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속았다 / 허숙희
오랜만에 언니 전화를 받았다. 다음 주 토요일이 형부와 결혼한 지 50년이 되는 날이라며 우리 6남매 부부 모두 모여 저녁밥이나 함께 먹자고 만날 시간과 예약한 식당 이름을 알려 주었다. 꼭 올라오라고 신신당부하였다. 부모님의 금혼식을 맞아 큰 조카가 외가 식구들을 위해 자리를 마련한 것 같다.
50년 전 언니 결혼식이 끝나고 축의금을 정리하시던 부모님께서 알 수 없는 이름이 있다며 의아해했다. 그때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결혼식장에서 내게 아는 척하지도 못하고 하객처럼 먼발치에서 서성이던 남편이었다. 잠깐 들른 줄만 알았는데 축의금까지 낼 줄은 몰랐다. 결혼 후에도 기념일은 잊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 주는 자상한 남편이다.
여상 졸업을 앞두고 시험만 보겠다던 나는 교육 대학에 합격하자 학비는 벌어서 해결한다며 집에서 나와 친구 자취방에 얹혀살며 대학 생활을 시작하였다. 입학식이 끝나고 전공과목이 심리학이라면 가난한 대학생의 처지를 잘 이해할 거라는 생각으로 ‘아동 발달 심리학 교수님(임형진 교수님)의 연구실’을 찾아가 형편을 이야기하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부탁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맹랑한 행동이었다. 마침내 교수님의 소개로 2년 동안 아무 걱정 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일을 하게 되었다. 부잣집 늦둥이인 초등학교 2학년을 가르치는 가정교사 자리였다. 고등학교 3학년인 큰아들 공부에 방해 될 수 있으니 아들과 마주치지 않게 다섯 시 이전에 끝내고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한 달 월급은 25,000원으로 꽤 많은 금액이었다. 4교시나 5교시 강의를 마치고 가서 진철이(당시 가르치던 아이 이름)를 가르치고 가정부가 진수성찬으로 차려 놓은 이른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서면 된다. 저녁밥까지 해결해 주니 정말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강의가 끝난 후에 내 생활이 없었다. 5교시 후에 전공으로 선택한 체육(배구)활동을 전혀 하지 못했다. 미팅도 해 본 적이 없다. 체육을 선택한 학생들은 모두 운동에 소질이 있었다. 아르바이트하는 데 시간을 빼기 쉬울 것 같아 선택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전문 코치에게 매일 지도받는 친구들의 실력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진철이를 가르치고 서둘러 학교 체육관에 도착하면 연습을 끝낸 후라서 체육관 뒷정리와 청소만 하고 오는 형편이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선택 교과인 체육 점수 과락을 면할 수 있었다.
나는 늘 배구부 출석부에 이름만 올려놓고 연습 시간에 볼 수 없는 학생이었다. 당연히 실력은 보잘것없어 늘 볼 보이(ball boy)였고 후보 선수였다. 대학교 2학년이 되자 코치가 바뀌었다. 지금의 남편이 대학 졸업 학년이 되자 우리 학교에 오게 된 것이다. 며칠이 지나도 연습 시간에 보이지 않는 내가 궁금해졌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 사연을 알게 되니 더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 날 내가 오도록 기다렸다고 했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눈매가 날카롭게 보였지만 경상도 사투리에 친절하고 나긋나긋한 음성이 싫지 않았다. 한참을 이것저것 말을 시키더니 배구 잘하고 싶은 생각 없느냐고 물었다. 형편 때문에 연습할 수 없어 볼 보이를 면치 못해 속상하다고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매일 한 시간씩 개별 지도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당연히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부터 성공적인 서브 방법과 토스와 서브 리시브의 기본자세, 전위에서 전략적인 공격 자세까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그렇지! 그렇지!", "아주! 잘했어!", "아! 바로 그거야!"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그가 너무 다정하게 느껴졌다. 간혹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대학 대표팀 선수답게 큰 키로 펄펄 나르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연습이 끝나면 체육관 뒷정리까지 같이 해 주고 늦게 끝나는 날에는 학교 앞 빵집에서 맛있는 것도 함께 먹곤 하였다. 이렇게 몇 달이 흘러 마침내 그해 가을 전국 교대 체전에 나는 등번호 6번으로 출전 선수가 되어 코트에 서게 되었다. 모두가 코치님 덕분이었다.
그랬던 코치님이 지금은 남편이 되어 내 곁에 늘 같이 있다. 오늘은 오전 내내 마당에서 감을 따고 있다. 일부러 내다 보지 않았다. 파킨슨이란 녀석과 싸우려면 기다란 장대에 달린 감 주머니에 집중하면서 감을 따는 것도 치료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컴퓨터를 마주 보고 앉아 일부러 바쁜 척하고 있었다. 점심 무렵에는 포장을 시작하는 것 같았다. 부르는 소리에 나가 보니 택배 상자에 테이프를 단단히 붙이려고 잡아 달라고 했다. 상자는 다섯 개였고 주소는 언니와 동생들 집이었다. 갑자기 큰소리로 "꽉 잡아! 꽉!", “꽉!" 오래전 체육관에서 보여 주던 부드러운 미소와 목소리는 간데없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슬쩍 보니 날카로운 눈매가 더욱 매섭게 보였다. 오늘만이 아니다. 결혼 후 시간이 흐르자 언제부터인가 차츰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아! 나는 속았다." 결혼하고 한동안 속상했다.
코치님의 친절과 성실함이 좋아 청혼을 너무 쉽게 받아들였나 하는 후회도 여러 번 해 보았다. 늘 부드럽게 미소 뛴 다정한 남편을 원하고 있지만 남자들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취중에 혀 꼬부라진 소리로 자신에게 최고의 재산은 ‘너’뿐이라는 남편의 말에 여러 번 속아 넘어가면서 어느새 47년이 지났다. 이제는 서운한 마음을 지우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친구처럼 함께 살아가길 바란다.
언니보다 3년 늦게 결혼한 우리도 얼마 후면 금혼식을 맞게 된다. 오랜만에 결혼 전에 자주 가던 푸른 월미도가 보이는 인천 자유공원에 가 봐야겠다. 예전처럼 다정한 남편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