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신문 > 제 1217호 붕우칼럼. 최후의 1인. 느6:11
주일 3부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하던 중, 김종일 장로가 이런 말을 했다.
“목사님, 어느 교회에서 성전을 신축하다가 부도가 났대요. 그러자 목사님이 사표를 내고 떠나 버렸다네요. 목사님이라면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부도를 막으려고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나는 당연히 그렇게 하지.”라고 답했다.
지도자는 책임자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 왔다고 도망쳐서야 되겠는가. 세월호 사건 때 선장이 제일 먼저 도망쳤다. 책임자로서 끝까지 배와 함께했다면 아까운 어린 생명들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느헤미야 6장을 보자. 무슨 영문인지 제사장 스마야는 두문불출했다. 이에 느헤미야가 스마야를 찾아가자 그는 말한다. “오늘 밤 적군이 그대를 죽이러 올 것입니다. 당신과 제가 성전 안에 있는 외소에 들어가 문을 닫읍시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외소’란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 분명 목숨은 건질 수 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의 말이다.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느6:11). “나는 이 백성의 리더다. 리더가 어떻게 이 큰일을 앞두고 도망가겠는가?” 한 것이다. 알고 보니 이것은 대적들에게 뇌물을 먹은 스마야의 계략이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가 전쟁이 났을 때 도망쳤다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벌써 먹혔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국민을 독려하며 나라를 지켰기에 ‘채플린에서 처칠’로 이미지를 바꾸며 열강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장기판에서 왕만 잡으면 경기는 끝나는 것 아닌가.
언젠가 교회에 깡패가 쳐들어왔다. 모양새 자체가 두려움을 줄 만했다. 그들은 옆의 한 장로의 안경을 빼앗아 짓밟아 깨며 위협했다. 그때 나는 앞의 도자기를 그들이 있는 벽을 향해 던지며 탁자 위로 달려가 그들의 멱살을 잡았다. “네깟 것들이 무서웠으면 목사 안 했어.” 내 행동에 그들은 당황했고, 무릎을 꿇었다.
지도자는 어려운 상황에 최후의 1인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라!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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