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려니
조귀순
단풍잎이 대추 열리듯이 달렸다. 나뭇가지를 가릴 만큼 샛노란 은행잎도 무성하다. 등성이에 핀 가녀린 들국화는 진한 향기를 내주고 있다. 지난 여름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폭우가 쏟아졌었다. 그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고도 의연하게 버터낸 나무들을 양팔로 안아본다.
혼자 봉선사에 왔다. 어딘가 숨 돌릴 곳이 없을까 했을 때 이곳이 떠올랐다. 석탑을 돌아서 보물로 지정된 범종루까지 내려왔다. 종각에 형형색색의 소원지가 다닥다닥 달려 있다. 한 자 한 자에 간절함을 담고 물들여서 고이 접었으리라. 나도 바람을 몇 자 적어 꼭 묶어놓았다 큰 연못 쪽으로 걸어갔다.
꽃을 떠나보낸 연잎들은 한층 진한 녹색으로 변했다. 잎사귀는 웬만한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만나고 헤어짐의 이치를 아는 듯하다. 잠자리가 앉았다 날아가고 잔잔한 물 위에서 장구벌레가 톡톡 튄다. 나는 연못을 바라보고 나무 의자에 앉았다. 지난봄에는 수양버들 가지가 춤사위를 치던 여기서 바삐 살아온 나와 쉼을 나눴다. 연못 가장자리에서 꼬물거리는 올챙이 떼를 보며 나른한 몸이 살아나는 걸 느꼈다. 쉼표 같은 몸에서 다리가 생기고 폴짝 뛰어 너른 곳으로 떠난 여기엔 퐁퐁 뚫린 숨자리만 보인다.
나는 몇 달째 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 어떤 말이 내 안으로 들어와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 나를 생각해 준 뜻이라고 몇 번을 되뇌어 봤지만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말 속에 갇혔다. 목소리에도 표정이 있고 입가에 맴돌던 조소에 뜻이 담겼다 순발력이 있었더라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런 말 좀 했을 걸 했지만 다시 말을 꺼내는 게 더 겁이 났다. 칼에 베인 상처는 바로 아물지만 말로 입은 상처는 평생 아물지 않는다고 했던가. 이럴 경우 예민 하게 대응해야 할까. 무덤덤하게 넘기는 것이 슬기로운 건가.
작가 이기수는 <언어의 온도> 에서 사람에겐 둔감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둔한 감정과 감각에 역力 자를 붙인 둔감력이 삶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둔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지나치게 예미한 반응을 하지 않는지 자각하란 말이다.누군가의 말에 쉽게 낙담하지 않고 적절히 둔감하게 대처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얘기다. 성질이 급한 내 아버지는 당신 말에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어머니에게 둔 한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하면서 혀를 끌끌 차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대꾸해야 할 말을 한 박자 쉬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 감정이 누그러지기도 했다. 선천적으로 그런 성향도 있지만 어머니만의 의연한 대처법인 것 같다
아버지와의 일만은 아니었다. 지금은 아주 오래전 일이라 정확하게 어떤 말인지 기억나진 않는다. 그날은 분명 누구라도 섭섭했겠다는 분위기였다. 기분 나쁠 법한 말을 듣고 나는 같이 흉보며 위로해 드리려고 먼저 화를 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되지, 한마디로 일축했다. 누가 봐도 어머니를 온순하다 했으나 심지가 굳었다. 어머니라고 어찌 섭섭하고 억울한 일이 없었겠는가. 때론 체념하고 때론 순응하며 한쪽 공간을 긍정으로 채우려 하셨다.
언제가 뒤꼍 살구나무에서 까마귀가 요란하게 울어댔다. 나는 흔히 들었던 대로 까마귀가 울어서 재수가 없다는 말을 흉내 내며 기분이 나쁘다고 투털댔다. 그러자 어머니는 "재(까마귀)도 지 소리 하는 거지. 그걸 갖고 왜 그러니. 재수 없는 건, 다 지 팔자지"하셨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셨다면 내 안을 휘젓는 말도 까마귀가 지껄이는 소리쯤으로 여기고 맘에 두지 말라 하셨으려나. 상대 말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하실까. 연못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나는 무엇 때문에 그 말을 붙들고 무엇을 비우려 하는가. 그 말이 설령 나를 위한 선물이라 할지라도 내가 받지 않으면 준 사람이 도로 가져갈 것을.
진한 녹차 한 잔이 마시고 싶어졌다. 연못을 돌아 찻집으로 향했다. 찻집에 다다른 넓은 길로 발을 내닫는데 커다란 돌에 새겨진 글이 눈에 들어왔다. '방하착放下着' , 마음속에서 한 생각도 지니지 말고 텅 빈 허공처럼 비워라. 참 이상도 하다. 나는 이따금 이곳을 다녀갔는데 어째서 이글을 오늘 처음 보았을까.
높이 뻗은 낙엽송 위로 새들이 날아간다. 까치와 까마귀도 짖어대며 날아 간다. 올려다본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조귀순 noeul40@hanmail.net 에세이스트 이사, 부천수필 회원 정경문학상 수상 작품집 <여치와 사담>- 벚꽃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 목련꽃은 소리 없이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