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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끄심 4화 - יָלַךְ 얄라크 : 고향을 떠나다 (2) 탈북민 수기 김 서 윤 전도사 23.4
우리 가족은 최선을 다해 여정을 이어갔지만 이 먼거리를 걸어간다는 것은 너무나 요원한 일이었다. 우리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헤매고 있는 우리를 딱하게 생각하셨는지 이 산행을 반강제적으로 끝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이끄셨다.
그 날도 영하 30도가 넘는 혹독한 날씨였다. 온 몸이 꽁꽁 얼었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발은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온통 흰 눈에 덮인 논밭만 보였고 인가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발 이 너무 시려서 논 한가운데 쌓아놓은 볏짚단 속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서로의 발을 옷 속에 품어 녹여주었다. 얼음덩이와 같은 엄마의 두 발이 내 배 위로 들어오는 순간 머리끝까지 느껴지는 추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얼어붙은 발을 서로의 품속에 넣고 잠시동안 죽어가던 세포를 다시 깨웠다. 볏짚 사이에서 추위를 피한 우리는 날이 밝아 올 때쯤 혹시나 사람들이 몰려올까 경계하며 그곳을 벗어났다. 날이 밝아오니 혹한의 추위 속에서 사방에 눈이 온통 반짝반짝 빛났다. 우리의 몰골은 영락없는 거지꼴이었지만, 보여지는 매무새나 추위, 배고픔, 고단함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오직 대한민국을 가기 위해서 걷고 또 걸었고 그 1차 목적지는 길림성(吉林 省) 길림시(吉林市)였는데, 얼마나 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불안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동쪽을 바라 보며 산과 마을을 넘고 또 넘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어느 날, 우리는 수백마리의 닭들이 들판에서 ‘꼬꼬댁’ 거리며 놀고 있는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수백 마리의 닭이 뛰어노는 광경을 보았다. 그 닭들을 보며 엄마와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저 많은 닭 중에 딱 한 마리만 먹어봤으면…” 하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눈앞에 보이 는 그림의 떡과 같은 닭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면서 왜인지 모르게 일어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 때 뭔가 물컹한 것이 발 끝에 걸렸다. 눈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하얀 눈 속에 닭 세마리가 죽어 있었다. 내 발이 닿은 닭의 안에서는 생쥐들이 닭 내장을 파먹다가 우르르 도망갔지만, 다행히 나머지 두마리는 아직 상태가 멀쩡했다. 우리는 서로 번갈아 보며 웬 횡재인가 싶어서 죽어있는 닭들을 주워서 탈탈 털어 어머니와 나의 배낭에 넣었다. 닭을 너무나 손쉽게 주운 것이 믿어지지가 않아 이것이 웬 떡인가 싶었다. 고맙고 기쁘고 신이나서 발걸음도 가벼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어리고 왜소했던, 그리고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자기몸 가누기 힘들었던 나에게 꽁꽁 얼어 붙은 닭의 무게는 생각보다 더욱 상당했다. 나중에는 버리고 싶을 만큼 어깨가 무거웠다. 게다가 하필 그 날은 걷고 걸어도 우리가 들어가서 몸을 녹일만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어렵게 매고 온 닭을 그냥 버릴까 했던 그때, 다행히 인적 없는 어느 과수원의 초막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겨울내내 사람이 머문 흔적이 없는 곳이었다. 어머니는 바닥에 모닥불을 피우고, 초막 주변에 있는 깡통들과 솥뚜껑을 주었다. 그리고 밖에 있는 하얀 눈을 떠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물이 끓어오르자 어머니는 닭의 털을 뽑고, 가지고 다녔던 맥가이버 칼로 대충 닭을 조각내어 삶았다. 뽀얀 국물이 올라오며 닭이 익어가는 향이 얼마나 좋았던지 침을 꼴깍꼴깍 넘어갔다.
마침내 닭이 익었다. 간을 맞출 소금 하나 없었지만 닭다리를 하나 잡고 뜯으니 그 순간에는 그 닭다리가 지구상 그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었다. 얼마 만에 먹는 고기인지... 우리 가족은 닭 비린내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너무도 맛있게, 숨소리도 내지 않고 허겁지겁 닭고기를 먹었다. 그러고는 오랜만에 경험하는 배부름과 포근함에 취해 기절한 듯이 잠들었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모닥불의 불씨가 꺼질 즈음 어머니께서는 몸을 쭈그리고 서로에게 기 대어 자고 있는 우리들을 챙기시며, 땔감이 떨 어진 것을 보시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땔감을 찾으러 밖으로 나가셨다.
그런데 온통 눈이 가득 쌓인 어둠 속에서 바닥에 굴러다니는 각목을 불에 때려고 주워서 꺾으시다가 그만 한 각목에 박혀있던 대못을 밟고 마셨다. 어머니의 발은 못에 관통되었고 삽시간에 퉁퉁 부어올랐다. 어머니는 천으로 발을 대충 묶고 지혈을 하셨다. 끔찍한 고통이 발끝에서부터 전해져 왔지만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몸을 걱 정하시기 보다는 이제 어떻게 여정을 이어갈까를 걱정하셨다.
그렇게 한참을 통증과 싸우다가 자신도 모르게 깜박 잠드셨던 어머니는 그 잠깐 동안 차를 타고 이동하는 꿈을 꾸셨다. 잠에서 깨신 어머니는 그 꿈을 생각하시며 이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차를 얻어 타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셨다. 중국말도 못하고 어떤 사람과 마주칠지도 모르지만 도박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북 조선에서 열심히 공부했던 나의 한자 실력이 빛을 발했다.
나는 ‘길림(吉林)’이라고 한자로 종이에 썼고, 우리는 그 종이를 들고 걸어서 강변도로까지 나왔다.
처음에는 용기가 나지 않아 손도 내밀지 못하고 몇 대의 차를 그냥 보냈다.
그러다가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용기를 내어 손을 흔들었고, 지나가던 용달차 하나가 우리 앞에 멈추어 섰다. 나는 길림이라는 한자가 적힌 종이를 보여주며 시계와 기차를 그려서 보여주었다. 그 아저씨는 우리의 모습을 보더니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태워 주었다. 아저씨 눈에는 우리가 매우 의심스럽고 위험해 보였을 것이다. 그 당시에도 중국으로 넘어 오는 북한사람들을 숨겨주거나 도와주면 많은 벌금 등 처벌과 불이익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지만 우리 남매들의 모습이 안쓰럽고 딱하셨는지 더 이상 캐묻지 않으시고 운전만 하셨다. 그 와중에 우리는 졸지도 않고 창밖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압록강 과 북한이 계속 보였다. 당장이라도 북한 군인들이 넘어와 우리를 데리고 갈 것 같아 자꾸 신경이 쓰였고 불안했다. 한참을 달리자 마을들이 보였고 우리 눈앞에는 중국 변방대 군인들이 검열하는 초소가 보였다.
검문소에서 모든 차량을 검열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아저씨는 예상을 하셨는지 차를 검문소에서 멀찍이 세우시고는 우리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손짓 하셨다. 그리고는 차에서 내리시며 차 문을 잠그셨다. 우리 마음은 차를 탄 것에 대한 후회로 가득해졌다. 영락없이 ‘독 안에 든 쥐’ 신세 가 된 우리는 가슴을 졸이며 아저씨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한참을 군인들과 이 야기를 하셨고, 다시 차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우리의 걱정과는 달리 특별한 검열 없이 그곳 을 통과할 수 있었다.
검문소를 통과할 때 아저씨의 표정은 다소 비장하셔서 우리는 아무 말 못하고 숨죽이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참을 달리고 달려 림강(臨江)이라 는 도시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중국 도시의 광경에 동생들은 “우와, 우와!”를 연발했고, 길 바닥에 버려진 음식물 쓰레기와 멀쩡해 보이는 귤, 만두가 굴러다니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며 종알거렸다. 하지만 나는 불안하기만 한 것이 도무지 역이 보이지가 않았다. 언어가 통하지도 않으니 물어볼 수도 없었고, 또 고마운 아저씨를 의심하면 안 될 거 같아 내면에 갈등이 있었다. 그러던 중 저편 멀리 뾰족하고 높은 시계탑이 보였다. 그제야 우리가 제대로 잘 도착 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아저씨는 기차역 옆 골목에 차를 세우시고 우리를 내려주셨다. 그리고 나와 동생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가라고 손짓하셨다. 떠나는 아저씨에게 우리는 고마움을 다 표현하지도 못한 체 배꼽인사만 여러차례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림강시 기차역 앞에서 우리는 난생 처음 도착 한 중국의 도시 모습에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그러다가 역 근처에 “림강조선족식당” 이라는 간판을 보았다.
국경지역 도시나 마을에는 조선말을 하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고 간판도 한글로 적힌 것이 많지만 그런 사실을 잘 몰랐던 나는 조선말 간판이 신기했고, 오랜만에 보는 한글이 반갑기도 하고, 또 식사 를 할 수 있다는 기쁨에 그 식당으로 뛰어 들어 갔다. 다른 가족들도 약속이나 한 듯이 그 식당을 향했다. 우리는 우리의 몰골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하게 식당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몇날 며칠 제대로 먹지 못해 허기진 우리는 식당 안에 모든 것이 신기했고, 나도 모르게 입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그 식당의 주인아 주머니는 한참을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시더 니 “어머나! 세상에! 저기… 북조선에서 오셨지요?”라고 물었다. 눈에 보이는 꼬락서니나 말하는 투나 우리가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만 너무 놀란 우리 가족 은 동시에 "아니에요!"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아주머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 아니, 딱 봐도 그런데... 빨리 이리 오시오. 지금 여기 이러고 있으면 안되오." 라며 우리를 식당 뒤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는 방 하나를 열어주 셨다. 우리는 주인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그 여관방에 들어갔다.
방에서 엄마의 발을 살펴 본 아주머니는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며 놀라셨다. 어머니께서는 돈을 좀 줄 테니 진통제를 구해줄 수 있는지 부탁하셨고 아주머니는 알겠다며 문을 잠그고 나가셨다. 한시름 놓은 우리 는 따뜻한 방안에서 꾸벅꾸벅 잠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머니께서 돌아오셨다. 아주머니는 어머니에게 쓸 진통제와 함께 허기진 우리를 위해 죽을 쒀서 상을 차려주셨다. 우리는 죽으로 모처럼 제대로 요기를 했다.
진통제를 드시고 쉬면서 어머니 발의 통증도 점차 가라앉았다. 우리는 오랜만에 깨끗하게 씻고 묶은 때를 벗겨냈다. 입고 있던 옷도 아주 해어지고 엉망이었는데 아주머니께서 옷을 갈아입으라고 여러 크기의 옷을 한 보따리를 가지고 오셨다. 한 숨 돌리신 어머니께서는 우리의 목적지인 길림시를 가기 위해 아주머니께 도움을 요청했 다. 아주머니께서는 무슨 일로 길림시에 가려 고 하느냐고 물어보셨는데, 어머니께서는 거기 친척이 있어서 도움을 받으려 한다고 얼버무리 셨다.
그러고는 다시금 도움을 요청하며 가지고 계시던 돈 얼마와 작은 금덩어리 하나를 아주머니께 드렸다. 아주머니께서는 바로 기차표를 구매해주셨다. 다행히 빠른 기차표가 있었지만 이곳은 시골이라 길림까지 한 번에 갈 수 없었다. 기차의 종점은 통화시(通化市)였는데 그곳에 내리면 다시 한 번 기차를 타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아주머니의 도움으 로 우리는 무리없이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처음 경험하는 중국의 기차는 모든 것이 신기 했다.
특히 승객들이 열차 안에서 삶은 차단(茶蛋) -중국에서 간식으로 먹는 차단(왼쪽)과 해바라기 씨-을 먹고 해바라기씨를 엄청 빠른 속도로 까서 먹는 모습과 그 소리가 이상하게 재미 있었다. 그렇게 쉼 없이 사람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덧 종점에 다다랐다. 이제 다시 기차표를 사야했는데 중국말을 모르니 어떻게 표를 구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어 떻게 하면 기차표를 살 수 있을까 하면서 역의 의자에 앉아있는데 의자 뒤편에서 조선말이 들렸다. “하... 이제 들켰어. 어떡하지?” “그러니까 내가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나. 당신 안까이 (아내)한테 들키지 않게.” “그래서 우리 이제 어디로 가야해? 이 동네에서는 이제 더는 못 산다.” 조용히 듣고 있으려니 아무래도 내연관 계의 커플인 것 같았다.
그 사람들 사정은 알 바 아니었지만 조선말 하는 사람을 찾은 것이다. 우리는 그 커플에게 기차표를 구매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면서 돈을 쥐어주었다. 그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더니 흔쾌히 표를 대신 구매해 주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를 도와주기만 하지 않고, 둘이서 숙덕숙덕 하더니 자기들도 길림시로 가야 겠다며 같이 기차표를 구매했다. 그렇게 같이 기차를 타고 가면서 그들은 내내 우리에게 길림에는 왜 가는지, 친척들이 거기 사는 것이 맞는지, 친척이 연락은 되는지 등을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가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얘기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친척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면 크게 한턱 낼 것이니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친척을 찾지 못하게 되면 산둥에 가서 일할 수 있다, 그 곳에는 여성분들이 일하기 좋은 일자리가 많다’며 우리를 꼬드겼다.
이미 기차역에서 자신들의 행로를 고민하던 둘의 대화를 뒤에서 들었던 우리는 이 사람들이 단순히 친절을 베푸 는 것이 아닌 다른 꿍꿍이속이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우리 가족을 어디론가 팔아먹으려는 심산일 것이다. 도움을 받았고 우리 신분이 불안하다보니 겉으로는 티를 내지 못했지만 우리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떼어낼까 고민하였다.
그렇게 기차를 타고 길림시에 도착했다. 드디어 그렇게 바라던 목적지에 한 발 앞까지 온 것 이다. 우리 가족과 그 커플은 택시를 잡아탔다. 우리는 친척이 대한민국 영사관 근처에 있다고 둘러대었기 때문에 그 커플은 택시기사에게 영사관으로 가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택시 기사가 도대체 영사관을 찾질 못했다. 그렇게 도시를 거의 두 바퀴를 돌았지만 헛수고였다. 어머니는 왜 영사관이 없는지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해서 안절부절 못하셨다. 이 와중에 그 이상한 커플은 우리에게 친척집에 가기 어려워졌으니 자신들을 따라오라고 계속 강하게 이야기하여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할 수 없이 택시에서 내린 우리는, 우리를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려는 그 커플에게 화장실만 잠깐 다녀오자며 근처에 조선말로 ‘연희조선족식당’이라고 적힌 간판을 단 식당을 가리켰다. 빨리 볼일 보고 오라는 말에 우리 가족은 그 식당에 들어갔고, 들어가자마자 주인 아주머니에게 도와달라고 애원을 했다.
주인아주머니는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우리를 가게 안쪽 방에 데리고 가서는 조용히 있으라고 하시고 문을 잠그셨다. 잠시 후, 우리가 도통 나오지 않자 그 남녀 커플이 가게로 들어왔다. 아주머니와 그 커플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커플은 아주머니를 추궁하며 우리의 행방을 찾으려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우리가 왔다가 볼일 보고 뒷문으로 나갔다고 둘러대셨다.
그 말을 믿지 못하고 그 커플이 아주머니를 수상쩍게 여기며 추궁하자 아주머니는 가게 장사하는데 방해하지 말라며 큰소리 치셨고 결국 그 커플은 가게에서 쫓겨났다. 이런 상황을 소리로 듣고 있던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점심시간이 지나고 손님이 빠진 이후, 아주머니는 우리가 있는 방의 문을 여셨다. 그리고는 우리를 위해 난생 처음보는 음식들로 한상 부러지게 차려 주셨다.
그동안 제대로 음식조차 먹지 못했던 우리를 위해 섬겨주신 것이다.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진수성찬에 눈이 뒤집혀서 허겁지겁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대부분의 음식에는 향신료가 첨가되어 자극적이었고 기름진 음식들로 한 가득이었지만 너무나 감사하고 눈물이 났다.
그렇지만 결국 얼마 먹지도 못하고 포만감과 느끼함에 수저를 내려와야 했고, 오랜 기간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갑자기 과식을 하는 바람에 우리 가족 모두 배탈이 나고 말았다. 그렇게 차례로 화장실로 들락날락하는 것을 본 아주머니께서는 자신이 차려준 음식 때문에 우리가 고생하게 되었다고 속상해 하셨다.
우리를 도와주신 식당 주인아주머니를 우리는 ‘은명이 이모’라고 불렀다. 이모는 식당일을 마치시고도 주로 식당 뒤편 방에서 쉬셨고 본인 집에는 잘 들어가지 못하셨다. 날이 어두워 오고, 식구는 많고, 당장 지낼 곳은 없었던 우리를 위해 이모는 선뜻 자신의 집을 내어주셨다. 건강상태도 좋지 못했고 몰골도 말이 아니었던 우리에게 은명이 이모의 친절은 정말 큰 도 움이 되었다.
그렇게 어머니와 동생들은 이모가 마련해준 집에 머물렀고, 나는 식당에서 이모 일을 도와드리며 이모와 함께 지냈다. 이모는 특별히 나를 예뻐해 주셨다. 나는 아직도 그 사랑을 잊지 못한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이모와 나는 저녁도 먹고 쉬면서 이모가 하시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 리고 낮에 식당이 붐비는 바쁜 시간이면 나도 이모를 도와 음식 서빙도 하고 갑자기 필요해진 식자재나 물품들을 인근 가게에서 사오기도 했다.
식사 시간이 지나 가게가 한적해지면 일부러 맛있는 음식을 요리해서 나에게 먹이기도 하셨다. 이모는 단골손님들이나 이웃에게 나를 시골에서 올라온 조카라고 소개했다. 이모와 나는 정말 가까운 가족과 같았다. 이모는 젊은 시절부터 고생을 많이 하셨고, 또 남편과는 이혼하고 딸을 홀로 키우셨다. 혼자 돈을 벌어서 고등학생 딸을 앞으로 대학까지 뒷바라지해야 했기에, 이모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셨다. 하루 종일 그렇게 일을 하신 이모는 저녁이 되면 꼭 어딘가가 아파와 잠을 이 루지 못하곤 하셨다. 나는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이모의 몸을 마사 지 해 드렸고 이모에게 힘내시라고 긍정적인 말도 해 드렸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주일이 되면 예배 드리러 가시는 이모의 모습이다. 처음에는 이모가 어떤 활동이나 모임에 나가시는지 잘 몰랐다. 그래서 하루는 이모에게 예배는 어디에서 하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이모는 교회에 가신다고 하셨다. 당시 나는 교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이모가 교회에 가시는 주일에는 밖에도 나가지 않고 혼자 방에 있으면서 이모가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는데 너무나 지루하고 심심했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린 이모는, 교회에 서 돌아오시면 나에게 성경말씀을 읽어주셨고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속으 로 ‘이모가 많이 외로우셔서 어딘가에 기댈 곳 이 필요하구나.
내가 이모를 더 이해하고 도와 드려야겠구나…'하고 생각했다. 밤에 일을 마치고 이부자리를 펴 놓으면 이모는 꼭 성경책 을 꺼내 묵상 하셨고, 흥얼거리며 찬송가를 부르셨고,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 하셨다. 그런 이모를 보고 있으면 하루의 고단함이 보이지 않 고 참 행복해 보였기에 나는 늘 마음속으로 이 모를 응원했다.
이모가 전문적으로 말씀을 가르쳐주거나 적 극적인 전도를 하셨던 것은 아니었다. 또 같이 교회를 다니거나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모의 신앙은 나에게도 소중하게 다가왔다. 이모는 사치스러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늘 하고 다니는 자그마한 십자가 목걸이가 늘 있었다. 나는 커서 꼭 이모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 다.
하루는 어떤 일로 힘들어하는 이모에게 힘이 되고 싶어서 “내가 어른이 되면 이모한테 꼭 순금으로 된 십자가 목걸이를 사드릴께요” 라고 씩씩하게 말했다. 이제 막 10대 초반 소녀인 나의 당돌한 이야기를 들으신 이모는 웃으시며 “너 밖에 없다” 하시고 나를 꼭 앉아주셨다.
그러면 나는 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모 진짜예요! 꼭 사드릴 거예요!” 라고 말하곤 했 다. 그렇게 밤마다 웃고 울면서 이모와 함께 지 냈던 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힘든 여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예비해주셨다는 사실이 신비롭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우연이겠지만, 나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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