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꾼 꿈 / 양선례
일어나니 남편은 새벽 수영을 가고 없었다. 문자를 보냈다. 9시 반에 떡집에서 미리 주문해 둔 호박 설기와 꿀떡, 10시에 김밥 70줄을 찾아오라는 내용이다. 부랴부랴 씻고 딸아이가 운영하는 카페로 갔다. 어젯밤 집에 온 아들과 예비 며느리까지 동원하여 감을 깎고 있으니 단짝 친구가 온다. 샤인 머스캣과 메론을 씻었다. 형님 집에서 빌려온 음식을 담아 둘 큰 접시와 개개인이 들고 가서 먹을 때 쓸 작은 접시 50여 개도 닦았다. 그 사이 광주 여동생도 도착하여 감 깎는데 손을 보탠다. 둘째 형님이 산에서 직접 주운 밤과 커다란 동부를 넣어 떡집에서 찐 찰밥, 온갖 약초를 넣어 밤새 끓인 물을 들고 온다. 찰밥은 보온밥통에, 약초 물을 주전자에 옮겨 담는다.
시계를 보니 행사 시작까지 30분이 채 남지 않았다. 서둘러 미리 찜해 둔 옷으로 갈아입었다. 2년 전 새 학교에 부임하면서 입으려고 산 옷이다. 새빨간 원피스로 소매는 가오리 모양이고, 치마 끝이 양쪽으로 퍼져서 인어공주의 꼬리를 떠올리게 한다. 그 모양이 맘에 들었는데 입어 보니 옷이 살짝 작았다. 몸에 딱 붙어서 통통한 중부 지방이 그대로 드러났다. 마음에 들어 웃돈을 주고 옆선을 늘이는 작업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개학일에는 어찌나 춥던지 입지도 못하고 지금껏 옷장만 지키고 있었다. 며칠 전에 오랜만에 걸치니 그사이 살이 좀 빠졌는지 잘 맞았다. 붉은 원피스는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들 멋지다고 한마디씩 하는데 머리가 거슬린다. 친구에게 총 지휘를 부탁하고 급하게 집 부근 단골 미용실로 향했다. 오늘은 내가 주인공이니 여기까지는 하자고 마음먹는다. 손님이 없어서 다행이다. 한껏 멋을 부린 걸 보고는 오늘 무슨 날이냐고 묻는다. 그냥 좋은 날이라도 대답하며 머리 손질을 부탁했다. 10분 만에 끝낸 것치고는 꽤 마음에 든다. 역시 전문가다.
카페로 돌아오니 정각 11시가 다 되었다. 떡과 김밥, 딸아이가 오븐에 구운 소금빵과 고구마, 찰밥과 김, 과일 세 가지, 내가 좋아하여 준비한 껍질 벗긴 생밤이 보기 좋게 차려져 있었다. 뷔페에 비할 건 아니지만 점심 한 끼를 때우기에 그리 부족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늘은 첫 수필집 <어느 구름에 비 들었을까> 출판 기념회 날이다. 지역의 문인협회에서 오래 활동했기에 몇 번 행사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뷔페에서 거하게 저녁을 먹으면서 하기도 하고, 카페에서 간단한 다과로 치르는 이도 있었다. 정치인의 그것처럼 후원금을 걷거나 세를 과시하는 것도 아니기에 격식을 따지지 않고 자유롭게 하고 싶었다. 오래 나를 지켜보고 응원해 준 사람을 모시고 한턱을 내고 싶은 마음도 컸다. 정오부터 문을 여는 딸아이의 영업에 피해를 적게 주려고 시간도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로만 정했다. 섹소폰 연주자도 불렀다. 아마추어이지만 20년이나 음악을 해 왔기에 실력은 수준급인 지인이었다. 별도의 사회자도 없이 그와 내가 분위기 봐 가며 진행하기로 했다.
시간이 되자, 자리가 차기 시작했다. 딸아이가 미리 준비하여 붙인 현수막과 지인이 보내준 꽃바구니가 잔치 분위기를 높였다. 나와 일주일마다 만나 밥과 차를 나누는 언니들도 왔다. 전임지에서 함께 근무한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동료 직원들도 여섯 명이나 왔다. 우리 학교 교직원도 여럿 보였다. 문인협회 회원이면서 동인 활동을 함께하는 사람들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남편의 회사 동료와 초등학교 친구 몇도 찾아와서 뜻밖이었다. 아들과 예비 며느리는 자리마다 다니면서 차를 주문받았다. 음료를 만드는 큰딸과 아르바이트생 둘의 손놀림이 부산했다. 섹소폰 연주자이면서 오늘의 사회자인 지인은 능숙하게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갑자기 사회자가 나를 부른다. 가장 마음에 드는 글을 직접 낭독하란다. 사전에 말을 맞춘 게 아니라서 당혹스럽다. 뭘 읽을까 고민하다 교직 이십 년을 맞이한 소회를 썼던 글을 읽었다. 그사이 잘 차려입은 세 분의 시누이도 오셔서 한가운데 자리를 잡는다. 정 많은 둘째 시누이는 초대장을 보냈을 때부터 ‘가문의 영광’이라며 추켜세웠다. 남편과 큰형님도 사회자의 부름으로 앞에 나가서 인사한다. 자기가 잘했더라면 지금쯤 대하소설을 쓰고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는 남편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친구와 전임지 동료가 연주에 맞춰 노래도 한 곡씩 불렀다. 가을에 잘 어울리는 섹소폰 연주가 이어지는데 사람들은 먹느라 소란스럽다. 그게 나는 또 미안하다. 사람이 들고 나고, 그때마다 자리 찾아가며 인사를 나누었다.
두 시 반이 되자, 손님이 거의 빠졌다. 딸아이는 약속된 시간이 지났는데 음식을 언제 치울 거냐고 야단이다. 그런데도 뒤늦게 발동이 걸린 섹소폰 연주자는 이제 힘드니 그만하라는 만류에도 멈추지를 않는다. 일반 손님이 들어오니 아예 그들의 신청곡까지 받는다. 그렇게 이어진 콘서트(?)는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알고 보니 코로나 이후 3년 만에 처음 무대에 선 거라서 기분이 좋았단다. 호응해 주는 관객이 있어서 더 흥이 났단다.
책을 펴내면 언젠가 한 번은 하고 싶었다. 이번에 제대로 소원 풀이했다. 그런데 두 번은 안 할 거다. 의도와는 다르게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해서다.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았다. 무엇보다 딸아이에게 많이 미안했다. 정당한 값을 치르기는 했으나, 애당초 큰딸이 카페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묘수를 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책을 묶고도 글이 많이 남았다. 비슷한 주제가 여러 편이라서, 지금 근무하는 우리 학교 아이의 이야기라서, 쪽수가 넘쳐서 등의 이유로 뺀 글이 많았다. 머잖아 두 번째 수필집을 펴낼 것이다. 한 번 가본 길은 조금 더 쉽게 찾아갈 수 있으리라. 오래 꾼 꿈을 드디어 이뤘다.
첫댓글 오래 꾼 꿈이 대성황리에 끝나서 다행입니다. 딱딱하지 않은 사회자 덕분에 음악이 흐르는기념회가 됐어요. 분위기도 좋았구요. 두 번째 수필집도 기대합니다.
'대성황리'라는 말에 빵 터져서 웃었습니다.
끝나고 나니 엄청 피곤하더라고요.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 모양입니다.
이제 소원 풀이 했으니 편하게 놀려고요. 하하.
참석을 못해 미안하고 궁금했는데 멋지게 잘 해냈군요.
참 잘했어요.
그래도 언니 안 오셔서 서운했어요.
이유가 납득이 되었지만요. 호호.
응원 고맙습니다.
그날 느낌이 옛날 시골 잔칫집 분위기 같았습니다. 장소만 마당에서 카페로 옮겨진 잔칫집이어서 좋았습니다. 두 번째 수필집도 기대가 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힘나요.
출판 기념회 현장에 있는 듯 생동감이 드네요. 저는 강진 출판 기념회에서 저자 서명이 담긴 책 한 권 주세요.
네. 당연히 그래야지요.
사인해서 보내드릴 건데 주소를 주지 않으셔서 못 보냈습니다.
이제 황 선생님 차롑니다.
소원도 풀었고, 두 번째 책도 준비하시고 기억에 남는 2022년이 되겠네요.
네. 올해는 보람있는 일이 많았네요.
응원 고맙습니다.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바쁘신데 죄송해요. 책이 안옵니다.
어? 그렇군요. 하도 여기저기 보냈더니 일찍 주소를 보낸 선생님은 깜박한 모양입니다.
바로 지금 우체국으로 달려갑니다.
죄송죄송!
@이팝나무 고맙습니다.
아주 그냥 출판 기념회 분위기가 둥실 떴습니다. 오래 된 꿈이 현실이 됐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책 구입을 '교보문고'에서 하는데 <어느 구름에 비 들었을까>가 검색되지 않습니다.
네. 선생님!
아직 등록을 안했더라고요.
출판사에서 바쁜가 봅니다.
저한테 책 많아요.
그러니 주소만 보내주십시오.
낼 바로 보내렵니다.
참 잘 살아 오셨다는 게 글에서 느껴집니다. 축하 해 주신분들을 위해 감사의 마음을 진솔하게 담으셨네요. 오랜 꿈 이루신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늦은 축하를 보냅니다.
현장 분위기가 생생하게 느껴집니다.글이 정말 재밌어요. 고맙습니다.
하하.
차례대로 읽어가시는 모양이군요.
자랑이라면 6학기 동안 글쓰기 개근했답니다.
한번 깨뜨리면 자주 그럴 것 같아서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