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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까니언 프랙시스 (LPI) 정신분석 상담&교육
참된 글쓰기란 진리에 관하여 말하는 글쓰기다.
여기서 진리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하여 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하는 사물들의 질서는 세상을 지배하는 고정관념이 설정하므로,
참된 글쓰기는 그러한 고정관념의 권력에 항의하는 행위, 일종의 액팅-아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가?
우선 먼저 존재하는 사물들을 지배하는 언어를 소진시켜야 한다.
정신분석 임상은 이와 같은 소진을 위해 내담자의 발화를 유도한다.
그리하여 존재하지 않는 존재, 공백으로서의 존재,
도래할 존재를 위한 새로운 기표가 생산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정신분석이 글쓰기라는 실천과 공유하는 가치는 바로 그러한 “새로움의 도입”이다.
- 백상현, < 라깡의 진리 이론 : '세미나 17' 강해 >, (2020년 하반기 출간예정). .... 중에서.
라깡 세미나 17 : 정신분석의 이면 : 1강 강해, 강의록(백상현)
1부 : 라깡의 진리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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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S1과 S2
1969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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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praxis으로서의 “세미나”
17번째 세미나: < 정신분석의 이면 >은 우선 먼저 장소의 차원에서 새로운 시작이었다. 1969년11월 라깡은 세미나의 장소를 ENS, 즉 파리 고등사범학교가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3번째의 장소 변경이 있었던 것인데, 이를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53년 라깡이 첫 번째 공식적인 세미나를 생탄(Saint-Anne) 병원의 강의실에서 시작했던 이후 10년간 강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던 것이 1963년 프랑스정신분석협회로부터의 파문을 계기로 장소를 옮기게 되어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자리를 잡았고, 다시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늘, 1969년 11월 26일은 고등사범학교를 떠나 파리 1대학의 법학부 강의실로 옮기게 된 첫 번째 시간이다. 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강의를 여는 라깡은 이곳에서 강의를 하도록 조력해준 인사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다. 더불어서 이처럼 3번의 자리 옮김이 있었던 세월 동안 자신을 따라 세미나에 참여하려 주었던 동지들, 제자들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하며 시작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라깡은 이번 세미나에서는 지난 20년간 해왔던 것처럼 매주 강의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공지한다. 이 시기부터 라깡은 2주에 한 번씩 강의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세미나 17에서 그는 매월 두 번째와 세 번째 수요일에만 강의를 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세미나를 시작하는 라깡을 강해하며 필자에게 문득 떠오른 인상은 그가 1963년 진행했던 11번째 세미나, < 정신분석의 4 가지 근본 개념들 >의 첫 번째 강의 장면이다. 파문당한 직후 라깡은 고등사범학교에 새로운 둥지를 틀면서 매우 비장한 말투로 “기지base”라는 표현을 썼었다. 전쟁과 전투 또는 투쟁을 암시하는 군사적 용어로서의 “기지“. 이것은 프랑스 정신분석 협회로부터 파문당한 당시 라깡의 현실을 대변하는 의미를 갖는 표현이었다. 그것은 라깡의 새로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유럽 정신분석학계의 반발과 축출에 대항하여 자신의 새로운 이론적 여정을 시작해야 했던 고독한 학자적 투쟁의 서막을 알리는 표현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라깡에게 세미나의 강의실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아마도 당시의 비장함은 다소 감소되었을지 모른다. 이제 라깡의 위상은 더 이상 위태로운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66년 그의 저서 < 에크리 >가 출간되었고, 이를 계기로 정신분석학계는 물론, 철학과 사회학을 아우르는 프랑스 인문학계는 “Lacan”이라는 이름을 하나의 고유명사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제 라깡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넘어선 거장이었다. 그의 이름은 정신분석학계를 비롯하여 인문학계 전반에 걸친 지식의 장(S2)을 흔들어 변화시킨 S1, 즉 주인기표가 되었다. 누구도 그를 축출시킨 프랑스정신분석협회가 어떠한 임상의 방향을 취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자크 라깡”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언제나 초유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와 유럽을 넘어 영미권의 학계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문학의 스타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시점에, 라깡은 강의실을 옮기게 된다. 파리 1대학, 법학부 강의실. 그리고 라깡은 6년 전 고등사범학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학교 인사들에게 감사의 말을,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우정의 말을 건네며 시작하고 있다. 특히, 세 번의 장소 변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줄곧 따라 주었던 청강생들에게. 이와 같은 감사의 말은 그저 빈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라깡에게 세미나라는 실천은 다른 많은 인문학자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라깡은 책을 쓰는 학자는 아니다. 그보다는, 그는 평생을 세미나를, 공개된 대중 앞에서의 강연을 주요한 임무로 간주했던 사람이다. 물론 < 에크리 >를 출간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라깡은 자신을 한 번도 “작가”로서 간주한 일이 없었다. < 에크리 >라는 대작은 어떤 의미에서는 필요와 요청에 못이겨 출간된 기표의 더미에 불과했으며, 라깡 자신이 보다 공들여 세공하려고 했던 것은 매주 수요일 정오라는 동일한 시-공간에서 반복 되는 강연들이었다.
책을 쓰고 출판에 가담하여 지식의 영역에 참여하고, 그에 따르는 “피할 수없는 타협”에 응하는 대신, 라깡은 주인기표를 발화하여 세상의 상징계를 뒤흔드는 보다 전복적인 행위를 실천하려 했다. 그가 자신의 진정한 실천적 스승으로 생각하는 소크라테스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수요 세미나는 바로 그러한 발화 사건의 현장이었다. 참석자들의 지식을 흔들어 상징계의 외부로 끌어내는 폭력의 장소. 말하는 자의 기표가 듣는 자들의 침묵과 부딪혀 파생시키는 잉여 주이상스의 힘을 체험하는 장소. 그리하여 말 속에서 죽음충동이 넘실대는 것을 감당해야 하는 장소가, 바로 라깡이 생각하는 세미나이며, 세미나를 실천한다는 것의 의미였던 것이다. 라깡이 장소를 옮겨 새로이 시작되는 세미나의 장소에 이처럼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매주 수요일, 같은 장소에서 반복되는 세미나는 세상이 우리에게 강제하는 반복에 저항하는 장치로서의 반복이었다. 그것은 세상이 우리에게 강박적으로 제시하는 욕망의 루틴으로부터 빠져나가는 라깡적 잉여향유의 루틴이었다. 바로 여기서 라깡은 참석자들에게 주인기표를, 공백을 등진 기표라고 묘사될 수 있는 그것을 던지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러한 공백을 양도trado받은 참석자들은 다시 그것을 번역traduire해 내야만 하지만... 그러나 그의 기표들은 번역불가능한 공백의 기표다. 그러하게, 참석자들은 번역불가능한intradusible 라깡의 기표와 마주치고, 그로부터 새로움을 도입introduire할 것을 요구당한다. 하나의 기표를 다른 하나의 지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의 기표는 지식의 세계를 몰락으로 이끌고 이윽고는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주체를 이끌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시작되는 라깡의 17번째 세미나는 그것이 상징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지식을 담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여전히 동일한 공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중요성을 찾아야 한다. 물론 < 정신분석의 이면 >은 라깡의 이론이 전회하는 중요한 계기의 지식들을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라깡이 자신의 세미나에 줄곧 참석하여 준 참석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은, 자신의 세미나가 던지는 기표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해 주었던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라깡의 세미나가 언제나 동일한 공백을, 단일한 공집합을 생산하는 반복의 장소라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만 동의될 수 있는 차원이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도록 만드는 몰락과 창조의 조건으로서의 공백은 그 어떤 요소도 갖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일자이며, 라깡의 세미나가 그의 목소리를 통해 환기시키고자 했던 것 역시 그러한 공백이기 때문이다. 라깡이 이미 1963년의 세미나에서 임상실천에 관하여 규정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그의 세미나 역시 과학이 아닌 실천의 차원을 토대로 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공백을 생산하고 반복하는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면모가 임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세미나의 실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의 세미나는 우선 먼저, 지식의 전파가 아닌 정치적 실천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 모든 종류의 권력행사에 항의하는 정치적 실천. 라깡이 오늘 강의에서, 장소를 옮겨 새로이 시작되는 세미나의 장소에 이처럼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전동 자전거의 습견 또는 < 큰사물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
강의를 여는 인사의 말을 마친 라깡은 세미나 장소와 주기의 변화가 초래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며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그는 지금 강의실에 있을 지도 모를 이름 모를 한 여성과의 짧은 만남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한다. 거리에서 택시를 타려던 자신에게 전동-자전거를 탄 한 여인이 다가왔고, 당신이 라깡 박사인지, 그리고 세미나를 다시 시작할 것인지를 질문했다는 것이다. 이에 라깡은 “세미나는 곧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더니, 여성이 어디서 할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서 라깡은 곧 알게 될 것이라는 말만으로 대답을 마쳤다. 그러자 여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리더라는 것이다. 사건을 회고하며 라깡은 만일 그 여성이 이 자리에 있다면 사과하고 싶다고 말한다. 세미나의 정확한 일시와 장소를 알려주는 대신, 그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 성의 없는 태도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라깡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에 있어서, 이는 확실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하게 해 주는 기회라고 할 수 있는데요, 어떤 방식이 되었든 다른 사람의 과도함에 의해서 우리가 스스로가, 최소한 겉으로는, 그렇게 과도해진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타인의 과도함은 언제나 여러분 자신의 과도함과 동시에 발생하여 만날 뿐이기 때문입니다.” 5.
풀어보자면 이렇다. 라깡은 자신을 갑작스레 멈춰 세우고 질문을 퍼부었던 한 여성의 과도함이 라깡 자신의 조금은 무례한 방식의 응대를, 그러니까 정확한 일정과 장소를 알려주지 않는 과잉된 태도를 끌어낸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도한 것처럼 간주되었던 여성의 태도와 관련 없이, 이미 자신에게도 무언가 초과되는 사태의 압박이 존재했을 것이고, 이 둘이 만나 드러난 사건이 전동 자전거 여성의 에피소드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라깡이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는, 여성에 대한 사과의 표시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라깡이 과도함 또는 초과를 의미하는 l‘excès에 대해서 언급한 만큼 그것이 세미나17의 전체를 가로지르며 암시하게 될 주제에 관하여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해서, 초과와 잉여가 암시하는 주이상스는 외부로부터 오는 이방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상징계 내부에서 이미 생산되는 잉여향유와 같은 것이다. 전동자전거의 습격이 라깡을 과잉대응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라깡이 처한 상황 내부에 초과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앞으로 전개될 강의의 이론적 핵심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즉, 지식의 체계로서의 상징계 내부에서 발생하는 주이상스의 잉여적 초과에 주목하는 이론이 그것이다. 전동자전거의 여성은 지식 또는 정보를 알고자 했다. 이에 대해서 지식을 담지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의 라깡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대신 과잉된 행동을 보이며 응답했지 않은가? 이에 대해서 라깡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어떤 걱정거리의 과도함에 사로잡힌 상태에 있었던 것이지요. 분명히 그러했기에 내가 곧바로 적절치 못한 태도라고 느끼게 된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대상a와 잉여향유를 등가의 개념으로 보면서 그것을 초과로서 규정하는 세미나17의 주이상스 이론은 상기의 에피소드를 통해 그것이 내밀성l'extimité의 사건으로서 다루어 질 것이라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백상현의 강의록)
2020년 2월 1일, 한국 LPI (Lacanian Praxis Institute) 백상현 정신분석학자의 이번 주 강의에서는 세미나 17: "정신분석의 이면" 3강의 다음 구절이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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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표는 고로, 하나의 주체를 다른 하나의 기표 앞에서 표상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이상스를 겨냥하는 반복으로서 최초의 반복강박에 의미를 부여하며 시작합니다.”
--- 이를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
주체를 표상하는 구조로서, 이항기표 앞에서 무한 반복되는 단항기표가 주이상스를 겨냥한다는 것이다. S2 앞에서 자신을 무한 반복하는 것으로서의 단항기표. 여기서 S2는 대학담화의 왼쪽 항을 지배하는 지식-상징계와 등가를 이루는 개념이다. S2는 그 토대에 S1으로서 아버지의-이름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주체를 대리하는 단항기표는 진리의 자리에 빗금친 주체를 은닉한 한 S1, 즉 (S1/$)이다. 그리하여 단항기표는 언어에 대하여 전적으로 외부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신체를 빗금으로 표지하면서 그것을 상징계의 내부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S1- >S2로 이어지는 상징화의 시도, 즉 신체에 빗금치는 시도는 언제나 불완전하며, 그로부터 잉여적인 것이, 파생물이자 초과하는 효과가, 엔트로피 효과라 할 수 있는 그러한 현상이 발생한다. 지금 라깡은 바로 이러한 잉여효과를 주체라고 부르고 있다. 주체가 잉여항유이며 대상a라고 말하는 것이 가리키는 바가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는 외부의 흔적이며 절편이자 파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상징계 내부에서 외부를 상상하게 만드는 흔적이 곧 주체라는 것이다.
S1의 기원적 반복이 겨냥했던 것은 주이상스에 다름 아니라는 라깡의 설명을 이처럼 해독하는 것은, 주체를 대리하는 S1 곧 외부를 도입하는 기표라는 사실로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라깡의 주체라는 개념을 ‘외부’의 반복적 도입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서 주체는 외부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다. 만일 사정이 이러하다면, 주체를 대리하는 단항기표로서의 S1과 주인담화의 S1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또는 대학담화에서 지식의 S2를 토대에서 지탱하는 S1은 반복강박으로 주체를 대리하는 S1과 어떻게 다른가? 이에 대해서 잠시 짚고 넘어가자면 다음과 같다. 즉, 주체를 대리하며 S2앞으로 대려가는 S1은 전적으로 외부의 기표이다. 그것은 상징계의 구조를 이루기 전의 표지로서의 외부기표일 뿐이다. 반면에 주인담화에서 S2에게, 즉 노예에게 노동을 강제하는 S1은 이미 상징계의 지배자이다. 또는 대학담화에서 지식의 기표인 S2를 토대에서 명령하는 S1은 지식의 지배자로서의 아버지의-이름이다. 그러니까 대학담화나 주인담화에서의 S1은 권력의 기표인 동시에 모든 지식이 의존하는 권위의 기표이다. 반면에 주체를 대리하는 단항기표로서의 S1은 그와 같은 권력에 대한 외부의 기표이며, 이제 막 내부로 포섭되려는 기표에 해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역시, 라깡의 주체 개념은 ‘절대적 차이’의 방문이며, 그러한 방문의 강박적 반복의 사건일 수 있다. 주체의 사건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무엇의 방문 그 자체, 고로 이방인의 방문으로서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라깡이 세미나 7에서 구약의 명제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문장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환기해 볼 필요가 있다. 거기서 라깡은 히브리어의 ‘이웃’이라는 단어가 ‘동포’에 반대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라깡이 이해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란 동일시가 불가능한 대상, 동일한 일자의 권력에 의해 셈해지지 않은 대상, 상징화에 저항하는 대상에의 욕망에 대한 명령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은 주이상스에 대한 사랑이며, 절대적 차이에 대한 사랑이다. 바로 이러한 사랑의 사건이 주체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임상적 차원에서 고려한다면, 그것은 바로 주체를 증상 그 자체로 파악하는 태도이며, 증상으로서의 주체를 사랑하라는 정언명령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자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주체에 대한 사랑. 성숙한 자의식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증상적 흔들림에 대한 사랑이 분석의 정언명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