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766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장보고와 청해진
완도군이 지금의 강진군에 소속된 것은 백여 년 전의 일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청해진은 완도에 있다. 『당보역간(唐寶歷間)』에서 말하길 ‘당나라 사람이 신라의 변방 백성을 많이 약탈하여 노비로 삼으니 흥덕왕이 장보고를 대사로 삼아 1만 명의 군사를 일으켜 청해에서 약탈하는 사람을 방어하였다.’ 문성왕 8년 장보고는 왕이 자신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지 않자 청해진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13년에 파진(罷鎭)하였다”라고 한 완도가 하나의 군이 된 것은 조선 말엽이다.
갑신정변 때 이조판서였던 이도재가 완도군 고금도에 귀양을 왔다가 8년 만인 1894년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동학농민운동의 3대 지도자였던 김개남을 체포한 뒤 즉시 효수하였던 사람이다. 그 뒤 곧바로 학부대신에 오른 그는 1896년 4월 1일에 완도를 군으로 승격시켰다. 완도 사람들은 이도재의 은혜를 기려 완도읍 죽청리에 그의 송덕비를 세웠다.
이처럼 완도가 강진에 딸린 지역으로 남게 된 것은 앞서 언급한 해상왕 장보고1) 때문일 것이다. 완도읍 장좌리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진 장보고는 당나라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 자리에 올랐으나 당나라 사람들이 서해 연안을 침범하여 신라 사람들을 납치한 뒤 노예로 판다는 사실을 알고 분개하여 벼슬을 내놓고 신라로 되돌아왔다. 그는 임금의 허락을 얻어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청해진, 즉 지금의 완도읍 장좌리에 진을 친 뒤 수병을 훈련시켜 해적들을 소탕하였다. 장보고는 그 뒤 당과 일본의 무역, 문화 교류 등을 독점하게 되면서 해상왕국이라 부를 만큼 성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곧이어 장보고는 현실 정치에 휘말리게 된다.
남북국시대의 왕위 계승 다툼에서 패배한 김우징이 제 목숨을 건지려고 837년 청해진으로 들어온다. 장보고는 김우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남북국시대의 44대 임금인 민애왕을 죽였고, 김우징은 45대 왕인 신무왕이 되었다. 그러나 신무왕은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병으로 죽고,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이 문성왕이 되었다.
반란을 성공시킨 공으로 감의군사(感義軍使)라는 벼슬자리에 오른 장보고는 그 무렵 청해진이 중국과 일본의 중간 지점에 자리한 점을 이용하여 일본에 무역 사절을 파견하는가 하면, 당나라에도 무역 사절인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어 이른바 삼각무역을 일으켰다. 이처럼 큰 힘을 갖게 된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아내로 삼게 하려다 조정과 군신들의 반대로 실패하자 불만을 품고 반란을 꾀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문성왕 8년(846)에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의 칼에 맞아 죽었다.
워낙 세력을 떨치던 사람을 죽인 뒤라 신라 조정에서는 그 부하들이 난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완도에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막았다. 또 851년에는 이 곳에 살던 모든 사람들을 전라도 북쪽 벽골군(지금의 김제군)으로 옮겨 살도록 명령하였다. 그때부터 5백 년이 흐르는 동안 완도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동백나무, 황칠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가 울창하게 자라났고 그 사이로 사슴, 노루, 고라니, 멧돼지 같은 야생 동물들이 마음껏 뛰어다녔다.
완도 청해진 © 유철상지금도 완도에는 장보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 장좌리 서쪽에는 장보고가 돌을 던져 맞혔다는 복바위가 있는데, 지금도 돌을 맞히면 복을 받는다고 전해져 온다. 그밖에 옥당(獄堂)터, 청해정 터가 남아 있다.
지금도 완도에는 장보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 장좌리 서쪽에는 장보고가 돌을 던져 맞혔다는 복바위가 있는데, 지금도 돌을 맞히면 복을 받는다고 전해져 온다. 그리고 청해진 군사가 당나라나 왜의 해적을 잡아서 가두었다는 옥당(獄堂)터, 청해진에 거주하던 군사들이 식수로 썼다는 청해정 터가 남아 있다. 죽청 북쪽에 있는 장수바위는 여섯 개의 바위로 이루어졌는데, 장보고가 아장을 데리고 군략을 협의하였다는 곳이다. 장보고 가족들의 무덤이라는 장보네 묘, 장보고가 지었다는 법화사 터 등이 지금도 남아 있는 장보고 유적이다.
다시 완도에 사람이 들어와 살게 된 것은 고려 공민왕 때인 1351년의 일이다. 그러나 그때는 지금의 완도군에 드는 완도와 그 밖의 여러 섬이 갈래갈래 나뉘어 강진군이나 장흥군, 해남군, 영암군 같은 뭍 지방에 들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완도는 남쪽 바다에 위치하여 조정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민들은 당연히 이웃 지방 사람들의 간섭과 구속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유로 완도라는 이름에 대해 ‘풀과 나무가 무성한 것이 왕골 풀과 같다고 하여 완도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5., 신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