻기가 보다 쉬울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희에게 사랑으로 대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사랑이 율법이 되고 율법이 사랑으로 나타나게 하소서 알맹이만 중요하다고 껍데기는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알맹이를 소중히 하되 그 알맹이를 보존하는 껍데기도 가치있게 여길 줄 아는 지혜를 잊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