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곶 순교성지 순교자 전
강화 지역이 교회와 특별한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양요와 이에 이은 병인박해 때이다. 어느 박해보다도 극심하게 이루어졌던 병인년의 교난을 초래했던 병인양요의 현장이 바로 강화도이다.
그리고 1868년에는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치선(張致善), 박순집(朴順集)의 형 박 서방, 50세 된 조참봉의 부친 등이 병인양요와 연루되어 강화에서 순교하였으며, 1870년에는 통진 출신 권 바오로가 20세의 나이로 강화에서 교수형을 받기도 했다. 또한 1871년 신미양요(申未洋擾) 때는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당한 강화에 살던 천주교 신자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박상손(朴尙孫) 등이 갑곶진두에서 순교하였다.
증거자 박순집(朴順集) 베드로(1830-1911년) [갑곶 순교성지 순교자 전]
박순집 베드로(1830~1911)는 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 밖 전생서(典牲署. 현 용산구 후암동)에서 순교자 박 바오로와 김 아가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모의 도움으로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의 심부름꾼이 되기도 하며 주교님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박순집 베드로의 아버지 박 바오로는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치명한 앵베르 주교, 샤스탕, 모방 신부의 시신을 목숨을 걸고 노고산에 매장하였다가 4년 후에 시흥(현 서울 관악구) 삼성산에 안전하게 이장하기도 하였다. 박순집의 부친 박 바오로는 1868년 3월 23일 자기 아들(박순집의 큰형) 집에서 잡혔고, 아들 내외와 동생과 함께 포청옥에서 치명하였다. 잡혀 간지 6일 만에 비신자 일가들이 시신을 찾아 매장했다고 한다.
박순집은 25세에 그의 부친과 같이 훈련도감의 군인이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 브르트니에르(Bretnie?res, 白, 1838~1866, 유스토) 신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1840~1866, 루도비코) 신부, 도리(Dorie, 金, 1839~1866, 헨리코) 신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미카엘) 신부,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1830~1866, 가롤로) 신부와 우세영(禹世英, 1845~1866, 알렉시오) 등이 3월 7일과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할 때 박순집은 군인으로 참여하게 되어 이를 직접 목격하였다.
그래서 박순집은 아버지 박 바오로의 뜻을 이어 가기로 결심하고, 박순지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3월 28(음) 시신을 찾아내어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4월 14일(음)에 다시 와서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3월 7일과 9일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과 최형 베드로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왜고개에 안장하였다.
병인박해로 박순집의 가족도 결국 체포되어 1866년 10월 17일 형 요한의 아들 박 바오로(20세), 고모 박 막달레나, 1868년 3월 29일 부친 박 바오로(63세)가 잡혀 순교한 것을 비롯하여, 그 일가 16위의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나 박순집은 여러 박해의 검거망을 기적적으로 피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래서 박베드로는 가족 시체들을 찾아내어 안장하였다.
이후 1979년 9월 26일 박순집의 공적을 기리고 그의 부친 순교자 박 바오로를 비롯한 “일가족 16위 순교자 현양비”를 제막하였다. 박순집에 의해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묻혔던 왜고개에는 현재 군종교구 국군 중앙 성당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