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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 휴양의 본거지에 가다
우리가 묵은 블루레이크 Top 10 홀리데이파크는 깊은 산속의 맑은 호숫가에 있어서 더더욱 공기가 맑았다.
취사장, 식당, 샤워장, 회장실, 빨래방, 야외 바비큐 둥 호텔급 편의시설이 깨끗하게 들어서 있다.
차를 타고 들어오면 공원 사무실에 신고를 하고 주차 장소를 배정받아
여러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캠퍼밴이나 텐트에서 그냥 잘 수도 있고, 별도의 숙박 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어젯밤 어두울 때 와서 보이지 않던 호수가 홀리데이파크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호수 이름은 블루레이크(Blue Lake). 산봉우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어 고요하다.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만 아니면 시간이 멈춰진 듯했다.
허영만 화백과 봉주 형님이 호숫가를 걷는다.
오랜 세월 친구로 지낸 두 사람은 많은 말이 필요 없다. 등산과 운동으로 발걸음이 경쾌한 허영만 화백도, 뒷짐을 지고 초로의 신사처럼 점잖게 걷는 봉주 형님도 맑은물에 발이 젖을 듯 말 듯 발걸음이 가볍다. 블루레이크의 평화로운 광경에 취해 우리는 10시가 다 되어서야 홀리데이파크를 천천히 빠져나왔다.
블루레이크가 있는 이 지역은 지금은 로토루아에서 가장 정적인 곳이지만, 불과 120년 전인 1886년 6월 10일 밤에는 그렇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자정을 조금 넘은 시간에 갑자기 근처에 있는 타라웨라(Tarawera) 산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폭발 소리와 함께 산의 정상부가 통째로 날아가 버리고 바위가 쪼개진 틈으로는 용암과 진흙과 물이 증기와 함께 쏟아져 나왔다.
이 폭발은 새벽 5시 30분 무렵에 멈췄지만, 화산재는 계속 쏟아져 내려 마오리 마을 두 곳이 통째로 매몰되어 버렸다.
그나마 인구 밀도가 낮은 곳들이라 인명 피해는 153명에 그쳤지만 화산 근처의 모든 지역은 순식간에 초토화되어 버렸다고 한다.
세계의 수많은 화산 중에서도 뉴질랜드의 회산 활동 규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중에 186년에 일어난 타우포 대폭발은 기원 후 역사상 가장 큰 폭발로 기록되었으며, 멀리 중국과 로마의 고대 문헌에도 이 폭발로 인한 자연의 변화가 기록되어 있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다행히 그때는 뉴질랜드 전체에 사람이 전혀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그때의 폭발로 뉴질랜드 북섬 전체가 평균 9센티미터의 화산재로 덮이고, 그 분화구에는 물이 차서 서울시 크기만 한 타우포 호수가 생기게 되었다.
뉴질랜드에서는 화산 활동을 매우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화산 활동도 특별하지만 무지막지한 힘으로 모든 걸 뒤엎는 화산 폭발은 생각만 해도 놀랍다.
지축을 뒤흔드는 155밀리미터 대포 소리도 들어봤고, 트레킹 중에 고막을 찢는 벼락 소리, 시속 100킬로미터가 넘는 바람 소리, 빙하가 움직이며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들어 봤다. 하지만 지축을 울리며 상상할 수 없는 힘으로 바위를 뿜어내는 화산 폭발이야말로 자연계에서 가장 거칠고 파괴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새들의천국
이런 화산의 영향 때문인지 태초에 뉴질랜드에는 새들만 살았다.
키가 3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모아새가 있는가 하면 몸무게가 15킬로그램에 육박할 만큼 세계에서 가장 육중하고 큰 날개를 자랑하는 하스트 독수리도 있다.
그 외에도 각종 앵무새나 희귀한 새들이 많았는데, 천적이 없었기에 새들은 기껏해야 활강이나 할 정도의 비행 수준을 넘지 못했다. 땅 위에 포유동물이라고 하면 엄지 손가락만 한 박쥐 두 종류(긴꼬리박쥐, 짧은꼬리박쥐)가 전부였고 과일이나 작은 벌레를 잡아먹는 이 포유동물들은 다른 새들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고 오랫동안 공존했다.
이런 단순한 생태 구조였기 때문에 새들의 개체수는 숲에 가득할 정도로 크게 번성했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 구조는 튼튼한 피라미드 형태로 개체수를 스스로 조절하는 다른 대륙의 먹이사슬에 비해 훨씬 더 부서지기 쉬운 예민한 구조여서, 한 번 시작되면 그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결국 남태평양의 원주민이 들여온 쥐를 시작으로 해서 유럽인이 개. 양, 가축 등을 들여놓자 뉴질랜드는 더 이상 새들의 파라다이스가 될 수 없었다.
그 후에도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토끼의 개체수가 늘고 이를 줄이기 위해 들여온 족제비들이 빠르고 힘이 센 토끼보다 잡기 쉬운 어린 새들로 눈을 돌리면서 피해는 점점 더 커지고 말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종류가 멸종되기는 했지만, 뒤늦게나마 사태를 바로잡으려는 뉴질랜드 정부와 전국민의 힘겨운 노력으로 멸종 위험에 처한 새들은 다시 숫자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오늘 도착한 타우포에 번지점프대가 있다고 하자 허영만 화백이 자신감을 보인다. “번지점프? 뭐 그냥 뛰면 되는 거지. 그거 뭐어렵나! " 그런데 막상 번지점프 장소에 도착하자, “이런 데서 띈다고?" 하며 난색을 보였다. 어쨌든 내일 꼭 뛰겠다고 약속을 했다.
오늘 숙소는 드 브레트 스파 리조트(De Brett Spa Resolt) 이다. 뉴질랜드에서 몇 안 되는 별 5개짜리 홀리 데이파크인데 시설도 경치도 모두 최고다.
온천을 함께 운영해서 저녁 식사 후에 모두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여독을 풀었는데 번지점프가 좀 위험해 보인다느니, 가격이 비싸다느니 하며 허영만 화백이 핑계를 댄다. 결국 봉주 형님이 경제적 후원을, 그리고 20만 명이 넘도록 무사고임을 이야기하고서야 번지점프를 하기로 했다.
입대를 앞둔 청년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허영만 화백의 말수가 점점 줄어갔다.
제10일 타우포
번지점프대에 서면 인생을 사랑하게 된다
드디어 아침이 밝았다 허영만 화백은 몸이 안 좋다느니, 감기 기운이 있다느니 하다가, 나중에는 이 사이가 답답해서 치실이 필요하다는 궁색한 변명까지 나오고 말았다.
“아침을 먹으면 번지점프에 매달려 토하는 것이 아니냐"는 허영만 화백에게 봉주 형님이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며 꽁치와 밥에 고추장을 잔뜩 바른 후 상추에 싸서 권하자 열심히 드신다. 이젠 정말 번지점프를 할 기세다. 봉주 형님 이 “마지 막일지 모르니까 많이 먹어둬” 하며 너스레를 떤다.
번지점프를 하기 전에 허영만 화백 이 타우포 호숫가에서 차나 한 잔 하고 가자고 한다.
자연의 원형을 간직한 타우포 호수는 그 규모로 보면 도저히 호수로 보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타우포 호수를 맑은 바다로 기억한다.
강풍이 자주 불어 높을 때는 2미터가 넘는 큰 파도가 치기도 하고 호수 건너편이 아득한 신기루처럼 멀리 보이는 이 웅장한 호수는 진짜 바다 같다.
앞서 말했듯이 타우포 호수의 크기 (619제곱킬로미터)는 서울시 (604제곱킬로미터)보다 더 크다. 호수를 가득 채운 물은 그냥 마셔도 충분한 일급수에 시계(視界)가 몇십 미터는 될 정도로 맑디 맑다. 한국에 이런 호수가 있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1800년 전에 화산이 폭발하고도 아직 여운이 남아 호숫가에는 증기와 함께 작은 온천들이 올라온다.
당연히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호수이고 1 미터가 넘는 송어가 살 정도로 자연환경이 좋다. 수질 보호를 위한 시의 노력도 대단하다.
송어를 잡으면 내장을 규정된 비닐봉지에 담아서 육지의 지정된 곳에 버려야지, 절대 호수에 버려서는 안 된다. 낚시 미끼 역시 일반적인 생선이나 벌레를 쓰면 안 되고 루어 (Lure 가짜 미끼)만을 써야 할 만큼 자연 보존을 위해 철저한 정책을 쓰고 있다.
자연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고 조용히 기대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타우포 호수에서 낚시로 잡을 수 있는 송어는 최소 35센티미터, 그 크기 이하는 다시 호수로 살려 보내야 한다.
민물낚시를 하려면 면허가 있어야 하는데 낚시점에 가서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즉석에서 간이 영수증같이 생긴 면허를 받을 수 있다.
허영만 화백 번지점프대에 서다
허영만 화백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진해서 번지점프 장소로 왔다.
번지점프대가 있는 높이 47미터의 벼랑은 자연의 원형을 손대지 않고 있어 한층 더 위기감을 준다. 벼랑 밑에는 타우포 호수에서 흘러나온 시퍼런 물이 넘치는 수량으로 꿈틀거린다.
물이 너무 맑아 수심이 20미터가 넘는데도 바닥이 훤히 보인다.
허영만 화백은 번지점프와는 상관없는 행인처럼 번지점프 사무실을 왔다 갔다 하며 동정을 살피다가 마침내 결심이 섰는지 직원에게 가까이 다가 선다.
젖은 번지 (Wet Bungy)와 마른 번지 (Dry Bungy) 두 종류가 있는데 어떤 것을 선택하겠냐며 직원이 묻는다.
허영만 화백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젖은 번지를 하게 되면 무료로 티셔츠를 준다는 직원의 단 한마디에 젖은 번지를 선택했다.
젖은 번지는 뛰어내리고 나서 붐이 물속으로 ‘첨벙’ 들어가는 진짜 번지점프이다.
봉주 형님이 남길 말 없냐며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에 부조금 낸다는 기분으로 점프 비용을 계산했고, 곧이어 허영만 화백이 조금은 으스스한 각서(상해나 사고가 나도 번지점프 회시를 상대로 소송을 하지 않는다는것)에 사인을 했다.
그러면서도 절대 안전하니까 걱정 말라고 한다.
‘절대 ’ 안전하다면 이런 용지는 필요 없을 텐데 ..... .
번지점프대로 올라가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름과 체중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후에 발목에만 간단한 끈을 벨크로(일명 찍찍이)로 붙여서 고정하면 준비 끝이다.
점프대 향하는 허영만 화백의 표정이 긴장과 걱정이 뒤섞여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하다. 번지점프는 점프 직전에 그 긴장감이 극에 달한다.
삶에 대한 본능적인 애착과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감이 머릿속을 몹시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 공포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번지점프를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
허영만 화백이 몸을 앞으로 굽혔다. 무게중심이 앞으로 넘어가는 찰나가 되면 머릿속에서는 아드레날린이 쏟아져 나오면서 깊은 쾌감이 터져 나온다.
이때부터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빙금까지 가지고 있던 고민도, 하다못해 공포감조차도 느낄 여유가 없이 지구의 중심을 향해 떨어지게 된다. ‘중력 가속도 = 9.8m/sec2’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몸으로 느끼며 물을 향해 질주하는 과정은 의외로 길고도 평화롭다.
엄청난 가속과 함께 좁아지는 시야, 얼굴에 몰리는 혈액과 함께 콧속으로 들이닥치는 차가운 물. 그리고 줄의 탄력으로 다시 튀어 올라갈 때 느끼는 살아 있다는 환희.
번지점프를 해보면 자신이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된다. 번지점프 직후에 느끼는 까닭 모를 즐거움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즐거운 것인지를 깊이 느끼게 해준다.허영만 화백 역시 상기된 얼굴로 연신 싱글벙글한다. 아침의 걱정스러운 얼굴보다 30년은 젊어 보였다.
통가리로 국립공원의 심장부 화가파파 빌리지
타우포는 청명한 무공해 도시다.
내일은 북섬 최고봉인 루아페후 산(2797미터) 정상에 올라가기 위해 루아페후 산 바로 밑에 있는 화카파파 빌리지(Whakapapa Village) 근처에 가기로 했다.
루아페후산은 거친 화산이다. 전 세계에 걸쳐 많은 화산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인 루아페후 산은 10년 전에도 이미 두차례나 폭발을 한 적이 있다.
2007년 9월에도 화산이 폭발해 부상자가 생기기도 했다. 루아페후 산은 원래 삼각형의 일반적인 활화산 모양이었지만, 산의 정상부가 모두 터져나가 버리는 바람에 왕관형이 되어버렸다.
수백 미터에 이르는 산 정상부가 없어져서 높이가 2797미터에 불과하지만, 산이 워낙 거대해서 4000미터급 산의 위용과 늠름함을 갖추고 있다.
우리가 오늘 저녁 야영하는 곳은 통가리로 국립공원(Tongariro National Park) 내부에 있는 화카파파 빌리지인데 세계문회유산, 세계자연유산으로 동시에 등재되어 있을 만큼 유명한 곳이다. 산은 거칠고 험해서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이 척박한 데다 물에도 화학 성분이 가득해서 마실 수 없다.
산 정상부에는 뜨거운 호수가 커다렇게 자리 잡고 있고 분출공에서는 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바위는 철 성분이 많아 크기에 비해 무거운 것이 있는가 하면 퍼미스(Pumice) 같은 다공질 암석은 크기에 비해 가벼워 물 위에 뜬다.
분화구 중앙부의 호수 옆에는 널따란 평원이 존재하고 만년설과 6개의 크고 작은 빙하가 그 권위를 더해주고 있다.
정상부에서는 바람의 세기가 시속 120킬로미터를 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아무도 근처에 갈 수 없다. 바람을 타고 붕붕거리며 날아다니는 새끼손톱만 한 얼음 조각을 얼굴에 맞아본 사람만이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화카파파 빌리지 지역은 고도가 높아서인지 저녁이 되자 쌀쌀해지더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캠퍼밴의 천장에 콩 복는 듯한 소리가 ‘도도도도도’ 하며 터진다. 바깥이 추울수록 식욕은 돋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불수록 실내는 더 아늑하게 느껴지는 법 오늘 저녁은 내가 솜씨를 부려보기로 했다.
얼큰한 된장찌개를 끓이고 양념을 약하게 해서 좀 심심한 불고기를 프라이팬에 국물 없이 구웠다. 오이를 길게 썰어 그릇 위에 수북이 담고 찍어 먹을 고추장만 떠놓으면 끝이다.
밥이 늦게 되는 바람에 우선 테이블에 반찬만 놓고 기다렸다.
재미로 왔다 갔다 하는 젓가락질에 불고기는 거의 다 없어지고 된장찌개의 사박사박한 감자와 호박,썰어 놓은 오이마저도 조금씩 양이 줄었다.
풍성했던 밥상은 공기밥을 퍼서 올릴 때쯤에는 반도 남지 않은 상태가 되어버렸다.
안타까워하는 내 표정을 보고 봉주 형님이 한마디 하신다.
“어차피 들어가는 순서만 다르지, 나오는 건 다 똑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