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력으로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이라고 하는 것은 기다린다 다가온다라고 하는 라틴어 어드벤투스에서 온 말입니다. 이 대림절은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인데 성탄절부터 앞서서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이 대림절 4주 동안에는 상록수 화한 둥그런 상록수로 화환을 만들죠.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얘기합니다.
이 상록수 환에 4개의 초가 있는데 한 주 진행 자주 지낼 때마다 켭니다. 이렇게 이 평화와 희망과 기쁨,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구약에서 많은 곳에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읽은 본문 이사야 9장의 말씀, 또 11장도 바로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한 이사야서의 예언서입니다.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김요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니라.
여기 한 아기 한 아들이 태어날 것인데 그 아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마지막에 평강의 왕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예언한 이 메시아가 태어나면 무엇보다도 평화의 왕, 평강의 왕이라고 하는데, 여기 우리 개혁 개정의 평강이라고 한 것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평화와 같은 단어입니다.
평화라는 말을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사회적으로 전쟁, 폭력, 싸움이 없는 평안한 상태를 말하고 또 개인적으로는 마음의 어지러움이나 불화, 두려움 걱정이 없이 평안하고 행복한 상태를 평화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평화가 실제 우리와 먼 것 같이 느껴지지만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애초에 평화로 시작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에덴 동산이 이 인류 역사에 제일 처음이죠.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한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과 이 모든 것들이 서로 갈등이 하나도 없이 서로 조화되고 평화를 이루면서 살아간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그거야말로 정말 에덴 동산인 거죠.
그런데 인간의 잘못된 탐욕과 끝없는 이 과도한 욕망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가 하나님과의 평화도 깨어지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지니까 인간 사이의 평화도 깨지고 또 인간과 자연과의 모든 관계도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 이 인류는 끝없이 미움과 증오와 갈등과 반복, 죽음 싸움, 전쟁이 현재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최초의 형제에 가인과 아벨이 있죠. 최초의 형제니까 얼마나 우에 있게 지내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 최초의 형제 가인과 아벨은 형이 동생을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무슨 이유가 있으면은 합당하겠는데 이유가 없어요. 동생이 형한테 대해서 잘못한 것도 없고 아무런 것도 없고 성경에도 뚜렷한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은 이 동생 아벨을 쳐 죽였어요. 이것이 인간의 본성인 거예요.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가 깨어지는 인간 본성은 이유 없이 상대방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죽이고 싶은 그런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 그거를 또 실천에 옮긴 것이 최초의 인간 가인이었고, 그것이 곧 한 개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인류의 역사와 사회가 이렇다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증오와 전쟁, 죽음이 되풀이되는 이 비극적인 역사를 끝내고 평화의 사회를 만들려고 많이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인류 역사는 단 한 번도 진정한 평화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간혹 드디어 이 땅에 평화가 왔다. 평화가 이 시대에 도래했다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로마에 있어서 잘 알고 있지만 로마에서 역사상 드디어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라고 선언한 적이 있지 그것이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이죠.
여기 이미지가 있습니다. 이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는 기원전 27년부터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죠부터 180년 AD 180년 마르크스 아우리루스 황제까지 거의 한 200여 년간의 기간을 팍스 로마나의 시대 로마의 평화의 시대라고 하죠.
이 팍스 로마나를 선언하면서 지금 그 로마 떼베레 강 옆에 보면은 평화의 재단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거기 한번 관광객들이 대부분 거기까지는 안 가는데 거기를 꼭 보셔야 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로마를 이해할 수가 있는데 그게 바로 평화의 재단입니다. 이 시대에 하늘에서 한 아기가 신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 아기가 이 땅의 인간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이 땅에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라고 이렇게 라틴 최고의 시인 버젤 메르길리스가 아이네이아스라고 하는 대 로마의 서사시를 지은 그 책에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죠.
그런데 한 아기가 태어남으로 이 땅에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하는 그 한 아기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아우구스투스를 이야기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 유현자라고 하는 마르쿠스 아우리스까지가 이 정말 진정한 이 시대에 평화가 도래한 시대라고 해서 팍스 로마나라고 했죠.
그런데 여러분 이 로마의 평화는 우리가 이 시대에 땅 평화가 도래했다고 해서 평화가 아닙니다. 이 팍스 로마나는 안타깝게도 진정한 진실된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우리가 잘하는 로마의 군사력 폭력 무력을 가지고 남을 억누리고 약한 민족을 쳐들어가서 그들을 노예로 삼고 식민지로 만들어서 아무 소리 못하게 끽소리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만든 그런 평화였어요. 이것은 잘못되고 불의한 평화죠. 평화라고 얘기할 때 한자로 이거는 평평할 평 평등할 평자입니다. 모두가 다 같이 평평하고 평등해야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그 평화가 진정한 평화인데 이 팍스 로마나 시대는 유해제라고 하지만 그러나 대부분 군사력으로 무력으로 폭력으로 남을 꼼짝 못하게 한 사람은 말 위에 타고 있고, 다른 아무 소리도 말을 못하는 사람은 말발굽 아래 짓밟혀서 아무 소리를 못하고 있는 그래서 잠잠하니까 그게 평화라고 했는데 여러분 이거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죠.
그런데 이러한 폭력과 군사력에 의한 평화 말고 인류 역사는 또 하나의 평화 평화를 말하고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로마의 평화와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 이 단어 자체는 평화 평화 똑같은 것 같지만 여기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로마의 평화는 힘으로 무력으로 군림한 평화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한 사람 자신이 자신을 희생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가져다준 평화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발 밑에 내려가 그 발을 씻겨주면서 섬김으로써 만든 평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 박스 크리스티아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와 그의 말씀 가르침, 그리고 그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적인 죽음, 그리고 부활로 말미암아 범인류적인 사랑과 용서에 의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평화는 한 시간 한 공간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9장은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한 말씀이죠. 그래서 이 이사 우리가 예언한 대로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나셨어요. 그것이 바로 성탄입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심 성탄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렇게 살아가셨는데, 그가 공생애 하면서 첫 번째 하신 설교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수훈 중에 팔복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평화를 만드는 사람, 평화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예수님께서 그의 첫 번째 설교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마태복음 5장 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며 여기 화평은 평화와 같은 말이죠. 이렇게 예수님은 그의 첫 번째 가르침 모든 말씀이 중요하긴 하지만 첫 번 가르침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될 길 우리는 누구냐?
바로 여기 화평을 만드는 사람, 평화를 만드는 사람 영어에는 우리가 잘 아는 많이 사용하는 단어로 피스메이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가 살아갈 우리의 존재, 우리의 길은 우리의 정체성은 피스메이커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그렇게 평생을 쭉 예수님 말씀하시고 가리키고 또 그렇게 살아가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지막 고별 설교에서 또 이 평화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마지막 고별 설교 요한복음 14장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우리 마음속에 얼마나 근심 걱정, 불안, 분노, 두려움, 절망 이게 여러분 안 생길 수가 없죠. 그게 오늘 우리 삶의 현실이에요.
그런데 그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최초의 설교에서는 피스 메이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하시고 예수님이 이제 우리를 떠나시면서 너희들에게 선물을 주는데 평안을 준다. 그러니 내가 주는 이 평안은 세상에 주는 평안과 같이 한다.
그렇게 하시면서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걱정, 근심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게 오늘 우리 이 땅의 현실이에요. 두려워요. 다 피하고 싶어. 그것이 오늘 우리 삶의 현실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 주시는 선물, 그 평안을 우리가 가지고 살아갈 때 세상에 주는 근심 걱정, 주변에 주는 두려움과 공포, 이 모든 것들을 우리가 이기고 주님이 이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하면서 이기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예수님께서 주신 평안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우리 이웃들과 평화를 누리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어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담 이후로 우린 깨졌어요. 다시 회복시켜주신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목되게 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야 된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우리에게 살아가는 동안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 앞에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서 그를 예배하고 경배하고 그를 찬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첫 번째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살려두신,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도 은총을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 없이 나 스스로 살아가려고 하는 오만방자하고 경거망동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솔직한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대림절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다시 한 번 온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 앞에 우리 주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우리가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을 찬양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성탄 시즌, 진정한 바로 이 대림절을 지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과 평화를 누린 우리들은 우리의 이웃들과 함께 평안의 줄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4장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라.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다 알지 못했어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의 줄로 하나로 묶어졌어요. 그래서 이제 우리는 성령께서 부탁한 이 아름다운 일들을 우리 삶 속에서 우리가 행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평화가 되시고 희망이 되시고 기쁨과 사랑이 되신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 사회와 우리 이웃과 우리의 가족 간에 평화가 되어야 되고 사랑이 되어야 되고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까이 있을수록 어떤 때는 더 평화의 관계가 깨질 때가 많잖아요. 안 보면 차라리 평화로운데 보니까 마음에서 끝없이 자꾸만 이게 뭐가 이렇게 올라와요 스물스물 올라와서 그냥 화도 나게 만들고 분노도 나게 만들고 그냥 짜증도 나게 만들고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평안을 가지고 내가 먼저 그 평안을 누리고 가장 가까이는 우리 가족들과 함께 평화를 누려야 됩니다.
여러분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세요. 나와 함께 살아온 이 사람 얼마나 감사한 거예요 아니 솔직히 이 사람 없었으면 어떻게 우리가 살아올 수 있었어요?
다 이 광야 같은 세상 속에서 맨날 그냥 절망과 울면서 그냥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함께 살아갈 사람들 가족을 주셨어요. 감사한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우리는 이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감사하고 그에게 평화의 마음을 줄 수 있도록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할 수 있어요?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섬김으로 이 땅에 평화를 주신 것처럼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 옆 사람을 섬기고 그를 존중해주고 나보다 나은 자로 여기면서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죠. 마음이 그냥 심란하고 뭔가 안정이 안 되는데 어떤 사람이 와 그럼 이 상황에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런 거 여러분 경험하죠 언제 경험해요?
여러분 서로 만날 때 그러지 않겠어요 저는 여러분 만나면 그냥 여러분들 얼굴 보고 만나는 것 자체로서 그냥 이 산란했던 마음들이 정리가 되고 평화롭고 정말 그래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죠. 우리 그렇게 살아가야 돼요.
어때요? 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는 평화를 만드는 평화의 일꾼이 되게 해주세요. 내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 희망과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지금까지 살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거 주고 저거 주세요. 그것도 좋지만 정말 하나님의 희망과 기쁨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게 해주세요. 이게 우리의 진정한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내가 있는 자리부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7절 사도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평화를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씁시다.
아멘 여러분 이 대림절 첫째번 주일을 지내면서 오늘 주신 말씀 단단히 붙들고 예수님의 삶을 따라서 하나님과 이웃과 가족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도모하면서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