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친구의 만남 (구상회)
젊었을 때는 친한 친구 네 명이 만나는 것이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뉴욕, 토론토, 밴쿠버, 호놀룰루에
흩어져 사는 구순(九旬)이 머지않은 친구 네 명과 그와 비슷한 나이의 배우자 모두 여덟 명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군대 한 사단을 동원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네 친구가 처음 만난
것은 18~19세에 S 의대 예과에
입학하였을 때였다. 동급생 50명 가운데
우리 네 사람만 아직도 친구로 지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가
대학에 입학한 것은 고등학교가 5년제에서 6년제로
바뀌고 있을 때였다. 신입생 가운데는 6학년을
마치고 온 학생과 5학년을 마치고 입학한 학생이 있었다. 우리
넷은 5학년을 마치고 온 그룹에 속하여
동지애를 느끼게 되었다. 예과 2년이 끝나고 1950년 4월에 의대 본과생(本科生) 이 되었으나 2개월
후에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인민군
통치하에서 살아난 우리는 2-3 개월 공부하다 1.4 후퇴를
맞게 되었다. 의과대학 3학년 이상 학생은
군위 관이 되고 하급 학생은 부산으로 내려가 36 육군병원에서 졸병 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 훈련을 받을 때, 야전침대(野戰寢臺)의 틀로 쓰는 몽둥이로
곤봉 찜질을 받은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넷 중의 한
친구는 미리 부산으로 피난하여 UN군 스웨덴 육군병원에서 기사로 근무하여 군대 입대에서 면제되었다.) 위생병으로 끊임없이 상급 하사관과 장교의 눈치를 보며 잡일을
하는 것은 참을 만하였으나 군율(軍律)이라는 구실로 때 없이 방망이로 매질하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이 신세를 면하기 위해 우리 세 명은 연락장교(영어 통역관) 시험을 치르고 장교 훈련을 받은 후 육군 중위가
되어 한국 전쟁이 치열했을 때 일선에 배치되었다. 2년 근무가 끝날 무렵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학창 복귀’라는 명목으로 제대하여 네 친구가 서울에서 의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전쟁으로
집이 파괴된 친구도 있었고 피난 간 가족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친구도 있어 우리는 합숙을 하여 한방에서 자고 한 밥상에서 음식을 먹으며 1년을
지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세 명은 같은 병원에서 인턴을 마쳤다. 인턴을 마치고 네 친구가 모두 전문의
훈련을 받으러 미국으로 떠났다. 우리는 전공 분야 훈련을 마치고 미국과 캐나다에 정착하여 이제껏
살고 있다. 우리가 계속 친분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네 명
친구의 부인들이 친근다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 친구의 부인은 여자대학 동창생이다. 총각 친구는 한 친구의 애들의 유치원 선생을 중매하여 결혼하게 되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네 친구가 가깝게 된 연유이다. 그러면 이 네 사람이
여러 면에서 비슷한가 하면 그건 아니다. 외모와
성격이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나와 같이 키가 작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국에서는 농구선수가
될 만큼 키가 큰 친구도 있다. 취미 활동도 매일 운동을 안 하면 몸이 근질거리고 몇 해 전까지 age shooter (골프 점수가 자기 나이 이하)인 친구도
있고, 광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진 촬영에 취미가 있어 사진 정리를 시작하면 시간이 가는지
오는지도 모르는 친구도 있다. 어느 친구는 사교와 행정 능력에 뛰어나 대학병원 과장, 부원장
등을 지냈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활동가인 친구도 있고 나와 같이 한 병원에서 희귀한
병 하나를 연구하며 한 우물을 파고 지난 사람도 있다. 믿음도 달라서 기독교 성경은 하느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신(神)의 존재는 사람이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초자연적 초인간적 신은 믿을 수 없다는 사람도 있다. 젊었을
때는 이러한 문제를 두고 핏대를 올리며 토론하기도 하였다. 친구의 의견, 믿음을 존중한다는 점에서만 네 사람의 의견이 일치를 보게 되었다. 서로가 여러모로 다르므로 피차 배우고 즐기는지도 모른다. 나이 70이 지나면서 네 친구 모임이 드물어졌고 80이 지나서는 5~6년 만에 한 번 만나면 다행으로 생각할
정도가 되었다. 은퇴하여 자유 시간이 많아졌는데 모일 수 없게 된 것은 우리의 우정이 멀어져서가
아니라 누군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여행할 수 없는 것이 이유였다. 50년 동안 편지를 순회(巡廻)하다가 지난 10년 동안은 인터넷으로 거의 매일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다. 그러나 편지로, 전화로 만나는
것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나. 더 늙기 전에, 네 사람이 다 살아있는 동안에 재상봉하자는 말이 나온 것은 지난여름이었다. 어느 곳에서 어떻게 모이느냐는 이야기가 인터넷으로 오가고 하였다. 독챗집을
아직 가지고 있는 친구는 자기 집에서 8명을 다 묵게 하겠다고 자원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이와 건강 상태로 모두를 한 집에서 여러 날 치른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정을 못하고 있는데 뉴욕에 사는 친구가 중풍으로 넘어져 말도 못 하고 반신마비가 되었다. 우리의 재상봉은 수포로 돌아간 것이 틀림없었다. 한 달 후, 중풍 치료를 받고 있던 친구는 지팡이를 짚고 걷기
시작하였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계속 회복한다면 같이 만나는 데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주치의도 3개월간 중풍이 재발하지 않으면 장거리 여행을 하여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한다. 이 친구 덕분에 우리의 재상봉 장소 선택은 쉬워졌다. 매일 한 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고, 날씨가 온화하고, 경치도 좋은 곳. Hawaiian Island Cruise (하와이
섬 크루즈)가 안성맞춤이었다. 모두 무사히 도착하였나
조마조마하며 1월 7일에 Pride of America 배에 올랐다. 마지막에
승선한 우리 부부는 세 쌍 부부가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여 앉은 자리에 합류하였다. 얼핏
보니 많이 남지 않은 머리는 몇 해 전보다 희어졌고 주름살은 더욱 깊어졌으나 병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친구는 없었다. 그러나 각자의 건강 상태는 판이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중풍에서
회복하고 있는 친구는 앉아서 대화할 때는 평소와 다른지 몰라 보였으나 의자에서 일어나려면 지팡이가
필요했고 100m는 걸을 수 있으나 그 이상 걸으려면 쉬어야 했다. 또 두 명은 당뇨병이 있어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했다. 그 반면에 한 친구는 주마다 다섯 번 걸어서 골프 라운드를 하고
있다고 한다. 두 명은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끼고도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대화하는 것이
힘들었다. 모두가 기억력은 쇠퇴하여 조반을 먹으며 약속한 점심식사 모이는 장소와 시간을
잊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래서 시간과 장소 약속은 두서너 번 되풀이하였고, 그래도 못 미더워 5분 전에 전화로 약속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60년 전 학창 시절에 있었던 사건은 어제
있었던 일같이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와이섬 크루즈 1주일, 호놀룰루 호텔에서 4일을 즐겁게 지내니 10일이 삽시간에 날아갔다. 작별하면서 우리의 처음
만난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내년에 다시 만나자고 다짐을 하였다. 그러나 내달, 내일의
건강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우리 형편에 어찌 일 년 후의 재상봉을 장담하랴. 그러나 희망보다 나은 약은 없고 내일에 대한 기대(期待)보다 좋은 강장제(强壯劑)는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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