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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받은 마지막 명령
신 32:44-52
44 모세와 눈의 아들 호세아가 와서 이 노래의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여 들리니라
45 모세가 이 모든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46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47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48 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9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50 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51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52 네가 비록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맞은편에서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
신 32:44-52 / [모세가 가르친 최후의 권고]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함께 이 노래를 모두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준 다음에 45) 이제까지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한 모든 말씀을 끝마치면서 46) 이렇게 권고하였다. `여러분은 내가 오늘 증거한 이 모든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도 전하여 이 모든 율법의 말씀을 지키며 살게 하십시오. 47) 여호와의 말씀은 빈말이 되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생명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에 따라서 살아야 요단강을 건너가서 얻을 그 땅에서 오래오래 살 것입니다.' 48) [하나님이 내리신 최후의 명령] 바로 그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49) `이제 너는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지로 들어가서 여리고의 맞은편에 있는 느보산 꼭대기로 올라가거라. 너는 거기서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 차지하게 할 가나안 땅을 바라보아라. 50) 그러면 너는 마치 네 형 아론이 ㄱ) 호르산 꼭대기에서 죽어 그의 조상들에게로 돌아간 것과 같이 그 산꼭대기에서 죽어 네 조상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ㄱ. 에돔 땅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51) 너희 형제 두 사람이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데에는 원인이 있다. 너희가 광야의 가데스 근처에 있는 므리바 물가에서 온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게 불순종하였고 내가 그들 앞에서 거룩하고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날 수 있는 기회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52) 그러므로 너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줄 땅을 멀리서 건너다 볼 수는 있어도 직접 그 땅에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모세가 모든 노래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친 후 느보 산에 올라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죽습니다.
지켜 행하게 하라(44-47) 모세는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노래를 가르치고 부르게 한 후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설교의 내용은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모세는 설명합니다. 율법은 그들이 지켜야 하는 의무이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언약의 말씀입니다(신 29:1,9; 출 34:28; 왕하 23:3; 대하 34:31). 따라서 율법 준수는 하나님과의 관계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언약 백성이 율법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그들에게 건강과 복과 장수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율법 준수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라고 강조합니다. 말씀 순종은 언약백성의 존재 양식(being mode)이자 삶의 양식(life mode)입니다.
모세의 죽음(48-52) 모세가 노래를 가르친 바로 그 날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느보 산에 올라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그 산에서 죽으라고 명하십니다. 형 아론과 함께 모세는 이스라엘 1세대를 이끈 영적 지도자이지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형 아론은 모세가 죽기 6개월 전에 호르 산에 올라가 죽었고(민 33:38), 모세는 느보 산에 올라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죽습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갈망하며 하나님께 구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신 3:25-26). 그 이유는 므리바 물가에서 범한 작은 실수 때문입니다. 곧 물이 없어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때 모세가 분노의 감정으로 반석을 두 번 쳤고, 이런 감정적인 행동으로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신 20:12).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달리 흠이 없는 지도자를 세우실 것이라고 예언하였고(민 18:15), 스데반 집사는 모세가 예언한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언합니다(행 3:22).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모세의 실패와 달리 흠도 티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실수 없이 완전하게 우리를 영원한 기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엡 1:3).
적용: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당신은 말씀 순종을 의무나 짐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여기고 있나요?
이 시대야말로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영적 능력이 요구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침묵과 자기반성의 기간을 선포하고 각자의 마음을 살피고 영적능력을 받기 위해 준비 작업에 돌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예기치 않은 큰 영적 유익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 설 교 >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신 32:45-47 / 오정호 목사
영성의 핵심은 어떤 신비로운 현상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강조합니다. 또 어떤 교회는 성결이나 사회정의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교회가 속한 교파는 복음주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합니다.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는 라틴어로서 그 의미는 '오직 성경으로만!'입니다. '오직 성경으로만!' 이 의미 속에는 카톨릭의 교회전통과 교황의 해석을 신앙의 최종권위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말씀의 권위만을 교회의 최종권위로 다시 세우고자 하는 개혁자들의 불타는 확신과 열정이 담겨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여러분을 붙잡고 지탱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미국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102층의 건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하1층밖에 되지 않는 이 건물이 오늘날까지 견고히 서 있는 이유는 바로 밑에 거대한 암반이 건물을 튼튼하게 지탱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는 정치권도 흔들리고 가정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과 교회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본문은 출애굽 후에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던 모세의 고별설교의 한 부분입니다. 모세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백성들을 향해 마음에 담아두었던 가장 간절한 말을 유언처럼 전합니다.
모세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은 우리에게 세 가지 면에서 영적인 도전을 줍니다.
1. 공허한 이론 위에 인생을 건축하지 말라(47a절).
47절의 '허사'라는 말은 '비어있다',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공허한 것 위에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건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에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든 후 축제를 벌이고 광란의 춤을 추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우상숭배가 큰 약점이었습니다. 이러한 백성들의 약점을 잘 아는 모세는 공허한 것 위에 인생을 건축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당부를 합니다.
우리 각자는 신앙생활가운데 평소에 잘 관리하지 않으면 문제를 일으킬 약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돈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음란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분노나 아집일 수 있습니다.
제가 미국의 네바다주에서 캘리포니아로 차를 운전해갈 때였습니다. 사막의 열기는 섭씨 40도가 넘어가는데 한참 달리다 보니 저 멀리 신기루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기루를 좇아 살아가다가 결국 시간을 낭비하고 탈진하여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허망한 인생으로 종지부를 찍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사막의 신기루와 같이 헛된 것에 주목하지 말고 참된 것 위에 인생을 건축하십시오. 우리는 비록 음란과 패역의 시대를 살아간다 할지라도 깨어있어서 항상 우리의 영적인 유산을 지키고 신앙의 가정을 세워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진리로만 인생을 건축하라(47b).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라고 할 때, 말씀은 곧 생명이기에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육체의 생명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날마다 생명의 역동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큰 복입니다.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는 신앙의 선조들이 물려준 귀한 영적 유산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우리의 믿음과 행위의 본분을 가르치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성경은 다른 수많은 저술보다 으뜸이며 교회의 전통보다 우월하며 개인의 종교적 체험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포용하는 교회입니다. 그 은사를 통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체험은 반드시 말씀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개인의 영적체험이 객관적인 말씀의 권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어떤 신학이나 이론이나 문화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훼손할 수 없습니다.
현존하는 영적 지도자 중에 복음주의의 전통을 바로 세우고 말씀의 권위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람은 빌리 그래함 목사님입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닉슨 대통령의 장례식을 집례할 때에 비록 노구의 몸이었지만 담대하고 권위있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전기작가는 빌리그래함 목사님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는 청년시기에 성경에 몰입했다. 그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설교하며 적용했다. 그는 대학시절에는 성경적 세계관을 흡수했기 때문에 그의 몸에서는 성경이 흘러나왔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평생을 말씀에 헌신했고 그의 삶 전체에서 말씀의 권위와 능력이 흘러나왔다는 것입니다.
1949년 빌리그래함과 동료들은 그들의 인생이 깨끗한 그릇으로 쓰임받기 원하여 4가지를 약속했습니다.
첫째, 금전적인 문제에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을 것을 약속했습니다.
둘째, 성적인 문제에 깨끗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셋째, 사역을 과장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습니다.
넷째, 공개적으로 지역교회 사역자들을 비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위의 약속들은 빌리그래함 선교회의 사역 50년 동안 깨지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는 것은 곧 말씀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7,8월 동안 성경다독대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재헌신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우리를 붙잡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고, 다음세대에 전하라(46절).
모세는 "말씀을 너희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합니다(46절). 교사와 부모는 먼저 말씀의 원리를 자신에게 적용하고 나서 맡겨진 학생과 자녀에게 전수해야 합니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당부합니다(딤후3:15). 주님은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8:20). 내가 진리를 확신하고 체험한 만큼 남에게 진리를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년동 새성전 건축에 힘써야 하는 이유도 다음세대를 말씀으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올해의 성경다독대회를 통해 우리 교회와 우리 가정이 말씀 앞에 재헌신합시다. 말씀의 은혜와 진리가 우리 가정과 교회를 세우게 합시다. 진리의 말씀을 확신하고 자녀들과 다음세대에 이 말씀을 전하는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의 공동체를 함께 세워나갑시다.
솔라 스크립투라
말씀에 생명이 있네 영생이 있네
지구상에 있는 이 모두 말씀을 받네, 생명을 받네
말씀으로 우주를 지어내신 주님,
말씀으로 인생을 거듭지어내시도다!
말씀에 길이 있네, 미래가 있네
주님을 따르는이 모두 말씀을 펴네, 은혜를 보네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신 주님,
말씀으로 인생을 인도하시는도다!
세상은 제길가네, 혼돈의 연속이네
주 따르는 이들은 말씀을 붙드네, 말씀이 생명이네
말씀을 사랑하는 이 말씀의 붙들림을 체험하네
솔라 스크립투라!
그대는 아는가
솔라 스크립투라의 비밀을!
그대는 체험하는가
솔라 스크립투라의 능력을!
느보 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본 모세
신 32:48-52 / 박성복 목사(동인교회)
오늘 우리 교회 성가대원들이 우리 교회 예배장소에서 한국어로 특송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리니까 어떻게 좋은지요. 저는 지난 주일날 태국에서 예배드릴 때 그들이 찬송을 힘차게 찬양을 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제가 알아들을 수가 없더라고요. 제가 그날 설교를 하면서 이런 소리를 했습니다. 태국에 와도 닭 소리는 똑같고 중국에 가도 닭 소리는 똑같고, 한국에도 닭소리는 똑같아서 통역하는 닭이 한 마리도 없어도 되고 통역하는 개가 한 마리도 없어도 되는데 오늘은 사람 소리인데 왜 못 알아듣는가? 라고 말하며 창세기 11장에 바벨성을 쌓다가 언어 심판을 하는 바람에 오늘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면서 이제 우리에게 만유가 회복되는 날이 오면 모든 언어소통이 다 잘 될 줄로 압니다라고 말하면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벌써 한 주간 성가대 찬양을 안 들었다고 해서 마치 천사의 합창단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여러분 잘 들어주십시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 년이라는 대장정의 광야생활 을 마칠 즈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려주신 놀라운 사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모세가 일백 이십 세에 가나안 땅이 보이는 이 모압 평지 느보 산에 올라서 저 멀리 가나안 땅을 바라볼 때 요단 평야가 손에 잡힐 듯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는 그때였습니다. 저 멀리 지중해 연안까지 훤히 볼 수 있는 그런 맑은 날씨였습니다. 그 땅은 사백 년 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땅인데 그것이 이제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모세가 이 사건을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하는 사건인 줄 압니다. 노예생활에 몸부림치며 울부짓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양의 피로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바로를 굴복시키고 이끌고 나와서는 민족들에게 환영도 받고 대접도 받고 칭찬을 받을 줄 알았는데 광야에 나와서도 역시 그들이 시비와 불평과 원망이 그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십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많은 동료를 잃고 이제 형님까지 호르산에서 잃어버렸고, 지금은 혈혈단신으로 느보산에 올라와서 생을 마감하기 직전인데 모세의 입에서 오늘 보문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참으로 가나안 문턱까지 와서 저 요단이 한눈에 잡힐 것 같고, 젖과 꿀이 흐르는 저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있는 모세인데 하나님의 선고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에게는 절망입니다. 모세라고 하는 이름은 ‘물에서 건져냈다’는 이름입니다. 그 바로 왕궁의 무서운 칼날과 무서운 재앙 앞에 그 종노릇하던 풍랑이 일어나는 그 바다와 같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하여 구출을 받고 큰 홍해라고 하는 대해에서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끌어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모세에게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를 바로의 딸인 공주의 아들이라는 명성을 가지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사는 것보다도 신명기 34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종으로 또 그를 민족의 선지자로 살아가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 그런데 육십만 대군을 이끌고 광야를 통과하면서 참으로 존경받아야 할 자가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대접을 받아야 할 자가 대접받기는 커녕 원망과 불평과 배신까지 당합니다. 마치 이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민족에게 멸시와 천대와 고통을 당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좌절할 때마다,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힘이 들 때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서 힘을 북돋워줬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는 하나님께서 힘을 돋워주기는커녕 좌절을 할 수밖에 없게 합니다. 신명기 34장 7절 이하에 보면 모세 나이 백이십년이라는 연대가 나와 있습니다. 바로 왕궁에 사십 년이요 광야생활 사십 년이요, 즉 망명생활이지요? 다시 말해서 모세는 광야생활 팔십 년입니다. 왕궁서 훈련받는 기간이 사십 년이요 광야 생활이 40년이고, 또한 자기 동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면서 광야 생활을 한 사십 년을 합하여 일백이십 년이라는 기간이 흘렀는데 그가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고 눈이 흐리지 아니했다 했는데, 그런 모세를 하나님께서 그 가나안 땅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육십만 대군을 이끌고 광야에 나왔으나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이랬을까?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왜 이랬을까요? 민수기 20장 24절 이하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신 광야 가데스 므리바 물가에서 범죄를 했다고 그랬습니다.
자, 여러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5절에 보면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라고 합니다. 모세가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다툼이 벌어지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영생과 직접 관계되어 범죄하는 것은 절대로 금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땅에서 저지르는 범죄는 순간이요, 또 실수나 부족함이나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영생과 관계되는 범죄의 문제에 걸려들면 이것은 용납지 아니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을 하고, 불평을 하고, 시비를 하고, 막 모세를 아주 괴롭힙니다. 그 때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칩니다.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얼마나 많이 솟아났는지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시고 짐승들도 다 먹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치니까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그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물을 마시게 되고, 짐승 같이 이방이었던 우리도 그 물을 마시고 영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보면,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랬습니다. 반석을 두 번 친 것이 문제가 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죄인을 위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한번만 치는 것도 참으로 대단한 일인데, 반석을 두번 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두 번 죽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모세가 걸려들은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민수기 20장 12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을 싸잡아서 같이 반석을 친 걸로 말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론은 억울하기도 하겠죠. 그러나 모세와 함께 아론을 싸잡아 반석을 친 걸로 하나님이 말합니다. 이것이 뭐냐면 동참 죄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칠 때에 아론은 두 번 치는 것을 붙들 여유도 없었습니다. 순간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아론을 호르산에 불러올립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중에 짓는 여러 가지 범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에 관계되는 범죄만은 우리가 조심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태국과 라오스, 캄보디아 국경지대까지 갔다 왔거든요. 우리 그 태국의 선교사가 몇해 전에 미국에서 집회를 하면서 저에게 배운 말씀을 전했더니 거기의 사람들이 정말로 ‘과연 이런 말씀이 있는가!’라면서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팔아서라도 이 말씀의 축복을 사야겠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이번에 가보니 태국에 교회를 잘 지어줬더라고요. 제가 이번에도 가서 거기 사람들에게 이 선교사가 내 제자니 좀 많이 도와주라는 말도 했습니다만 교회를 참 잘 지었어요. 그런데 그중에 한분이 박정희 대통령 때에 신임을 받아 돈을 떡 주무르듯이 하고 물 쓰듯이 쓰던 사람인데 하나님이 치니까 10년 동안 식물인간이 되어 있었다고 그래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1년의 식물인간도 어려운데 10년 동안 식물인간 되면서, ‘하나님 나를 이번만 살려주면 가장 오지에 가장 미개한 나라에 가서 교회 짓겠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 대단한 것 같더라고요.
언제나 남편은 부인이 신앙이 좋아야 되요. 모든 것 승리하는데 보면 부인의 신앙이 좋아야 되는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10년 만에 그 분이 살아나서 그 산촌 오지에 여러 교회를 지었는데 잘 지었어요. 제가 다 못 다니고 대충 다녀보고 말았습니다만 얼마나 그 어려운 곳에서 교회를 짓고 복음을 전해 예수를 믿게 하는지 제가 참으로 고맙다고 그랬어요. 이 복음을 받고, 이 말씀을 받고, 힘들게 교회를 지어주고, 또 그 사람이 혹시 자기 이름이 날까봐 그저 헌당식을 하기 전에 먼저 가버렸다고 해요. 제가 그런 소리를 들을 때, 참 우리 교회가 참 고맙다고 생각했어요. 왜 우리 교회가 고마우냐면 이 말씀을 듣고 함께 힘을 합쳐서 전할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말씀을 전하면 다 좋아하잖습니까? 그래서 앞으로 우리 교회 여러분들은 다 세계로 나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요 번역 기계가 잘 되어 있어가지고 한국말만 해도 알아들을 수 있는 기계 장치가 개발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그 나라 언어를 잘 못 구사해도 소통할 수 있는 모든 장비들이 지금 개발되어 있다고 하니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제가 지난번에도 말했습니다만, 신문에 보니까, 세상에 이제는 비행기가 미국 뉴욕에서 딱 2시간 만에 한국 오더라구요. 그런 비행기가 지금 나왔어요.
그런데 그 비행기 항공료가 지금은 만만치 않게 생겼더라고요. 여러분이 돈을 많이 벌어야 되겠더라구요. 저는 6시간동안 태국 치앙마이까지 가는데 몸부림이 나서 못 견디겠더라구요. 그런데 앞으로 미국도 2시간만 타면 갈 수 있다고 하니 얼마든지 말씀을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정말로 과학이 그토록 발달되어 있습니다. 이는 주님 오실 때가 꽉 되었기 때문인줄 압니다. 지금 여러분, 쉽게 미개 국가라고하면 안 되겠더라구요. 중국서 지금 4백 7십 몇 키로로 달리는 고속 열차가 나와 있더라구요. 4백 몇십키로라고 그러면요 비행기만큼 빠릅니다.
그런데 그게 중국서 지금 만들어서 운행직전에 있더라구요. 여러분, 다니엘서 12장 4절 이하에 보면,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고도로 발달한다”고 했잖습니까? 제가 치앙마이에서 선교사 보고 이랬습니다. 한국이 사명자 국가이기 때문에 지금 인천공항과 똑같은 비행장 하나를 또 짓는다고 하니까 깜짝 놀래요. 2017년에 완공한다고 하는데 지금 그 인천 공항이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최우수 비행장으로 선정이 되었잖습니까? 가보시오. 얼마나 큰 플랜카드에 세계 일곱번째 1등으로 승진된 비행장이라고 써있습니다. 처음 그 비행장을 만들 때 ‘거기가 안개가 끼어서 안 된다. 거기 갯벌에 비행기 다 빠진다. 철새들 날아다니는 도래지기 때문에 비행기가 다 떨어진다’면서 데모꾼들이 얼마나 그 비행장 만드는 걸 반대했는지 모릅니다. 지금 보십시오. 그 비행장 만들 때 반대하던 사람들이 4대강 일할 때 또 반대했고, 지금 저 제주도 강정마을 가서 또 반대를 합니다. 그건 절대로 반대하는 귀신이 따라 붙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말씀이 확 믿어지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하거나 설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라”했습니다. 말씀이 믿어지도록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세가 일백 이십년 동안 살았으나 눈이 흐리지 아니하고 기골이 정정한 그 모세는 더 오래 장수할 수가 있었는데 모압 평지에 와서 사명을 거둬가니까 거기 호르산에 오를 때 생명이 끝납니다. 여러분, 민수기 10장 28절 이하에 보면 모세가 자기 조카를 데리고, 다시 말해서 아론의 아들을 데리고 다 함께 호르산에 오를 때 아론은 모르지만 모세는 알고 있었습니다. 딱 그 산에 가서 자기 동생 모세가 반석 칠 때 거기 옆에 있었다는 것 때문에 아론의 옷을 벗깁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억울하죠? 여러분, 주님 나라 가는 사람들은 시험받는 옆에 서지 마세요. 시험받는 자와 동조하지 마세요. 바로 이것은 내가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바로 그 산에서 아론의 옷을 벗깁니다. 그리고 아들 엘르아살에게 옷을 입히니까 그 산에서 하산하지 못하고 아론은 그 산에서 죽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그 말을 해줍니다. ‘너의 형 아론은 호르산에서 죽었다’며 그 죽은 이유를 말합니다. 반석은 모세가 쳤는데 왜 아론까지 곁들여 싸잡아 말을 합니까? 그 옆에 있었다는 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소돔 고모라가 멸망 받을 때 그 옆의 이웃 동네까지 함께 멸망 받았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어쨌든지 은혜 받은 자 옆에 함께 가시고, 기도하는 자 옆에 계셔야지 만약에 비방하거나 흉보거나 남을 헐뜯는 사람 옆에 있으면 반드시 그 영도 내게 옵니다. 제가 많이 바쁩니다. 어제는 태국서 와서는 바로 광주에 내려가서 결혼 주례를 하고 왔는데 신랑 신부에게 그런 말을 마지막에 그랬습니다. ‘너를 괴롭게 하는 자는 물에다가 기록하고 너에게 은혜를 입힌 자는 반석에다 기록해라’. 이 말은 받은 은혜는 잊지 말라는 소리거든요. 그저 악한 자가 괴롭히는 자가 있습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런 일이 있거든 흐르는 물에 기록해 떠내려 보내버리고, 내가 잊어서는 안 되고 정말로 잊을 수 없는 그 분은 돌에다가 새겨서 항상 잊지 말라고 하면서 주례사를 마쳤습니다.
오늘 여러분, 정말로 모세가 왜 가나안 땅 못 들어갔는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신과 같이 썼던분 아닙니까?. 제가 이제 새벽예배 때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마치고 지금은 레위기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지방에 내려갔더니 ‘아이고, 목사님 외국 가 있는 동안 숨통이 막혔다’며 지방 목사님들이 그래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마음에 새겨질 때에 우리는 이 말씀이 영생하는 말씀인 줄 여러분이 믿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보세요. 애굽에서 종노릇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남자 아이를 막 죽이는 거기에서 해방시켜서 이끌어서 약속의 땅을 가면 여간 어려워도, 여간 힘들어도, 여간 괴로워도 참아야 되는데 거기서 뭐 하려고 무화과를 찾습니까? 그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다’고 하는 이건 미친 자가 하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원망하고 불평하던 그들은 그곳을 공동묘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약속의 땅을 안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끌고 여기까지 왔고, 벌써 구름이 덮어지고, 불기둥이 인도해주면 이미 배후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데 그 입에 들어가는 것 때문에 원망하면 안 되는데 지도자를 원망하다 다 죽었습니다.
나는 이번에 산족들에 대해 들어보니 기가 막힌 삶을 살아요. 거기는 윤리와 도덕이 없어요. 예를 들어서 그 부족 중에 산족 중에 한 여자가 경도가 있으면 동네 총각이 전부 다 잠자리 같이 해야 되요. 그리고 애기를 가졌다고 하면 맨 마지막에 잠잔 자가 남편이 되는 거예요. 자식은 누구 자식이든 관계없어요.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 복음이 들어갔어요. 웃을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또 그들은 절대로 못 살아도 원망이 없어요. 불교 세계라서 내가 원망하면 다음 세대에 환생할 때 못된 놈으로 태어날까봐 없다고 해요. 제일 좋은 팔자가 개 팔자가 그 팔자더라고요. 개가 늘어져 자도 그것이 자기들 조상이라는 거예요. 숙모도 될 수가 있고, 할아버지도 될 수가 있다고 하면서 혹시 내가 잘못하면 저 놈이 될 수가 있으니까 원망도 하지 않는다고 해요. 그래서 남편이 살다가 가 버려도 ‘내 업이구나’하면서 남편을 원망하지 않아요. 여러분 같으면 칼부림 납니다. 다음 내세의 소망을 바라고 그렇게 참는다고 하면 그게 맞지 않거든요. 오늘 여러분들은 정말로 내세에 부활이 있음도 믿고, 이 말씀을 믿는 우리는 또한 변화성도가 되기 때문에 정말로 인내할 줄 알기를 바랍니다. 나는 불교문화가 그런 줄 몰랐어요. 환생한다는 소리만 들었는데 가보니까 여자가 다른 남편한테 가서 살아도 ‘내 업보구나’ 그러면서 살아요. 남편이 부인을 두고 다른 여자를 또 얻어 가버려도 또 그것 가지고 싸우다가 내가 다른 나쁜 놈으로 태어나면 어떻게 하냐면서 인내하는 거예요. 인내를 기가막히게 잘 해요. 우리는 인내하는 척 하다가 뒤집잖아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성도 여러분, 모세가 그 땅에 못 들어간 것은 반석을 두 번 친 것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볼 땐 별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딱 같다 걸었습니다. 사실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 아프게 한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많고, 그렇게 모세도 그들과 싸우고 지지고 볶고 했는데, 딱 모세에게 걸은 것은 반석을 두 번 친 겁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지요? 고린도전서 10장 4절 보세요. 그 반석은 예수그리스도라 그랬습니다. 이는 한 번 죄를 위해서 주님을 못 박는 거 외에 또 못 박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도 물을 내라고 그래서 반석을 두번 쳤거든요. 저는 이번에 우리 집사님들이 저에게 신경을 많이 써줬어요. 여러 가지 가져간 게 많습니다. 어떤 집사가 이렇게 큰 왕뚜껑 사발면을 사줘서 그것을 어떻게 먹나 했더니 하나님이 그것도 차에 싣고 가다가 뜨거운 물 부어서 풀밭에 앉아서 먹으니까 한국의 왕뚜껑 맛이 아니고 천국의 왕뚜껑 맛이 나더라고요. ‘아이고, 여기서 먹으라고 이걸 보냈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김치가 어떻게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가야할 고국이 있고, 가야할 교회가 있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있고, 나를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있다고 느껴지니까 감격해 지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내일이면 고국에 간다니까 오늘부터 좋아져요. 여러분, 거기가 천국같이 좋으면 뭐 그런 마음이 있겠습니까? 잠자리도 그렇지요. 저는 정말로 그 나라 음식을 못 먹겠어요. 그래서 어디 갈 때마다 그 침치 같은 것을 꾸리고 다녔거든요. 그런데 오다가 산길이 너무 나빠 가지고 막 뒤집는 바람에 마지막 때는 바닥에 다 쏟아가지고 먹지도 못했습니다마는 얼마나 길이 험하고, 험난한지 모르는데 거기에 복음이 들어갔더라고요. 14대 복음이 거기 들어갔다니까요. 너무 감사하지 않습니까? 너무 고맙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차라리 안 보이면 되는데 저 지중해 연안까지 다 보이게 하고 안 보냅니다. 여러분, 분명히 신명기 3장 23절에서 27절 보세요. 모세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가게 해 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하는지 모릅니다. 기도하라고 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 주겠다고 하시면서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신명기에 보면 모세의 기도가 나옵니다. “저 요단강, 아름다운 그 요단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가 그 땅 들어가고 싶으니 나로 그 땅을 들어가게 해달라”고요. 간절히 애원을 했으나 하나님은 그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러분, 그래서 아론은 호렙산에 오르면서 자기가 그 산에 왜 올라가는지도 몰랐고, 내려올 때에 알아서는 못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기가 느보산에 오르면서 못 내려올 것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 골고다 언덕으로 가서 죽을 것을 주님은 미리 아셨던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왜 가나안 땅 가면서 광야에서 수많은 실수를 하고, 원망과 불평과 싸움이 날마다, 날마다 그들의 생활에 얼룩졌습니다. 그렇지요? 그렇게 원망하고, 그렇게 불평하고, 그렇게 싸우고, 모세를 돌을 들어 치려고 해도 그런 범죄보담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더디 믿는 것 때문에 20세 이상은 두 사람외엔 싹 다 죽여 버렸다니까요. 민수기 13장 1절에 한 번 봐보십시오. 열두 정탐꾼을 뽑아서 가나안 들여보냈습니다. 가나안에 들여보냈는데 사십일 동안에 정탐을 다 하고 돌아와서 그 땅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열지파입니다. 그런데 말은 은혜로운 말의 전파보다도 시험되는 말이 잘 번져 갑니다. 그 많은 사람이 울고불고 가나안 땅 들어가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갈렙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이다. 그 악한 자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하는데 여호수아 갈렙의 말을 믿지 않고 열 지파 사람들의 말을 듣습니다. 여러분, 열 지파의 그 대표를 뽑을 때요. 신앙이 있고, 믿음이 있고, 열심 있고, 건강하고 이런 사람을 뽑아 보냈는데, 그 사람들은 지파장이에요. 지파의 대표에요.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 빼놓고는요 다 잘 못 뽑았어요. 그 땅 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400년 만에 이루어지는 절호의 기회인데 약속의 말씀을 안 믿는다 이 말이에요. 말씀을 안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 땅에 들여보내지 않기 위해서 광야에서 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 땅에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절호의 기회를 놓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절대 우리는 말씀을 믿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세계가 점점 어려워서 경제공항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6장 보면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그러나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고 그랬습니다. 여기 감람유는 뭡니까? 성전의 불을 밝히는 기름이에요. 즉 어두운 시대에 불을 밝히는 교회입니다. 그다음에 포도주는 뭡니까? 진리입니다. 즉 진리가 있는 교회는 경제의 파탄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십세 이상은 싹 다 죽여 버렸습니다. 그 때 모세 아내도 죽습니다. 모세나 아론의 자식도 죽습니다. 그런데 누구만 남기느냐면 이십세 이하만 남기고 20세 이상은 여호수아 갈렙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다 광야에 쓰러뜨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고린도전서 10장 보면 6절에 이런 일이 우리의 거울이라 그랬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구약에 일어났던 일들은 우리의 거울이에요. 여러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면서 세례를 받았다고 그랬습니다.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민족들이 한꺼번에 물세례를 다 받았습니다. 여러분, 장정만 육십만 이라면 젊은이들까지 하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어린아이들까지요. 제가 논산훈련소에서요. 이천 명을 목사 몇 명이서 세례를 주니 정신이 없어요. 명찰을 딱 봐야 알아요. ‘누구누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아멘’하며 2천명 세례를 주는데 나중에 손이 퉁퉁 불어요. 이천 명을 한번 해보십시오. 그런데 홍해를 갈라놓고 이스라엘 백성을 한꺼번에 세례를 주었다고 고린도전서 10장에 그래놨다니깐요. 그러니 다 세례를 받았고 신령한 식물과 신령한 음료를 먹었다고 했는데 그 신령한 식물은 뭡니까? 만나입니다. 또 신령한 음료는 반석의 생수입니다. 이걸 먹여놓고 다 죽여버렸다니깐요. 오늘날 신약시대에 와서 신령한 생수가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입니다. 신령한 만나가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 먹었다고 해서 그 나라 가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죽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 제가 태국에서도 이런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죽는다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받기로 작정된 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말씀을 먹고 면박이 벗어지고 휘장이 벗어지고 사망을 이긴다고 하는 이사야 25장을 알려주니깐 그 사람들에게 통역을 해도 ‘아멘’ 한다니깐요. 여러분, 말씀을 믿는 것은 내가 아니고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 아니고는 믿어지지 못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그냥 왔다 갔다만 하는 곳이 아니에요. 여러분,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계를 보면 세 가지의 바늘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쓸데없이 바쁜 사람을 말하는데 그것은 초침이에요. 그건 별 효용도 없는데 정신없이 바빠요. 그다음에 점잖은 척 하는 분침이 있어요. 그런데 정확한건 뭐에요? 시침이에요. 다 필요합니다 만은 세 가지 종류 중에 여러분은 어떤 부류입니까? 여기 지금 다 있어요. 앉았다가 후다닥 가는 사람은 무슨 성도입니까? 초침성도예요. 그다음에 적당히 때를 살피는 분침성도가 있는데 여러분은 시침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장 짧아도 사람들이 그걸 먼저 보게 되지 막 바삐 돌아가는 건 잘 안봅니다. 그걸 누가 봅니까? 돌아가는 것만 알죠.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제가 설교가 길어서 죄송합니다만 내가 은혜 받았다고 해서 안심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백성 된 거 가지고 마음 놓고 계시지 마십시오. 분명히 우리는 약속의 땅을 밞아야 되기 때문에 그 땅 가야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반석 두 번 친 것 때문에 가나안땅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말씀을 안 믿기 때문에 가나안땅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꼭 고린도전서 10장 1절에서 7절까지를 읽어보면 이런 일이 우리의 교훈이 되고 거울이 된다고 했습니다. 거기 1절서 4절을 보면 출애굽 역사가 나옵니다. 홍해 건너는 것이 나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나오고 하늘에서 내린 만나가 나옵니다. 이걸 먹였으나 하나님은 다수를 기뻐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왜? 안 믿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하는 다수보다 순종하는 소수를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소수의 무리지만은 이 말씀을 굳게 믿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영생의 주인공들이 다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예고와 선고
신 32:48-52 / 송기정 목사
존 맥스웰 목사님은 “인생에서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보다 강력한 힘은 없다” 고 했습니다. 모세와 바울 등,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생애와 사역은 결코 순탄하거나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동역하였기에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32장은 모세의 마지막 노래입니다. 그는 그의 평생에 그가 체험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스라엘 대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노래로 들려 주었습니다. 그는 노래로 들려 준 것이 결코 빈말이 아니며 그들의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따라야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그들의 날이 장구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후 바로 같은 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오늘의 본문 신명기32:48-52입니다. 그 내용은 모세의 말년에 대한 하나님의 예고와 선고입니다. 인생의 말년,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생의 말년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교훈이 있습니다. 그 은혜와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가나안 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의 조상에게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신32:49-5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가 느보 산에서 평안하게 임종하게 될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느보 산은 아바림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서 해발802m입니다. 이곳은 팔레스틴 전역을 바라보는데 최적의 장소입니다. 가시거리가 100km에 달해 청명한 날에는 예루살렘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120세 노인 모세가 이 높은 산에 올라간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간 그 산에서 죽었습니다.
모세, 그는 참으로 죽을 때까지 충성했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그 높은 산에 오르게 하시고 그 산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하신 것은 그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한 눈에 다 바라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의 땅입니다. 이 땅은 모세가 한 평생을 다 바쳐 사모해 온 땅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이 걸려 있는 축복의 땅입니다. 그래서 온갖 시련과 역경에 굴하지 않고 꿈꾸어 왔던 땅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수 없이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결코 가나안 땅에 대한 그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리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굳게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마침내 그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죽어도 여한이 없는 말년을 보내게 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강변교회 김명혁 원로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결혼 후 두 자녀를 얻었습니다. 첫째는 딸이고, 둘째는 아들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수종이라는 병에 걸린 아들 철원이는 머리뼈가 벌어지는 극심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믿음이 참 좋았습니다. 아버지가 기도해주시면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는 “아빠는 기도를 잘해서 최고야!” 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아빠와 함께 찬송도 부르고 성경도 암송한 그는 때로 이런 말도 했습니다. “아빠! 예수님은 나보다 더 아프셨지? 이제 천국에 가면 예수님이 나 다 고쳐 주시겠지? 나 천국 가고 싶어. 엄마, 아빠, 누나랑 다 같이 천국 가고 싶어.”
결국 아들 철원이는 네 살 때 천국으로 갔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로서 비통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김명혁 목사님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 119:71)하면서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자녀를 먼저 보낸 슬픔과 아픔이 저에게는 보석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 예수 그리스도의 슬픔과 아픔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곳곳에서 슬픔과 아픔을 당하며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고, 그들에게 찾아가서 위로와 사랑의 손길을 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천국을 사모하는 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슬픔과 아픔을 허락하신 것이 은혜입니다. 그 사건이 제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그네 길에서 띄우는 목회 편지, 2011)
히브리서12:2의 말씀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아멘!
모세, 그는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실 가나안 땅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는 실로 그의 평생에 가나안 땅을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그가 애굽을 떠난 것이나 광야를 지나 올 수 있었던 것은 다 그 앞에 있는 기쁨 곧 가나안 땅에 대한 꿈과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느보 산 정상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그의 말년과 죽음을 아주 행복하게 맞이한 줄 믿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그 약속하신 기업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참는 사람에게 반드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맞이하게 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말년과 죽음을 행복하게 맞이했던 모세처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천국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동역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느보 산 정상에 올라갔던 모세처럼 신앙과 순종의 정상에서 인생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되시기를 십자가를 참으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간절히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 대로 애굽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를 건너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네가 비록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맞은편에서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신32:51-5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가 과거 므리바 물 사건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선고하신 말씀입니다.
므리바 물 사건 (출17:1-7;민20:1-13) 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신 광야의 가데스에 거할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백성이 물이 없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들의 원망은 하나님께 대한 다툼이기도 하였습니다. (민20:13)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스라엘 목전에서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그는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민20:10,11) 여기서 우리는 모세가 큰 실수를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을 믿지 않고 범죄하여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라고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석을 두 번 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모세에게 들려 주셨는데 모세는 자기가 물을 내는 것처럼 말하였고, 하나님은 ‘반석에서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셨는데 모세는 반석을 두 번 침으로 불순종 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 그는 참으로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큼 가장 온유하고 충성스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음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본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만해도 족하니라’ (That’s enough! 신3:26) 라고 말씀하신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더라면 모든 사람에게 훨씬 더 큰 감동을 주는 귀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다투는 사람들 중에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에게는 그 인생의 말년에 더더욱 족한 은혜를 주시는 줄 믿습니다.
길버트 빌지키언 교수는 강의를 시작할 때마다 늘 사도행전2장40-47절 말씀을 읽어 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약 2,000년 전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며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그 교회로 몰려든 사람들이 절망에서 소망을 찾았습니다. 그런 교회의 모습이 왜 1970년 현재 시카고에는 없을까요? 그때의 하나님과 지금의 하나님이 다른 분입니까? 그분의 능력이 줄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단지 순종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을 바쳐 그 비전을 위해 헌신할 사람은 없습니까?”
당시 그 강의를 듣던 한 학생이 그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빌지키언 교수에게 찾아가 “교수님,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제가 바로 그런 살아 있는 교회를 이 지역에 세우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빌지키언 교수 역시 감동을 받아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왔습니다. 교수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그 위대한 비전에 인생을 걸기로 한 첫 학생은 바로 빌 하이벨스 목사님입니다. 그가 세운 시카고 윌로우크릭 교회는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1:14-15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아멘!
필립 얀시는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전하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고” 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전에 알지 못할 때 따르던 자기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순종하는 자녀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고 전하는 매개체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부르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명령대로 더 이상 자기 사욕을 따라 살지 말고 모든 일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고 전하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실 가나안 땅을 바라볼 뿐 아니라 그 약속의 땅에 다 들어가게 되시기를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신 (벧후1:10)’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예고와 선고를 들은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언약을 지키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였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 기업의 땅에서 펼쳐질 그 민족의 장래를 마음껏 축복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 가나안을 소망하면서 평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인생의 말년과 죽음,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느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예고와 선고를 마음에 잘 새겨 놓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우리가 항상 바라보아야 할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새 시대에 주신 비전
신 32:48-52, 행 2:16-21 / 이성희목사
러시아로부터 미국이 알래스카를 단돈 720만 달러에 샀습니다. 처음 알래스카를 사려고 할 때에 의회원의 대부분이 반대하였습니다. 그 때 재무장관이었던 윌리엄 시워드는 의원들을 설득하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나는 눈 덮인 알래스카를 보고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감추어 있는 무한한 보고를 보고 사자는 것입니다. 우리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자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은 비전을 보는 사람입니다. 눈 덮인 땅에서 무진장의 보화를 봅니다. 비전은 엄청난 가치를 동반합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입니다. 그는 형제들의 볏단이 자기 단에 절을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또 그는 달과 해와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을 꾸고 꿈을 말하기 때문에 고생하였습니다. 그 꿈 때문에 팔려가고, 종살이하고, 옥살이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꿈 때문에 다시 영광을 누리고, 총리가 되고, 가족과 백성을 구합니다.
꿈은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대가 없는 꿈은 허망한 꿈입니다. 백일몽이며 개꿈입니다. 이사야 29장 8절에는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 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 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라고 합니다. 꿈은 그냥 꿈입니다. 그러나 꿈에 대가를 지불하면 현실이 됩니다.
“비전은 성장을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큰 강은 처음에 작은 개울에서 시작 된다”고 합니다. “참나무는 도토리 속에서 잠잔다”고 합니다. “새들은 알속에서 기다린다”고 합니다. “사람 영혼 속에는 천사가 깨어나려고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비전이 있고 비전을 품어야 합니다.
잠언 29장18절에는 “묵시가 없으면 백성은 방자히 행하거니와”라고 합니다. 꿈이 없으면 성이 망합니다. 꿈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합니다. 얼마 전에 어느 신문에 보니까 현재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꿈을 키워왔던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전 미국 대통령 클린턴, 미국의 국무장관인 콘돌리자 라이스, 골프의 황제라고 하는 타이거 우즈, 가장 영향력 있는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등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꿈을 키워온 사람들입니다. 타이거 우즈는 2살 때 골프 치는 동영상까지 나와 있습니다. 그냥 어쩌다가 된 위인은 없습니다.
전도서 5잘3절에는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들리느니라”고 합니다. 꿈이 없는 사람이 말을 많이 합니다. 꿈은 이루어집니다. 꿈은 절대로 말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새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비전의 의미를 이해하고 비전을 꼭 이루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비전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신명기 32장49절에는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땅입니다. 그들이 꿈에 그리던 땅입니다. 이 비전의 땅은 하나님이 직접 하나님의 사람에게 보여주십니다. 은혜로 주시는 것이 비전입니다. 비전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창세기 1장28절에는 인간에게 주신 비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아무 것도 없는 삭막한 곳에 보내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신 다음에 사람을 보내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창세기 13장14절에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창세기 12장2절에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하십니다. 창세기 46장3절에는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브라함에 대한 언약은 자세히 보면 비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룰 꿈을 그리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전장에 갔다가 골리앗이란 불레셋의 거인 장수를 만납니다. 비전의 사람은 하나님께 의존합니다. 자기의 힘이나 장비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가 얘기한대로 골리앗을 보고 “크니까 얼마든지 빚나갈 리가 없겠다. 아무렇게나 던져도 맞출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 물맷돌 다섯 개를 가지고 갔습니까? 사무엘하 21장16-21절에는 그 해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던 사람은 골리앗 외에 네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아스비브놈과 삽과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와 손가락 발가락이 각각 6개씩 모두 24개를 가진 거인 이렇게 네 사람입니다. 다윗은 골리앗뿐만 아니라 이 네 사람까지 모두 자기의 손에 있음을 미리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을 조롱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모두 죽일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사재인(謀事在人)이나 성사재천(成事在天)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을 계획하고 도모하는 것은 사람이 하지만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잠언 16장33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비전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비전을 품고 이루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비전을 가진 사람에게 이루어 주십니다.
오래 전 히로시마에서 아이들이 불을 피워놓고 고구마를 구워먹고 있었습니다. 트럭이 후진을 하다가 아이 하나를 치웠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재빨리 피하여 화를 면하였지만 한 아이가 오른 손을 크게 다쳤습니다. 이 아이는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습니다. 근육을 다쳐 오른 손을 잘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야구를 좋아해서 야구 방망이 쥐는 연습을 꾸준히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야구선수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내 자신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이 아이가 장차 자라서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장 훈 선수입니다. 비전은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게 합니다.
“비전을 명확히 세우고 계획의 불확실성에 직면하라. 다시 말해 계획은 연필로 쓰고, 비전은 잉크로 써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전은 확실해야 합니다. 분명하게 성취 가능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비전도 확실해야 합니다. 비전에 대한 확신과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비전은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 주신 변화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활용하려고 합니다. 청계천이 복구되므로 더 잘 연구하여 선교의 장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다변화하는 세계에서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효율적으로 선교하려고 합니다. 문화의 세기를 맞아 문화와 복지를 사회에 정착시키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가나의 집이 훌륭한 도구가 되게 하려고 합니다. 연동청소년학교가 연동가나학교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사회를 섬기려고 합니다. 주 5일 근무에 따른 복지를 개발하여 사회에 기여하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의 비전 타운을 조성하여 후손에게 물려주려고 합니다. 한 해 동안 ‘1-10운동’을 성공적으로 전개하려고 합니다. 작은 꿈을 크게 이루어 교회가 영광을 돌리며 세상의 위로자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시대적 사명을 잘 수행하여 많은 교회 중의 하나가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하나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래 전 코가콜라의 회장은 “내 혈관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른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그의 비전은 이제 세계 196개국 이상에서 하루에 7억 3000만병의 콜라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전에 대한 끓는 정열을 우리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란 책에는 지혜로운 자와 사귀면 지혜를 얻는 것처럼 성공한 사람과 함께 하면 오래지 않아 성공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는 성공한 사람의 비전은 전염성이 강해서 우리 마음속으로 금세 파고든다고 합니다. 우리의 비전이 개인의 비전이 아닌 우리 모두의 비전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비전이 우리의 것으로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비전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가지는 은혜입니다.
사도행전 2장17절에는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합니다. 예언하며, 환상을 보며, 꿈을 가지는 일은 비전을 가지는 일입니다. 어떻게 비전을 가지는 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부으시는 사람에게 비전은 있게 됩니다.
성령으로 비전을 듣습니다. 성령으로 비전을 봅니다. 성령으로 비전은 가슴에 다가옵니다. 성령으로 비전은 실현 됩니다. 성령 강림으로 세계 선교의 비전을 봅니다.
이전에는 유대밖에 못 보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바라던 회복은 이스라엘 땅이었습니다. 세계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이런 좁은 마음에 대하여 예수님은 넓은 세계선교의 비전을 주십니다.
사도행전 1장8절에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세계를 품습니다. 성령이 임해야 세계를 얻습니다. 성령이 임해야 세계를 변화시킵니다.
북미 대초원 인디언들에게는 어린 나이에 치러야 하는 비전 찾기(vision-seeking)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무더운 오두막에서 혼자 긴 시간을 보내며 금식하며 기도하는 의식입니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삶의 의미와 인생의 목적 그리고 부족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전이란 엄밀히 말하면 찾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비전은 얻어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없이 얻는 비전은 결국 개인의 욕망이며 야망으로 끝납니다. 비전의 삶은 주님을 위한 삶입니다. 야망의 삶은 자신을 위한 삶입니다. 비전의 삶은 하나님께 목적이 있습니다. 야망의 삶은 내게 목적이 있습니다. 비전의 삶은 하나님의 능력을 얻습니다. 야망의 삶은 하나님의 능력을 잃습니다. 비전의 삶은 주님을 높이고 생명을 얻지만, 야망의 삶은 주님을 팔고 생명을 잃는 삶을 삽니다.
영성(靈性)은 영성(零性)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 영성은 아무 욕망도 없는 빈 상태라는 뜻입니다. 제 야망을 비전이라고 우겨대는 고집스러움을 버리고, 주님이 이뤄가실 새 시대 새 세상을 꿈꾸는 것이 영성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주님께 의존하는 것이 비전입니다.
헬렌 켈러에게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앞이 보이지 않는 생활보다 더 불행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 때 헬렌 켈러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비전 없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왜 비전이 없이 살아갑니까? 성령을 받지 못했으니까 비전이 없이 살아갑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비전으로 충만합니다.
알프스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13일간 방황하다 구출 당했습니다. 그는 매일 12시간씩 걸었습니다. 알고 보니 자기가 있는 곳에서 6킬로미터 안에서 왔다갔다한 것입니다. 사람이 눈을 가리면 바로 걷지 못합니다. 20미터를 걸으면 약 4미터 이내의 간격이 생기며 10미터를 가게 되면 결국 원을 그리면서 돈다고 합니다. 이 현상을 윤형 방황(輪形彷徨)이라고 합니다. 인생에도 윤형 방황이 있습니다. 이런 방황을 벗어나는 방법은 눈 가리고 걷기와 마찬가지입니다. 소신대로 과감하게 전진하며 새 출발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안 해 본 것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안 먹어본 것은 절대 안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 먹어보고, 이상한 것만 골라 먹어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윤형 방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비전을 향해서 과감하게 전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이 개척 정신이며 비전을 품은 비전가 입니다.
결 론
미국 플로리다의 디즈니월드를 개장할 때 월트 디즈니는 이미 죽고 없었습니다. 행사장에서는 그의 부인이 그를 대신하여 연설하였습니다. 청중 앞에 그녀를 소개한 사람이 “디즈니 여사, 디즈니 씨가 이것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그 양반은 우리보다 먼저 보고 가셨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비전은 아직 없는 것까지도 이미 보게 합니다.
어떤 이는 사람을 이렇게 구분하였습니다. 비전과 전혀 관계없이 끌려 다니는 사람(stranger)이 있습니다. 비전에 끌려 다니는 사람(follower)이 있습니다. 자신의 비전을 성취하는 사람(achiever)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비전을 성취하고 다른 사람에게 비전을 심는 자(leader)가 있습니다. 리더십은 비전을 현실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우리 모두는 크리스천 리더이며 비전을 가지고 있고 그 비전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변화하는 사회에서 우리 교회에 주신 복음적 목적과 비전을 곧게 세우고, 사회와 민족을 위해 목적과 비전이 이끌어 가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신명기 32:44-52
찬송가 199장 ‘나의 사랑하는 책’
신명기 32장은 모세의 노래를 담고 있습니다. 모세의 노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노래의 마지막 가사가 ‘속죄하시리로다’로 끝나며, 이스라엘의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이 결국 그들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소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노래는 31장 30절과 32장 44절을 액자의 테두리 삼고, 그 안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노래가 끝난 뒤 모세가 결론적 해설을 덧붙이는 장면과 하나님께서 모세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장면 두 가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모세의 말(44-47)
(44) 모세와 눈의 아들 호세아가 와서 이 노래의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여 들리니라
44절은 여호수아가 모세와 더불어 지도자의 자리에 선 것을 보여줍니다. 31장에서 이미 위임식을 마쳤기에 모세는 여호수아를 적극적으로 세워주고 있습니다.
44절은 모세의 노래를 ‘말씀’으로 부릅니다. 이처럼 모세의 노래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율법입니다. 신명기라는 율법을 시로 요약해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렸습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곳에 스스로를 노출시켜야 합니다. 매일 소음을 넘어 굉음이 울리는 현대사회에서 지금 우리는 어떤 소리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소리는 무엇입니까? 세상이 부추기는대로 자기 욕망의 소리를 따라 살다보면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릅니다(약 1:15).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적극 노출시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명에 이르는 삶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45-46) 모세가 이 모든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모세가 전한 말씀은 모세 한 개인의 말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도 자신이 ‘증언’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울려퍼지자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3가지 책무가 주어졌습니다.
첫째는 ‘너희의 마음에 두고’입니다. 이는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마음은 한 사람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말씀은 귀로 듣는 것을 넘어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이로써 모든 삶의 정황에 말씀이 적용되도록 해야합니다.
둘째는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1차적으로 기성세대인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최종목적지가 우리 자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통로이고, 자녀 세대에게로 흘러가야 합니다. 기성세대만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받고 구원에 이르러서는 안됩니다. 자녀 세대에게도 그 말씀은 명령되어 그들 또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셋째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입니다. 신약의 예수님께서도 승천 직전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a).”라며 말씀은 들음을 넘어 행함으로 열매맺어야 한다고 동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가 율법을 지켜 행하게 하려면 부모가 율법을 지켜 행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자녀 주변에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자녀 스스로 말씀을 지켜 행할리 만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믿는지는 입술의 고백이 아닌 삶의 행동이 그 믿음을 증명하고, 자녀는 부모의 삶을 보고 배웁니다.
모세가 가장 먼저 이 세 가지를 행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받아 자기 마음에 두었고, 출애굽 2세대인 자녀 세대에게 끝없이 전하여 명령했고, 그들의 삶에 지켜 행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32장의 모세는 임종을 앞둔 노인입니다. 즉, 모세는 임종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자녀에게 가르쳐 명령하고, 그들이 그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모세가 먼저 그 삶을 살았기에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출애굽 2세대도 말씀 위에 자신들의 삶을 얹었고, 그 순종의 역사가 여호수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삶의 중심에 말씀을 두고 행해야하며, 가정에서 자녀나 손자에게 말씀을 가르쳐 행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나아가 교회학교 자녀 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하여 가르치고, 그들이 행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현재 교회학교에서는 열여덟분의 선생님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자녀 세대를 잊어버리고, 나 자신이 말씀의 최종목적지가 되어 삶을 마감하게 된다면 곧 다가올 한국기독교 200년은 밝지 않을 것입니다. 가정에서든, 교회학교에서든, 어떤 자리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세대에게 어떻게 전할지 고민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기성세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세가 왜 그토록 자녀 세대에게 하나님 말씀을 명령하여 지키게 하라고 했는지 그 이유가 나옵니다.
(47)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47절의 ‘이는’은 앞서 나온 율법의 모든 말씀을 가리킵니다. 모세는 율법이 헛된 일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다바르’는 말이라는 뜻도 지니기에 새번역 성경은 “율법은 단지 빈 말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의 생명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왜 모세는 굳이 ‘빈 말이 아니’라는 말을 했을까요?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빈 말’로 여기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빈 말과 생명의 말을 바르게 구분하고 있는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난방비 인상, 집값 폭락, 전쟁, 지진 등 살림살이가 옥죄어오고, 흉흉한 소식이 들려올 때 우리는 무엇을 빈 말로 여기고, 무엇을 생명의 말로 여깁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넉넉한 물질 중 어떤 것이 우리를 구해줄 생명의 말로 다가옵니까?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목을 죄어올수록 더욱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의지해야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그럴 때 물질을 포함한 각종 세속적 가치관이라는 빈 말을 생명이라 여기다가 희망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진정 소망의 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이사야 60장 2-3절입니다.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세상에 흑암이 짙어질수록 참된 그리스도인을 향한 사회적 요청은 커져만 갑니다. 진리와 생명의 사이드에 굳게 서서 블라인드 사이드에 놓인 영혼의 곁을 지켜주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모세는 율법을 준수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의 방식이 곧 차지하게 될 땅, 가나안에서의 생존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49절에서 그 땅 곧 가나안을 하나님이 주는 땅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기에 그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그 땅에서의 날이 장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땅이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라는 것을 잊고, 하나님을 빈 말로 여기고, 가나안 풍습과 문화를 생명의 말로 여긴다면 이내 약속의 땅에서 내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거주하는 땅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잊을 때 생명을 잃습니다. 잊음은 잃음이 됩니다.
이렇게 모세의 말이 끝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48) 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증언을 마친 바로 그 날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고,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마음이 있는지, 그리고 그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용기가 있는지 여부입니다. 혹시 우리의 학식과 숱한 경험들이, 아니면 우리가 쌓아올린 의로운 업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와 마음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자신을 말씀 위에 올려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인간의 말이 아닌 온 세상을 창조하신 광대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49)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바림 산맥의 높은 봉우리인 느보 산에 올라 가나안 땅을 바라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느보 산은 해발 약 800m의 높이로 날이 맑으면 서쪽으로 100km 떨어진 대해(지중해)까지 보였기에 모세는 가나안 땅을 한 눈에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이 때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땅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자리인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라고 명확하게 인식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회사 내 직책, 자녀 육아, 학업, 부모 봉양 등의 자리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리로 여기고 계십니다. 바른 신앙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섬깁니다. 잊음은 잃음으로 이어지기에 우리는 날마다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마땅히 섬기며 생명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50) 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형 아론의 죽음을 언급하며 예고하십니다. 모세도 아론처럼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잠깐의 시간차만 있었을 뿐 죽게 되는 것은 동일합니다.
모세가 형의 죽음을 기억하듯 우리도 먼저 떠나보낸 고인들을 기억하며, 우리도 그들과 같이 잠시의 시간차만 있을 뿐 곧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음을 직시하고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모세는 시편 90편 12절에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먼저 별세한 이들의 죽음과 더불어 한 분의 죽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밝혀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공포 너머의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의 소망 아래 매일을 기쁨과 감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세의 죽음을 예고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지 또 다시 말씀하십니다.
(51-52)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네가 비록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맞은편에서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
모세는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않았기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모세가 범죄한 것을 ‘믿음 없는 행동’을 했다고 번역했습니다. 모세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믿고, 바위를 향해 말해야 했지만 지팡이로 내리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모세는 하나님을 드러내야 할 자리에서 자신의 어떠함을 드러낸 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드러내야 할 때 온전히 하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모세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미리 죽음을 예고해 주심으로 33장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며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습니다.
블라인드 사이드에서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삶의 이유도 모른채 방황하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건져주시고, 생명과 진리, 용서의 사이드로 옮겨주셨습니다. 게다가 우리 인생이 유한함에서 끝나지 않고, 영원함으로 이어지도록 크신 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듯이 우리 또한 먼저 별세한 이들처럼 시간차 죽음을 맞게 될 유한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정해진 기한을 살고 있음을 아는 지혜를 갖고, 오늘 하루를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있고 가치있는 보석들로 가득 채우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기었노라 승리를 선언하신 영원한 부활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가득 담고, 말씀이신 그분을 자녀 세대에게 끝없이 전하여 그들이 지켜 행하도록 돕고, 죽음을 넘어 부활의 소망으로 가득찬 인생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기도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생길에서 말씀으로 생명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자신이 말씀의 최종 목적지가 되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유한한 인생이 자녀 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보내는 일에 온전히 쓰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죽음 너머 부활의 날, 말씀으로 연결되었던 우리와 자녀 대대손손 모두가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광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자리에 선포되었을 때 내가 해야할 3가지는 무엇인가요?
2. 내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 세대에 흘려보내고 있는 일은 무엇이며, 없다면 어떻게 흘려보낼 수 있을까요?
3. 내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야 할 곳은 어디인가요?
4. 내가 이기었노라 승리를 선언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승리로 가꾸어가는 삶은 어떤 삶인가요?
가나안이 금지된 모세
신 32:44-52
본문에 여호수아가 등장한 것은 여호수아를 모세와 함께 연결시킴으로써 그의 지휘권을 인정하기 위함이라고 봅니다. 모세는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고 당부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은 허사가 아니며 생명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44-45절에 “모세와 눈의 아들 호세아가 와서 이 노래의 모든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즉 모세는 자기와 대등한 권위를 주고자 했던 여호수아와 연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율법을 공손한 마음으로 대하도록 모세는 그들이 위협과 책망에 유의할 것을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다 전하였습니다. 47절에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인하여 너희가 요단을 건너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살고 죽는 일에 관계가 있음을 명시합니다. 레 18:5에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이 저들에게 잘 이해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모세가 원하던 것은 이스라엘 스스로 이 율법을 주의깊게 지키라는 것이요, 또 후손들에게 충실히 전달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명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저들이 준수하도록 하고 스스로 선량한 자들은 그 자녀들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선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고 그 후손들이 그들 시대에 그 종교를 계속 보유하며 그런 내용의 상속이 단절되지 않기를 소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종교를 자기 사업으로 삼고 그 안에서 오래 견디어 내도록 설득하기 위해 그가 소원했던 것입니다. 생명에 관한 일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지키면 성공할 것이요 무시하면 영원히 멸망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킴으로 무한한 유익이 있는데 가나안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는 것입니다. 48-52절은 모세가 느보산에 오름인데 하나님께서 모세의 죽음에 대해서 내리신 명령입니다. 그가 이전에는 요단강을 건너갈 수 있기를 간구했으나 이제는 완전히 흡족하여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느보산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마지막 축복을 선언하고 그 자리에서 영민한 것입니다. 본 신명기 32장에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들어 가는 것은 모세의 죄 때문으로 되었지만, 신 4:21의 해석에 따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이스라엘 지도자로서의 죽음이었다는 설명입니다. 아비림 산은 사해 동편 모압 땅에서 사해 북쪽을 내려다보는 산맥이며 그 중 높은 봉우리가 느보산입니다. 신명기에는 비스가산으로 표시되고 있습니다. 모세는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느보산 위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론의 죽음은 민 20:22-29, 민 33:37-39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는 모세의 무죄를 주장하지만 민 20:1-13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하여 모세가 지은 한 번의 죄가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모세가 바위를 두 번 치므로 화를 냈다고 보든가, 아니면 “내가 바위에서 물을 내랴”하면서 자만심을 드러냈다든가, 그렇지 않으면 시 106:32-33을 토대로 하여 모세가 함부로 말을 했거나, 아니면 정탐군의 보고를 들은 다음 곧 바로 가나안 입성을 위해 쳐들어가지 않은 것 등을 구실로 상상해 보는 이도 있습니다. 아무튼 본문에서 하나님 여호와는 모세가 여호와의 권위를 실추시킨 것을 큰 잘못으로 보고 있습니다. 모세는 산 위 멀리서나마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를 바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 땅에 발을 들여 놓지는 못할 망정 눈으로 볼 수는 있었습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가 지은 죄를 상기시키는데 이 범죄로 인하여 그가 가나안 복지에 들어감에 있어서 제외 당하게 된것입니다. 이는 그가 범죄하였음으로 하나님의 견책을 좀 더 참을성 있게 견딜 수 있도록 하며, 그 지각없는 말에 대한 슬픔을 회상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들 중에서 가장 선한 자라도 그 스스로가 의식하고 있는 결점을 뉘우치면서 죽는다는 것은 유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불쾌히 여기시는 일은 바로 이런 태만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의 형 아론의 죽음을 (50절) 상기시킴으로써 모세가 자신의 죽음을 더 친근히 여기고 무서워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이제 모세가 느보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볼 때 죽음의 공포는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화해되심을 나타내는 표징이었으며 비록 그의 죄로 인하여 그가 이 땅 위의 가나안에는 못들어 가게 막힘을 당하였을지라도,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더 좋은 복지에 들어갈 자격은 박탈하지 않으셨음을 그에게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모세는 신앙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믿음의 전망과 사망 건너편에 있는 영생의 소망을 잘 구축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실 때면 언제나 편안하게 안도감을 가지고 죽을 수가 있습니다.
신명기 강해 70
신 32:44-52 / 푸른교회
신명기 32장 1-43절까지 계속된 긴 모세의 노래가 끝났습니다. 이제 모세는 백성들에게 당부의 말을 합니다.
46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내가 노래로 증언한 하나님의 율법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도 명령하여 지켜 행하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지키는 일이야 말로 너희의 생명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4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일은 헛되거나 공허한 일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곧 죽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지켜야 하지만 자녀에게도 가르쳐야 합니다. 47절 하반절입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아야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삽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사는 게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노래에 이어 마지막 당부까지 끝나자 하나님은 느보 산에 올라가 요단 건너 가나안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 산에서 너는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왜 모세가 이런 최후를 맞아야 합니까? 51절입니다.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므리바 사건은 민수기 20장 7절 이하에 나옵니다.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9]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바로 이 사건입니다. 이것 때문에 모세는 요단을 건너지 못합니다.
결국 모세는 가나안을 들어가지 못합니다. 52절입니다. “네가 비록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맞은편에서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에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멀리서 바라보게는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러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우선 하나님 앞에서 혈기 한 번 부렸다고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면 과연 우리 가운데 누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징계가 심하고 비현실적이라는 겁니다.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지 않고 혈기를 부리며 지팡이로 두 번 후려쳤다고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는 게 가혹하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에서 표면적 이유가 아니라 더욱 심오한 뜻을 찾아야 합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신 것은 가나안 입성은 율법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려는 조치입니다. 모세가 아니라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메시지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 산에서 죽었다는 것을 그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천국에 갔다고 확신합니다. 50절 하반절입니다.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모세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어디에 있습니까? 천국입니다. 바로 그들에게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신약에도 근거가 있습니다. 주님이 변화산에서 선지자 대표 엘리야와 율법 대표인 모세와 함께 3자 회의를 하십니다. 이런 근거를 종합해 볼 때, 모세는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가나안이 상징하는 천국에는 들어갔습니다.
순종하여 복을 받자
신명기 32:44-52
말씀 포인트 : 모세는 위대하고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가 행한 죄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고, 모세는 그토록 고대했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끝까지 본분을 망각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최선을 다해 당부했습니다.
1) 여호와의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할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된 복은 어떤 것이 있나요?(47절)
모세는 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공포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백성들은 그 말씀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심지어 우상을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무려 사십 년이나 광야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출애굽 1세대가 모두 죽고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모세는 120세의 고령이 되었는데, 그는 마지막까지도 백성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노래까지 만들어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고 위대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지 설명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만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이 됨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만 가나안에서 장구하게 살 수 있으며, 그런 삶이 참된 복임을 백성에게 강조했습니다.
2)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만 할 뿐, 들어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51절)
모세는 바로 왕과 신하들 및 그의 군대에 맞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 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가르며,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백성을 인도하는 모든 순간에 모세를 사용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는 사람이었습니다(참조 신 34:10). 이러한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하나님은 모세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어 원망할 때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솟게 하셨는데, 그때 모세가 혈기를 발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모세가 분노로 인해 죄를 짓고 만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나눠 보세요.
모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만이 참된 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가나안 땅 자체가 복이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다면 아무리 가나안 땅이라고 해도 멸망의 땅이 될 수 있습니다. 가나안이 정말 복된 가나안이 되려면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이 사실을 숱하게 강조했으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순종을 통해 그것을 몸소 실천해 보였습니다. 그는 그토록 고대하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충격적인 말씀에도 겸손하게 순종했습니다. 이 마지막 순종을 통해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판단과 견해를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세의 고백
신명기 32:44-52 / 이근호 목사
모세는 백성들 앞에서 고백을 합니다. 자기가 들어가고 싶은 땅에 하나님께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은 백성들 앞에서 모세 본인이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이랍니다. 자, 이런 고백을 ‘약속의 땅의 입성 원칙’으로 삼게 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됩니다.
“아무리 과거에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오랫동안 봉사해도 어느 한 순간에 죄를 지어하나님의 거룩을 가리게 되면 약속의 땅에는 못들어간다.”고 말입니다. 이 원칙을 살리면서 여러 가지 경우를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즉 지금까지 나름대로 죄짓지 않고 충실하게 신앙생활 했다고 자부해도 구원은 여전히 장담할 수 없다는 식이 됩니다.
또 달리 이야기하면 이런 결론도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어느날 죄를 지어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했다면 그것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는 두 번 다시 없다는 겁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것에 관심둔다는 말은, ‘착실하게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구원받는데 유리하다’는 원칙을 인간들이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에 탈락되지 아니하려면 내쪽으로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라는 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대했다는 본심이 들통나게 됩니다. 이 ‘모세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기만 했지 못들어간다’가 담긴 취지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모세 안에 계신 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모세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모세를 어떤 식으로 이끄시는가는 오늘날 예수님께서 자기 성도를 어떤 식으로 이끄시는가와 관련 있습니다. 히브리서 3:5-6에 보면,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집의 집사까지 약속의 땅에 못들어가게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장차 오실 예수님의 면면을 보이시는 겁니다. 즉 ‘실패함으로 구원되는 원칙’이 바로 예수님께서 지상에 펼치시는 원칙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배신당하고 버림받았습니다. 따라서 성도라면 예수님과 마찬가지고 배신당하고 버림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모세의 위상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하나님을 만났고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 분이기에, 그 상황에서 모세 믿지 않고 달리 믿을 사람이 또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신망있는 모세를 약속에 땅에 못들어가므로서 “자신의 운명을 눈에 보이는 자에게 다 걸 수 있느냐?”를 묻습니다.
보다 상세하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불확실한 장래를 위해서 주변에서 믿을 만한 사람들을 찾습니다. 이는 그 사람을 위함도 아니요 하나님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영달과 미래의 안정성과 복지와 행복과 영원한 복락을 누리겠다는 쾌락적 본성 때문입니다.
즉 “나는 당신을 자발적으로 믿고자 합니다. 따라서 당신은 나의 결단에 상응하는 보상을 제공할 책임이 있습니다.”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모세를 통해서 좌절시킵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믿고자 하는 그 믿음이라는 것을 인정치 아니하겠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자합니다.
즉 ‘있음 중에서 하나의 있음’을 최종 믿을 만한 ‘있음’으로 확정짓는 식으로 자기 인생을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모세 시대 사람들에게 ‘모세의 실패성’을 믿음의 내용으로 제시하십니다. ‘모세마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를 믿게 합니다.
이로서 백성들 마음 속에 ‘모세 믿기’가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아님을 드러내십니다. 이는 곧 ‘모세가 구원의 종결자, 메시야의 직능의 종결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누가복음 9장에 나오는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이 두 사람의 등장은 예수님께서 격려하려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과 대화하면서 ‘별세’에 대해서 언급하시기 때문입니다. (눅 9:31) 왜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별세의 대상입니까? 그들이 나름대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살지 않았습니까? 그들 나름대로 훌륭한 신앙인이 아닙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모세와 엘리의 천국행은 그들의 헌신이나 회개나 노고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 뿐입니다. 바로 이 피의 의미가 모세의 긴 역경 속으로 그대로 녹아지고 이것으로 마무리지어져야 합니다. 이점은 모세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6:21-26에 보면,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자진해서 울면서 생애를 보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웃음과 하나님의 웃음에 참여하기 위해 예비된 자들은 예수님이 겪였던 그 일을 그대로 답습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것으로 웃는 것은 그 자체로 ‘성공’인양 여깁니다. 즉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살던 그 세상이 주는 경향성에서 자진해서 철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을 살면서 성도는 울게 되는데 이 울음을 예수님의 웃음에 참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겪여야 될 코스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사실 전체를 알고 도리어 웃어야 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마음껏 웃을 수 있어야 더 이상 자신의 믿음조차 믿지 않고 예수님의 피를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벌어지는 모든 일이 우리 자신의 허사하는 점을 일깨우기 위한 일임을 알고 마음껏 웃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모세가 받은 마지막 명령
신 32:44-52 / 구성교회
지난 2월 고베성결교회 기도원에 갔을 때였습니다. 기도원 옆에는 ‘아베’라는 남자분이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자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은퇴 이후에 현재 사는 곳에 자리 잡고 사는 분이었습니다. 예수의 ‘ㅇ’자도 모르는 분인데도 기도원의 수리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일본은 연금 제도가 나름 잘 만들어져 있어서 은퇴하신 분들이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듯합니다. 아베씨는 연금이 나오면 한달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 돈으로 파친코에 가거나 이런저런 여가를 즐긴다고 합니다. 문득 아베씨를 보면서 나는 은퇴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이 은퇴 이후의 삶을 잘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재정적인 문제를 뒤로하고 은퇴 이후에 해야 할 장기적인 계획이 없다면 사는 것이 허무하고 재미없을지도 모릅니다. 신체적인 변화와 함께, 심리적-정서적 변화가 찾아오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다가 절망에 빠지곤 합니다. 성경 읽기와 더불어 자기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찾아야만 우리의 생명이 다 할 때까지 주의 사명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교회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재미있게 설명해 주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일을 위해선 가장 먼저 성경에 관해 깊이 공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의 자녀뿐 아니라 교회 안의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사역자만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모두가 감당해야 해야 할 하나님이 주신 숙제입니다.
모세가 모든 말을 마치고 난 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숙제가 바로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고 자녀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까지가 부모의 역할입니다. 부모로부터 배운 자녀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에서는 보통 1년에 두 번(성탄절, 부활절) 세례식을 진행합니다. 자녀들이 성인이 되지 않았다면 대부분 부모의 선택에 의해 자녀들이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세례는 자기의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세례는 나의 자아가 죽고, 내 안에 사신 예수님으로 인해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개인의 신앙 고백이 없는 세례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라는 의문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례받으실 때, 세례 요한의 만류에도 스스로 받기를 자청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누군가의 권유로 세례를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세례를 받은 뒤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삶의 변화는 ‘세례’라는 것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이스라엘 전체가 세례를 받은 사건(고전 10:2)”으로 말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다른 신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분은 오직 주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동거(同居)는 “일단 한번 살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결혼은 죽을 때까지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신앙의 내용은 바로 동거가 아니라 결혼입니다. 즉, 부모는 자신이 만난 하나님, 성경의 이야기가 내 삶에 어떻게 생생하게 살아났는지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도 삶을 살아가며 부모가 만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룻 1:16), 스스로 고민하며 부딪혔던 성경 속 이야기들이 삶에서 어떻게 성취되는지 경험해야 비로소 진정한 신앙 고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모세는 부모가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헛된 일이 아니라 ‘생명’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지켜 행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과 대면한 모세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남긴 유언과 같은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이자, 그의 평생 경험한 신앙 고백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남긴 가르침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며, 우리도 모세처럼 신앙의 유산을 자녀들에게 남겨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신앙의 유산을 전수하세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영원히 우리 삶을 지키실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신명기 32:45-52 / 코너스톤 교회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떠나기 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갈 것을 반복해서 권면하고 또 다시 권면했습니다. 모세가 수 차례 반복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버리지 말고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라고 말한 이유는, 모세가 살아있을 당시에도 이미 목이 굳은 완악한 몇몇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려 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염려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헛된 가르침’으로 받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47절을 봅시다.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텅텅 비어 있는’ 혹 ‘아무런 효력이 없는’ 그런 평범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면 반드시 고통과 저주가 임하게 될 것이며, 반대로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고, 가나안 땅에서 복을 주셔서 장수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따르면 생명과 축복, 하나님 말씀 거스르면 죽음과 저주”, 이 단순한 주제를 모세는 계속해서 반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모세의 마지막 가르침은 끝이 났습니다. 이제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해 축복만 하고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날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산에 올라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48-4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신 32:48) 당일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신 32:49)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49절에 “아바림 산에 올라 느보 산에 이르러”라는 말은 “아바림 산맥에 속한 느보 산에 올라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약속의 땅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느보 산에 올라간 모세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그토록 사무치도록 들어가고 싶었던 바로 그 땅이 지금 바로 눈 앞에 있습니다. 요단강 하나만 건너면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50절을 읽겠습니다. “(신 32:50) 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형 아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호르 산에서 죽은 것과 같이, 모세 또한 느보 산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가나아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그 내용이 51절에 나와 있습니다. “(신 32:51)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연고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며 므리바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어 ‘목이 마르다’고 하나님과 모세에게 불평하고 원망하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를 내며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까지 주어야 하느냐?”하고 말하며 자신이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그러자 반석에서 물이 솟아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모세가 이스라엘의 회중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책망하시며, 이로 인해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너무 엄격한 것 아니신가?’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수고하고 섬긴 모세와 아론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한 이 사건 하나 때문에 그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은 과한 처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므리바 사건은 모세와 아론의 치명적 죄악이 담겨져 있습니다. 민수기 20장 9-10절을 한 번 찾아봅시다. “(민 20:9) 모세가 그 명대로 여호와의 앞에서 지팡이를 취하니라 (민 20:10)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0절에 모세의 마지막 말을 다시 한 번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다시 해석하면 “우리가 여러분을 위해서 이 반석에서 물까지 내줘야 하겠습니까?”입니다. 한 순간입니다만,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자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민수기 20장 11절에 기록된 사건을 읽으며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한 번 쳤어야 했는데, 두 번 친 것이 잘못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나보다”하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사건의 핵심이 아닙니다. 모세와 아론의 죄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 되심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신들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가나안 땅까지 이끄는 인도자처럼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마땅한 영광을 빼앗아 갔으니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사 모세와 아론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32장 51절로 다시 돌아오십시오. 여기서 하나님은 분명하게 모세와 아론의 죄악을 밝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 32:51)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연고라”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하는 영광을 가로챘던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벌인지 하나님께서 52절에 모세에게 다음과 같은 벌을 내리셨습니다. “(신 32:52)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네가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 결국 모세는 이 말씀에 따라 느보 산에 올라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을 뿐,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마땅한 영광을 우리가 빼앗는 것은 커다란 범죄입니다. “내가 지금 이만큼 사는 것, 이거 다 내가 밤낮으로 열심히 산 덕분이지.” 하나님께서 베푸신 공급하신 은혜와 돌보아 주시는 은총을 잊고, 그 모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는 자는 하나님 앞에 커다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제 내일이면 ‘Thanksgiving’ 입니다. 영어 이름 그대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우리 삶에 가장 좋은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나님께하 받으셔야 하는 영광을 가로채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하는 영광을 올려 드리십시오. 하나님만이 우리 삶의 구원자, 공급자, 모든 복의 근원 되심을 기쁘게 감사로 찬양하고, 기도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