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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지 않는 남자
-수요일-
갑자기 멍해졌다. 이제 뭘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다 병욱이 생각났다. 평소에 잘 마시지도 않는 술 생각도 났다. 병욱이가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인지, 병욱이가 제일 친한 친구라서 생각난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 아무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병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병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뭔 일이냐? 저녁도 다 지나서?”
전화 너머로 텔레비전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듯 했다.
“나 미정이랑 헤어졌어.”
나는 약간 뜸을 들인 후 말했다. 맞은편에 미정이 남긴 카푸치노가 하얀 머그잔에 가득 차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거품이 채 가시지도 않았다. 문득 왼손이 어색해져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들었다. 커피 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사이에 병욱이 말했다.
“미친놈. 이제야 정신 차렸구나. 진즉에 그럴 것이지. 그런데 이번엔 진짜지?”
“어.”
“지금 어디냐?”
“신촌에 카페.”
커피 잔을 힘없이 내려놓으며 내가 말했다.
“아니, 집 근처 놔두고, 왜 헤어지러 신촌까지 갔어?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술이나 한잔 할래?”
“그럴까?”
“그럴까가 뭐야 그럴까가. 당연히 그래야지. 얼른 이리로 와.”
병욱이는 평소에 미정이가 마음에 안 들었다. 헤어진 마당에 나대신 실컷 욕할게 분명했다.
“근데 많이는 못 마셔. 내일 출근해야지.”
“미친 새끼. 그건 니 상태보고 이 형이 판단한다. 근처에 와서 연락 바란다, 친구야.”
눈을 한번 감았다 뜬다. 조심스럽게 앉고 있던 의자를 뒤로 빼내고 일어섰다.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까페 밖으로 나왔다. 병욱이가 살고 있는 봉천동으로 가기 위해 전철역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쩌다 고개를 드니 길가에 활짝 핀 목련이 가로등에 비추어 눈이 부셨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무리가 그 아래서 왁자지껄 떠들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갑자기 바람이 불며 3월 말의 차가운 밤공기가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왠지 똑바로 걷고 싶었고, 마주 오는 사람들이 단지 나를 잘 피해가기를 바랐다.
카페엔 미정이 먼저 와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하니 자기도 방금 왔다고 했다. 갓 나온듯한 카푸치노 잔을 두 손으로 감싸들고 있었다. 봄이 왔다고는 하지만, 아직 밤공기가 찼다. 나도 모르게 손을 한번 비비고, 가방을 내려놓으며 커피를 주문하고 온다하며 자리를 떴다. 웃으며 얘기하는 여자 점원에게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억지웃음인지 알 길은 없지만 미정의 웃음기 없는 얼굴이 대조적으로 떠올라 고개를 돌려 미정의 뒷모습을 슬쩍 바라봤다. 기다리는 사람이 별로 없어 커피가 나올 때까지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주문 받은 점원이 커피가 나왔다며 다시 한 번 웃는다. 자리로 돌아오니 미정의 하얀 얼굴이 창백해 보인다. 시선은 창밖을 향하고,두 손은 여전히 머그잔을 감싸고 있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저녁은 먹었어?”
서로 연결되지도 않는 질문을 연달아 물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던진 질문이 미정의 대답이 늦어지면서 상황을 더 어색하게 만들었다. 미정은 별일 없었고, 저녁은 아직 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말을 이으며 ‘헤어지자’고 했다. 미정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했고 입은 억지로 다물고 있는 듯 보였으며, 나는 약간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두 번 다시 서로 연락하지 말자고 했다. 휴대폰에서 연락처도 지우고, 이메일도, 메신저도,인터넷에서도 가능한 서로의 흔적을 다 지우자고 했다.
우리는 전에도 헤어졌었다. 그 때는 누가 먼저 연락해서 다시 만났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슴이 조금 답답해져서 한 숨을 한번 쉰다.
“알았어.” 나는 짧게 답했다. 길게 얘기해서 좋게 결론이 난다해도 석 달 쯤 뒤에 다시 헤어짐을 얘기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스쳐간다.
미정의 두 눈이 나의 눈과 잠깐 잠깐 마주치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지내라는 말을 하며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보이더니 카페 문으로 향했다. 미정이 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 커피 잔만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내게 커피를 주문 받은 점원이 미정에게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히 가세요.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저 점원은 오늘 하루만 저 얘기를 몇 명에게 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교육 받은 대로 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야 하는 것이 지겹지 않냐 하고 참견하고 싶었다. 그러면 점원은 그게 하기 싫으면 저 그만 둬야 하는데요? 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맞는 말이다. 어쩌면 미정과 나는 반복되는 어떤 말들이 지겨워서 서로 그만 뒀는지 모르겠다.
처음 몇 분간 나의 심정은 조각하지 않은 통나무와 같았다. 미정과 나의 지난 삼 년 간의 관계는 지금부터 어떻게 생각을 다듬어 가느냐에 따라 굉장히 달라지겠지. 애써 나쁜 기억들을 파내어 멋지고 아름다운 추억들로만 이루어진 조각품을 만들어 내려고 병욱에게 가는 내내 무진 애를 썼다. 때론 순간적으로 솟구쳐 오르는 화에 조각품이고 뭐고 도끼로 쳐부숴 버리고 싶은 감정을 꾹 누르며 말이다. 미정에게인지 나 자신에게 화가 났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늘 헤어진 뒤에는 사랑을 시작할 때처럼 단순명료하지가 않다.
마침 전철이 병욱이 사는 곳에 도착했을 때 병욱에게 전화가 왔다. 전철에서 내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철에서 나는 소리가 시끄러워 일부러 크게 말했다. 평소의 나라면 ‘어 왜’ 라고 말했을 텐데 달리 나오는 말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 현규야, 미안한데 오늘은 안 되겠다.” 병욱이 또 말했다. “아, 갑자기 경희가 온다네. 얘는 완전 지 멋대로야. 근데 너도 알잖아. 우리도 요즘에 약간 소원해진 거. 자기도 꽃피는 춘사월에 혼자 지내고 싶지는 않은 거겠지 뭐. 아니면 오빠의 남자 맛이 그리워졌거나. 크크.”
“그래. 그럼 내일은 괜찮아?” 나는 비난을 퍼부어도 시원찮을 판에 내일 약속을 잡는다.
“친구야. 내일은 내가 경희를 내 쫒는 한이 있더라도 너랑 술 마셔줄게. 우리 현규, 형이랑 약속할까? 미안해, 크크. 야, 어디서 방황하지 말고 일찍 집에 들어가라.”
병욱이 약속을 어긴 것, 조금 더 엄밀하게 얘기하자면 약속을 약 24시간 정도 미룬 것에는 어떠한 감정도 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병욱과 전화를 끊고 난 뒤 이상하게도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일찍 집에 들어가라’
‘이 자식이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갑자기 화가 치민다.
계단을 천천히 올라 전철역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몇 개의 커피 가게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들어가지 않기로 한다. 약간의 허기가 느껴져, 갈 곳이 떠오를 때까지 어디에서 무엇을 조금 먹기로 했다. 도로변 인도를 걷다가 차들이 쌩쌩 달리는 꼴이 보기 싫어 얼굴을 찌푸리며 골목으로 들어가 시장으로 접어든다. 병욱과 함께 가봤던 족발 집이 눈에 들어왔지만 혼자 족발이나 뜯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족발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 옆 과일 가게에 진열된 딸기 박스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서 보니 빨갛게 잘 익은 딸기가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문득 딸기를 좋아하는 누나 생각이 났다. 어렸을 때 엄마가 딸기를 사오는 족족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곤 했고, 누나는 시치미를 뗐다. 옳다 거니하며 누나 집에서 신세를 질 요량으로 딸기 두 박스를 사고 서둘러 시장 골목을 벗어나 다시 전철역이 있는 도로변으로 나왔다. 택시를 타고 누나 집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만은 어렴풋이 알았다. ‘오늘은 정말 집에 가기 싫다.’
-목요일-
이른 아침, 나는 평소와 다른 부산스러움에 문득 잠을 깼다. ‘아, 어제 누나네 집에서 잤지.’ 머리맡에 놓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간밤에 아무에게도 연락은 없었다. 잠시 후 거실에서 달가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제 밤 매형과 마신 맥주 병 치우는 소리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살짝 열고 밖으로 나가자, 누나는 상을 닦으며 바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일어났니?”
누나는 행주를 든 한 손을 움직이며 고개만 내 쪽으로 돌리고 말했다.
곧 상을 부엌 한쪽 귀퉁이 세워놓고, 안방으로 들어가 매형을 깨웠다. 매형에게는 세 살배기 조카를 깨워 얼른 씻기라고 말했다.
“현규 너도 출근하려면 얼른 씻어라.”
문턱에 가만히 서서 눈을 비비고 있던 내게 말했다.
나는 누나 말대로 ‘얼른’ 씻고 나와서 대충 머리를 말렸다.
매형이 준 큼지막한 트레이닝복을 벗고, 고이 걸어둔 옷을 다시 주섬주섬 입었다. 그 사이 매형은 화장실에서 조카를 씻기고 있었고, 누나는 부엌에서 아침상을 차리고 있었다. 여느 맞벌이 부부의 아침일상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는 식탁에는 조카도 같이 앉아서 밥을 먹었다. 정확히는 누나가 밥을 먹기 싫어하는 조카에게 밥을 떠먹여주고 있었다.
“처남, 오늘은 집에 갈 거지? 여자 친구랑 헤어졌다고 집나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 매형이 반찬을 떠서 크게 벌린 입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어제 밤에 내가 그렇게 말했었나?’ 미정이와 헤어졌다는 사실과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사실이 서로 인과관계가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매형이 식탁에서 던진 말로 인해, 이 두 사실은 서로의 원인과 결과로 둔갑했다.
“어이구 우리 동생, 고등학교 때도 안하던 방황을 왜 서른 넘어 하시나.” 누나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누나는 집에 들어가기 싫었던 적 없어?” 나는 투정부리듯 말했다. 아무래도 두 개의 사건이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었다.
“니 매형이 술 먹고 집에 늦게 들어올 때 집에서 나가고 싶은 적은 있어도, 집에 들어가기 싫었던 적은 없는데?” 누나는 매형과 나를 번갈아보면서 말했다.
뒤이어, 누나와 매형 사이의 이런저런 대화를 들으며 나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식사를 거의 마칠 때, 조카가 식탁에 있는 숟가락을 손으로 쳐서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이목이 그쪽으로 집중됐다.
“난 먼저 일어날게.” 마지막 밥술을 입에 넣고, 입안에 음식물을 씹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방에서 가방을 챙겨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나의 두 발은 다른 여러 발들 사이에 파묻혀 바쁘게 전철역으로 향했다.
누나네 집에서 학교까지는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야하고, 거리도 멀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도착해서, 교무실 책상에 앉으니 교무실 한쪽이 소란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소란의 주인공은 음악을 가르치는 이목련 선생님이었다. 주변의 무리에 껴서 얘기를 들어보니, 이목련 선생님 집에 어제 도둑이 들었다는 것이다. 학교 근처의 오피스텔에 혼자살고 있는 이목련 선생님은 무섭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글쎄, 장롱이랑 서랍을 다 헤집어 놨더라구요. 바닥에 옷가지랑 책들이 막 흩뜨려져 있는데,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이목련 선생님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이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말을 계속 이어갔다.
“돈은 안 없어졌는데, 애초에 집에 돈이 없었으니. 좋은 옷 몇 벌이랑, 아 글쎄, 피아노를 망가뜨려놨어요. 건반 몇 개를 뽑아놨지 뭐에요. 뭐 이런 몰상식한 인간이 다 있는지.” 이목련 선생님은 어느덧 씩씩대고 있었다.
다른 선생님들이 그래도 사람이 없었으니 다행이라며, 그 순간 집에 있었으면 어찌할 뻔 했냐며 이목련 선생님을 진정시켰다.
얼마 후, 교무실로 교감선생님이 들어오자, 나는 곧 내 자리로 돌아왔다. 이목련 선생님은 교감선생님에게도 도둑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이목련 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다른 선생님들이 하나 둘씩 교무실로 들어왔다. 교감 선생님은 아침 조회 시간에 몇 가지 전달 사항을 안내했다. 얼마 뒤, 1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선생님, 옷이 어제 입었던 옷이랑 똑같아요.” 칠판에 문제를 적으려 뒤돌아 서있는 동안 누가 말했다.
“와, 어제 집에 안 들어 가셨나 봐요.” 뒤이어, 다른 목소리들이 계속 들려왔다.
“어디서 주무신 거예요?” 목소리들은 교실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딱 보면 모르겠냐? 여자 친구네지.” 까르르, 교실에 웃음이 터졌다.
나는 침착히 칠판에 연습 문제를 다 적고 돌아섰다.
“음, 선생님은 이 옷을 사랑해요. 그래서 똑같은 옷이 집에 두벌 있는데...”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고 있었다.
“한 벌은 여자 친구 집에 놔두셨나 봐요.” 교실은 다시 한 번 웃음바다가 되었다.
교복 입은 여고생 집단을 말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세희 너, 이리 나와서 이 문제 풀어. 틀리면 아주 혼날 줄 알아. 입만 살아가지고.” 나는 어떻게든 이 분위기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세희가 입을 비죽대며 교실 앞으로 나왔다. 학생이 문제를 푸는 동안 수업종이 울렸다.
퇴근하고 예정에 없던 학교 근처 백화점에 들렀다. 아까 일을 생각하면, 내일도 같은 옷을 입고 출근할 수 없었다. 봄 옷 세일이 한창이었다. 여러 가지 옷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내일 출근할 때 입을 옷이다. 지금 입은 체크무늬 셔츠와 검정색 바지와 달라 보이는 민무늬 셔츠와 베이지색 바지를 한 개씩 골랐다. 문득 혼자 쇼핑하는 것이 오랜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체크무늬 셔츠도 미정이 골라줬던 것인데.’ 잠시 그 때 기억이 떠올랐다.
피팅룸에서 입고 나온 새 셔츠와 바지는 잘 어울렸다.
“사이즈는 잘 맞으세요? 요즘 잘 나가는 바지에요. 약간 색상이 짙게 나와서 다른 베이지색보다 컬러감이 더 좋아요.” 여자 점원이 상냥하게 말했다.
“이걸로 주세요.” 애초에 ‘컬러감’은 상관없었다.
저녁 7시가 조금 넘어서, 병욱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전화해보니, 병욱은 이제 퇴근해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우리는 종종 가던 고깃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고깃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의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손가락으로 브이 표시를 하고, 입으로는 두 명이라고 말하며, 식당의 한 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몇 테이블 차 있지 않았다. 이윽고 아주머니가 물과 물수건을 가지고 왔다.
“삼겹살 2인분하고 소주 한 병 주세요.” 나는 병욱이 오기 전에 미리 음식을 시켰다. 아주머니는 소주와 잔 두 개를 먼저 내오셨다. 고기가 나올 때 쯤, 병욱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건 뭐냐? 내 선물이냐” 병욱이 인사도 하기 전에 쇼핑백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일 입을 내 옷이다. 오늘은 니네 집에서 신세 좀 져야겠다.” 하고 나는 선수를 쳤다.
“야 인마, 가출은 10대 때 해야 멋있지. 어제는 누나 집에서 잤다며?” 병욱은 입을 실룩대며 말했다.
“재워주기 싫으면 말구.”
“이 새끼, 그새 삐쳐가지고. 야, 우리 나이에 사람들은 세상살이에 지쳐 출가를 해요. 가출이 아니라.” 병욱은 고기를 불판에 올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미정이는 이제 완전히 정리된 거지? 난 걔가 겨울철에 코트만 입는 것만 봐도 마음에 안 들어. 아니 어떻게 사람이 코트만 입어. 코트만 옷이야? 자켓도 입을 수 있고, 점퍼도 입을 수 있고,그냥 거적때기도 걸칠 수 있는 거지. 안 그래?” 하고 말하며 병욱은 소주를 땄다. 병욱이 말처럼 미정은 겨우내 코트만 입고 다녔다.
“점퍼 입으면 둔해 보여서 싫다고 하잖아.” 내가 미정의 말을 옮겨서 말했다.
“둔해 보이긴, 요즘에 슬림하게 나오는 옷들이 얼마나 많은데. 걔는 그래서 안 돼. 나중에 결혼해서 애 낳으면, 애한테 쫄쫄이만 입힐 거야, 걔는. 하여튼 난 ‘꼭 이래야만 해’ 하는 인간들이 제일 싫어.”
“다음에 미정이 만나면 내가 꼭 전해줄게.” 나는 웃으며 농담으로 말했다.
“그래, 꼭 전해줘라, 이 새끼야. 크크.” 내 농담을 눈치 챘는지, 병욱 역시 웃으며 답했다.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곧 시작하는 프로야구에서 어느 팀이 잘 할 것인지, 요즘 아이돌 중에는 누가 괜찮은지, 어느 주식이 많이 올랐는지, 하는 시덥지 않은 얘기들. 얘기는 돌고 돌아 여자 얘기로 돌아왔고, 그 사이 취기가 올라왔다.
“내가 경희한테 부탁해서 소개팅 잡아줄게. 경희가 이제 곧 직장 때려치울 거거든. 새 직장 잡고, 거기서 갠찮은 여자를 떡하니 찾아서, 너 소개시켜주라고 할게.” 병욱은 조금 취했다. ‘괜찮은’을 ‘갠찮은’으로 발음한 것이 증명했다.
“내 걱정 말고, 너나 경희 씨랑 잘 해봐. 너 같은 애를 다시 만나주는 것만 해도 좋은 사람이란 증거야.” 내가 조금은 약을 올리며 말했다.
“이 새끼가, 이 형이 그걸 얼마나 잘하는데, 그게 증거다 이 새끼야. 어제도 그냥 확, 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 이러면 형이 재워줄 수가 없어요. 크크.” 병욱은 취기에 붉어진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알았어. 알았어. 아저씨, 그거 참 잘해요. 이제 집에 가자.” 나는 병욱을 달래고는, 계산서를 집었다.
-금요일-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렸다. 병욱은 아직 자고 있었다. 거울 옆에 드라이어가 보였으나, 병욱이 자는데 방해가 될까봐 켤 수는 없었다. 조용히 쇼핑백에서 새 옷을 꺼냈다. 바지를 먼저 입었는데 지난밤 과음, 과식을 한 탓인지 배가 나와서 약간 허리가 약간 타이트한 느낌이었다. 새 셔츠를 바지 안에 넣어 입고, 예전 바지에서 허리띠를 빼서 찼다. 머리를 마저 말렸다.
병욱을 깨웠다.
“야, 일어나서 출근해야지. 난 나갈 준비 다 했어.”
병욱이 눈을 반쯤 떴다.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벌써 나가냐? 너 이따가는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는데. 어떻게 할지.”
“그냥 집에 가, 새끼야. 오늘은 안 재워준다. 경희 올지도 몰라.” 병욱은 머리를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냥 하던 대로, 살던 대로 살아라. 너 예전에 그 누구냐, 전에 걔랑 헤어졌을 때에는 담담했잖아.방황은 너랑 안 어울려. 사람이 일관성 있게 살아야지, 사람이.”
“난 간다. 너도 출근해라.” 나는 대답을 피했다.
이틀간 입은 옷은 병욱의 집에 두고 밖으로 나갔다.
어제처럼 전철을 타고 출근하는 내내 ‘오늘은 어디서 잘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잠시 ‘쓸데없는 오기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늘도 집에 가지 않기로 했다. 마침 금요일이라서, 내일은 출근하지 않아도 됐다. ‘옷 갈아입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네.’ 속으로 생각했다. 잠잘 곳을 찾지 못하면,오늘은 모텔에서 자기로 했다. ‘모텔에 혼자 가본 적이 있던가.’ 하는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전철이 학교 근처 정거장에 도착하였다.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는 바람에 머릿속의 생각이 흩어지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학교에서는 아직도 이목련 선생님의 집에 도둑이 든 사건이 화제였다. 이목련 선생님은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고, 경찰이 CCTV를 분석 중에 있다고 했다. 어제는 무서워서 친구네 집에서 잤다며,아침부터 호들갑을 떨었다.
“도둑이 또 오면 어떡해요. 이사를 가야하나.”
‘집에 안 들어가는 사람이 나 말고 여기 한 명 더 있네.’ 하고 자리로 돌아오며 나는 슬그머니 웃었다.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기지개를 펴며 복도를 따라 운동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낮에는 이제 따뜻해져서, 밥 먹고 오후 수업시간에는 선생이나 학생이나 나른했다. 복도 끝의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으려고 주머니의 동전을 뒤적거릴 때였다.
“저기 이 선생님, 잠시 만요.” 나는 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나를 부른 것은 이목련 선생님이었다. 키가 170 센티미터 정도로 큰 이목련 선생님이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네, 이 선생님, 무슨 일이시죠?” 나는 바지에서 냉큼 손을 빼며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이 선생님한테 부탁이 있는데요. 혹시 집에 잘 안 신는 신발 같은 거 있으면 몇 켤레 가져다주실 수 있으세요? 아무래도 여자 혼자 사니까 무섭기도 한데, 다른 선생님들이 현관에 남자 신발 몇 개 가져다 놓으라고 하셔서.” 이목련 선생님은 짐짓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이제는 닳아서 잘 안 신는 구두도 있구요, 헤져서 잘 안 신는 운동화도 있어요. 제가 가져다 드릴 수 있어요.” 하고 선심 쓰듯 말했다.
“다음 월요일에 출근할 때 가져다 드릴게요.” 이 때까지, 나는 집에 가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요, 그럼 제가 너무 죄송해서 안 되구요. 이따가 퇴근하실 때 제가 댁에 같이 가서 신발만 받아가도 되는데, 오늘 퇴근하시고 곧장 집으로 가세요?” 이목련 선생님의 이 말에 갑자기 나는 집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고민하다가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 아니요. 저는 오늘 다른 약속이 있어서요. 제가 월요일에 꼭 가져다 드릴게요.” 이목련 선생님은 작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짧게 끄덕이더니, 감사하다고 말했다. 나는 살짝 목례를 하며, 커피를 한잔 뽑으려던 생각도 잊은 채 교무실 쪽으로 향했다.
이제 말을 뱉어놨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번 주말에는 꼭 집에 가야 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고집부리지 말고, 이 참에 집에 들어갈까, 하고 고민도 했지만, 나는 주말까지 더 버텨보기로 했다.
미정과 가끔 가던 신촌의 모텔로 향했다.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신촌 거리는 젊은 대학생들로 보이는 무리가 많았다. 며칠 만에 이 거리를 혼자서 다시 걷고 있다는 사실보다, 혼자 모텔로 향하고 있는 내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모텔에 혼자 가는 사람이 있을까? 신나게 놀고 모두들 집으로 가겠지? 집에는 왜 가는 걸까? 집 말고 갈 데가 없으니까? 그럼 집 말고 갈 데가 있으면 집에 안가도 되는 거지.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했다. 나는 집 말고 갈 모텔이 있단 말이다.
“방 없어요.” 모텔의 카운터에 앉아 있는 아저씨가 말했다.
“아니, 금요일 초저녁에 와서 숙박할 방을 찾으면 우린 어떻게 해요. 이따가 11시 넘어서 한번 와보세요. 대실하는 손님들 나가면 숙박 놓을 방 나올지도 모르니까.” 아저씨는 짜증을 애써 숨기는 태도가 역력했다. 그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은 나는 터벅터벅 모텔에서 나왔다. 나를 제외한 모든 세상이 합리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른 ‘합리적인’ 모텔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근처에 신발가게가 보여서 무작정 그곳으로 향했다. 이목련 선생님에게 헌 신발을 주게 되면, 왠지 새 신발을 사놔야할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 남자 운동화 코너가 어디인지 살펴봤다. 다양한 스타일과 브랜드의 운동화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학교에 신고 다닐 것은 아니고, 그냥 운동할 때나 주말에 편하게 신을 만한 신발을 몇 개 골랐다. 점원을 불러280 사이즈로 신어볼 수 있냐고 물었다. 주황색 유니폼을 말끔하게 입은 점원은 옆에 쌓은 신발 상자들 사이에서 280 사이즈를 찾아내 내 앞에서 신발을 꺼내어 주었다.
“천천히 신어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말씀해주세요.” 하며 다른 손님이 찾는 곳으로 갔다.
나는 운동화 몇 개를 신어보고, 그 중에 괜찮아 보이는 것으로 한 개를 골랐다. 회색 바탕에 파란색으로 브랜드 로고가 적힌 요즘에 유행하는 스타일의 운동화였다. 손을 흔들어 아까 그 점원을 불렀다. 점원이 급히 내쪽으로 왔다.
“사이즈는 잘 맞는데, 혹시 이거 다른 색깔도 있어요?” 하고 물었다. 점원은 고개를 저으며, 이 디자인으로는 이 색깔 밖에 안 나온다고 하였다. 색깔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혹시나 해서 그냥 물어본 말이었다. 나는 신발 상자가 든 쇼핑백을 들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토요일-
점심때 쯤 현규에게서 전화가 와서,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나는 대뜸 어제는 어디서 잤냐고 물으니, 모텔에서 잤다고 했다. 나는 지금 경희랑 같이 있는데, 오고 싶으면 이쪽으로 오라고 했더니,현규는 그럼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밤에는 혹시 재워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나는 그냥 모텔에서 살라고 답하며 단칼에 거절했다. 나는 한마디 덧붙이며 전화를 끊었다.
‘그냥 집에 가, 이 미친놈아.’
-일요일-
동생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일요일 오후가 다 지나서 해가질 무렵이었다.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 채널만 돌리고 있는 남편을 설득해서 아파트 근처 마트에 왔다. 남편은 아들을 태운 유모차를 밀고, 나는 카트를 밀고 다니며 장을 보고 있었다. 현규는 혹시 오늘 밤 집에 와도 되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자고 가려고? 너 아직도 집에 안 들어갔어?’ 하고 물었다. 휴대폰 너머로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나는 다시 물었다. ‘어제는 어디서 잔거야?’ 현규는 병욱이네서 잤다고 했다.옆에서 남편이 ‘처남 아직도 집에 안 들어갔대?’ 하고 물었다. 나는 잠시 카트를 멈추고 현규에게 얼른 집에 들어가라고 종용했다. 시골에 부모님한테도 알린다고 협박까지 했다. 현규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다시 현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현규는 받지 않았다.
‘곧 들어가겠지. 자기가 집에 안가고 어디 갈 거야?’ 남편이 나를 안정시키려고 말했다.
-월요일-
어제 현숙이와 늦게까지 술을 홀짝이며 노닥거렸더니, 아침에 늦잠을 잤다. 고등학교 동창인 현숙이가 서울로 올라와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부쩍 더 친해졌다. 얼마 전 집에 도둑이 든 후로는 나는 현숙이의 자취집에서 얹혀살고 있다. 그것이 계속 같은 학교에 총각 선생님을 소개시켜달라고 하는 바람에 밤늦게 까지 얘기가 길어졌다. 일어나자마자, 헐레벌떡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현숙이가 어제 밤에 했던 말이 출근길에 자꾸 떠올랐다. ‘그 총각 선생님, 니가 관심 있는 거지?’ 나는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며, ‘그 선생님, 여자 친구 있을 걸?’ 하며 맞받아 쳤다. 학교에서 유일한 총각인 그 선생님은 따르는 여학생들이 많을 정도로 인물이 괜찮았다. 그런 선생님과 섣불리 소문이 잘 못 났다가는 학교 안이 시끄러워질 것이 분명했다.
학교에 도착하여, 교무실로 들어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현규 선생님은 아직 오지 않은 듯 했다.교무실을 가로질러 그의 빈자리를 지나, 내 책상에 도착했다. 의자 옆에 웬 쇼핑백이 하나 놓여 있었다. 쇼핑백 안에는 신발 상자가 들어 있었다. 꺼내어 보니, 새 남자 운동화였다. 회색 바탕에 큼지막하게 N 로고가 파란색으로 적혀있었다.
‘이현규 선생님이다.’
‘새 신발을 사다 주셨구나.’ 입가에 조그마한 웃음이 번졌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남자 신발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끝-
첫댓글 해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무작정 부인해보자' 였습니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하루 일과가 끝나고 집에 가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자친구와의 이별로 시작하는 것도 그래서 생각한건데, 하지만 그것이 집에 가지 않는 직접적인 이유로 보이지 않게, 불확실하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사실은 병욱이 약속을 어기며 '집에 들어가라'라는 말에 대한 반발심이 촉발한 것이고, 그 반발심은 이별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현규 자신도 집에가지 않는 이유를 정확히 모르는 것이 핵심입니다.
누구나 그럴때가 있거든요. 비합리적으로 행동할 때가. 그걸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제 소설을 '듣고'싶은 분들은 제 Youtube 채널을 방문해 주세요. https://www.youtube.com/@read-me-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