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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韓中日近現代史 원문보기 글쓴이: 정암
루거우챠오의 포성중일전쟁1931년 9월 ‘만저우 사변’ 이후 동북 지역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은 일본은 그 이듬해인 1932년 5월에 일어난 ‘혈맹당 사건’(곧 ‘5·15사건’)으로 나라 전체가 군국주의화되어 본격적인 대륙 침략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일본 군부 내에는 청년 장교들을 중심으로 천왕 중심의 혁신론을 주창하면서 원로나 중신, 정당 재벌 등을 현상 유지파라 배격한 ‘황도파(皇道派)’와 육군 막료층을 중심으로 군 전체의 통제를 강조한 ‘통제파’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1936년 2월 26일, ‘황도파’의 청년 장교들이 1,400명의 병력을 지휘하여 총리와 내대신(內大臣) 등의 관저와 사저, 육군성 · 참모본부 · 경시청 · 아사히(朝日)신문사 등을 습격한 사건이 일어났다(‘2·26사건’). 이들은 원로 중신들을 죽이고 천왕의 친정(親政)이 실현되면 정 · 재계의 부정부패나 농촌 지역의 곤궁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주모자 가운데 한 사람인 노나카 시로(野中四郞) 대위는 사건 직전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한다. “나는 미쳐버린 것인지 바보인지도 모른다. 외길을 따라가므로 피가 끓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누구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육군 수뇌부는 당초에는 이들의 반란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나 육군의 독주를 우려한 해군이 견제에 나서고 여론 또한 쿠데타에 동정적이지 않자 그 다음날인 27일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결정적인 것은 천왕의 태도였다. 사실상 반란군은 천왕의 친정을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고 있었는데, 정작 쇼와 천왕은 그들의 행위에 격분해 28일 이들의 원대 복귀를 명령했다. 사실상 이것으로 상황은 종료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9일 진압이 시작되자 노나카 시로는 권총으로 자살하고 나머지 장교들은 부사관과 사병들을 원대 복귀시킨 뒤 투항해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 사건으로 육군 당국은 숙군(肅軍)을 단행해 ‘황도파’는 궤멸하고 ‘통제파’가 득세하였다. 사건 직후 내각을 새롭게 구성한 히로다 고키(廣田弘毅, 재위는 1936년 3월 9일~1937년 2월 2일)는 각료의 인선이나 정책에 대해서까지 군부의 요구를 수용하였고, 현역 무관제를 부활해 군의 정치 개입을 용인하는 등 군부의 정치력을 증대시켰다. 이후로 군과 정부는 독점자본과의 유착 · 군비 확장 · 민중 탄압을 강화하여 일본 파시즘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일어난 ‘5·15사건’으로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섰다면, ‘2·26사건’은 이와 같은 흐름에 쐐기를 박은 결정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정계에서도 이러한 군부의 움직임에 대해 불만을 품은 이들이 많았으니,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전 중의원 의장인 하마다 구니마츠(濱田國松)가 1937년 1월 21일 제70회 제국국회에서 ‘2·26사건’ 이후 군부의 과도한 정치 간섭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에 육군대신 데라우치 히사이치(寺內壽一)가 그의 말이 군대를 모욕하는 것으로 들린다고 반발하자 하마다는 자신의 말 어느 부분이 모욕적이냐고 되받아쳤다. 그럼에도 데라우치가 계속 모욕으로 들렸다고 강변하자 하마다는 “속기록을 조사해 내가 군을 모욕한 말이 있다면 할복으로 당신에게 사죄한다. 없다면 당신이 할복하라”고 소리쳤다. 데라우치가 격노해 단상에서 하마다를 노려보자 의장이 그를 나무라는 등 대혼란이 야기되었다. 다음날 의회는 정회되었고, 데라우치는 “정당이 시국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며 히로다 총리에게 의회 해산을 요구하면서 해산하지 않으면 자신이 단독으로 사직한다고 선언했다. 시급한 예산 처리를 위해 총리부터 해군장관까지 나서 데라우치를 설득했지만, 데라우치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히로다는 내각 내의 불통일을 이유로 내각의 총사직을 단행했다. 새로 총리가 된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 총리 재위는 1937년 2월 2일~1937년 6월 4일)[각주 "참고로 하야시 센주로는 조선 군사령관으로 재임하던 1931년 9월 18일 이른바 ‘만저우 사변’이 일어나자, 그 다음날인 9월 19일에 휘하의 20사단을 39혼성여단으로 개편하고, 상부의 지시 없이 이 부대를 만저우로 파견하였다. 내각은 만저우 사변을 둘러싼 군부의 음모를 조사하려고 하였으나, 손쓰기 힘들 정도로 사태가 확대되자 이를 용인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그리하여 39혼성여단을 독단적으로 움직인 하야시는 9월 22일 사후 승인을 받았다. 당시 만저우 사변을 꾸몄던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는 “하야시 대장은 우리 마음대로 고양이도, 호랑이로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하야시는 승승장구해 1932년부터 1934년까지는 육 군내 3대 보직 중 하나인 교육총감에 오르고, 1934년부터 1935년까지는 육군대신으로 일하는 등 승진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사이토 내각과 오카다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맡았다."] 장군은 군부에 대한 싸늘한 민심을 의식해 “나는 호전적인 외교 정책을 신봉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한편 야전의 사령관들에게 더 이상의 도발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아울러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 오가는 ‘통일전선’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다소 신중하게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일본 군부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만저우와 허베이 지역에 구축해 놓은 경제적 기반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소련에 대한 전면 공격에 대비해 그곳을 전략적 · 경제적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이들은 만저우 지역에서 특수 무역이라는 미명 하에 밀무역을 자행해 낮은 관세의 염가 상품을 들여와 상하이와 같은 대도시뿐 아니라 오지에까지 퍼뜨려 중국의 경공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러허 지역에서 생산된 아편까지 판매하는 등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러는 사이 중국 사회에 점차 팽배했던 ‘반일’ 감정이 중국군에도 전염되어 중국군의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만 갔다. 장차 임박한 일전을 앞두고 양측에는 애매한 소강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갑자기 사태가 급진전됐다. 마오쩌둥이 ‘항일군정대학’에서 모순론을 강의하고 있을 즈음, 일본에서는 의회를 통한 경제 정책 수행에 실패한 하야시 센주로 내각을 대신해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총리 재위는 1937년 6월 4일~1939년 1월 5일) 내각이 들어섰다(‘제1차 고노에 내각’). 고노에는 취임하자마자 “국내의 각론의 융화를 도모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걸고 치안유지법에 의해 체포되었던 공산당원과, ‘2·26사건’에 연루된 복역자들을 사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후견인인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가 특히 2·26사건에 연루되었던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의 사면에 반대하여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고노에는 명문가의 후손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음에도 결단력은 부족했던 것이다. 그즈음 일본군은 1937년 6월부터 베이징 남쪽의 펑타이(豊臺, 풍대)에 주둔하면서 도발적인 군사 훈련을 자주 실시했다. 운명의 날인 1937년 7월 7일 오후 10시 40분 베이핑 서남쪽 융딩허(永定河, 영정하)에 있는 루거우챠오(蘆溝橋, 노구교) 인근의 완핑 현(宛平縣) 성 근처에서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부대를 향해 현성(縣城) 쪽에서 몇십 발의 총알이 날아왔다. 이 와중에 일본군 사병 하나가 실종되었다는 이유로(사실 이 병사는 곧바로 원대 복귀했다) 일본군이 완핑성에 들어와 수색을 요구했다. 당직을 서고 있던 중국 측 29군단 37사단 219연대장인 지싱원(吉星文, 길성문)은 심야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양측의 교섭은 그대로 진행되었는데, 새벽 4시가 되자 돌연 일본군 측이 일방적으로 완핑 성에 포격을 가했다. 일본으로서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양동작전으로 중국군의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어 놓은 뒤 전격적으로 기습 작전을 펼친 것이다(루거우챠오 사건). 현재 완핑 현성 안에는 ‘중국인민항일투쟁기념관’이 있고, 그 앞에는 포효하는 사자상이 세워져 있다. 애당초 일본 내에서는 사태가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7월 9일 각의에서는 불확대 방침을 결정하였고, 일본의 ‘지나주둔군’ 특무기관과 톈진 시장 장쯔중(張自忠, 장자충) 사이에 정전 협정이 성립되어 소규모의 충돌은 있었지만 9일 중에는 거의 사태가 수습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육군과 정부 내 강경파가 확전을 주장하니 고노에 내각에서는 불확대 방침을 내버리고 병력 증원을 결정해 전쟁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11일 오전 일본 각의는 일본 본토로부터 3개 사단, 조선으로부터 1개 사단, 만저우로부터 2개 여단을 파견한다는 강경 방침을 서둘러 승인했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일본 내의 확전파와 비확전파 사이의 논란이 거듭되어 동원 명령 결정은 세 번이나 중지되었다. 이제 중국과 일본 간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는데, 누군가 말한 대로 이 전쟁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었음에도 공식적인 ‘선전포고’도 없이 일어나 확대되어갔다. 쟝졔스 역시 4개 사단을 허베이 남부의 바오딩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중국 공산당 역시 7월 8일 일본군의 화북 지역으로의 전면적인 진격이 임박했다고 호소하면서, 필요한 경우 즉시 항일의용군의 조직에 착수할 것을 지시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양측 간의 성명전도 이어졌다. 고노에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 사건이 “전적으로 중국 측의 항일 군사작전의 결과이며, 중국 당국은 불법적인 항일 행위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쟝졔스 역시 쟝시 성의 유명한 피서지인 루산(廬山, 여산)의 구링(牯嶺, 고령)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는데, 여기에는 공산당 대표 저우언라이도 참석했다. 7월 15일 중국 공산당 중앙은 국공합작의 개시를 선포했다. 이에 발맞추어 7월 19일 쟝졔스도 담화를 발표하고[루산담화(廬山談話, 여산담화)], 일본과 이전에 맺은 협정은 유지되어야 하며 중국의 주권을 침범하는 어떠한 해결안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때까지 타협적으로만 일관해오던 쟝졔스가 그간의 태도를 바꾸어 결연한 항전 의지를 담아낸 강경책으로 돌아선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이를 환영했고, 7월 23일 항일을 위한 구체적인 방침을 발표했다. 7월 27일 고노에 내각은 드디어 일본 본토의 3개 사단의 파병을 결정하고 천왕의 승인을 얻어냈다. 다음날인 28일 현지 일본군은 톈진과 베이핑을 중심으로 전면 공격을 개시해 30일에는 베이핑 남부에 있는 융딩허(永定河, 영정하) 이북 지역이 모두 일본군 손에 떨어졌다. 이로써 1931년 ‘만저우 사변’ 이후 동북 지역에서 군사 세력을 확장해 오던 일본은 대륙 침략의 야욕을 만천하에 드러냈으며, 본격적인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7월 28일 고노에 내각은 전쟁이 전 중국으로 확산될 것을 예견하고 한커우를 비롯한 양쯔 강 유역 일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철수를 지령했다. 약 1,600명의 일본인들이 한커우에 집결해 배를 타고 양쯔 강을 따라 내려가 8월 9일에 상하이에 도착했다. 바로 그날 저녁 상하이에서 일본군 해군 중위 오야마 이사오(大山勇夫)가 중국 보안대에 의해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제2차 상하이 사변). 11일 일본은 곧바로 군함을 증파했으며, 13일 일본 내각은 그때까지의 불확대 방침을 사실상 포기하고 일본 내 2개 사단의 상하이 파견을 결정했다. 이때 쟝졔스는 일본군의 공격이 북중국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틈타 상하이 지역의 일본군을 공격하는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14일 쟝졔스는 상하이 만에 정박하고 있는 일본 군함들을 폭격하도록 공군에 명령했으나 결과적으로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이 공격은 일본군이 중국군에 대해 대반격을 하게 되는 빌미가 되어, 14일에는 타이완에서 날아온 일본 해군항공대가 항저우(杭州, 항주) 등지를 폭격하고, 15일에는 나가사키(長崎)에서 날아온 비행기가 국민당의 수도 난징을 폭격했다. 9월 2일 일본 정부는 종래의 ‘북지사변(北支事變)’으로 부르던 명칭을 차제에 ‘지나사변(支那事變)’으로 바꾸기로 결정함으로써 앞서 말한 대로 아무런 선전포고도 없이 전면적인 중일전쟁이 개시되었다. 이렇듯 긴박한 상황 속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 또한 빠른 속도로 진전되었다. 8월 22일
화북의 공산당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3개 사단)으로 개편되고, [각주 “홍군의 명칭은 폐지하고 그 명칭을 바꾼다. 국민혁명군으로 재조직될 것이며 국민당 정권의 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복종한다. 나아가서 항일 전투를 위한 의무를 위해 명령을 대기한다.”(S. 슈람,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203쪽에서 재인용.)" ] 9월 6일에는 산시 성 북부(陝北) 지역의 소비에트 구가 산간닝(陝甘寧, 섬감녕) [각주 "각각 산시(陝西, 섬서)와 간쑤(甘肅, 감숙), 닝샤(寧夏, 영하)를 가리킨다."] 변구(邊區)로 개칭되었다. [각주"두 번째 변구는 이듬해인 1938년에 세워진 ‘진차지(晋察冀, 진찰기)’ 변구로, 산시(山西, 산서)와 차하르(察哈爾, 찰합이), 허베이(河北, 하북) 세 지역을 관할 구역으로 삼았다." ] 그러나 일본군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중국 대륙을 유린했다. 상하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영웅적인 저항을 벌였으나, 이러한 총력전의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쟝졔스가 거느린 정예 병력 가운데 60퍼센트에 해당하는 25만 명의 중국군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결국 상하이 전선이 무너졌고, 11월 11일 상하이가 함락되었다. 중국군은 난징으로 패주했다. 도쿄의 일본 정부는 중국 사태를 종결짓기 위한 조약을 체결하도록 쟝졔스를 압박했다. 그러나 쟝졔스는 국제 사회가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 믿고 시간을 끌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국제 연맹은 12월 초까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쟝졔스는 그제야 일본과의 협상에 관심을 보였으나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당시 난징을 맡고 있던 것은 구 군벌 탕성즈(唐生智, 당생지)였다. 그러나 그는 쟝졔스의 기대를 저버리고 12월 12일 난징을 포기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난징을 사수하겠다고 공언했었지만 사실상 난징을 방어할 아무런 대책도 갖고 있지 않았기에 난징을 떠날 당시 그곳의 주둔군을 질서 있게 대피시킬 계획 따위는 애당초 없었다. 마치 자신은 도주 길에 오르면서 아무 일도 없으니 동요하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한 어느 나라 대통령과 비슷한 처신을 한 것이었다. 12월 13일 상하이 전선이 붕괴된 뒤 각 방면에서 진격해온 일본군에 의해 난징이 함락되었다. ‘루거우챠오 사건(蘆溝橋事件)’ 이후 겨우 반년 만의 일이었다. 그 직전에 일본군은 잔류 시민들에게는 모두 관대하게 대하겠다는 전단을 시내에 살포했다. 그러나 개전 이래 손쉽게 중국을 점령할 것으로 생각했던 일본군은 악전고투 끝에 난징에 입성한 터였다. 그들은 전쟁에 대해 신물이 났고 그로 인해 몹시 화가 난 상태였으며 지쳐 있었다.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7주 동안 근대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한 참상이라 일컬어지는 이른바 난징 대학살이 벌어졌다. 그곳에 남아 있는 남자들은 무기력했거나 이미 탈출해버린 뒤였다. 결국 남아 있는 무력한 주민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지옥의 모습(地獄相) 그것이었다. 여자들은 강간당했고, 아이들은 재미 삼아 허공에 던져졌다가 총검에 찔려 죽었다. 공식적으로는 난민 병사 3만에 일반 시민은 1만 2천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최소한의 숫자이고 그 정확한 내용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밝혀질 수 없을 것이다. 피해자의 숫자가 30만 명이든 그 이하든 그런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참혹한 정상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데 모든 이들이 할 말을 잊었다. 중국의 현대문학가이자 정치가인 궈모뤄(郭沫若, 곽말약)는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그 죄상은 야만적인 행위라 비판받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단순소박한 야만인에게도 그런 잔혹성과 잔인성은 없다. 이것이야말로 인류 사회의 위기를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 문명을 이성의 통제 밖에 두고 문명의 이기를 악용하게 놔둔다면 그 결과는 의심할 필요 없이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것이다. 이제 동북 지역을 벗어난 일본군은 화중 지역을 장악하고 이곳에 괴뢰 정권을 세웠다. 11월 22일 기왕의 군소 괴뢰 집단들을 묶어 멍쟝(蒙疆, 몽강) 연합위원회가 결성되었고, 12월 14일에는 왕커민(王克敏, 왕극민)을 원장으로 하여 허베이와 허난, 산둥, 산시(山西, 산서), 차하르(察哈爾, 찰합이)의 다섯 개 성을 관할하는 ‘중화민국임시정부’라 불리는 정권이 세워졌다. 그 다음해인 1938년 난징에서 양훙즈(梁鴻志, 양홍지)를 행정원장으로 하는 ‘중화민국 유신정부’가 세워져 쟝쑤와 저쟝, 안후이 3성을 관할했다. 한편 난징에서 아수라의 지옥상(地獄相)이 연출되고 있던 그즈음에 살아 남은 국민당 군은 우한으로 철수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이른바 산간닝(陝甘寧) 변구의 중심지인 옌안에 비행기 한 대가 모습을 보였다. 처음에는 일본군 폭격기라고 생각했던 이 비행기는 러시아에서 날아온 것이었고, 옌안의 작은 공항에 착륙한 뒤 비행기에서 내려선 것은 그때까지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던 천사오위(陳紹禹, 진소우) [각주 "일명 왕밍(王明, 왕명)." ] 였다. 그가 급거 귀국한 것은 그 자신의 말대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단결을 더욱 강화해 항전을 철저하게 관철시킴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등장은 미묘한 시기에 미묘한 방식으로 중국 공산당 내부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때까지 당내에서 일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소련 유학파’의 실질적인 리더로 당내에서 마오쩌둥에 다음가는 2인자의 위상을 갖고 있던 천사오위의 등장은 향후 공산당이 직면하게 될 두 개의 노선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항일혁명전쟁의 수행과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혁명의 완수라는 두 가지 과제를 어떤 식으로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과 코민테른의 입장을 대변한 천사오위는 기본적으로는 협조 관계를 유지했다. 마오쩌둥이 ‘쭌이회의’ 이후 당내 주도권을 잡고 대장정을 완수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지만, 중국 공산당에 대한 코민테른의 권위는 여전히 강력했으며, 장원톈이나 친방셴 등과 같은 소련 유학생 파 역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이들의 리더인 천사오위의 지위는 마오와 맞먹는 것이었다. 1938년 3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정치국 회의도 마오쩌둥이 아닌 천사오위가 주관해서 열렸다. 여기서는 국민당과의 통일전선을 비중있게 다루었는데, 마침 국민당 군은 개전 이후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하다가 이즈음에 리쭝런 휘하의 쑨롄중(孫連仲, 손연중)의 제2집단군이 타이얼좡(台兒莊, 태아장)에서 일본군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사실상 이것은 개전 이후 승리만 해오던 일본군의 방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국민당 군의 강력한 항전에 놀란 일본군은 5월에 쉬저우 대회전(徐州大會戰)을 벌여 결국 국민당 군을 패퇴시켰다. 패주하는 국민당 군은 기동 퇴각 전술을 취해 소부대 단위로 포위망을 돌파했다. 일본군은 이들을 추격하며 고도(古都)인 카이펑(開封, 개봉)으로 진군했다. 쟝졔스는 우한 방면으로 향하는 철도를 일본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울러 우한을 방어할 시간을 벌기 위해 황허의 제방을 폭파시켰다. 그 결과 일본군은 수 개월 간 진군이 지체되었으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중국인들이 수장되었고 막대한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다. 국민당 정부가 양쯔 강 중 · 하류 지역을 근거지로 삼고 항전을 계속하려는 의도가 분명해지자 일본군은 우한에 대한 최종 공격에 필요한 비행기와 탱크, 대포 등을 집결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