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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5일 14구간 초희길 출발지 시청 종각 주차장에서...(09:54)
국장님 인사말과 구간지기님 소개
'알바는 없으니.. 절 믿고 즐겁게 걸으십시오..'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왕눈이 지기님..
열심히 리딩을 하다 춘갑봉 근처에서 알바를 하고 말았다..
(근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알바가 아니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 같았다.)
하곤 형님의 야릇한 미소.....
江陵市廳
강원도 강릉시 홍제동에 있는 강릉시 관할 지방 자치 행정 기관.
[설립 목적]
강릉시의 행정 및 민원 등의 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변천]
1955년 9월 1일 법률 제369호로 강릉읍, 성덕면, 경포면을 병합하여 강릉시로 승격되었다.
당시의 강릉시 행정 구역은 38개동 489개 반이었다.
강릉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강릉군은 명주 군으로 개칭되었다.
1995년 1월 1일에는 강릉시와 명주군이 도농 복합 형태의 강릉시로 통합되었다.
새롭게 조성되고 있는 공원에서 바라 본 강릉의 일부(구 도심).....
잠시 발 걸음을 멈추고... 강릉을 내려 다 본다.
시내를 가로 질러 보무도 당당히 걸어가는 바우님들....
시립 미술관 언덕을 오르면서...(10:53)
강릉시립미술관
2006년 9월 8일 강릉미술관으로 개원
2013년 4월 18일 정식 인가 및 강릉시립미술관으로 재개관
강릉시립미술관은 지역작가의 예술 활동을 활성화하고
전시 다양화를 위해 ‘2024년 지역작가 전시 지원사업’을 시행한다.
관람 시간: 화~일요일 09:00 ~ 18:00
휴관일: 매년 1월 1일, 매주 월요일, 설 연휴 및 추석 연휴
2006년 9월 강릉미술관으로 출발하여 2013년 4월 강원도에서 유일한 시립미술관으로 재개관한 미술관이다.
강릉 시내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강릉시립미술관은
아담한 2층 건물에 529㎡의 전시 공간을 갖추고 있으며, 각각의 전시실은 짜임새 있는 정결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어,
누구나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싶은 의욕을 갖게 하는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예술교육의 확대를 지향하는 강릉시립미술관은 전시와 연계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교육프로그램을 통하여
지역민과 함께 호흡하고 교육 행사를 수행하여 지역 문화 발전에 기여 하고 있다.
임영고개에서...(11:08)
이명고개
강원도 강릉시 교동에 있는 고개.
[명칭유래]
이명고개는 ‘염양사(艶陽寺)가 있는 고개’란 뜻으로 ‘염양고개’라고 불리다가 나중에 염양이 이명으로 변하였다.
염양사는 고려 충숙왕(1294~1339) 때 박종이 중건한 절인데, 조선조 성종 때(1457 ~ 1494)에 이르러
염양사의 승려들이 민가에 가 주민들을 괴롭히는 등 횡포가 심하여 나라에서 폐찰시켰다고 한다.
[자연환경]
이명고개는 정봉(성산면 금산리 소재)에서 동쪽으로 내려온 줄기에 있는데,
위쪽에는 원현(元峴), 아래쪽엔 화부산이 있다.
[위치와 교통]
이명고개는 강릉의 북쪽지역인 경포와 시내를 잇는 고개로 율곡로, 화부산로, 임영로가 교차하며 지나간다.
율곡로를 따라 북쪽으로 가면 율곡중학교가 나오고, 동쪽으로 가면 옥천 5 거리가 나오고,
화부산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강일여자고등학교, 영동초등학교가 나오고, 북동쪽으로 가면 강릉역이 되고,
임영로를 따라 시내로 가면 강릉제일고등학교가 나온다.
[현황]
이명고개는 경포지역과 시내로 다니는 관문으로,
고개 주위에는 강릉 행복한 모루, 강릉향교, 강릉명륜고등학교, 향현사, 계련당, 화부산사 등이 있다.
임영고개를 지나 화부산으로 오르면서....
화부산 정상... (11:22)
화부산(花浮山)
강원도 강릉시 교2동에 있는 산.
옛날 이 산에 꽃이 많이 피어 멀리서 보면 마치 꽃이 산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화부산(花浮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자연환경]
교1동 원뎅이재에서 내려온 줄기가 북쪽으로 이어지면서
포남동의 바깥 뫼인 춘갑봉을 지나 초당을 거쳐 그 낙맥이 경포로 이어진다.
[현황]
화부산 기슭은 강릉시내와 포남·송정의 넓은 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줄기가 감싸고 있어 예로부터 교육기관을 세우기 좋은 장소로 선호되어 왔다.
고려시대인 1313년에 이미 향교가 화부산 기슭에 건립된 바 있으며,
화부산 북쪽 마을인 당두에는 화부산 양지쪽
남향의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린 위치에 강릉향교의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교동에 소재한 강릉향교를 기반으로 개화기 유림학자들에 의해 근대학교로 1909년 설립되었다가
한일병탄 이듬 해인 1911년에 폐교되었던 화산학교(花山學校)도 화부산의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과거 화부산 아래에는 김유신 장군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화부산사(花浮山祠)가 있었으나
강릉역 확장 때 현 위치인 교1동으로 이전되었다.
한편 수십 년 전에는 화부산 남쪽 산기슭에서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민무늬토기, 석기, 석촉, 방추차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화부산에 얽혀 있는 이야기들을 설명을 하고 있는 국장님......
(결론은 화부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본인의 모교인 명고가 쵝오! 라는 ...ㅎ)
시내를 가로지르는 산기슭에 이런 아름다운 숲 길이 있다는 게....
나그네님, 감자아빠님을 당겨 본다....
식사 후 모임 장소를 안내하는 지기님...(11:27)
각자 흩어져 식사 후 다시 모임의 장소로....(12:34)
소동산 봉수대로 오르는 어마 무시한 오르막 길....
소동산 봉수대에서....(13:09)
소동산 봉수대
주연야화(晝煙夜火).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을 올린다는 뜻이다.
옛 봉수대를 설명할 때 등장하는 말이다.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전근대에 불과 연기는
위급한 소식 등을 빠르게, 널리 알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봉화를 사용했고,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인 아이스킬로스(서기전 525~456년)의 작품인
‘아가멤논’에 봉화를 올린 내용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에 이미 봉화가 있었다고 하고,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에도 봉화가 언급되니
가장 오랜 기간, 범세계적으로 활용된 ‘레전드급’ 통신 수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서주(西周)가 봉화를 잘못 운영해 망국에 이른 일화도 유명하다.
서주의 마지막 왕 유왕(幽王)은 경국지색 미모를 타고난 포사가 웃음이 없어 애간장을 태우다가
어느 날 실수로 잘못 올려진 봉화에 제후들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을 본 포사가 박장대소를 하자,
그 뒤로 시도 때도 없이 봉화를 올리도록 했고,
오랑캐 견융이 진짜로 침입했을 때는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아무도 달려오는 제후가 없어 결국 망하게 됐다는 고사다.
우리나라의 봉수(烽燧)는 조선시대에 특히 잘 정비되고 활용됐다.
평상시 1홰(炬)부터 전투가 시작되면 5홰까지 위급함의 정도에 따라 봉화 횃불의 개수를 달리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700여 척의 왜(倭) 선단을 발견하고,
부산 황령산에서 봉화를 올린 지 12시간 만에 한양의 목멱산(남산) 봉수대에 도착했다.
평시에도 봉화를 올린 것은 적에게 점령당하는 등의 변고 없이 봉수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다.
동쪽 바다의 안위를 맡던 강릉 ‘소동산 봉수대’가 최근 거화 의식을 갖고 옛 봉수의 면모를 재현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이 전하는 소동산 봉수대는 지난 2008년에 주민 노력으로 복원된 곳이다.
경포호와 바다를 조망하는 일출 명소로도 인기를 더하고 있다.
포남2동과 주민자치위원회는 앞으로 주기적으로 거화행사를 열고,
역사문화 교육 현장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옛 봉수대가 민간의 노력으로 새롭게 불을 밝히고 문화관광 콘텐츠로 활용되는 모습이 흐뭇하다.
/ 강원도민일보. 최동열 강릉본부장
먹이를 찾아 어슬렁 거리는 하이에나....
5월 ~ 장미의 계절....
춘갑봉에 도착해서...(13:25)
춘갑봉은 강릉시 포남동에 있으며 55m 낮은 봉우리로
예전에는 은퇴자들이 많이 찾는다고 해서 명퇴봉이라 불렀다 하는데...
명칭이 그닥 좋지가 않아... 후에 봄이 일찍 찾아온다는 의미의 춘갑봉으로 새 이름을 얻은 곳이다.
무쟈게 높은 춘갑봉 정상에서 인증 샷....
두 팔 벌리고 앞장서서 씩씩하게 걸어가는 구간지기님.....
믿고 따라오라 해 놓고 선... 알바를 하기 시작한다.
환선정 근처에서...
환선정 (喚仙亭)
강원도 강릉시 포남동 모안이굼에 있던 조선 시대의 정자.
환선정(喚仙亭)은 16세기 후반경 권협이 지은 건물로
아들 권수경, 손자 권칭(權稱)에게 물려준 누정 건축물이나, 지금은 없어졌고 그 터만 전해지고 있다.
환선정과 관련된 인물 중 대표적인 이는 권칭이다.
권칭은 안동 권씨로, 강릉 지방의 사족이었으며, 1627년(인조 5) 증광 초시 생원에 입격하였고,
이듬해에는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에 천거되었으며,
이후 이조 좌랑·병조 좌랑·경상도사·직강 사예를 두루 역임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환선정에서 지역 유생 및 문중 인사들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
[위치]
환선정은 강릉시 포남동 모안이굼의 산기슭에 있었다.
경포호의 남쪽에 위치하여 정면으로 경포호와 경포대가 바라다 보였다.
[변천]
16세기 후반경 권협에 의해 경포호 남쪽 언덕에 건립되었던 정자로 그것이 아들 권수경에게 유산으로 전해졌고,
또 손자 권칭에게 상속되었다. 『증수 임영지』에는 권칭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나 이는 잘못된 기록으로 보인다.
환선정은 초기에는 권협과 권수경의 산장으로 이용되다가 이후 권칭 대에 이르러 소요(逍遙)와 시를 읊고,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1666년경(현종 7) 권수경과 아들 권칭의 묘를
환선정 주변으로 이장한 후 정자는 점차 쇠락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형태]
환선정의 형태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우복 정경세(鄭經世)[1563~1633] 등의 시에 따르면 정자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월출의 광경을 즐겼던 것으로 보아 누마루와 방을 함께 만든 형태의 정자로 추정될 뿐이다.
1614년(광해군 6) 강릉 부사를 지냈던 우복 정경세가 환선정에 머물며 지은 시
「환선정에 머무르다[宿喚仙亭甲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송간화각출운구(松間畫閣出雲衢)[솔숲 사이 그림 누각 구름 높이 솟았거니]
봉도비선정가호(蓬島飛仙定可呼)[봉래도의 나는 신선 부를 수가 있으리라]
주성야심휘촉퇴(酒醒夜深揮燭退)[술은 깨고 밤 깊기에 촛불 불어 꺼버린 채]
좌간청월만평호(坐看晴月滿平湖)[맑은 달빛 호수 위에 가득한 걸 바라보네]
환선정의 밑으로는 못[池]이 있어 마을 이름인 모안이굼(못 안에 있는 마을) 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주변 경관은 판서 김세렴(金世濂)이 지은 글을 통해 전해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둘레에 화초를 많이 심고 그 공간에서 태평하고 한가롭게 노닐었다.
부사 정경세가 지은 시에 이르기를 ‘그림 같은 환선정이 구름 밖에 솟았으니 봉래산 신선들을 불러도 되겠구나.
밤늦도록 술 마시고 촛불을 물리고 나니, 휘영청 밝은 달이 호수에 넘실대네.’”
[현황]
건립 당시의 환선정은 없어진 상태이며, 정자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만 확인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명승지 경포호를 배경으로 한 경포 팔경 중 하나인 환선취적(喚仙吹笛)의 대상이 되었던 누정 건물로
경포대를 비롯한 주변 누정들에 대한 역사성과 지역 문화성을 설명할 수 있는 유적지이며,
또한 17세기 초반 강릉 지방 사족들의 교유 관계, 문화 및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바우님들...이거슨 절대 알바를 한 게 아닙니다.....
개척 정신으로 좀 더 좋은 새로운 길을 찾아 걸어 보는 겁니다....'
모안이굼[慕顔洞]
강원도 강릉시 포남동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유래]
모안이굼(慕顔洞)은 예전에 경포호의 물이 이곳까지 들어차서
‘못 안에 있는 굼’이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인데, ‘굼 ’이란 길게 내려온 산줄기 끝을 말한다.
예전에는 모안이굼 앞에까지 경포호의 물이 들어왔으나,
지금은 경포호가 많이 메워져 모안이굼과 경포호 사이는 넓은 논으로 되었다.
[자연환경]
모안이굼은 포남2동 뒤에 길게 늘어진 춘갑봉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 끝에 있고,
앞에는 경포호가 펼쳐지고, 그 사이에 넓은 논이 있다.
[위치와 교통]
모안이굼은 경포호를 바라보고 있으며, 초당동 안초당과 교동 수릿골 사이에 있다.
마을에서 동쪽으로 가면 춘갑봉이 돠고, 남쪽으로 가면 수릿골이 된다.
안초당에서는 당재를 넘어 서쪽이 되고, 포남동에서는 북쪽 끝이 되고, 경포호에서는 동남쪽 끝이 된다.
[현황]
모안이굼의 남쪽에는 바둑골이 있는데, 옛날 이 골에 서당이 있었을 때 서당에서 공부하던 선비들이
글공부를 하면서 잠시 머리를 식힐 때 이곳에서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 바둑돌이 있고, 그 옆에 선비들이 마시던 우물도 있다.
모안이굼 산줄기 끝에는 환선등이 있고, 이곳에 환선정(喚仙亭)이 있다.
허난설헌 달빛 산책로로 접어들면서.....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앞에서...(13:52)
허초희 기념관
강릉에 있는 허난설헌 생가터는 조선 시대 최고의 여류문인
허난설헌의 예술혼과 문학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곳이다.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로 8세 때부터 천재적인 시재를 발휘하였으나 27세 때 요절했다.
섬세한 필치로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달래는 노래를 했는데
허난설헌이 죽은 후 동생 허균이 작품 일부를 모아 '난설헌집'을 간행했다.
2001년 복원된 허난설헌 생가터는 아름다운 솔숲을 지나면 나타나는 전형적인 사대부가 한옥의 형태이다.
솟을대문과 야트막한 담장 안에 대청과 사랑채, 안채 등이 있고
우물과 방앗간 옆으로 좁은 문을 두어 여성들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여 남녀의 구분을 두었다.
안에는 허균과 허난설헌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매화나무가 아름답게 자란다.
강원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곳이다. 생가를 비롯해 허균·허난설헌 기념관과 기념 공원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그늘진 곳에서 잠시 쉬어 간다.
새로 오신 부부님 모습...(두 팔 벌려 환영하고 바우길에 자주 오셔서 함께 하시길 바래 봅니다)
연초록.옥연님....
하곤형, 봄꽃님, 동그라미홍님
아직도 먹이를 찾아 헤매고 있는 하이에나....(오늘 중으로 먹이는 찾을 수 있을런지....)
사계절 언제 걸어도 좋은 아름다운 숲 길을 지나간다.
江門島
강원도 강릉시 강문동의 육지와 연결된 육계도(陸繫島).
[개설]
‘강문(江門)’은 ‘강이 흐르는 입구’라는 뜻으로 ‘경포대를 품고 있는 경포호의 물이 바다로 흐르는 곳’을 의미한다.
강릉부 동북쪽 10리 되는 북일리면에 있으며, 경포호수의 동쪽 출구이다.
해안이 우뚝 솟은 봉우리는 견조도와 서로 마주 바라보고 섰으며,
읍을 호위하고 있는 관문으로 위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이 있다.
[자연환경]
죽도와 맞닿은 강문은 야간에 나룻배로 작업 시 사용되는 횃불이
바다와 호수면에 비치는 아름다움을 보는 광경이 일품이어서
경포 8경 중 하나인 ‘강문어화(江門漁火)’로 유명하다.
또한 이 강문도에서 떠오르는 달을 보는 아름다움으로 ‘죽도명월(竹島明月)’도 역시 경포 8경에 속한다.
[변천]
『동국여지승람』에는 “경포호 동쪽 입구에는 나무다리[板橋]가 있는데 이것이 지금의 강문교이고,
다리 밖은 죽도가 있고 이 섬 북쪽에는 5리나 되는 백사장이 있다.
백사장 밖은 창해(滄海) 만리인데, 해돋이를 바라볼 수 있어 가장 기이한 경치이다.”라고
기술된 내용으로 보아 지금의 호텔 현대가 자리 잡은 곳으로 지금은 육지와 연결된 육계도이다.
[위치와 교통]
강문도는 행정구역상 강릉시 강문동으로 해발고도는 31.1m이다.
월파정(月波亭)은 경포호 한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이다.
호수 가운데 있는 바위에는 각종 철새들이 찾아와 노는 곳으로 새바위라고 하며,
조선 숙종 때 우암 송시열이 쓴 '조암(鳥岩)'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고 한다.
월파정은 1958년에 강릉지역의 기해생 동갑 계원 28명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계(契)의 도시 강릉
강릉은 계의 도시라고 한다. 다른 도시에 비해 유독 계가 많다.
강릉 사람치고 네다섯 개의 계에 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따라서 강릉 사람들의 유대관계는 계로 시작해서 계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 영향으로 경포호수 주변에 있는 정자들이 예외 없이 계원들이 세웠거나 계와 관련되어 있다.
경호정 : 1927년 강릉 주민들의 '창회계' 계원들이 세운 정자
상영정 : 1866년 강릉 유림 16명의 '상영계' 계원들이 세운 정자
금란정 : 1466년 19명의 '금란반월계' 계원들이 인수하여 세운 정자
취영정 : 1893년 18명의 강릉 선비 모임인 '취영계' 계원들이 세운 정자
월파정 : 1958년 기해생 동갑계원 28명이 세운 정자
강문 솟대 다리
강문 해변에 있는 강문 솟대다리는 이 다리를 기점으로 강문 해변과 경포 해변으로 나누어진다.
솟대는 마을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볍씨를 주머니를 넣어 장대를 높이 달아맨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기도 하고 민간신앙의 상징물로 장대 끝에 새를 나무로 깎아서 달기도 했던 장대를 말한다.
강릉에서는 이 솟대를 옛날에는 진또배기라고 불렀다.
강문에서는 음력 정월 보름, 4월 보름, 8월 보름 세 번에 걸쳐 서낭제를 모신다고 한다.
진또배기는 서낭신을 보필하고 삼재(수재, 화재, 풍재)를 막아 마을의 안녕과 풍어, 풍년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강문 솟대다리에 도착해 초희길 발걸음을 마무리한다(14:38)
江門洞
‘강문’은 ‘강이 흐르는 입구 또는 강릉의 문’ 이란 뜻인데,
옛날 강릉 시내로 관류하던 물줄기가 공제(홍제동), 경방을 지나 옥거리(옥천동)에서 궁개(포남동), 보남이,
도투재 밑 베루끝(한국 전력 공사 아래쪽)으로 돌아 초당(쏠터)에서
강문으로 흘러 경포호 하구 죽도봉 앞에서 바다로 빠졌다.
그래서 ‘강문’은 강릉 시가지로 흐르는 물줄기 끝, 또는 바다에서 강릉 시가지로 들어오는 물줄기와 맞닿는 곳이란 뜻이다.
강문동은 고대에는 예(濊)의 속국으로 있었으며, 기원전 127년에 창해군으로 편입되었고,
한무제(漢武帝) 때에는 임둔의 땅이었다.
기원전 30년에 동예의 땅으로 계승되어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 하슬라로, 신라 하서소경의 땅으로,
고구려 동원경의 속현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시대에는 진관부에 속해 있었다.
강문은 초당과 역사를 같이 하고 있는데, 강문리는 원래 남일리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군내면, 1916년 강릉면, 1931년 강릉읍에 편입되었다.
1955년 9월 1일 강릉읍이 경포면, 성덕면과 병합하여 강릉시로 승격되면서 행정동인 초당동에 속하게 되었다.
[자연환경]
강문교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강릉의 7개면(왕산면·성산면·구정면·사천면·덕방면·성남면·정동면)에서 흘러온다.
강문 한가운데는 마을의 수재, 풍재, 화재 즉 삼재를 막아주는 진또배기가 우뚝 서 있고, 포구가 있다.
이곳 포구에서 여름에 바다에 나가 불을 켜 놓고 고기 잡는 모습이 아름다워 강문 어화라 했다.
강문 진또배기가 있는 곳에서 강문교를 건너 북쪽에는 죽도봉이 경포호와 바다 사이를 가로막고 서있다.
또한 최근 강문항의 솟대다리가 명소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현황]
강문동은 강릉시의 경포동과 초당동에 각각 있는 법정동으로서, 총면적은 1.21㎢이다.
강문동의 동쪽 기슭에는 여서낭당이 있고, 내 건너에는 남서낭당이 있다.
여서낭당에서는 3년에 한 번씩 바다에 나가 조업을 하는 마을 사람들의 안위와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제를 올린다.
강문동의 주요 문화재 및 관광지로는 1892년(고종 29)에 취영계 계원들에 의해 건립된
취영정·창랑정·석란정·죽도봉·강문동 서낭당·강문 진또배기·철기 시대 유적·
신라 시대 주거지 유적·강문동 신라 토성 터 등이 있다.
최근 솟대다리와 씨마크호텔이 새롭게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으며, 해변에는 강문항과 회맛집촌이 즐비하다.
江門洞新羅土城
강원도 강릉시 강문동 경포대 현대 호텔 신축 부지 내에서 발굴·조사된 신라 시대의 토성 터.
강문동 신라 토성 터는 강릉시 강문동 265번지 일명 죽도봉(竹島峰) 일대
경포대 현대 호텔 신축 부지 내에서 발굴 조사되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2011년 경포대 현대 호텔 신축을 위한 사업 시행을 목적으로 실시된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지로 토성이 위치한 죽도봉은 해발 8~26m의
동고서저의 독립성 구릉으로 성벽은 구릉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형태]
성의 둘레는 약 1㎞ 내외이다. 성벽 기저부는 외측 기반암을 삭토하고 성토다짐을 하였으며,
급경사면은 계단상으로 조성한 후 축조하였다.
성벽의 외측 끝단에는 강돌 및 다듬은 석재를 이용하여 최대 4단 정도의 기단 석축을 조성하였다.
성벽 축조 방식은 삼국 시대 양식 중의 하나인 판축 기법을 활용하였는데,
기저부 외측에 1차 토루를 조성한 후 내측에 2차 토루를 덧붙여서 판축하였다.
[출토 유물]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대형옹, 항아리[壺], 굽다리 접시[高杯], 배(杯), 개(蓋), 그릇 받침[器臺],
장란형 토기, 연질발, 시루, 컵형 토기, 갈돌, 쇠도끼, 금제 고리 장식 등이 출토되었다.
[의의와 평가]
시기적으로 5~6세기는 신라가 동해안 북변으로의 진출을 활발히 진행하였던 때이며,
고구려, 말갈 세력과의 빈번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한 시기와도 맞물려 있으므로
강문동 신라 토성 터는 동해안 지역의 고대사 및
신라의 북변 진출 과정에 대한 연구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유적지이다.
강문에서 안목까지 길게 이어져 있는 아름다운 해변...
바우길 역사를 위해 함께 한 바우님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말리꽃 -이승철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지 짙은 어둠을 헤매고 있어 내가 바란 꿈이라는 것은 없는걸까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는 것 지친 두 눈을 뜨는 것 마저 긴 한숨을 내쉬는것조차 난 힘들어 이렇게 난 쓰러진채로 끝나는 건 아닐까 항상 두려웠지만 지금 내가 가야할 세상속에 네가 있기에 지쳐쓰러지며 되돌아가는 내 삶이 초라해 보인데도 죽어진 네 모습과 함께 한다면 이제 갈 수 있어 소중하게 남긴 너의 꿈들을 껴안아 네게 가져가려해 어두운 세상속에 숨쉴 날들이 이제 잊혀지도록 지쳐쓰러지며 되돌아가는 내 삶이 초라해 보인데도 죽어진 네 모습과 함께 한다면 이제 갈 수 있어 소중하게 남긴 너의 꿈들을 껴안아 네게 가져가려해 어두운 세상속에 숨쉴 날들이 이제 잊혀지도록
첫댓글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목도 아프실텐데 여러각도를 찾아 찍어주신 아름다운 사진과 해박하신 지명 설명까지. 함께라서 즐겁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알바는 절대아니고, 길이 아름답고, 새로운 길을 찾아 안내해드렸을 뿐입니다. 죄송합니다. ㅋㅋ
리딩에 감사드리고 함께 한 발 걸음 즐거웠습니다.
맞습니다..그거슨 절대 알바가 아닙니다....
새로운 길을 잠시 찾아 본 지기님의 개척 정신..ㅎ
오늘도 걷자님 덕분에 14구간 초희길 후기 잘 보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어쭙잖은 후기...
즐겁게 봐 주시고 댓글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걷자 걷자 그리고 또 걷자 ㅎㅎㅎ
나는 걷는데....그대는 아니 보이고...아니 걷고.....
그럼 못 써요...배가 안 들어 가요...ㅎ
@걷자(서울/강릉) 이제 배들어가면 큰일나요
그냥 나온 배 잘 유지하는게 더 좋아요
2주정도 못 뵈었을 뿐인데,,
어찌나 반갑던지요 ^^
아름다운 꽃과
시원한 바람이 함께 한
즐거운 걸음
멋지게 담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축제 때 뵈어요~걷자님 ^^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 오셔서 너무 반가웠습니다.
두 분이 안 계시는 빈 자리가 너무 허전했었습니다.
(축제 때는 제가 일이 있어 참석을 못함에 아쉽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