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았던 유년기
위대한 블루스 뮤지션을 꿈꾸었던 로버트 존슨은 어느 새벽, 도커리 농장(훗날 이 도커리 농장은 델타 블루스의 성지로 불리게 된다.) 근처 교차로를 향했다. 그 사거리에서 악마로 추정되는 어느 검은 생명체를 만난 로버트 존슨은 자신의 기타를 내주었고, 악마는 기타를 조율한 뒤 몇 곡을 연주했다. 악마의 기운이 깃든 기타를 돌려받은 로버트 존슨은 귀신같은 실력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압도적인 연주력을 내세워 델타 블루스계를 평정했다. 《파우스트》에 나오는 거래처럼 로버트 존슨은 신들린 연주력의 대가로 자신의 영혼을 내주었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27세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이런 신화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로버트 존슨은 1911년 5월 8일, 미시시피 주 헤이즐버스트라는 촌구석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당시에 헤이즐버스트의 인구는 2천 명을 조금 넘는 수준으로 작은 동네였고, 현재도 4천 명이 채 안 된다. 짧고 굵은 음악 활동과 신화적인 이야기와는 대비되는 초라한 출생이 배경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에게는 형제가 아홉 명이나 있었다. 남부의 가난한흑인이 자식을 무슨 열 명씩이나 낳았을까 싶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의 아버지 찰스 도즈는 지주였다. 그 덕분에 로버트 존슨의 삶은 꽤 유복한 편이었다. 당시 남부 흑인 농부는 대부분 백인에게서 경작지를 임차한 소작능이었으므로 찰스 도즈는 굉장히 특별한 케이스에 해당된다. 그런데 실은 찰스 도즈는 그의 친부가 아니었다. 친부는 노아 존슨이라는 자다. 하지만 로버트 존슨은 친부와 함께 생활하지 못했고, 이후에도 그를 만났다는 기록이 없다.
풍족한 삶은 오래가지 않았다. 찰스 도즈는 백인 지주들과의 분쟁으로 헤이즐버스트를 떠나야 했다. 떠난 후 첫 2년 동안 로버트 존슨은 그의 어머니와 지냈지만, 얼마 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멤피스에 있는 찰스도즈에게로 보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있는 미시시피 델타로 돌아간 것으로 보아 멤피스에서 그리 잘 지냈던 것 같지는 않다. 당시에 그의 어머니는 스물네 살 어린 남자 더스티 윌리스와 살고있었다. 당시 몇몇 지인은 로버트 존슨을 리틀 로버트 더스티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당시에 로버트 존슨은 찰스 스펜서, 로버트 스펜서 등의 이름을 사용했다. 훗날 그가 떠돌이 생활을 할 때도 그는 여러 가명을 사용한다. 로버트 스펜서라는 이름으로 학교에 등록했던 그는 당대 흑인으로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편에 속했고, 실제로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다. 졸업 뒤에는 그는 친부의 성을 딴 로버트 존슨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당시 최고의 슬라이드 기타리스트였던 선 하우스는 로버트 존슨이 살고 있던 로빈슨빌로 옮겨 왔다. 선 하우스는 이때 만난 로버트 존슨의 모습을 기억했다. “하모니카는 제법 불었지만 기타 연주자로서는 ‘부끄러울 정도의 꼬맹이’였다.”라고 회고했다. 선 하우스가 연주했던 스타일은 델타 블루스였다. 델타 블루스는 선 하우스와 로버트 존슨이 거주했던 미시시피 델타 지방에서 유행한 블루스 음악이다. 남부시골의 흑인들이 연주했던 블루스라는 의미에서 컨트리 블루스로 불리기도 한다.
미시시피 델타라는 지역은 미시시피 주의 북서부 지역으로 아칸소주와 루이지애나 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 이 경계를 나누는 것이 바로 미시시피 강인데, 이 강과 야주 강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 바로 미시시피 델타다. 면적은 약 1,787km2로 면적이 1,847km2인 제주도보다 약간 작은편이다. 이 지역의 날씨는 혹독하다. 여름을 길고 무더우며, 높은 습도 때문에 금세 땀투성이가 되곤 한다. 날씨는 최악이었지만 델타의 넓은 광야가 토양으로 비옥했던 탓에 농사짓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노예 시대부터 대규모 농장이 자리했던 곳으로 노예 해방 뒤에도 큰 발전 없이 농촌의 모습을 유지했고, 수많은 흑인은 소작농의 삶을 살았다. 그러니까 1차 산업 이 주 수입원인 촌동네라는 이야기다.
이 시골에서 블루스 음악가들은 통기타 하나에 의지해 노래했다. 1장에서 이야기했던 W. C 핸디라든지 메이미 스미스 등의 음악가들의 블루스는 대중음악화된 도시의 블루스였다. 그들의 음악은 규모가 있는 공연장이나 음반으로 접할 수 있었던 반면, 델타 블루스 음악가의 블루스는 델타 지역의 허름한 술집에서 접해야만 했다. 연주 규모부터 달랐다. 빅밴드를 동원했던 도시의 블루스와 달리 델타 블루스 연주자들은 통기타 하나로 연주했다. 그들은 왼손 손가락에 슬라이드를 끼워 기타 넥을 잡았다. 작은 쇠파이프, 위스키나 맥주병에서 자른 병목을 잘라 슬라이드로 사용하거나 작은 식칼을 쓰기도 했다. 병목을 사용했기 때문에 보틀넥 슬라이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슬라이드를 활용하면 매끄러운 음 이동과 풍부한 비브라토를 할 수 있다. 선 하우스뿐 아니라 델타의 기타리스트 대부분은 슬라이드 기타를 연주했다. 델타 블루스 기타리스트들은 이 기타로 리듬을 강조한 연주를 선보이며 노래했다.
악마의 연주자
얼마 뒤에 로버트 존슨은 로빈슨빌을 떠나 마틴스빌으로 이주했다.이유는 불분명하다. 마틴스빌이 그의 출생지인 헤이즐버스트의 근교인점을 미루어 친부를 찾으러 떠난 것이거나, 선 하우스와 같은 거장 연주자의 눈을 피해 연습하기에 편한 장소가 필요했을 거라는 추론을 해 볼뿐이다. 이 기간 동안 정확히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곳에서 그의 기타 실력이 일취월장했다는 점이다. 선 하우스의 기술을 연마해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은 물론이고, 블루스 기타리스트 아이크 지너먼에게서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그로부터 약 2년 후, 로빈슨빌로 복귀한 로버트 존슨이 엄청난 기타실력을 선보이자, 선 하우스를 포함한 많은 음악가와 관중은 그가 악마와의 거래로 뛰어난 기타 실력을 얻게 됐다고 믿었다.
급기야 1966년에는초자연적인 믿음에 근거한 선 하우스의 증언이 재즈 전문지 〈다운비트〉에 실리기에 이르렀다. 이런 믿음을 반박하는 이도 많았다. 평론가 로버트 산텔리의 설명 을 참고하자.
그의 기타 솜씨는 어느 새벽 미시시피 델타의 한 교차로에서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고 얻은 대가라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하루아침에 이른 실력처럼 보였지만, 실은 선 하우스와 초기 블루스 연주자들의 공연을 관람하고 음반을 들으며 남다른 열정으로 연습한 것이 그를 놀라운 기량의 기타리스트로 만들었던 것이죠. 로버트 존슨의 목소리는 아름답지도 거칠지도 않았어요. 그보다는 징징대는 것에 가깝기는 했지만 깊이가 있었죠. 그것은 쑤시는 듯한 느낌이었고 안락함을 갈망하는 소리였으며 외로운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타 연주는 훨씬 더 충격적이었어요. 프레이징한 기타 음과 코드를, 그가 부른 가사에 아름답게 조화시키는 로버트 존슨의 재능은 당시, 아니, 지금의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을 겁니다. 그의 연주를 들으면 한 명이 아닌, 두 명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가 악마와 거래했다고 믿는 데도 다 이유가 있던 것이었죠.
훗날 로버트 존슨가 홀로 연주하는 녹음물을 들은 롤링 스톤스의 키스 리처드가 동료 브라이언 존스에게“함께 연주하는 기타리스트는 누구야?”라고 물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다. 로버트 존슨의 연주를 두고 키스 리처드는‘하나의 오케스트라’라며 극찬했다. 선 하우스의 증언처럼 ‘부끄러울 정도’의 연주자였던 그가 불과 2년 만에 이런 엄청난 대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로버트 산텔리의 설명을 참고하더라도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뮤지션들이 말도 안 되는 미신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믿을 수밖에 없을 법도 하다. ‘악마와의 거래설’이 정설처럼 전래된 데는 또다른 배경이 있다. 사람들이 그에게 진실을 물어도 좀처럼 답을 하지 않았고, 그저 미소 짓기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신비스러운 행동 때문에 악마와의 거래설을 믿는 사람은 늘어만 갔다.
로버트 존슨의 침묵이 인정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주변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굉장히 조용하고 매너가 좋은 신사였다고 한다. 좀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증언도 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는 말을 굉장히 아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앞세워 스타가 되겠다고 나서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로버트 존슨은 한 곳에 길게 머물지 않고 미국 전역을 떠돌며 연주하는 방랑자였는데, 그 과정에서 그가 사용한 예명 중 확인된 것만 여덞 개가 넘는다고 하니 유명세를 바랐던 타입은 분명히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각의 이야기에 따르면 로버트 존슨이 블루스 연주자가 되고, 또 떠돌이 연주자가 된 데는 그럴 만한 배경이 존재했다고 한다. 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1929년이었고 두 번째 결혼은 1931년이었는데, 두 번 모두 그의 부인이 출산 직후 사망했다. 그런 충격적인 경험을 두 번이나 반복해 겪었으니 자신에게 악마의 저주가 씌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첫째 부인의 사망에서 그는 블루스 음악을 시작했고, 둘째 부인의 사망에서 그는 떠돌이 삶을 시작했다. 음악학자 로버트 매코믹은 그의 이런 결정은 그 자신을 향한 처벌이었다고 해석했다. 세속음악을 연주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은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는 결정이라는 이야기다. 선 하우스와 같은 직업 음악가가 되는 것 역시 포기한 선택이었다. ‘악마의 음악’이라 불렸던 블루스를 연주하며 불안정한 삶을 살았던 그의 결정을 보면,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내 주고 블루스를 얻었다는 표현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삶을 혹독하게 몰고 갔다. 이후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 <Black Star 38> (저자:류희성/ 그림: 김준홍)에서 발췌했습니다 -
*p.s.: 대중음악 발전에 기여한 흑인 음악가 38명을 조명하는 내용의 책인데요,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약간 낯설지만 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했고, 극적인 삶을 살았던 아티스트들에 대해 접해보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화가분의 개성 넘치는 삽화들도 인상깊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