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자에 대한 소망
며칠 전에 저의 장모님이 소천하신 지 1주기가 되어 인천시립공원에 안치된 잔디장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고인은 제가 전도하여 늦은 나이에 예수님을 믿으신 분입니다.
이분은 전도를 받고 믿기로 작정하신 이후에 바로 새벽기도회에 나가시고 교회의 강단 꽃꽂이로 다른 분을 돕는 역할을 충실하게 하셨습니다. 고인은 권사의 직분을 받아 순결한 신앙을 지키시다 96세의 천수를 누리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복된 인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저는 장모님의 묘지에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 분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를 말입니다. 헬렌 켈러는 ‘죽음은 곧 새로운 탄생’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모태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듯 지구라는 모태에서 영원한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스웨덴의 신학자 에마누엘은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신비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는 <위대한 선물>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지금까지 세상에 태어나 지상에서 생을 다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영원히 소멸한 사람은 역사 이래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놀라운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인간은 죽어서 무덤에 가면 그만인 줄 알았는데, 그 누구도 이 우주에서 소멸한 사람은 없더라는 겁니다. 지상에 두는 가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것입니다.
어윈 W. 루처는 <영원한 상급>이란 글에서 심판대 앞에 설 때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 당신이 했던 일을 좋게 만들 수 있는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당신을 대변해줄 변호인이 없다. 그리스도의 눈에 비춰진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원하든 원치 않든 언젠가 우리가 직면해야 할 심판대의 모습입니다.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심판대 앞에 ‘나타나’라고 말했을 때, ‘다 나타나게 되는’이라는 의미가 있는 헬라어 ‘파네로오, φανερόω’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안에 든 것을 뒤집어 모두 다 꺼내놓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행한 선악간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숨길 수 없이 드러나게 됨을 말씀합니다.
내가 어머니 태에서부터 물려받은 죄의 유전자와 이 세상에서 마음으로 말로 행동으로 지은 모든 죄는 반드시 드러나는 때가 있습니다. 이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영원한 저주와 고통이 깃들어 있는 지옥입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장모님이 그 예수님을 믿고 육체는 땅에 묻혔지만, 영혼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예수님의 부활을 함께 누리며 영원한 천국에 머물 것으로 생각하니 마음에 큰 기쁨이 밀려 왔습니다. 맑고 푸른 늦가을의 바람이 그렇게 신선할 수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