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9일(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교회
성당에서 크게 소리내어 울던 그 이주 노동자 여성 교우를 기억한다. 그는 아마도 본래 계획과 다르게 아기를 갖게 됐는데, 말도 모르는 낯선 이국땅에서 어떻게 출산하고 살아갈지 막막했을 거 같다. 그는 작은 지역에 수십 개 개신교회만 있는 이곳에 유일한 가톨릭교회 성당을 찾아다녔다. 성당에는 예수님 몸이 모셔져 있는 감실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축성된 제대가 있다. 한 마디로 성당은 예수님 몸이 있는 곳이다. 그는 무서운 일을 겪은 아이가 엄마를 만난 거처럼 성당 안에서 서럽게 울었다.
성당 안에 감실과 제대가 있듯이 성전은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무척 좋아하셨다. 열두 살 때 처음으로 부모와 함께 성전에 가셨는데, 어린 예수님은 그곳을 당신 집같이 편하게 느꼈고 집이니까 계속 거기 계셨다. 그분은 좋아함을 넘어 성전을 사랑하셨다. 그곳은 아버지 하느님이 계신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곳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이들에게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이라지만 양이나 비둘기 같은 동물을 죽여 피를 내고 태우고, 또 성전세를 내기 위해 돈을 유대인 화폐로 환전하면서 계산이 맞니 틀리니 하는 통에 얼마나 소란스러웠을까? 게다가 성전 사제들 그리고 상인과 환전상 사이의 검은 뒷거래를 아셨으니 예수님은 그 분노가 당신을 집어삼킬 듯했을 거다(요한 2,17; 시편 69,10). 그 분노는 당신의 성전 사랑, 아버지 하느님 사랑이었다.
예수님은 수없이 도살되는 그 동물 제물과 성전세 대신 당신의 몸을 내어놓으셨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써 그 번잡스럽고 소란스러운 모든 행위를 다 치워버리셨다. 비둘기 몇 마리 잡아서 피를 뿌린다고 내 죄가 없어지겠나. 황소인들 그렇게 할 수 있겠나. “이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히브 10,5)’”.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분의 위대한 행위는 책과 기억 속에만 남았겠지만, 그분은 부활하셔서 살아계신다. 미사 성찬례 안에서 내 죄를 없애주시려고 또 도살당하신다. 성당이 바로 그런 곳이고, 미사가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울 수 있었다.
교회는, 성당은 그런 곳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리고 끝까지 깨끗해야 한다. 정말 깨끗해서 투명하고 투명해서 빛을 그대로 투과시켜야 한다. 성당이 그런 곳이니까 무릎 꿇고 제단 바닥을 닦는 교우들 모습이 거룩하게 보이고 거기서 그들의 하느님 사랑이 느껴지는 걸 거다. 아직도 그런 분위기가 남아 있어 안타까운데 사제가 교회인 것이 아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이고 사제는 하느님 백성 봉사자다. 성당 안에 성체와 제대가 모셔져 있는 거처럼 하느님 백성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 그 백성이 하느님을 따르지 않을 때 교회는 더러워지기 시작한다. 함께 하느님 말씀을 듣고, 함께 하느님 뜻을 찾고, 함께 그대로 실천한다. 순종이나 복종이란 말이 딱딱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거 같다면 동의, 기꺼운 동의라고 하면 어떨까. 하느님을 사랑하니까 싫고 내키지 않아도 그렇게 하는 거 말이다. 그런데 내가 감히 하느님 뜻을 안 따를 수도 있다고 두렵다. 외아들을 희생시키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을 안 따르면 도대체 뭘 따르겠다는 말인가. 이런 분을 좋아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른 무엇을 사랑하겠다는 말인가. 죽음을 이기는 분 편에 서지 않는다면 누구 뒤에 서겠다는 말인가.
예수님, 저는 동의보다는 복종과 순종을 택하겠습니다. 저는 어려서 뭘 해야 제게 진짜로 좋은지 잘 모릅니다. 괜히 저 좋은 대로 했다가 다칠까 겁납니다. 주님 말씀대로 저 자신을 버리려고 노력하고 자주 넘어져도 제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갈 겁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하느님 신뢰를 가르쳐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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