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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오복음 18,15-20
마태오복음 18장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작고 약한 이, 뒤로 밀려난 이, 소외된 이, 가난한 이를 받아들이는 공동체여야 하고, 서로 죄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어야 합니다. 혹 누군가 길을 잃더라도 공동체의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공동체 역시 길을 잃은 형제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이 말씀을 읽으면 우리는 먼저 ‘어떻게 잘못을 지적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핵심은 교정의 방법보다 그 목적에 있습니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형제를 얻는 것입니다.
그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옳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잘못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도 아닙니다.
잃어버린 형제를 다시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교정에는 사랑이 먼저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잘못은 굳이 바로잡아 주고 싶지도 않습니다. 반대로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데도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말하느냐입니다.
‘네가 틀렸다’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는 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마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단둘이 만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의 잘못을 드러내기 전에, 먼저 그의 마음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 나의 잘못을 말해 주었을 때, 그 말의 내용보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지가 더 깊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사랑에서 나온 말은 아프더라도 마음을 열게 합니다.
그러나 판단에서 나온 말은 옳더라도 마음을 닫게 합니다.
그래서 형제적 교정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죄를 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만, 죄인을 죄와 함께 버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셨지만,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아주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흔히 함께 기도할 때 떠올립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문맥에서 보면 주님께서는 형제를 다시 얻기 위해 애쓰는 그 자리에도 함께 계십니다.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한 형제를 위해 애쓸 때, 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함께 기도할 때, 상처 입은 관계를 다시 잇기 위해 마음을 모을 때,
“나도 함께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공동체란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 때문에 상처받으면서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인 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나는 형제의 잘못을 보면서 무엇을 먼저 생각하는지 돌아봅니다.
‘저 사람이 왜 저럴까?’
‘저 사람은 틀렸어.’
아니면,
‘어떻게 하면 저 형제를 다시 얻을 수 있을까?’
주님,
제가 형제를 판단하기 전에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잘못을 보았을 때 외면하지도 말게 하시고, 그 잘못 때문에 그 사람을 포기하지도 말게 하소서.
제가 형제를 바로잡으려 할 때
제 안에 사랑이 먼저 있게 하시고,
제 말과 행동을 통해 형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한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마음을 모으는 그 자리에
“나도 함께 있다.”고 하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머물러 주소서.
(천 사비나 수녀님)
8월12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에제키엘 9,1-7; 10,18-22 마태오 18,15-20
결속력이 사랑 기반인 공동체의 특징
오늘 복음은 ‘교회에 죄의 용서 권한이 있는가?’에 대해 말합니다.
죄인인 형제가 교회의 말까지 듣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 취급하라고 합니다.
교회의 결정이 곧 하늘의 결정인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시기 위해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죄의 용서의 권한인 ‘하늘 나라의 열쇠’가 교회에 있음을 천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도 성령을 내어주시며 이 지상에서 사도들이 용서하면 용서받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죄의 용서의 권한의 근저에는 교회공동체의 결속력이 하느님의 ‘사랑’ 때문임을 말합니다.
모든 공동체가 사랑을 기반으로 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공동체를 모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회사도 하나의 공동체라 한다면 그것은 돈이라는 힘 때문에 모인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공동체로 부르기보다는 ‘집단’으로 부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삼국지’에서 두 공동체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평화로운 한 마을에 느닷없이 군인들이 나타나 남자들을 끌어가서 목을 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죽은 남자들의 목을 수레에 달아 질질 끌고 다닙니다.
옆에 있던 대신이 장군에게 물어봅니다.
“아니, 저 백성들을 왜 죽였습니까?”
장군은 말합니다.
“심심해서!” 이 사람이 삼국지의 ‘동탁’입니다.
동탁은 이렇게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나라를 장악한 인물입니다.
물론 그 나라가 평화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황건족과 같은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조조와 같이 그를 살해하려는 시도가 지속되었습니다.
이런 시도들이 번번이 실패한 이유는 동탁 옆에 있었던 호위무사 ‘여포’ 때문이었습니다.
동탁은 어떻게 죽게 될까요?
여포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당시 임금을 볼모로 잡은 동탁의 폭정을 보다 못한 왕윤이란 신하가 임금을 구해내기 위해 계략을 핍니다.
자신의 딸처럼 아끼는 ‘초선’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초선은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명입니다.
왕윤이 초선에게 말합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거라.
내 이제 너를 여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약속하고 동탁에게 바칠 생각이다.
네가 할 일은 저들 사이에서 이간질하여 여포가 동탁을 죽이도록 하는 것이다.”
초선은 잘 해냈고 여포는 자신의 여인을 빼앗은 동탁을 죽여버립니다.
두려움으로 뭉친 집단은 더 큰 두려움이 찾아오면 와해되기 십상입니다.
이와 상반되는 공동체를 만든 사람이 ‘유비’입니다.
유비는 귀족 출신이긴 했지만 가난하여 시골에서 돗자리를 짜며 하루하루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장비와 관우와 힘을 합쳐 도적 떼로 변해버린 황건적을 토벌하는 의병이 됩니다.
그의 명성이 점점 커지자 동탁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된 조조가 그 싹을 잘라버리려 합니다.
도망만 다닐 수 없었던 유비는 전쟁의 신이라 불리게 될 ‘제갈공명’을 찾아갑니다.
제갈공명은 산 밑에서부터 걸어서 자신을 만나겠다고 세 번째 찾아오는 유비를 만나줍니다.
제갈공명을 얻게 된 유비는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제갈공명은 자신에게 그렇게 머리를 조아린 유비를 처음엔 잘 신뢰하지 못하다가 한 사건을 목격하게 됩니다.
유비가 자신의 아기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일이었습니다.
유비의 두 아내가 조조 군의 진영에 고립되어 있을 때 조자룡이 끝까지 찾아내어 아들을 구해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조자룡은 상처를 입습니다.
유비는 아기를 집어 던지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까짓 어린 자식 하나 때문에 하마터면 내 큰 장수를 잃을뻔했구나!”
이에 조자룡은 깊은 절을 하며 이렇게 맹세합니다.
“자룡은 이제 간과 뇌가 땅에 으깨어지기까지 주공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둘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제갈공명도 이런 사람이라면
자신도 목숨을 바쳐도 될 것이라 믿게 됩니다.
시골 돗자리 장수였던 유비는 이렇게 사람을 모을 줄 알아, 조조의 위나라, 손권의 오나라와 함께 촉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유비는 관우를 살리기 위해서도 자기 목을 내어놓습니다.
처음부터 유비와 하나가 된 사람들은 유비의 사랑의 힘 때문에 모인 이들입니다.
그렇게 아들까지 집어던질 정도로 자신의 공동체를 사랑했다면 당연히 목숨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집어 던져 십자가에 매달으시며 교회라는 공동체를 모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아드님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며 모으신 이들을 위해 죄의 용서 권한을 주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를 위해 아드님을 주셨다는 것은 ‘다’ 주셨다는 말입니다.
결속력이 사랑 기반인 공동체의 특징은 모든 것을 청할 수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통한 죄 사함이 가능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랑에 감동하여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조자룡의 이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의 간과 뇌가 땅에 으깨어질지라도 주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강론>
(2026. 8. 12. 수)(마태 18,15-20)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5-20).”
1)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는 말씀에서 ‘너에게’ 라는 말은 삭제해야 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생각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은 개인 사이의 사적인 잘못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파문’까지 고려해야 하는 공적인 죄에 관한 가르침이기 때문이고, 또 많은 필사본에 ‘너에게’ 라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너에게’ 라는 말을 그냥 놓아두는 것은, 이미 확정되어 있는 성경 본문을 함부로 손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 형제를 타이르라는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1-3)”
죄를 짓는 형제를 타이르는 일은 ‘심판’이 아니라
‘형제애 실천’입니다.
‘의인’이 ‘죄인’을 꾸짖는 일이 아니라, ‘같은 죄인’의 입장에서 ‘우리, 그러지 말자.’ 라고 권고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나는 의인이고, 너는 죄인이다.” 라는 태도로, 사랑 없이 꾸짖고 혼내기만 한다면, 그것은 ‘남을 심판하는 일’이 되어버리고,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바로 앞에 있는 ‘되찾은 양의 비유’(마태 18,12-14)에 연결해서, ‘잃은 양’이 ‘다른 잃은 양’에게 “우리 함께 목자를 찾아가자.” 라고 권고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아픈 사람이, 또는 아팠던 사람이 ‘다른 아픈 사람’의 아픔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더 잘 도와줄 수 있습니다.
공감과 이해는 사랑 실천의 필수 요소입니다.
‘단둘이 만나’ 라는 말씀은, 공감과 이해, 또 형제애 실천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죄를 지적하고 꾸짖기만 한다면, 상대방을 회개시키기는커녕 반감과 적대감만 심어 주게 될 것입니다.
2) 입장을 바꿔서, 형제가 나에게 와서 나를 타이르는 상황으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형제애를 형제애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너나 잘해라.” 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그것은 나의 죄를 더욱 키우는 일이 됩니다.
바로 그런 모습이,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3) 개인의 힘으로는 해결이 안 되어서 교회에 알리게 되는 상황의 대표적인 예가 ‘이단 문제’입니다.
밖에서 생긴 이단에 오염되었든지 아니면 스스로 잘못된 생각을 해서 이단에 빠졌든지 간에, ‘이단’은 개인의 힘으로 해결이 안 될 때가 많고, 그럴 때에는 교회가 공적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이단 교리에 빠졌더라도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고,
회개하면 해결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
파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라는 말씀은,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대하여라.”, 즉 파문하라는 뜻입니다.
파문은 신자의 자격과 권한을 모두 정지하고,
공동체에서 내보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영구 조치는 아닙니다.
파문당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교회는 그를 다시 받아줍니다.
물론 보속이 크고 무거울 것입니다.
4)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라는 말씀은, 베드로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실 때 하셨던 말씀입니다(마태 16,19).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표현 때문에, 교회의 결정을 하늘에서 무조건 따르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이 말씀은 땅의 결정을 하늘이 따른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결정을 할 때에는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의 14절에 있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라는 말씀은, 매고 푸는 권한을 행사하기 전에 꼭 명심해야 할 말씀입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이라는 말씀은, “죄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공동체가 마음을 모아서 기도하고, 노력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8월12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18,15-20: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공동체 안에서 갈등과 죄의 문제를 다루신다. 인간이 모인 곳에는 상처와 오해가 생긴다. 예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사랑과 자비의 충고, 그리고 공동체적 치유를 제시하신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15절) 목표는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되찾는 것이다.
예수님은 먼저 “단둘이” 만나라고 하신다. 이는 은밀히 그의 상처를 싸매 주려는 배려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사랑의 태도다. “충고”는 꾸짖음이 아니라, 구원으로 이끄는 손길이다. 만일 개인적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과 함께 대화하라고 하신다. 공동체의 지혜와 사랑이 함께할 때 형제가 더 잘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끝내 듣지 않는다면, 교회의 권위에 그를 맡기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교회에 “매고 푸는 권한”(18절)을 주셨다. 이는 교회의 권위가 인간적 통제의 수단이 아니라, 구원의 열쇠이자 자비의 도구임을 의미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리스도께서 형제를 구원하는 길을 보여 주신다. 그 목적은 상대방을 벌주는 것이 아니라, 그를 다시 얻는 것이다.”(Hom. in Matt. 60 요약)라고 하였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사랑 없이 훈계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랑으로 훈계하지 않는다면, 그 침묵은 죄에 동조하는 것이다.”(Sermones 요약)라고 하였다. 성 베네딕토 규칙에는 공동체 안에서 죄를 짓는 형제에 대한 교정은 언제나 점진적이고 인내심 있게, 형제를 다시 얻기 위한 사랑의 과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RB 23 참조)고 가르친다. 교리서는 “형제적 훈계는 사랑의 본질적인 표현이며, 그것은 영혼의 구원을 위한 자선 행위이다.”(1829, 2447항 참조)라고 한다.
우리는 누군가가 잘못했을 때, 은밀히, 인내로, 사랑으로 다가가야 한다. 신앙은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삶이다. 개인적 대화가 실패했을 때 공동체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구원의 책임을 진다는 의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주 강조했다. “교회는 완전한 이들의 모임이 아니라, 죄인들을 치유하는 병원이다.” 형제의 잘못을 고발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함께 치유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 시대는 분열과 갈등이 많은 사회이다. 주님의 약속대로, 두세 사람이 그분 이름으로 마음을 모아 기도할 때,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화해와 평화의 길을 열어주신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형제를 잃지 않는 법을 가르치신다. 충고는 정죄가 아니라, 사랑으로 형제를 다시 얻는 길이다. 공동체는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치유와 화해의 장이다. 기도는 마음을 모아 사랑으로 하나 되는 길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