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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
이 홍사
인천공항은 군데군데 흡연실이 있어 인간적이다.
인간적인 면이 매우 돋보이는 공항. 담배는 인간만이 즐긴다. 개를 위해서 흡연실을 만들지는 않을 터. 인간을 위하는 인천공항에서는 어지간히 기다려도 갈증이 나지 않는다. 특히 탑승구 앞의 흡연실은 긴 사막에서 만나는 오아시스와 다름이 아니다.
오아시스에서 목을 축이고 먼 길을 떠난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인간적인 면을 따지니 생각난 건데, 개 같은 공항,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서 환승을 하면 그야말로 개가 된다. 그 공항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군데의 흡연실이 있었다. 그런데 언제가 환승을 하면서 보니 흡연실을 폐쇄하고 그 자리에 베트남 쌀국수 가게가 들어섰다.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연결편을 기다리는 세 시간 동안, 흡연실을 없애버린 그 어느 자식이 무간지옥에 떨어지기를 기도하고 그다음부터 절대로 노이바이 공항에서 갈아타는 비행기는 이용하지 않는다.
같은 베트남이지만, 호치민의 턴손 누트 공항에는 아직 흡연실이 있어 길손들의 애환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형편이니, 하노이 공항에 흡연실을 없애버린 자식에 대해서 지옥으로 떨어지라는 기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담배에 대해서 박절하고 엄격하기로 이름난 싱가포르 창이 국제 공항에도 흡연실이 버젓이 있는데, 그러고 보니 나는 환승 공항의 흡연실을 꿰뚫고 있다. 방콕의 돈무항 공항이나 스완나품 공항의 흡연실이 어디에 있는지 외고 있는 나도 어지간한 작자다.
아무튼, 인천공항 2터미널 233번 탑승구는 흡연실에서 나서면 바로 코 앞이다. 탑승이 시작되는 걸 보고 반대 방향에 붙은 흡연실로 와서 느긋하게 한 대 피우고 가도 늦었다고 눈총받을 일이 없는 위치다.
탑승은 느긋하게 내릴 때는 신속하게,
이런 철칙으로 맨 나중에 느긋하게 타더라도 기내에 들어가면 앞 사람이 짐을 올리느라 좌석에 앉지 못한 승객의 엉덩이 때문에 통로에 서서 기다리기 일쑤다.
오늘은 좀 이른 시간에 공항에 도착했다.
집에서 공항으로 오는 리무진 버스가 코로나로 승객이 줄자 배차간격을 대폭 늘여서 그 차를 타지 않으면 다음 차는 공항에 도착해서 바쁘게 서둘더라도 탑승 시간이 빡빡한 터라, 좀 일찍 여유를 가지고 나섰다.
일찌감치 출국 절차를 마치고, 마일리지로 스카이라운지를 한 번 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스카이라운지에 들러 거의 두 시간이 넘게 보냈다. 오늘 스카이라운지에서는 본전을 뽑았다. 점심시간, 적절한 시기에 적절하게 이용했다. 생긴 모양과 맛을 탐하며 가지런한 뷔페를 두 접시나 비우고 라운지에 딸린 사우나에서 느긋하게 뜨거운 물을 즐기는데, 느긋함에서 동반해야 할 담배가 생각나 서둘러 챙겨입고 나와 탑승구 쪽 흡연실을 찾았다.
저 아가씨 담배 피우는 모습이 아주 예술인데?
흡연실 중에서도 공항 흡연실에 들어서면 다른 곳보다 여성 흡연자를 쉽게 볼 수가 있다. 이 흡연실에는 여행객뿐이 아니라 공항 면세점에 근무하는 직원 중에서 여성 흡연자가 많이 이용한다. 특정 항공사의 유니폼을 입은 여승무원들은 흡연실로 들어오는 걸 본 적은 없었으니, 여행객이나 면세점에 근무하는 여직원들이라는 얘기인데,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 페미니즘을 들먹이는 아내는 여기까지 듣고 인상이 살짝 돌아가겠지.
뭐 여자는 담배를 피우면 안 되나, 당신의 그 꼰대, 남성 우월적인 시각이나, 사대부 시절 눈높이가 문제인 거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일축할 아내가 분명하다. 내 얘기는 그 여성 흡연자를 비하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게 보기 싫으면 내가 왜 흡연실에만 가면 여성 흡연자가 많은 재떨이에 둘러서겠는가. 사실을 말하자면, 젊은 아가씨가 긴 머리를 늘어트리고 볼우물이 살짝 파이도록, 연기를 빠는 입술을 보면 성적인 매력이 살짝 보인다,
그래서 흡연실에서는 여자가 있는 쪽으로 가서 끼이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런데 깊게 관찰한 결과,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여성 흡연자들이 재떨이에 자주 침을 뱉는다는 거. 이 문제를 지적하고 꼬집고 싶은 마음이다.
지금도 그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고. 담배를 피우던 여성이 재떨이에 침을 뱉으면 바로 성적인 매력은 고사하고 바로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얘기. 공항 흡연실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재떨이가 텅스텐으로 만든 것이 높이가 허벅지쯤 올라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재떨이를 중심으로 익명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쓴 족속들이 둘러서서 끽연을 즐기는데. 재떨이에는 꽁초를 끄기가 좋게 모래를 살짝 깔아두었다. 청소하는 사람들이 늘 돌아다니는데도, 그 사람이 보고 있는데 재떨이에 침을 뱉는 몰상식한 여자도 가끔 있다. 그렇게 모래를 깔아둔 곳에 침을 뱉으면 모래의 입자와 침이 섞여 덩어리가 되어버린다. 청소하는 사람은 꽁초를 일일이 줍기가 불편해 붓이나 솔로 쓸어 담은 데 모래가 그렇게 덩어리가 되어있으면 얼마나 불편할까? 그런 걸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재떨이 앞에 설 자격이 없는 거다.
방금 그렇게 침을 뱉은 아가씨는 딱 졸리는 청바지를 입은 여행객이었다. 그 젊은 여자와 마주 서서 담배를 피우다가 정나미와 더불어 담배 맛이 떨어져서 청소하는 재떨이 앞으로 옮긴 거다.
밖은 어지간히 춥다.
우리나라 상공에 있는 제트기류가 북극에서 오는 찬 공기를 가두고 있지만, 기온이 올라가면 그 힘이 약해져 찬 공기를 막는 힘이 약해진다고 했다. 제트기류는 북극과 남쪽의 기압 차이가 클수록 활성화되는데, 북극 기온이 올라가 기압 차이가 줄어들면서 제트기류가 약해져 북극의 찬 공기가 내려와 강추위가 위세를 떨치는 것이다. 최근 오십 년 동안 다른 지역이 1도 상승할 때 북극은 2.5도 올라갔다는 게 지구 온난화의 한 증거자료라고 했다.
이 사실은 직접 인터넷을 찾아서 읽은 게 아니라 매주, 주말 편지를 보내는 친구의 메일, 아침에 받은 메일을 읽지 못하고 있다가 공항으로 오는 버스에서 읽었다. 친구는 그 이야기를 상세하게 메일에 기술했다. 그런 걸 즐겨 찾아서 제 것으로 만들어 메일로 알려주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흡족해하며 읽었다. 어쨌거나, 오늘이 기록이 될 만큼 추운 날이다.
재떨이에 침을 뱉는 아가씨의 잔상을 지우기 위해 추운 날씨를 떠올리고 그 원인을 다시 짚어보았다.
돌아보니 그 아가씨는 나가고 없다. 그 자리에 면세점 직원으로 보이는 다른 아가씨가 서서 담배를 물고 있다. 제발 저 아가씨는 재떨이에 침을 뱉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그런 눈으로 아가씨를 보았는지,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가슴에 명찰을 단 면세점 아가씨가 몸을 살짝 돌려 나를 등지고 섰다, 앗 뜨거라. 이것도 잘못하면 이상하게 꼬일 눈길이 분명하다.
얼른 시선을 돌렸다.
지금이 밖은 영하 15가 넘는다. 내가 가는 곳의 날씨를 버스를 타고 오면서 스마트폰으로 찾아보았니 섭씨 30도가 된다.
기온 속으로의 이동!
한겨울에서 한여름으로 이동이 아닌가. 공간적인 이동과는 약간 다른 기온으로의 이동을 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하 15도에서 섭씨 30도로 이동.
45도의 기온 차이?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아 입고 나온 재킷의 무게를 가늠했다. 아무래도 비행기를 타면 두꺼운 윗도리는 벗어야 할 것이다. 그 시간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윗도리는 짐이 된다. 나는 더운 나라로 가고 있기에.
이미 집을 나서면서 입고 나온 외투는 버스 터미널까지 태워다 주며 배웅을 나온 아들 녀석에게 돌려보냈다. 그래도 입고 있는 이 옷이 가는 나라에서는 입고 다니기에는 두터운 옷이다. 비행기를 타면 바로 벗어야 할 옷이라고 생각하니 거추장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향하는 나라 사람들은 추위를 견디지 못한다. 영하가 아닌, 영상 9도까지 떨어지는 이상기온이 발생했다. 그게 불과 몇 년 전인데 여러 사람이 얼어 죽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영상 9도에서 충분히 얼어 죽을 수도 있는 피부를 지닌 사람들이 사는 나라다.
분명한 사실은 입고 있는 이 재킷은 비행기에서 벗으면 다음에 들어오는 날까지 입을 일이 없다. 들어오는 날이 두 달이 넘을 예정으로 가는 것이니 그때는 봄기운이 완연할 터이니 이 재킷을 입기에는 두터울 것이다.
지난번 나갔을 적에는 엄청나게 더웠다.
살인적인 더위.
그게 거의 두 달 전이다. 아무래도 지금은 그 살인적인 더위가 좀 누그러졌을 터이다. 그 나라는 사계절로 나뉘는 게 아니라 우기와 건기로 나뉜다. 지난번에 나갔을 적이 11월 초였으니 가장 더울 때였다. 우기가 막 끝난 시점인 11월과 우기가 들어서기 전인 5월이 일 년 중에 가장 덥다. 5월부터 10월까지는 여름이지만 매일 비가 한두 차례 오니 오히려 시원하다. 신은 정말 공평하다. 그 열대지방에 우기를 선사한 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아무튼, 그 나라에는 5월이나 11월의 거의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더위를 견디며 그곳 사람들은 산다.
둘러보니 명찰을 단 면세점 아가씨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여행객으로 보이는 아가씨 세 명이 둘러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노랑머리에 키가 작달막한 아가씨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듯한데 들어와서 친구들과 노닥거리고 있었다. 아가씨의 가슴에는 간접흡연의 폐해보다 친구들과의 대화가 더 크게 자리 잡은 모양이다. 아가씨들이 주고받는 대화로는 상당히 격앙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은 원래 사람을 조금 들뜨게 만드는 성향을 지닌 품목이다.
어느 나라로 가는 아가씨들인지 모르겠지만 마음껏 담배를 피우며 선 처녀들의 젊음, 그 싱그러운 나이가 살짝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해외 어디를 가도 말이 통하는 배운 세대, 인터넷으로 직접 검색하고 가격과 볼거리, 특히 즐길 거리를 선택할 수 있는 세대의 자유분방함, 그건 내가 따라잡을 수 있는 항목이 아니다.
이 흡연실에 들어오는 사람은 모두가 떠나는 사람들이다. 이미 출국심사를 받고 들어온 사람들이기에 면세점 직원이나 청소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어디로 떠나는 사람들 뿐이다. 떠나는 사람들은 조금 설레서 그런지, 말을 많이 하며 목소리가 약간 높아진다. 그게 거의 이십 년이 되도록 이 공항 흡연실을 들락거리며 관찰한 결과다. 저 아가씨들은 여행으로 가겠지만, 나는 일로 간다. 여행으로 가는 설렘과 일로 가는 찹찹함은 차이가 있을 터. 한 번도 친구들과 저렇게 자유분방한 여행을 나는 다니지 못했다. 공항에서 늘 혼자 떠났다.
둘러선 그녀들의 노닥거림에 나도 모르게 귀를 세웠다. 왜 그랬을까? 왜 남들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을까? 그렇게 되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그녀들의 노닥거림에서 나를 설이라는 한 마디를 주워들었다. 그리곤 바로 지나간 설을 떠올렸다.
설!
어제까지 명절 연휴였다.
이번 설은 아주 특별한 설이었다.
말을 유난히 많이 한 특별한 설날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특별하다는 말과 함께 따라온 얼굴이 눈에 펼쳐졌다. 세상을 살아온 자의 느긋한 표정이 성만 아재의 얼굴에 깃들어 있었다. 나는 그 아재에게 말했다.
아재! 아주 곱게 늙고 있어요. 아재 얼굴에는 은퇴한 노교수의 느긋하고 편안한 표정이 묻어나네요.
그렇게 보이냐고 묻는 아재의 말에도 느긋함이 배어 있었다.
아재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일부러 찾은 건 아니었다. 차례를 지내러 갔다가 성만 아재가 별장으로 꾸며서 산다는 집에 차가 서 있기에 들렀다가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우리는 명절 차례를 고향에서 모신다.
고향이라고 하면 아득히 먼 곳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집에서 차를 타고 출발하면 이십 분 정도 걸리는 도시 변두리가 되었다. 명절 차례는 고향 집에서 모시고 기제사는 편의상 형님이 사는 아파트에서 모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형님이 그렇게 하자고 해서 그렇게 모시는데, 차례를 그렇게 모시면 조상들의 혼이라고 고향 땅을 밟을 것이며, 또 우리도 가깝지만 등한시하는 고향을 한 번이라도 더 가게 될 거라는 말을 형님이 언젠가 했었다.
차례나 제사에 관해서라면 형님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제주는 형님이다. 형님을 기준으로 제사의 기준이 정해진다. 지금까지 고조부모 기제사나 차례를 모시는데 사대 봉제사라서 형님이 죽으면 그 제사를 더 이상 모시지 않는다. 사대 봉제사의 계산상 그렇다. 나는 차남이기에 제사에 관해서라면 나의 존재는 무시된다. 내가 죽든 말든 그건 고조부모 제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형님이 죽으면 장조카인 정봉이가 고조부모 제사는 빼고 또 장조카의 항렬에서 고조부가 되는, 나의 증조부모 제사부터 모시게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적에는 아버지께 고조부가 되는 조상의 제사나 차례를 모셨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연스럽게 맨 윗대의 제사가 하나 빠지고 형님이 물려받은 의식이다.
고향 집에는 새어머니가 홀로 살고 계신다.
새어머니가 들어오신 지, 사십 년이 훌쩍 넘는다. 이렇게 말을 하면 상당히 복잡한 가계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내가 군에 있을 적에 돌아가시고 오로지 사대 봉제사에 음식을 장만할 사람을 들인다는 명분으로 아버지는 새어머니는 맞으셨다. 새어머니는 오로지 사대 봉제사에 제수를 장만하러 들어오신 분이 되었다. 그리고 새어머니와 오래 행복하게 제사를 받들고 사셨으면 좋겠지만 아버지는 그러시질 못했다. 새어머니를 들이고 팔 년을 사시고 아버지는 가셨다. 새어머니를 두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는지 모르지만, 이끌어주던 고삐를 잃은 새어머니는 고향 집에 지금까지 눌러사신다. 혼자서, 달랑 혼자서 밥을 끓여 먹고 고향이라는 이름을 지탱하며 사신다.
그래서 고향에도 차례를 지낼 집이라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서 명절 차례를 모신다. 형님 고향에서의 차례를 고집할 적에는 분명 새어머니의 존재도 염두에 두었을 터이다.
배산임수.
뒤로 병풍처럼 둘러선 미석산에 귀를 묻고 들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에 길을 열어둔 나지막한 시골 마을. 그곳에 백삼십 호가 넘는 일가가 뿌리를 내린 집성촌이었지만, 고향 마을은 이제 피폐할 만큼 피폐해져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예전에는 아주 큰 동네였고 골목에는 조무래기들이 늘 말썽을 부리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우글거리던 마을이었는데, 그런 소리가 사라진 마을이 되었다.
명절이 되면 형수나 아내는 하루 전에 고향마을로 가서 제수를 장만하고 그곳에서 새어머니와 함께 잔다. 나나 형님은 명절날 아침에 들어가고, 그 꼬리를 물고 조카들이 제 조무래기를 데리고 들어오는 형편이다.
이번 설에는 아침에 내가 좀 일찍 들어갔다.
들어가서 보니 형수와 아내가 한참 차례상을 차리고 있었다. 형님은 당도하기 전이었다. 이런 짬에 윗마을이 어떻게 변했나 한 번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고향 집은 마을 어귀에 있는데 윗마을에는 객지의 사람들이 들어와 전원주택을 몇 채나 지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보지 못했다. 내 기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을 거니 생각하니 그 변한 모습이 상당히 궁금했다.
이런 짬에 기억에 밑거름을 주어야지.
걸어서 천천히 마을 뒤로 올라갔다.
예전에 초등학교를 다닐 적에 질러서 가는 길인 고개의 오솔길은 잡목이 무성했고 길은 아예 없어졌다. 당시에는 높은 고개였는데 야트막한 둔덕으로 보였다.
거기서 옛 기억과 장소를 일치시키기란 상당히 어려웠다.
그곳에 있는 어느 종가의 산소를 중심으로 조금 돌아다니며 여기가 어디쯤이거니, 몇 군데를 짚어가며 기억을 수정시키고 내려오는데, 누굴까? 큰 아재가 살던 집이 깔끔한 전원주택으로 탈바꿈해 있었고 마당에는 외제로 보이는 고급 승용차가 서 있었다. 큰 아재는 다 팔아서 서울로 올라갔는데 누가 들어와 사는지 소식을 듣지 못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내려오는데 설을 쇠러 온 상욱이가 골목에 서성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서너 살 적은데 집성촌 항렬로 따지면 엄연히 아재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면 할 말이 없어지는 법.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많이 변했다고 하며 저 전원주택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 물었다.
성만 형님!
아, 성만 아재!
그 호칭을 듣는 순간, 반갑다는 생각이 들었고 외지의 타인이 아니라 그 양반이 고향으로 돌아와 터를 잡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아재가 마을 위의 땅을 거의 다 샀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그곳에 전원주택을 꾸미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차가 있는 걸 보니 집에 계시는 모양이네. 일단 인사나 드리고 가야지.
상욱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데 전화가 왔다. 아내였는데 어딜 갔느냐고 물으며 형님이 당도했으니 빨리 차례를 모시러 오라는 전갈이었다.
집으로 내려가 차례를 모시고, 떡국을 먹고 다시 올라가니 마당, 잔디밭에 있던 아재의 차가 없었다. 빈집이었다. 전원주택을 마당 잔디밭에 서서 둘러보고 내려오던 참에,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노닥거리던 아가씨 셋이서 나갔다. 노랑머리의 키가 작달막한 아가씨가 나를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던지고 나갔다.
무슨 의미지?
그녀들이 의식할 정도로 내가 눈길을 주고 있었던가?
그걸 정작 나는 모르고 있었는데, 인사를 받고 보니 어딘지 모르게 민망했다. 산만해지는 눈길을 다독일 필요가 있다. 자칫하면 오해를 받을 수가 있다. 처음 보는 아가씨들인데 내 눈길이 혹시 불쾌하지는 않았나.
잠시 나를 더듬으며 다시 담배를 다시 물었다.
줄담배다.
그래, 설날 아침, 성만 아재가 없다는 걸 알고 내려오다가 마을 길에서 이장을 맡은 종주를 마주쳤다, 종주는 같은 항렬의 동생이니 나에게 깍듯하게 형님이라 부른다. 종주에게 들으니 아마도 성만 아재는 절에 잠시 갔을 거라고 했다.
절? 초하루 새벽부터?
그렇게 물었던가?
성만 아재는 차례를 집에서 모시지 않고 절에서 모신다는 걸 알았다. 종주 말로는 그게 요즘 돈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유행이라고 했다. 유행?
머지않아 내려오실 거라는 말을 듣고 들개의 축사로 갔다.
들개 아내가 떡국을 내왔다.
들개는 환갑 언저리가 되어도 아직 불알친구들 사이에 들개로 불리는, 고향을 지키는 유일한 친구다. 그의 축사에 딸린 작은 방은 언제나 아랫목이 따뜻했다. 그는 마을 앞, 들판 한가운데 우사를 지어 한우를 대대적으로 사육하는 부농이다. 그 정도면 어지간한 기업규모다. 술이 없어도 그 작은 방 아랫목은 항상 이야기가 넘쳐났다.
친구는 으레 명절날 오후면 내가 오는 줄 알고 있다.
아침에 올라가 보니 마을 뒤쪽에서는 어릴 적 기억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얘기를 물고 옛 기억을 더듬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자고 한 건 아니지만 둘은 이야기 속으로 쉽게 침몰했다. 이야기의 물은 깊어,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미 사라진 옛 모습을 군데군데 짚어보니, 둘은 상당히 많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뚜렷한 주제가 없이 그냥 옛날 풍경이나 사건을 짚어보는 데에도 정치에 관한 얘기보다 훨씬 감미로웠다. 둘이서 기억을 꺼내놓고 수정하고, 다시 재단하고, 틀린 부분은 합의해서 다시 저장하기까지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축사에 딸린 골방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성만 아재를 찾은 것은 해가 설핏할 무렵이었다. 차를 그대로 끌고 올라가 아재의 마당에 세웠다.
성만 아재는 오랜만에 만났다.
아이들 혼사에 어떻게 알았는지 번번이 부조를 보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이렇다 하고 인사를 한 적이 없었으니 아재를 만나는 건 숙제로 여겨졌다. 아재의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다. 하지만 지금 풍기는 뉘앙스는 은퇴한 노교수의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런 표정은 돈이 있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돈을 주고 살 수도 없는 표정이다. 세상을 통달한 다음 관조할 수 있는 시각이 생겼을 때 묻어나는 표정, 그 점을 아재에게 지적했다.
그렇게 보이냐? 자네 눈이 고맙네.
아재의 대답에도 여유가 묻어났다.
아무리 돈이 있어도 쓰는 법을 모르면 그건 금수와 진배없다.
돌아가신 숙부님의 말씀인데, 그건 아재를 본받으라고 하신 말씀이다. 아재는 돈을 잘 쓴다. 잘 쓴다는 말은 헤프게 쓴다는 말이 아니고 적절한 곳에 적절하게 갈증을 축이는 물이 된다는 말이다. 숙부님께서 배우라고 하신 건 그 부분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방직공장으로 들어가 자수성가한 아재는 지금, 웬만한 그룹 총수보다 일찬 기업을 거느리고 있다. 고향이라는 이름의 면에서 무슨 행사나 기부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 알고 찾아가는지, 체육회장, 노인회장, 발전협의회장, 동창회장, 엄청 많이, 자주 찾아간다는 소문은 뒤로 들었다.
그런 점에 내가 왜 미안할까?
아재에게 시간을 오래 뺏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적당한 시간이라고 판단될 때쯤 일어났다. 아재의 마당에 선 차는 들어갈 적에는 대충 보았는데 나올 적에 보니 벤틀리였다. 벤틀리? 얼른 보아도 웬만한 아파트 한 채 값이다.
아! 이게 벤틀리구나,
탄성을 질렀던가? 아직 그런 차의 운전석에 나는 앉아보지 못했다. 배웅을 나온 아재와 벤틀리에 관해서, 벤틀리에 대해서, 잠시 얘기를 했다.
아재의 좋은 기운을 받아 갑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설날입니다. 아재를 뵙게 되어.
진심에서 나온 말이다. 아재의 좋은 기운을 나는 분명히 받은 것이다.
아재는 골목을 나서는 내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뒤에 눈은 없지만 그걸 느낄 수가 있었다.
아재를 생각하니, 아니 그 자식을 생각하니 담배를 한 대 더 물지 않을 수가 없다. 어느 탑승구에서 탑승을 시작했는지 내가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일 때, 흡연실에 붐비던 승객들 한 무리가 주섬주섬 챙겨서 빠져나갔다.
뭐야?
시계를 보니 내가 타야 하는 탑승구가 아니다. 굳이 나가서 확인할 필요가 없다. 조금 더 기다려야 내가 가야 할 탑승구의 문이 열릴 것이다. 무리가 챙겨서 나가는 틈을 비집고 면세점 직원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들어섰다. 내 눈은 순간적으로 아가씨를 따라갔다.
아서라, 눈을 다독이자.
성만 아재를 전범으로 여기는 ‘벌로’가 있었다.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 모르지만, 다들 벌로라고 불렀다. 벌로? 함부로, 섣불리 이런 뜻으로 쓰이는 경상도 방언인데 그 자식의 고유명사로 굳었다. 집성촌에 빌붙어 사는 ‘타성받이’후손인데, 우리가 살던 집성촌에서는 다른 성을 가진 사람들은 타성받이라고 했다. 그들은 대부분 머슴이나 소작농으로 동네에 들어와 살면서 뿌리를 내린 집안이다.
정초부터 그를 떠올리는 건 재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성만 아재를 생각하니 그 틈바구니에 덤으로 따라온 자다. 벌로의 이력을 생각하면 약간 성만 아재와 닮은 점도 있다. 벌로는 중학을 졸업하고 당시에는 귀하다는 덤프트럭 조수로 가서 운전을 배웠다. 그 방면에서 성공할 수도 있다. 거기까지는 성만 아재를 닮았다.
성만이를 능가할 거야. 나는
벌로의 입에 붙은 말이었다. 집성촌 동네에서 다를 성만 아재라고 부르는데 벌로가 말하는 그 호칭은 항렬과 더불어 싹수가 노래서 주위의 빈축을 샀다.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래? 두고 보자는 식으로 벌로에게 냉소를 띄웠다.
벌로는 십 원이 있으면 백 원짜리 장사를 시작하려고 덤볐다. 백 원짜리를 하든, 천 원짜리 사업을 시작하든, 제 돈이나 제 이름으로 빚을 내서 하면 누가 뭐라고 하겠냐만, 집성촌의 좀 만만한 사람을 찾아가 보험을 넣는 데 필요하다면서 인감을 받아 보증보험에서 돈을 왕창 빌렸는데, 보험은 보험이지만 까딱하면 채무를 떠안는 고약한 보험이었다. 남에게 자신도 모르게 보증을 세워 돈을 빌려 잘 나갈 때는 일제 신모델 덤프를 여러 대 할부로 보유하기도 했다. 그 정점에서 어디 가서 앉으면 제 자랑이었고, 성만이 그 자식을 반드시 능가할 거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왜 나이도 한참 어린 그 자식 입에서, 성만 그 자식이 되어야 하는지 듣는 사람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맘쯤 제가 차린 사무실에 채용한 아가씨를 제 조강지처와 자리바꿈을 하기도 했다.
벌로는 집성촌 사람 여럿을 거덜내고 잠적했다. 한꺼번에 터지는 바람에 그 자식으로 인하여 동네는 쑥대밭이 되었고 제 친구들 여럿은, 누구의 빚인지도 모르는 빚을 갚느라 십 년 이상의 세월을 탕진하기도 했다.
아, 갑자기 그를 왜 떠올렸을까?
담배 맛이 쓰다.
흡연실에 너무 오래 있는 게 아닌가. 주위를 둘러보니 흡연실 한쪽 구석에서는 아예 독서를 즐기는 인간도 있었다. 내가 흡연실에 들어올 적부터 한쪽 구석에서 담배를 물고 책을 읽고 있는 사내 하나, 저런 사람에게 흡연실은 얼마나 요긴하며 인간적인 공간인가.
이제 탑승 시간이 거의 되어가는 모양이라 여기며 마지막 담배에 불을 다시 붙이는데,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다.
아, 없으면 몰라도 있는 거 다 알고 달라는데 어떻게 안 줘요?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떠오른 말.
벌로에게 일 번으로 당한 현길의 말이었다. 약간 모자라 아직 떠꺼머리총각으로 사는 현길이 뱉은 말인데, 그게 한동안 마을에 유행어처럼, 바람처럼 휘젓고 다녔었다. 벌로에게 인감을 왜 떼 주었냐는 제 당숙의 물음에 한 대답이었다.
이 자식이 왜 죽었을까?
문자 메시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분명 현길의 부음이다. 메시지를 보낸 이는 불알친구들끼리 모은 계의 총무를 맡은 천수였다. 이번 설에도 고향에서 현길을 보지 못했다. 명절이면 현길은 차례를 보시는 제 동생 집으로 간다. 아직 떠꺼머리인 그는 맏이지만 차례상을 차릴 형편이 되지 않기에 제 동생, 현수가 사는 대구로 내려간다. 그래서 설날이면 현길의 집은 항상 비어있다. 그러므로 나는 설이 되어도 현길의 집에 들르지 않는다. 이게 공식이 되었다.
이 자식을 언제 보고 못 봤던가?
출국하려는 발길에 갑자기 느껴지는 버벅거림.
메시지를 보낸 천수에게 전화를 해야 마땅했다.
바로 천수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천수를 찾아가는 신호음이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낙엽처럼 아득했다. 흡연실 유리를 통해 233번 탑승구에 승객들이 줄을 서는 모습이 아득하게 보였다. 손가락에 사이에 끼인 마지막 담배에서 길게 붙은 재가 휘어지고 있었다. 나는 나를 감싸고 있는 껍질을 부수고 나갈 수가 없었다. 느닷없이 생긴 이 껍질의 정체는 뭔가? 천수를 향하는 신호음은 낭떠러지를 향해 한없이 울리고, 나를 에워싼 껍질이 딱딱하고 두텁게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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