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764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다산 정약용의 숨결이 남아 있는 강진군
부산에서 시작된 2번 국도를 따라 종착지인 목포로 가다 보면 강진에 이른다. 예로부터 강진 대합이 유명하다는 뜻으로 ‘강진 원님 대합 자랑하듯 한다’라는 말이 있는 강진은 백제 때 도무군(道武郡)이었고, 고려 때 도강현(道康縣)이 되었다. 태종 17년에 도강현과 탐진현을 합하면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강진군에 강진읍의 지형과 관련이 있는 ‘연지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약 350년 전의 일이다. 강진에 부임한 역대 현감들은 아전들의 횡포로 인하여 소신 있는 행정을 펼 수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어떤 때에는 현감 자리가 공백일 때도 있었다. 효종 4년(1653)에 신유가 현감으로 부임하였는데, 그는 아전의 횡포가 강진의 지세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진의 지세는 누워 있는 황소의 형국, 즉 와우형(臥牛形)이었다. 신유는 ‘황소는 코뚜레를 뚫어야 말을 듣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코뚜레 자리에 연지를 파서 지세를 누르자 아전들의 횡포가 사라지고 덕치를 펼 수 있었다. 현재 어린이 공원 주변이 옛날에 연못이 있던 곳이다.
다산 정약용이 17년에 걸쳐 유배 생활을 한 강진의 만덕산을 윤회는 기문에서 “전라도 강진현 남쪽에 우뚝 솟아 맑고 빼어난 산이 바닷가에 이르러 머물렀으니, 만덕산이라 한다. 산의 남쪽에 부처의 궁전이 있어 높고 시원하게 트여 바다를 굽어보고 있으니, 백련사가 곧 그곳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때 처음 세웠고 고려의 원묘대사가 새로 중수하였는데, 11대 무외대사 때 이르러서는 항상 법화도량이 되어 동방의 이름난 절로 일컬어졌다. 섬 오랑캐가 날뛰게 되자 바다를 등진 깊은 지역이 폐허가 되어 버렸으며, 절도 그 성쇠를 같이하였다”라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승려 혜일은 “앞 봉우리는 돌창고 같고, 뒤 봉우리는 연꽃 같았다”하였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지었다.
백련사 경치도 좋고
만덕산 맑기도 하여라.
문은 소나무 그늘에 고요히 닫혔는데
객이 와서 풍경 소리 듣는구나.
돛은 바다를 따라서 가고
새는 꽃 사이에서 지저귀네.
오래 앉아서 돌아갈 길을 잊으니
티끌세상 전혀 생각 없네.
만덕산 중턱에 자리한 백련사에서 동백나무 숲길을 지나 산길을 걸어가면 정약용의 숨결이 바람으로 남아 있는 다산초당에 이른다. 다산초당의 원래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허물어졌고, 지금의 것은 1958년에 다시 세운 단층 기와집이라 ‘다산와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집 앞에는 그가 차를 끓여 마셨다고 전해지는 반석이 있고, 집 뒤편에는 그가 유배에서 풀려 돌아가기 전에 썼다는 ‘정석(丁石)’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다산초당 가는 길 © 이종원만덕산 중턱에 자리한 백련사에서 동백나무 숲길을 지나 산길을 걸어가면 정약용의 숨결이 바람으로 남아 있는 다산초당에 이른다.
나주들목인 율정점에서 정약전과 헤어진 다산은 나주 영산강을 건너 누릿재와 성전 삼거리를 지나 강진에 도착한 뒤 강진읍 동문 밖의 할머니 집에다 거처를 정한다. 오두막집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지은 그는 그 집에서 1805년 겨울까지만 4년을 기식하였다.
그는 “방에 들어가면서부터 창문을 닫고 밤낮으로 외롭게 혼자 살아가자 누구 하나 말 걸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기뻐서 혼자 좋아하기를 ‘나는 겨를을 얻었구나’ 하면서, 『사상례(士喪禮)』 3편과 『상복(喪服)』 1편 및 그 주석을 꺼내다가 정밀하게 연구하고 구극까지 탐색하며 침식을 잊었다”라고 『상례사전(喪禮四箋)』 서문에서 기록하였던 것처럼 본격적인 학문을 연구하고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사의재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하며 살아가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함이 있다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함이 있으면 곧바로 엄숙함이 엉기도록 해야 한다.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도록 해야 한다. 동작은 마땅히 후중하게 해야 하니 후중하지 못한다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그 방의 이름을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해야할 방’이라고 하였다. 마땅함이라는 것은 의(義)에 맞도록 하는 것이니 의로 규제함이다. 나이만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 둔 사업은 퇴폐함을 서글프게 여기므로 자신을 성찰하려는 까닭에서 지은 이름이다. 때는 가경(嘉慶) 8년(1803) 11월 10일 동짓날······.
다산초당다산이 만덕산 자락의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유배 생활 8년째 되던 1808년 봄이었다. 집 앞에는 그가 차를 끓여 마셨다는 반석이 있고, 집 뒤편에는 그가 유배에서 풀려 돌아가기 전에 썼다는 ‘정석(丁石)’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다산은 1805년 겨울부터 강진읍 뒤에 위치한 보은산에 있는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자리를 옮긴 후 그곳에서 주로 『주역』 공부에 전념하였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닿는 것, 입으로 읊는 것, 마음속으로 사색하는 것, 붓과 먹으로 기록하는 것에서부터 밥을 먹거나 변소에 가거나 손가락을 비비고 배를 문지르던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인들 『주역』이 아닌 것이 없었소”라고 썼던 시절이었다. 그다음 해 가을에는 강진 시절 그의 애제자가 된 이청의 집에서 기거하였다. 다산이 만덕산 자락의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유배 생활 8년째 되던 1808년 봄이었다. 시인 곽재구는 다산초당의 아랫마을에서 다산을 생각하며 「귤동리 일박」이라는 시를 남겼다.
아흐레 강진장 지나
장검 같은 도암만 걸어갈 때
겨울바람은 차고
옷깃을 세운 마음은 더욱 춥다
······
적폐의 땅 풍찬노숙의 길을
그 역시 맨발로 살 찢기며 걸어왔을까
······
어느덧 귤동 삼거리 주막에 이르면
얼굴 탄 주모는 생굴 안주와 막걸리를 내오고
그래 한잔 들게나, 다산
혼자 중얼거리다 문득 바라본
벽 위에 빛바랜 지명수배자 전단 하나
······
정다산 1762년 경기 광주산
깡마른 얼굴 날카로운 눈빛을 지님
전직 암행어사 목민관
기민시 애절양 등의 애민을 빙자한
유언비어 날포로 민심을 흉흉케 한
자생적 공산주의자 및 천주학 괴수
다산초당은 본래 귤동마을에 터를 잡고 살던 해남 윤씨 집안의 귤림처사 윤단의 산정이었다. 정약용이 5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난 그의 어머니가 윤씨였고, 귤동마을 해남 윤씨들은 정약용의 외가 쪽으로 먼 친척이 되었다. 유배 생활이 몇 해 지나면서 삼엄했던 관의 눈길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자 정약용의 주위에는 자연히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윤단의 아들인 윤문거 3형제가 있어서 정약용을 다산초당으로 모셔갔던 것이다.
다산초당 시절 정약용이 각별하게 지냈던 사람은 백련사에 있던 혜장선사1)였다. 혜장선사는 해남 대둔사의 승려였다. 30세쯤 되었던 그는 두륜회(두륜산 대둔사의 불교 학술 대회)를 주도할 만큼 대단한 학승으로 백련사에 거처하고 있었다. 정약용이 읍내 사의재에 살던 1805년 봄에 서로 알게 되어 그 후 깊이 교류하였다. 정약용이 한때 보은산방에 머물며 『주역』을 공부하고 아들을 데려다 공부시켰던 것도 혜장선사가 주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혜장은 다산보다 나이는 어리고 승려였지만, 유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문재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1811년에 혜장선사가 죽자 정약용은 그의 비명을 쓰면서 “『논어』 또는 율려(律呂), 성리(性理)의 깊은 뜻을 잘 알고 있어 유학의 대가나 다름없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