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 하느님 계신 곳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이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여 드높이는 것이다. 여기서 대화란 하느님과 실제로 말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그분과 맺는 인격적 관계를 의미하고, 마음을 드높임은 가슴을 부풀리거나 감정이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느님과 그분 계신 곳, 많은 선하고 의로운 영혼이 있는 곳을 향하고 그곳에 있기를 갈망하는 것이라 하겠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감동받으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하느님은 돈은 물론이고 우리 봉사와 헌신도 필요 없는 분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봉헌하고 봉사하는 건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고 그분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조금 주면 조금 사랑하고, 많이 주면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 다 주면 완전히 사랑하는 것이다. 그 과부는 생활비를 다 하느님께 드렸으니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한 것이다. 하느님은 액수와 봉사 시간이 아니라 그의 오롯한 사랑과 완전한 신뢰를 바라신다. 구약에서는 이런 하느님 마음을 질투라고 표현하는데 그건 우리 생각이고, 실제로는 하느님 나라 밖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하느님 편과 그 반대편 사이 중간 지대는 없다. 생명과 죽음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당신 나라로 들어오게 하신다. 나중에 연옥 단련을 거쳐서라도 당신에게 속하게 하신다.
우리는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에게 관심갖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이 많은 장터에서 눈에 띄게 긴 겉옷을 입고 다니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찾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는 길게 하면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비난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아깝다. 게다가 흉보며 닮는다고 하니 조심한다. 판단과 비난하며 자신이 정의로운 줄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는 동전 두 닢만 보였을 거다. 아니 허름한 차림을 한 과부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몰랐을 거다. 그런 이들에게 하느님을 향한 오롯한 마음, 하느님께 목숨과 영혼을 맡긴 그의 사랑과 신뢰가 보였을 리 없다.
사랑하면 그의 말을 듣고 따른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실천이고 의지이다. 그래서 사랑은 수고 봉사 희생이다. 사랑은 처음에는 어색해도 의지적으로 계속하면 자연스러워진다. 산책을 나서며 비닐봉지 하나 챙겨나가는 게 아직 습관이 되지 않아 자주 까먹기는 하지만, 이제는 산책길에 버려진 페트병이나 캔을 주우며 그걸 숲속에 그냥 버린 사람들을 욕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사한다. 내게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줬으니 말이다. 쓰레기 몇 개 줍는다고 자연이 금방 회복되지 않는 줄 안다. 그것은 내 마음을 하느님께 드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내 마음을 조금씩 하느님과 그분 나라에 두는 것이다.
예수님, 세상 것들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애착을 모두 끊어버립니다. 저 높이 나르는 독수리처럼 제 마음이 하느님 나라에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지을 게 아니라 제 믿음이 더 굳어지고 희망이 더 커지게 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오가며 이 이콘을 바라보고 잠시 머뭅니다. 어머니 계신 곳에 제 마음을 두게 이끌어 주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