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던 산버들나무가 생겼다는 소식을 사유수님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카페이름을 ‘버드나무 한가지’라고 정해 놓고도 정작 새벽은 버드나무를 직접 본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겼습니다. 없던 나무가 생긴 걸 보니 씨가 어딘가에서 날아와 터를 잡은 것이겠지요? 이런 것도 인연이겠지요. 사유수님은 반대하였지만 새벽은 버드나무 하나 심었으면 좋겠다 하였는데 일손 덜었습니다.
카페명을 ‘버드나무 한가지’로 지은 이유에 대해 설명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번 기회에 조금 언급해 보아도 좋겠습니다. 카페의 관세음보살 그림을 걸어놓았습니다. 오른 손에 들려 있는 것이 버드나무 가지 입니다. 왼손에 들려 있는 것은 호리병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물이 들어 있겠지요?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이 번뇌로 불타는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버드나무 가지를 물에 적신 다음 가지를 중생을 향해 흔들어 번뇌의 불을 끄고 열을 식혀 준다고 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폭포수와 같은 물줄기로 쏴아~하고 시원하게 뿌리면 금방 꺼질 불을 왜 고작 버드나무 가지를 갖고 저럴까? 싶지만…… 화상으로 고통을 당해본 새벽에게는 그것마저 보살의 자비심의 표현이란 생각이 듭니다.
정말로 심각한 화상에 흐름이 거센 물줄기를 들이대면 흐물거리는 피부 자체가 물줄기에 휩쓸려 뭉개지고 뜯겨질 것입니다. 이럴 때는 솜에 알코올이나 물을 묻혀 화상을 당한 피부를 부드럽게 닦아 줍니다. 그러면 물과 알코올이 증발하면서 피부의 열을 식혀 줍니다. 또한 병상에서 심한 탈수 상태에 있는 사람이 물을 한바가지 벌컥벌컥 마시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식도를 통해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솜이나 수건에 물을 묻혀 입술을 적셔주는 것이 해갈에 더욱 도움이 되는 행위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번뇌 역시 섣불리 위로한다고 달라든다든지 다 이해한다든지 별것 아니라든지 확실한 해결책이라며 내미는 등의 태도로 다가간다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번뇌의 역풍을 목도할 것입니다. 적당한 시기와 적당한 조건에 적당한 행위의 보살행을 새벽은 관세음보살 오른손에 들린 ‘버드나무 가지’가 잘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버드나무 뭉탱이도 아니고 두 가지도 아니고 세 가지도 아니고, 굳이 ‘한’ 가지라고 명명한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새벽의 수행 여정에서 ‘하나’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향점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화엄철학에서는 멋지게 ‘다즉일 일즉다’라고 표현해 놓았고, 일찌기 유가에서는 ‘일이관지’라고 하여 공자의 도를 표현해 놓았음을 보았으며, 도가에서는 ‘大’자에 대한 노자의 애정으로 표현해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버드나무 한가지’의 ‘한’은 ‘韓’입니다. 새벽이 태어나 공부하며 살아가는 터전이자 내 조국 ‘대한민국’의 ‘韓’입니다. 이 글자는 태양과도 같은 밝은 빛이 두루차는 형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민족 最古의 경전이라는 <천부경>에 언급되는 ‘앙명’이라는 표현 또한 빛과 연관되는 수행법이라고 봅니다. 보편적 측면에서의 ‘一’의 뜻을 포함하면서도, 피가 흐르고 살이 맞닿는 그래서 애정을 느끼는 특수적 측면까지 껴안는 글자로서 ‘韓’을 택했습니다. 그렇게 ‘버드나무 韓가지’라는 이름이 지어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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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봄에 일찍 순을 내밀어 봄 소식을 알리는 나무.
긴 겨울을 지나 강가에 핀 버드나무 군집의 새싹을 보며
이렇게 또 한 해의 시작이구나를 느끼곤 합니다.
저에겐 개인적으로 '희망'이라는 단어가 떠 오르는 나무로 다가옵니다.
위치를 아주 잘 잡고 태어난 것 같습니다^^.
_()_
‘희망’이라는 단어는 참 중요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 않는다면 종교로서의 의미보다는 철학의 한 일파로 그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새벽은 ‘희망’적인 분위기라는 결과를 자아내는 원인을 찾았습니다. 약을 먹으면 병이 낫는 것 처럼 단순한 매커니즘을 찾았다는 말이지요. ㅎㅎㅎㅎ
원담님도 희망과를 한번 따먹어 봅시다~ ㅋㅋㅋ
@새벽 넵!~, 잘 이끌어 주십시요 싸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