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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책박물관
요약 :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위치한 구립박물관. 도서 관련 전시, 교육, 보존, 학술연구 사업을 진행한다.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송파대로 37길 77
문의 및 안내 : 02-2147-2486
규모 : 연면적 6,212㎡
관람시간 : 오전 10시~오후 6시 (오후 5시 30분 입장마감)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1일, 추석 당일, 설 당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위치한 송파구청 운영의 공립 책 전문 박물관으로 2019년 개관하였다.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아우르는 각 시대별 도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도서 관련 전시, 교육, 보존, 학술연구 사업을 진행한다. 연면적 6,212㎡ 규모로 지하 1개 층, 지상 2개 층을 갖추고 있다.
주요 시설
전시실은 박물관 지상 2층에 위치해 있다. 상설전시실은 “향유-선현들이 전하는 책 읽는 즐거움,” “소통-세대가 함께 책으로 소통하는 즐거움,” “창조-또 하나의 세상, 책을 만드는 즐거움” 3개 주제로 구성된다. 제1부 “향유” 상설전시실은 생활 속 조선 사대부의 독서, 조선의 독서광, 조선의 장서문화, 조선의 장서가, 조선 후기의 독서환경, 수진본의 6개 소주제를 통해 조선시대 독서문화를 조망한다. 제2부 “소통” 전시실에서는 1910년 이후 100여년 간 전개된 독서문화를 소개하는 도서와 관련 자료를 전시한다. 제3부 “창조” 전시실은 책을 집필하는 작가의 방,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출판 기획자의 방, 출판 편집자의 방, 책을 디자인하는 북 디자이너의 방 4개 소주제를 통해 도서 제작 과정을 소개한다. 지상 2층에는 도서문화 관련 특별전이 개최되는 기획전시실도 위치해있다.
전시시설 외에 디지털 콘텐츠 열람공간인 미디어 라이브러리, 도서 관련 창작 활동 공간인 북스튜디오가 지상 2층에 마련되어 있다. 지상 1층에서는 어린이 책 체험전시실과 전시 연계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키즈 스튜디오가 운영된다. 지하 1층 오픈 스튜디오에서는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수장고를 관람할 수 있다.
주요 소장품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 역, 계환(戒環) 주해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1433년 편찬된 종합의학서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 1480년 간행된 『춘추집전대전(春秋集傳大全) 』, 지석영이 출간한 국한문(國漢文) 단어집인 『언문(言文)』 등의 서적과 책장, 책 반닫이, 백자연적 등의 유물이 알려져 있다.
부대시설
전시 및 교육시설 이외에 행사 및 강연을 위한 어울림홀, 카페, 야외 정원이 운영된다.
조선 5대 독서광 : 세종대왕, 이황, 이이, 김득신, 이덕무
다독 시인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
노력하는 자가 성공한다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천재도 있고 둔재도 있다. 한 자를 가르치면 열 자를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 번을 가르쳐도 한 자를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지능이 떨어진다고 해서 공부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에서 알 수 있듯이 노력하는 자가 오히려 성공한다.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은 1604년(선조 37년)에 태어나 문명을 크게 떨친 인물로, 화가 김득신과는 동명이인이다. 그는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지각이 발달하지 못해 노둔한 편이었다. 김득신의 아버지 김치는 이러한 아들을 질책하기보다 격려했다. 김치가 김득신에게 당부했다.
"학문의 성취가 늦는다고 성공하지 말란 법이 없다. 그저 읽고 또 읽으면 반드시 대문장가가 될 것이다. 그러니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마라."
"그래, 열심히 읽다 보면 반드시 외울 수 있을 것이다."
김득신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했다. 김득신은 그때부터 책을 잡으면 수없이 반복하여 읽었다. 『사기열전』 중 「백이전」을 11만 3천 번을 읽었고, 다른 책들도 1만 번 이상 읽었다.
한유 문장 사마천 『사기』를 천 번 읽고서야 韓文馬史千番讀
금년에 겨우 진사과에 합격했네 菫捷今年進士科
김득신은 스스로 시에서 『사기』를 천 번 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득신은 많은 시를 남겼는데 「용호(龍湖)」 「구정(龜亭)」 「전가(田家)」 등의 시가 유명하다. 어촌이나 산촌과 농가의 정경을 그림같이 묘사하여 한문 사대가로 불리는 이식으로부터 "그대의 시가 당금 제일이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문명이 널리 알려졌다. 그는 『백곡집(柏谷集)』을 남기고 80세에 죽었다.
이덕무(李德懋)
자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고증과 박학의 대가
출생 – 사망 : 1741 ~ 1793
조선후기 서울 출신의 실학자 그룹인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의 한 가지를 형성한 이덕무는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유득공(柳得恭)과 더불어 청나라에까지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을 날린 실학자이다. 그는 경서(經書)와 사서(四書)에서부터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출세에 제약이 많았다. 그러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여 서얼 출신의 뛰어난 학자들을 등용할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과 함께 검서관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박물학에 정통한 이덕무는 사회 경제적 개혁을 주장하기 보다는 고증학적인 학문 토대를 마련하여 훗날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正喜) 등에 학문적 영향을 준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정조에게 발탁된 서자 출신의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정종(定宗, 조선의 제2대왕)의 서자인 무림군(茂林君)의 10세손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인데 이 밖에 형암(炯庵)ㆍ청장관(靑莊館) 또는 동방일사(東方一士)라는 호도 사용했다. 특히 즐겨 사용한 청장(靑莊)이라는 호는 일명 신천옹(信天翁)으로 불린 해오라기를 뜻하는데, 청장은 맑고 깨끗한 물가에 붙박이처럼 서 있다가 다가오는 먹이만을 먹고 사는 청렴한 새라고 한다. 청장으로 호를 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성격을 상징한 것이라 하겠다.
이덕무는 서울 출신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성호(聖浩)이고 어머니인 반남 박씨는 토산현감 사렴(師濂)의 딸이었다. 할아버지 필익(必益)은 강계부사를 지낸 인물이었다. 6살에 아버지가 아들인 이덕무에게 한문을 가르치고자 중국 역사책인 [십구사략]을 읽혔는데, 1편도 채 끝나기 전에 훤히 깨우친 영재였다. 16세에 동지중추부사 백사굉의 딸 수원 백씨와 혼인하였고, 20세 무렵에는 남산 아래 장흥방(현재 종로구 부근)에서 살았다. 이 무렵 집 근처 남산을 자주 오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많이 지었다.
이덕무는 가난한 환경 탓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학문에 비상하고 시문에 능해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사후에 그의 행장을 지은 연암 박지원은 시문에 능한 이덕무를 기리며 “지금 그의 시문을 영원한 내세에 유포하려 하니 후세에 이덕무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또한 여기에서 구하리라. 그가 죽은 후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만나볼까 했으나 얻을 수가 없구나”하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이덕무는 청장이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호리호리한 큰 키에 단아한 모습, 맑고 빼어난 외모처럼 행동거지에 일정한 법도가 있고 문장과 도학에 전념하여 이욕이나 잡기로 정신을 흩뜨리지 않았으며, 비록 신분은 서자였지만 오직 책 읽는 일을 천명으로 여겼다고 한다. 가난하여 책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굶주림 속에서도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수백 권을 책을 베꼈다. 이덕무의 저술총서이자 조선후기 백과전서라 할 수 있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史實)에 대한 고증부터 역사와 지리, 초목과 곤충,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적 편력은 실로 방대하고 다양하여 고증과 박학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그의 묘지명을 지은 이서구(李書九)는 이덕무를 두고 “밖으로는 쌀쌀한 것 같으나 안으로 수양을 쌓아 이세(利勢)에 흔들리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인물”이라 평했다.
이덕무는 1766년 그의 나이 26세 때 대사동으로 이사한 후, 서얼들의 문학동호회인 백탑시파(白塔詩派)의 일원으로 유득공ㆍ박제가ㆍ이서구를 비롯하여 홍대용, 박지원, 성대중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적 재능에 비해 신분적 한계로 천거를 받지 못하다가 1779년 그의 나이 39세에 정조에 의해 규장각 초대 검서관(檢書官)으로 기용되면서 벼슬길이 열렸다. 1789년에는 박제가, 백동수와 함께 왕명에 따라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기도 했다. 검서관 이후에 사도시주부, 광흥창주부, 적성현감 등을 역임했다.
중국 시단에 알려진 조선의 시인
이덕무는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와 함께 사가시인으로 중국 청나라 문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시가 중국 시단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77년부터이다. 친구이자 유득공의 숙부이기도 한 유련(柳璉, 柳琴으로 개명, 1741~1788)이 1776년 중국을 방문하면서 훗날 사가(四家)로 불린 이덕무를 비롯한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4명의 시를 담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청나라 시인이자 학자로 이름 높았던 이조원(李調元, 1734~?)과 반정균(潘庭筠,1742~?)에게 소개하였고, 1777년 청나라에서 [한객건연집]이 간행되었다. 이 시집에 실린 이덕무의 시는 총 99수로 그 내용은 자연과 여정, 인물, 송별, 역사에 이르기까지 실로 매우 다양하다. 중국에 가 본적도 없던 이덕무였지만, 그의 시는 중국 시단에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한객건연집]이 소개되고 2년 뒤 이덕무는 연행단을 따라 중국을 방문했다. 이미 지명도를 쌓은 이덕무는 반정균을 비롯하여 이조원의 동생인 이정원, 기균, 옹방강, 축덕린 등 청조의 문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고, 이들을 통해 그의 시명(詩名)은 청조 시단에서 더욱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조원은 이덕무의 시를 가리켜 “건실하고 격조를 갖추어 네 사람 중에서 가장 노련하다”고 평했다.
시에 대한 그의 재주는 정조도 익히 인정한 바였다. 한번은 정조가 규장각 신하들을 불러놓고 [성시전도(城市全圖)]에 대한 백운시(百韻詩)를 짓게 하고는 각각 점수를 매겼는데, 이덕무가 1등을 차지했다. 정조는 “신광하의 시는 소리가 나는 그림 같고, 박제가의 시는 말하는 그림, 이만수의 시는 좋고, 윤필병의 시는 풍성하고, 이덕무의 시는 우아하고, 유득공의 시는 온통 그림 같다.”고 평했다. 정조는 이덕무의 시권(詩卷)에 우아하다는 의미의 ‘아(雅)’자를 썼는데, 이후로 이덕무는 아정(雅亭)이라는 호를 지어 사용하였다.
18세기 그들이 나누었던 우정
청나라에 소개된 [한객건연집]의 저자들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는 백탑파 혹은 이용후생파로 불리는 실학자이며, 지기(知己)의 정을 쌓은 벗이기도 하다. 특히 박제가ㆍ유득공과는 서자라는 비슷한 처지에서 오는 신분적 공감대가 있었다.
이덕무가 천애지기(天涯知己) 박제가를 알게 된 것은 24세 되던 1764년이다. 이덕무의 처남인 무인 출신 백동수의 집에 갔다가 현판 위에 써진 박제가의 ‘초어정(樵漁亭)’이라는 글씨를 인상 깊게 본 것이다. 3년 후 이덕무는 백동수의 집에서 박제가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그와의 첫 만남을 두고 “너무 맘에 들어 즐거움을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을 정도로 기뻐했다. 이덕무와 박제가의 우정은 1793년 이덕무가 죽을 때까지 근 30년간 이어졌다. 30년 동안 이덕무가 있는 곳엔 박제가가 있었고 박제가가 있는 곳엔 항상 이덕무가 있었다.
가녀리고 큰 키의 이덕무는 고상하고 조용했던 반면에, 박제가는 작은 키에 박력있고 자기 주장과 고집이 강한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외모와 성격은 달랐지만, 뜻이 맞았고 항상 서로를 그리워했다. 눈이 내린 어느 겨울날, 착암 유연옥의 집에서 해금 연주를 듣던 박제가는 한밤중에 자신의 벗 이덕무가 보고 싶어졌다.
“올 적엔 달빛이 희미했었는데 취중에 눈은 깊이도 쌓였네. 이러한 때 친구가 곁에 있지 않으면 장차 무엇으로 견딜 것인가. 내게는 즐겨 읽던 [이소]가 있으니 그대는 해금을 안고 야심한 밤 문을 나서 이덕무를 찾아가세.”
- 박제가의 [정유각집(貞蕤閣集)] 중에서
두 사람은 1778년 중국 연행에도 함께 갔을 정도로 인연이 깊었고, 1779년에는 규장각 검서관에 동시에 등용되어 십수년간 동료의 정을 나눴다. 잦은 숙직과 힘든 근무 속에서도 두 사람은 의지해가며 규장각 도서들을 편찬해 갔다. 사실 이덕무는 박제가 보다 9살이나 연상이었으나, 이들에게 나이차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아주 가난한 삶을 살았다. 하루는 빈곤을 겪던 이덕무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집안에서 제일 값비싼 것을 팔았는데, 그것이 [맹자(孟子)]였다. 글을 하는 선비가 책을 내다 판다는 것은 가지고 있던 전부를 내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덕무는 책을 팔아 밥을 해먹고는 유득공을 찾아가 크게 자랑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유득공 또한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그대가 옳다’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이덕무와 함께 술을 마셨다.
이덕무와 유득공은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左丘明,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학자)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술잔을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며 박장대소했다. 두 사람은 밤새 술을 마시며 맹자와 좌구명을 칭송했다. 1년 내내 굶주리며 책을 읽기만 한다고 해서 살 방도가 나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책을 팔아 끼니를 마련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의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말에는 평생 글을 읽어봐야 과거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었던 서얼들의 신분적 한계가 자조적으로 담겨 있다. 그러나 그의 기구한 현실은 유쾌하고 장난스런 태도로 승화되었고, 세상의 출세와 명예로부터 한 꺼풀 벗어난 자유인으로서의 경지로 나아갔다.
갑작스런 죽음과 남긴 저술
1793년 1월 25일 이덕무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본래 체력이 약한 데다가 규장각 검서관 생활에서 오는 고된 직무와 생활고를 겪다가 감기와 함께 폐렴 증상이 겹치면서 타계한 것이었다. 갑작스런 비보를 들은 박제가와 이서구, 박지원, 남공철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를 기리는 글을 지었고, 정조는 내탕금(內帑金: 임금이 개인적 용도로 쓰는 돈) 5백냥을 하사하여 그의 유고(遺稿)를 간행하게 하고 아들 광규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차했다.
이덕무의 박학다식은 이용후생파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가난하여 책을 사 볼 수 없어 집에는 비록 책이 없었으나, 책을 쌓아 둔 것과 다름없었다. 평생 동안 읽은 책이 거의 2만 권이 넘었고, 손수 베낀 승두세자(蠅頭細字: 파리만큼 작은 글자) 또한 수백 권으로서 자획이 방정하며 아무리 바빠도 속자(俗字: 원래 글자보다 획을 간단하게 만든 글자) 하나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쓴 책은 10여 종에 달하는데, “나의 글이 진귀하지 못한 것이라, 한번 남에게 보이면 사흘 동안 부끄러워진다. 상자 속에 깊숙이 넣어 두었는데 스스로 나올 날이 있을 것이다.”하여 처음 쓴 초집(初集)의 이름을 [영처고(嬰處稿)]라 하였다 한다. 또한 청장이라는 물새 이름을 자호(自號)한 뜻을 삼아 두 번째 문집을 [청장관고(靑莊館稿)]라 이름 지었다. 또한 듣는 대로 쓰고 보는 대로 쓰고 말하는 대로 쓰고 생각하는 대로 썼다는 의미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예절에 관한 [사소절(士小節)] 등이 있고, 그 외에 [청비록(淸脾錄)], [기년아람(紀年兒覽)], [청정국지(蜻蜓國志)], [앙엽기(盎葉記)],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 [예기억(禮記臆)], [송사보전(宋史補傳)],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등이 있다.
북학을 거부한 자국 중심의 세계관
북경유리창. 이곳은 이덕무와 박제가가 북경 연행 중에 중국 문인들과 만났던 장소이다. 이덕무는 박제가와 달리 청나라의 선진 문물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출처: 신영담,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
조선후기 특히 18세기는 실학자들의 중국 방문이 활발하게 이뤄지던 시기였다. 홍대용과 연암 무리의 문인들인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가 모두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중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연행록(燕行錄)을 남겼는데, 이덕무는 [입연기(入燕記)]라는 연행록을 남겼다. [입연기]는 1778년 3월 17일 서울을 출발하여, 윤6월 14일 의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연행록이다.
이덕무는 중국을 다녀온 연암파 실학자들과 달리 청 왕조의 지배체제를 부정적으로 인식한 인물이었다. 박제가와 절친한 사이였지만, 이덕무는 그의 친청적(親淸的)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을 다녀왔지만, 조선 선비들이 청을 오랑캐로 폄하하는 것을 비판한 박지원ㆍ박제가와는 서로 다른 중국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덕무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국은 중국일 따름이고 조선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으니, 중원만 모두 옳겠는가? 비록 도회지와 시골의 구분은 있을망정 모름지기 평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대용과 박지원, 박제가와는 또 다른 자국 중심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그는 청나라와 조선을 자주적이고 평등한 관계로 인식하였다. 사실 청나라에 대한 이덕무의 생각은 전통적인 보수성을 띠면서도 자국 중심적이고 평등한 것으로 점차 변화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대명의리(大明義理)와 존주양이(尊周攘夷)의 생각이 팽배했던 시기에 조선 선비들이 가졌던 청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이덕무를 통해 읽을 수 있다.
송파 책박물관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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