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의 제257대 교황이자 성인인 비오 10세는 1835년 6월 2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리에세’에서 지역 우체국장(구두 수선공이었다는 기록도 있음)의 10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35년 6월 3일 세례를 받았습니다. 본명은 ‘주세페 멜키오레 사르토’로 어린 시절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했지만, 그의 부모는 자녀들의 교육 문제를 항상 최우선으로 두었는데, 그는 6km 정도 떨어진 학교를 매일 걸어 다녔으나 신발이 닳을까 봐 맨발로 다닐 만큼 순박하고 검소했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 마을 본당 신부로부터 처음 라틴어를 배웠는데, 이후 카스텔 프랑코 베네토에 있는 ‘김나지움’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1850년 그는 트레비소의 교구장 주교로부터 삭발례를 받았으며, 트레비소 교구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파도바 신학교에 입학하여 고전학, 철학, 신학 등을 공부하게 됩니다.
1858년 9월 18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톰볼로에서 9년간 보좌신부로 지낸 후 ‘살차노’에서 8년간 본당 신부를 맡아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이어갔으며, 이후 트레비소 신학교의 영성 지도 신부와 교구의 상서국장을 역임한 후 1867년에는 살차노의 수석사제로 임명되었으며, 1884년 11월 10일에는 교황 ‘레오 12세’에 의해 만토바의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1893년 6월 12일 교황 ‘레오 13세’는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고, 3일 후에는 베네치아 총대주교로 임명하였습니다. 1903년 7월 20일 교황 ‘레오 13세’가 고령으로 선종하자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한 교황 선거 비밀회의 ‘콘클라베’가 개최되었는데,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1903년 8월 4일 그가 새 교황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당시의 콘클라베는 선거 과정에서 세속 군주가 새 교황으로 유력시되는 후보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한 마지막 콘클라베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당시 기독교 교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대적 풍토를 거부하고 오히려 전통적인 해석과 관습을 계속 유지하도록 장려한 가톨릭 전통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는데, 오랫동안 각종 부조리로 문란해지고 해이해져 있던 교회 조직과 성직자 교육 등을 다시 바로잡는 대대적인 쇄신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특히 교회법과 성무일도서 등을 개정하고 새롭게 체계화함으로써 20세기 가톨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교황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탈권위적이고 대중적인 모습을 추구하는 가톨릭의 형태는 거부하였으나 교회에 만연한 많은 문제점과 폐단은 과감히 없애고 수정함으로써 현재의 가톨릭교회의 위상과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교황이었습니다.
1914년 8월 20일 심근경색으로 선종한 비오 10세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전의 지하로 옮겨 생전에 그가 원하던 대로 소박한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이후 30년이 지난 1944년 ‘비오 12세’는 그를 가경자로 선포하였고, 1951년 6월 3일에는 복자로 선포하였으며, 생전에 비오 10세의 전구로 이루어진 2건의 기적 같은 사례가 ‘시성성’에서 승인되자 1954년 5월 29일에는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성 비오 10세 교황이 재위하던 시절인 1911년에 우리나라는, 조선 대목구장이었던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주교가 조선의 가톨릭 신자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그에 따라 관할구역도 넓어지자, 대목구를 분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교황청에 건의하게 되는데, 이에 비오 10세 교황은 뮈텔 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조선 대목구를 서울 대목구와 대구 대목구로 분할하여 대구 대목구는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을 관할하도록 하면서 초대 대목구장으로 ‘플로리안 드망즈’ 주교를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작년 자료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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