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냉면과 파가니니 / 유혜자
여름이면 붉은 깃발을 걸고 신장개업한 냉면집을 찾아가 본다. 기대하며 달려가서 먹어보면 번번이 실망하면서도, 면이나 국물 맛이 20년 동안 단골집에 미치지 못하는 걸 확인하는 결과밖엔 안 된다.
얼마 전에 먼 거리에 있는 단골집으로 근무시간에 택시를 타고 달려가기도 했다. 그 집에 들어서니 식탁 위에 놓인 냉면 대접만 봐도 땀이 식고 군침이 돌았다. 대접 바깥에 찬김이 서려 있고 안에 국은 모시올처럼 가뿐하게 틀어 올린 면이 솟아 있었다. 그 위에 길쭉한 무김치와 수육, 아슬아슬하게 얹혀 있는 달걀이 서걱서걱한 얼음 육수에 굴러 떨어질 듯했다.
식초와 겨자를 넣고 면을 풀어 휘휘 저을 때 코끝으로 산뜻하게 다가오던 내음, 면을 한 젓가락 입에 넣었을 때 매끄럽고 쫄깃한 맛에 미처 육수의 맛이 아쉽지가 않았다. 국수를 몇 젓가락 삼킨 다음 국물을 후루룩 들이켰을 때 사이다처럼 짜릿하던 맛, 입안엔 구수한 뒷맛이 남고 가슴은 서늘했다. 아! 그때서야 냉면을 무척 좋아하는 친구들 몇몇이 떠올랐다. 그 친구들과 함께 이 별미를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난한 슈베르트는 친구를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초인적인 재주를 가진 바이올린 연주자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1782~1840)에 매혹되어 친구들에게 입장권을 사주고 자신도 연주회에 매일 다니느라 호주머니에선 먼지만 날렸다.
같은 시대의 바이올리니스트는 물론 슈베르트까지 현혹시킨 파가니니의 연주가 음반 제조기술이 없던 때여서 전해오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그가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카프리스를 후세 명인의 연주음반으로 들으면서 다른 작곡가의 작품과 달리 잘 뽑은 냉면발처럼 쫄깃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나의 단골 냉면집이 지금은 아들이 경영해서 돌아가신 아버지 때만은 못해도 다른 집의 것보다 훨씬 나은 것처럼.
음식 솜씨와 예술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어느 경지에 이르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파가니니는 '바이올린의 귀신'으로 불릴 만큼 독특한 마술적 기교를 지녔었다고 한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기막힌 연주 솜씨 때문에 신비화된 얘기가 나돌았다. 연습하는 소리나 모습을 듣고 본 일이 없는데 무대에 서면 청중을 도취시키는 것에 사람들은 의심을 품었다. 그래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 탁월한 연주기술을 얻어냈다는 루머가 퍼졌었다. 그만큼 숭고한 소리로 사람들의 넋을 흔들어놨다는 것이다.
내가 다니던 냉면집의 짜릿한 국물맛과 쫄깃한 국수 맛은 서울 장안의 어느 집도 따르지 못했다. 국물은 양지머리를 고아 끓인, 뒷맛이 담백한 육수와 동치미 국물의 배합이며, 메밀가루와 녹말가루를 섞은 반죽으로 국수를 뽑는다는 둥 방법은 대충 알려졌다. 그러나 그 맛은 아무도 따를 수 없어서 나쁜 소문이 돌기도 했다.
남들이 잠든 사이에 국물을 만드니 무엇을 섞는지 알 수 없고 국수가 쫄깃한 이유는 양잿물을 약간 넣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부친의 생존 시에만 해도, 밤새워 육수를 공들여 끓이고 정성으로 국수를 뽑는 법 등 뒷얘기는 알려지지 않았었다. 육수를 고아내는 가마솥 곁에서 수시로 기름을 걷어내고 불을 조절하여 지켜보다가, 깜빡 졸아서 맛이 덜한 날엔 자신도 굶고 장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파가니니가 받은 어린 시절의 맹훈련이 최근 음악사가들의 연구로 밝혀졌듯이 냉면집 부친의 비법 아닌 비밀이 아들과의 인터뷰기사로 밝혀진 걸 읽었다.
어린 시절 파가니니는 하루 10여 시간이나 맹훈련을 받았고, 지키지 않은 날 그 아버지는 밥도 먹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훈련 덕분에 연주 중 현을 반음 올리거나 G선만을 반음 높게 하는 동작을 청중 모르게 재빨리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줄을 왼손으로 튕기는 피치카토, 피리소리처럼 감미로운 소리를 내는 플래절렛, 여러 음을 한꺼번에 내는 자기만의 연주법을 창안해냈던 것이다. 이 어려운 기술을 이미 어렸을 때 터득했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는 많은 연습이 불필요했다. 연주 여행 때 그의 비법을 엿보려고 옆방에 투숙했던 사람들은 헛수고만 했다.
음식 만들기나 연주에는 천부의 재능과 함께 숙련된 손맛이 어우러져야 한다는 진실을 잊기가 쉽다. 그래서 명연주가나 장인이 그 비법을 전수해 주지 않았다는 누명을 쓴다. 단골 냉면집도 다들 이 방법을 전수 받아 현대 시설까지 갖췄으나 그 맛은 부친 때만 못하다. 파가니니도 유일한 제자 시보리(Sivori)에게만 비법의 일부를 전해줬다. 분주한 연주여행 때문에 지속적인 교육은 못 시켰지만 자신이 창안한 연습방법으로 시보리의 테크닉을 1년도 안된 기간에 빨리 향상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파가니니만큼 훌륭한 연주를 하지 못했으며 오늘날 그의 악보를 비슷하게만 소화해 내는 몇몇 연주자가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기량을 발휘할 만한 많은 작품을 썼으나 오늘날 전해오는 악보는 바이올린 협주곡 6곡과 전24곡의 카프리스뿐이다. 그 중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베토벤이나 브람스와 같은 정서적 깊이는 없으나 듣고 난 뒤에 일종의 시원함이 남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쫄깃한 면과 육수의 조화로 이뤄지는 시원한 평양식 냉면, 오케스트라의 명쾌한 연주에 이어서, 비단 찢는 소리처럼 선명한 바이올린의 다채로운 독주를 받쳐주는 오케스트라 연주가 20분이나 되는 1악장. 마치 국수와 육수로 어우러지는 냉면처럼 맛있고 시원하다. 풍부한 서정으로 겨자처럼 쌉쌀하고 달콤한 2악장, 경쾌한 스타카토 기법으로 활기차며 화음이 뛰어난 마지막 악장.
후텁지근하고 불쾌지수 높은 계절에 밝고 현란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이나 들어볼까?
[유혜자] 수필가.
* 조경희 수필문학상 동국문학상 한국문학상
*《음악의 페르마타》《가슴에 그려보는 수채화》《미완성이 아름다운 것은》외
냉면과 바이올린 협주곡의 조합!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하지만, 경지에 이른 음식솜씨와 예술은 맥이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명연주를 위한 각고의 노력, 좋은 육수를 뽑기 위해 밤을 새워 공들이는 수고가 분야는 서로 다르지만요.
유튜브에서 찾아 들어보니 수필가의 언급처럼 밝고 현란하며 풍성하고 경쾌하네요. 바이올린 쏠리스트의 독주, 비단 찢는 선명하고 다채로운 기교도 엄청납니다. 명인의 연주 음반을 감상하며 잘 뽑은 면발의 부드럽고 쫄깃한 탄성과 육수의 시원한 깊은 맛을 빨리 들이키고 싶어요. 태풍이 지나간 한낮, 습한 불볕더위를 날려버리려면 냉면 한 그릇이 더할 나위 없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