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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면 결국은 오지만 기다림보다 늘 오고나면 항상 과하기에 인간은 늘 자연에게
고마움보다 불평이나 불만뿐인 나약한 받는 자들이 하는 어리석음인가 하지만 자연은 늘 때가 되면 순환하는 것 뿐이다.
다선일미 茶禪一味 란 선불교의 조주선사는 찻아오는 이 한마다" 차나 한잔 하시게" 라고 말하며 차와 선의 경게가 없음을 말하셨다. 백장 선사는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는것" 이 곧 도라고 하셨다. 이처렁 도란 평범한 일상의 행위가 지금 여기의 깨달음을 찻는 것이 다선일미 의 본질이다. 차를 마시는 찰나에 잡념이 끊어지고 오직 차와 맛과 향에 집중하고, 불이 不二의 마음이 하나로 나타내는 것이다. 현대인은 늘 두가지 행위나 세가지 사념이나 네가지 걱정이나 다섯가지 고통이나 모두 여러가지 삶에 젖어 번뇌를 가진다. 밥 먹어면서 스마트폰 보고 종일 텔레비전 소리에 젖어 지내는 것이 안심을 느끼는 뒤죽박죽의 그늘에서 보호받는 짓을 하고 지낸다. 자면서도 늘 번뇌와 꿈이나 잠을 자지도 못하는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산다.
밥 먹을때 만물의 우주의 산물의 고마움이나
차 한잔을 음미하고 즐길수도 없는 다사로운 정리하지 못하는 짓의 반복으로 지새운다.
산속의 야생화는 때가 되면피고 지고 삼라만상은 저절로 지나가는 순리속에서 가만히 두면 이루어지는 것인데 기다리고 바라보는 마음은 어디두고 차 한잔 마실수도 없다. 차 한잔에는 삼라만상의 구름과 햇빛과 비를 통해서, 흙의 기운으로 생긴 차잎에서, 제다의 노고와 맑디맑은 물 한잔속에 우주의 기운으로 소통하는 다선일미의 기운을 얻고,
차를 즐긴다는 하나의 행위는 고요한 선방禪房을 만들수 있다. "차나 한잔 드시게"
다선불이 茶禪不二란 범부와 성인이 본질은
하나이고, 차를 마시는 것은 분별이 없는 것이고, 맑은 물은 하나의 도이라, 옳고 그른 것은 하나의 물을 마시는 차와 같은 것이라.
선과 악, 너와나, 차와 수행이 본래 둘이 아니라는 선불교의 가르침이다. 차를 마시는 일은 일상이고, 선을 찻는 일은 명상의 길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차한잔 마시는 순간,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의 행위에 집중하는 즐거움이다. 차 한잔 들어보면 화두를 생길수도 만드는 것도 모두 하나의 본질이다. 유마거사의 불이不二 법문은 오로지 침묵으로 나타낸다. 두가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차를 물에 담어면 하나이고, 마시는 이들은 모두 하나일 뿐이고, 차 한잔 마시고 나면 빈잔으로 비워지는 공空의 가르침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차를 음미하는 것보다 비워지는 찻잔의 여운이 하나일 뿐이다.
차나 한잔 하시게 하는 조주선사의 가르침은 두가지 분별을 하나로 가르치는 선불교의 기본이다. 가르치는 이도 배우는 이도 하나이고, 너와 나라는 것도 하나이고, 차별도 하나이고 누구나 차 한잔 드시고 깨달음을 아는 것이 우선이다.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비교와 분별의 연속이다. 나와 타인을 만들고, 성공과 실패를 만들고, 스스로를 고통과 번뇌의 수렁으로 가는 것이다. 차한잔의 선방의 자리가 이분법적인 사고의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차의 온기를 느끼고, 차의 향기를 즐기고, 차의 맛이 속에 내리고, 차가 나를 적실때 선의 경지는 하나에 진리라는 깨달음으로 가는 것이다.
물은 흘러흘러 강으로 가고, 수많은 물은 탁하고 맑은 것도 바다에 도달하는 것은 하나의 물이다. 차한잔의 여유는 삼라만상의 본질은 하나의 빈잔에 담기는 차일 뿐이다.
비우고 비우면 마음은 분별을 잠재우고 있는 것이다.
다선동원 茶禪同原 은 차와 선은 그 뿌리가 하나라는 것이다. 차란 본래 땅의 기운으로 나타내는 삼라만상의 본성을 인간의 몸을 정화하고, 선은 마음의 번뇌를 버리는 공空의 개념으로 비우는 것이다. 차를 마시는 행위나 참석하는 모습이나 모두 맑아지는 마음과 깨달아지는 마음은 같은 것이라 한다. 조선시대 초의선사는 차를 마시는 것은 선을 딱는 길이라고 다신전 茶神傳에서 설하셨다.
차란 달이는 정성과 마음을 가담듬고 차에 대한 정성은 같은 깨달음이라 한다. 차를 마시기전에 찻잔을 대하는 마음이 느끼는 찰나의 평온함은 어디서 얻지 못하는 고요이다. 우리의 본심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고요한 근원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생각과 수없는 행위가 하루에 몇번씩 다가오고 지나가는 것들의 반복에서 자신의 근붠은 무엇인지 잃어버리고 살아간다. 하루에 차를 만나는 시간은 자신의 고요한 본성을 보는 시간이다. 빈잔에 채울 찻잎을 우려내는 시간에 고요한 본성을 기다리다 온갖 번뇌의 순간이 공空으로 변하는 찻잔을 마시고 비우는 것이다. 차는 코로 맛보는 것도 아니고, 시각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미각으로 느끼는 것도 아니고, 마음의 문을 열어 본래의 내면의 깊은 곳을 보는 것이다.
차는 강력한 수행의 길잡이로 만드는 것이다.
다선일념 茶禪一念 은 차와 선은 한 가지 지금이다. 무심無心이란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담긴 집착과 분별을 비우는 것을 말한다. 차를 마실때 차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든지, 다도의 예절을 지켜야 한다든지,
마음에 과거의 일이나 미래의 일을 담고 있어면 차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심이란 " 일 체 선악의 분별을 쉬어버리는 것이 무심" 이라고 백장선사께서 말하셨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무심을 가지는 선방禪房을 가지는 일의 연습이다. 차 한잔을 들고 망각의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우린 항상 무엇을 채우려는 마음 뿐이다. 마음이란 것은 에고의 사슬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현대인들은 항상 미래에 오는 것을 끝없이 만들고 지난 과거를 소중하게 여기는 악순환이다. " 차나 한잔 하시게. 끽다거 喫茶去" 조주선사의 가르침은 번뇌의 사슬을 버리라는 가르침이다. 차 한잔을 마시는 순간 선禪의 세계에 들어오라는 것이다. 차를 달이는 순간에 차를 마시는 순간에 모든 번뇌의구별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우리는 늘 반복되는 삶에서 소외되기를 싫어하는 집착에 매달린다. 바라지 않어면 실망도 없다. 그러나, 자신을 항상 타자에 비추는 것에 반복하고 스스로 비우고 자신의 본성의 빈 마음인 모습을 보는 것에 인색하다. 거창한 깨달음은 없는 것이라 한다. 단지 뜨거운 차한잔의 여유가 주는 마시면 비워지는빈잔에 가르침을 얻어야 한다. 따스한 녹차의 물한잔의 소리에 마음을 비우고, 목을 타고 넘길때 마음의 빈곳을 바라보고, 빈잔의 따스함을 느끼는 일념으로 지금의 순간을 즐기면서 선방禪房에 앉은 깨달음을 느껴야 한다.
다선동정茶禪動靜 물은 끓어오를수록 마음은 더욱 맑아지고, 겉은 흔들려도 안은 절로 고요해지네, 움직임과 고요함은 본래 둘이 아니라. 선禪수행의 가장 기본은 하나이다. 움직이는 물을 끓이는 소리는 차를 존비하는 소리인 동動이라 하고, 기다리는 차인들의 마음은 정靜이라는 고요한 마음의 평정이다. 차를 끓이는 소리는 차를 마시는 차인들의 마음을 재우는 고요라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늘 끓어오르는 물과 같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물은 고요속으로 가라앉고 사라지는 것 뿐이다. 차를 달이는 행위는 움직이는 것이지만, 고요함 속으로 가는 길이다. 선禪이란 고요한 산사나 어느 절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소란한 곳에서 얻는 세상소음의 모든 삶에서 얻는 고요한 소리의 본질이다. 선은 심오한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말하지만, 사실은 본질은 고요와 빈마음으로 얻어지는 무상이라 한다. 찻잔속의 선은 무진선 無盡禪의 넓디 넓은 우주의 가르침이라 한다. 우리는 추상적인 행복을 찻는 파랑새 같다. 바로 지금 인간이 되어 즐기는 축복을 한순간도 바로 느끼지 못한다 고 한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기가 참으로 힘들고 지금 이순간 하나도 소중한 즐거움이라 한다. 차 한잔 마시는 순간 마음의 감각을 깨우치는 극락의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단순히 차를 마실띠, 휴식을 넘어서 진리를 깨우치는 선방禪房을 만드는 행복을 가져야한다.
다선일체茶禪一切 일체개선은 깨달음을 어떤 영역이나 특정한 곳이나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걷고 서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정지하는 일상의 모든 행위가 그대로 선禪이라는 것이다. 지금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온전히 깨어있는 상태가 깨달음이라 한다. 차를 마시는 순간이나, 발우를 씻는 순간이나, 사소한 일들 모두가 반복적인 일상속에 우주의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선이리는 것도 일상의 밖에서 찻으려하면 영원히 찻을수 없고, 지금 바로 내 눈 앞의 차 한잔 과 차를 마시는 행위에서 얻어지는 자리가 극락이고 본래 마음의 본질이다. 수행이란 어느 깊은 골짜기 동굴이나 유명한 고찰 선방이 아니고, 마음이 머무는 곳이나, 어느 산길의 바위옆이나, 특별한 시간이나 한정된 장소가 아니라, 마일 반복되는 평범한 일생의 자리에서 얻는 것들에서 정성을 다하고 소중한 차 한잔에 선방을 만드는 지혜가 필요하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 도라는 노자의 도덕경의 말이나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자고 하는 선사의 말이나 지금의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일상의 삶이 선이다.
특별한 것을 갈망하는 인간들의 신비로움은 헛것을 찻아다니는 어리석음 뿐이다. 진정한 평온은 밖에서 구하고 얻어지는 것은 없다.
어느 산길에서 지나가는 발길에서 얻어지는 순간의 깨달음으로 다가오는 소중한 순간에 벌써 다가와 있는 것이다. 일상이 도道라고 깨닫는 순간 세상은 선방禪房이 되는 것이다. 차는 평상심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동반자이다. 더우기 차 한잔 나눌수 있는 자리는 가장 크나큰 이타심의 길이다. 차의 담담한 맑은 기운은 우리를 중용의 상태에 도달하는 길이다. 치우침 없는 평상심을 만드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지루함을 벗어나 소중한 순간들의 깨달음을 얻는 좋은 길이 비로소 선禪을 가지는 것이다.
다선평등茶禪平等 차나 한잔 하시게 의 선문답이란 평등심의 진리를 가르친다. 조주선사의 말씀대로 찻아 오는이가 이전에 왔었든, 처음으로 왔었든, 오래같이 지내는 원주스님이든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은 같은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언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다. 세상은 망상의 산이다. 현재의 자기에서 과거나 미래나 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메달리고 있다.
일찌기 왔던 사람은 새로운 것을 찻아온다. 어제 배운 것보다 오늘 더 대단한 것을 배울려는 진보의 길을 바란다. 이미 가지고 있는데 무엇을 더 바라는가? 익숙한 것에 새로움을 뜨는 평상심을 바라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은 찻아오는 마음의 진리를 원한다. 거창한 이론이나 특별한 가르침을 바라는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지금 가까이 있는데 무엇을 칫는가? 하는 가르침이다.
조급함은 바라는 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고 가장 기초적인 평상심을 가지는 것이다. 온갖 망상은 버리고 가장 순순한 비움을 기르킨다. 원주 스님은 모두에게 똑같이 차나 드시라 하는 까닭의 논리적 분별을 버리고 시시비비하는 환상을 버리라는 질문이 필요없음을 가르친다. 누구에게나 진리라는 것은 나누어 마시는 차의 온도나 마시는 이의 지위나 경력은 필요없고 오직 차한잔의 나눔으로 깨달아라 하는 선문답 이다. 우리에게 직관의 힘을 가르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걷어내고 눈앞의 차힌잔으로 답을 찻기보다 체험속으로 와서 가르침을 배울려는 마음도 깨달음도 없는 순수한 따뜻한 차 한잔 건네는 마음으로 부처의 길로 가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스스로 깨닫는 것이 마음을 비우고 차를 마시는 것이다. 무엇을 찻는 것은 멀기만 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힘들고
차나 한잔 마시고 늘 평상심을 가지는 것이 선禪이다.
다선직지 茶禪直指 직지인심은 선종의 4대 강령중 하나이다. 모든 가르침은 복잡한 경전이나 이론보다 인간의 본성을 직접 꿰뚫어 보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가르침을 원하던 것도, 수많은 불법의 시비도, 지금 차를 마시는 순간을 바라보는 것이다. 차를
마시는 것이나 진리를 찻는 것이나 너무 많은 글과 말의 속에 머무는 것이다. 가르키는 것은 손가락일 뿐이다. 차맛이 별다르게 느끼기를 바라고, 명상이나 마음챙기는 것으로 찻는 것들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다. 단순한 것은 선의 미학이고 차의 본질이다. 진리란 덧붙어진 언어나 분별의 행위가 아니다. 차의 세계에서 가장 귀한 가르침은 담박談泊이다. 마냥 순수한 물에 찻잎과 만나는 빗어내는 단순함이다. 단순함이란 결코 부족함이 아니라, 더 이상 버릴것도 더 할것도 없는 완벽한 상태이다.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과잉된 세계에 살아간다. 너무 많은 물건, 너무 많은 관계, 너무 많은 정보 속에 영혼을 담고 살아간다.
가장 편안한 것은 단지 단순한 담백함이 있을 뿐이다. 성불이나 견성은 차를 마시는 순간 가질수 있는 지금의 자리이다. 찻잔을 내려놓은 순간부터 마음을 잔을 비우는 평온함으로 유지하는 선의 관점으로 진정한 공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찻잔을 내려놓은 뒤 마음은 차의 맛이 늘 그대로 입안에 머무는 단맛이 가르치는 것은 걸음걸음 마다 맑은 바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선무위 茶禪無爲 모든 것은 무위로 자라나고 차나 선이나 자연을 본받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욕심이나 억지 스러운 것을 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차나무는 자연에서 그 본연의 상태에서 비료나 성장을 촉진시키는 것은 맑은 기운이나 자연을 거스러는 짓이다. 선禪이란 무위의 본질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 받는다" 도덕경 25장에 나오는 글처럼 차는 훌륭한 재배지는 스스로 자라는 야생의 환경만 조성하고 사계절의 순리에 견디어 스스로 강해지는 것을 바란다. 차나무는 인간의 노력으로 자라지 않는다. 하늘과 땅과 자연의 노고가 주는 인간의 정성이 만든 하나의 작품이다. 녹차잎 하나를 기다려서 녹차 한잔을 만들기 위해 인간의 지극한 노력이 없어면 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일은 나홀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우리의삶도 수많은 주변의 인연과 우주가 주는 도움으로 존재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선禪이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한 노고의 보답이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이른 봄에 나타내는 찻잎을 생명력을 기다리는 것은 수행자들이 인내하는 내면의 힘을 길러가는 가장 순수한 지혜의 싹을 준비하는 선의 경지이다. 고귀한 것은 시간과 기다림으로 숙성되는 과정 을 거쳐야한다. 봄에 차밭에서 피어나는 찻잎은 하나의 탄생이다. 깊고 깊은 차향을 만드는 것은 겨울의 혹한이 없어면 이루어질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 바르고 손길이 정직할때, 차나무는 그 정성으로 화답하여 맑은 기운을 새싹에 드러낸다. 우리는 때를 기다리는 법을 차 한잔의 노고가 우주의 선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장자의 "천지와 나는 함께 태어났으며, 만물과 나는 하나다. " 라고 했다. 찻잔 속에 담긴 맑은 빛깔과 깊은 향은 만들지 않는 이들은 알지 못한다. 차는 세상을 향한 지극한 예의이다.
다선일창 茶禪一槍 일창이기一槍二旗는 녹차밭에서 녹차를 딸때 아직 펴지지 않는 눈하나와 갓핀 잎두개를 거두는 최상의 채취방법을 뜻한다. 뽀족한 눈은 창槍을 닮았고, 살짝 펴진 잎은 깃발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좋은 차의 기준을 넘어 수행하는 차인들의 마음과 단순한 것을 나타낸다. 선가禪家에서는 " 도를 딱는 것은 정수리를 치는 것과 같고, 번잡함을 버리고 오직 일념을 잡아야한다". 고 가르친다. 일창이기의 채취는 양보다 질을 우선하는 삶의 가르침이다. 수 많은 차잎에서 오직 맑은 싹만 골라내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 수많은 번뇌에서 가장 진실힌 본심을 다스리는 수행과정과 같은 것이다. 잡다한 인연에 휘둘리지 않고 순수함을 유지하는 때, 차는 다중선 茶中仙 의 경지에서 이타심의 마음으로 차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쓸데없는 잎들을 덜어내고, 누군가에게 보시하는 맑디 앍은 고귀한 차를 드린다는 가볍고 향기로운 삶을 준비하여야 한다. 모든 일들이나 차잎들 중에서 탐심을 버리고 오직 가장 빛나는 차잎만 고르듯이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소중한 차의 정신이라 한다. 찻잎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며, 찻잎이 따고나면 그 자리에 또 다시 짙은 고운 빚이 나는 차잎이 살아난다. 선가에서는 줄탁동시茁晫同時라는 뜻처럼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차를 따는 일은 자연이 주는 시기를 알고 차인이 귀중한 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이 순간은
득도의 절기처럼 정성으로 적시의 중요성이 필요하다. 너무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는 것이 좋은 차를 만드는 기본이다. 적당한 때는 기회이고, 적당한 때에 늘 깨어있는 것이 준비하는 빈 마음이다.차잎은 순수한 손가락만이 필요하다. 손길이 닿는 곳마다 마음이 머문다는 것은 선가의 기본이다. 세상은 따스한 손길이 필요한 자비로운 마음이 필요하다. 이것이 선의 길이다. 마치 꿀벌이 자연의 손실이 없듯이 꿀만 필요하듯, 차밭의 아무런 손실도 없이 고요히 갓핀 일창이기의 순한 잎만 필요한 것이다. 내 삶의 근본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오늘의 삶이 타자의 삶에 손실이 없어야하는 것이 선의기본이다. 차잎을 고르고 따는 섬세한 반복은 우리의 가치관을 점검하는 수행이다.
찻잔에 담기는 것은 결코 내가 선택한 것들 뿐이다.선별된 삶은 단순하지만 깊고, 고요하지만 강한 항과 맛을 남기는 것이다.
다선여수 茶禪如修 제다여수製茶如修는 차를 만드는 물리적인 과정이 선을 얻는 수행과정과 같은 여정이라는 것이다. 솥안의 뜨거운 열기는 우리 내면의 탐욕과 분노를 태우는 지혜의 불이라 한다. 찻잎을 비비는 손길은 아집을 끼부수는 자각의 손길이라 한다. 제다는 선가의 가르침은 고통을 승화의 도구로 느끼는 것이다. 또한 단련의 기쁨도 가르친다. 정성을 다하여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차를 제다하는 것이다. 과열과 무기력의 사이에서 적중의 손놀림으로 푸른 차잎이 열정의 불속에서 고운 차로 탄생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덖어낼 줄 아는 이가 진정한 선가의 길이다. 그 오묘한 끝에서 비로소 가장 부드러운 깊은 삶이 향기를 내는
것이다. 차잎은 뜨거운 열기 속에서 푸르는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차로 거듭나는 것이다.
유념柔念은 살청을 마친 찻잎을 멍석 위에서 비비는 과정이다. 찻잎의 성분이 적당히 스며나오고 차의 본연의 맛이 잘 우려나고, 특유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다. 전문가의 손길이 멍석에 구르고 비벼지고 특유의 거친 푸르름과 깨달음으로 가는 부드러운 차로 거듭나는 것이다. 우리는 고단한 삶의 모서리를 마찰과 비비는 아픔으로 둥굴고 고운 빛으로 변하는 원성圓成의 상태로 수많은 시련이 주는 성숙의 선의 경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건조의 단계로 내면의 수분을 완전히 제거한 차의 향미를 고착시키고 장기보존으로 변하지 않는 성숙의 단계로 가는 것이다. 온갖 단련을 거친 뒤에 깨달음을 유지하는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는 수럼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건조함이란 마음을 비우는 지혜의 성숙이라 한다. 잘마른 찻잎은 수십년 지난 향기를 가질수 있는 변치않는 편안한 선 禪의 길이다. 기다리는 것은 때가 되면 인연의 물을 만나 이전보다 더 풍성한 향기와 맛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선가의마음이 변하지 않듯이, 녹차의 향과 맛은 변하지 않는다 죽음에 가까운 고통은
뜨거운 솥에 덖이고, 거친 멍석에 비벼지고, 또 다시 뜨거운 열에 건조의 시간을 말려지는
것은 비로소 녹차로 거듭니는 수행의 길이다.
우리의 인생도 제다의 고통을 넘어서고 죽은 듯이 기다리는 것이 언젠가 피어나는 차향과 맛을 회감回甘을 기다리는 것이다.
다선 일완茶禪一脘 차를 마시는 과정이 선가의 깨달음과 같이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과정이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목을 축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대면하는 거룩하신 의식이다. 허리를 펴고 바르게 앉는 것으로 기운의 중심을 잡고, 불을 피우고 잡념을 쫏아내는 마음은 청풍을 부르는 것이다. 선가에서는 차를 감로甘露라 한다. 감로란 고통을 멎게하고, 생명을 살리는 하늘의 이슬이다. 차를 마시는 찰나, 시간은 정지되고 오직 지금의 시간만이 맑아진다.
차 한모금이 나라는 아집을 벗겨내고, 내면의
번뇌를 녹여내는 맑은 본심은 나타나는 것이다. 지나간 과거나 먼 미래나, 잡다한 사념이나 지금 이순간 한잔의 차를 마시고 부처의 마음을 얻고, 두잔의 차는 해탈의 진리를 보고, 석잔의 차는 회심回心의 향을 기다리는 것이다. 차를 마시는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될때, 마음은 비로소 본심을 가진다. 찻잔을 든 그 손이 진리의 손이고, 차를 마시는 그 순간이 깨달음이고, 빈잔이 주는 것이 회향의 즐거움이다. 차를 마시는 행위가 가장 큰 명상이다. 무심이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집착과 분별이 사라진 빈마음이다. 차를 마시고나면 오랫동안 회향의 맛이 감도는 것을 느끼는 것으로
회감回甘은 명차만이 주는 인생의 진리이다.
여운은 형체는 없으나 존재하는 것들의 위대함을 일깨워준다. 우리의 삶은 눈앞의 결과물이 사라진 뒤에 남는 덕德과 향기로 나타나는 위대한 것이다. 비어있음 속에서 가득한 회감의 맛과 향을 누리는 진정한 다인이 되길 빈다.
때가 되면 녹차밭에는 일창이기의 새잎이 나오는 것인가 백중이 지나가니 피는구나
가을이 오면 익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 가을
백중 녹차는 영글어 지는구나
한잎 두잎 가을오는 소리에 쏫아나는 녹차잎이 어찌저리 곱기만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