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put from “Anointed” at Headquarters
본부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로부터의 입력
Witnesses are informed that ‘the greatest concentration of “anointed” ones in any one place on earth’ is to be found at the international headquarters in Brooklyn. 42 That is a fact. But it is one that is completely meaningless as regards the actual direction of the work of Jehovah’s Witnesses throughout the world or with regard to the “food” supplied, the Bible explanations and doctrinal information Witnesses receive from the international headquarters. Any headquarters staff members who are of the “anointed” but who are not privileged to be members of the inner circle of the Governing Body are never—on the basis of their being of the “anointed”—called in to Governing Body meetings to express their views. They are never interviewed on that basis and are rarely talked to on matters of weight. They are as much in the dark as to what goes on in the Governing Body meetings as any 19-year-old boy in the Bethel headquarters family. Yet they are supposedly part of the “faithful and discreet slave” class to which the Master has entrusted all his goods! 43 증인들에게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 가장 많이 집중된' 곳이 어디냐에 대해서 '지상의 어느 한 장소를 들라면 브루클린 국제본부로 알고 있다.42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 각처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실제 사업의 방향이나 공급되는 '양식'과 관련해 증인들이 국제본부로부터 받는 성경 해설과 교리적 내용에 대해서는 기름부음 받은 자의 의미가 전혀 없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지만 통치체의 내부 구성원이 될 수 있는 특권이 없는 본부 직원은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의견을 표현하기 위해 통치체에 결코 초청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문제의 토의에 참여한 적이 없으며 그들의 생각 속에 성서의 중요한 점을 내포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은 베델 본사에서 일하는 19세 청소년 만큼이나 통치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그러나 파수대 해설에 따르면, 그들도 분명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맡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의 일부일 것이다. When opinions are sought by the Governing Body, they are generally sought from men such as the secretaries in the “Executive Offices,” some of whom also serve as secretaries for the individual committees of the Governing Body (and as such are permitted to express themselves in committee meetings, though they do not attend sessions of the full assembly of the Body), or opinions may be solicited from members of Branch Comittees or from the Brooklyn Service Department or similar sources. Yet these are sources composed almost entirely of men not professing to be of the “anointed.” 통치체가 의견을 구할 때는 일반적으로 「집행부」의 실무자들로부터 의견을 구하게 되는데, 그 중 일부는 통치체의 개별 위원들의 업무보조 역할도 한다. (따라서 통치체의 정식 모임의 회기에는 참석하지 않지만 위원회 모임에서는 의사표현이 허용된다.) 또는 의견을 지부 위원 또는 브루클린 봉사부 또는 이와 유사한 부서로부터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거의 전적으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고 공언하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된 부서이다. How can this possibly be harmonized with the claims made? If the Governing Body does not pretend to be itself “the faithful and discreet slave,” and if the claim is indeed true that it simply acts on behalf of the collective number of all “anointed” ones—as their representative and spokesman—how can its members have around them at the Brooklyn headquarters the ‘greatest concentration of anointed in any one place on earth’ and yet have no provision for consulting these fellow members of the “faithful and discreet slave” class, receiving input from them? 어떻게 이것이 워치타워의 공식적 주장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만약 통치체 자체만으로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라고 자처하지 않는다면, 동시에 통치체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인 기름부음 받은 자들의 반열 전체를 대표로만 활동한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ㅡ그리고 기름부음 받은 자들의 대표이자 대변인으로서ㅡ부룩클린 본부가 가장 많은 기름부음 받은 자로 이루어져 있는 지상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그들로부터 의견을 듣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의 동료들에게 상의할 수 있는 마련이 되어 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The fact is, they simply do not operate that way. They never have. The exalted role and privilege of the approximately 8,600 “anointed” as depicted in the published teaching is, as stated, both theoretical and fictional, not real, not of substance. In the end, the great respect and deference, the loyalty and submission which the four-million non-anointed members are called on to give to this “faithful and discreet slave” class, actually winds up as the portion of a small group of men, the dozen or so men forming the Governing Body. If one is in any other position—congregation elder, circuit or district overseer, missionary, branch office staff member, Branch Committee member, or international headquarters staff member—his being of the “anointed,” a member of the “faithful and discreet slave” class, will not cause his thoughts to be shown any greater consideration, or grant him any greater voice in what is published or done, than would be the case with any of his non-anointed peers. 현실은 그들은 조직을 그런 참여의 방식으로 전혀 운영하지 않는다. 또 그들은 그런 식으로 운영해 본 적도 결코 없다. 출판물의 해설에 언급된 바와 같이 약 8,600명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의 역할과 특권은 이론적이고 허구적이지 결코 실제적이거나 실질적이지 않다. 결국 4백만 명 이상의 기름부음을 받지 않은 증인들이 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에 나타내도록 요구받는 큰 존중과 존경심, 충성심과 순종의 실체는 통치체를 구성하는 12명 정도의 남자 노인들, 즉 소수 집단의 몫으로 전락하게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회중 장로, 순회 또는 지역 감독자, 선교사, 지부 직원, 지부 위원, 국제본부 직원 등 다른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그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의 일원인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사실이 기름부음을 받지 않은 동료들보다 그의 생각을 더 많이 배려하게 하거나 출판이나 다른 어떤 분야에서 더 큰 목소리를 내게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If it were possible to bring together all of the 8,600 members of the “anointed” ones, or even a majority of them, so that the question could be put, “What does the ‘faithful and discreet slave’ believe and teach on such and such a point?” there is not the slightest doubt that the response of virtually all would be to quote from the Watch Tower publications or refer to these as the source of an authentic answer. That response would not be truly their own, it would simply be repeating, echoing what they have been told, since they themselves had nothing to do with the development or presentation of that answer, in any part of the publication process. Even though representing a great majority of the so-called “slave class,” they could not speak for themselves as such a class, could do no more than quote what they are given. They would feel afraid to do otherwise. In reality, there is only one distinguishing thing about such “anointed” ones and that is that once a year they partake of bread and wine while others around them abstain. The rest of the year their being part of the “slave class” has no genuine significance. Only when it comes to being a member of the Governing Body does one’s being of the “anointed” become a decisive factor, since being such is a requirement for membership therein. If the person is outside that small, powerful administrative group, he will find that his profession of being “anointed” is simply not a factor as to what he does, what voice he has in matters, what consideration is given to his views, or what assignments he receives from the organization. The 8,600 “anointed” ones who are not of the Governing Body know that this is the reality. The current Governing Body members know it also, but evidently give it little thought. '기름부음 받은' 성원 8,600명 전부나 대다수의 성원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들이 이러저러한 점에 대해 무엇을 믿고 가르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때, 사실상 모든 사람들의 답변은 토씨 하나 안 틀리게 워치타워 출판물에 나오는 그대로일 것이며, 권위있고 정확한 답변의 출처로 이런 출판물들을 참고한다는 데에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 답변은 진정으로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이 듣고 배운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집필과 출판 과정의 어떤 부분에서도 그 답변의 결과나 해석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기 때문이다. 소위 '종 반열'의 대다수를 대표한다고 해도, 그들은 자신있게 자신의 이해를 말할 수 없고, 이미 주어진 출판물의 내용을 인용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출판물과 다르게 말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런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해서 1년에 딱 한번 주변 사람들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는 일로 구별되는 일이 있을 뿐이다. 한해의 나머지 기간 동안은 그들이 "종 반열"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단, 통치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관한 한, 오직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데, 왜냐하면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사실이 통치체의 성원이 될 수 있는 자격 요건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사람이 그 작고 강력한 행정 집단을 벗어나 있다면, 그는 "기름부음 받은" 그의 신분이 그가 하는 일, 그가 어떤 문제에서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어떤 견해에 발표할 배려를 베푸는지, 또는 조직으로부터 어떤 임무를 받는지에 대한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통치체가 아닌 8,600명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은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물론 안다. 현 통치체 성원들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Without frankly or openly acknowledging the true situation, the article in the March 1, 1981 Watchtower mentioned earlier makes an apparent effort at justifying the existing situation found in the Watch Tower organization, wherein a tiny fraction of the “slave class” exercises complete authority over the kind of spiritual “food” that is prepared and served and the direction of the activity and practices of all Jehovah’s Witnesses, with the vast majority of the “anointed” who are not part of the authority group having no voice whatsoever in the matter, and being themselves expected to submissively accept whatever the small authority group gives to them. After quoting the familiar text in Isaiah 43:10-12, in which Jehovah refers to Israel as both “my servant” and “my witnesses,” the article makes a somewhat subtle effort to justify this situation by saying (page 25): 앞서 언급된 1981년 3월 1일 파수대 기사는 실제 상황을 솔직하게든 공개적으로든 인정하지 않고, 워치타워 조직에서 드러난 기존의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워치타워 조직에서는 "종 반열" 중 극히 작은 집단인 통치체가 영적 "양식"을 준비하는 일에 대해 권한을 완전히 장악하여 그 영적 양식에 대해서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는 대부분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과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 방향과 실천 방향을 제시한다. 또한 그들은 이 작은 권위 집단인 통치체가 그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어떤 것이든 순종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기사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나의 종'과 '나의 증인'으로 지칭하는 이사야 43장 10절, 12절의 친숙한 성구를 인용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다소 묘한 노력을 기울여 이 상황을 정당화시키려 하고 있다(25쪽): |
Even though not any individual shared in adminstrating the nation`s affairs, all individuals made up the one people, God`s servants. Only a few shared in writing or copying the Holy Sciptures, yet the apostle Paul could say of the people of Israel ; " They were entrusted with the sacred pronouncements of God."(Rom, 3:1, 2) 비록 어떤 이도 국사의 행정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한 민족을 구성했다. 오직 몇 사람만이 성서를 기록하거나 필사했지만,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하느님의 신성한 선언을 맡았다는 것입니다."(롬 3:1, 2) |
The examples here chosen, however, actually serve only to confuse and blur the issue. Jehovah spoke of Israel as his “servant” and his “witnesses,” not as his “administrators” or “inspired writers.” They were all to serve, each individual. They were all to be witnesses by personally putting their faith and trust in Him and thereby testifying to his Godship. Administration and inspired writing were not at issue. The Christian congregation was not modeled on the nation of Israel with an earthly administration by a king and his officials. It has only one heavenly King and Administrator, Christ Jesus, the Head of each Christian man and woman.44 And the inspired writings of the Scriptures have been completed, with no provision for their continuance by any in post-apostolic times. So these factors have no true parallel for Christians in our time. And they certainly supply no justification for using Jesus’ parable regarding the faithful steward to uphold as rightful the authority of a small group of persons to control and dictate what other members shall receive as to their understanding of God’s Word and the application thereof.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예는 사실 문제를 혼란스럽게 하여 초점을 흐리게 하는 데에만 기여할 뿐이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그의 '관리자'나 '영감 받은 필자'가 아니라 그의 '종'또는 '증인'으로 표현했다. 그들은 각자 서로를 위해 봉사해야 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을 증언함으로써 증인이 되었다. 행정적인 문제를 다루는 자나 글을 써는 필자가 누구냐 하는 것은 쟁점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인 회중은 한 왕과 그의 신하들에 의해 지상 행정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위에 모델로 세워진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회중은 오직 한 명의 천적인 왕이며 행정가이시며, 그리스도인 남녀 성원들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44 한편 영감을 받은 성경의 기록들이 완성되었을 때, 사도시대 이후에는 어느 시대에도 그 기록된 내용에 어떤 부가적 마련도 이루어진 바 없다. 따라서 인용된 성경본문의 요소들은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병행점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그 적용에 대해 다른 성원들이 받을 양식을 통제하고 명령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충실한 관리인에 대한 예수의 비유를 그들에게 적용하는 것에 대한 어떤 확실한 정당성도 제공하지 못한다. There is a clear inconsistency in this use of the parable. When interpreting many of the other parables of Jesus, the Watch Tower Society’s publications regularly acknowledge the fact that the particular action or activity depicted applies to all anointed Christians, being carried out by each of them in a figurative way. Thus, if the parable speaks of fishermen using a dragnet, it is acknowledged that all anointed Christians do a ‘fishing work,’ not just some of them. (Matthew 13:47-50) If the parable deals with attenders at a wedding meal, it is said that, although some may be discovered to be unworthy attenders, all anointed Christians are figuratively in attendance, not just a few of them. (Luke 14:16-24) If the parable deals with servants being entrusted with valuables of their master, with which they are to produce increase, even though the “quantity” may vary (in accord with the parable’s presentation), nonetheless all anointed Christians are viewed as receiving valuables with which to work for increase, none exempted. (Luke 19:11-27; Matthew 25:14-30) If the parable deals with wise virgins who keep their lamps lit in expectation of the master’s arrival, this is presented as indicating that anointed Christians should continue alert, and maintain their supply of the “oil” of the holy Spirit so as to continue as light-bearers. (Matthew 25:1-10) Christ clearly intended his parables to be taken to heart by each person and applied in a personal way. But when it comes to the “faithful and discreet slave” the Watch Tower organization makes the clear implication that only some of the “slave class” may actually do the real food preparing and supplying, that only some may do the actual administering of the master’s earthly interests. There is a brief attempt made in the article to show that all of the “anointed” members do indeed share in the fulfillment of the faithful steward figure and his feeding work. Thus, on page 26, the article in the March 1, 1981 referred to says: 이 비유의 사용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다. 다른 많은 예수의 비유들을 해석할 때, 워치타워 협회의 출판물은 특정한 행동이나 활동을 설명하면서 그 비유의 인물들은, 기름부음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일상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물을 사용하는 어부들의 비유에서 말하자면,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중 특정 소수의 사람에게만 비유가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어부에 비유되어 '고기 잡는 일'을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마 13:47-50) 만약 이 비유가 혼인잔치의 식사에 초대 받은자들을 다룬다면, 비록 비유에서 초대받은 자의 일부는 초대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는 것이 밝혀지더라도, 기름부음 받은 자들 중 특정인이 아닌, 비유적으로 모든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초대받고 있다고 설명한다.(누가 14:16-24) 만약 그 비유가 그들이 늘려야 할 주인의 귀중한 소유물을 맡긴 종들을 다루고 있다면, 비록 "양(量)"은 (비유의 달란트가 다른 것처럼) 다양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외 없이 모두가 늘리기 위해 장사해야 할 귀중한 소유물을 받는 것으로 취급된다 . (Luke 19:11-27; Matthew 25:14-30) 만일 비유가 신랑이 올 것을 기다리며 등불을 켜놓고 있는 지혜로운 열 처녀들을 다룬다면, 이는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하여 깨어 있도록 성령의 '기름'을 공급받아 등의 빛을 밝게 유지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설명된다.(마 25:1-10)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그의 비유를 각 사람에게 적용해 보도록 의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비유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 관한 한, 워치타워 조직은 오직 "종 반열"의 일부만이 실제 양식을 준비하고 공급할 수 있고, 오직 일부만이 주인의 지상 관심사를 실제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암시를 분명히 준다. 그 기사에는 "기름부음 받은" 모든 성원들이 충실한 청지기 모습과 양식을 공급하는 일에 실로 참여하고 있다는 짤막한 언급이 있다. 이와 비슷하게, 1981년 3월 1일자 파수대 기사는 26면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It is Scripturally true that all Christians share in ‘building up the body’ of Christ’s believers as this paragraph demonstrates. The question is, how do all those of the 8,600 “anointed” who are not part of the authority structure share in fulfilling the picture of the “faithful slave” in the way all other publications of the Watch Tower Society present it? To briefly say that “each respective member” makes “a contribution to the building up of the body” does not answer the question. If all the “anointed” are part of the “slave class” and the remaining 4,000,000 of Jehovah’s Witnesses are not, how is the “contribution” of the vast majority of the “anointed” any different from those of the “non-anointed” class? Do not all Witnesses make some kind of “contribution” to the “building up” of the Witness community—including the building up of those of the “anointed” within it? What, then, is distinctive about the “contribution” of these “anointed” outside the authority structure that causes the parable to be fulfilled in them but not in the “non-anointed” Witnesses? 이 항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신자들의 '모임'을 구성'하는 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성서적으로 볼 때 참이다. 그러나 의문점은 권위 구조에 속하지 못한 8,600명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 워치타워 협회의 다른 모든 출판물들이 제시하는 방식으로 "충실한 종"의 모습을 성취하는 일에 참여하는가 하는 것이다. '각각의 성원'이 단순히 '모임'을 구성하는 데에 참여한다'고 말하는 것은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가 모두 '종 반열'에 속하고 여호와의 증인들 중 나머지 4백만은 종 반열이 아니라면, 대다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기여'가 '기름부음 받지 않은 자'의 기여와 어떤 점에서 다른가? 모든 증인들이 증인 공동체의 "구성"에 일종의 "기여"를 하지 않는가? (그 안에 "기름부음 받은" 증인들의 "구성"을 포함하여) 그렇다면 이러한 권한 구조 밖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들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 이 아닌 증인들에게서 비유가 성취되도록 하는 "기여"와 구별되는 다른 점은 무엇인가? As has been shown, when it comes to the parable of the faithful steward and his providing of “food at the right time,” the feeding is consistently related to the information received through the “channel” of the central organization. Beyond denial, in the minds of Jehovah’s Witnesses this “food” is one thing only: the teaching supplied by and through the publications of the Watch Tower Society, emanating from its international headquarters, a viewpoint that has been carefully nurtured in them by the organization. When Witnesses speak of something coming from the “faithful slave” they mean that it originates with and comes from the Brooklyn headquarters. Anything from any other source does not qualify. As has been clearly demonstrated, only a tiny fraction of the 8,600 “anointed” have anything whatsoever to do with the information thus supplied. Only a tiny fraction also exercise the supervision supposedly entrusted in fulfillment of the slave’s being placed ‘over all his master’s goods.’ The paragraph quoted simply never addresses these realities or the existing disparity.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충실한 관리인의 비유와 그가 "적절한 시기에 양식을 제공하는 것"에 관한 한, 그 공급은 중앙 조직의 "통로"를 통해 전달된 정보와 일관되게 관련되어 있다. 증인들에게 이 "양식"은 오직 한 가지, 즉 워치타워 협회의 출판물을 통해, 그리고 그 국제 본부에서 나오는 가르침, 그리고 그 조직이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발전시켜왔던 관점을 가진다. 증인들이 "충실한 종"으로부터 오는 무언가에 대해 언급할 때, 그들은 그것이 브루클린 본부에서 비롯되거나, 브루클린 본부에서 직접 전달되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소스로부터 오는 어떤 것도 해당되지 않는다. 충분히 설명한 바와 같이, 8,600명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 중 극히 일부만이 이렇게 제공된 정보와 관련성을 가진다. 이들 중 극소수만이 종이 '주인의 모든 소유 위에' 놓여진 것을 맡도록 위임된 것으로 추정되는 관리권을 행사한다. 인용된 파수대의 기사는 이러한 사실과 기존하는 차이를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
Masking Over Reality—For What Purpose?
실제 권위구조를 덮는 목적은 무엇인가?
What, then, does the fictional teaching about a worldwide administrative and spiritual-food-supplying slave “class” accomplish? It provides a prime basis on which the organization’s authority rests, by which a small group of men, whose number represents only one seventh of one percent (0.0014) of the 8,600 “anointed,” assumes the right to determine not only what all the “anointed,” but in fact all Witnesses, will read, study, believe and practice. By its stress on a “class” it also serves to robe the real authority structure with a shroud of anonymity, giving the appearance of a wide diversity of membership and globality that is ‘not of whole cloth,’ simply not true. This fictional concept enables the real authority structure— the dozen or so members of the Governing Body—to ask for almost total obedience to their own directives without appearing as arrogant or self-serving. 그렇다면, 세계적인 조직 관리와 영적인 양식을 제공하는 종 "반열"에 대한 허구적인 가르침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조직의 권위가 달려 있는 주요 근거를 제공하며, 그 권위에 의해 8,600명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 중 1퍼센트(0.0014)의 겨우 1/7에 불과한 소수의 사람들이 나머지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실 모든 증인들에게, 읽고, 연구하고, 믿고, 실천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결정할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반열"을 강조함으로써 그것은 또한 실체적 권위 구조를 익명의 장막으로 가리는 역할을 하며, '전체가 아니며' 사실과는 다른 외관상의 다양한 구성과 세계성을 제공하는데 이 허구적인 개념은 실질적인 권위 구조 즉, 통치체의 십여 명의 성원들이 거만하거나 자기 잇속만 차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며 그들의 지시하는 바에 거의 완전한 순종을 요구할 수 있게 만든다. If, for example, they were to say, “Any person engaged in a type of employment that we twelve men here in Brooklyn have decided is wrong, must either quit or be disfellowshiped,” the focus would be on them and the tremendous power they exert over the lives of the individual members of the worldwide community of Witnesses. By speaking of the “faithful and discreet slave class,” attention is diverted from the small power group as the true authority structure. As “the slave class” that authority source takes on a certain vagueness, an amorphous quality and an extensiveness belonging to an essentially faceless aggregation that is not definable or identifiable in any real sense for the average member. The euphemistic use of the expression and, surprisingly, their own belief in the concept, also enables the Governing Body members to publish statements calling for almost total submission to their decisions without being troubled personally by a sense of arrogance. 예를 들어, 만약 "여기 브루클린에 있는 12명의 사람들이 어떤 직업이 성서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결정을 내려,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일을 그만두거나, 아니면 제명되어야 한다"고 그들이 말한다면, 그 말은 이들의 권위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고, 전 세계 증인 공동체의 개별 구성원들의 삶에 그들이 행사하는 권위는 엄청난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을 거론함으로써 진정한 권위 구조의 실체로서의 작은 권력집단이라는 생각은 비켜 나가게 된다. 권위의 출처가 어떤 모호함을 가지면서, 본질적으로 얼굴 없는 집단에 속하는 무형의 성질을 나타내며 일반 신도들이 어떤 실제적 의미에서도 정의 할 수도 없고 식별할 수 없는 광범위한 의미를 띠는 "종 반열"로서의 이미지를 가지기 위한 것이다. 대한 자신들의 권위 실체를 완곡한 표현과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통치체 성원들이 개인적으로 교만한 느낌을 주지 않고 자신들의 결정에 대해 전체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거의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가르침을 펼 수 있게 된다. The Watch Tower’s multifaceted claims regarding a “slave class” formed of a collective body of “anointed” ones prove, one after the other, to be unsupportable, even fictional. What message, then, does this parable of the Master genuinely bring to us? '기름부음 받은' 자들의 집합체로 구성된 '종 반열'에 대한 워치타워의 다중적 주장은 지지 될 수 없으며, 심지어 허구임이 속속 입증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이 충.슬.종의 비유는 어떤 진실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일까? |
Christian Stewardship
그리스도인의 청지기 직분
In proportion as each one has received a gift, use it in ministering to one another as fine stewards of God’s undeserved kindness expressed in various ways.—1 Peter 4:10.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의 훌륭한 관리인으로서, 각자 선물을 받은 대로 서로 섬기는 일에 그 선물을 사용하십시오.ㅡ베드로 첫째 4:10 |
The greatest objection to the Watch Tower Society’s heavy and constant emphasis on an organizational “slave” as fulfilling Christ’s parable, is that it robs the parable of much of its force. The real lesson is lost and the parable serves the principal purpose of a prop, supporting an exercise of religious authority by the small group of men forming the Governing Body. 워치타워 협회가 반열로서의 "종"을 그리스도의 비유를 성취하는 것으로 계속 무게 있게 끊임없이 강조하는 데 대한 가장 큰 걸림돌은, 그것이 비유가 가진 의미의 상당부분을 앗아 간다는 점이다. 참된 의미는 사라지고 비유는 소그룹들이 통치체를 구성하여 종교적 권위를 행사하는 의미를 지지하는 버팀목이라는 역활을 강조하는 목적에 주된 도움이 되게 할 뿐이다. There is nothing wrong of itself with describing as a “class” those Christians who fulfill in their lives the things taught in Jesus’ parable of the faithful and discreet slave. A “class” can refer to a number of persons who have similar characteristics, who share similar qualities, or hold certain principles in common, or who engage in a similar course in life. But this does not require that they form part of, or be tied in with, some system or structured group. They are of that “class” because of what they are as persons, not because of what they belong to or hold membership in with regard to some organization. The term, for example, is often used to refer to persons who share the same economic or social status (the “wealthy class” or the “educated class” or the “underprivileged class,” and so forth) without regard for any organizational affiliation they may or may not have. In this sense all Christians are of the same “class.” They should all share certain identifying characteristics, hold beliefs and principles in common, follow a similar course in their walk in life, be subject to the same headship. Persons who manifest the same qualities often associate together, drawn to one another because of a common viewpoint and belief and hope or because of mutual standards. Christians similarly should feel drawn to one another for these reasons, and because of mutual love. But the fact remains that it is because they have those qualities as individuals that their likeness and their affinity exist, not because of their being members of some visible organization, an institutionalized association. The “body of Christ,” to which “class” all anointed Christians belong, is a spiritual body, its members not identified by earthly organizational membership. 예수의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 대한 비유를 통해 주는 교훈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종 반열'로 묘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반열"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거나,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거나, 어떤 원리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거나, 비슷한 인생 행로를 걷는 여러 사람을 집합적으로 가리킬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시스템이나 구조화된 그룹의 일부를 형성한다거나 관련되어 있을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어떤 조직에 소속되어 있거나 소속과 관련하여 신분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들로서 자신의 성향 때문에 그런 "반열"에 속한다. 예를 들어, 이 용어는 종종 그들이 가질 수도 있고 갖지 않을 수도 있는 조직적 제휴와 관계없이 동일한 경제적 또는 사회적 지위("부유층" 또는 "교육받은 계층" 또는 "취약계층" 등)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의 '반열'이다. 그들은 모두 특정하게 구별되는 특성을 공유하고, 신념과 원칙을 공통으로 지니고, 그들의 삶에서 비슷한 과정을 따라야 하며, 같은 '머리'에 속해 있어야 한다. 같은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은 공통의 관점과 믿음, 희망 또는 상호 비슷한 표준 때문에 서로 끌리고 서로 연합된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이유와 상호 사랑 때문에 서로에게 끌림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비슷함과 친밀감이 존재하는 것은 개인으로서 그러한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그들이 어떤 가시적인 조직, 제도화된 협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반열'에 속하는 '그리스도의 몸'은 영적인 몸이며, 그 구성원이 지상의 어떤 조직의 성원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The Watch Tower organization uses the term “class” in a very different way. It sets aside the normal sense of the term and gives it its own special meaning. It states that the designation of the “slave class” applies to persons only as they form part of an organization-connected class and therefore the designation does not and cannot have an individual application to anyone not affiliated with that particular visible organization. No matter what Christian characteristics, beliefs, qualities and course of life a person manifests, these are not determinative in identifying him or her as of the “slave class.” Connection with the Watch Tower organization is an indispensable requirement. Without that all other factors lose their force in identifying one as of the “faithful and discreet slave” class. Thus the organization sets, not only its own definition of the “class,” but also its own parameters determining who can qualify to be within the “class” and who remains outside. One particularly damaging feature of heavy emphasis on a “class” is its influencing people to think in terms of fulfilling what is taught in the parable through group membership, rather than being concerned to demonstrate personally the particular Christian qualities set out therein, including faith, discretion, a sense of individual responsibility, watchfulness or any of the other qualities that Jesus’ parables frequently stress. The restricting of the parable’s application to 8,600 persons and eliminating its application as regards millions of other members not of their “class,” compounds the damage done. 워치타워 조직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반열"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워치타워는, 용어의 정상적인 의미는 제쳐두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종 반열"의 의미는 그들이 조직으로 연결되는 반열의 일부를 형성할 때에만 적용되므로, 그 의미는 특별히 보이는 조직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에게 개별적 적용을 하지 않으며 적용할 수 없다고 명시한다. 사람이 어떤 그리스도인 특성이나 신념, 자질 그리고 어떤 인생 행로를 나타내든, 이것들은 '종 반열'을 기준으로 그 사람을 식별하는 데 결정적인 근거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워치타워 조직과의 연계는 필수불가결한 요건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모든 요인들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의 한 사람으로 식별되는데 있어서 의미를 상실한다. 따라서 조직은 "반열"에 대한 자체적인 정의뿐만 아니라 "반열" 내에 속할 사람이 누가 자격을 갖추고 있고 누가 자격이 없는지를 결정하는 자체적으로 긴준을 설정한다. "반열"을 심도있게 강조하는 특징에 데미지를 가하는 특별한 한 가지는 예수의 비유들에서 늘 강조되는 믿음, 분별력, 개인의 책임감, 깨어있음이나 그 밖의 다른 자질들과 같은 그리스도인 특성을 개인적으로 입증하는데 관심을 두기 보다는, 그룹의 멤버쉽을 통해 비유의 교훈점을 성취하는 관점으로 생각하도록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비유를 8,600명으로 제한하고 다른 수백만의 성원들에게는 그 반열에 속하지 않은 것으로 그 비유를 적용함으로써 데미지를 가중시킨다. The organization’s presenting one view in theory, while following another policy in practice (whereby the Governing Body to all intents and purposes becomes the “steward” having charge over all Christ’s earthly interests) results in the parable’s purpose being perverted. Rather than its serving as an exhortation to modest, faithful service to one’s Master and one’s fellow servants, it is used principally as a means to demand unquestioning submission to the Governing Body’s direction. 조직이 이론적으로 제시하는 한 가지 관점은 실제적으로는 비유의 의도와는 다른 의도(모든 일과 목표에 대해서 통치체가 그리스도의 모든 지상 관심사를 책임지는 "관리자"가 됨)로 적용하는 동시에 비유의 목적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것은 주인과 동료 하인들에게 겸손하고 충실한 봉사에 대한 교훈으로 작용하기 보다는, 주로 통치체의 지시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요구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Illustrating this, in one Governing Body meeting, Grant Suiter quoted a Watch Tower missionary as having said to him, “There is a faithful and discreet slave. Once we find out who he is, from then on it is simple: If he is wrong, he is responsible to God.”45 Governing Body member Suiter manifested obvious approval of this attitude. Yet the idea that some collective group, through its leadership, can bear the responsibility for what we as individuals do—simply because we unquestioningly follow their directions— is totally false and contrary to what the Scriptures teach. It is the same philosophy that enables men to commit acts that are contrary to what is true or right, and perhaps contrary to their conscience, and then seek to excuse themselves of responsibility by saying that their political or military or commercial leaders told them to do so. The Scriptures are clear that when we stand before the judgment seat of God and Christ we stand as individuals and as individuals answer for what we have done.46 이를 설명하면서 그랜트 수이터는 워치타워 선교인의 말을 인용하였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있다. 일단 그가 누구인지 알아내면 그때부터 간단하다: 만약 그가 잘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45 통치체 성원인 수이터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분명한 승인을 표명했다. 그러나 어떤 집합적 집단이 그 지도력을 통해 우리가 틀림 없이 그들의 지시를 따르기 때문에, 개인으로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거짓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다. 사람이 진실이나 옳음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어쩌면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범하게 한 다음, 자신의 정치나 군사나 상업적 지도자들이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해 책임에 면죄부를 받으려 하는 것도 같은 핑계이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심판의 자리 앞에 설 때 우리는 개인으로 서고 개인으로서 우리가 한 일에 대해 답한다는 것이 분명하다.46 When this general subject surfaced in one Governing Body session, I raised the question of the validity of insisting on restricting the application of Jesus’ parables to “classes” (in the way the organization uses the term). If this was right, then such application should be consistent, not arbitrary. Did we say, then, that there is a “ten-minaclass” and a “five-mina-class” in applying the parable found at Luke 19:12-27? If so, who were, or are, they? Surely that identification would have to be determined, not on a group basis, but on an individual basis, and in reality only Christ could make such an identification. The same might be said regarding Luke 12:47, 48, in which Jesus says: 이 일반적인 주제가 한 통치체 회의에서 표면화되었을 때, 나는 예수의 비유의 적용을 '반열'(조직이 용어를 사용하는 방식에서)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의 타당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그러한 적용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일관성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19:12-27에 나오는 비유를 적용하는데 '10므나 반열'과 '5므나 반열'이 있다고 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였을까, 아니면 누구인가? 분명히 신분의 정체성은 집단기준이 아니라 개인기준으로 결정되어야 할 것이며, 실제로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런 신분의 정체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누가 12:47, 48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Then that slave that understood the will of his master but did not get ready or do in line with his will will be beaten with many strokes. But the one that did not understand and so did things deserving of strokes will be beaten with few. 그때에 주인의 뜻을 이해하고도 준비하지 않았거나 주인이 시킨 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고 매 맞을 일을 한 사람은 적게 맞을 것입니다. 참으로, 누구든지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될 것이며 많이 맡은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요구될 것입니다. Were we then to say that there is a “many strokes class” and a “few strokes class”? If so, who were or are these? Again this would have to be determined, not on a group basis, but on an individual basis, being discernible and determinable only by the Master who can read human hearts and who “will reward each person according to what he has done.” (Matthew 16:27) Certainly no one can claim that there is, or has been, some specific, identifiable group or “class,” joined by organizational ties, membership in which would serve to identify one as part of the “many strokes class” or of the “few strokes class.” The Watch Tower Society does not choose to employ their practice of “class” application here, yet this section of Luke is the same one in which Luke presents the parable of the “faithful and discreet slave” found in Matthew chapter twenty-four. Surely logic should call for a consistent “class” application.47 그렇다면 우리가 "여러 대의 매를 맞는 반열"과 "조금 맞는 반열"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그룹 단위로가 아니라 개인 단위로 결정되어야 할 것이며,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자신이 한 일에 따라 각 사람에게 보상할 주인"에 의해서만 분별이 가능하고 결정 가능해야 할 것이다.(마 16:27) 어느 누구도 특정하고 식별할 수 있는 그룹이나 "반열"이 있어서, 조직적 유대 관계에 의해 연합되어 있거나, "여러 대를 맞는 반열" 또는 "조금 맞는 반열" 중 하나로서 식별되는 역할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있거나 있어 왔다고 주장할 수 없음은 확실하다. 워치타워 협회는 여기서 그들의 "반열" 적용을 늘 하던 식으로 선택하지는 않지만, 누가의 이 부분은 누가가 마태복음 24장에서 발견되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의 비유를 제시하는 것과 같다. 일관된 "반열" 적용을 해야 논리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47 I brought up these points in the session but there was no response from any of the Governing Body members. As was so often the case, discussion simply shifted to other matters. 나는 통치체 회의에서 이 점들을 꺼냈지만 통치체의 어떤 성원들로부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토론은 말없이 다른 문제로 넘어갔다. |
42 See, for example, the Watchtower of February 15, 1981, page 19.
42 예를 들어 파수대 1981년 2월 15일 호 19쪽을 참조하라
43 A listing in my files from the 1970s shows 24 “anointed” men other
than the Governing Body at headquarters. I cannot recall a single one
of these ever being invited to express himself to the Governing Body
as a whole on any topic during the nine years of my being on the Body.
43 1970년대의 내 파일에 있는 명단에는 본부에 있는 통치체 이외의 24명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이 있다. 나는 9년 동안 내가 통치체에 몸담고 있는
동안 어떤 주제에 대해 전체 통치체 모임에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기 위해
초대된 사람은 이들 중 단 한 명도 기억할 수 없다.
44 1 Corinthians 11:3; Ephesians 1:22, 23.
44 고린도 첫째 11:3; 에베소서 1:22, 23
45 He was quoting a Gilead graduate, who, as I recall, was serving in Latin America.
45 그는 길리어드 졸업생을 인용하고 있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중남미에서 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46 Matthew 12:36, 37; Luke 12:48; Romans 14:10-12; 1 Corinthians 4:5; Galatians 6:4, 7, 8.
46 마태 12:36, 37, 누가 12:48, 로마서 14:10-12, 1 고린도 첫째 4:5, 갈라디아 6:4, 7, 8.
|
첫댓글 성서의 모든 해석은 문맥의 흐름과 역사적 이해(팩트로서의 진위)의 바탕 위에 신학적 의미를 과거 현재 미래에 적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워치타워는 충슬종의 의미를 오직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어 (통치체의 권위를 높이려고)신학적 의미만을 해석한 결과 다른 복음서(예:누가복음)와의 조화를 깨뜨렸고 결국 본질적인 의미에 데미지를 입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내가 볼 때는 복음서의 모든 비유와 교훈은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적용된다고 볼 수 없고 오히려 셀 수없는 흰 옷 입은 큰 무리에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큰 흰 무리는 예수님과 1:1 관계로서 구원을 얻기 때문이다.
144,000(상징적이든 문자적이든)은 실제 유대인에서 택함 받은 자를 가르키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면적 유대인과 진정한 유대인으로 가른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반박할 지 모르지만 바울의 그 말은 단지 할례라는 유대인의 관습을 지킬 필요와 관련해서 적용했을 뿐이다
바울은 마지막 때에 유대인이 다시 돌아올 것을 말했고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접붙여진 가지라고 이야기 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반드시 유대인이 통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144,000이 서로 자기네 교인에서 나온다고 하는 주장은 모두 틀린 것이며 아전인수격 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