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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쓰라!
사도행전 2: 37~42
예배일자 : 2024-02-11.
[목회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한 주일 예배자 되게 하심 감사드립니다.
하루의 삶도 장담할 수 없이 우리 모두 연약하지만 세상 삶에 승리하게 하심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지금 마음이 힘든 이들이 있습니다. 몸이 아픈 이들도 있습니다. 위로와 회복을 주옵소서.
세상이 줄 수 없고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을 원합니다.
하나님 주시는 평강으로 세상을 이기는 하늘 백성 되게 하옵소서.
군대, 객지, 외국으로 흩어져 있는 성도들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 있든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도록 도와주옵소서.
병든 몸을 치료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여 주옵시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하옵소서.
나이 들고 힘들어 요양병원/요양원에 계신 분들도 많습니다.
순간 순간의 삶이 평안이 되도록 지켜 주옵소서.
세계 곳곳에서 수고와 땀을 흘리시는 목회자와 선교사들, 성도들을 지켜 주옵시고.
각처에서 단을 쌓고 예배하는 이들도 평안케 하여 주옵소서.
부족한 종이 말씀 전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능력 있게 전하도록 붙드시고 은혜만 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2024년 설 잘 보내셨나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터넷에서 회자되는, 어떤 아이의 글입니다.
우리 엄마는 참 이상하다.
나를 야단칠 때 내가 고개를 떨구면 ‘엄마 제대로 안 봐?’라고 목소리를 높이신다.
그래서 고개를 들고 눈을 바라보면 ‘뭘 잘했다고 똑바로 봐?’하신다.
한참 혼나고 있을 때 내가 아무 대답 안 하면 ‘왜 대답을 안 해!’ 소리치신다.
그래서 대답하면 ‘뭘 잘했다고 말대꾸야!’하신다.
한참 야단맞다 보면 잘못했다는 생각도 들어서 내가 울면 ‘뭘 잘했다고 울어!’라고 하신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웃으면 ‘지금 웃음이 나와?’라면서 나를 더 혼내신다. 도대체 어쩌라는 건가!
우리도 살다 보면 뭘 어찌해야 하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답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2월에도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답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고 승리하는 2월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5) 이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라고 답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이 말씀은 ‘교회’라는 단어가 성경에 처음 기록된 구절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 어떤 곳인지 …???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연구하는 신학자들도 많고 목회자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마다 각기 자기 판단에 따라 정의하지만 저마다 다르게 표현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 예수 믿는 성도들도 모두 교회를 똑같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역할 / 교회와 성도가 가져야 할 올바른 모습을 사도행전에 소개된
처음 교회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후에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
또 유대인은 아니지만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 2:1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베드로는 “어찌할꼬”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베드로는 세 가지를 권면했습니다.
회개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라. 성령의 선물을 받아라.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경은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했습니다. (행 2:41)
이렇게 초대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본문 42절은 초대교회가 초대교회 성도들이 무엇에 힘을 썼는지 … 알려줍니다.
42절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그때 세례받고 ‘교인’이 된 사람들은 먼저 “사도의 가르침을”받았고 가르침을 받은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교회도 교회는 가르치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배우는 교회(Learning Church)’가 되어야 합니다.
배운다는 것은 몰랐던 지식을 받아들이고 필요한 경험을 늘리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 성도라 불리는 이들은 성경의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힘을/경험을 늘려가야 합니다.
상황과 형편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즉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 가지 일에, 혹은 여러 일이라 해도 많이 연구하고, 많이 배우고, 많이 해보면
‘전문가(specialist)’라는 타이틀이 붙습니다.
그렇게 전문가가 된 사람도 전문가로 계속 남아 있기 위해서는 계속 배워야 합니다.
한번 공부했고 전문가라고 하는 평판을 받았다 할지라도 계속 배우지 않으면 도태되고 맙니다.
새로운 흐름, 새로운 기술, 새로운 지식을 외면하고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 고집하면 전문가로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만 고집하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전문가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생명체의 염색체 끝부분에는 ‘텔로미어(telomere)’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텔로미어는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길이가 짧아지고 짧아질수록 노화가 진행됩니다.
결국 텔로미어가 길면 오래 살 가능성이 높아지고 텔로미어가 짧아지면 죽게 됩니다.
그런데 캐나다와 미국 동부 해안가에서 잡히는 바닷가재(Lobster) 중 한 종(種)인
‘미국 랍스터’의 몸에서는 ‘텔로머라아제(telomerase)’라는 물질이 분비되어 텔로미어의 파괴를 막습니다.
그래서‘미국 랍스터’는 140년, 150년을 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미국 랍스터’도 영원히 살지는 못하는데
그 이유는, 성장하면서 껍질을 벗는‘탈피’ 과정을 겪는데
100살 정도 된 랍스터는 자기 껍질이 너무 단단해서 껍질을 벗지 못하고, 자기 껍질에 끼어 죽게 됩니다.
< 2017. 10. 31. 문화일보 22면 “박태균의 푸드 X파일 : 장수 물질 함유한 랍스터” 기사 참조. >
탈피 과정을 못해서 죽는 거지 텔로미어가 짧아져서 죽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경험은 우리에게 새로운 껍질이 됩니다.
그런데‘다 아는 거야’, ‘다 배운 거야’, ‘해본 거야’‘지금으로도 충분해’…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단단한 껍질 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변화되지 못하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하게 되어
‘옛날’, ‘라떼’타령이나 하게 됩니다.
혹시, 성경을 잘 아나요? 많이 읽으셨나요? 많이 배웠나요?
오랫동안 예수 믿어서 10년, 20년, 30년 예수 믿어서 설교 많이 들으셨습니까?
목사 되고, 전도사 되고, 장로, 권사가 되셨습니까?
그래서 주일날 교회에 와서 주보를 보고, 성경 본문이 어딘지 보고
‘이런 내용의 설교를 하겠구나’ 감이 왔나요?
무슨 설교를 들어도 다 들어본 것 같은 말씀인가요?
그런 분들이 문제입니다.
오래 믿었다고 … 많이 들었다고 … 많이 안다고 …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분은 변화되기 어렵다는 겁니다.
‘미국의 조지 바나(George Barna, 1955~)’라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변하지 않는 하나님 말씀을 / 변할 수 없는 복음을 변하는 세상과 다양하게 변하는 세대에 전할 수 있을까?”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오늘도 / 지금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께서 새로운 은혜, 새로운 감동을 주십니다. (요 14:26)
하나님 마음에 합한 성도, 청결한 하늘 백성으로 살려면 배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 받기에 힘썼던 초대교회처럼 말씀을 통해 배우고, 목회자들의 가르침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배운 것을 가정에서 식구들에게 / 친구들에게 / 이웃에게 /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혹은 복음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통해 세례를 받아 교회의 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는 일에 힘썼습니다. 은혜받은 성도는 서로 교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제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떡(빵)을 … 먹을 것을 준비하고 나누는 수고와 희생이 필요합니다.
살다 보면 나하고 맞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나가면 그 사람과 사귈 일도 없고 가까이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나와서 함께 신앙 생활하기 때문에 만나야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만나려면 나를 포기해야 됩니다. 나를 죽여야 됩니다.
이해해 주고, 받아들이고, 참아 주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 누굴까 하고 찾아봤더니
누구는 이래서 틀렸고, 또 누구는 저래서 틀렸고 하다보니 세상에 한 명이 남았답니다.
마음에 안드는 사람 제치면 세상에 자기만 남습니다. 남은 사람이 바로 자기 한 사람 입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다 좋아할 것 같나요?
‘그 사람 때문에 상처받아서 교회에 안 가고 싶어요.’
‘그 사람 때문에 상처받아서 나 교사 안 해요.’
‘나 그 사람 때문에 상처받아서 찬양대 안해요.’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은 없을까요?
저를 보세요. 제가 누구에게 상처 줄 거 같이 생겼나요? 웃는 분들 수상한 겁니다.
근데 저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사람 많습니다.
인사 하는데 안 받아줬다고. 안경도 끼고 있지만 사람을 잘 몰라요.
안면 인식 장애 정도는 아닌데 기억을 잘 못합니다.
밥이라도 열 번쯤 사 주고 마주 보면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잘 안 들립니다. 그런데 누가 뭐 얘기했는데 제가 못 들은 척했다는 겁니다.
못 들은 척한 게 아니라 못 들은 겁니다. 어쨌든 삐죽거리고 상처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잘하는 말이 ‘죄송합니다. 못 들었습니다. 기억 못해서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 상처 준 그 사람 때문에 하던 일을 그만둔다면 이 세상에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삶의 속도가 빨라지고, 여유가 적어질수록 사람들은 혼자 있기를 좋아합니다.
점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혼자 즐기고, 혼자 먹고, 혼자 여행하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 신앙은 혼자가 아닙니다. 1인칭 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이 홀로 계신다면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셔서 우리를 살게 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기에 우리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 대신 죄 값을 치르시고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늘나라 백성이 되게 해 주셨으니
길이 되어 주셨고, 진리요 생명이 되시니 예수님의 죽음이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능력으로 천국 백성 된 우리는 그 복음의 능력을 혼자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교제하며 나누어야 합니다. 나누기 위해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엔 이런저런 아픔이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은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교회 안에서도’ 교제를 힘들어하거나 불편하게 여기고 싫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람들과 만나면 예전에 경험했던 아픔이 반복될까봐 … 혹은 자신의 약함이 밝혀질까봐 염려합니다.
교회학교 교사를 하다 보면 예전에 교사였던 그 교회에서 겪었던
그런 일을 또 겪을까 봐 이젠 안 하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게 하나님의 뜻일까요?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가면 의사를 만나야 하고 어디가 아픈지 자세히 설명해야 합니다.
숨기면 치료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픈 것 설명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 목이 아픈 증상을 낫게 하려고 병원에 갔다면 입을 벌려 목구멍을 보여줘야 합니다.
- 배가 아파 병원에 갔다면 의사가 배에 청진기 대고, 필요한 검사를 하도록 옷을 벗으라면 벗고
- 수치스러운 것도 보여주어야 합니다. 주사 맞으려면 간호사에게 엉덩이를 보여줘야 합니다.
- 의사가 수술해야 한다고 하면 목숨을 맡기기도 해야 합니다.
먹는 것, 보는 것, 듣는 것도 내 마음에 안들어도 (이해되지 않아도)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의사 말을 들어야 치료를 받습니다.
우리 인생의 아픔도 그렇습니다. 상처가 있으십니까?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러내야 합니다. 사람에게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내 생각, 내 경험, 내 판단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가만히 혼자서 잘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인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자기만의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울려 살라고 하셨습니다. 보기 싫은 그 인간도 천국에 가면 만나야 합니다.
가만히 혼자 있다고 잘되는 게 아닙니다.
콩자루 속에 들어 있는 콩은 탱글탱글하고 이쁘지요.
그러나 자루에 구멍이 나서 콩이 쏟아지면 콩 자루에 들어 있던 콩들이 다 흩어집니다.
콩자루 콩이 하나가 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을 으깨서 앞에 있는 콩, 뒤에 있는 콩 옆에 있는 콩, 위 아래 콩하고 붙으면 됩니다.
냄새가 날지 모르지만 그 매주 덩어리는 딴딴하게 됩니다.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 하면서도 자신은 으깨지지 않으려고 하고
다른 사람만 으깨지라고 하니 그 똘똘하고 반질반질한 콩으로 혼자 사는 겁니다.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떡을 떼며 교제하기에 힘썼던 초대교회는 기도하는 데에도 힘을 썼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기도했다는 말은 홀로 골방에 앉아 개인 기도를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개인기도도 해야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감사합니다.’ 식사 전에 기도하고 핸들을 잡고 기도하고
중요한 일을 할 때 기도하는 거 중요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기도하는 것은 모여서 기도하고, 모여서 예배했다는 뜻입니다.
처음 성도들은 구원받은 기쁨을 예배로 표현했고, 모여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사도행전 2장 46절에도 이런 초대교회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하나님을 찬미하며 …” (행 2:46~47)
좀 더 쉽게 번역한 ‘메시지 성경’은 같은 말씀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서 …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그들의 하루 일과였다. …” (행 2:46~47, 메시지 성경)
정해진 시간에 교회에 모여 예배에 참여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일을 다 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틈나는 대로 기도하는 생활을 하고 예배한 후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
하나님과 동행하며 어디에 가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의 향내를 풍기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래전에 한 집회에 참석했을 때(2000암스테르담 빌리그래함 집회)‘기도의 자세’에 대해 강의를 들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들의 기도 자세는 두 손을 쭉 뻗어 가슴과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황제의 존재를 염두에 두다 보니 황제를 알현하듯,
하나님께도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사실 기도의 자세에 정답은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도의 모습도 다양합니다.
-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 솔로몬은 무릎을 꿇고, 손을 펴고 기도했습니다.(왕상 8:54)
-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했습니다.(왕하 20:2)
중요한 것은 … 기도가 일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배우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배우면서 서로 교제했습니다. 교제만 하지도 않았습니다.
교제하러 모이면 기도하고 예배에 힘쓰며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 첨단과학 시대에도 많은 이단들이 활개 칩니다.
이단이 왜 이단입니까?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무엇 하나에는 열심이지만 열심인 그것 때문에 다른 무엇인가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 목회자의 권위, 목회자의 능력을 강조하면서 성도 간의 교제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 성경은 지독하게 강조하면서, 가족을 외면하게 합니다.
- 성도 간의 모임과 활동을 강조하면서, 예배와 목회자를 약화시키기도 합니다.
< 존 스토트, 『살아 있는 교회』 (서울 : IVP, 2018), p.39. 참조. >
성령이 함께하는 교회 … 성령 받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균형이 잡혀야 합니다.
균형 있는 신앙생활에 힘썼던 초대 교회는 이런 유익을 누렸습니다.
“…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기독교 역사에, 지금도 교회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도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힘써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성경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
- 목회자가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 들으시고, 배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 먹고 살기에 바쁜 세상살이지만 … 사람들과 관계 맺고 살려면 스트레스가 생기지만 …
그래도 예수님 이름으로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하며(골 3:17) 교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처음 신앙을 가졌던 성도들은 그렇게 신앙을 지켰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 나 때문에, 나로 인해 구원받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 가정에서 나 때문에 예수 믿는 식구들이 있어야 합니다.
- 일터에서 나를 보며 교회와 신앙에 관심 가지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 이웃에게 예수 믿는 사람, 교회 다니는 사람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청결한 삶을 살자며 2024년을 시작했습니다.
몸도 청결히 하고, 주변도 청결히 해야 하지만 … 가장 중요한 청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 받아 / 죄 씻음받아 온몸과 영혼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배움에, 교제에, 모여 기도하기에, 예배에 힘써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는
하늘 백성으로 삶에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배움에, 교제에, 기도하기에, 예배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에 살면서 얻은 소득을 구별하여 드립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등 여러 가지 제목으로 예물을 드립니다.
성도들의 정성을 받으시고 저들의 가정과 일터를 지켜주옵소서.
이 힘든 세상에 살면서 물질 때문에 죄와 타협하지 않게 하시고
일용할 양식 때문에 눈물 흘리는 성도들 없도록 지켜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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