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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축복 1
신 33:1-17
1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2 그가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
3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4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령하였으니 곧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로다
5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수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 한 때에로다
6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7 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하니라 일렀으되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의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그의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가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8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9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
10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
11 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12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
13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14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15 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16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17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민족들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리로다
신 33:1-17 / [모세의 축복]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유언으로 빌어 준 축복이다. 2) 그는 이렇게 축복하였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부터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다. 에돔의 산들 위로 자기 백성을 위하여 태양처럼 떠오르시고 바란산 줄기에서 빛을 발하며 오신다. 거룩한 무리를 거느리고 오시며 오른손에 이글거리는 불꽃을 뿜으며 자기 백성을 찾아 오신다. 3) 주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며 자기의 거룩한 백성을 보호해 주신다. 그들이 주님의 발앞에 엎드려 주님의 명령을 받는다. 4) 모세가 전한 율법이 야곱 자손의 귀중한 재산이라고 하신다. 5) 야곱이 존귀하게 되어 여수룬이라고 불릴 때에 여호와께서 친히 여수룬의 왕이 되셨다.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이 모두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 모였을 때 주께서 친히 이스라엘에서 왕이 되셨다.' 6) 여기서 모세가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게 축복하였다. `르우벤 지파는 전멸하지 말고 살아 남아 남은 사람이 적어지지 않기를 빈다!' 7) 유다 지파에게는 이렇게 축복하였다. `여호와여, 유다의 호소를 들으시고 그를 ㄱ) 혼자 버려 두지 마시고 그의 형제들에게 데려다 주소서! 유다 지파를 위하여 주님의 손으로 직접 싸워 주시고 주께서 그를 보호해 주셔서 그가 항상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게 하소서!' (ㄱ. 지리적으로 팔레스타인 남쪽에 혼자 고립되어 있지 않게 하라는 뜻이다) 8) 레위 지파에게는 이렇게 축복하였다. `레위는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므로 주께서 둠밈과 우림을 그들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맛사에서 시험해 보시고 므리바에서 다투기도 하셨습니다. 9) 그러나 나중에는 그들이 오로지 주께만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들은 친부모도 돌아보지 않고 제 동기도 모른체하고 자녀들까지 외면하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주님의 말씀만 지키고 주님의 계약에만 충성을 다 바쳤습니다. 10) 그들은 야곱에게 주님의 계명을 가르치고 이스라엘이 항상 율법대로 살도록 주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그들은 주께 향기로운 분향을 올리고 주님의 제단에 번제물을 완전히 살라바칠 것입니다. 11) 여호와여, 레위 지파에게 기력과 재물의 복을 주시고 그들이 하는 일들을 보시고 기뻐하소서! 그들에게 대적하는 이들이나 미워하는 이들의 허리를 꺾어 어느 누구도 그들을 대적하여 일어서지 못하게 하소서!' 12) 베냐민 지파에게는 이렇게 축복하였다. `여호와여, 베냐민은 주께서 귀엽게 키우신 아들이니 항상 주님 곁에서 평안히 살게 하소서! 주께서 온종일 그를 지켜 주시고 주님의 품안과 같이 안전한 산봉우리들 사이에서 살게 하소서!' 13) 요셉 지파,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에게는 이렇게 축복하였다. `여호와여, 요셉 지파의 땅에 복을 내리소서. 위로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와 아래로는 지하에 저장된 물줄기로 그 땅을 비옥하게 하소서! 14) 햇볕을 받아 오곡백과가 풍성히 자라게 하시고 한달이 지날 때마다 새로운 열매가 익게 하소서! 15) 태고적 산지에서 극상품이 나오게 하시고 영원한 산언덕에서 모두 특산품이 나게 하소서! 16) 그 땅에서 온갖 것이 자라나 그 땅이 가득하게 하소서! 떨기나무 속에 사시는 하나님이 요셉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풍성한 복이 그의 머리 위에, 형제들의 대표자로 뽑힌 그의 정수리 위에 내리게 하소서! 17) 요셉은 처음난 수송아지처럼 위엄이 있고, 그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힘이 머물러 있다! 그에게는 들소뿔같은 두 뿔이 있어서 그 뿔로 대적하는 족속들을 들이받아 땅끝까지 밀어붙일 것이니 한 뿔은 에브라임 지파에서 나오는 수만 명의 병력이요, 또 한 뿔은 므낫세 지파에서 나오는 수 천만의 용사들이다.!'
모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이스라엘의 미래를 축복합니다.
주신 은혜를 찬양(1-5) 축복하는 주체가 하나님의 사람 모세입니다. 모세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 세일 산, 바란 산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셨습니다. 광야 사십년 동안 이스라엘은 대부분 거역하고 불평하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어디든 찾아오셨고, 불같은 율법을 주셨습니다. 번개가 치는 가운데 십계명을 주신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주의 발아래에서 주의 말씀을 주실 때 겸손하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이 이스라엘의 재산입니다. 총회는 구약의 교회를 말합니다. 여수룬에 왕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광야를 지나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르우벤, 유다, 레위에 대한 축복(6-11) 맏아들 르우벤은 서모와 나쁜 짓을 하여 장자의 자리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왕성할 수 없으나 생존은 하며 그 사람의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한다는 소극적인 축복을 받습니다. 지파가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정도의 축복입니다. 유다를 위한 모세의 첫 번째 축복은 모든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래서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와 승리자가 되도록 축복합니다. 이에 레위인을 들어 주의 둠밈과 우림으로 하나님의 뜻을 밝혀 백성을 인도할 때 경건해야 한다고 합니다. 물이 없던 르비딤에서 모세의 지팡이로 친 곳에 물이 나왔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도 물이 없어 어려울 때 모세가 화를 내었습니다. 므리바에서 실수로 경건하지 못했던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하나님의 귀한 직책,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하고 예배 인도할 때 모든 것에 부요하게 살게 하고 권위를 세워 주셨습니다.
베냐민, 요셉에 대한 축복(12-17) 베냐민은 막내 지파입니다.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 것입니다. 어깨 사이에 있게 해 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있게 사용해 주실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잘 대접했고, 아버지를 평생 동안 잘 섬겼기에 장자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의 자손에게는 만만으로, 므낫세 자손에게는 천천의 복을 빌어주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축복한 것입니다.
적용: 오늘 당신은 누구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시겠습니까? 부모이면 자녀에게 축복의 말을 전합시다.
죄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어떤 것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어떤 것들은 버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부정할 줄 알아야 긍정할 줄 알게 됩니다. 노(No)라고 바르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올바르게 예스(Yes)라고 말하지도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살아가는 동안 말씀에 근거하여 단호히 죄를 멀리하고 올바른 것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성도의 3대 축복
신명기 33:8-11 / 이한규 목사
1. 선택의 축복
본문 8절을 보라.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둠밈과 우림의 재료, 모양, 사용법, 용도 등은 성경에 나오지 않아 잘 모른다. 아마 당시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사용한 도구로 추정된다. 그 둠밈과 우림이 경건한 레위 지파에게 있다는 말씀은 레위 지파가 하나님의 뜻을 묻고 백성들에게 알리는 제사장 지위를 얻게 되었음을 뜻한다.
선택된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자부심도 되지만 사실상 그 일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다(벧전 2:9). 성도는 둠밈과 우림을 가진 존재다. 그래서 구별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줄 책임이 있다. 제사장직은 권력을 가진 자리가 아니다. 선택된 존재가 되었다는 뜻은 권리가 커졌다는 뜻이 아니라 책임이 커졌다는 뜻이다. 구별된 존재로서 자부심을 잃지 않고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면 언젠가 수직상승의 축복의 때가 반드시 온다.
2. 중보의 축복
본문 10절을 보라.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 당시 레위 지파에 주어진 중보의 직무는 크게 2가지 직무가 있었다. 하나는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교육의 직무’이고 또 하나는 백성들의 죄를 속함 받기 위한 ‘제사의 직무’다. 레위 지파는 이 2가지 직무를 이행하려고 이스라엘의 각 지파 사이에 흩어져 살았다.
사람은 죄 공장이다. 기회만 되면 죄의 습성이 나타난다. 죄를 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끊임없이 말씀과 기도로 죄의 습성을 극복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 일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바로 제사장이다. 제사장은 말씀을 맡은 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 중의 하나는 말씀을 전해주고 말씀으로 교육하는 일이다.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은 목회자지만 모든 성도도 그 일의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3. 승리의 축복
본문 11절을 보라. “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된 레위 지파는 가나안 정복 후 다른 지파처럼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했다. 대신 다른 지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를 받아 생활했다. 결국 레위 지파의 재산을 풍족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재산을 풍족하게 해달라는 기도다.
부와 영성은 꼭 반비례하지 않는다. 부자 중에도 영성이 좋은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모세의 축복 유언 기도를 따라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 부를 경시하지 않게 하소서. 그래서 많이 나누고 많이 선교함으로 영성과 심령의 가난함을 잃지 않게 하시고 나눔과 선교의 모델이 되게 하소서.” 왕 같은 제사장이란 인식을 가지고 나눔과 선교의 모델이 되면 어떤 대적도 물리치고 넘어설 수 있는 인물이 되는 축복을 얻는다. 그런 축복을 꿈꾸라.
< 정체성을 분명히 하라 >
어느 날 한 영국 기자가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다. “수녀님! 소외되고 가난하고 힘든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테레사 수녀가 말했다. “자신이 버림받은 존재란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란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힘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내가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런 느낌이 들도록 사랑을 나눠주라. 공의와 사랑을 바탕으로 누군가를 힘써 도울 때 그 사람 자신도 더욱 큰 존재의 도움을 받게 된다.
왜 어떤 사람은 성공한 뒤에도 고독과 공허를 느끼는가? 성공해서 부와 명성은 있지만 헌신과 나눔이 없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부와 명성은 있었지만 네 번의 결혼을 통해서도 행복하지 못했다. 결국 심한 우울증에 걸려 61세에 권총자살을 했다. 그는 마지막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나는 필라멘트가 끊긴 텅 빈 전구처럼 공허하다.” 헌신과 나눔의 삶을 알았다면 그의 삶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란 정체성과 하나님의 사명을 이행해야 할 존재란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라. 그런 사랑과 사명을 가지고 고독한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고 힘든 사람의 도움이 되어주고 소리 없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거룩한 하늘의 암행어사가 되는 꿈과 비전을 가지라. 누군가를 일으켜주려고 하면 신기하게도 자신부터 일으켜지는 체험을 한다. 그런 체험을 만끽하며 더욱 나누고 선교함으로 행복과 보람 가운데 살라.
이스라엘의 복
신명기 33:1-4 / 석원태 목사
신명기 33:1-4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영감표현에 ‘여수룬’이란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15절에나 33장 5절, 33장 26절에 이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영감의 사람 이사야도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 …나의 택한 여수룬아…」(사 44:1-2)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여수룬’은 야솰에서 유래되었다고 봅니다. 그 의미는 ‘옳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수룬’이라 할 때는 ‘옳은 자’를 뜻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70인역(LXX)에는 ‘사랑 받는 자’로 번역했는데 칼빈(Calvin)은 이 뜻을 따랐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옳게 보아준 백성’ 또한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을 뜻하는 애칭적 별명이며, 또한 시적(詩的)으로 표현한 별명이 되겠습니다. 신명기 33장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신 33:1). 물론 그것은 모세 자신의 산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자신의 택한 여수룬(이스라엘)을 향하여 주고 싶었던 축복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하나님의 축복을 대신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모세 자신도 대단한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나의 종」, 「여호와의 종」, 「하나님의 사람」(신 33:1, 34:5)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영감을 주어 여수룬(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늙어서 죽기 전에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얼마나 영예롭고 존귀한 사람이겠습니까? 더욱이 그가 이스라엘 구원의 명을 받고 그 백성을 인도하여 40년 광야생활을 친히 지도했던 사람이고 보면, 그가 죽기 전에 그 백성이 받을 하나님의 축복을 대신 전달할 수 있었음이 그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자신의 백성을 축복하도록 영감을 주시고 은혜를 입혀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 자신은 참으로 큰 은총을 입은 행복자가 아닌가? 이스라엘(여수룬)을 향한 모세의 축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한 사실입니다(신 33:29).
그렇다면 여수룬의 행복, 곧 이스라엘의 행복이 무엇인가?
Ⅰ. 하나님 자신이 여수룬의 행복이었습니다.
여수룬의 행복이 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1. 「오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33장 2절에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시내에서’라고 한 말은 시내산을 가리킵니다. ‘시내에서 오시고’라 함은 완료진행형으로, 지난날 모세에게 오신 그 하나님이 지금도 계속해서 모세와 그 백성을 찾아오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여수룬(이스라엘)의 행복은 하나님 편에서 찾아오시고 계신다는 이 사실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복은 하나님 편에서 그를 찾아오심에 있었습니다. 이삭과 야곱의 행복도 하나님 편에서 그를 찾아오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결과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고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이삭을 찾아오고, 야곱을 찾아오신 결과 저들의 인생여로에는 예기치 못한 온갖 축복의 샘물이 터졌습니다. 저들은 새로운 삶의 축복의 경지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찾아오신 결과, 그는 종된 애굽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새로운 존재적 사명과 목적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타지 않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은 “모세야, 모세야!”라고 그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출 3:1-5).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오셨습니다.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과 불 가운데서 모세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선민 이스라엘의 생활헌장인 율법(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찾아오심이 행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왔을 때 유월절을 체험했습니다. 출애굽의 거사를 체험했습니다. 홍해의 기적, 마라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메추라기와 만나, 반석이 터져 토하는 청수를 체험했습니다. 아말렉과의 싸움에서의 승리를 체험했습니다. 40년 동안 불기둥 구름기둥의 은총을 체험했습니다. 농사짓지 않고, 길쌈하지 않아도 장정으로만 60만 명이 넘었던 저들의 의식주가 해결되었습니다. 전 성경이 인류에게 주는 축복의 소망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 편에서 죄인 된 인간을 찾아오신다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하여 타락한 인생을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전 성경의 내용은 하나님이 인생을 찾아오신다는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 자신이 인생을 찾아오시는 자기계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즉 여호와 자기 계시(나타나심)를 알려주는 말입니다. 모세는 스스로 계신 여호와, 자존하신 여호와께서 또한 자기 스스로를 모세 자신에게 나타내심을 체험했습니다. 이 사실을 그 백성과 애굽 왕 바로에게 증거하고 말았습니다(출 3:12-13, 14).
2) 계시의 궁극적 목적은 구원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 편에서 스스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방도를 계시하였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고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후손을 통하여 구원의 길이 있다고 계시하여 주었습니다(창 3:15). 그 구원이 대속(속전)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벗었으므로 두려워 떨고 있는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이 진리를 알려주었습니다(창 3:21).
3) 그 계시의 방편은 여러 시대, 여러 모양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절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① 하나님 자신이 친히, 직접 찾아오시기도 하였습니다. 아담에게, 노아에게,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경우들입니다. ② 아니면 우림과 둠밈, 이적과 기사로 찾아오신 경우들도 있습니다. ③ 하나님이 세우신 예언자(선지자)들의 마음과 입에 말씀을 담아두어서 찾아오시기도 하였습니다.
4) 그 계시의 최후, 최고 절정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보내어 우리를 찾아오신 일입니다. 히브리서 1장 2절에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시어 사람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현현이요, 이적 그 자체요, 선지자(예언자)였습니다.
5) 그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의 자기 사랑이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랑은 죄인을 구원하는 구속의 사랑, 속죄 은총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냈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가지고 죄인을 찾아오셨습니다. 여기에 죄인들의 소망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6) 그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지금은 성령으로 우리를 찾아오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인 진리의 성령이(요 15:26), 예수의 영인 보혜사가(요 16:7) 약속대로 오순절에 충만으로 인생을 찾아오신 것입니다(행 2:1-3). 그 성령이 사람들에게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구원의 축복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고전 12:3). 또한 그 결과 지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딤전 3:15), 큰 집(딤후 2:20), 내 아버지의 집(요 2:16)이라고 한 것입니다.
7) 그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마지막 약속을 남기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와 그 백성에게 오셨습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하늘로부터 친히 그 아들 예수께서 도성인신(道成人身)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세상 끝날에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에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영물인 천사는 예수의 재림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그의 재림을 거듭 거듭 약속하였습니다. 특별히 고별사 첫머리에 자신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희망을 약속하였습니다(요 14:1-3). 더욱이 종말 계시인 요한계시록은 예수 재림으로 시작하고(계 1:7), 예수 재림 약속의 반복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7, 12, 20)!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음을 앞에 두고, 그의 백성 여수룬의 행복을 기원하고 있음을 들었습니다. “여수룬아! 이스라엘아! 너는 참으로 행복자로다!”라고 기원하고 있음을 들었습니다. 그 행복은 바로 하나님이 너희 하나님이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하나님이시기에 행복한가? ‘오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찾아오신다는 그 자체가 이스라엘에게는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이스라엘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만백성, 만국들 중에 하나님이 유독히 이스라엘(여수룬)을 찾아오셨음이 행복이란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선택의 방문을 뜻합니다. 그것은 자원적 사랑의 방문을 뜻합니다. 그것은 목적적 방문을 뜻합니다. 바로 여수룬의 구원을 목적한 찾아오심이었습니다. 그것은 궁극적이요 불변적인 영생을 약속한 방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처럼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한 사실 그대로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여수룬)에게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이 인생을 찾아오시는 역사입니다. 목자 편에서 양을 찾는 역사입니다. 여자 편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역사입니다. 아버지 편에서 탕자를 찾는 역사입니다. 죄인과 하나님(아버지) 간에는 상거가 멀었지마는 아버지 편에서 그 아들 예수를 앞세워 아들(죄인)에게 쫓아오는 역사입니다. 아버지 편에서 죄인(탕자)을 먼저 알아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는 역사입니다. 아버지 편에서 달려가 아들(탕자)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어 주는 역사입니다. 아버지 편에서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그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주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살진 소를 잡고, 동리 사람을 초청하여 잃어버린 내 아들, 죽었던 내 아들을 다시 얻었다고 소리치며, 다시 찾은 기쁨을 함께 나누는 축제의 역사입니다(눅 15: ). 이런 경우 그 아들은 행복자가 아닌가? 누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그 탕자의 행복을 대적하겠는가? 송사하며 정죄하겠는가(롬 8:31-34)? 누가 이 부자(父子)의 생명적 사랑관계를 끊을 수 있겠는가(롬 8:39)? 환난인가? 곤고인가? 핍박인가? 기근이나 적신인가? 그 무슨 위험이나 칼인가(롬 8:35)?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찾아왔을 때, 저들은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된 죄인을 찾아왔을 때, 저들은 마침내 구원의 은총을 받고 말았습니다(막 2:17, 눅 19:9). 예수께서 마지막날에 다시 세상에 오실 때, 새 하늘 새 땅에서 구원받은 새 백성이 새 임금의 통치를 약속받고 있습니다(계 21-22장).
하나님 자신은 여수룬의 행복입니다. 이스라엘의 행복입니다.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찾아오심이 이스라엘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신다’는 약속의 기쁜 책입니다. 예수님이 오신다! 이것이 구약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다! 이것이 신약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이 새 하늘 새 땅의 출현이 아닌가! - 아 멘 -
이스라엘의 복(3)
신명기 33:1-4 / 석원태 목사
사람들이 쓰는 말 가운데 환상적인 설렘을 가져다 주는 말이 있습니다. 다름아닌 ‘행복’이란 단어입니다. 행복은 모든 사람들이 듣기를 좋아하고, 갖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한없이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그럼에도 이 행복의 정체성을 바르게 파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행복이란 말 자체가 지니고 있는 그 정체성이 너무나도 여러 가지 내용과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 광야교회의 지도자 모세를 세상에서 부르기 직전에 그를 통해 자기 백성 여수룬(이스라엘)을 향하여 ‘행복자’라고 불러주었습니다. 신명기 33장 29절에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을 향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이 말씀은 결코 지나가 버리는 예찬 정도나, 위로하고 달래주기 위한 정도의 말이 아닙니다. 여수룬이 받은 실제적 행복을 사실적으로 말해주는 무게 있고 내용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행복자라고 부르셨다면, 그 결과 이스라엘은 행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주 자주 자신이 행복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고, 말들을 합니다. 또 인간 자신이 행복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결코 행복의 주인은 인간 자신이 아니고, 또 인간 자신이 행복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산물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행복이 우연의 산물일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행복의 정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인생은 하나님 자신께로부터 행복을 받아 누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생 행복의 근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인생들이 받아 누릴 행복의 법칙들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인생이 행복하게 되는 비결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행복의 법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컨대 영생의 행복은,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독생자 예수를 영접하는 믿음의 법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의 사람된 제일의 본분은 여호와를 경외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전 12:13).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축복은 부모를 공경하는 법칙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출 20:12)). 물질 축복의 행복은 소득의 온전한 십일조라고 하였습니다(말 3:10). 부부간의 행복은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과, 남편을 향한 아내의 순종이라고 하였습니다(엡 5:22-26).
그러므로 결코 행복은 인생의 독자적인 창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에게 준비하신 축복입니다. 인생은 그것을 받아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행복수용의 법칙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산소를 마시는 호흡의 법칙에 의해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스라엘의 행복, 곧 여수룬의 행복을 생각하는 중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행복은,
Ⅰ.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① 시내산에서 오시고 ②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③ 바란산에서 비취시고 ④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신 그 자체가 이스라엘의 행복이라고 하였습니다(신 33:2).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오심이 없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일어나심이 없고, 하나님의 비취심이 없고, 하나님의 강림하심이 없다면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Ⅱ. 여수룬(이스라엘)이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신명기 33장 3-4절이 이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인생의 행복은 하나님이 주신 법칙을 따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 그 첫째 이유는, 여수룬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33장 3절에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저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 자신 편에서 이 사실을 이스라엘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열방에 공개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축복 중에 최고의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사랑을 먹을 때 행복합니다. 부모의 사랑이 자식을 행복하게 합니다. 스승의 사랑이 제자를 행복하게 합니다. 친구와 선배의 사랑이 행복한 사회를 이룩하여 나아갑니다.
특별히 죄로 인하여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인생에게는 ‘하나님의 사랑’, ‘특별한 사랑’, 곧 ‘구원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이 바로 아하브(bh'a;), 곧 아가페(ajgaphv)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① 선수적 사랑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먼저 주신 사랑입니다(요일 4:10). ② 선택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선택의 요인이 되었습니다(신 4:37, 7:6-7). ③ 무조건적 사랑, 일방적 사랑입니다(롬 5:8). ④ 불변적인 영원한 사랑입니다(요 13:1). ⑤ 그것은 구원의 사랑입니다(요 3:16). ⑥ 모든 것에서 넉넉히 이기게 하는 사랑입니다. 로마서 8장 31-39절에는 이 사실을 길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적자를 이기게 합니다. 송사하고 정죄하는 자에게 이기게 합니다. 환난도, 곤고도, 죽음도, 핍박도, 기근도, 적신도, 위험도, 칼도, 사망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이나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이나 깊음도 그리고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사랑이 이스라엘의 안전보장이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여수룬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금세와 내세에서 결정적인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죄문제, 구원문제, 영생문제, 기업문제를 모조리 해결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세상 끝날까지 임마누엘의 보장을 받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마 28:20).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자기 형제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롬 1:7).
2. 두 번째 이유는, 모든 성도(이스라엘)가 그 수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3장 3절에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전 인생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저들의 전 인생과 역사가 결정적인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통치를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천지가 지음을 받았습니다. 시편 19편 1절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손에서 아담이 지음을 받았습니다(창 2:7). 그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범죄한 아담에게 짐승(동물)의 가죽옷이 입혀졌습니다(창 3:21).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선민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출애굽기 13장 3절 중에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 곳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5장 15절에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손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에 능하신 손(수 4:24)이라고 하였습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시 98:1)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그 손을 내밀어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붙잡아(구원) 주었습니다(마 14:31). 주님은 손을 내밀어 병을 깨끗하게 하여 주었습니다(마 8:3). 그리고 손을 내밀어 안수하고 축복하여 주셨습니다(막 10:16). 요한복음 10장 28절에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영원한 구원의 안전보장이 되는 손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표현된 여호와의 손은 그의 능력의 창조와 구원과 통치와 섭리의 권세를 알려주는 손입니다.
반면에 그 손은 애굽을 치신 심판의 손이요(출 9:3), 이방 블레셋을 치신 재앙의 손이요(삼상 3-4장), 이방 제국(바벨론)의 종말을 나타내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의 손입니다(단 5:5, 25:28). 지금 모세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89편 13절은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으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시 31:15)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자는 행복합니다.
3. 그 세 번째 이유는 주의 발 아래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3장 3절 중에 다시 말하기를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주의 발 아래 앉는 경우를 몇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실 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고 한 경우입니다. 나중에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십계명의 돌판을 받을 때도 하나님의 발 아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출 24:10-12). 여리고 함락을 앞에 두고 여호수아를 찾아왔던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수 5:15)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신명(神命)에 대한 절대 경외와 순종을 보여주는 경우입니다.
시편 8편 6절에는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110편 1절에는 여호와의 발이 원수를 짓밟는다(발등상 되게 하심)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 자신의 엄위하신 자기 통치를 가리킵니다. 여호수아 10장 24절에는 여호수아가 그의 군장들에게 이르기를 저들이 잡아온 적군의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고 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22장 39절에 보면 다윗이 적군을 무찔러 파하였더니 저희가 다윗의 발 아래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는 모두 정복과 승리를 나타내는 표현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시는 가나안 땅으로 갈 때, 저희가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다 저희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신 11:24, 수 1:3). 이런 경우는 축복의 번성과 형통을 나타냅니다. 이 모두가 축복의 장면들입니다. 행복한 장면들입니다. 참으로 시원하고, 밝고, 유쾌한 장면이 아닌가! 그럼에도 본문에는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신 33:3)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축복입니다. 이것은 열국 중에 이스라엘(여수룬)만이 받는 행복입니다. ‘주의 말씀’은 바로 여호와 자신의 음성입니다. 인격적 계시입니다.
저들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은 바로 저들의 삶과 직결하는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된 결정적인 요소는, 저들에게는 여호와의 말씀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에게, 다윗에게 그리고 여러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들이 살고 죽는 것과 직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 곧 율법을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신 33:3). 주의 증거로 영원한 기업을 삼았다고 하였습니다(시 119:111). 여기 ‘야곱의 총회’란 전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이르는 말로 신약시대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2)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행복한 편을 택하였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눅 10:39)라고 한 사실입니다. 그 결과 온 천하에 주의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그녀가 행한 일도 따라다니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막 14:6-9).
왜 주의 발 아래 앉아 말씀을 들음이 행복한가?
① 성령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바로 베드로의 설교(말씀)를 듣는 순간에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을 찔렀습니다(행 2:37-38). 고넬료 가정에 모여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회중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4절에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성경)이 바로 성령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딤후 3:16).
② 그 결과 회개와 믿음이 생기고, 신앙고백이 일어나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가족이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행 10:46-48).
③ 마음이 열리고, 믿음이 생기고, 봉사와 헌신이 일어납니다.
루디아와 그 가정이 그러했습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집이 그러했습니다(행 16장).
④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이 열리고, 그 시로 다시 예루살렘(교회)을 향하여 움직입니다.
그리고 모인 자들에게 예수를 증거하게 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25-36)라고 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행복한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분명히 여수룬입니다. 우리는 행복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해야 됩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행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시내산에서 오시는 하나님, 세일산에서 일어나시는 하나님, 바란산에서 비취시는 하나님, 일만 성도 가운데서 오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행복입니다. 이스라엘(여수룬)이 행복한 이유는 충분하고 확실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주의 발 아래 앉아서 그 말씀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현재보다 1,000배나 더하는 축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너는 행복자로다
신 33:1-29 / 박조준 목사
오늘 주신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의 백성을 위하여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베푸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후 광야생활 40년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모세의 관심은 그칠 날이 없 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에게 부담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놀라운 인내와 온유의 자세로 그들을 대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하여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때 모세는 생명을 내걸고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만일 모세의 이와 같은 노력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벌써 멸망당했을는지도 모릅 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모세는 그가 누릴 수 있는 지극히 영광스러운 지위를 포기하고 그의 백성과 함께 고난의 길에 나선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이스라엘을 사랑했기 때문에, 은혜를 잊어버리는 이스라엘 사람이었지만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듯 그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목이 곧고 완악한 그의 백성을 계속 가르치며 인도하고 지도하였습니다. 모 세의 심중에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외에는 아무런 다른 생각이 없 었습니다. 이러한 모세가 죽을 날이 가까워온 것을 느끼게 될 때 자기 백성에 대한 관심이 더 컸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모세의 오직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그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 어가는 것을 보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모세는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렸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 거동할 수가 없이 되었 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저에게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제가 기억하고 있 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이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한 땅에 들어가게만 된다면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모세는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백성을 향하 여 하나하나 축복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모세는 위대한 입법자입니다. 이와 같은 모세가 이런 입장을 표현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은 일입니다. 모세는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며 감격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스라 엘아, 너희는 행복할지어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 앞에서 이 말 외에 무슨 말을 할 수가 있 었겠습니까? 아마 모세의 눈에는 자기를 계대(繼代)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도하게 될 새로운 얼굴이 떠올랐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수아의 지휘 밑에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가 가나 안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아말렉과 바산족과 싸워서 이긴 경험 도 가지고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는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모두가 군인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에 이르게 될 이스라엘 백 성을 생각하면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는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 은 곳을 밟으리라 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의 어려운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위안의 말을 하였습니다. 오늘 영적 인 면에서 이스라엘인 우리들에게 이 말씀이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 스도 안에서 새로워지고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1. 하나님의 백성은 행복합니다.이스라엘은 은총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모세 자신도 이들 을 생각할 때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모세는 이 백성이 비길 떼 없이 은총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했습니다. 그 당시 애굽 사람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강대국의 사람들로서 교양을 갖추고 있었고 세 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살았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초 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배운 것도 없었고, 교양미도 없었고, 세련되지도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육신의 눈으로 겉모양만 본 것이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 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특별히 택해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선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선택된 백성입니다. 우리가 거듭 나서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뽑힌 자요, 선택된 자입니다. 그리고 하 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돈으로 이 행복을 살 수 있 습니까?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권력으로 누릴 수 없 는 축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보다 얼마나 더 귀하다는 것 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강한 자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시고 우리의 찬양과 분깃과 영광의 대상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 에 깃든 행복은 이 세상 어디서도 찾을 수 없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 신이 죄사함받은 사실을 알고, 구원받은 사실을 알고, 영생얻은 사실을 알 때, 이 세상 어디 에서도 맛볼 수 없는 놀라운 행복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세상의 기쁨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원하는 기쁨은 세상 적인 데 있지 아니합 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기쁨은 진실하며 그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참 기쁨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환경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지만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어 떤 환경에서도 누리게 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형편없이 보일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측량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우리 가운데 낙심하신 분계십니까? 불 안해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속죄함 받으신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것을 믿으십니까? 주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그 능력의 오른팔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을 믿으십니까? 2. 우리는 행복한 마음을 소유하기 위해서 주님이 주신 특권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백성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 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사도 바울이 한 말입 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구원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의 집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능력의 손과 팔로 그들을 건져내신 것입니다. 우리도 사실 무서운 죄의 권세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더 이상 사탄이 우리를 지배할 수가 없고 묶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좇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악의 속박에서 구원을 받았고, 우리를 지배하던 정욕의 용광로에서 건져냄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사자에게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천사가 그 날 밤 애굽 땅 을 날아다니면서 애굽의 장자를 다 죽였지만, 문설주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 가족은 구원을 받 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사람들 보다 의로워서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양의 피를 보고 넘어간 것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우 리가 의로워서가 결코 아닙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바로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추적하고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이스라 엘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구원하고, 바로의 군대는 홍해 가운데 몰살시키고 말았 습니다.이러한 은혜를 힘입어서 하나님의 속죄함을 받은 사람들은 홍해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다시 그들의 원수인 애굽 사람을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유혹의 강에 서 이처럼 건져 주십니다.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주변의 죄악과 무서운 마귀의 추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십니다.백성들이 광야에 들어갔을 때 물이 없어 목이 타서 죽을 뻔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셔서 그들의 기갈을 면케 하시고 살려 주셨습니다. 굶 주림에 지쳐 죽게 되었을 때에도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리시어 그들을 먹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피곤해졌을 때 아말렉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이스라 엘의 편이 되어서 아말렉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는 여호수 아가 나가 싸울 때 뒤에서 기도했습니다. 그의 팔이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까지 내 려오지 아니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사 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영적인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 니다. 하늘의 떡으로 양식을 삼고 영원한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생수를 마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원수들이 사방에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나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는 그의 백성된 우리를 절대로 해칠 수가 없습니다. 사자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사 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자는 쇠고랑에 묶여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백성 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 원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자유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은 값없이 주신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늘 드려도 아쉬운 것밖에 없습 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 아들의 피로 값을 지불하고 사셨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의 많은 사람 중에서도 우리를 특별히 인 도하십니다. 3. 더구나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방패시오 영광의 칼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전투하 는 백성이지만 행복한 백성입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 다. 우리를 해할 자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경우에 우리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때로는 병에 걸려 눕지만 오히려 우리는 영혼의 건강을 누리게 됩니다. 사업의 실패 로 많은 물질의 손해를 보지만 다른 차원으로 볼 때 그로 인해 우리는 부하게 됩니다. 때로는 원치 않는 비난을 당하지만 우리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호로 인해 우리의 품성은 더욱 밝아집 니다. 어떤 때는 유혹의 곤경을 당하지만 그러나 악한 경향이 우리의 영혼에 침투하지는 못합 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옛 원수 마 귀는 이때도 힘을 써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리땅 위에 누가 당하랴 제 힘만 의지하면은 패할 수밖에 없으나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운다이 장수 누 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없으니반드시 이기리로다 4. 무기에는 방어하는 방패와 공격하는 무기가 또한 있어야 합니다.본문에 하나님은 너의 영광의 칼이로다 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 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 이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하며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쳐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무기는 없습니다. 이 칼을 차고 다니는 곳마다 승리가 보장됩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행복합니다. 네 대적이 내게 복종한다 고 했습니다. 승리의 확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7절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 넉히 이기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힘이 없으나 주님으로 말미암아 대적 마귀가 우리에게 복 종합니다 감사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영접하세요.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가 있고 천국의 행복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의 마음은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성 호를 찬양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너무 많은 일을 하셨고 지금도 그리고 앞 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은 또 다른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기쁠 때 다른 축복에 대한 확신을 가 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인자와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과거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게 되면 새로운 어려움 이 닥칠 때 능히 이것을 이길 수 있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또 다른 확신을 가질 수가 있습 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힘있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신 하나님은 앞으로도 우리를 그와 같이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모든 원수를 대적하고 하나님 우편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때까지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5. 우리 믿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다른 사람이 구원을 찾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만일 우리의 신앙이 거짓이라면 이런 것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소개한다면 우리는 다 사기꾼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행복하지 못하면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권한다면 그 것 역시 비극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에서 참된 행복을 찾았습니다. 우리의 행복 여부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 려 있기도 하려니와 우리의 신앙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 람은 공중의 새와 같이 행복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이 항상 감사와 찬송의 생활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복에 대한 선택권을 쥐고 있고,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참 행복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주 안에서 누리 는 행복을 맛보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주저하지 마시고 그 행복을 찾으세요. 하나님께서 여 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예비하신 안식처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마음 속에 평화가 강같이 흐르고, 기쁨이 생수처럼 솟아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심오한 평강과 행복을 맛보았을 때 그 기쁨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따라올 수도 없는 참된 행복이 있 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행복과 같은 행복을 맛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세상의 것이 좋고 훌륭하다고 해도 우리의 영 혼에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 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어찌하여 너희가 양식 아닌 것을 위 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사 55 : 1-20) 여러분, 그저 주님께 나아와서 주님께서 마련하신 포도주와 젖을 마셔 영혼의 배부름을 얻 고 참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여수룬의 행복(4)
신 33:1-25 / 석원태 목사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저 광야교회의 아버지였던 모세의 입에서 마침내 이스라엘 12지파를 향한 구체적 축복의 내용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여수룬의 행복 내용이었습니다. 여수룬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모세를 통하여 선언되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신명기 33장에서 여수룬 곧 이스라엘의 행복을 받아먹고 있는 중입니다.
Ⅰ. 여수룬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신 33:1-2).
① 시내산에서 오시고, ②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③ 바란산에서 비취시고, ④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신 33:1-2).
Ⅱ. 여수룬이 행복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를 생각하였습니다(신 33:3-4).
여수룬은 ①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고, ② 하나님의 수중에 있고, ③ 주의 발아래 앉아 주의 말씀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신 33:3-4).
Ⅲ. 여수룬의 행복의 실제적인 내용을 생각하기 원합니다.
1. 르우벤에게는 생명의 축복이 임하였습니다.
신명기 33장 6절에 「르우벤은 살고 죽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아비에게 죽을죄를 범한 자입니다.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자였습니다(창 35:22, 49:4). 그러나 「르우벤은 살고 죽지 아니하고 그 인수가 적지 않기를 원하도다」(신 33:6)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죽을 죄인으로 출생한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죄로 말미암아, 죽지 않고 영생을 받게 된다는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축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의 행복을 알려주는 축복의 진리입니다(롬 4:7).
2. 유다가 받은 기도응답과 감사의 축복입니다.
신명기 33장 7절에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그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로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유다지파에서 그리스도가 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백성을 구원하실 메시야적 승리의 축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창 49:9-10). 그 지파에서 다윗의 뿌리 곧 메시야께서 승리자로 나타났습니다(계 5:5). 문제의 초점은, ‘유다’라는 이름은 ‘찬송’이라는 뜻인데, 그의 찬송은 그 기도응답에 대한 감사를 뜻합니다. 유다의 기도응답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메시야를 그 후손으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3. 레위에게는 제사장의 축복이었습니다.
① 그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깨닫는 둠밈과 우림의 축복을 받았습니다(신 33:8). 둠밈과 우림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데 사용한 성물이었습니다. ② 또 저들은 하나님의 일을 전무(全務)하는 일로 인하여 혈통을 초월하고, 또 육신을 위하여 일하지 않는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물질적 삶의 풍족을 보장하고, 대적들로부터의 안정보장을 축복받았습니다(신 33:8-11).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는 복음의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둠밈과 우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은총의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신앙이 있는 자에게는 온갖 물질 축복과 가족적 복음의 은총과 대적들로부터의 승리가 보장되는 신약적 약속입니다.
4. 베냐민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보호의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신명기 33장 12절에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맞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 지파가 하나님의 성전 가까이 거하는 분깃을 차지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바로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라고 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가까이 거하는 자는 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요 ② 날이 맞도록 보호를 받을 자요 ③ 원수들의 음모와 공격에도 하나님의 어깨 사이에서 안전보장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중심으로 생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5. 요셉은 천천이요 만만을 더하는, 땅끝까지 이르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이 받은 축복은 하나님께서 호렙산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서 약속하신 은혜로 인하여 왔다고 하였습니다(신 33:16).
그 복은 땅의 축복(신 33:13), 하늘의 축복(신 33:14), 온갖 보물들의 축복(신 33:15)들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그가 받은 복은 모든 형제들의 축복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정수리에 임하는 복이었습니다. 그는 첫 수송아지 같다고 하였습니다. 으뜸가는 복, 제일가는 복이었습니다. 그 축복은 그 아들 에브라임에게 만만으로, 므낫세에게 천천으로 더하여 갔다고 하였습니다(신 33:16-17). 그는 장차 선민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예비한 자였습니다(창 45:). 하나님이 쓰시고자 예비한 사람은 큰 축복을 받고 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요셉의 삶에는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가 함께 하였습니다.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타고 있던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그 불꽃 가운데서도 가시떨기 나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출 3:2).
바로 십자가 고난의 은혜의 상징입니다. 가시나무의 은혜입니다. 사라지지 않는 은혜, 망하지 않는 은혜입니다. 오히려 그의 부활로 그 가시나무 십자가가 더 우뚝하게 세상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망하지 아니합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의 고난은 바로 사죄와 구원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철두철미하게 십자가 가시나무를 통과한 사람은 오늘의 ‘요셉’, 곧 ‘더함의 은총을 입은 사람’입니다.
6. 스불론은 무역의 문이 열리는 축복을 약속받았습니다.
신명기 33장 18절에 「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나감을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스불론은 해변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그 무역활동의 범위가 시돈까지라고 하였습니다(창 49:13). ‘너는 나감을 기뻐하라’는 것은, 그의 백성이 열린 축복의 문을 향하여 전진할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앞으로 나아감을 기뻐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온갖 생존경쟁에서 나아감을 기뻐하고 계십니다. 제자리에 머무는 것은 벌써 후퇴입니다. 현상유지는 축복이 아닙니다.
7. 잇사갈은 ‘의로운 제사’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명기 33장 18절 하반절에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농업에 종사할 축복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창 49:14-15). 그들은 비록 예루살렘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백성(이웃사람)’들을 불러모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이르게 하는 열심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9절에 보면 거기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저들은 비록 성전(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사람들을 불러모아 함께 성전예배에 참석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저들은 형식적인 예배가 아닌 의로운 제사를 드렸습니다. ‘의로운 제사’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를 중심한 예배’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예배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요, 산 제물로서의 예배입니다. 교회(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예배의 열정이 더하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 사람들에게 바다의 풍부한 것,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하는 복을 약속하였습니다(신 33:19). 뜻밖의 축복, 감추어져 있는 축복, 은밀한 축복이 주어진다고 하였습니다.
8. 갓은 용맹한 신앙과 순종의 축복을 누린다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33장 20-21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갓’이란 이름의 뜻은 ‘복됨’입니다. 그를 암사자 같다고 함으로 그의 호전성을 보여줍니다. 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전쟁하여 이겼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자기 기업으로 택하였습니다. 이는 저들이 지도자 모세에게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민 32:). 그래서 저들은 약속의 땅을 미리 분배받았습니다. 모세는 저들에게 「갓을 광대케 하시는 자에게 찬송을 부를지어다…」(신 33:20)라고 하였습니다. 천국은 세례 요한 때부터 침노를 당한다고 하였습니다. 용맹한 신앙과 순종을 가지고 영전(靈戰)에 뛰어드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축복이 우선적으로 주어짐을 보여줍니다.
9. 단은 바산에서 뛰어 나오는 사자의 새끼라고 하였습니다(신 33:22).
이는 전쟁을 좋아하는 그들의 호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9장에 나타난 야곱의 축복을 보면 단은 한 지파의 심판자요,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라고 하였습니다.
이 지파에 속한 삼손은 한 때 나라를 지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구원이 히브리서에 언급되고 있습니다(히 11:32). 그러나 이 지파는 사사시대에 우상숭배의 선구자들이 되었습니다(삿 18: ). 그리고 분열왕국시대에 와서는, 이 지역이 여로보암의 금송아지를 섬기는 우상종교의 중심지가 되어버렸습니다(왕상 12:28-30). 이상하게도 요한계시록 7장 4-8절에 보면 14만 4천인의 수를 나타내는 지파들 가운데 ‘단’이 빠져 있습니다.
10. 납달리는 은혜가 족하고 복이 가득하다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33장 23절에 「납달리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은혜가 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방과 남방을 얻을지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모자람이나 불만이 없는 족함,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는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복음적인 축복을 연상하게 합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예수께서 천국복음을 제일 먼저 전한 장소가 이 납달리 지역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합니다.
11. 다복한 행복의 약속을 받은 아셀지파를 봅니다(신 33:24-25).
그 이름의 뜻이 ‘행복’입니다. 그는 그 이름대로 명실공히 여러 유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① 먼저 다자(多子)한 축복이라고 하였습니다(신 33:24). ② 형제들에게 화목하고 기쁨이 되는 복이라고 하였습니다(신 33:24). ③ 그 발이 기름에 잠긴다는 말은 물질의 축복입니다(신 33:24). ④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된다’고 함은 절대적인 안전보호의 축복을 받는다는 말입니다(신 33:25). ⑤ 장수의 축복입니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 33:25)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때를 따라 주시는 돕는 은혜의 축복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은혜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누구든지 복을 좋아합니다. 또 복 받기를 좋아합니다. 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복받기를 원하는 일반적인 심리를 보더라도 결코 복이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복은 하나님 창조의 선물이요, 또 언약적 선물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획적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축복하자고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전모의가 있었습니다(창 1:26-27).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창조하셨습니다. 결코 복은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물론 다른 신들의 산물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하실 때, 이미 복을 주시려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복의 본질적 정체는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창 1:1)란 말은 ‘바라(ar"b;)’입니다. 이는 ‘벨리트(tyrB])’ 곧 ‘언약’이란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라’에서 ‘바락(hk,r:b;)’이란 말이 파생되었습니다. 그 뜻은 ‘무릎을 꿇는다’, 혹은 ‘경배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하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 언약하기를 우리가 우리 형상대로 창조할 인생은 우리(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피조물로 만들자고 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인생으로 만들자고 한 것입니다. 그 자체가 바로 복의 본질적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솔로몬도 고백하기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고 하였습니다. 여기 ‘본분’이란 말은 ‘전부’란 뜻입니다. 하나님 경외를 위하여 존재함이 인생의 전부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히 6:13-14)고 하였습니다. 인생이 복받고 사는 것을 하나님 자신 편에서 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축복의 신적 필연성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 축복의 약속을 그대로 받고 말았다고 그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히 6:15). 하나님은 모세의 입을 통하여 여수룬의 축복을 예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 편에서 원하셨던 축복의 신적 필연성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수룬(이스라엘)은 복을 받고 만 것입니다. 그 축복은 각 지파마다 실로 다양했습니다.
신약의 우리 경우에는 구약 어느 지파에 속한 축복으로 분류되지 아니합니다. 신령한 이스라엘, 온 이스라엘(롬 11:26)이 받은 공유적 구원의 축복으로 종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중심하고 구약 이스라엘 12지파들에게 약속된 다양한 축복들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언약적(계획적) 축복은 선택받은 여수룬(이스라엘)을 통하여 예언되고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였으면 그대로 되고 마는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여수룬의 행복입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고, 하나님께 찬송하고 경배하기 위하여 지음받은 여수룬이 행복한 자들이란 말입니다. 바로 역사상에 축복받은 모든 개인과 가정과 민족이 이 위대한 성경의 예언을 웅변적으로 입증하고 있지 않았던가! - 아 멘 -
언약에 근거한 아낌없는 축복
신명기 33:1-17 / 행복한 교회
왜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기 전에 시내산 사건을 먼저 언급했을까요?
지도자의 마지막 말은 축복이어야 합니다. 죽음을 앞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축복합니다. 그는 축복하기 전에 먼저 과거에 하나님이 율법을 수여하시기 위해 시내산에 강림하셨던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사건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누릴 모든 은혜와 복은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모세는 르우벤 지파의 수가 줄어들지 않고 보존되기를 간구합니다. 이는 요단 동쪽 땅을 먼저 분배받은 이유로 가나안 정복 전쟁의 선봉에 서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다 지파에게는 지도자적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합니다. 언약에 근거한 축복 메시지는 비전와 소망, 위로와 힘이 됩니다.
내가 언약의 말씀에 근거해 축복하며 소망을 전할 지체는 누구인가요?
모세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합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 죽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된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탓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기 전에 그들을 원망하고, 욕하고 미워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모세는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오늘 이 장면을 깊이 묵상해 우리의 삶에도 적용해야 합니다. 축복은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이 뭡니까? 복의 근원이 되시는, 유일하게 복을 주실 수 있는 주 하나님께 이미 약속하신대로 복을 내려 주시라고 복을 비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면 누가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주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 되시며, 복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며, 그분의 약속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축복, 즉 복을 빌 수 있습니다. 자녀들을 축복할 수 있고, 형제자매들을 축복할 수 있고, 이웃들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레위 지파가 담당한 직무는 무엇이며, 모세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간구하나요?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조차 복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레위 지파는 폭력성과 잔인함으로 인해 나뉘고 흩어지는 저주를 받았습니다(창 34장; 49:5-7). 그러나 그들의 흩어짐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서 율법을 가르치고 예배를 주관하는 거룩한 축복으로 반전됩니다(10절). 하나님은 우리의 수치스러운 경험조차 그분 나라와 영광을 위해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모세는 땅의 기업이 없는 레위지파가 풍족함을 누리고 직무 수행에 방해받지 않도록 간구합니다. 베냐민 지파는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와 사랑을 입고, 요셉 지파(에브라임.므낫세)는 풍성한 산물과 힘이 있어 지속적인 번성과 영예를 누리도록 축복합니다.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복은 인색하지 않고 항상 차고 넘칩니다.
내 수치와 약점이 어떻게 쓰임받을 수 있을까요?
레위지파는 세겜성 사람들을 복수심에 모두 다 죽여 버리는 실수를 했었습니다. 그들 안에 잔혹하고 폭력적인 기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의 아버지 야곱이 임종 전에 그를 위해 축복할 때 “그 노여움이 혹독하고, 그 분노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들을 야곱 자손 사이에 분산시키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흩어 버릴 것이다.”(창 49:7)라고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축복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470여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레위는 그때와 다른 “레위에게 주님의 둠밈을 주십시오. 주님의 경건한 사람에게 우림을 주십시오.”라는 축복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인생이 바뀌었고, 변화 되었습니다. 잔혹하고 폭력적인 기질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명자로 살아가는 열심히 바뀐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가운데 흩어져야 했던 것이 오히려 이스라엘 자손들을 말씀으로 이끄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 심지어 수치와 약점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주님이 선하신 뜻대로 살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주님만이 복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복의 근원인 것을 잊지 않게 하소서. 주님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삶인 것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이 주신 복으로 기쁘게 사명을 감당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