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산행 계획을 세울 때는 '자하곡 매표소 → 등산로 갈림길 → 배바위 → 화왕산성 남문 → 허준 세트장 → 화왕산 정상 → 3 등산로 → 도성암 → 자하곡 매표소'의 8km, 4시간 코스의 상춘 산행을 즐길 예정이었다.
1
관룡산
높이: 754m
위치: 경남 창녕군 창녕읍 고암면
관룡산은 부곡 온천의 영향으로 등산객들이 주말을 이용하여 등산과 온천을 겸해서 자주 찾는 산이다.
관룡산 일대가 이웃한 화왕산과 함께 봄이면 진달래, 가을이면 억새밭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주로 옥천리를 기점으로 관룡사, 원통골, 화왕산의 연속 등산으로 산행이 이루어진다. 계곡 아래에는 도성암 등의 암자와 정자 등이 산재하여 있고 부근에는 사적 65호인 목마산성이 잘 보존되어 있다. 도성암을 지나 솔밭이 아름다운 계곡 길을 따라 올라가게 된다.
밋밋한 주 능선 안부에 이르면 널따란 분지가 나타난다. 억새와 개솔새 등 볏과의 키다리 풀이 수만평에 이르는 분지를 뒤덮고 있어 장관이다. 능선에는 한 키나 되는 조릿대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산성터를 지나 관룡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또한 억새에 뒤덮여 있다. - 한국의 산하
화왕산[火旺山]
높이: 758m
위치: 경남 창녕군 창녕읍
창녕읍에서 바라보면 기암절벽 같은 바위들로 병풍처럼 펼쳐진 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화왕산에서 관룡산으로 이어지는 화왕산군립공원이다. 화왕산은 오래전 화산이 폭발하여 형성된 산이라고 한다. 분화구였던 곳에는 3개의 연못이 남아있고 인근에는 창녕 조씨 시조가 여기서 탄생했다는 득성비가 있다.
분화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평원에는 둘레만 십 리에 이른다는 억새군락이 장관을 이루고 경계면을 따라, 가야 시대 때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화왕산성이 있다. 천연의 요새인 기암절벽을 이용하여 조성한 화왕산성은 임진왜란 때 크게 명성을 떨친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의 활동 무대였던 호국 영산이기도 하다. 성내에는 잡목이 없이 억새만 자라고 있어 가을철에는 억새제와 3년마다 윤년 초봄에는 억새 태우기 행사가 이루어진다.
이름하여 환장고개로 불리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넘어서면 바위 낭떠러지 위로 10리 억새밭이 웅지를 드러낸다. 화왕산하면 억새를 떠올리게 할 만큼 화왕산은 억새의 대명사가 되었다. 6만여 평의 대평원에 십 리 억새밭. 화왕산 억새밭은 산 위에 펼쳐지는 광활한 대초원이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 옴팍한 대규모의 분지가 온통 억새꽃 하얀 솜이불을 두르고 있다.
화왕산의 억새는 크기도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다. 화왕산 억새밭을 한 바퀴 도는 데는 한 시간 남짓 걸린다. 화왕산 억새밭은 새벽녘에는 또 다른 진풍경이 펼쳐진다. 밀려온 안개가 푹 팬 초원을 가득 채우면서 초원은 하얀 호수가 된다. 안개가 억새꽃 사이사이를 지날 때면 억새밭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이 하얀 목을 내밀고 우윳빛 욕조에서 목욕하는 듯한 선경을 이룬다.
가을에는 이곳 6만 평 억새 숲에서 국내 최대의 산악인 야간축제가 벌어진다. 전국 각지에서 1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산신제와 의병추모제를 비롯한 통일 기원 횃불 행진이 펼쳐져 7백50 고지의 가을밤을 수놓으며 일대 장관을 이룬다.
화왕산은 진달래 명산이기도 하였으니 억새 태우기 행사 등의 영향인지 화왕산성의 둘레 경사진 면에서만 진달래를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관룡산 정상에서 화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등산로에도 진달래가 일부 있다. 기온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4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하여 4월 하순까지 이어진다.
화왕산의 진달래 산행은 화왕산성을 한 바퀴 도는 게 제격이다. 드라마 허준 촬영지 앞 비탈에도 진달래가 조금 있다. - 한국의 산하
지난 3월 홍성의 용봉산, 덕숭산 산행기에서 언급했듯이 올해 초 한국의 산하 인기 명산 100개중 4개를 올봄이 가기 전에 다 오르겠다고 결심하고 산행 계획을 세웠었다[산행기]. 해서 4월 16일 창녕 화왕산과 4월 23일 예산 가야산에 오를 예정으로 2월 1일 안내산악회에 회비를 입금하고 자리까지 배정받았었다. 그런데, 당장 몇 시간 후도 모르는 게 세상일인데, 거의 두 달 전에 신청해서인지, 4월 16일 돌발 상황이 생겨 불가피하게 화왕산행을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그나마 예산 가야산은 예정대로 갈 수 있어 다행인가? 어쨌든 다시 화왕산행 계획을 세우기 위해 산악회를 뒤적였는데, 적당한 날짜가 없었다. 내가 가능한 일자에는 산악회의 산행 계획이 없고, 산악회가 출발하는 날은 다른 중요한 일정과 겹치고.
해서 차라리 화왕산 하면 억새니, 가을 억새 철에 갈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가을까지 미루면 화장실에서 중간에 나온 거 같은 찝찝한 기분으로 그때까지 살아야 할 거 같아, 사고의 전환을 시도했다. 말인즉 꼭 휴일이 아니라, 평일이라도 화왕산에 가는 산악회가 있다면 따라가기로. 그래서 발견한 게 4월 20일 수요일 화왕산으로 출발하는 팀이다. 출발지는 건대입구역으로 평소와 다르나, 양재나, 건대 입구나 집에서 걸리는 시간은 비슷해 문젯거리가 아니다. 해서 4월 14일 바로 산악회에 신청하고 회비를 입금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놀란 게 있다면 생각보다 평일에 출발하는 팀이 많다는 거. 그리고 애초 가기로 했던 4월 16일 화왕산으로 떠나는 산악회가 최소 4개 이상에 산악회에 따라서는 다수의 버스가 동원되어 화왕산이 상춘 인파로 도떼기시장을 방불했을 텐데, 평일이라 조용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와중에 회비도 평일이 더 싸다!
평일에 하는 산행이라고 해서 준비물이 달라질 거는 없으나, 이제는 봄을 지나 완연한 초여름 날씨라, 지난 푯대봉 산행[산행기]과 같은 고생을 하지 않기 위해서 1L 물통에 700mL 정도의 물을 채워 냉동실에 넣어 얼리는 중이고, 500mL 생수도 하나 추가로 가져갈 예정이다. 물론 복장도 여름용으로. 먹는 걸 비롯해 나머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준비한다. 날머리인 자하곡 주차장 부근이 도심과 가까워 식당이 영업할 거라 믿고 주어진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내려와 하산주를 마실 생각이라, 여차하면 점심은 건너뛸 수도 있다!
2 - 1
이번 화왕산은 약수역에 이어 또 다른 출발지인 건대입구역이라, 휴일이라면 불광역에서 6시 6분 열차를 타면 되나, 평일이라 6시 7분 차를 타려고 역으로 갔으나 예상보다 빨리 불광역에 도착하는 바람에 6시 열차를 타 6시 38분에 도착했다. 건대입구역에서 산악회 버스가 출발하는 시각이 7시 정각이라 아무리 빨라야 6시 55분경에 도착한다. 고로 남은 20여 분을 뭐하며 보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열차로 이동 중 아랫배가 슬슬 아파져 건대입구역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볼일을 보느라 시간을 보냈다. 일찍 도착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대형 사고를 칠 뻔했다. 급한 볼일을 무사히 보고 6시 50분이 조금 지나 버스가 정차하는 5번 출구로 나가 주변을 둘러보니 생각보다 많은 등산객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건대입구역 출발 예정 시각인 7시가 지났음에도 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7시 10분이 지나자 주변의 등산객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7시 20분이 되자 앞창 LED에 화왕산이라 표기한 빨간 버스가 나타났다. 20분이나 늦었다. 정상적으로 창녕에 도착하고 산행이 진행된다면, 귀경 시간이 그만큼 늦어진다는 얘기다. 평일이라, 교통 체증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누굴 탓할 건 아니나, 앞으로 평일 산행에선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그나마 다행은 의정부를 출발지로 하는 산악회 버스는 죽전이나 신갈에 정차하지 않는다는 거. 버스에 타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들어 1시간이 조금 넘어 깨어 다시 책을 보고 있으니 차가 휴게소로 들어가는 게 느껴져 시간을 확인하니 8시 55분으로 옥산휴게소다. 초면인 거 같아, 산행기를 검색해 보니, 최소 6번 이상 방문한 휴게소로 가장 최근에 방문한 건 3월 19일 백두대간 연결 산행 때 방문한 거다. 그런데 왜 초면처럼 느껴졌을까? 치매? 휴식 시간은 20분, 딱히 할 일은 없으나, 스트레칭과 신선한 공기를 위해 버스에서 내려 마스크를 벗고 사람이 없는 곳을 돌아다녔다.
9시 5분에 버스가 휴게소를 출발하자 인솔 대장이 이번 산행의 코스와 주의사항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다. 산악회 게시판의 산행 계획에는 A, B 두 코스가 있으나, 생각보다 등산로가 많아 취향에 따라 선택해 오르라고 했다. 가장 편한 코스는 계곡을 따라 관룡산을 건너 뛰고 바로 옥천 삼거리로 오르는 거고, 산악회 A 코스가 관룡산을 지나지만 두 번째로 무난한 코스고, 발이 빠르고 암릉을 좋아하는 사람은 관룡사에서 용선대로 좌회전하지 말고 직진해 암릉으로 오르라고 했다. 암릉이라는 말을 듣자 귀가 번쩍 뜨였으나, 발이 빠른 사람이라는 조건 때문에 일단 암릉 코스는 버렸다. 휴일이라면 상춘 차량으로 붐빌 고속도로를 평일이라 막힘없이 달린 버스는 11시 23분에 들머리인 옥천 매표소에 도착했다. 물론 버스가 도착하기 전 인솔 대장이 대략의 도착 시간을 고려해 산행 마감 시각을 공지했다. 17시 20분! 산행에 주어진 시각은 6시간이나, 하산주에 1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16시까지 내려오기로 목표를 세웠다.
2 - 2
버스에서 내릴 때 이미 등산 준비가 완료된 상태라 짐칸에서 배낭을 꺼내 둘러멘 후 등산 앱을 기동하고 산행을 시작한 시각이 11시 24분이다. 그런데, 등산로가 심상치 않은 게 관룡사라고 이 동네에서는 꽤 유명한 절인 거 같은데, 거기까지 포장도로가 계속될 거 같은 분위기다. 내리쬐는 햇볕을 피해 모자를 눌러쓰고 푹푹 찌는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 11시 31분에 인솔 대장이 얘기한 가장 편한 등산로 즉 제1 탐방로 갈림길에 도착했다. 제1 탐방로는 계곡으로, 관룡사로 가는 길은 능선으로 향하는 만큼 경사도 차이가 심했다. 급경사의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며 500m 거리마다 등산 앱이 알려주는 속도를 들어보니, 시속 4km/h 이상이다. 역시 아무리 경사가 심해도 잘 포장된 도로에서의 속도는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빠르면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악회의 안내에 따르면 이번 산행 전체 거리가 10.4km에 불과한데, 500여 미터의 오차를 고려해도 평소 산행 속도인 시속 2.5km 가도 4시간 조금 더 걸리는데, 거의 시속 3km로 달린다면 3시간이 조금 넘는다는 얘기로, 너무 이른 도착이다. 해서 시속 2.5km를 유지하며 가기로 했다. 물론 마음대로 되지 않겠지만.
포장도로를 따라 10분가량 으로자, 저 앞으로 주차해 있는 택시가 보였다. 관룡사 주차장이다. 그런데 그 뒤로 보이는 암봉이 절경이다. 대장이 얘기한 암릉이다. 보이는 것만으로는 그 코스를 선택하고 싶으나, 얼마나 험한지 예측이 되지 않아 선뜩 오르겠다는 생각은 못 하고 눈으로만 즐기며 주차장을 지나, 도로가 아니라, 등산로를 따라 오르자 두 개의 돌기둥 서 있는 게 보였다. 멀리에서 보고 작은 문의 기둥으로 지붕이 사라진 거라 생각했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그 돌기둥에 대한 소개의 글이 있었다. 돌기둥이 아니고 돌장승이란다! 해서 각각의 장승을 사진을 남기고 다시 길을 재촉해 11시 47분에 일주문이라 생각되는 건물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절집 뒤로 보이는 암봉과 그 앞의 소나무, 전체가 한폭의 그림이라 감탄을 연발하며 사진 몇 장을 남기는 걸 잊지 않았다.
사진을 찍고 다시 도로를 따라 올라가자 전혀 의외의 곳에 문이 있다. 문짝은 없는 돌문이다. 그리고 그 돌문을 통과해 들어가며 일주문이라 생각했던 건물을 보니 일주문이 아니다. 그럼 관룡사에는 일주문이 없나? 해서 이 글을 쓰며 구글링해본 결과 그 작은 돌문이 일주문이란다! 당시에는 일주문이라는 걸 모르고 통과해 들어가자 다시 절집의 식구들이 사용하는 주차장이 나타나고, 그 한편에 등산 지도가 있었다. 나보다 먼저 도착한 등산객이 그 지도를 유심히 보더니, 오른쪽으로 향했다. 해서 나도 오른쪽으로 가려고 하다가 그래도 지도는 한번 확인해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살펴봤다. 애초 따라갈 예정이었던 산악회 A 코스는 왼쪽의 절을 통과해서 용선대로 가야 하나, 앞선 등산객은 그 반대편으로 향했다. 즉 A 코스로 가는 게 아니다. 해서 다시 지도를 보니, 밑에서 본 암봉을 '병풍바위'라 부른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병풍바위로 향하는 코스가 용선대로 가는 길보다 더 짧다는 것도 확인했다. 물론 거리가 짧은 만큼 그 경사도야 비교가 안 되겠지만.
지도를 보며 어느 코스로 갈까 고민하다가 비록 암릉의 상태가 어떤지는 모르나, 시간이 충분하니, 직진하기로 했다. 여차하면 하산주도 포기하기로 하고. 산이 중요하지, 술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렇게 결론 내리고 절로 가지 않고 직진하자, 뒤에서 따라오던 등산객들도 아무 생각없이 날 따라오다가 이정표를 보고 이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서로 용선대로 가려면 절로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를 나누더니 방향을 바꾸었다. 병풍바위를 향해 직진하며 앞서간 등산객을 찾아보니, 이 사람은 다시 나타난 갈림길에서 청룡암이 아니라 우회전해 '노단이마을'로 향했다. 지도에는 미지정 등산로라 표기된. 지도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 길로 가면 화왕산까지 더 크게 돌고, 바위 능선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해서 일단 미지정 등산로는 버리고 그 사람과는 달리 아래 주차장 지도를 보며 결정한 청룡암 방향인 직진을 선택해 올라갔다.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는 부도를 지나, 조용한 숲길로 들어가자 무언가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해서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고라니로 보이는 동물이 뛰어다니다가 서서 나를 지켜본다. 그런데 머리에 뿔이 있는 거로 봐서 고라니가 아니라, 노루다. 산에서 노루를 보는 건 처음인가? 그놈이 다시 뛰어 숲으로 사라지고 나서 나도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역시 길은 예상대로 너덜에다 급경사로 숨이 가빠오고 갈증으로 입술은 바짝 타들어 갔다. 거리상으로 봐서 청룡암이 멀지 않아 보여 일단 청룡암에 도착해서 준비해가 얼음물을 마시기로 하고 계속 오르자, 저 앞에 청룡암 이정표가 나타났다. 그 시각이 12시 11분으로 산행 시작 49분 만이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이상 절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본존불에게 웬만하면 신고하는데, 관룡사는 길의 방향이 틀려 그냥 지나쳤으나, 작은 암자야 다 둘러본다고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아, 등산로에서 벗어나 50m 떨어진 청룡암으로 향했다. 그 가는 길목에 식수로 사용하는 약수터가 있었고, 길 양편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란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 물맛은 나올 때 보기로 하로 청룡암으로 들어가서 보니, 주인장이 없고, 본존불이 있는 건물의 문에 예불을 들이려면 관룡사로 와서 얘기하라는 문구가 적힌 안내문이 걸려있었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아 문을 열고 본존불에게 신고하고, 절집 돌담 뒤에 서서 전망을 보니, 저 아래로 저수지와 그걸 둘러싼 산세가 절경이다. 그 모든 걸 사진으로 남기고 암자를 떠나려고 보니 머리 위로 산신각이 보인다. 먼 거리가 아니라 당연히 산신각을 향해 올라가는데, 마애불이라는 팻말이 있어 깜짝 놀라며 그 팻말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서 보니, 불상이 있다. 마애불이라기 보다는 투박한 석불이다. 그걸 사진으로 남기고 다시 산신각에 올라 산신에게 무사 산행을 기원하고 청룡암을 떠났다.
청룡암으로 갈 때는 시간에 쫓겨 자세히 찍을 여유가 없던 이름 모를(집단 지성에게 물어본바 "죽단화" 또는 "겹황매화"라고) 꽃에 근접해 사진으로 남기고, 약수터에서 물맛을 봤다. 시원하고 맛있다. 배낭을 벗어 물통을 꺼내야 하는 귀차니즘에 갈증을 참으며 올라왔는데, 그 약수가 배낭을 벗어야 하는 노고를 덜어주었다. 그런데 그 약수터 뒤가 암벽인데, 밧줄이 설치되어 있다. 과거에 등산로로 사용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아무리 유심히 주변을 찾아봐도 그 밧줄까지 갈 방법이 없어, 포기하고 여기저기 핀 야생화를 구경하며 다시 등산로로 돌아와 산행을 재개했다. 그런데, 관룡사에서 청룡암까지 올라오는 구간도 쉽지 않았는데, 청룡암을 벗어나 바위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거의 직벽이다. 아래에서 봤던 병풍바위 사이로 난 길이다. 거의 기다시피 해서 급경사를 13분가량 올라가 드디어 암릉에 도착했다. 그 시각이 12시 30분이다.
관룡산 갈림길에 있는 이정표에 의하면 관룡산까지는 1.3km, 노단이마을까지는 1.1km, 관룡사까지는 1.2km다. 뭔가 이상하다. 분명 산악회 코스 설명에 의하면 관룡산에서 구룡산 왕복에 1.8km라고 했는데, 구룡산은 노단이마을 방향으로 300m를 더 가야 하니, 이정표에 따르면 관룡산에서 구룡산까지 1.4km다. 고로 왕복 2.8km! 산악회는 실제 산행 기록이라, 틀리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이정표가 틀렸다. 처음 A 코스 산행을 목표로 했을 때는 왕복에 1.8km라 구룡산을 포기했는데, 코스를 변경한 현재 왕복에 600m에 불과하니 당연히 다녀와야! 해서 배낭을 바위 능선 소나무 아래에 벗어두고 노단이마을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바위 능선에는 금줄을 치고 "출입 금지, 미지정 등산로"라는 경고문이 달려있었다. 초면이라 암릉의 상태를 알 수 없어, 일단 정규등산로로 구룡산으로 가기로 했다. 암릉과의 대면은 돌아오는 길에 하기로 하고.
정규 등산로에는 암릉이 만든 깊지 않은 동굴 있고, 깨끗한 제단은 동네 주민이 수시로 기도처로 이용하고 있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천막으로 덮여 있는 건 등산로 정비를 위한 자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굴을 사진으로 남기고 구룡산을 향해 올라가는데 위에서 등산객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목소리로 봐서는 꽤 많은 수의 등산객으로 길을 찾기 위해 서로 논쟁하고 있었다. 그리고 위에서 한 무리의 등산객이 내려오며 이 길이 "관룡산"으로 가는 게 맞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렇다고 대답하자, 뒤의 일행을 향해 이 길이 맞는다며 이리로 오라고 큰 소리로 불렀다. 그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로 봤을 때, 경상도 지역의 50대에서 70대로 구성된 산악회에서 꽤 많은 수의 등산객이 산행을 왔다가, 구룡산에서 관룡산으로 향하는 등산로 때문에 내분이 일어난 거 같았다. 출입 금지, 미지정 등산로로 향하는 비법정파와 정규 등산로로 향하는 법정파의 내분! 그들을 지나, 12시 41분에 정상이라는 어떠한 표지는 없고, 부곡온천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있는 구룡산 정상에 도착했다.
역시 정상에는 여러 갈래로 나눠지는 등산로가 있고, 그중 능선을 따라 관룡산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는 빨간 글씨로 "이곳은 등산로가 아닙니다"라는 경고문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방향에서 꽤 많은 수의 등산객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비법정파가 법정파를 부르는 소리다. 애초 돌아갈 때는 암릉으로 가기로 했었고,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비법정파가 떠드는 대화 내용으로 봐서 그렇게 힘든 구간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그 경고문을 무시하고 능선을 따라서 왔던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 등산로가 정규 등산로보다 더 잘 다듬어져 있는 게 "미지정 등산로"라는 경고문을 설치하기 전에는 정규 등산로로 사용했고, 지금도 정규 등산로보다 더 많은 등산객이 이용하고 있는 거로 보였다. 분위기로 봐서 특별히 어렵거나, 위험한 코스가 아니나, 토호의 발호로 '안전시설'이라 부르고 등산로를 망치는 구조물을 설치하기 위해 길을 막은 분위기다. 보기 싫은 구조물이 설치되기 전에 방문한 걸 다행이라 생각하며 등산로의 철쭉 터널을 동영상으로 남기며 배낭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목적지를 향해 가며 병풍바위 위로 난 등산로를 따라가며 왼쪽을 보니 장관이다.
암릉 바위틈에서 자라는 소나무와 저 아래로 보이는 관룡사, 앞에 보이는 관룡산! 그 모든 걸 감상하고, 기록으로도 남기며 바위 능선으로 관룡산을 향해 가는데, 앞선 비법정파의 떠드는 소리가 요란하다.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으로 봐서는 밧줄이 설치된 암벽을 만났으나, 밧줄이 있다고, 아무나 갈 수 있는 게 아니니, 병목이 발생하고 있는 거 같았다. 그 지점에 도착해 보니, 아직 대여섯 명이 내려가지 못하고 있었고, 위에서 내려다본 바에 의하면 굳이 밧줄이 없어도 내려갈 수 있는 암벽인데, 그놈의 밧줄 때문에 병목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 옆의 튀어나온 바위로 뛰어내려가는 게 더 쉬워 보였으나, 열심히 밧줄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비법정파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들이 다 내려가기를 기다렸다가 밧줄을 버리고 내려갔다. 암릉을 우회하는 등산로로 비법정파가 내려가는 동안 암릉을 따라가며 대부분 비법정파를 추월해 출발지인 금줄이 설치된 곳에 도착한 시각이 12시 52분으로 갈 때는 법정, 올 때는 비법정 등산로를 이용했는데, 왕복에 21분이 걸렸다. 비법정파가 암벽에서 길을 막지 않았으면, 15분 내에 주파가 가능한 거리고 코스였다. 바위 능선은 위험도와 난이도를 북한산과 비교해 보면 의상능선은 말할 바도 아니고 숨은벽에도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대신 조망은 최고다! 여기다 뭘 설치해서 암릉을 망칠지 암담하다!
처음 계획은 구룡산을 왕복한 이후 배낭을 벗어둔 곳에서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으나. 법정, 비법정 합쳐 30명이 넘어 보이는 등산객으로 붐비는 등산로에서 밥 먹는 건 아니라는 판단에 배낭을 둘러메고 바로 출발했다. 토호에 의해 필요 없는 곳에 설치된 바위 능선의 안전시설이라 부르고 암릉을 망치는 걸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암봉을 우회했음을 깨달았다. 분명 넘어갈 수 있는 바위 봉우리임에도 쓸데없는 시설이 우회하게 만든 거다. 무의식중에 튀어나오는 욕을 삼키고 암봉을 사진으로 남기고 앞으로 갔다. 그리고 만난 깔딱, 그 깔딱을 헉헉대며 오르고 있는데, 어느 순간 등산 앱이 음성으로 봉우리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이정표에 의하면 관룡산은 아직 멀었고, 그 중간에 봉우리가 또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하고 정상에 올라서서 보니 이정표가 관룡산에 도착했음을 알려준다. 역시 예상대로 산악회 지도가 맞고, 지자체가 설치한 이정표가 틀렸다. 정확히는 관룡산 정상이 아니라 화왕산 갈림길 이정표로 정상은 그 이정표에서 10여 미터 왼쪽으로 가야 했다.
이정표 삼거리에서 관룡산 정상으로 가자 이제 막 도착했는지, 정상석 앞에서 노년의 두 등산객이 배낭을 벗고 쉬려고 하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아는 체를 한다. 구룡산으로 올라가다가 만나 법정파다! 해서 그 등산객에게 부탁해 인증을 남기고 바로 화왕산으로 출발했다. 사실은 아침에 먹은 건 건대입구역 화장실에 다 반납한 상태라, 배가 고팠고, 시간은 이미 점심시간이 지났다. 해서 혼식이 가능한 자리를 찾는 게 시급했다. 이른 점심일수록 하산주가 더 맛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정상에 도착했으면 내려가는 건 당연한 거고, 다만 많이 내려가지 않기를 빌며 잘 다듬어진 등산로를 따라 고개로 내려가며 왼쪽 숲 사이를 바라보다가 언뜻 보이는 화왕산을 보고 약간 실망했다. 멀어서 뚜렷하지는 않으나, 진달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다. 무명의 봉우리에서 자주 만나는 나무에 매달린 지맥 표지에는 '화왕지맥 690.7m, 준.희’라 적혀 있었다. 내가 다닌 거의 모든 무명봉에서 만난 지맥 표지를 만들어 단 "준.희"라는 꾼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사진으로 남겼다. 준과 희 두 명이겠지?!
1시 19분경 하산 중인 등산로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서너명이 앉아서 점심 먹기 괜찮은 장소가 보여 거기로 가 먼저 올해 들어 처음으로 얼려 온 물을 한잔한 이후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보니 준비해온 물은 이번이 처음이고, 이번 산행에서 물이든 뭐든 먹은 건 두 번째다. 처음은 청룡암의 약수! 대략 7분 정도 걸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다시 산행을 시작해 100여 미터를 내려가자 저 앞으로 임도와 긴 의자 두 개가 보인다. 그리고 그 임도에 접해 정자도 있다. 옥천삼거리다! 여기서부터 화왕산 구간이다. 정확히는 삼거리가 아니라 오거리로 임도 기준 삼거리다! 그리고 진행 방향으로 이정표가 있는데, 임도로 이어지는 게 화왕산, 등산로로 이어지는 건 "박월산"으로 6.4km의 거리다. 당연히 화왕산으로 가려면 임도로 들어서야 해 임도로 갔다.
곧 임도가 끝나고 등산로로 바뀔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계속 임도로 이어지고, 능선 또한 임도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즉 아까 이정표 갈림길에서 박월산 방향으로 올라가서 능선을 따라 화왕산으로 가는 게 등산로다. 해서 다시 돌아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는 판단에, 능선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를 찾기로 하고 임도를 따라 계속 갔다. 혹시나 해서 산악회의 지도와 코스를 확인해 보니 임도를 따라 가게 돼 있었다. 임도에 드라마 허준 촬영장 등 볼거리가 많아서다. 나같이 등산이 목적인 인간에게는 무의미한 거지만. 능선 조금 아래에서 나란히 달리는 임도라, 능선이 올라가면 임도도 올라가, 역시 깔딱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임도 깔딱을 올라가자 고개다! 정상의 임도변 철책에는 대한민국 산악회의 리본은 다 달린 거 같았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능선에서 내려오는 등산로가 있었다. 박월산 방향으로 갔다가 이 길로 내려오는 거라 생각하고 계속 임도를 따라 10여 미터를 내려가다가 뭔가 이상해 등산 앱의 지도를 확인하니, 능선이 끝난 게 아니라 화왕산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고개로 돌아가 능선에서 내려오는 등산로를 따라 50여 미터를 올라가자 건물이 있었다. 멀리서 보고 화왕산 관리소 정도로 생각했는데, '경북대 아마추어 천문회 관측소'란다! 대학 아마추어 천문 동호회에 산 정상 부근에 건물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경북대는 이게 가능한 것을 부러워하며 그 건물을 지나자 능선 삼거리다. 그리고 그 직전에 동호회원을 추모하는 비석이 있었다. 설마 여기서 하늘을 관측하다가 사망하지는 않았겠지? 어쨌든 제대로 된 등산로에 접어들어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화왕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능선길로 화왕산으로 향하면서 이 능선으로 올라오지 않았으면 평생 후회할 뻔했다. 철쭉 터널과 조망 뭐 하나 버릴 게 없다. 상월마을 갈림길을 지나, 철쭉 터널을 통과해 봉우리에 오르자 전후좌우로 조망이 탁 트였다.
저 아래로 허준 촬영장소로 여겨지는 건물도 보이고,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광활한 벌판에 들어찬 억새다. 억새를 볼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는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진달래의 붉은 덩어리가 없었다면, 계절을 착각하게 할 지경이다. 억새와 진달래의 절묘한 조화를 감상하며 화왕산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을 따라 진행하다가, 배바위(동문) 갈림길 이정표에서 약간의 혼란이 생겼다. 산악회 지도에 의하면 화왕산에서 배바위로 가야 한다고 했는데, 그럼 저 앞에 있는 정상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지? 그게 맞는다면 배낭을 벗어 두고 갔다 올 생각인데, 만약 정상에서 배바위로 가는 다른 길이 있다면, 헛걸음하는 거라 등산 앱의 지도를 이리저리 훑어보니, 정상에서 배바위로 가는 길이 있었다. 그리고 정상으로 이어지는 암릉 위로 난 둘레길을 따라가며 왼쪽의 억새밭에서 배 비슷한 바위를 찾았다. 억새에 묻혀서는 아니고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해서 뭔가를 닮았다는 다른 바위도 그렇듯이 누군가 배를 닮았다는 한마디에 배바위라는 명칭을 얻은 배를 전혀 닮지 않은 바위라 결론 내리고 찾는 걸 포기하고 앞만 보고 갔다.
처음에 정상이라 생각했던 봉우리에 도착해 보니, 정상은 더 가야 하고 이 봉우리는 이름도 없어 일반 관광객이나 등산객은 지나쳐 갈 확륙이 높았다. 그렇다고 나도 지나칠 인간이 아니라 그 봉우리에 올라서서 보니 거북 바위라는 안내문이 있었다. 해서 봉우리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거북이를 찾았으나, 거북이를 닮은 건 없어, 또 속았구나 실망하다가 그 안내문 아래를 보니, 거북이 한 마리가 납작 엎드려 있었다. 해서 그 무명봉을 내 멋대로 거북봉이라 이름 짓고 저 앞으로 보이는 화왕산 정상으로 가, 2시 16분에 도착했다. 먼저 정상석을 사진을 남기고, 그 앞에 있는 바위 위에 카메라를 놓고 타이머를 이용해 인증을 찍었다. 이후 정상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절경을 감상했다. 그런데, 저 앞으로 보이는 암릉이 절경이다. 그 모든 걸 사진으로 남기고 정상에서 내려와 본격적인 하산을 시작했다. 그 시각이 2시 18분으로 목표한 4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페이스 조절이 필요했다.
정상에서 내려오자 서문 갈림길 이정표 앞에서 등산객이 핸드폰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그 이정표를 봐서는 가야 할 배바위의 위치를 알 수 없어 나도 핸드폰을 꺼내 산악회 지도를 확인했다. 지도에 의하면 어디로 가든 배바위로 갈 수 있으나, 동문은 빙 돌아서, 서문은 바로 가는 길이다. 해서 볼 것도 없이 서문 쪽으로 내려갔다. 미소바위를 지나자, 자갈이 잔뜩 얹혀 있는 소원바위다. 소원이 얼마나 많은지 소원석을 올려놓을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돌 하나 올려놓고 소원을 빌려고, 주변을 샅샅이 뒤졌으나, 돌이 없다. 주변의 돌은 이미 다 소원바위 위로 올라갔다. 어쩔 수 없이 소원 비는 건 포기하고 둘레길을 따라 10여 미터 가자 억새 사이로 작은 돌이 보여 그걸 주워 들고 돌아가 간신히 다른 돌 위에 올려놓고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2시 27분에 서문에 도착해 보니, 서문을 통과하는 제2 등산로가 있었다. 얼마나 급경사인지 지도에는 "환장고개"라 표기된! 그리고 배바위는 성벽을 따라 계속 가면 된다는 게 이정표의 지시다.
억새 사이에서 배를 닮은 바위를 찾으며 앞에 보이는 봉우리를 향해 올라가는데, 왼쪽의 관룡산 방향에서 시커먼 연기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불이다! 그런데 산불 치고는 연기의 양이 많지 않아 보이는 게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뭐 그런 생각을 하며 배를 찾으며 올랐으나, 결국 배는 못 찾고 봉우리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직전에 등산 앱이 봉우리에 도착했다고 음성으로 알려준다. 여기도 나름 유명한 봉우리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 정상에 있는 배바위 소개문을 보고 머리가 띵해지는 걸 느꼈다. 배를 닮은 바위가 아니라, 큰 물난리가 났을 때 배를 묶은 바위다. 내가 아는 배를 묶은 바위만 이거 포함해서 3개다! 먼저 방태산의 '배달은석', 다음으로 조계산의 '배바위[산행기]', 그리고 화왕산의 '배바위'다! 소위 그 지역에서 가장 높다는 봉우리에 배를 묶었다는 전설이 서린 바위가 있는 걸 보면 먼 옛날 실제 대홍수가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 간신히 바위 하나 드러난 망망대해에서 배를 묶어서 뭘 하려고 했을까?
배바위에 관한 오해를 해결하고 곰바위를 지나자, 오른쪽으로 구룡산과 병풍바위, 관룡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망원렌즈가 없는 걸 아쉬워하며 병풍바위를 감상하고, 산불 감시 초소를 지나, 작은 암봉에 올라 본격적인 하산을 하기 전 쉼터 의자에 앉아 얼음물로 갈증을 해소하고, 배낭의 망가진 부분을 수리했다. 그리고 땅에 나무를 박아 만든 계단으로 도성암 방향으로 300여 미터를 내려가자 갑자기 전망이 확 트였다. 그리고 위에서 내려다보니, 등산로는 암릉 위로 이어지고 있었다. 화왕산 정상에서 보고 감탄했던 그 바위 능선이다. 설마 그 암릉 위로 난 등산로로 하산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의외의 수확이다. 결과적인 얘기나, 그 바위 능선은 치악산 사다라병창 못지 않은 산행 재미와 조망을 안겨주었다. 개인적으로 사다리병창보다 더 나았다. 가야 할 암릉을 보며 감탄을 연발하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헬기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물주머니로 보이는 걸 들고 날아가고 있었다. 배바위에서 본 시커먼 연기가 산불에 의한 게 맞다!
3시 정각에 바위 능선의 두부바위를 지나, 14분가량 내려가자 아래로 정자가 있었다. 페이스가 좀 빠르다는 판단에 그 정자로 들어가 배낭에서 물통을 꺼내 물 한 모금하는 여유를 조금 부린 후 다시 2분 정도 내려가자 삼거리 이정표가 있었다. 이번 산행의 날머리인 매표소까지 남은 거리는 1.9km, 현재 시각 3시 16분! 너무 빠르다. 산세로 봐선 바위 능선이 끝난 형세라, 암릉의 1 등산로를 버리고 2 등산로는 어떤지 확인차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어 2 등산로로 내려갔다. 2 등산로는 어느 산이나 정상으로 오르는 최단 코스가 다 그렇듯이 최종 깔딱이 "환장고개"라 불릴 정도로 힘드나, 등산로 자체는 아주 훌륭해 웬만한 산책로보다 좋았다. 2 등산로로 하산해 1 등산로와 만나는 지점에 도착한 시각이 3시 23분으로 너무 이른 시각이다. 해서 천천히 하산하다가 데크 길이 보여 일부러 그 길로 올라갔다.
데크 길 끝에는 갈림길 이정표가 있었는데, 우로 가면 도성암, 직진은 약수터다. 비록 무당이 판치는 세상이라 암자가 중요하다고 해도, 갈증과 뜨거운 얼굴을 식혀 줄 차가운 약수가 더 필요해 망설임 없이 약수터를 향해 직진했다. 지자체에서 열심히 주변을 정리하고 가꾼 보람도 없이 가물어 약수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그 끝에 있는 세족장이 쓸모없다는 건 언급할 필요도 없고. 하기로 했었던 걸 못 했으니 다시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로 돌아가 도성암 방향으로 갔다. 그런데, 암자라는 명칭과는 다른 너무 과한 모습의 절집이라 들어가서 본존불에게 신고할 생각이 싹 사라져, 거대한 문만 사진으로 남기고 미련 없이 도성암을 떠나, 날머리로 향했다. 와중에 뜨거운 얼굴을 씻기 위해 도성암부터 시작된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며 계곡에 물이 고인 곳이 없는지 살폈으나, 계속에 소는 없고 도로 옆 식당가 주차장에 화장실이 보여 그리로 들어가 차가운 수돗물로 얼굴을 식혔다.
이번 산행의 날머리인 매표소 주차장으로 가는 도로 주변에는 간혹 식당이 있었고, 평일임에도 영업 중이었다. 기분 같아서는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하산주를 마시고 싶었으나, 버스의 위치를 모르는 상태라 일단 차가 있는 곳까지 찾아갔다. 그런데, 탄생 후 처음 창녕 방문이기는 했으나, 이렇게 고분이 많은 동네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산에서 내려가며 오른쪽으로 보이는 작은 봉우리가 다 고분이다. 가야 시대 고분이겠지? 그 고분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식당에서 300여 미터를 내려가자 매표소가 나타났다. 그 옆으로는 주차장이 있고. 그런데 버스가 보이지 않아 혹시 주차료 때문에 다른 곳에 주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나치려다가, 그래도 혹시 하고 주차장으로 들어가자 저쪽 구석에 주차해 있는 빨간 버스가 보였다. 그 시각이 3시 54분으로 이번 구룡산, 관룡산, 화왕산, 배봉 연계 산행이 끝난 시각이다. 별짓을 다 하고 돌아다녔음에도 목표보다 6분 일찍 마감했다!
3
하산주가 급하기는 하나, 남는 게 시간이고 분위기를 보니, 나를 포함 현재까지 하산한 사람이 5명이 넘지 않아 보여, 모든 정리를 마치고 하산주를 하기로 했다. 물론 그 전에 뒤로 보이는 화왕산을 사진으로 남기고! 해서 버스 뒤 잔디밭에 앉아 모든 걸 거기에 던져두고 등산화의 끈을 느슨하게 하고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편한 복장으로 버스에서 내린 기사가 슬리퍼가 없냐고 물었다. 버스 좌석 앞주머니에 있어 여기서 정리가 끝난 다음에 가지러 갈 거라고 얘기해 주고 계속할 일을 했다. 일단 버스에서 필요한 물건은 배낭에서 꺼낸 후 배낭을 버스 짐칸에 넣고, 차에 타서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이후 마스크를 쓰고 패드와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산행 계획을 세울 때 하산주 식당으로 고려하고 있었던 "진짜 순대"로 향했다.
사전에 확인한 지도에 의하면 "진짜순대"집은 주차장 옆에 있었으나, 주차장에서 직접 갈 수 있는 길이 있는지 확인되지 않아 주차장에서 나와 도로를 따라 주차장을 우회해 순댓집으로 갔다. 핸드폰의 지도 앱에 의하면 꽤 멀어 보였는데, 바로 옆이었다. 멀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식당 마당으로 들어가며 주차장과 연결 통로가 있는지 찾아봤다. 주차장과는 철책문으로 연결하고 있었고,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문에 가까이 다가가 주차장을 바라보니, 건너편 끝에 서 있는 빨간 버스가 보였다. 하산주 후 버스로 돌아가는 방법은 확인했으니 부담 없이 하산주를 즐기면 된다는 기쁜 마음으로 꿀벌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꽃 사이 계단을 지난 전면이 유리로 만들어진 식당 정문으로 올라갔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구조의 식당이라 슬리퍼를 벗으며, 신발장과 바닥에 놓여 있는 신발을 훑어본바 등산화는 두 족에 불과했다. 말인즉 등산객은 두 명이라는 얘기다. 슬리퍼를 벗고 맨발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내부를 둘러보니, 손님이 있는 테이블은 두 개에 불과했고, 그중 하나는 두 명의 등산객이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현지 주민으로 보이는 여성이 앉아 있었고. 그리고 내가 들어오는 걸 본 매장의 여성 요원이 몇 명인지 물었다. 수없이 받은 그 질문 때문에 어디든 들어갈 때 매장 요원이 보고 있으면, 애초 손가락 하나를 들고 간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질문이 나오는 순간 반사적으로 손가락 하나를 든다. 말로 "한사람이요!" 하는 것보다 피차 더 빠르게 이해한다. 손가락 하나를 보이자, 순댓국은 없고 순대전골인데 2인분부터 주문받는다고 했다. 순댓국이 없는 건 알겠는데, 전골만 파는 순댓집은 들어보지를 못해 매장 요원의 말을 무시하고 벽에 붙은 메뉴판을 보니, '모듬순대'를 포함 다양한 안주가 있었다. 해서 ‘모듬순대’ 작은 걸 주문하고 술은 손수 매장의 냉장고로 가서 지역 소주인 "좋은 데이"를 들고 왔다.
주문한 안주가 나오기 전에 화장실로 달려가 발을 씻었다. 계곡에서의 세족은 아니나, 시원한 수돗물로 씻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씻을 건 씻고, 뺄 건 빼고 나와 내 자리로 돌아가 안주가 나오는 시간 동안 소주를 따라 마셨다. 그리고 젓가락을 들고 깔린 밑반찬을 보니, 소금, 새우젓, 고추냉이 간장, 막장(쌈장)의 소스 4종에 쌈무, 양파채, 오이고추, 겉절이다. 오이고추와 겉절이를 뺀 나머지는 순대에 곁들이는 거고, 소주 안주로 겉절이는 최악이라 오이고추를 쌈장에 찍어 안주로 먹었는데, 최악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아무 맛도 없는 고추라니! 창녕 시골 바닥에 이건 뭐, 막걸리는 팔지도 않고, 안주 때문에 기분이 최악으로 달리기 직전에 주문한 모듬순대가 나와 기분을 풀로 그걸 안주로 좋은데이를 홀짝였다. 하긴 21세기에 비록 무당이 정치를 좌우할망정 시골 바닥의 장터 모습을 기대한 내 잘못이 크다.
그렇게 '좋은데이' 두 병을 마시고 결국 순대를 다 못 먹어서 조금 남기고, 다른 등산객이 식당을 다 나간 이후인 4시 5분에 계산하고 나와 주차장에 서 있는 버스로 갔다. 최소 마감 시각보다 10분 전에는 출발할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차에서 기다렸으나, 한 여성 등산객 덕분에 마감보다 조금 늦은 시각에 버스는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비록 이번 산행에서 매번 늦어 버스 출발 시각을 지연시킨 여성 덕에 조금 늦게 날머리에서 출발했으나, 막힘없이 고속도로를 달린 버스는 7시 14분에 내게는 초면으로 느껴지는 '문의청남대 휴게소’에서 20분간 휴식 후 다시 달려 9시 30분경 아침에 출발했던 건대입구역에 도착하는 거로 이번 산행을 최종 마감했다. 물론 집에서 무사 산행을 기념하는 하산주 2차도 했다!
안내산악회가 계획한 A 코스를 조금 변형해 '화왕산 옥천매표소 → 관룡사 → 용선대 갈림길 → 청룡암 → 병풍바위 → 구룡산 삼거리 → 우회로 → 구룡산 → 암릉 → 관룡산 삼거리 → 암봉 → 화왕산 갈림길 → 관룡산 → 화왕산 갈림길 → 옥천 삼거리 → 임도 → 경북대 아마추어 천문대 → 730고지 → 거북바위봉 → 화왕산 정상 → 배바위(배봉) → 도성암 → 창녕매표소 → 자하곡 주차장'의 12.13km, 4시간 36분의 구룡산, 관룡산, 화왕산 연계 산행이었다. 이동 4시간 30분, 휴식 6분!
봄의 진달래, 가을의 억새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산행이었다.
미처 예상치 못한 바위 능선과 바위 봉우리는 계절을 잊은 억새와 진달래의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소위 얘기하는 인기 명산에 화왕산이 낀 이유를 알 수 있었던 산행이었다. 진정한 산행의 즐거움은 임도를 따라 움직이는 관광코스가 아니라, 바위 능선과 흙산이 절묘하게 섞여 있는 구룡산에서부터 화왕산까지 달리는 걸 권한다. 물론, 1 등산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