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선릉(성종과 정현왕후)과 정릉(중종)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위치 :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100길 1
선정릉은 조선 제9대 왕 성종(1457-1494)과 그의 계비인 정현왕후 윤 씨(1462-1530) 그리고 성종의 둘째 아들인 제11대 왕 중종(1488-1544)의 왕릉이다. 성종은 제7대 왕 세조의 손자이자 덕종(추존)의 둘째 아들로 세조 3년(1457)에 태어나 13세(1469)에 즉위했다. 그는 교육과 문화 진흥에 힘을 기울여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를 완성시켰다는 평을 받으며 25년간 재위하였다. 정현왕후는 성종 11년(1480)에 책봉되어 중종 25년(1530)에 6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성종의 둘째 아들인 중종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1506)으로 왕위에 오른 이후 개혁을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고자 했다. 선릉은 성종대왕과 정현왕후의 능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정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능으로 단릉의 형식으로 왕 한 분을 모신 능이다. 이외에도 각각의 능에 홍살문, 정자각, 비각이 있고 재실, 역사문화관도 능역 안에 있다. 선정릉은 수도권 지하철 선릉역 10번 출구, 선정릉역 3번 출구에서 아주 가까운 강남 도심에 위치해 있음에도 잘 알려지지 않아 한적하며, 조용히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또한, 능을 둘러싸고 있는 철망 울타리를 철거하여 숲이 있는 구간에는 고풍스러운 담장을 쌓아 돌담길을 만들었다. 도보 15분 거리에 봉은사와 코엑스몰이 있다.
이용안내
이용시간
- 3월~10월 06:00~21:00 (입장마감20:00)
- 11월~1월 06:30~17:30 (입장마감16:30)
- 2월 06:00~18:00 (입장마감17:00)
쉬는날 : 매주 월요일
주차시설 : 가능
문의및안내 : 02-568-1291
관련 홈페이지 : https://royaltombs.cha.go.kr
상세정보
화장실 : 있음
입 장 료
- 개인 1,000원
- 단체(10인 이상) 800원
성종(成宗)
조선 제9대 왕(재위 1469∼1494).
출생-사망 : 1457 ~ 1494
재위기간 : 1469년 ~ 1494년
가족관계 : 왕비 공혜왕후(恭惠王后), 정현왕후(貞顯王后), 아버지 덕종(德宗), 어머니 소혜왕후(昭惠王后)
휘(諱)는 혈(娎), 시호(諡號)는 성종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成宗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다.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懿敬世子) 이장(李暲)과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461년(세조 7)에 자산군(者山君), 1468년에 잘산군(乽山君)으로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사예(射藝)와 서화(書畵)에도 뛰어났으며 매사냥도 즐겼다고 한다.
아버지인 의경세자가 1457년에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세조의 둘째아들인 해양대군(海陽大君) 이황(李晄)이 왕위에 올라 조선의 제8대 예종(睿宗, 재위 1468~1469)이 되었다. 그러나 예종도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 만에 죽자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와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등 훈구대신의 뜻에 따라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과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 등을 제치고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1469년부터 1476년까지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가 섭정으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성종은 1467년(세조 13) 한명회(韓明澮)의 딸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와 결혼했으나 그녀가 1474년(성종 5)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1476년(성종 7)에 봉상시(奉常寺) 판사 등을 역임한 윤기견(尹起畎)의 딸 제헌왕후(齊憲王后) 윤씨를 계비(繼妃)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79년(성종 10)에 세자 융(imagefont, 뒷날의 연산군)의 생모인 제헌왕후 윤씨를 폐비하고 윤호(尹壕)의 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를 다시 계비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1482년(성종 13)에 폐비 윤씨를 사사(賜死)하였는데, 이 일은 뒷날 연산군 때에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성종은 이외에도 명빈 김씨(明嬪 金氏), 숙의 김씨(淑儀 金氏) 등 수많은 후궁(後宮)을 두었으며, 그들과 20여 명의 자녀를 낳았다.
성종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집권초기에 신숙주, 한명회, 홍윤성(洪允成), 김질(金礩) 등 9명의 원로 대신들이 원상(院相)으로서 정책 결정에 자문으로 참여하여 실질적으로 국정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1476년(성종 7) 친정(親政)을 시작한 후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등 사림(士林派) 세력을 등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그리고 1478년 홍문관(弘文館)을 예문관(藝文館)에서 다시 분리하여 왕권을 호위하는 정치기구로 만들고, 새로운 인물을 과감하게 발탁하는 등 왕권 강화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성종은 교육과 문화의 진흥에 힘을 기울여 세종과 세조 연간에 기틀이 형성된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승려들을 엄하게 통제하고 사찰을 폐쇄하는 등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철저히 시행하였으며, 법령의 정비에도 힘써 유교적 통치 질서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1474년(성종 5)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하여 반포하였고, 1492년(성종 23)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더욱 보충하여 《대전속록(大典續錄)》을 간행하였다. 1491년 문신 중 덕과 재주가 있는 사람을 뽑아 직무를 쉬면서 학문에만 전념케 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라고 불리는 호당(湖堂) 제도를 실시하였고, 서적의 간행도 활발히 추진하여 《여지승람(輿地勝覽)》, 《동국통감(東國通鑑)》, 《동문선(東文選)》, 《오례의(五禮儀)》, 《악학궤범(樂學軌範)》 등을 편찬·간행하였다.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하는 등 북방 방비에도 힘썼다. 1479년(성종 10) 윤필상(尹弼商) 등을 통해 압록강 인근의 여진족을 소탕했으며, 1491년(성종 22) 허종(許琮)을 통해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을 진압하였다.
성종은 재위 25년째인 1494년 음력 12월 24일에 38살의 나이에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사망했다. 죽은 후 서울시 강남구에 위치한 선릉(宣陵)에 매장되었다.
정현왕후(貞顯王后)
조선 성종의 계비
재위 1480년 11월 8일 ~ 1494년 12월 25일 (음력)
전임 폐비 윤씨
후임 폐비 신씨
조선의 왕대비
재위 1494년 12월 29일 ~ 1530년 8월 22일 (음력)
전임 인수왕대비 한씨 (소혜왕후), 인혜왕대비 한씨 (안순왕후)
후임 성렬왕대비 윤씨 (문정왕후)
이름
휘 창년(昌年)
별호 자순왕대비(慈順王大妃)
시호 정현(貞顯)
존호 자순화혜(慈順和惠)
휘호 소의흠숙(昭懿欽淑)
신상정보
출생일 1462년 7월 30일 (양력)
출생지 조선 충청도 신창 관아
사망일 1530년 9월 23일(68세) (양력)
사망지 조선 한성부 경복궁 동궁 정침
가문 파평 윤씨
부친 영원부원군 윤호
모친 연안부부인 담양 전씨
배우자 성종
자녀 1남 1녀 (1남 3녀)
순숙공주 · 중종
능묘 선릉(宣陵)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100길 1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1462년 7월 30일 (음력 6월 25일) ~ 1530년 9월 23일 (음력 8월 22일)는 조선 성종의 세번째 왕비이며 중종의 모후이다.
생애
출생과 가계
1462년(세조 8년) 6월 25일, 충청도 신창의 관아에서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와 연안부부인 전씨(延安府夫人 田氏)의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이며 이름은 창년(昌年)이다. 당시 아버지 윤호가 현감으로 부임중이었던 신창(新昌)에서 '창(昌)'자를 떼어 지었다.
정현왕후의 할아버지인 윤삼산은 성종의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6촌이며, 성종과 정현왕후는 윤척(尹陟)을 공통 조상으로 하는 10촌지간이다.
┌─→ 윤승례 → 윤번 → 정희왕후 → 덕종 → 성종
윤척
└─→ 윤승순 → 윤곤 → 윤삼산 → 윤호 → 정현왕후
또한 정현왕후의 증조모이자 윤삼산의 어머니인 근순택주 한씨는 한상질의 딸이며 한명회의 고모이다. 따라서 한명회는 윤삼산의 외사촌 동생이 되고, 성종의 첫번째 왕비 공혜왕후는 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와 6촌이 된다.
입궁과 왕비 책봉
1473년(성종 4년) 6월 14일,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에 책봉되어 입궁하였다. 1478년(성종 9년)에는 순숙공주를 낳았다.
당시 왕비였던 폐비 윤씨가 투기와 미신, 저주 행위등의 부도덕함을 이유로 폐위되어 사가로 쫓겨난 후, 성종은 대신들을 불러 숙의 윤씨를 새로운 왕비로 택했음을 전교하였다. 정현왕후는 공혜왕후와 폐비 윤씨에 이어 성종의 세번째 왕비가 되었다.
왕비 시절
1480년(성종 11년) 11월 8일, 창덕궁 선정전에서 교명과 책보를 받고 왕비에 책봉되었다. 폐비 윤씨가 사사된 이후 폐비의 아들인 연산군을 돌보았는데, 연산군은 성종의 묘지명을 읽어 보기 전까지 자신을 정현왕후의 아들로 알고 자랐다.
성종과의 사이에서 순숙공주를 비롯한 공주 3명과 진성대군(중종)을 낳았는데, 공주 2명은 조졸하였고 순숙공주 또한 11세로 요절하였다.
1486년(성종 17년), 선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1489년(성종 20년)과 1494년(성종 25년)에도 양로연을 베풀었으며 1492년(성종 23년)과 1493년(성종 24년)에는 내외명부를 이끌고 후원 채상단에서 친잠례를 거행했다.
왕대비 시절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1496년(연산군 2년), 자순(慈順)의 존호를 받았고, 이후 화혜(和惠)의 존호가 가상되었다.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의 지문을 읽다가 자신의 생모가 폐비 윤씨임을 알게 되었고, 이후 갑자사화를 일으켜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들을 고문하고 처형하였다. 이때 계모인 정현왕후의 침전 밖으로 가서 장검을 들며 밖으로 나오라고 행패를 부렸으나, 왕비 신씨(폐비 신씨)가 연산군을 극구 말려 보호하였다.
시어머니인 소혜왕후가 죽고 연산군이 상의 기간을 줄이려 하자 정현왕후는 "삼년복은 천자(天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천하의 공통된 상사인데 어찌 단상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감히 따르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에 연산군이 화를 내며 "부인은 삼종(三從)의 의리가 있는 법인데, 임금의 법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는가?" 하자, 마지못해 이를 따랐다.
1506년 9월, 중종반정으로 아들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즉위하였다.
1507년(중종 2년), 정현왕후는 세종과 세조, 소헌왕후와 정희왕후, 소혜왕후 등 역대 왕과 왕비들이 불교를 숭상하고 사찰을 건립한 일을 언급하며 불교를 옹호하고 사찰을 세우려 하였다. 이에 대간과 홍문관을 비롯해 여러 대신들이 극렬히 반대했으나 중종은 대비의 사찰 건립을 옹호하였다.
1517년(중종 12년), 병을 앓아 제안대군의 집으로 잠시 이어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도교의 영향을 받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소격서의 폐지를 두고 중종과 대신들간의 의견 차이가 벌어졌는데, 중종은 정현왕후가 소격서에 자주 행차하였음을 이유로 윤허하지 않았다.
사망
1530년(중종 25년) 8월 22일, 동궁의 정침에서 사망했다.
정현왕후의 졸기
신시(申時)에 대비(大妃)가 동궁의 정침에서 훙(薨)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대비는 인자하여 족속들과 화목하였으며 외척을 위해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왕세자(인종)가 탄생한 지 열흘도 못되어 장경왕후(章敬王后)가 훙서하였는데
대비가 어루만져 보호하면서 하지 않은 일 없이 다 했다.
— 《중종실록》 69권,
중종 25년(1530년 명 가정(嘉靖) 9년) 8월 22일 (기묘)
시호와 능묘
시호는 정현(貞顯)이며, 원대한 생각을 잘 성취시킨 것이 '정'(貞)이고 행실이 중외에 나타난 것이 '현'(顯)이다.
존호와 휘호를 합치면 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이다. 능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선정릉 내에 위치한 선릉(宣陵)으로, 남편 성종과 동원이강의 형태로 같이 묻혀 있다.
정현왕후 (貞顯王后)
조선전기 제9대 성종의 왕비. 계비.
시호 : 정현(貞顯)
출생 연도 : 1462년(세조 8)
사망 연도 : 1530년(중종 25)
본관은 파평(坡平). 우의정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濠)의 딸이다.
신창(新昌) 공아(公衙)에서 출생하여 1473년(성종 4) 대궐에 들어가 처음 숙의(淑儀)에 봉하여졌고, 1479년 6월 연산군의 생모인 왕비 윤씨가 폐위되자 이듬해 11월에 왕비로 봉하여졌다.
1497년(연산군 3)에 자순(慈順), 1504년에 화혜(和惠)라 존호되었다. 1530년(중종 25) 8월 경복궁에서 죽었으며, 1남1녀를 두었다.
시호는 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이고, 능호는 선릉(宣陵)으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중종 (中宗)
제11대 조선 국왕
재위 1506년 9월 2일 ~ 1544년 11월 14일 (음력)
즉위식 경복궁 근정전
전임 연산군
후임 인종
이름
휘 이역(李懌)
별호 진성대군(晉城大君) · 진산대군(晉山大君)
시호 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
(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능호 정릉(靖陵)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100길 1
신상정보
출생일 1488년 3월 5일 (음력)
출생지 조선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
사망일 1544년 11월 15일(56세) (음력)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경궁 환경전
부친 성종
모친 정현왕후 윤씨
배우자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
자녀 9남 11녀 (14남 12녀)
중종(中宗, 1488년 4월 25일(음력 3월 5일) ~ 1544년 12월 9일(음력 11월 15일))은 조선의 제11대 국왕(재위: 1506년 ~ 1544년)이다.
휘는 역(懌),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천(樂天)이며, 성종의 여덟째 아들이자 적차남으로, 어머니는 정현왕후 윤씨이다. 이복 형인 연산군이 반정으로 폐위되자 박원종, 성희안 등 반정공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중 훈구 공신과 사림의 갈등으로 정쟁이 심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사화와 옥사, 저주와 주술, 익명서 투서, 무고 등의 궁중 암투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삼포왜란이 발생하였으며,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여진족의 침탈로 인해 발생하는 국방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임시기구인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이 밖에 《속삼강행실도》(1514년),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등 다방면에 걸친 책들이 중종 시대에 편찬, 간행되었으나 기묘사화 이후로는 문화 발전 정책이 거의 정지되었다.
생애
탄생과 즉위 이전
1488년(성종 19년) 3월 5일,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은 이(李), 휘는 역(懌), 아명은 구등은금이(仇等隱金伊)이다.
1494년(성종 25년) 4월 6일,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해졌다. 이후 신수근의 딸인 신씨(단경왕후)와 혼인하였고 13세가 되던 해에 출궁하였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왕비인 폐비 신씨의 오빠이므로, 연산군과 중종은 이복형제임과 동시에 처고모부와 조카사위의 관계가 되었다.
1506년(연산군 12년) 9월 2일,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 박원종(朴元宗) · 유순정(柳順汀)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이 성공함에 따라 조선의 새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즉위와 개혁
재위 초반
1506년(중종 1년), 9월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반정 세력들은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 신씨를 궁에서 내쫓을 것을 주장하였고, 중종은 결국 왕비 신씨를 폐위하여 사가로 내보냈다. 이후 윤여필의 딸인 장경왕후를 왕비로 책봉하였으나,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승하하였으며, 다시 윤지임의 딸인 문정왕후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반정 세력의 정치적 의도로 즉위한 중종은 집권 초기에 반정 공신들의 위세에 눌려 실질적인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연산군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문란해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연산군이 폐지시켰던 모든 법제를 복귀시켰으며, 국왕의 자문을 담당하는 기관인 홍문관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고 신하들의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등을 시행했다. 또한 중종은 왕도정치를 앞세워 공신들의 세력 팽창을 억누르려고 시도했으나 공신들의 힘이 막강하여 성공하지는 못했다.
박원종, 홍경주 등의 공신 세력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려 하자 그는 사림 세력을 다시 등용하기로 결심한다.
사림파의 등용과 개혁 정치
큰어머니 월산대군부인의 남동생이자, 경빈 박씨의 양아버지인 박원종, 희빈 홍씨의 친정아버지 홍경주 등의 세력을 경계한 중종은 당초 박원종과 성희안의 월권행위를 비판하다가 이들의 눈밖에 났던 남곤을 등용한다. 이어 훈구 공신들의 질병과 연이은 죽음, 그리고 훈구 공신의 지도자인 박원종, 성희안의 죽음으로 훈구파가 주춤한 틈을 타 사림파 인사를 홍문관과 사간원, 사헌부, 춘추관 등의 하위직에 등용함으로써 사림파를 다시 정계로 끌어들인다.
중종은 조광조 등 갑자사화로 밀려났던 사림파를 중심으로 현량과를 실시하는 등 철저한 유교적 개혁 정치를 행하여 공신세력을 누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조광조의 개혁 정책은 보수적 기득권층인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지지하던 중종마저도 싫증을 내게 된다. 특히 조광조 등 급진 사림파의 위훈 삭제로 다수의 공신들이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일이 벌어지자 훈구파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한다.
기묘사화
조광조와의 갈등
중종 반정으로 추대 받아 즉위한 중종은, 공신 세력에게 좌지우지 되어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였고, 본인의 뜻과 상관 없이 왕비 신씨를 폐위하고 이복 형인 견성군을 사사하였다. 중종은 훈구 공신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사림을 등용하였고 비대해진 훈구파 척신들의 전횡에서 벗어나 보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조광조는 도학 정치 실현이 목적이었기에 중종과의 정치적 노선이 달랐다.
또한 사림파의 지치정치, 군신 공치 역시 중종에게 거부감을 주었다. 조광조는 도학정치가 펴지길 꿈꿨고, 중종은 힘센 군주가 되길 갈망한 것이다. 조광조는 임금 역시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사류가 되기를 원했고, 성리학 사상에 입각한 사류와 군주가 공동으로 다스리는 세계 또는 임금 역시 한 사람의 선비가 될 것을 여러 번 권고하였다. 중종은 피로를 느낌과 동시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일종의 천거제인 현량과를 실시할 것을 청했고, 성리학적 이데올로기 하에 향촌사회의 자치규약인 향약을 널리 보급하여 유교 윤리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사회를 구현하려 하였다. 이러한 조광조와 사림들의 사상은 후에 조선 내에서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조광조는 불교와 미신을 믿지 말것을 청하였으며 도교의 영향을 받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업무를 관장하던 소격서를 폐지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여 마침내 폐지시켰다. 조광조와 사림파들은 중종반정에서 거짓 공로(僞勳, 위훈)로 공신이 된 자들을 가려내 이들을 공신에서 제명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 위훈삭제로 인하여 조광조와 사림은 훈구파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주초위왕 사건
중종은 당초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지지하고 그를 총애하였으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도학적인 조광조를 점차 기피하고 불신하였다.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훈구세력은 홍경주의 딸이자 중종의 총희(寵姬)인 희빈(熙嬪)을 사주하여 궁궐 후원 나뭇잎에 꿀을 바른 붓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走+肖=趙氏)가 왕(王)이 됨(爲)'이라는 네 글자를 썼다. 벌레가 나뭇잎 위를 기어다니며 꿀을 바른 부분의 글자를 파먹자 '주초위왕'의 형상이 파인 나뭇잎을 들고 중종에게 호소하였다. 마침내 주초위왕 사건을 이유로 중종은 조광조를 실각시키고 많은 사림들을 사사하였다. 동시에 그가 추진하던 개혁들도 폐지하였다.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
1527년(중종 22년), 세자(인종)의 생일 무렵에 죽은 쥐의 사지를 찢어 불에 지진 다음 동궁전 창가에 매달아놓고 세자를 저주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사건의 배후로 중종의 서장자이자 인종의 이복형인 복성군과 복성군의 어머니인 경빈 박씨가 지목되어 폐서인 되었으며, 경빈의 딸들이자 인종의 이복 누나들인 혜순옹주와 혜정옹주 또한 폐서인 되었다.
1533년(중종 28년), 동궁(東宮)의 빈청 남쪽 바자(把子) 위에 사람의 머리 모양을 한 물건이 발견되었다. 이 형상에 누군가가 머리카락을 붙이고 이목구비등을 새겨 목패에 단 다음, 목패에 '세자의 몸을 능지할 것', '세자 부주(父主)의 몸을 교살할 것', '중궁(中宮)을 참(斬)할 것' 과 같은 내용을 적어놓았는데, 이 저주 사건으로 인해 6년전 폐출된 복성군 모자와 혜정옹주의 남편인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가 연루되었다.
대간의 탄핵을 받은 복성군과 경빈 박씨는 마침내 사사되었는데, 나중에서야 이 사건의 배후가 인종의 누나인 효혜공주의 남편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와 김희의 아버지인 김안로가 꾸민 일임이 드러났다. 이후 인종은 중종에게 복성군 모자의 신원 회복과 폐출된 두 옹주의 작호를 회복시켜줄 것을 청하였다.
외척의 등장
외척 세력의 등용
조광조를 비롯한 급진적인 사림파들이 몰락한 뒤 견제 세력이 없어지자 다시 공신들의 세력이 부활할 조짐을 보였다. 중종은 공신들의 권력집중을 차단할 목적으로 외척인 윤여필, 윤여해, 윤지임, 김안로 등을 등용한다.
처음에는 이들에게 내섬서와 장악원 등의 제조 직을 제수했다가 훈련대장 등을 제수하여 도성의 숙위를 맡겼고, 이후 이들의 자녀들이자 자신의 처남격인 윤임, 윤원로, 윤원형 등이 출사하게 된다. 그러나 외척 세력은 또다른 세력을 형성하여 전쟁의 소용돌이를 만들게 된다.
외척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여 중종의 치세 중기와 후기에는 외척 세력과 반정 공신들 간의 정권 다툼으로 인해 크고 작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혼란 정국이 지속되었다.
1531년(중종 26년)에는 기묘사화 후 집권했던 심정·이항(李沆)·김극복(金克福) 등이 화를 당했고, 1537년(중종 32년)에는 심정 일파를 모함한 김안로(金安老)·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이 주찬되는 등 재위 동안에 화옥(禍獄)이 그치지 않았다.
대윤과 소윤의 등장
윤임과 윤원형은 정희왕후의 아버지 윤번의 후손들로, 각각 인종과 명종의 외숙부들인데, 이들은 중종 말엽부터 세력을 형성하였다. 인종의 외가인 윤여필, 윤임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대윤(大尹)과, 경원대군(명종)을 지지하는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인 소윤(小尹)이 파를 나누어 갈등하였다.
1538년(중종 33년) 10월, 중종은 본인의 재위년수와 나이가 세종의 재위년수와 세종이 승하했을 때의 나이와 비슷해지자 태종과 세종의 고사를 들며 세자(인종)에게 선위하려 하였는데, 세자가 곡기를 끊고 극구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최후 및 능묘
1544년(중종 39년) 11월 14일, 중종은 세자(인종)에게 전위의 뜻을 밝히고, 다음날인 11월 15일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승하하였다.
묘호는 중종(中宗), 시호는 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이다. 묘호인 중종은 연산군으로부터 나라를 구하여 중흥시켰다는 의미로 정해진 것이다.
능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정릉(靖陵)으로 본래 고양시에 위치하였으나, 풍수지리상 위치가 좋지 않고 장마로 인해 재실에 물이 차자 명종대에 지금의 위치로 천장하였다. 정릉은 임진왜란 당시 훼손되었다. 정릉에서는 시신이 나왔지만 이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 위해 원로 대신에서부터 궁중의 나인들까지 동원되어 살펴보았지만 중종이 승하한 지 오래 되어 외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없었고 남은 사람들도 고령이라 확인이 힘들었다. 중종 외모를 기억하는 몇몇 사람들의 몽타주 기록에 의하면 중종은 키가 크고 보통의 체격이었고 수염은 그리 많지도 않았으나 또한 적은 편도 아니었으며 수염 색은 누런 편이었다고 한다. 이마에는 녹두보다는 좀 작은 검은 사마귀가 있었고, 용안은 갸름하며 약간 얽은 흔적이 있었으며 턱의 끝이 약간 굽어 모난 턱이었으며 코가 높고 길되 살짝 굽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신의 모습은 비대하고, 키는 포백척으로 3척 2촌으로 작았다. 남아있던 기록과 시신의 모습이 달랐고 중종이 승하할 당시가 더운 여름이었는데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남아있다는 점 때문에 왜군이 왕릉을 욕보이기 위해 가져다 둔 시신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후 중종일 지도 모른다는 의견 때문에 일단 시신은 선정릉 근처의 정결한 곳에 묻었다. 그 시신이 정말 중종의 시신이었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확인할 방법은 아직은 없다.
평가
조선왕조실록《중종실록》의 사관은 중종과 중종 시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상(중종)은 인자하고 유순한 면은 남음이 있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비록 일을 할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었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지 않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등용했기 때문에
재위 40년 동안에 다스려진 때는 적었고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소강(小康)의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 슬프다.
사신은 논한다.
인자하고 공검한 것은 천성에서 나왔으나 우유부단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이끌려
견성군(甄城君)을 죽여 형제간의 우애가 이지러졌고,
신비(愼妃, 단경왕후)를 내치고 박빈(朴嬪, 경빈 박씨)을 죽여 부부의 정이 없어졌으며
복성군(福城君)과 당성위(唐城尉)를 죽여 부자간의 은의(恩義)가 어그러졌고,
대신을 많이 죽이고 주륙(誅戮)이 잇달아 군신의 은의가 야박해졌으니 애석하다.
— 《중종실록》 105권,
중종 39년(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11월 15일 (경술)
서울 선릉과 정릉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