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리를 보다 - 영국의 역사와 지리 세계의 시간이 시작되는 영국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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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0.13. 20:52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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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리를 보다
영국의 역사와 지리
세계의 시간이 시작되는 영국 (1)
1 솔즈베리 - 13세기 중엽에 지은 솔즈베리대성당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북쪽 15km에 위치한 솔즈베리 평원에는 거석 기념물인 스톤헨지가 있다.
2 요크 – 로마 시대에 주요 군사 기지이자 행정 중심지였다.
3 마켓 보즈워스 – 30년에 걸친 장미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일어난 도시.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랭커스터 가문이 요크 가문을 격파하면서 장미 전쟁은 막을 내렸다.
4 노르망디 - 프랑스 북서부 영국 해협에 면한 지방.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1세가 노르만 왕조를 세웠다.
섬나라인 영국에는 예전에 천사들(Angels)이 살았다. 진짜 천사가 아니라 앵글 족(Angles)이 살았다는 뜻이다. 오늘날 영국의 그레이트브리튼 섬인 ‘브리타니아’에 게르만 민족인 앵글 족과 색슨 족이 정착했는데, 앵글 족이 중심 세력이었다. 그래서 이 섬은 ‘앵글 족의 땅(Angleland)’이라고 불렸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지금은 앵글랜드(Angleland)를 엥글랜드(England)라고 쓰고 ‘잉글랜드’라고 읽는다. 지금도 잉글랜드 사람을 ‘앵글로·색슨 족’이라고 부른다.
이 섬에는 잉글랜드 외에도 웨일스와 스코틀랜드가 있다. 섬 전체는 ‘그레이트브리튼(Great Britain)’이라고 부른다. 그레이트브리튼 옆에는 섬이 하나 더 있는데, 이 섬의 이름은 ‘아일랜드(Ireland)’다. 섬 동북부에 있는 북아일랜드는 영국에 속한다.
오늘의 영국은 역사의 결과물이다. 무릇 그렇지 않은 게 없겠지만 영국은 과거와의 연결 고리가 더욱 강하다. 영국의 공식 명칭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일랜드의 연합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에서도 복잡한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입헌군주국 영국은 여전히 역사의 흐름 속에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배경을 모르면 영국의 인문 지리적 성격에 대해서도 알기 힘들다. 먼저 영국에 최초로 정착한 민족부터 만나 보자.
스톤헨지의 비밀을 캐다
선사 시대의 거석 기념물인 스톤헨지. 인공적으로 깎은 돌들이 계획적인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출처: (CC) Travail personnel @ wikimedia commons>
런던에서 서남쪽으로 130km 떨어진 월트셔 주의 도시 솔즈베리에서 북쪽으로 15km 정도 가면 영국 최초의 이주민들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스톤헨지가 웅대한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주민들이 누구인지, 왜 스톤헨지를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2008년 영국 본머스 대학 고고학 연구팀은 “방사성 탄소에 의한 연대 측정법에 근거해 스톤헨지가 기원전 2300년쯤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발표했다. 2014년에는 영국 버밍엄 대학교 연구팀이 스톤헨지 주변에서 17개의 구조물과 수십 기(基)의 무덤을 발견했는데, 무덤의 일부가 별의 위치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기원전 2333년이고, 1994년에 북한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기원전 2993년이다. 그리고 영국 전역에서 한반도의 고인돌과 비슷한 형태의 고인돌이 발견되었고, 일부 고인돌 덮개돌에는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한편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 정도는 한반도에 분포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일각에서는 스톤헨지가 한반도의 고인돌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동아일보사에서 출간한 [고조선 사라진 역사]에는 2003년에 발견된 스톤헨지 주변 무덤에 묻힌 유골의 주인공들이 아시아 계열이라는 연구 결과가 소개되어 있다. 일부 학계에서는 한반도에서 고인돌이 만들어지기 시작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인돌과 청동기 문명이 고조선 지역에서 유럽으로 확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여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고고학은 늘 바뀌어온 학문이다. 다만 세상은 분리된 게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세계 지리도 마찬가지다. 대륙판의 이동, 침식과 압력, 대기 대순환, 지구촌 동식물과 사람들, 이 모든 것을 따로 떼놓고 설명한다는 게 가능할 성싶지 않다.
영국의 시인이자 성직자 존 던.
런던 출신 시인이자 성직자인 존 던(John Donne, 1572~1631)은 세계 지리를, 아니 세상의 본질을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에서 명징하게 표현했다.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다.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진다.
모래톱이 씻겨 가도 마찬가지다.
그대의 친구나 영지(領地)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죽음이라도 나를 감소시킨다.
나는 인류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를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
켈트 족과 앵글로 · 색슨 족의 결투
기원전 4세기경 켈트 족 일부가 로마 인에게 쫓겨 갈리아(현재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라인 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지방)에서 영국으로 건너와 선주민을 밀어내고 정착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방의 켈트 족을 정벌하였고, 이후 로마군은 잉글랜드까지 진출해 약 350년 동안 섬을 지배했다. 잉글랜드 북부의 요크는 로마 시대에 북쪽 변경의 방위 거점이었다. 당시 로마 인은 그레이트브리튼 섬을 ‘브리타니아’, 그곳에 사는 켈트 족을 ‘브리튼 족’이라고 불렀다.
4세기 말경 훈 족의 침입을 받은 게르만 족이 대이동을 시작하면서 게르만 족의 일파인 앵글로․색슨 족이 대륙에서 브리타니아로 건너갔다. 이 여파로 5세기경 로마군은 영국에서 철수했고 켈트 족은 스코틀랜드·웨일스·아일랜드·유럽 대륙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19세기 중반 수많은 아일랜드 인들이 신대륙을 향해 위험을 무릅쓰고 고향을 떠났다.
대륙으로 쫓겨 간 켈트 족은 ‘작은 브리튼’을 의미하는 프랑스의 브르타뉴에 정착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는 앵글로․색슨 족과 1,000년 넘게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영국에 합병되고 말았다.
아일랜드는 섬이라는 특성상 켈트 족의 원형이 유럽에서 가장 잘 유지되고 있는 나라다.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들은 유대인이 시온주의를 내세우는 것처럼 켈트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아일랜드에는 가톨릭교도들이 살고 있지만 영국령에 속하는 북아일랜드에는 영국에서 건너온 성공회 교도들이 거주하고 있어 두 세력 간에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세기 중반에는 아일랜드에 대기근이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신대륙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때 농부 패트릭 케네디도 신대륙으로 건너갔고, 그의 후손 J. F 케네디는 켈트 족인 아일랜드 계 최초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켈트 족의 신화 ‘아서 왕 이야기’에 나오는 아서 왕도 6세기경 앵글로․색슨 족과의 싸움을 여러 차례 승리로 이끈 켈트 족이다.
왜 영국과 프랑스는 앙숙이 되었나
7세기경 앵글로․색슨 족은 런던 부근에 7왕국을 건설했으나, 1066년 프랑스 땅에 있던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1세가 도버 해협을 건너가 앵글로․색슨 왕조를 무너뜨리고 노르만 왕조를 세웠다. 노르망디 공국은 노르만 족의 지도자 롤로가 프랑스를 압박하여 샤를 3세로부터 받아낸 봉토(센 강 하류 지역)에 세운 공국이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에는 선주민, 켈트 족, 라틴 족 로마 인, 앵글로․색슨 족, 노르만 족 등 다양한 민족이 서로 섞이게 됐다. 영국에서 노르만 왕조가 시작된 후 그들의 본거지인 노르망디는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1259년 파리 조약에 의해 프랑스 왕국에 정식으로 귀속되었다.
오를레앙 포위전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잔 다르크.
1328년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죽자 당시 잉글랜드 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어머니가 샤를 4세의 누이라는 점을 내세워 자신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샤를 4세의 사촌인 필리프 드 발루아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 계승권 분쟁이 단초가 되어 양국은 기나긴 백년 전쟁(1337~1453년)을 치렀다. 에드워드 3세가 337 박수를 치며 전쟁을 독려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전쟁이 시작된 연도를 기억하기 쉬울 것이다. 처음에는 영국이 유리했으나, 영국 내에서 왕권을 둘러싸고 혼란이 일어난 틈을 타 프랑스의 샤를 7세가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바로 이때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가 활약했다.
백년 전쟁 직후 영국에서는 붉은 장미를 문장(紋章)으로 삼은 랭커스터 가문과 흰 장미를 문장으로 삼은 요크 가문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본격화되었다. 랭커스터 가의 헨리 7세가 마켓 보즈위스에서 요크 가를 물리침으로써 장미전쟁(1455∼1485)을 종식시켰고, 이어서 요크 가의 엘리자베스를 왕비로 맞아들여 튜더 왕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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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림 전쟁 중 러시아 요새를 향해 대포를 쏘는 영국군. 2 영국의 간호사 나이팅게일. 크림 전쟁 당시 야전병원장으로 활약했다. |
영국과 프랑스는 오랫동안 앙숙으로 지냈으나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1853년 크림 전쟁에서 함께 오스만 제국을 지원했다. 전투보다 전염병이 더 기승을 부렸던 이 전쟁에서는 영국의 나이팅게일이 활약했다. 편의상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하얀 크림을 ‘팔러오셨다(853)’라고 기억해두자.
왜 월드컵에는 영국 국가 대표 팀이 없을까
미국 국기에는 별(星, Star)과 희고 빨간 줄(條, Stripe)이 들어가 있어 국기를 성조기(星條旗, Stars and Stripes)라고 부른다. 태양이 그려져 있는 일본 국기는 일장기(日章旗)라고 한다. 또 프랑스 국기에는 자유, 평등, 박애를 의미하는 파란색, 하얀색, 붉은색이 들어 있어 삼색기(三色旗)라고 한다. 우리나라 국기에는 태극 문양이 있어 태극기(太極旗)라고 한다. 그렇다면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Union Jack)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영국의 국기, 유니언 잭.
영국 국기에는 결합 문자처럼 십자가 세 개가 한데 어우러진 문양이 그려져 있다. 그중 하나는 잉글랜드의 수호성인(守護聖人) 성 조지의 십자가이고, 다른 하나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 성 앤드류의 십자가이고, 나머지 하나는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성 패트릭의 십자가이다.
유니언 잭의 탄생 과정.
1606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통합되면서 두 나라의 국기를 합친 최초의 유니언 잭이 탄생했다. 당시 웨일스는 이미 잉글랜드에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웨일스의 국기는 빠져 있다. 1801년에는 아일랜드도 통합되면서 아일랜드의 국기까지 더해 총 3개의 국기를 합친 유니언 잭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이다. ‘잭’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뱃머리에 세우는 ‘국적을 나타내는 깃발’을 의미한다. 따라서 유니언 잭은 ‘통합된 나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2014년을 기준으로 과거 영국의 자치령이었거나 식민지였던 영국 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은 53개국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등 다수의 국가들이 영국 국왕을 국가 원수로 모시고 있다. 하지만 영국 연방 구성국의 대부분이 공화국이 되면서 정치․경제적 연결 고리는 느슨해졌다.
월드컵 대회에서 우리나라의 붉은 악마는 태극기를, 미국인은 성조기를, 일본인은 일장기를 흔들었다. 하지만 유니언 잭은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았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연방이 각각 따로 출전했기 때문이다.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과 라이언 긱스는 각각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국가 대표로 활약했다. 두 선수는 영국이라는 한 나라에 살면서도 다른 팀으로 출전한 것이다. 1888년부터 시작된 영국 연방의 프로 리그가 유럽 전체 리그를 압도할 정도로 맹활약하였다. 그 덕분에 국제 축구 연맹은 영국의 4개 연방국을 모두 개별 회원국으로 받아들였고, 두 선수는 다른 유니폼을 입고 필드를 뛰었던 것이다.
습한 편서풍이 영국 신사를 탄생시키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국의 역사와 지리 - 세계의 시간이 시작되는 영국 (1) (세계 지리를 보다, 2012.07.30, 박찬영, 문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