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X 년 6월 20일
오늘 학교에 가서 휴학을 했다..
다행히 여름방학이라서 내가
휴학을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녀가 있는 이곳에 계속 있고 싶지만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할 것 같다.
이게 내가 부모님께 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기에......
그녀에게서 떨어져 답답한 병원에서 혼자 누어 있을 생각을 하니
두렵다.
199X 년 6월 21일
내일이면 병원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난 그 병원에서 나의 남은 삶을
보내게 될 것이다. 난 이 일기장을 그녀에게 선물하고 싶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유일하게 남겨둘 나의 일기장을 그녀에게 전하고 싶다.
나의 천사에게...
. . . . . . . . . . . . .
민구가 어제 쓴 마지막 일기를 읽고 미영은 일기장을 덮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이내 화장기 없는 얼굴에 흘러 내렸다.
언제나 약하기만 하던 녀석에게 이런 아픔이 있었다니..
그런 녀석에게 나는 얼마나 모질게 굴었던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녀석을 만날까봐
일부러 친구들과 놀다 와도 어김없이 그 녀석을 만났다..
그 녀석은 기다렸던 것이다..
자신의 병과 싸우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래 그 녀석을 만나야해...
미영은 정신없이 학교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민구의 집으로 향했다..
녀석의 집앞에 서서 미영은 잠시 망설였다.
녀석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하지.....
자신의 병과 싸우며 나에 대한 사랑을 키우던 녀석에게 무슨 말을 하지...
미안하다고.. 아냐...
초인종을 향하던 손을 멈추고 미영은 민구의 문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미영은 밖에 나가지 않고 방안에 틀어 박혀 녀석의 일기장을
읽고 똑 읽었다.
괜히 눈물이 난다..
나 때문에 힘들어했을 그 녀석을 생각하니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지금 그 녀석은 병실에서 병과 힘들게 싸우고 있을 텐데
민구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녀석을 한번 찾아가 보고 싶지만 차마 얼굴을 볼 용기가 없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 미영아 손님 찾아 왔다."
" 누군데요"
" 모르겠다. 그냥 너를 찾아 왔다고 하던데..."
" 알았어요 엄마"
미영은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년의 여자를 보았다.
" 저.. 누구시죠 "
" 학생이 미영인가요?"
" 예...그런데 누구시죠"
" 저 민구 이모 되는 사람이에요"
미영은 민구 이모라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민구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 무.. 무슨 일이죠?"
" 여기서 말하기 곤란 하니까 우리 나가서 얘기 좀 할까요?"
" 네 ....그래요
한적한 공원에는 산책을 하는 몇 명을 제외하고 사람이 없었다..
민구 이모와 미영은 커다란 나무밑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 불쑥 찾아 와서 미안해요"
" 괜찮아요... 그런데 저를 어떻게 찾아 오셨죠..
민구가 제 얘기를 하던가요? "
" 민구가 써 놓은 낙서를 보고 학생의 이름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학교 친구 인 것 같아서 학교로
찾아갔더니 학생 주소를 가르쳐 주더군요"
" 민구는 괜찮은가요?"
" 아니요.. 민구는 병이 악화되어서 지금 위험한 상태 에요.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해요"
" 수술을 받으면 되잖아요?"
고통스러운 병과 싸우고 있을 민구를 생각하니 미영은 가슴이 미어졌다.
" 제가 학생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민구를 한번 만나 달라는 거에요
지금 민구는 수술을 안 받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어요.
제발 한번 찾아가서
녀석에게 수술을 받으라고 설득을 좀 해 줘요"
미영은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녀석의 일기장을 읽은 후로 녀석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한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민구와의 만남이 두렵기도 했다.
" 아가씨.. 부탁이에요. 민구를 만나서 용기를 주세요"
미영은 끝내 대답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 왔다..
그 날밤 미영은 책상에 앉아서
촛점 없는 시선으로 책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민구의 일기장이 놓여 있었다.
199X 4월 20일
그녀는 나의 천사...
하지만 이젠 나는 그녀의 천사가 되고 싶다.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다음날 미영은 병원으로 향하였다.
암병동 들어서자 소독약 냄새가 짓게 풍겼다.
민구 이모가 알려준 입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무도 없었다..
병실은 깨끗하게 치어져 있었다.
미영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겁이 났다....
안돼. 뒤돌아 나와서..
복도에 환자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속에서 미영은 민구를 찾기 시작했다..
찾아야 한다..
미영은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들고 물었다..
" 403호에 입원하고 있던 백민구라는 사람 어디에 있어요?"
간호사는 들고 있는 차트를 한참 찾아보더니..
" 아 그 환자요. 병이 악화돼서 오늘 아침에 무균실로 병실을 옮겼어요"
" 그럼 어디로 가야 하나요?"
" 4층에 올라 가셔서 거기에 있는 간호사에게 물어 보세요"
" 고마워요.."
미영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 시키고 4층으로 향하였다.
" 미영 학생!"
미영은 뒤돌아보았다.. 민구 이모...
" 왔군요.. 고마워요.. 올라가요.. "
4층 병동에는 민구의 부모님과 형이 복도에 벤치에 앉아 있었다.
" 형부 이 학생이 미영이라는 학생이에요"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민구 아버지는 그녀를 보자 무척이나 반가운지
덥석 손을 잡았다.
" 학생이 민구를 좀 만나서 수술을 받으라고 말 좀 해줘.. 부탁이야..."
그녀를 보며 민구 어머니는 눈물을 닦기 바빴다.
자기의 아들을 설득해 달라는 간절한 눈빛이다.
미영은 면회 시간이 되자 무균실에 들어가기 위해
소독약으로 손을 씻고
무균복으로 갈아입었다. 민구가 있다는 병실.....
병실 안에 들어서자 미영은 유리벽이 있는 방안에
눈을 감고 침대에 누어 있는 민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눈물이 났다.. 녀석의 얼굴은 몰라보게 야위어 있었다..
삶을 포기한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는 녀석을 보자
미영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안돼.. 내가 이렇게 약해지만 민구에게 도움이 될 수 없어
미영은 눈물을 훔쳤다.
유리벽에 걸려 있는 전화기를 들었다..
" 민구야"
그래도 민구는 눈을 뜨지 않는다..
" 민구야 나야 미영이...."
민구는 지금 지쳐있다.. 얼마나 지쳐 있으면 지금 미영의 환청이 들릴까...
지금 미영은 뭘 하고 있을까..
민구는 모든게 귀찮았다.. 눈뜨는 것조차 귀찮았다..
그런데 또 환청으로
미영의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게 아닌가...
민구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었다.. 저기 유리벽밖에 미영의 모습이 보였다.
아.. 난 꿈을 꾸고 있는 거야...
" 민구야 나야.. 우리 얘기좀 해.."
꿈이 아니야... 미영이야...
민구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안았다..
그는 힘겹게 침대위 탁자에 있는 전화기를 들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마나 보고 싶던 모습인가..
죽기 전에 꼭 한번보고 싶던 모습..
바로 앞에 서 있는 미영을 보자 민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야 민구...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