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수선하는 고행복 씨
개암 김동출
지난여름, 건조기에 넣어 말리다 길이가 짧아진 바지 몇 벌을 수선하려고 나선 길에서 ‘행복 옷 수선’ 가게를 찾게 되었다. 폐업한 롯데백화점 마산점 맞은편 골목길 모퉁이에 조용히 자리 잡은 그 가게는 이름만큼 따뜻한 기운을 풍겼다. 개업하며 선물 받은 “崇德廣業(숭덕광업)”이라는 현판이 걸린 두 평 남짓한 가게는 아담한 공간이었다.
작업대 맞은편 벽면 아래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반들거리는 소파가 놓여 있었고, 맞은편 가운데에는 주 작업대를 중심으로 각종 수선 도구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부라더(Brother) 미싱과 오버록, 커버스티치, 지그재그 미싱이 동선에 맞게 배치되어 있었다. 입구 맞은편 벽면에는 다양한 색깔의 실들이 보기 좋게 꽂혀 있었고, 선반 아래에는 자, 초크, 재단 가위 등이 주인의 성품을 드러내듯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화자의 또래로 보이는 처음 만난 사장님은 빙그레 웃으며 인자한 기운을 풍겼다. 수선을 맡기고 작업하는 동안 조심스레 말을 붙여보니 온유함과 겸손함이 묻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 한쪽 편에는 따뜻한 인상이 오래 남았다.
두 번째로 그 가게를 찾은 날은 숨 막히게 더운 여름이었다. 수선할 옷을 맡기고 작은 성의라도 보이고 싶어 근처 커피점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사들었다. 다시 가게 문을 열자, 사장님은 손에 쥔 바느질을 마친 뒤에야 마시겠다며 고마움을 전하셨다. 그 순간, 나는 먼저 자기소개를 하고 실례를 무릅쓰고 나이를 여쭈었다.
“56년생입니다.”
“와, 사장님 우리 또래네요! 동네에서 한두 살 차이는 친구지요.”
내 말에 사장님의 얼굴은 금세 화색으로 물들었다. 굳게 닫혀 있던 입이 서서히 열리며, 마치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듯한 기운이 가게 안에 번졌다. 그날 이후 나는 이 수선가게를 단골로 삼아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작은 인연이지만, 여름날의 냉커피처럼 시원하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다.
1956년 6월 4일 경상남도 마산합포구 자산동에서 5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69년 무학초등학교를 졸업하였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웨슬레 고등공민학교(교장 서익수)”에 입학하여 6개월간 공부하였다. 그 후 학업을 중단하고 성호동 맞춤복 거리에서 옷 짓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손재주가 뛰어나고 총명하여 기술 습득이 빨라, 스무 살이 되기 전 이미 독립하여 가게를 열 수 있을 정도의 경력을 쌓았다. 병역의무를 마친 뒤 성실한 인품을 지켜본 이웃 할머니의 중매로 진동마을 전(全)씨 가문의 규수를 만나 1984년 1월 2일 혼례를 올렸다. 결혼 후 아내와 함께 “청송”이라는 상호로 작업복 맞춤 집을 개업하며 신접살림을 시작하였다.
고행복 씨, 그는 崇德(덕을 높이 받들고 크게 쌓는다)’ 정신을 삶의 좌표로 삼아 평생을 걸어왔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개업 초기에는 주로 중·고등학생 교복을 맞추며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1983년 교복 자율화가 전면 시행되자 교복 제작을 접고, 곧바로 회사 사원복 제작에 몰두하였다. 그의 손재주를 눈여겨본 S 전기 구매부장의 도움으로 사원복 납품을 시작하게 되었고,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건희 회장의 품을 직접 재어 사원복을 맞추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러나 다른 회사에 납품하는 과정에서 수천만 원에 달하는 대금을 사기당하는 불운을 겪으며 사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그는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고, 삶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젊은 시절 그는 연예인 뺨치게 용모가 출중하였으므로 친구의 권유에 따라 한때 나이트클럽의 바지 사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생 재봉틀을 돌려온 그에게 있어 유흥업은 체질에 맞지 않아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그는 다시 심기일전하여 “홈플러스 창원점”에 옷 수선가게를 열었다. 당시 호경기를 타고 수선 물량이 넘쳐 직원을 고용하기까지 하였으며, 옷 수선 학원도 운영하였다. 그러나 수강생이 적어 학원은 접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정든 마산으로 돌아와 ‘행복 옷 수선소’를 열었다. 그는 슬하에는 올곧게 잘 자란 두 아들을 둔 타고난 옷 수선 기능인이었다. 옷의 종류와 상태를 가리지 않고 그의 손이 닿으면 주문한 대로 빠르고 완벽하게 해결되었다. 새 옷과 헌 옷을 가리지 않고 품을 늘리고 바지 길이를 조정하며, 떨어진 단추도 순식간에 꿰맬 수 있었다.
2025년 11월 초, 이른 추위가 닥쳤을 때의 일이다. 행복 씨와 안면이 있는 듯한 한 노인이 소매에 담뱃불로 인한 구멍이 난 패딩을 들고 와 구멍이 더 커지지 않도록 손봐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패딩을 살피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구멍을 감쪽같이 메워냈다. 노인은 수고료 대신 흡족한 웃음을 머금고 “수고했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그 모습은 신기하고 흐뭇하였다. 그는 이처럼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며 이웃에게 인정을 베풀며 살아왔다.
2025년 6월, 행복 씨의 칠순 잔치가 열렸다. 그는 가장으로서 가정을 책임졌고 자녀들을 돌보았다. 잔치 자리에서 두 아들은 아버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상패를 준비했다. 상패에는 "위대한 아버지상"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 상패는 금속으로 만든 공식적인 상패가 아니라, 아버지의 삶을 기리는 상징적인 증표였다. 가족들은 이날 행복 씨의 역할을 되새겼다. 행복 씨는 상패를 받아서 들며 가족의 마음을 확인했다.
『위대한 아버지 상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고행복
가족을 위해 쉼 없이 달려오신 우리 아버지.
당신과 함께한 모든 날, 모든 순간이 감동이었습니다.
사랑으로 길러주신 은혜에 감사와 존경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가족 일동』
그것은 인고의 세월 속에서 참사랑으로 자녀들을 바르게 길러낸 ‘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을 담은 상패였다. 문안을 읽는 동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훌륭한 아버지에 두 아들도 필시 효자임이 분명하다. 화자(話者)가 상패 문안을 낭송하는 동안 그는 흐뭇하게 웃으며 잠시 추억에 잠기는 듯 보였다. 오늘의 행복이 있기까지 아내의 뒷바라지가 있었음을 그는 숨기지 않았다.
덕불고 필유린(德不孤必有鄰). 덕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으며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이다. 평생 바늘 끝으로 옷을 꿰매며 이웃의 삶까지 함께 이어온 고행복 씨의 인생은 바로 그 말의 증거였다. 그의 바늘은 단순히 옷을 고치는 도구가 아니었다. 찢어진 천을 다시 잇듯,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고 꺼져가는 희망을 밝혀내는 손길이었다. 그래서 그의 가게는 ‘행복 옷 수선소’라는 이름처럼, 작은 공간 안에서 수많은 사람의 하루를 새롭게 수선해 주는 따뜻한 터전이었다.
지난한 세월을 꿋꿋하게 살아온 우리의 이웃 “고행복 씨”의 인생은 오늘도, 바늘 끝에서 찾은 행복으로 이어지고 있다.
2025-11-27
첫댓글 사람의 삶의 모습....즐감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