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남>
기억하기로 우리는 스물일곱과 스물여덞으로 만났다. 물론 내가 한 살이 위이다.
그와 내가 이름만 익히다가 처음 만난 것은 1978년 부산 세미나 때였다.
그는 그 무렵 경상북도 한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해 있었다. 그는 반짝거리지 않는 차림에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내게 왔다.
한국이동문단의 키가 큰 남녀간의 첫 만남인 셈이었다. 그 첫 만남을 연유하여 세간에서는 우리 두 사람을 첫사랑 사이로 알기도 한다. 내 경우, 손해나는 장사는 물론 아니다.
우리는 그때 1박 2일의 부산 세미나 일정을 마치고 ‘아무렇지도 않게’ 제각기 머물렀던 곳으로 돌아갔으며 세월은 또 무심힌 듯 우리 두 사람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상한 것은 그 무렵보다 그는 더욱 더 아이 같아졌다 라는 사실이다. 이 말은 내가 전에 비겨 훨씬 어른스러워진 까닭이리라. 나는 그보다 한 살이나 더 많으므로.
전에 그의 이름만 듣다 처음 얼굴을 본 후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참으로 보기 드물게 선한 인상’ 이라는 것이다. 너무도 오래 익혀온 얼굴이며 표정이라서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과연 그랬다.
송재찬, 그는 입을 열어 말을 꺼내기 전에 얼굴에 가득 웃음을 머금는 버릇이 있다. 약간은 어눌한 말투의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나는 이야기 내용에 앞서 그이의 눈빛과 말투에 더 먼저 마음이 가는 것을 마지 못한다.
이야기 중간 ‘그래서 뭐냐,...’ 를 넣는 버릇이 있는 그이. 때로는 여성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까닭은 어린 시절 이모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한 까닭이 아닐까 생각한다.
큰 키에 준수한 외모, 참으로 선한 인상의 사나이, 송재찬!
그와 내가 ‘첫사랑 사이’ 로 불리기도 하나 사실 그렇지는 않다라는 것을 알 사람은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만나면 마치 첫사랑 사이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것을 스스로도 깨닫곤 한다.
사실 나는 그가 몇 년도에 경북의 초등학교에서 서울로 옮겨와 근무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어떤 인연으로 내가 아닌 다른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첫 만남 뒤 우리는 사는 일에 쫓겨 세미나 때나 시상식 모임이 있을 때 등 잊지 않을 만큼 만나 인사를 나누며 지내왔다. 참으로 무심힌 듯. 그러다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은 부산 배익천 형의 초청으로 몇몇이 1박 2일로 부산을 드나들면서였다. 아니, 아니, 내가 술을 꽤 거하게 잘 마시면서 그리고 잘 떠들게 되면서였을 것이다.
언제 한번은 그이의 부인과 여럿이 자리를 함께 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늘 해오던 버릇대로 그만 ‘송재찬은 나의 첫사랑’ 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고 말았다.
내외는 그 일을 기억 못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불쑥 말해놓고는 퍽 쑥스럽고 멋쩍고 낭패스러웠다. 그때는 지금보다는 훨씬 덜 뻔뻔했으며 덜 자신만만했다.
한번은 송재찬이 내게 말했다.
“우리 슬기 엄마가 이상교 선생을 좀 더 가까이 알게 되면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아마 더 많이 좋아하게 될 거야!”
그는 진심으로 말했다.
“에이, 무슨 소리야? 그런 경우가 어디 있어?”
“아냐, 정말이라니까!”
나는 그 말을 죽을 때까지도 잊지 못할 것이다. 아, 그는 나를 정말이지 좋아하는구나!
<좋은 선생님, 훌륭한 동화작가>
그는 아다시피 초등학교 선생님이자, 동화작가이다. 그이의 작품세계며 작품 활동, 경향 등에 대해서는 장을 달리하며 다른 이가 꽤 꼼꼼하게 다룰 것을 알고 있으므로 어줍잖은 이야기는 말기로 한다. 자칫 잘못 말했다가는 안하느니만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심정도 매한가지지만)
그는 먼저 내가 알고 있는 좋은 선생님 가운데 드물게 좋은 선생님으로 여겨진다. 선생님들이야 모두 선생님다운 훌륭한 덕목을 갖추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그를 훌륭한 선생님일 것이라고 여기는 까닭에는 이유가 있다.
몇 해 전, 선생님 반에 싸움쟁이 여자 아이가 있었단다.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입양되어 온 아이였는데, 입양해 온 부모가 헤어지는 바람에 아이는 입양 부모의 한쪽인 아빠의 어머니인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는 것이다.
제 삼자인 우리가 볼 때에는 파양되지 않고 할머니 손에 키워지게 된 것도 다행이다, 싶지만 아이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불운감, 불행감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 송재찬 선생님은 아이를 불러 말했단다.
“그래, 친구들과 싸우고 싶으면 싸워도 좋아. 그 대신, 싸우기 전에 선생님한테 허락을 받고 싸우는 거야. 알았지?”
허락을 받고 싸움을 싸우기란 어디 쉬운 일인가. 아이의 싸움은 점차 줄었고, 한 날은 다가와 말하더란다.
“선생님은 어떤 선물을 받는 것이 제일 좋으세요?”
몇 가지 선물의 예를 드는데 유치원 때 만들었다는 종이찰흙 공작물이 제일 마땅할 것 같더란다. 아이는 선생님이 제게 쏟는 관심과 사랑이 마음 깊이 고마웠던 것이리라. 그래서 선생님이 제일 흡족해 할 선물을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어린 시절 송재찬 선생님이 담임인 반에 들어 공부를 하는 건데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송재찬 선생님은 늘 칭찬 속에 파묻혀 크는 아이, 부유하고 복된 가정의 아이를 관심있게 돌아보기보다 가족이 없이 외로운 아이, 친구들로부터 소외된 아이, 그늘진 집안의 아이들에게 좀더 깊은 사랑과 애정을 쏟아오고 있는 선생님, 정말이지 좋은 선생님으로 여겨진다.
특히 그런 느낌을 마지 못하는 까닭은 이따금 내가 그이가 담임으로 있는 반의 어린 제자로 돌아가 있기도 해서다.
내가 만일 그이가 맡는 반의 초등학생이라면 성실한 편의 학생이 아니었을 것이 뻔하다. 지각을 밥 먹듯 했을 것이며 선생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운동장 밖을 내다보기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걸핏하며 울었을 터이고 숙제 같은 것은 해오지도 않았겠지.
송재찬 성생님은 그런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을 것이다.
“이상교. 오늘도 숙제 안 해왔니? 아, 노느라 바빴구나. 그래, 너는 장래 훌륭한 동화작가가 될 터이니 그냥 놀렴. 네게 제일 맞는 건 노는 일로 보이는구나. 그래, 소질을 충분히 살려야겠지?”
송재찬 선생님은 따뜻한 눈빛과 온화한 말투로 나를 잘도 다독였을 것이다.
거꾸로 내가 어린 날의 그이의 선생님이고 그가 나의 제자라면.
그는 어린 날에도 키가 커서 맨 뒷자리에 앉을 것이다. 큰 키에 지금보다 얼굴이 좀 더 갸름했을 그는 해 오라는 숙제를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잘도 해왔을 것이다. 학년이 바뀌도록 칠판에 씐 것을 공책 한 장에도 옮겨 적지 않는 나와는 달리 필기를 잘했을 것이며 준비물 또한 성실하게 챙겨 왔을 것이다.
이따금 물기가 도는 커다란 눈망울이라서 선생님인 나는 그의 작은 어깨를 다독여야 했으리. 더러는 안아주기도 했으리.
“송재찬, 반장해라. 너희 어때, 송재찬이 반장하는 거 불만 없지?”
편애가 대단히 심한 이상교 선생님이 되었을 것이 뻔하다.
그는 좋은 선생님 외에 부지런한 동화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것은 물론, ‘돌아온 진돗개 백구’ 같은 불후의 베스트셀러를 비롯,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을 양산해 내는 일 외에 대외적인 임원활동도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그이다.
<영원한 첫사랑>
그와 내가 좀더 급격히(!) 가까워지게 된 것은 어떤 한 사건을 연유해서였다.
그것은 내가 20년 가깝게 살았던 중곡동을 떠나 중랑천이 가까운 휘경동으로 이사 오면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거의 그렇지만 연고라곤 없는, 더구나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없는 우리 세 식구는 지금으로부터 3년 전쯤 중랑천이 가까운 휘경 주공 아파트로 이사를 해 왔다.
이사를 해온 얼마동안 우리 세 식구는 새로운 이곳이 낯설기도 하고 외롭고 서먹서먹하였다. 새 아파트라서 입주 들어온 집도 많지 않았으며 크다란 장방형의 엘리베이터 안은 부근의 음식점, 미용실을 선전하는 광고 쪽지가 가득 붙여져 있었다.
그런 어느 토요일,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이사 잘했어요?”
“으응, 대강.”
그이가 사는 집은 중랑천을 사이로 맞은쪽인 묵동인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 보여요? 나는 이상교 선생네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보이는데?”
자신의 집 이층 창문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보이노라고 했다.
"정말?“
다른 높은 건물들에 가려 보일 리 없을 터인데도 그가 보인다고 하자, 정말 보일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발꿈치를 들고, 묵동 쪽으로 나있는 거실 베란다 유리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어, 정말 보인다니까.”
105동 아파트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그이의 집 베란다 유리문을 열고 이마에 손 그늘을 만들고 웃고 있는 그가 보였다. 보이는 듯했다.
“어, 나도 보여. 아주 잘.”
그리고 몇 시간 뒤, 그는 챙이 달린 운동모자 차림으로 우리 아파트를 찾아왔다. 아파트에 살려면 다른 무엇보다 가습기는 있어야 한다며 커다란 가습기 박스를 들고.
사실, 우리 집에는 가습기라는 것은 있은 적이 없었다. 대단한 살림꾼인 나는 저녁이면 집안에 젖은 빨래를 널어두는 일로 가습 효과는 충분하다고 믿어왔다. 가습기가 있게 되면 공연히 자리만 차지할 것이며, 부담될 만큼은 아니어도 전기값이 좀 나갈 것이며, 고장이라도 나면 고치려 다니느라 성가스럽기나 할 것이다 생각해 왔었다.
가습기는 옅은 보랏빛 커다란 달팽이를 본따고 있었다.
“차라도 한 잔 할래요?”
그는 오기 전부터 다른 일이 있어 차도 마시지 못하고 나오게 될 거라는 말을 미리 해 놓긴 했다.
“어떻게 해? 그냥 맨입으로 가게 해서...”
동생이 여섯이 되고 그 중에 남동생이 넷이나 되지만 뚝뚝하기 짝이 없는 놈들.
“괜찮아. 이상교 선생. 그럼, 나 갈게요.”
엘리베이터로 그를 내려 보내놓고 한동안 나는 더워진 눈시울의 초등학생으로 돌아가 있어야만 했다. 그가 담임인 반의.
“이상교, 힘내서 잘 지내.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아마 잘 지낼 거야.”
그 날의 가습기 덕으로 우리 세 식구는 감기에 걸리는 일이 없이 지금까지도 잘 지내고 있다.
거실 안에 들여놓은 화분의 나뭇잎들은 까딱도 하지 않는다.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곤 없게 느껴진다.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해서 때로는 한 글자도 옮겨 적을만한 여력조차 잃은 채 컴 앞에 앉아있는 때가 있다. 사는 일도 생각하는 일도 힘에 겹고 주저앉고 싶고..... 그때 귀에 들리는 소리 하나.
솨아솨아, 펄펄펄펄 -
냉장고 옆의 한 쪽 귀퉁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흰 수증기를 뿜어내는 송재찬표 가습기.
건조한 실내를 촉촉하게 적셔 주는 놀라운 가습의 효과에 앞서 ‘그래, 펄펄펄 살아 있어야겠구나!’ 새삼스레 드는 생각.
나만 말고 그이를 믿음직스러워 하며 좋아하는 선배들과 동료, 후배들은 많다. 그이를 싫어하는 사람을 나는 이제까지 본 일이 없다. 언제나 겸손하며 부지런히 스스로를 갈고 닦는 이. 훌륭한 작품 쓰는 일에 쏟는 그이의 열정은 끊임없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그이를 나는 조금이라도 닮고 싶다.
아, 칭찬 일변도의 글을 써놓은 나는 이제부터 좀 켱기기 시작하누나!
궁색한 변명(?)같지만 내가 그에게 특별한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키 큰 남동생이 넷이나 되는 터라 큰 남동생 같아서기도 할 것이다.(미안)
“그런데 뭐냐.... ”
전혀 매끄러운 말투가 아닌 그, 틈틈이 첼로를 연습한다는 그. 하나 뿐(누구나 다 하나지만)인 아내를 사랑하는 그, 멀리 떨어져 공부하고 있는 아들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그.
무엇보다 점점 더 단물이 오르게 될 그이의 찬연한 문학을 위해 오늘은 노래 한 곡을 불러주고 싶다. 조용필이 부른 노래 ‘큐’다.
“.....너를 마지막으로 우리의 청춘은 끝이 났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 램프가 켜져 있는 작은 찻집에서 나 홀로 우리의 추억을 태워버렸다. 사랑 눈 감으면 모르리, 사랑 돌아서면 잊으리. 사랑, 내 오늘은 울지만 다시는 울지 않겠다. 하얀 꽃송이, 송이 웨딩드레스 수놓던 날....”
송재찬, 그이의 선한 웃음이 보인다. (*)
첫댓글 영원한 첫사랑!
동감. 아플 때 따뜻한 손을 잡아주신 이. 송선생님.
아~ 멋진 선생님 두 분!! 난 이 두 분 선생님을 모두 뵈었다. 그리고 마음으로 많~이~ **합니다~!! 그래서 *복 되다!!
정말 따뜻한 분들의 이야기군요. 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
그런 분이셨군요. 두 분의 눈같이 희고 푸근한 우정(아님 애정이라도~*^^*)은 지속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