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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봉암사백일법문
백일법문은 1967년도 저희 은사 스님인 성철스님께서 해인사 총회 반장스님으로 되시면서 그 당시 스님들이 불교를 모르고, 참선을 해도 어떠한 것이 참선의 목적인지를 모르는 것 같아 불교를 좀 알게 하고 올바른 참선을 하게 해야겠다고 하여 마음을 먹고 제목을 ‘백일법문’이라 하시고 법문을 하셨습니다. 실제 법문일자는 백일이 못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목을 ‘백일법문’이라 하여야 했기에, 그것이 전래가 되어 근래에 와서 스님들께서 장시간 또는 백일을 잡아 법문을 하여 ‘백일법문’이라는 명칭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백일법문의 내용의 구성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평상시 법문하실 때, 은사스님은 ‘중도’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물론 쌍차, 쌍조이야기도 많이 하셨습니다. 물론 중도가 쌍차, 쌍조이고, 쌍차, 쌍조가 중도를 말하는 겁니다.
요전에 중도 법문을 요약을 하였는데, 중도 법문을 가지고 원시 경전부터 발전을 시켜 중문사상, 유식사상, 열반경, 천태사상, 화엄사상, 맨 마지막에 선종사상에 배대를 하여 우리 불교의 발전 과정을 보면 이름이 다양하게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근본을 보면 초점은 중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불교의 모든 공부는 중도 사상을 위해 하는 겁니다.
이 백일법문도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리하여 원시경전에서의 중도사상 이야기, 또한, 중문의 공사상도 알고 보면 중도사상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유식의 종착역도 중도사상으로 가야하며, 열반경에서 불성을 이야기하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중도사상이며, 천태종에서 ‘일념삼천, 일심삼관’ 등 여러 각도에서 이야기하지만 이것도 중도사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화엄종에서도 이사불기, 사사불기 하여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하여 현란하게 설명을 하는데 그것도 알고 보면 중도사상입니다. 참선, 깨달음 이러한 것도 중도 사상입니다. 그리하여 중도 사상 하나를 가지고 전체 내용을 깨뚫고 있는 것이 ‘백일법문’입니다.
우리가 중도 사상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고 강의나 법문을 듣게 되면 모든 법문의 내용이 어렵지가 않습니다. 모든 걸 수용할 수가 있는데, 그런 것을 모으는 힘이 없으면 법문 따로, 부처님 말씀 따로, 선사 말씀 따로, 각각 말이 조각이 나서 현란하고 어지러워집니다.
부처님은 팔만사천법문을 설하셨다고 하는데, 이 법문도 알고 보면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뒤, 나온 말씀이라 합니다. 팔만사천법문은 부처님 마음이며, 이런 부처님 마음을 우리는 일심이라 합니다. 팔만사천법문은 부처님 마음자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처님 마음자리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 법문은 부처님 법문이 아닌 게 되며, 그 마음자리에서 법문을 내게 되면 이것이 부처님 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팔만사천법문을 들여다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 때에는 항상 부처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부처님 마음을 선이라 하기도 하고, 교라고 하기도 하는데 선과 교의 차이는 안과 밖의 차이일 뿐이지 한 몸뚱이에서 나온 겁니다. 선이 펼쳐져서 드러나는 모습이 교의 모습이며, 그 교의 모습 즉 가르침의 모습은 진심에서 그 가르침이 나와야 합니다. 즉, 선과 교는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가 절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 선방스님이 최고고, 시원찮은 사람들이나 강의를 듣고, 강원으로 가고 강원에서 강의하는 것도 아주 하찮게 봤습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말입니다. 23,4년 전에는 강의하는 사람들을 천시하는 풍조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선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때 선을 이야기 하면서 꼭 종경록을 봐야한다고 했습니다.
종경록(宗鏡錄)이 원래 100권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종경록의 원전을 펼쳐서 한문글자 숫자를 따지게 되면 그게 구십 몇 만 자가 됩니다. 이 구십 만자를 100권으로 보면 구천 자, 도덕경보다 더 분량이 많은 책이 종경록 입니다.
종경록의 서문을 보면, 종경록이 100권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모든 말은 일심(一心)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거울에 비추어서 많이 이야기를 하는데, 종경(宗鏡)이라는 것은 최고의 마음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부처님 마음에서 나온 기록이 종경록(宗鏡錄)이라는 것입니다.
종경록 내용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선사들의 경과 어록을 발취해 나름대로 풀이하는 식으로 쓴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해당 스님이 ‘명추해오’ 라 하여 중요한 부분을 추려낸 글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제가 98년도에 ‘마음을 바로 봅시다.’ 라는 제목으로 상, 하 두 권으로 번역을 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것을 번역을 하면서 보니깐, 결국은 다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마음자리 하나가지고 손으로 이야기 하고 이 선사의 이야기, 저 선사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게 결국 마음 하나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서 100권의 책이 나온 겁니다.
그렇다면, 종경록에서 말하는 ‘일심’은 무엇이냐?
그것은 백일법문에서 이야기하는 중도사상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사상을 제대로 이해를 하면 우리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고, 그 마음을 제대로 이해가 될 때, 그 마음을 바탕으로 우리는 수행을 해 나갈 수 있는 겁니다. 도를 닦아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은사스님의 특성 하나가 있는데, 그 특성이란 무슨 말을 해도 꼭 어떤 근거를 제시하면서 말씀을 하신다는 겁니다. 법문 하실 때도 당신이 느끼고 보는 이야기를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꼭 옛날 증거를 끌어다가 근거를 들어 이야기를 하십니다. 백일법문 강의 하셨을 때, 원래 원문만 초록을 해서 그것을 가지고 강의를 하시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강의를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니깐 그것을 가지고 책으로 만든 겁니다.
이 백일법문은 저하고 86년도에 인연이 되었습니다. 이 백일법문이 책으로 나온 계기는 지금 백련암 원택스님께서 큰 스님을 모시고 살면서 스님이 연세가 들기 이전에 스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고심을 하시다가 백일법문이 절집에서 유명하니, 백일법문을 책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마음을 먹고, 원택 스님이 녹음기를 귀에다 꽂고 정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원택 스님이 노트에 정리를 하신 다음에, 당신은 녹음기에서 그대로 내용을 옮겨 놓았지, 이걸 정리를 해서 책을 내야 하는 고민을 하셨는데, 그 때 제가 해인사 강원에 잠깐 있었는데, 스님께 그것을 정리해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정리를 하다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이 백일법문이 책으로 나온다면,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대하여 해메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1차적으로 정리를 하고 제가 원택 스님께 다른 준비하는 책도 중요하겠지만, 백일법문이 빨리 나온다면 절집에서 공부하는 많은 분들께 도움이 될 수 있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드렸냐면, 제가 절에 들어오기 전에, 절 집과 일찍이 인연이 되서 절 집 공부를 한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동국대 교수들 강의를 듣게 되면 그분들이 아주 새로운 이론이라고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참신하게 했는데, 내가 백일법문을 들어보니깐, 그 분들이 70년대에 참신한 이야기라고 했던 것이 60년도 후반에 벌써 스님께서 해인사에서 법문을 하고 계셨던 겁니다. 그러니 이게 빨리 나오게 되면 기존에 새로운 이론이라고 나오는 것들의 말이 없어지면서, 스님들이 하는 이야기니깐 어떤 자긍심도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이 백일법문의 이야기를 쭉 풀어나가는 방식을 보니깐, 초지일관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방법도 아주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이 책을 빨리 내야 한다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93년도에 나왔습니다.
이 책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일심이나 중도의 이해가 없이는 절대 쉬운 책이 아닙니다. 요즘 백일법문을 사람들이 많이 사보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고호스님이라고 예전 태백선원 선원장을 맡으신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요즘 사람들이 선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선에 대한 강의가 들어오면 초청 1순위로 꼽히는 분이며, 그리고 옛날 봉암사 주지도 역임하신 선방의 원로스님이십니다. 그 스님이 이 백일법문을 보면서 자신의 공부에 많은 도움을 받으셨습니다. 93년도에 제가 그 스님과 선방에 같이 지내면서 그 때 그 스님이 어록을 좀 봐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제가 장영각에서 나오는 전체 책을 하나 보내드리고 난 다음에 그 스님도 저도, 서로 공부에 정진하였습니다. 저는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송광사 인월암에 96년도에 들어가서 10년째 살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 곳에서 종경록 책을 번역 하였고, 그 외 원각경과 도서 라는 책을 번역 하였습니다. 도서 책을 번역하고 마지막 교정을 할 때, 도반과 잠깐 태백산으로 단풍놀이를 가자고 나서는 과정에서 서암에 들려서 고호스님을 7,8년만에 뵙게 되었습니다. 만나 뵙고 밤을 새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분이 연세가 70이 넘으셨는데도 말씀하시기를 좋아하고 공부이야기를 좋아해서 지금도 앉아서 이야기를 하면, 시간가는 줄을 모르십니다. 스님을 모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지금 도서책을 번역하고 있다고 하니, 스님께서 백련암스님께서 도서책을 번역해서 되겠냐고 했습니다. 도서는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책이아니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스님께 도서책을 읽어보셨냐고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안읽어 보셨고 앞으로도 읽어볼 생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 책을 읽어보시고 그런 뒤에 이야기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제가 도서를 번역하게 된 계기는, 예전에 도서를 강원에서 강의해보고, 정리를 해보니 도서만큼 선과 교를 회통시켜서 정리를 잘 해놓은 책이 없다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저는 도서를 보면서 불교가 어떤 것인지 알았고, 저에게 도움을 많이 준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님께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스님께서 도서는 돈오점수 이야기라고 하셨지만 도서는 돈오돈수도 이야기를 합니다. 돈오돈수에 대해 중근기, 하근기에 맞추어서 사람들이 못 알아들으니까 조금 문장이 길어지고, 내용이 많아져서 그렇게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도서책에는 돈오돈수 이야기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조스님의 돈오점수를 비판을 하는데, 처음에는 우리 스님이 왜 그렇게 비판을 하는지 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보조스님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스님이 갖고 있는 어떤 논리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보조스님을 제대로 인정을 하기위해서는 ‘가나결’이라 하여 말년에 쓴 책을 봐서 보조스님을 평가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가나결’을 보면, 스님 나름의 견처가 열려서 대접을 받을 만한 분이신데 그런 책은 놔두고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듯한 그런 내용만 보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정말 보조스님을 아끼고 존경하려면, ‘가나결’을 보고 선종에서 추구하는 근본사상을 스님이 제대로 설파하셨다고 이야기를 해야합니다. 참선하는 납자들이 ‘돈오점수’의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 백일법문 못지않게 도서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백일법문과 비슷한 책으로는 도서와 종경록이 있습니다. 아침에 선원장스님을 만났는데, 요즘 종경록 책을 아주 잘 읽고 계시다고 합니다. 종경록은 의외로 아주 어려운 책이고, 또한 만들 때 최고급으로 만든 책입니다. 다행이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이 그 책을 보고 아주 잘 봤다고들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상당히 기쁩니다. 종경록 같은 책은 옛날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필독서이기에, 여러분들도 많이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1)|작성자 다마림
그러면 지금부터 백일법문의 내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백일법문은 스님이 원문만 가지고 강의를 하셨습니다. 이 책은 스님이 67년도에 법문을 하셨다가 26년 정도 지난 다음인 93년도에 그 법문 테이프를 듣고서 정리를 하여 나왔습니다. 원문 밑에 독음을 풀이해서 적어놓은 것은 상당히 잘한 정리 입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원문 번역 자체가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문 번역 할 때, 동국대에서 박사과정에 있고 불교학을 전공한 박사들이 정리를 한 것 일 텐데, 한문에 능통한 사람들이 이글을 자기 것으로 완전히 만든 다음 번역을 하면은 상당히 부드러우면서 뜻을 확실히 드러낼 수 있었을 텐데, 지금 번역은 한문을 알긴 알아도 자체를 그대로 옮긴 것이기에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부분만 따로 번역을 해야겠다하여 제가 사실 다 번역을 했습니다. 언제 시간이 나면 기본서를 교재로 내던지, 아니면 백일법문교재를 내던지하여 원문을 번역한 책을 따로 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문에 많이 익어진 사람들은 책의 번역을 더 좋아할 수도 있지만, 한문을 잘 모르고, 한글에 익어져있고, 한문을 옛날식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은 아마 이 글을 더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백일법문 구성을 보게 되면, ‘불교의 본질’ 이라 하여 ‘불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 다음, 불교의 키포인트는 중도사상에 있다는 서가 나옵니다. 그 다음 2장을 보면, 원시불교사상 이라 하여 중도대선언, 팔정도, 십이인연, 가전연경등 여러 가지를 이야기 하는데, 이것 역시 중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공사상과 십이연기도 그 근본에는 중도사상이 밑바탕 되어있습니다. 제3장에서 나오는 중관사상에서는 원시불교에서 나중에 북파불교로 발전이 되어가면서 유부라하여 무언가 있다고 주장하는 학파가 나옵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집착을 깨기 위해서 대장정을 하게 되는데, 그 중심에 있는 분이 융수스님입니다. 그래서 융수스님이 그 집착을 깨기 시작하여 중관사상에서는 융수의 중론을 이야기합니다. 융수스님이 말하는 공사상도 역시 중도에 기초합니다. 제4장에서는 유식사상을 이야기 하면서 유식의 낙차가 중도로 간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어 제5장에서는 열반경 등의 사상을 이야기 하는데, 이 부분도 역시 중도 사상으로 연결 지어 집니다. 이렇게 백일법문 상권이 끝납니다.
하권에 가서는 천태, 화엄이 나오는데, 천태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발췌, 그리고 화엄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발췌해서 역시 그것도 중도를 이야기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선종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그리하여 백일법문의 핵심은 중도법문을 상향하는 데에 있습니다.
법문을 들어가기 전에 게송을 하나 넣었는데, 상단법문에서 쓰이는 게송입니다. 이 게송을 읽으시고 스님께서 이것으로 내 법문은 끝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법문이 끝나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전부 알아듣고, 나도 알아듣고 그리하여 서로 마주보며 빙그레 웃으면서 염화미소가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서로 박장대소를 한다던지 무언가 있어야하는데 알아듣질 못하니, 스님께서 “이제부터 내가 세상의 잡놈이 되어 여러분들에게 거짓 아닌 거짓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백일법문의 핵심은 이 게송 하나에 전부 들어가 있는데 못 알아들으니깐 못난 여러분들을 위해서 사족을 달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백일법문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스님께서 게송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겠습니다.
休去歇去하니 跛鼈盲龜요
有麽有麽아 文殊普賢이라
虛空이 撲落하고 大地平沈이로다
高高峯頂에 灰頭土面이요
紛紛街下에 斬釘截鐵하니
囉囉哩哩囉囉에
野老醉舞芳草裏로다
摧掛垢衣云是佛이라
却裝珍御復名誰오
於此에 喪却金剛正眼하면
八萬藏敎는 是拭瘡疣故紙라
馬鳴龍樹向什麽處하야 下口리오
良久에 云甲乙丙丁戊로다
喝一喝
獨尊無比獅子王이 鐵銷로 自縛入深穽이라
哮吼一聲에 震天地하나 却彼野干이 相唾笑로다
口出口出口出
抛却金闕七寶座하고 欲爲衆生入阿鼻로다.
쉬어가고 또 쉬어가니
절름발이 자라요 눈 먼 거북이로다.
있느냐? 있느냐?
문수와 보현이로다.
허공이 무너지고 대지가 꺼지니
높고 높은 봉우리에 앉아
머리에 재, 얼굴에는 진흙이고
시끄러운 거리에서 쭈그리고
땅! 땅! 못을 끊고 쇠를 끊네.
날라리 리랄라여
술에 취한 들늙은이 풀꽃 속에 춤을 추네.
때 묻고 떨어진 옷 방편으로 걸어 놓고
이를 일러 부처님이라고 하니
도리어 보배 얼굴로 단장한 이는 다시 누구라 할꼬.
여기에서 흔들리지 않는 바른 안목이 없다면
부처님의 말씀인 팔만대장경은 고름 닦은 휴지로다.
마명과 용수는 어느 곳을 향하여 입을 열리오.(한참 묵묵한 뒤)
갑․을․병․정․무로다. 억!
비할 데 없이 홀로 높디높은 사자의 왕이
쇠사슬로 자신을 묶고 스스로 깊은 함정에 들어가니
한번 소리를 침에 천지가 진동하나
도리어 저 여우들이 침을 뱉고 웃는 구나.
애달고 애달프며 애달프다.
황금 궁궐과 칠보 옥좌를 버리고
중생을 위해 무간지옥으로 들어가도다.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1-1)|작성자 다마림
權掛垢衣云是佛이라
‘권(權)’은 방편으로, 거짓으로, 임시로를 뜻합니다. 이 ‘권’자가 원래 권력할 때 쓰는 권자 입니다. 권력은 힘을 모아줄 때 쓰는 것인데, 힘을 모아줄 때에는 그 권력을 자기 마음대로 쓰는 게 아니라 그 권력을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써야 합니다. 아무 때나 쓰는 게 아닙니다. 권력은 상황 상황에 맞추어서 전체 이익을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쓰는 것이지, 영원한 권력은 없습니다. 고정된 권력은 없습니다. 권력의 의미도 그 ‘권’의 의미를 정치인이나 힘을 가진 사람들이 그 뜻을 잘 알면 어떤 무소유 정신을 가지고 힘을 쓸 수 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권력의 의미를 잘못 알기에 그 힘을 잘못 쓰는 것입니다. 권력의 원어을 따져보면 불교에서 나왔다고 보아야합니다. 그리하여 ‘권’자가 나오게 되면 임시방편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방편으로 때묻은 옷을 걸어 놓고 부처라 하나>
여러분들이 “스님, 부처님이 어디 있습니까?” 수자들이 이렇게 물어보면, 내가 옷을 걸어놓고 하는 이야기가, “여기에 부처님이 있어.” 어떤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바로 ‘임시로 때묻은 옷을 걸어 놓고 부처라 하나’ 라는 말을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서보현이 있어. 보고 있어? 듣고 있어?” 이라는 말입니다.
却裝珍御復名誰오
각장(却裝)은 꾸미는 것이고, 진어(珍御)는 보배 같은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봉암사 법당 안에 앉아있는 부처님입니다. 아주 근사하게 만들어서, 금태를 입혀서 뒤 테마 장식을 해서 꽃가지로 장식하고 그리하여 부처님이라고 모셔놓고 예불을 드립니다. 그런데 때묻은 옷을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각장진어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잘 꾸며서 법당에 앉아있는 사람을 누구라고 해야 할 것이냐 말입니다.
於此에 喪却金剛正眼하면
금강(金剛)은 꺽이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나 영원한 것입니다. 정안(正眼)은 바른 안목입니다. 금강정안은 금강 같은 지혜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진리를 볼 수 있는 바른 안목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걸 딱 갖다놓고 ‘부처님이야.’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럼 법당에 있는 부처님은 지금 우리가 무어라고 불러야 하나? 이렇게 물어봤을 때, 금강정안을 여기서 잊어버린다면, 즉 이 말 뜻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八萬藏敎는 是拭瘡疣故紙라
<팔만대장경에 나오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피고름이나 닦아내는 휴지에 불과하다.>
우리가 옛날에 경전가지고 공부를 할 때 경전을 부처님이라 생각하고 상에 모셔놓고 공부를 하는데 지금 때묻은 손으로 ‘부처님이야.’ 했을 때, 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면, 팔만대장경에 나오는 모든 가르침이 쓸모없다는 겁니다.
馬鳴龍樹向什麽處하야 下口리오
마명과 용수는 대단한 논사들, 조사들을 뜻합니다. 이 사람들은 글 쓰는데 그리고 말하는 데 걸림이 없어서 어떤 상황이 와도 당신들 논리대로 척척 해결해 가는데 이 자리에 와서 마명과 용수가 입을 열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난 다음에 가만히 있다가,
良久에 云甲乙丙丁戊로다
<일 이 삼 사 오로다.>
우리 스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여기에 깊은 뜻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시는 이야기가, 본문을 다 했다는 겁니다. 백일법문을 다 이야기 했는데, 못 알아들으니깐 자비심을 내서 백일법문을 시작한 겁니다.
獨尊無比獅子王이 鐵銷로 自縛入深穽이라
독존(獨尊)은 홀로 존귀에, 무비(無比)는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독존무비는 최고로 존귀하고 위엄 있고 비할 바 없는 아주 근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자왕이 철사로 자기 몸을 묶어서 스스로 함정에 들어가 큰 울음소리를 내어 그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나,
哮吼一聲에 震天地하나 却彼野干이 相唾笑로다
<도리어 저 여우가 서로 침을 뱉고 웃는구나.>
口出口出口出
<애닯고 애닯고 애달프다.>
抛却金闕七寶座하고 欲爲衆生入阿鼻로다.
금궐(金闕)은 대웅전 같은 것입니다. 대웅전을 황금으로 칠한 것입니다. 칠보(七寶)는 잔뜩 치장을 하여 부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칠보로 거하게 치장한 곳은 부처님 자리인데, 그 자리를 포기하고 중생을 위해 아비지옥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육조단경을 근사하게 선포하고 앞에서 법문을 보면서 딱 입 다물고 있으면 근사해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폼을 잡고 살아가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폼 잡고 법문 해봐야 알아들을 사람이 누가 있느냐 말입니다. 우리 수자들은 밖에 다니며 법문 하는걸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것을 삿되게 보고, 공부하는데 쓸데없는 짓이라고 폄하를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모욕, 수모를 당한다 할지라도 정말 부처님의 자비는 중생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니깐 여러분들이 다 알아들으면 내가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지만 못 알아든다면 여러분들을 위해서 부처님의 말씀, 조사스님들의 말씀, 근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 글들은 알고서 보면 쉬운 글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글들을 딱 갖다놓고 그 글의 재미에 빠지면 그 글에 일주일을 빠질 수가 있고 석 달을 빠질 수도 있고, 그 글 하나가지고 평생을 갈 수도 있는 겁니다.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1-2)|작성자 다마림
2.봉암사 백일법문
제1장 서
1. 불교의 본질
(1) 깨달음의 종교
조주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근기에 따라 법을 설하면 온갖 법이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오직 본분사로 사람을 대할 뿐이다.” 만약 나로 하여금 근기 따라 사람을 대하게 하면 삼승 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가 있게 되느니라”
‘야의건설법하면 자유상승 십이분교’라.
중생의 근기에 의거해서 법을 설할 거 같으면 저절로 삼승 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가 있게 된다. 십이분교(十二分敎)가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에 있게 된다.
삼승(三乘)은 성문영각보살을 이야기 하고 십이분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12가지로 분류를 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법문 하실 때 삼매에 가만히 계시다가 산중에서 깨어나, 대중들이 물어보는 일이 없는 데도 설법하는 것입니다. 또, 설법을 할 때 하나하나 설명을 해가면서 설법하는 방법도 있고, 백일법문 첫 문 게송처럼 거두절미하게 게송하나 읊어서 법문 다했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법문을 할 때 옛날 인연에 대해서 이야기 해줄 때도 있고, 제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 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비유를 들어서 설명을 할 때도 있습니다. 팔문사천 법문이 설 해질 때, 여러가지 방법으로 설 해지는데 그 내용을 모아서 12가지로 정리를 해놓은 것이 십이분교(十二分敎)입니다. 또한 십이부교라 하기도 합니다. 십이분교는 팔만대장경의 모든 가르침을 이야기합니다.
삼승(三乘)은 법화경에서 많이 쓰는 말입니다. 삼승은 성문연각보살을 이야기 합니다. 성문(聲聞)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공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문승이라고 합니다. 연각(緣覺)은 혼자 선정에 들어서 이치를 스스로 터득하는 겁니다. 연각은 인연법, 12연기법 그 연기법을 스스로 강조해서 깨닫는 사람, 이게 연각입니다. 홀로 깨닫는 사람이기에 독학생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보살승은 깨달음을 혼자 갖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하고 나누어 갖습니다. 삼승은 스님들의 공부형태를 보이는데, 여기서 성문과 연각을 소승이라고 표현을 하고, 보살승을 대승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렇다면 소승과 대승이란 무엇인가?
소승은 공부하는 목적이 주로 자기중심적이며, 대승은 자기와 남을 동시에 보며 폭이 넓습니다. 그리하여 성문승은 자기공부에 중심을 맞추어 가르침을 받아서 공부하는 게 성문승이며 연각승은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총명한 지혜가 있어, 스스로 터득해 나가는 사람이며 인연법을 터득하는 사람입니다. 보살승은 동체대비(同體大悲)가 일어나, 여기서 동체대비란 여러분과 내가 한 몸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러분들이 법문을 잘 들어주면 법문하는 사람도 신이 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법문 하는 사람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배격하고 내치면 제가 상처를 받습니다. 즉, 여러분들이 쓰는 마음에 따라서 제가 흥이 나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과 제가 분리가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연계가 되어 한 흐름으로 같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면, 여러분들이 내 몸이고 내가 여러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깨닫게 되면,, 서로 안 챙겨 줄 수가 없습니다. 서로가 잘못 되는 것을 마음 아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동체대비라고 합니다.
동체(同體)는 같은 바탕이란 뜻이며 대비(大悲)는 서로가 같은 바탕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일으키는 자비심을 말합니다. 동체대비라고 하는 것,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이렇게 설명을 듣는 건 처음이죠? 불교는 재미있습니다. 중도, 일심만 확실히 깨우치면 이런 걸 배워서 아는 게 아니라 보면 알아듣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스님 가운데 호진스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책을 평생 읽으시고 지금도 책상에 앉아서 책을 14시간씩 읽으시는 분이십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양심적이고 공부를 제일 많이 하시는 스님입니다. 그 스님은 매스컴 받기를 싫어하고, 칭찬 받는 거 싫어하고 법문 하는 걸 싫어하십니다. 하지만 제일 좋아하시는 것은 책상에 앉아서 책보고 사유하고 글 쓰는 것입니다. 제가 그 스님을 만난지 25년이 되가는데 그 마음이 25년 전과 조금의 변화도 없으십니다. 이 분 사제 스님 중에 근하스님, 소호스님이 있습니다. 그 스님이 석가에 있을 때 도서관에서 만나서 하루 종일 책을 같이 읽던 스님 입니다. 종림 스님과 같이 이 분들은 책벌레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흉내를 내서 같이 살았었습니다. 이 두분이 서로 출가한지 모르다가 절에서 만났습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한 생각이 일어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짬을 내서 스님과 함께 마해봉에 올라가는데 저쪽에서 한 분이 내려왔습니다. 마해봉에서 서로 얼굴을 돌려 보니, 옛날에 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호진스님과 같이 찾아가 차를 마시며 밤늦게 노는데, 그런 얘기가 나왔습니다. 책을 보다보면,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책을 한권 한권씩 봐야하는데 내용을 다 아는 사람들은 꼼꼼히 볼 필요 없이 넘기면서 봅니다. 우리가 무협지를 볼 때도, 처음에는 한줄한줄 천천히 읽지만, 무협지를 50권, 100권 볼 때는 내용을 파악했기에 책을 금방금방 넘기면서 읽지않습니까? 그 날 얘기하면서 제가 책을 하루에 3,4권씩 읽는다니깐, 호진 스님은 납득이 안간 다고 했습니다.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글을 하나하나 볼 때는 어려울 수도 있는데, 내용을 다 아는 사람들은 쉽게 봅니다. 바로 이것이 일심과 중도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조주 스님이 그걸 말하고 싶으셨던 겁니다.
중생의 근기에 의거해서 법을 설할 거 같으면 저절로 삼승 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가 있게 된다. 십이분교(十二分敎)가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에 있게 된다.
하지만 조주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기서 본분사(本分事)로서 사람들을 대한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본분사를 가지고 사람들을 대한다.’ 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본분사가 일심을 말하는 것이며, 중도를 말합니다. 깨달음이며, 부처님의 마음을 말합니다. 그 자리가 참 마음이 있는 자리이며, 주인공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때 묻은 옷을 걸어 놓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글을 볼 때,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이 굉장히 혼란스러워 하는 게 용어가 너무 다양해서 입니다. 부처님 세상을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을 진심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주인공이라고 하기도 하며, 마삼근 이라고 하기도 하며, 무자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내용을 알아보면 전부 일맥상통 합니다. 일맥상통 되어서 ‘아~ 이런 거였어?!’ 라고 생각을 하게 되면 글을 보는데 어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본분사라고 하는 것은 근본, 중도를 이야기 합니다. 항상 중도 자리에 서서 사람을 접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법문을 해도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하지만, 내가 법문 하는 자리에는 중도실상에 서 있다는 겁니다. 쌍자, 쌍조에 서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법문은 항상 본분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진실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못 알아듣고, 잘 알아듣고는 여러분들의 몫이라는 겁니다. 그리하여, 내가 지옥에 가고자 법문을 하지만, 이 법문은 본분사에 입각해서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2)|작성자 다마림
우리 스님이 열반 하실 때, 열반송이 있습니다.
生平欺狂男女群 彌天罪業過須彌 活陷阿鼻恨萬端 一輪吐紅쾌碧山
생평기광남녀군 미천죄역과수미 활함아비한만단 일륜토홍쾌벽산
평생 동안 살아오면서 모든 사람을 속였더니 하늘에 가득한 죄를 진 업보들이 수미산에 넘친다. 산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많다.(법문을 한게)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산에 걸렸도다.
봐라, 저 푸른 산에 붉은 태양이 질 때 거기에 노을이 질 때, 세상에 어떤 바보천치가 그 빛을 못보겠는가.
彌天罪業過須彌
<하늘에 가득한 죄를 진 업보들이 수미산에 넘친다. >
수미산은 우주 중심에 뿌리박고 있는 산입니다. 수미산 한 귀퉁이에 사바세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미산의 천만분의 일도 못 봅니다. 그런 수미산을 넘치게 할 정도로 죄역들이 많다는 겁니다.
나는 부처님 법문을 설하는데, 중생들은 자기 멋대로 속여 부처님 법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차라리 내가 부처님 법을 이야기를 안했다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처님 법에 시비를 안하고 죄를 안질 것인데, 부처님 법을 이야기 해줌으로, 제대로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설교를 해서 부처님 법이라고 이야기를 하며, 부처님 법을 비판하고 부처님 법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죄를 어떻게 받을 것이란 말입니까. 즉, 부처님 법을 차라리 이야기 하지 말지언정, 이라는 생각이 있게 되는 겁니다. 죄를 지으면 어디로 갑니까? 지옥에 갑니다. 지옥에 어떻게 갑니까? 살아있는 사람이 큰 죄를 지으면 생지옥, 즉 살아서 빠지는 지옥에 빠집니다. (活陷阿鼻)
活陷阿鼻恨萬端
<산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많다.(법문을 한게)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차라리 내가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 나보고 ‘도인’이라고 쫓아오던 많은 사람들이 나로 인해서 죄를 짓지 않았을 텐데, 내가 무엇을 아느냥, 떠들어 되니 그 말에 현혹이 되어서 전부 자기들 식의 이야기를 하게 되니, 갑갑해진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죄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一輪吐紅쾌碧山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산에 걸렸도다.
봐라, 저 푸른 산에 붉은 태양이 질 때 거기에 노을이 질 때, 세상에 어떤 바보천치가 그 빛을 못보겠는가.>
일륜(一輪)은 태양을 이야기 하고, 토홍(吐紅)은 노을을 이야기 합니다. 해가 동쪽으로 떠오를 때, 붉은 노을이 있지 않습니까? 해가 바다에 떨어질 때 아주 붉습니다. 그걸 말하는 겁니다. 저 푸른 산에 태양이 걸려 있을 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쳐다봅니다. 즉, 일륜토홍은 부처님의 진리를 이야기 합니다. 부처님의 진리는 여러분들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여러분들이 귀를 막고 눈을 가려서 못 보는 것이지, 그게 어떻게 잘못이겠는가? 진리는 항상 우리 눈앞에 넘쳐 나는 것인데 그걸 보지 못하는 여러분들에게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들은 눈을 뜨고 보고, 귀를 막지 말고 들어야 합니다.
열반송이 나왔을 때, 일부 기독교인들은 큰 스님도 세상 사람들을 속여서 지옥에 가는데 다른 스님들도 말할 필요가 뭐가 있냐 하여 기독교에서 선교 소재로 쓰기도 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베껴서 복사를 하여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보라, 조계종의 최고 큰스님도 지옥에 갔다하는데,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하나님 믿으십시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도 이런 질문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 붓다는 무엇입니까? 붓다(佛陀)를 번역하면, 깨달음 각(覺)자, 즉 부처님은 깨달은 자를 일컫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깨달았느냐? 중도를 깨달은 자입니다. 그래서 불교라는 것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내려주는 가르침입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언어문자를 무시하고 배격하며 교가(敎家)에서는 언어문자를 숭상한다고 흔히 생각하고 있는데, 만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교는 꿈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수자들이 귀담아 들으라고 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정리를 하다보면 경을 보고, 어록을 보는 것을 굉장히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마음속에 경시, 무시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이 잘 안 봐집니다. 경이나 어록을 무시하고 참선을 잘해서 깨달음을 얻으면 그야말로 상상근기입니다. 그런 사람들한테는 이 자리가 정말 시간 낭비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무시하고 배척하면서 ‘나는 공부하는 수자다.’ 이런 상이 생기게 되면, 이 상은 부처님이 와도 고치기가 힘들어집니다.
만약 언어, 문자를 무시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멀리하고 정말 도인들이 많이 나온다면, 여러분들은 오늘 이런 인연을 갖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횟수로 절 집에 들어 온지 24년째 되갑니다. 그런데 24년 동안 살면서 언어, 문자를 무시하고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들을 한명도 못 봤습니다.
선방을 다니다가 한문을 조금 볼 줄 알고, 경에 밝다하면 강의를 한번씩 해달라고 청을 받게 됩니다. ‘도서’같은 경우, 저는 공부 삼아 가르쳤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인 즉, 강원에 가서 공부를 하게되다 보면, 사집 보다 전부 선방에 가게 된다는 겁니다. 제가 번역을 한 ‘서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서장에서 관화산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 오로지 화두에 집중하라는 상대자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이미 언어, 문자에 달포한 달인들입니다. 그 당시 상대들이 지금으로 말하면, 국무총리, 장관 이렇듯 최고의 학자들이었습니다. 옛날에 장관이나 국무총리를 하려면, 학문을 안하고서는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 최고의 지성들입니다. 이런 사람들한테 가서 글 가지고 주고니, 받거니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상대방이 너무 글을 잘 알기에, 말을 하려면 글을 떠난, 글을 초월한 그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럴때 우리가 화두를 가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세계, 그런 세계를 이야기 하면서 그런 세계를 글로써 따지려고 하고 또한 글가지고 판단을 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철저하게 내리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아비지옥’이라는 기본적인 불교 용어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어려운 문자를 들이미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제가 볼때는 우리가 20,30년 부처님 가르침을 무시하면서도 공부를 하면서 도인을 배출 못 한 것은 마무리설, 외도설에 속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언어문자를 무시하고 배격하며>
이것은 문자에 속지 말고, 끄달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를 많이 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집착을 하여 글을 가지고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지 말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히 봐서 이 글이 의도하는 뜻을 알아내야 합니다.
그 의도를 안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부처님의 의도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중생들의 언어로 답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곧 ‘임시방편으로 때묻은 옷을 걸어놓았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방편으로 팔만대장경을 설한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한달동안 4시간씩 이런 공부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은 여러분들의 큰 복입니다. 큰 행복입니다. 저는 이렇게 배우고 싶어도 못 배웠습니다. 또한, 선방에서 정진하면서 맑아진 머리로 공부를 하면 공부가 정말 잘됩니다. 공부를 하면서 부정하고 멀리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공부가 안됩니다. 공부라는 것은 철저한 믿음, 신뢰 속에서 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의 한 달 공부가 강원에서의 1년 공부와 같습니다. 공부를 하고 난 다음에, 경을 보면 글자가 살아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냥 글을 보기 위해서 글을 보면 힘이 듭니다. 재미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정진을 하면서 맑은 정신으로 경을 보면 공부의 진도가 금방 나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앞으로 고참 스님들도 스님들 공부를 시킬 때, 막무가내로 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본을 갖추어서 시켜야 하지 않냐는 생각입니다.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2-1)|작성자 다마림
3.백일법문
제1장 서
1. 불교의 본질
(2) 절대적 인간관
원각경
불법이란 바로 깨쳐야 하는 것이니 일체 만법의 법성, 자성을 깨쳐야 하는데 그것은 언어문자의 이해로써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성, 자성은 일체 언설과 이론을 떠나 있으므로 언어문자로써 표현할 수 없고 말로써 형용할 수 없는데 어떻게 언어문자에 의지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이 자성, 법성이라는 것은 이름이 없고 모양이 없어 일체가 끊어졌기 때문에 증지(證智), 즉 깨친 지혜로써만 알 수 있고 다른 것으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깨친 법성은 참으로 깊고 미묘해서 일체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사량분별이 멸한 것이라, 오직 깨쳐야만 알지 언어문자로써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불교란 마음을 깨치는 데 근본이 있다는 것을 선종(禪宗)에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문자로 근본을 삼는 교가(敎家)에서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 대강 이해될 줄 믿습니다.
다음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바른 깨달음, 곧 증지(證智)를 이루느냐 하는 것입니다.
善男子 但諸聲聞 所圓境界 身心語言 皆悉斷滅 彼之親證 所現涅槃 何況能以有思惟心 測度如來圓覺境界 如取螢火燒須彌山 終不能着 以輪廻心 生輪廻見 入於如來大寂滅海終 不能至. [圓覺經 金剛菩薩章]
선남자여, 단지 모든 성문의 원만한 경계에서는 신심(身心)과 언어만이 다 끊어졌을 뿐, 이 경계로는 끝내 저 친히 증득하여 나타날 열반에는 이를 수 없다. 하물며 범부의 사유 분별하는 마음으로 어찌 여래의 원각 경계를 측량하여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는 마치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고 하나 끝내 태울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윤회하는 마음으로써 윤회하는 견해를 내어 여래의 대적멸 바다에 들어가려 하면 끝내 이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 때문에 일체보살과 말세의 중생은 먼저 무시이래로 윤회하는 근본을 끊으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상스님의 법성게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증지소지비여경을 원각경의 내용으로 가져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증지소지는 증득한 지혜, 부처님의 지혜로만 법성 근본자리를 알 수 있는 것이며, 비여경 중생이나 성문, 연각, 보살의 경계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문승들이 열반을 얻을 때는 무기공 일 때가 많습니다. 무기공은 모든 것이 다 끊어지고 사라졌고, 아무것도 없다는 상태이며, 이런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성문의 열반을 가지고 부처님, 진짜 대승의 열반에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성문승이나 열각승은 본부보다는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사유심은 중생의 마음으로 분별하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성문, 연각의 마음보다 낮은 단계의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열외의 원각경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한다는 반딧불을 가지고 우주의 중심에 서있는 수미산을 태우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딧불이 반짝하면 그 앞에 있는 풀도 태울 수 없는데 중생들의 사유, 중생들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님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것에 이렇듯 불가능한 표현을 씁니다.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다 같은 큰 부처님의 마음을 알려고 한다면, 먼저 중생의 마음을 없애야 합니다. 중생의 마음은 무명에서 왔기 때문에 그 무시, 무명을 끊어야 부처님의 열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앞에 내용과 같다 하여 원각경의 내용을 이렇듯 인용하였습니다.
동산 낭계스님이 깨달음 자리를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만약 생멸(生滅)하는 심의(心意)를 가지고 불교의 깊은 뜻을 배우려고 하면 동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과 같느니라. [洞山良介禪師]
심의식(心意識)에서 마음심(心)은 8식을 이며, 의(意)는 7식이며, 식(識)은 전6식입니다.
8식은 깊이 숨어있는 마음입니다. 본부들이 잘 알지 못하고, 부처님만이 볼 수 있는 마음입니다. 8식은 근본 무명에서 나왔습니다. 8식 그 자체는 논서로 분리가 되지 아니하고, 어떤 모습으로 뛰지도 않습니다. 이 것이 점차 커져서 그것이 ‘나야’라고 생각하는 것이 7식입니다. 저는 그것을 잠재의식이라 합니다. 7식이 기반이 되서 바깥에 6근이 생겨, 바깥에 시비분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6식이라 합니다.
그리하여 심의식은 8식, 7식, 6식을 말하며, 또한 이 식(識)은 ‘안다’라는 뜻입니다. 분별한다는 뜻입니다. 8식에서 분별하는 마음이 있고 7식에서 분별하는 마음이 있고 6식에서 분별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분별하는 마음은 그 근본이 전부 무명에서 나왔기에, 무명존자들입니다. 무명존자는 중생이 쓰는 마음입니다. 그 무명존자를 가지고 있으면, 무명너머 그 세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그 무명을 깨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중생계이며, 무명너머는 부처님 세상입니다. 부처님 세상과 중생계의 그 라인에는 무명이 있습니다. 그 무명이 점차 커져서 8식이 되고 7식이 되고 6식이 되어 점차 중생계를 만들었습니다. 항상 ‘나’라고 하는 것이 바탕이 되어 8식을 깔고 앉아서 6식으로 분별하는게 중생들의 삶입니다. 중생들의 삶은 항상 ‘나’에 초점이 맞혀져 있고 그 근본에는 8식이 작용하고 있기에 무명너머 세상을 도저히 갈 수가 없습니다. 그 무명너머 세상을 가려고 하면 8식,7식,6식도 사라지고 무명도 사라져야 합니다. 즉, 무명을 깨트리는 것이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참선을 하여 화두를 통해 그 무명을 꺠트리는 것입니다. 그 무명을 깨트리는 방법은 판단 융지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이야 한 곳에 집중되어 일체 시비분별을 끊어서, 일체 시비분별이 일어나지 않는 그 마음으로 무명을 뛰어넘을 때 단숨에 여래의 경계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리하여 우리 공부의 근본 목적지는 그 무명을 깨트리는 데 있습니다. 무명은 우리 중생들의 마음에 시비분별을 일으키는 근원적인 동력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시비분별이 사라져야 무명이 사라지고 무명이 사라져야 부처님 세상으로 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심의식(心意識)은 중생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끊어야 합니다. 그 마음을 끊기 위해서는 무명자체를 사라지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하는 이야기는 섣불리 공부를 해서, 무슨 경계가 나타났다고 하여 폼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경계가 나타났다하여 집착을 하는 사람은 거기서 공부가 끝나게 되는 겁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은 많습니다. 요즘에는 그런 소리가 잘 안들려오지만, 공부를 무식하게 한 옛날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문제점은 바탕이 없어서입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몸도 사라지고 내 마음도 사라지고 말 자체도 다 사라지고 공부를 하는 모든게 다 끊집니다. 무기공, 성문의 열반이라고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것은 우리 수준에서는 굉장히 대단한 것입니다. 무기공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한 쪽을 정리하면서 몸이 완전히 사라지고, 생각이 사라져 앉아있는데 텅 비어 있는 상태를 만끽해보셨습니까? 이런 경계만 와도 굉장히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이 그런 공부를 해도 진짜 부처님 경계를 보는 것은 택도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증도가를 가지고 되풀이 설명해줍니다.
損法財滅功德 莫不由斯心意識
是以禪門了却心 頓入無生知見力. [證道歌]
참다운 법의 공덕 사라지는 건
그 원인을 찾아보면 心意識이라
이 때문에 禪門 수행 마음을 알아
단숨에 無生知見 들어간다네
損法財滅功德 莫不由斯心意識
<참다운 법의 공덕 사라지는 건 그 원인을 찾아보면 心意識이라>
법재를 법의 재물이라 표현했는데, 이 표현이 여러분들 마음에 들어옵니까? 우리는 재물을 재산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법을 공부하는 사람이 어떤 경계를 얻은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재산입니다. 그래서 법을 비유해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다 하여 법재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법의 재물은 뜻을 모르고 그냥 한문만 풀어쓴 것입니다. 그리하여 법재는 법의 재물보다는 법을 손상시키고, 이런 표현이 더 좋습니다. 그럼 왜 ‘재’자가 붙은 것이냐면, 우리가 재산, 재물을 소중하게 여기기에 공부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법이 소중한게 아니냐 그래서 법이 소중하다는 입장에서 붙여진 것입니다. 일반사람들이 재산을 소중히 하듯이 말입니다. ‘심의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아니니’은 강조시키기 위해 이중 부정으로 쓴 것입니다. 공덕의 설명은 ‘육조단경’을 보면 이것과 설명이 매치가 됩니다.
是以禪門了却心 頓入無生知見力.
<이 때문에 禪門 수행 마음을 알아 단숨에 無生知見 들어간다네>
無生知見力(무생지견력)은 부처님의 지견력을 이야기 합니다. 무생은 무생멸의 줄임말입니다. 무생무멸로 쓰기도 합니다. 무생멸은 생멸이 없는 것입니다. 생멸이 없어지는 것은 생하고 멸하고가 없어진다는 것이며, 또한 이는 차별하고 분별하는 것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차별이 있어야 분별을 하기에 그것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무심지견력은 생멸이 없는, 분별이 없는, 무심에서 나오는 지견력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이것은 부처님의 지견력을 뜻합니다. 심의식, 즉 심은 8식, 의는 7식, 식은 6식이라 하였는데 여기서의 심은 8식을 뜻합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 중도의 있는 자리라고 하는 것, 부처님의 마음이 있는 자리라고 하는 것, 이런 것을 불교의 본질에서는 깨달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부처님의 세상, 열반 자리인데 이것은 분별심 가지고는 조금도 접근이 안되는 곳입니다.
참선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뒷구절을 더 이야기 합니다.
네가 비록 억천만 겁토록 여래의 묘장엄법문을 기억하여도 하루 동안 선정(禪定)을 닦느니만 못하느니라.
이것은 경을 공부 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여래의 묘장엄은 부처님의 법문을 이야기 합니다. 이 여래의 묘장엄법문을 아무리 외우고 기억하여도, 그렇게 지식을 담아두는 것을 백년, 천년을 한다 한들 수자들이 마음먹고 하루 동안 선정을 닦는 공덕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법문을 통해서 선정 속에 들어가 있으면 법문 하나하나가 빛을 발하지만, 부처님의 법문을 통해서 잘 알지 못하고 그 말만 달달 외워서 이야기를 한다하면 차라리 그런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수자들이 이뭐꼬 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앉아있을 때, 또 정신일도 즉, 정신을 통일 한 다음 몸과 마음을 잊고 날 때의 충만감이 있습니다. 그런 충만감은 대단한 행복입니다. 저는 큰 도를 깨치기 전에 좌복에 앉아서 편안함을 아는 것도 최상의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쉬도 때도 없이 앉아서 머리 생각 다 끊어버리고 탁 앉아있으면 그 자체가 대단한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 맛을 알지 못하고 그냥 수자들의 행동을 보는 사람들은, ‘참선 한다는 사람이 왜 화를 참지 못하고 저따위로 하나...저렇게 거친 표현을 쓰나...그렇다면 공부할 필요가 뭐가 있나. ’이렇게 비난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수자들이 모든 생각을 놓고 난 다음, 어떤 한 순간에 얻는 환희, 충만감, 행복감을 맛본다면 공부하는 사람들은 부러워 할 것입니다. 그런 맛을 느낀 사람들은 경을 봐도 그 근본을 느낄 수 있지만 그런 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경을 봐도 문자만 따라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진 안해본 사람들이 수자들의 나쁜 면만 보고 이러쿵저러쿵하는데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또한, 공부 하는 사람들이 그런 기계가 없다면 재미가 없습니다. 그런 기계가 있는 사람이 파랄 때, 일체 분별심이 없이 자기 길만 갈 수 있을 때 이런 모습은 집착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슴이 쏴해지게 합니다. 그게 서슬입니다. ‘이건 아니야.’ 아니다 라는 곳에서 등을 돌리고 누가 뭐라 하든 내 갈 길을 갈 수 있을 때 그런 것이 서슬입니다. 그래서 선정의 맛을 알아서 사람이 시비분별 안하게 되면 얼마큼 마음을 쓸 수 있는지 그런 맛을 본 사람만이 참선을 하고 공부를 하는 겁니다.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3)|작성자 다마림
4.백일법문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제아무리 공부를 하여도, 근본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 쓸데 없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이를 아난에 비유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아난은 부처님을 모시고 평생 따라다니면서 부처님의 법문을 다 듣는 사람입니다. 아난은 총명하여 듣는 족족 100% 암기를 하였습니다. 실제로도 정말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송광사에 계시는 법봉스님은 스님들의 생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다 외우고 계십니다. 몇 십 년 전에 들은 이야기라도 다 기억하십니다. 아난은 이런 법봉스님보다도 잘 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니, 부처님의 제자들은 모여서 결집을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결집은 부처님의 말씀, 가르침이 유실이 될 까봐 제자들이 모여서 부처님 말씀을 재정립하여 역사에 남기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500명이 모여서 부처님 말씀을 정리하는데, 아난은 그 자리에 끼질 못했습니다. 그 자리에 가더라도 쫓겨났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다 알고 있더라도 근본은 모르고 있다 하여 아난을 쫓았습니다. 그리하여 아난이 사형 가섭에게 물었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제가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까?” 라고 간절히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가섭한테 의지를 하라고 했는데 가섭이 쫓아내니, 도리가 없어 그는 애걸하면서 가섭에게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매몰차게 쫓겨났습니다. 원래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남을 가르칠 수도 있으니, 또한 아난은 부처님의 최측근이니, 밖에 나와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난에게 사람들이 큰스님이라고 하며, 법문 해주시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법문을 하니,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법문을 더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문이 들리는 가운데, 한 소식 하는 스님이 아난이 법문을 하는 근처에서 정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아난이 법문 한다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으면서 아주 시끄럽게 법문을 하니, 그 스님은 ‘아난이 자기 알게 하는 재주에 빠져서 공부를 제대로 못하는 구나. 깨침을 줘야겠다.’ 생각하여 아난에게 가서 게송을 읊어주었습니다.
나무 밑에 고요히 앉아
열반을 생각 하되
좌선을 하며 게으르지 말라
많은 말은 필요 없느니라.
아난은 이 게송을 듣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충격을 받고, 이제부터 열반이 무엇인지, 근본세상이 무엇인지...부처님 말씀에 몰두하게 됩니다. 아난은 무조건 부처님 말씀만 녹음기처럼 외운 겁니다. 부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고, 부처님 말씀만 그대로 알고, 그대로 행동만 한겁니다. 그러나 발기비구라는 사람은 항상 부처님 말씀 한마디 듣고 그 근본을 안 사람들입니다. 마음 자체에 집중하여 공부를 하게 되면 그 마음이 점차 깊어지고 강해지고 흔들림이 없게 됩니다.
정말 참선하는 사람들은 참선 하면 할수록 그 마음자체가 굉장히 부드러워지고 평온해 집니다. 그 마음이 넓어집니다. 그래서 그런 힘을 가진 사람들은 갑자기 어떤 경계가 온다 하여도 정진을 잘하며, 또한 선정의 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호들갑을 안떱니다. 그들은 오는 인연의 흐름이 어딘지,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집착을 안하고, 분별을 안하니 진실을 봅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 줌으로 해서 문제 해결 능력이 생깁니다. 이들은 나쁜 인연도 좋게 만들고 나쁜 인연도 피해가게 해줍니다. 이런 힘을 가진 사람들은 상대방이 아무리 정교한 논리를 가지고 온다하여도 속지 않습니다. 발기비구는 그런 힘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힘이 있으니, 아난의 많은 말에도 끄달리지 아니하고 말을 던져 준 것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들은 던져주는 말에도 힘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난은 충격을 받아서 밤잠을 안자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공부에 너무 지쳐서 쉴려고 하는 그 순간에 깨달음이 왔습니다.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 공부 완성이라고 하는 것은 아난이 그 많은 법문을 외우고 하는 이러한 것도 공부의 축적 과정으로 봐주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그런 공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공부를 축적하는 과정으로 봐주어야 합니다. 보통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밥 먹고 공부하고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전생에 닦아놨던 겁니다. 공부가 축적이 되어서 터지는 것이지, 그냥 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철스님은 어릴 때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금방 신선이 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이런 상상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얘기를 들어보니, 스님은 어렸을 때 몸이 약하셔서 약을 먹고 사셨다고 합니다. 몸이 아프니 몸이 건강해지길 원하고, 죽음이 떠오르니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좀 오래 살고, 영원히 살 수 있으려고 책을 엄청 읽으셨답니다. 그런데 한번 책에 재미를 붙이면, 하루 종일 책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스님도 그러하셨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채근담강의(菜根談講義)'라는 책이 있어 그것을 펼쳐 보다가 한 군데 눈이 딱 멈추셨다고 합니다.
我有一卷經하니 不因紙墨成이라
展開無一字호대 常放大光明이니라.
나에게는 한 권의 책이 있으니
흰 종이와 검은 글자 책이 아니어
펼치면 한 글자도 보지 못하나
언제나 늘 큰 광명을 놓고 있도다.
<展開無一字>
‘한글자도 없다.’ 이것은 법성게에서 말하는 무명, 무상, 절일체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고 깜짝 놀라셨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채근담에서 나오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말하는 깨달음, 열반과 맥이 상통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게송을 보고 환심을 내셨다고 합니다.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4)|작성자 다마림
여러분들은 정말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글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희가 처음에 공부할 때, 누가 이런 이야기를 설명해 주었다면 더 잘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10년 넘게 선방다니며, 왔다갔다 하며, 평생 책을 안볼거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정경록과 인연이 되어 보고 난 다음에 절집에 번뇌가 있다고 믿어, 그 때부터 공부를 하였습니다. 나이 40이 되어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1996년 여름에 인월암에 들어가면서 공부를 하고 강의를 하며, 정리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동화책 4권을 제외하여 11권의 책을 냈습니다. 앞으로 몽산법어, 내친김에 선가귀감 책도 나올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러시아 모스크바 가서 강의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몽산법어를 강의 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중국 불교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한국사람이 불교에 대해 강의를 하는데 중국불교를 가르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전부 중국, 인도 불교를 배웁니다. 돌이켜보면, 한국 불교, 한국 불교 저서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전문가들이 없습니다. 저는 외국에 나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습니다. 제가 나가서 한국 불교에 대해 이야기를 할려니, 저 또한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굉장히 놀라웠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스님들은 전부 중국 스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불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중국 스님이 아닌 한국 스님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스님의 저서 역시 좋은 저서가 많습니다.
중국 시아몬에 가면 큰 절이 있습니다. 거기를 가니, 그 절 방장 스님이 한국스님이 오니, 굉장히 좋아하셨습니다. 그 당시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시길, 보조스님의 수심결을 10만부를 찍어서 돌렸다는 겁니다. 십몇 년 전에 우리는 수심결을 일부에서 이야기를 했지, 그것을 번역을 해서 공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정작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이정도만 알지, 별로 보조스님의 실체에 대해서 접근한 사람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가능하다면, 한국 스님의 이야기를, 한국 스님이 지은 저서나 법문을 가지고 공부를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조스님의 수심결이나 어록을 보게 되면, 여러분들 ‘공적영재’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쌍차(雙遮), 쌍조(雙照)는 들어보셨습니까? 쌍차(雙遮)는 모든 걸 부정하는 겁니다. 일체 인정을 안하는 겁니다. 차(遮)는 막을 차자로서, 시비분별이 들어오는 것을 다 막는 다는 겁니다. 쌍(雙)은 니가 옳으면 내가 그른 것이고, 내가 그르면 니가 옳은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쌍입니다. 쌍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시비분별을 통해서 어떤 분별심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들이 전부 끊어진 것이 쌍차 입니다.
그런 것들이 다 끊어지게 되면 우리 속에서 번뇌가 사라집니다. 번뇌가 사라지면 부처님 마음만 남습니다. 부처님 마음 위에 무명이 떨어져, 무명이 무럭무럭 자라 중생계를 만들어냅니다. 시비분별이 떨어지면 무명이 사라집니다. 중생들은 무명이 만들어낸 헛것을 가지고 계속 시비분별하고 살지만, 그게 사라지면 부처님 세상이, 감히 보지 못한 세상이 보이게 됩니다. 세상이 보여, 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염지 입니다. 부처님의 지견을 가지고 삶을 살 수 있는 게 염지 입니다. 공적염지에서 번뇌가 사라져버려 고요하게 되는 것이 공적입니다. 공적한 그 자리에서 부처님 마음이 드러났기 때문에 대광명이 비추어집니다. 대광명이 비치는 것을 쌍조(雙照)라고 합니다.
이것이 염지에 해당되고, 선정과 지혜 중 지혜에 해당되는 겁니다. 선정은 고요한 마음이며, 고요한 마음에서 빛이 나는 게 지혜입니다. 그래서 ‘한글자도 없다.’ 라고 하는 것은 모든 시비분별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공적한 자리가 드러나는 것이고 ‘큰 빛이 드러난다.’는 것은 부처님 지혜가 거기서 뻗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공적염지에서 염지에 해당이 되는 것이고, 쌍차, 쌍조에서 쌍차에 해당이 되며, 대광명이 드러나는 것은 쌍조에 해당이 됩니다. 쌍차 자리에서 쌍조가 일어나며, 쌍차 그 자리에서 쌍조가 일어나고 쌍조가 있는 자리에 쌍차가 있게됩니다. 그것을 쌍차, 쌍조라고 합니다. 쌍차, 쌍조를 다른 말로 하면 조적이라고 합니다. 비추는 지혜와 고요한 마음, 이것은 동시 한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것을 조적동시라고 합니다. 그것을 또한 다른 말로 하면 자선정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쌍차, 쌍조를 다른 말로 중도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중도실상자리를 알 수 있게 게송을 하나 읊어 보겠다하여 성철 스님께서 게송을 하나 읊으셨습니다. 이 게송 자체가 여러분께 화두가 될 수 가있고 정리를 할 때, 무료하실 때, 밤에 마음자체가 흥이 나실 때, 읊으시면 좋은 게송입니다.
奇哉自家大寶藏이여
無限神功妙難測이로다
頓超意地徹心源하면
靈光이 長照不壞身이로다.
기이하도다. 내 집에 있는 큰 보배 곳간이여!
끝없는 신기로운 공능이 오묘하여 측량하기 어렵구나.
나라는 마음을 문득 벗어나 마음의 근원을 사무치면
신령한 빛이 무너지지 않는 법신을 영원히 비추도다.
사무친다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확실하게 안다는 의미입니다.
‘奇哉自家大寶藏이여 無限神功妙難測이로다’
<기이하도다. 내 집에 있는 큰 보배 곳간이여! 끝없는 신기로운 공능이 오묘하여 측량하기 어렵구나.>
이 표현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다음, 화엄 경계에 들어가 그 깨달음을 훓어 보는 과정에서 내지르는 탄성입니다. 부처님이 성불하고 난 다음에 바뀐 세상을 표현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볼 때는 아직 공부가 한참 모자란 중생으로 보일 겁니다. 또 나도 여러분을 볼 때는 이론적으로 모두 다 부처님으로 봐야지, 그런 생각을 갖지만 중생으로 보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것은 나도 중생이고, 여러분들도 중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부처님 마음을 더 갖고 있다 하면, 여러분들을 부처님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더 클 것입니다. 부처님의 눈은 시비분별이 다 사라진 눈이기 때문에 온 세상을 부처님으로 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난 다음에 여러분들을 보니, 전부 부처님이더랍니다. 그건 깨달아서 부처님이 된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은 이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부처님이었다는 겁니다. 깨닫고 나서 보니, 깨닫고 나서 부처님이 된 것이 아니라 깨닫기 전부터 이미 부처님이었다는 겁니다. 그런 대목을 첫 탄성으로 내 뱉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기록상으로 부처님의 첫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성제, 팔정도를 설하기 전에 어떻게 보면 부처님이 어떤 근본을 탄성 한마디에 다 담아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내용을 보겠습니다.
菩提樹下에 初成正覺하시고 歎曰 奇哉奇哉라 一切衆生이 皆有如來智慧德相이언마는 以分別妄想而不能證得이로다. [華嚴經]
보리수 밑에서 처음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을 둘러보고 찬탄하며 말씀하시기를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모든 중생들이 다 여래의 지혜와 공덕을 갖추고 있구나! 그런데도 분별망상 때문에 그것을 알 수가 없도다.”
여래의 지혜덕성은 부처님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부처님의 첫 마디가 참선법문을 하고 계신 겁니다. ‘깨닫고 나니,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이었다.’ 그런데 이 말은 믿기 어려웠단 겁니다. 택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진실만을 이야기 하십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보지 못하는 것은 분별, 망상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비분별을 끊기 위해서는 좌선을 해야 합니다. 화두를 하여야 합니다. 화두에 우리가 마음을 두고 화두와 하나가 될 때 그 자리에 시비분별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래 지덕성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깨달음을 얻는 다는 겁니다.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4-1)|작성자 다마림
5.백일법문
지금까지 불교의 깨달음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깨달음이란 법성, 자성, 진여, 중도라는 이야기를 게송을 인용해서, 경전을 인용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깨달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깨달음을 가장 빨리 얻을 수 있는 길은 참선하는 수행에 있다는 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또한 그렇다면 참선수행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정리를 해놓은 대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계속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마음을 깨치려고 하면 여러 방법이 있는데 교(敎)에 있어서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삼승십이분교가 벌어지고 또 선(禪)에 있어서는 언어문자를 버리고 바로 깨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의 근본 입장에서 볼 때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기 전에 이미 알아맞혔다 해도 공연히 땅에서 넘어져 뼈를 부러뜨리는 사람입니다. 하물며 덕산스님이 비 오듯이 몽둥이로 때리고 임제스님이 우레 같은 할(喝)을 한다 하여도 관 속에서 눈을 부릅뜨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송장이 관 속에서 아무리 눈을 떠 봐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법상에 앉아서 쓸데없이 부처가 어떻고 선이 어떻고 교리가 어떻고 이러니저러니 하는 이 법문은 중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생들에게 독약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이 법문이 사람 죽이는 독약 비상인 줄 바로 알 것 같으면 그런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불법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부처 되려는 병, 조사(祖師) 되려는 병, 이 모든 병을 고치는 데는 우리의 자성을 깨쳐서 모든 집착을 벗어나면 참으로 자유자재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서는 집착을 버릴래야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이 바른 사람이라면 부처님이나 달마조사가 와서 설법을 한다 하여도 귀를 막고 달아나 버려야 합니다.
예전에 무착(無着文喜)스님이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그 절 공양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큰 가마솥에 팥죽을 끓이고 있는데 그 팥죽 끓는 솥 위에 문수보살이 현신(現身)하였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큰 종을 치고 향을 피우고 대중을 운집(雲集)시키려고 야단했을 터인데 무착스님은 팥죽을 저었던 주걱으로 문수보살의 뺨을 이리 치고 저리 치면서 말했습니다.
“문수는 네 문수며 무착은 내 무착이로다[文殊自文殊 文喜自文喜].”
그와 같이 이 대중 가운데서 ‘성철은 너 성철이고 나는 나다. 긴 소리 짧은 소리 무슨 잠꼬대가 그리 많으냐’ 하고 달려드는 진정한 공부인이 있다면 내가 참으로 그 사람을 법상 위에 모셔 놓고 한없이 절을 하겠습니다. 그런 무착스님의 기재가 참으로 출격장부(出格丈夫)이며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내 밥 내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어째서 남의 집 밥을 구걸하느냐 말입니다. 부디 내 밥 내 먹고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언어문자를 익히는 것뿐만 아니라 육도만행(六途萬行)을 닦아서 정각(正覺)을 성취하는 것이 어떠냐고 흔히 수좌들이 나에게 묻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전 조사스님들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하려고 하는 것은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것과 같다’고.
어떤 바보 같은 사람이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갈 것입니까. 육도만행이 보살행으로서 아무리 좋다고 하지만 이것으로는 자기 자성을 깨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조 오백 년 동안의 불교계를 볼 때 대개 서산(西山)스님을 그 대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것은 좀 틀립니다. 진묵(震黙)스님이 말씀하셨듯이 명리승(名利僧)이지 참다운 도인(道人)이 아니더라 그 말입니다. 그런 서산스님이 말했습니다.
“오히려 일생 동안 어리석은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승이 되길 바라지 않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산스님의 문집(文集)이 여러 권 있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그러나 이런 결심이 있었기 때문에 서산스님의 문집이 후세에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투철한 각오가 없었다면 일종의 문자승이나 되고 말았지 어찌 이조 오백 년을 대표하는 스님이 되었겠습니까. 우리가 앞으로 공부를 함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경전을 배우면서 참선을 하고, 참선을 하면서 경전을 배우고 조사어록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언어문자는 산 사람이 아닌 종이 위에 그린 사람인 줄 분명히 알아서 마음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여기 대중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로 공부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염불이나 주력(呪力)을 하든지 또는 경을 보아 삼매를 성취하여 성불한다는 등등. 그러나 그 무엇보다는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것이 성불하는 지름길이라고 조사스님들은 다 말씀합니다. 그러니 이 법회 동안에는 누구든지 의무적으로 화두를 해야겠습니다. 이제 내가 화두를 일러줄 터이니 잘 들으십시오.
不是心 不是物 不是佛이니 是什麽오.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내가 일러준 이 화두의 뜻을 바로 알면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고 자성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흔히 이 화두의 뜻을 잘못 알고 ‘마음이라 하면 어떻고 물건이라 하면 어떻고 부처라 하면 어떠냐’고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늘 마음속에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의심을 지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까지 자기가 참구하는 화두가 있는 사람은 그 화두를 놓치지 말고 더욱 간절한 의심을 지어 가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무착스님이 문수보살을 친견한 이야기를 했는데, 문수보살이 무착스님에게 설한 법문입니다.
若人靜坐一須臾 勝造恒沙七寶塔
寶塔畢境碎微塵 一念淨心成正覺.
잠깐 동안 앉아서 챙긴 한마음
많고 많은 보물 보다 더 좋은 공덕
많은 칠보 언젠가는 티끌이 되나
한 생각에 맑힌 마음 영원한 깨침. 』
스님께서 참선 수행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그 근본자리에서 다 군더더기 아니냐, 하시면서 비유를 들기를, 임제 스님이 파릇하고, 덕산 스님이 몽둥이로 오는 납자들을 두들겨 패도, 관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치는 거와 마찬가지다,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다, 하여 쳐버리고 있습니다. ‘문수는 문수고 무착은 무착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근본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근본자리에서 일체 지견이나 선입관이나, 이전에 무엇을 설정을 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뛰쳐나오는 소리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뒤에 가서는 경전을 배우면서 참선을 하고, 참선을 배우면서 경전을 하고 조사어록을 읽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조사스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분들의 말씀은 현란함이 없습니다. 상징적이고, 비유적이고, 사람 숨통을 움켜쥐었다가 확 풀어주기도 합니다.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5)|작성자 다마림
제가 백련암에서 있을 때, 기도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잘 할 수 있도록 사형님들하고 기도하는 짬짬이 10분씩, 기도하는 분위기를 잡아 준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같이 들어갔던 스님이 지금 해인사 수자스님으로 계시는 원융스님과 원통스님입니다. 원통스님은 살아계실 때는 신도들한테 절을 많이 시키셨고, 기도를 시키셨고 스님들한테는 참선을 하라그러셨는데, 스님들이 참선을 하기 전에는 항상 스님 밑에서 경전을 보도록 했습니다. 쉬지 않고 3년을 경전을 봐야 ‘정법안정’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강원에 안보내고 스님 밑에서 직접 경을 보도록 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일화가 있는데, 쉽게 말해 강원을 믿지 못하셨습니다. 강원에 가서 공부를 하면 제대로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자기 밑에서 공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법회를 보는데, 원융스님이 신도들한테 가서, 아부라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갖다놓고 마음을 깨닫는 길, 성불 하는 길, 부처님이 되는 길은 참선이 최고라고 하면서 참선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니, 거기서 기도 하던 사람들이 흔들리는 겁니다. 큰 스님의 말을 믿고 기도를 하러 온 사람들한테, 스님이 진짜 공부를 하고 성불하려면 참선을 해야 한다니깐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어 원융스님에 이어 원통스님이 법회를 보러 들어오셨는데, 보살들한테 ‘당신들은 업보가 많으니, 무슨 참선이냐, 절이나 해야 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선을 주로 하던 사람들은 원융스님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또 그 스님이 들어와서 절하고 기도하라고 하니, 이것을 주로 하던 사람들은 그렇다 하여 좋아했습니다. 그런 다음 제가 법회를 들어갔습니다. 보살들은 원융스님은 큰스님이다 보니, 거기에 감히 질문을 못하겠고 또한 원통스님은 너무 무섭게 생기시기도 하고 무서우시고 하니, 질문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들어가니까, 보살님들이 제게 어떻게 하여야 하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보살님들께, “보살님은 어떤 스님을 좋아하시고 따르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스님들은 자기가 공부하는 방식으로 보살들이 공부하기를 원하십니다. 자기가 익어있는 방식으로 공부하기를 바랍니다. 이렇듯 제가 볼 때는 자기의 공부 이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보살님들께 “보살님들이 일단 스승으로 정하신 그 스님들을 따라서 공부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백일법문과 인연이 되어, 백일법문이 최고라고 생각이 든다면, 여러분들이 참선이 최고라고 생각이 든다면, 온통 마음이 참선에 가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다 이념이 다르기 때문에 내 인연이 닿은 사람들에게는 참선을 시키지만 내 인연이 달라서 다른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내 이념이 담긴 공부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념이 담긴 공부방식도 포용해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수자 생활을 하다보면, 내 공부가 최고라 생각하여 다른 공부 방식을 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이 부분도 그런 부분을 상기시켜줍니다. 참선을 하면서 경전을 배우고 또 경전을 하면서 참선을 하고 조사어록을 읽어야 한다고 성철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이야기는 수자 공부를 일주일, 한달 안에 끝내야지, 라고 마음을 먹은 사람들한테는 해당 될 수 있는 이야기 일지 모르지만 불교에 대해서 기초도 모르고 마음이 갈팡징팡 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식의 공부를 강요한다면, 5년,10년 후에는 낭패를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초보자들은 공부가 익어 질 때까지, 10년 정도는 항상 생활은 참선하는 자세고, 화두 참고를 하는데 내가 이것을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를 부처님, 조사스님의 말씀에 의지를 해서 응용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5,10년 후에 공부가 익어서, 이 길 밖에 없다고 생각 될 때, 불림문자, 괘별자를 표방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중도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지금 백일법문 강조를 하면서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참선이다, 그 참선 가운데에도 여러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빠른 것은 화두다, 하여 공부하는 대중들한테 화두를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不是心 不是物 不是佛이니 是什麽오.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은 이 화두를 깨칠 때까지 정진하라는 뜻입니다. 마음이라 하면 어떻고, 물건이라 하면 어떻고, 부처라고 하면 어떻던가, 다 그게그거 아닌가, 라는 식으로 의리를 가지고 말로 가지고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화두의 진정한 목적은 그 화두에 몰입이 되어서 화두와 하나가 됐을 때, 화두의 진정한 이치를 깨칠수 있기에, 어떤 화두를 받았을 때, 알았다 하여 자기 식대로 해석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문수보살이 무착스님에게 게송으로 설한 본문이 나옵니다. 이 게송은 굉장히 유명합니다.
若人靜坐一須臾하면 勝造恒沙七寶塔이라
寶塔은 畢竟碎微塵이어니와 一念淨心成正覺이로다
잠깐 동안 앉아서 챙긴 한마음
많고 많은 보물 보다 더 좋은 공덕
많은 칠보 언젠가는 티끌이 되나
한 생각에 맑힌 마음 영원한 깨침.
若人靜坐一須臾하면 勝造恒沙七寶塔이라
<잠깐 동안 앉아서 챙긴 한마음 / 많고 많은 보물 보다 더 좋은 공덕 >
약(若)은 만약이고, 수요(須臾)는 아주 짧은 시간을 말합니다. 일수요(一須臾)는 잠깐 사이를 이야기 합니다. 정좌(靜坐)는 여러분들이 아침, 저녁으로 좌선하는 그 모습을 이야기 합니다. 조(造)는 만드는 것을 말하며, 항사(恒沙)는 겐지스강 모래알을 말합니다. 그 안에 있는 모래알만큼의 뜻이며 즉, 어마어마한 숫자를 말합니다. 이 표현은 많은 경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寶塔은 畢竟碎微塵이어니와 一念淨心成正覺이로다
<많은 칠보 언젠가는 티끌이 되나 / 한 생각에 맑힌 마음 영원한 깨침.>
‘칠보탑은 필경 부서져 티끌이 되지만, 생각 깨끗한 마음은 뒷날 바른 깨달음을 이루느니라.’ 내가 정진하여야 겠다, 화두를 깨쳐야겠다 마음먹고, 한 생각을 챙길 때, 이는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종자를 심어주는 셈입니다. 이 종자는 한 번 심어주면 영원히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 씨앗이 발아서 싹이 트고, 꽃이 필 시절이 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겐지스강 모래알 같은 칠보탑은 언젠가는 부서져, 그 자취가 온데간데 없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수자들이 한 생각 챙기는 마음을 갖는다면, 마음속에서는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며 어느 날 인연이 모아질 때, 싹이 트고, 꽃이 펴서 깨달음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겁니다.
선방에서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철 정진 잘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정진만 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확신이 있습니다. 사실도 그러합니다. 공부를 잘하고 정진을 잘하면 자신이 원하는 데로 이루어집니다. 오대산 법흥사에 주지스님이 계십니다. 그 스님은 기도를 참 잘하는데, 어느 날 겁이 나서 기도를 못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인즉, 기도를 하면서 마음속으로 원하는 것을 말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 스님뿐만이 아니라 주력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주력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진 잘 하는 사람들은 원하는 바는 있는데, 원하는 그 자체가 삿되기 때문에 기도하기가 겁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수자입니다. 앉아있으면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어떤 영적인 세계에서 주어지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공부하는 사람들이 한 생각을 일으키면 에너지가 생겨 부수기도 하고 일으키게도 합니다.
여러분들, 무당들 아시죠? 무당들이 스님들을 만나면, 기가 죽고 위축이 됩니다. 그 이유인즉, 그들에게는 영적인 기운을 감지하는 기운이 있지만, 공부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파장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역량 가지고는 그것을 넘어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5-1)|작성자 다마림
6. 백일법문
중도는 앞으로도 많이 쓸 표현입니다.
깨달음 자체가 중도입니다. 깨달음을 중도라고 하는 표현을 쓰면서, 깨달음이 이런 것이라는 안내를 하는 겁니다. 교학에서의 중도사상은 주로 부처님 말씀, 경전에 의거하는 것이고, 선종에서의 중도사상은 선사들의 이야기에서 중도사상을 이끕니다. 중도는 양쪽의 집착을 여인 것, 두변을 여인 것을 말합니다. 두변은 상대적인 개념을 말하는데, 보통 상대적인 개념은 유무, 생멸, 단상(단절된 것,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육조스님 같은 경우에는 36대대법이라 하여 상대적인 개념을 36가지를 늘어뜨리면서 한 쪽에 치우치지 말고 벌어놔야 중도라고 했습니다. 이 내용은 육조단경에 나옵니다. 중도는 결국은 집착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육조스님은 ‘응무소주이생지심(應無所住而生其心)’을 듣고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이 뜻은 집착없이 마음을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심의 마음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응(應)은 응단이며, 무소주(無所住)는 머무른바 없이, 이생지심(而生其心)은 그 마음을 낸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어떤 경계에 가서 머물러 있다는 것은 그 경계에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머무른 바 없이 마음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표현은 절집에서 익어져 있어서 자연스럽게 쓰는데 이 말뜻을 일반사람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그 표현을 다른 표현으로, ‘집착 없이 마음을 낸다. 무심하게 마음을 낸다.’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면 사람들이 금방 알아듣습니다. 육조스님의 이 말은 한마디로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쓴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항상 시비분별에 집착을 합니다. 중생들에게는 집착하는 습이 있기 때문에 그 습을 밀쳐내는 과정에서 시비와 분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비와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 중생들의 고(苦)고, 삶입니다. 그런 삶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 고통을 벗어나려면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고 살아야 하고, 이러한 삶이 중도사상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부처님 경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선종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러한 내용이 나온 것이 이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그 교리 내용이 복잡다단합니다. 다른 종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은 간단하지만 불교의 소의경전은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방대한 전적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도 어떤 때는 이런 방편을, 어떤 때는 저런 방편을 말씀하셔서 얼핏 보면 서로서로 모순도 있는 것 같고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45년 간 설법하신 말씀 전체를 체계화하고 가치적으로 배열하여 자기 종파(宗派)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게 되었는데 교학적으로 이것을 교판(敎判)이라고 합니다. 교상판석(敎相判釋)의 줄인 말로서 혹은 간단하게 판석(判釋)이라고도 합니다. 판(判)은 부판(剖判), 쪼개어 판단한다는 뜻이며 석(釋)은 해석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복잡한 불교의 이론체계를 교학적으로 정리하여 교판(敎判)을 가장 잘 세운 이가 바로 천태종(天台宗)의 지자대사와 화엄종(華嚴宗)의 현수대사입니다.
지자대사(智者大師)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시팔교(五時八敎)로 분류하여 해석했습니다. 오시(五時)란 부처님 일생 동안의 설법을 다섯 시기로 나눈 것이니, 첫째는 화엄시(華嚴時)로서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성도(成道)하시고 불교 최고의 진리를 말씀하셨다고 하는 21일 간의 설법기간을 말합니다. 둘째는 녹야원시(鹿野苑時)로서 21일 간 화엄경을 설하시고는 다시 교진여 등 다섯 비구들을 위해 소승교(小乘敎)를 설하셨습니다. 이후 12년 간 주로 소승교만을 설하셨으며, 이때의 설법을 결집한 것이 아함경(阿含經)이라고 하여 이 시기를 아함시(阿含時)라고도 합니다. 셋째는 방등시(方等時)로서 대소승의 법을 함께 설하여 영리한 근기(根機)나 둔한 근기나 간에 고르게 이익을 주는 시기를 말합니다. 유마경, 사익경, 능가경, 능엄삼매경, 금강명경, 승만경 등을 설한 연간을 말합니다. 넷째 반야시(般若時)란 방등시(方等時) 후 22년 간 모든 반야경을 설법하신 것을 말합니다. 다섯째는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로서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한 시기를 말합니다. 법화경은 8년 간의 설법이며 열반경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는 최후 하루 낮 하룻밤 동안에 설법하신 것입니다. 오시(五時)를 가르친 시기를 합산해 보면 50년이 되는데 지자대사는 부처님께서 29세에 성도하시고 79세에 열반하셨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오시팔교(五時八敎)라는 말을 참 많이 씁니다. 오시라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시기별로 정리를 해놓았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난 다음에 그 깨달음으로 인해 들어가서 본 세상이 화엄경의 세상입니다. 그 화엄경의 세상을 중생들에게 일러주려고 하니, 엄두가 안나셨습니다. 엄두가 안나니, 법을 가르치겠다고 하는 생각을 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제석천이 그러한 모습을 보고 내려와서 방편으로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법을 설했으니, 부처님도 해주시는 게 어떻겠냐고 하여 시작한 게 법문입니다. 그래서 녹야원에 가서 초전법률을 설법하시게 된겁니다. 천태지자 대사가 나름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림을 그려서 정리를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정확하다 라고 하는 것은 사실 맞지 않습니다. 단지 모든 경전, 아함경까지 갖다 놓은 다음에 그 경을 내용이나 수준별로 분류를 하여 천태지자 대사가 분류를 한겁니다. 천태지자 대사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 당시 화엄경이 최고의 경전인데 부처님이 성불하시고 난 다음에, 그 세계를 잠깐 보고, 중생들의 근기에 맞지 않기에 법문을 안하려고 하니, 제석천이 도움을 주게 됩니다. 제석천의 도움을 받아서 초등학생 가르치듯이 ‘가, 갸 ,거, 겨..’이렇듯 불교의 초보단계부터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아함경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초등학생을 가르면서 말길을 알아들으면, 그 다음 옳고 그름을 가르칩니다. 1학년 애들은 너무 어려서 어떤 게 옳은 건지, 그른 건지 판단이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하지 않습니까?
방등(方等)경은 불교의 반듯반듯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반듯반듯한 모습을 보여,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겁니다. 애들이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움직이다가 사회생활을 가르치기 위해서 무엇을 알만하면, 도덕성을 가르칩니다. 그것이 방등시(方等時) 입니다. 도덕성을 배워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교에 들어가면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창의성을 요구 합니다. 우리가 방등시하여 경을 어느 정도 배워 올라가서 어떤 틀이 잡히게 되면, 그 틀에 안주하는 게 아니라 그 틀을 가꾸게 하는 어떤 근원을 알아야 합니다. 그 근원을 알기위해서 그 틀을 부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반야시(般若時) 입니다. 반야시는 반야 지혜를 가지고 공사상을 사냥하는 것입니다.공사상을 일체 부정한다는 겁니다. 일체를 부정하는 데서 대 긍정이 나오는 것입니다.
반야시가 끝나고 난 다음에 창의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끝내려, 공부를 완성시키려 하면 거기에 맞는 수자 공부를 던져줘야 합니다. 천태 지자대사는 법화경을 숭배하는 사람입니다.
천태 지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법화경의 최고의 경전입니다. 또한 열반경은 부처님이 돌아가셨을 때 설하는 경전이기에 그러므로 부처님의 지혜가 다 녹아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맨 마지막에 설하는 경전이 법화 열반경입니다.
이리하여 경 자체를 5가지로 분류를 해서 이건 12년 가르치고, 이건 8년 가르치고, 이건 22년 가르치고, 8년 가르치고 해서, 50년을 가르쳤다 하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29세에 성불하여 79세에 열반하셨다 하여 나름대로 부처님 나이를 계산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탄생의 나이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어떤 설이 옳은가,를 따져보면 굉장히 머리가 아픕니다. 그리하여 구두절미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천태 지자대사는 우리가 이해하고 정리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는 것, 그것만 이해하고 앞으로의 글을 봐줘야 하겠습니다.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6)|작성자 다마림
『팔교(八敎)란 부처님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법의 방식을 달리한 것인데 그 교화 방법에 따라 네 종류로 나누니 화의사교(化儀四敎), 즉 돈교(頓敎)․점교(漸敎)․비밀교(秘密敎)․부정교(不定敎)이고, 또 설법의 내용에 따라 네 종류로 나누니 화법사교(化法四敎), 즉 장교(藏敎)․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를 말하는 것입니다. 장교란 경장․율장․논장의 삼장에 의해서 세운 교법으로서 소승자리교(小乘自利敎)를 말합니다. 즉 아함경․5부율․바사론․구사론 등의 교학입니다. 통교란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의 삼승에 공통하고 삼승이 함께 받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별교(別敎)란 성문․연각의 이승과 함께할 수 없고 보살승의 수행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별교는 격력(隔歷)의 입장에서 설명한 교리이며 원융무애(圓融無礙)의 입장에서 설명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원교와는 틀립니다. 원교란 격력이 아닌 사(事)와 이(理)가 원융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을 설명하므로 대승 가운데 최고로 깊은 가르침을 말합니다.
화엄종의 현수대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교로 분류하여 해석했습니다. 오교(五敎)란 첫째 소승교(小乘敎), 둘째 대승시교(大乘始敎), 셋째 대승종교(大乘終敎), 넷째 돈교(頓敎), 다섯째 원교(圓敎)입니다. 소승교란 아함경․바사론․구사론 등의 말씀으로서 우법소승(愚法小乘)이라고도 합니다. 우법(愚法)이란 ‘법에 어리석다’는 뜻으로 대승보다 못하다는 뜻이니 인아(人我)가 공함은 알지만 법아(法我)의 공함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대승시교란 대승초문의 가르침이기에 시교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또 상시교(相始敎)와 공시교(空始敎)가 있습니다. 상시교는 해심밀경․유가론․유식론 등에서 사와 이가 격력하고 오성각별(五姓各別)로써 일체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공시교는 반야경․중론․백론․십이문론 등에서 일체 모든 것은 공(空)이라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대승종교는 대승의 종극적인 말씀으로서 근기가 원숙한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열반경․능가경․승만경 등의 경과 기신론․보성론 등이 이것입니다. 돈교는 수행의 계단을 세우지 아니하고 ‘한 생각 나지 않음이 곧 부처’임을 깨닫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특별한 경론은 없으며 경론 가운데서 이와 같이 설법하는 것은 모두 돈교라고 합니다. 현수대사의 시대에는 아직 선종이 성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돈교에 선종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원교는 원융원만한 가르침이라는 의미로서 완전한 교리를 말하니 화엄종 자체를 가리킨 것입니다. 화엄종은 일승에는 동교일승과 별교일승이 있다고 주장하나, 원만한 가르침으로 말한다면 별교일승은 화엄종만이라고 봅니다.
앞으로 각 교단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므로, 우선은 간략하게 천태종과 화엄종의 교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들 교판은 역사적으로 가장 잘된 교판으로 보는데 그 두 교판에서 다 같이 불교의 최고 위치를 어디에다 두었느냐 하면 원교에 두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자대사는 원교를 법화경과 화엄경이라 하고, 현수대사는 법화경을 돈교에 두고, 화엄경만을 원교라고 주장하였지만, 어찌하였든 간에 천태․화엄 양 종파에서 원교를 불교 최고의 원리로 삼은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원교의 근본이 무엇이며 어떤 내용으로 되어 있는가를 알게 되면 불교의 최고 원리가 어느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천태종과 화엄종에서 교파를 하는데, 최고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집니다. 천태종에서는 천태 지자대사가 법화경을 숭배하였기 때문에, 법화경이 최고다, 화엄종에서는 현수대사는 화엄경이 최고다 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관점은 법화경이나 화엄경을 원교라 주장하는 겁니다.
원교(圓敎)는 둥근 원자, 가르칠 교자를 쓰는데, 둥근 원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하여 원교는 조금의 부족함이 없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녹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모습이 아닌, 원상으로 한 가지 모습으로 녹아있는 것입니다. 그런 원교는 사실 중도를 달리 말한 것으로 보면 됩니다. 즉, 원교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결국은 중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圓敎者는 此顯中道니 遮於二邊이니라.[天台, 觀音玄義]
원교란 중도를 나타내니 집착하는 견해를 떨친 것이니라.
자(者)가 첫머리에 붙으면, 강조를 의미합니다. 글을 읽다보면, 차(此)자가 많이 나옵니다. 이는 ‘차단하다, 막는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부정한다.’의 뜻도 있습니다. 막아서 내치는 것을 일컫습니다. 이변(二邊)은 상대적인 개념을 일컫습니다. 이것은 양근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한 가지 주장이 있으면 반대되는 주장이 있습니다.
유(有)가 있으면 무(無)가 있듯이, 생이 있으면 멸이 있고,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듯이,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게 있듯이 이런 것들이 전부 이변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이변에서 좋다, 나쁘다, 너, 나를 구별해서 한 쪽에 집착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생입니다. 우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되어야 하며,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는 중생의 습성을 버려야 합니다.
중생의 습성을 버린다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두 가지 개념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개념조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개념에 집착하는 ‘나’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올바른 중도는 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집착하는 대상도 없는 겁니다. 또한 이것은 모든 경계와 내가 하나가 되있는 자리입니다.
지자대사의 말씀입니다. 불교의 최고 원리란 중도이며 그 중도의 내용은 양변을 다 막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자대사가 좀더 자세하게 설명한 것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心旣明淨에 雙遮二邊하고 正入中道에 雙照二諦니라[天台, 摩訶止觀]
마음이 밝고 깨끗해짐에
병적으로 한쪽에만 집착하는 견해를 모두 떨치고
바르게 중도에 들어가
세간과 출세간의 진리를 둘 다 환히 비추니라.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6-1)|작성자 다마림
쌍차, 쌍조를 앞에서 이미 설명을 하였습니다. 쌍은 이변을 이야기 합니다. 쌍차(雙遮)는 세상의 모든 시비 거리를 차단했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세상의 모든 시비 거리를 차단을 하면 내 마음자리에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번뇌가 시끄럽게 하지 않으니, 고요하고 공적해집니다. 이는 부처님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며, 부처님 마음이 세상에 드러나서 환하게 비추는 것, 그것이 일체종지 입니다.
‘일체 유종, 무종이 일체종지를 이룬다.’ 라는 말은 산천초목과 내가 함께 성불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쌍조이제(雙照二帝) 입니다. 이제는 속제, 진제를 말합니다. 이는 속인들의 진리, 스님들의 진리를 말합니다. 이것을 쌍조라 합니다. 쌍조(雙照)는 모든 번뇌를 제거했기 때문에 진리가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조스님은 ‘공적염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는 공적한 자리에서 부처님의 지혜가 드러난 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쌍차가 있는 자리에 쌍조가 있고, 쌍조가 있는 자리에 쌍차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쌍차, 쌍조는 다른 말로 ‘조적동시’ 라고 합니다. 이는 쌍차와 쌍조가 한 자리에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이 것을 ‘기신론’에서 표현 할 때는 ‘지관(止觀)’이라고 합니다. 그칠 지는 사마타 입니다.
사마타는 화두 참관 할 때, 화두 참관하는 것은 사마타 선에 해당됩니다. 사마타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화두선을 한다는 것은 화두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는 화두 이외의 다른 생각을 일체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칠 지(止)자를 씁니다.
그리고 사마타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비파사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위빠사나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우리가 중도사상을 제대로 깨달으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 ‘아~ 모든 중생들이 여래 지덕성을 갖추고 있구나.’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의상조사 법성게, 맨 마지막 구절에서는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窮坐實際中道床하니 舊來不動名爲佛이로다.
구경에 실제인 중도의 자리에 앉으니
예로부터 움직임이 없어 부처라 한다.
여러분들이 화두를 참관 할 때, 처음은 익어지지가 않아서 애를 먹습니다. 그런데 그 공부가 익어지는 함이 강해지면 화두만 늘리게 됩니다. 화두가 딱 깨치고 나면, 실제 부처님의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궁좌실제(窮坐實際) 입니다.
그 밑에는 쌍차, 쌍조를 알게 되면 종취를 알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종취는 최고의 깨달음이 있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卽照而遮하고 卽遮而照하여 雙照雙遮하야 圓明一貫하면 契斯宗趣矣니라.
진리를 비추면서 번뇌를 떨치고, 번뇌를 떨치면서 진리를 비추어, 모든 진리를 비추고 모든 번뇌를 떨쳐 오롯하게 밝아서 하나로 통하면 부처님의 참뜻에 맞아떨어지느니라.
교학자라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사실 선사들이 하는 이야기 입니다.
백장(百丈)스님은 경․율․론 삼학에 해통하고 지식이 넓은 선지식인데 불법을 바로 보는 견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不落有無 誰敢和.
有와 無에 떨어지지 않으니 누가 감히 화답하겠는가.
불락유무(不落有無)는 유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무에도 걸리지 아니함을 말합니다. 유무는 양변입니다. 불락유무는 양변을 벗어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중도라는 겁니다.
不見有無하면 卽時見佛眞身이니라.[大珠, 頓悟入道要門論]
有나 無를 보지 않을 때 부처님의 참된 몸을 본다.
不見有無는 不落有無와 같은 내용입니다. 또한, 부처님의 참다운 몸은 중도를 말하는 겁니다.
대마조스님의 제자되는 대주(大珠)스님의 말씀입니다.
心旣無二邊이라 中亦何有哉아 得如是者는 卽名中道니 眞如來道니라.[大珠, 頓悟入道要門論]
마음에 이미 어느 한쪽에 집착하는 것이 없다면 중도가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경계를 얻은 것을 중도라고 한다. 이것이 참된 여래의 도이다.
이변이 있기 때문에 중도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心旣無二邊 입니다. 마음이 이미 이변을 집착하지 아니하고 내쳤다는 것은 이변에 상대되는 개념인 중도도 존재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공부를 합니다. 도통, 즉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합니다. 중생의 입장에서 공부를 해서 도통이 되면, 부처님이 되는 겁니다. 또, 부처님이 되어버리면 중생은 존재 하지 않습니다. 중생이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는 부처님이라는 개념도 존재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깨달았다.’하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정말 깨달았다면, 나 자체가 존재 하지 않기 때문에 깨달았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청와대 지도법사를 하시는 원로스님이신 하남스님이 계십니다. 이 스님은 낙은 시간만 나면 오동송을 써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하남스님이 어느 날, 공돈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염명스님이 패교를 하나 사서 절로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같이 갔습니다.
저는 돈이 없으니, 노스님의 공돈을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입니다. 그런데 이 노장 스님이 공돈을 줄 생각은 안하시고 자꾸 오도송 가지고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조금 심통이 나서, “스님, 스님의 오도송에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도 라고 하는 부분을 가리켰습니다. 이에 하남스님이 껄걸 웃으시더니, “내가 그런 허물도 없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겠느냐. 그런 허물이라도 남겨놓으니, 지금 이렇게 웃는 게 아니겠느냐.” 그래서 한방에 이야기가 끝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다보면 깨달음을 얻으면, 그 얻은 순간에 ‘나’라고 하는 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체 시비 분별, 무심한 사람들만 있으니, 이들이 ‘나’를 드러내겠습니까? 그것을 아상(我相)이라 합니다. 금강경은 아상을 모시는 경전입니다. 마음을 쓸 때, ‘나’라고 하는 욕심을 내서 법을 쓰면 그것은 삿법이 됩니다. 전체 흐름을 통해 마음을 쓸 때, 이것이야말로 도인의 마음입니다.
출가해서 공부를 할 때, 좋은 말을 듣고 좋은 말을 하면서 지냅니다. 그렇게 지내다보면 그런 것에 방출하여 스님들 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못난 스님이 굉장히 많습니다. 허물 짓는 스님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것을 가지고 따지게 됩니다. 시비분별을 일으킵니다. 진정한 수자는 어떤 괴로움이 오고, 기득권에 손상이 가하는 일이 온다 할지라도 불평, 불만 없이 시비 없이, 자비심을 다하여 어떤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비에 여념 하게 되면 삿된 수자가 되는 겁니다. 수자들이 시비하려고 달려들면, 수자로 안봅니다. 공부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올해 어떤 인연이 되어서 상자를 받아들게 되었지만, 10년간 나쁜 것을 보지 말고,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언가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백일법문에서도 ‘양변을 여의지 말아라.’ 했습니다. 이 뜻 또한 시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 마음 없이 여러분들이 10년도 아닌 1년간만 사신다면 여러분들이 도인 되는 것은 제가 보장을 합니다. 그게 바로 중도사상입니다.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6-2)|작성자 다마림
7. 백일법문
대승기불소는 요즘 밖에서 간화선을 공부한다든지, 대승경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아함경을 공부하시는 분들이 논의 하는 과정에서 자주 질문을 받을 때, 대답하기 좋은 장르입니다. 제가 여기 들어오기 전에 어떤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은 아함경을 계속 공부하신 분입니다. 아함경을 보시면서, 아함경이 부처님의 진짜 말씀이 아니냐, 법화경이나 화엄경, 능음경이 있지만 아함경만 보면 되지,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조계사 포교를 맡아서 하시는 스님과 우연히 차를 마시게 되었는데 당신은 다른 경전들은 다 문제가 있어서 아함경만 봐야할 것 같다고, 그래서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경전이 아니니깐, 부처님의 직설인 아함경을 봐야한다고 생각을 하여 아함경만 보자는 운동을 한다는 스님들도 계셨습니다.
대승기불소는 1970년도 후반에 불교 교양으로 제가 강좌를 가서, 절집에 들어오기 전에 공부를 하는데 이것을 듣고 굉장히 의아하기도 했고 신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구익진씨라고 아함경을 굉장히 강조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그 당시 와서 아함경 강조를 많이 하셨습니다. 이 분의 바톤을 이어 받아 호진 스님이라고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 스님이 아함경의 대가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아함경의 전통 맥을 받아서 공부하시는 분이 이분인데, 이 분들이 대승비불설 주장을 하시는데, 67년도에 대중을 모아놓고 대승비불설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연을 따라 들어가 보면, 일본 사람들이 이거에 대해 연구를 하고 하여, 세계 학회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어느 정도 통용이 되었는데, 1980년대에도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쉽게 못하던 시대에 구익진씨가 말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86년도에 원택스님이 테잎 풀어놓은 내용 가운데 이 내용이 들리는데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스님이 참 젊은 학자들 보다도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는 분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승기불설은 중요한 부분이기에 미리 습득하고 알고 있는게 좋겠습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대승경전의 입장에서 선(禪)과 교(敎)를 통하여 일관된 최고 원리가 중도사상(中道思想)이라는 것을 설명해 왔는데 대중들도 이해했을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문제가 하나 붙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원시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모두 부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으로 믿고 경전 그 자체에 대해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학문이 발달되고 불교 연구가 깊어짐에 따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들의 성립 시기가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법화경이나 화엄경의 범어본(梵語本)을 언어학적, 문법학적으로 연구한 결과 이 경전들이 부처님 당시에 성립된 것이 아니라 부처님 돌아가신 후 5~6세기 뒤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육조스님께서도 부처님 돌아가신 후 천여 년 뒤의 사람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내가 지금까지 부처님 근본사상은 중도(中道)라고 법문한 것이 부처님 뜻과는 관계없는 거짓말이 되어 버리고 말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당시에 친히 하신 말씀의 기록이 아니라 돌아가신 지 5~6백 년 뒤에 성립된 경전을 인용하여 이것이 ‘부처님 말씀’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경전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불교계가 크게 당황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이라 합니다. 이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의 주장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경전 연구를 거듭한 결과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경전은 아니다’고 하는 확증이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불교의 초기경전으로 대․소승에서 함께 인정하는 아함경(阿含經)은 모두 다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경전인가 하고 연구해 보니 그 아함경조차도 모두 다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니 불교를 어디 가서 찾아야 될지 모르게 되어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살아 계시다면 물어나 보겠는데 그럴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학문적으로 곤란한 상황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교학자인 우정백수(宇井伯壽)라는 분이 ‘어떻게 해야만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알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부처님의 중요한 사적(史蹟)을 기초로 삼고, 둘째 부처님 당시의 인도 일반 사상을 참고하고, 셋째 원시경전 가운데서 제일 오래된 부분이라고 인정되는 것을 종합하면 이것만은 꼭 부처님이 설했으리라고 믿어지는 공통된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원칙들을 기둥 삼고 부처님의 근본불교를 알려고 우리가 노력해야지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如是我聞]’고 시작한다고 해서 모두 다 부처님이 친히 설한 경전이라고 알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리하여 다시 학자들이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연구하여 보니 초기의 원시경전인 아함경도 아니고 대승경전도 아니고 율장(律藏)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율장을 보면 시대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나 문법학적으로나 부처님 당시부터의 사실을 그대로 기록해 내려온 것으로서 혹 중간에 가필한 내용이 더러 있기는 하나, 근본적으로 봐서는 가장 부처님 말씀에 정확하지 않은가 하고 학자들이 판단을 내렸습니다. 율장 가운데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학자들은 통칭하여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합니다. 이 초전법륜이 불교에 있어서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부처님 말씀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7)|작성자 다마림
여기 공부하시는 분들 가운데, 아함경은 부처님의 친설이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아함경 까지도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지금 나오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가섭이 우두머리가 되어 제자 500명을 모아 1차 결집을 하는데 그 당시에는 문자로 기록을 하는 게 아니라, 그 당시에는 암송을 하여 같이 외우는 겁니다. 여러 사람들이 외워서 아래로 이어져 가는데, 세월이 가면서 진실한 사람들은 그 말대로 하지만 글을 하다보면 나는 ‘이게 좋겠다.’하여 변화하는 게 생겨납니다. 공양게는 법정스님이 번역을 한 게 처음이었습니다.
입측진언도 내가 아는 스님이 만드신 건데, 요즘들어 공양게와 입측진언을 보게 되면 글자가 처음 것하고 다릅니다. 내용은 비슷하지만 달라지는 게 눈에 띕니다. 이렇게 문자를 써놔도 변질이 되고 있는데 말로 암송을 해서 전달된다하면 더 심하면 심하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결론은 이렇게 가다가 율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율장은 아함경 비슷한 절차를 밟았겠지만, 옛날부터 부처님의 법은 바른 법이라 하여서 감히 어길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의 초전법률(初轉法輪)이 율장에 있다라고 결론이 난겁니다. 그리고 여시아문(如是我聞) 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는 앞서 말했듯이, 아난이 부처님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외웠지만 그 근본이 없어 결집 할 때 쫓겨났다고 하였습니다.
쫓겨난 다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 외우고 있고, 잘생기고 하여 중생들이 큰스님이라 칭하며 모여드는데, 발기비구가 가서 근본 뜻은 모르지만 큰스님 소리를 들으며 법문을 하니, 가서 이르기를 ‘앉아서 공부를 해야지, 니가 많은 말을 한다 하여서 그 말이 네게 무슨 도움이 돼?’ 이것을 게송으로 읊어서 아난이 충격을 받아 그 때부터 열심히 공부를 해, 쉴려고 할 때 딱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500 제자가 모여 결집을 할 때 거기에 동참을 해서 시작을 하는데, 아난이 주도적인 역할로 결집을 하였습니다.
여시아문은 그리하여 부처님 생각이라고 우리는 말을 하는데 경전이 성립된 시기를 보면, 부처님 것이라고 말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래서 그것을 연구를 해보니, 아함경도 아니요, 법화경도 아니요, 율장이라는 겁니다. 율장 가운데도 여러 가지가 내용이 있는데, 가장 오래 되고 반복이 되는 가, 그 내용이 부처님의 진실이 아니겠는가 하여 이런 원칙을 정해 찾아보니깐 지금 이 밑에 인용문을 옮겨 놓은 대목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율장에서 이 밑에 인용한 내용들은 부처님의 진설이라고 확실을 가지고 본 겁니다.
『세존(世尊)이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출가자는 이변(二邊)에 친근치 말지니 고(苦)와 낙(樂)이니라. 여래도 이 이변을 버린 중도를 정등각(正等覺)이라 한다.
출가(出家)라는 것은 꼭 불교의 승려가 되는 것만이 아니고 인도 당시에는 집을 나가 도를 닦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도를 전념으로 닦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변에 집착해서는 안 되니 예를 들면 고(苦)와 낙(樂)이라는 것입니다. 이변이라 하면 시․비, 선․악, 유․무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어째서 ‘고와 낙’을 예로 들었느냐 하면 부처님 당시 실정에 비춰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수행자들은 대부분이 고행주의자였으며 다섯 비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행주의자(苦行主義者)란 세상의 향락을 버리고 자기 육신을 괴롭게 해야만 해탈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병을 따라 약을 주듯이 고행주의자들인 다섯 비구에게 ‘고와 낙을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이 세상의 향락만 버릴 줄 알고 고행하는 이 괴로움[苦]도 병인 줄 모르고 버리지 못하지만, 참으로 해탈하려면 고와 낙을 다 버려야 한다. 이변을 버려야만 중도를 바로 깨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변을 버리고 중도를 정등각하였다’는 이 초전법륜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부처님의 근본법이라고 확증하고 있으며 이것을 부처님의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라고 합니다.
이 중도대선언은 남전대장경 율부(律部)경전에 있는 것을 인용하였고, 한역(漢譯) 오분율(五分律)․사분율(四分律) 등에도 기록되고 있으나 남전대장경과 같이 명백하고 정확하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깨치신 것이 ‘이변을 떠난 중도’라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봅니다.
세계의 어느 불교학자이든 간에 율장의 초전법륜편의 중도대선언을 불교의 근본 출발점으로 삼는데, 혹 또 논란하기를 경전 성립사적으로 보아서 율장보다도 더 앞선 경전의 하나인 숫타니파타에서도 중도를 설명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숫타니파타의 「피안도품(彼岸道品)」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양 극단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불교의 근본이 중도사상에 있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가 부처님 돌아가신 후 몇 백년 뒤에 성립되었든 간에 어떤 경전이든 중도사상에 입각해서 설법되어져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 법이고 그렇지 않다면 부처님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앞에서 말한 천태종이나 화엄종이나 선종 등이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그대로 이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설법이 아니다.’ 이런 내용에 반박논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어느 것이냐, 따져보니 율장에 나오는 초전법률에 있었다는 겁니다. 초전법률을 보니, ‘참으로 해탈하려면 고와 낙을 다 버려야 한다. 이변을 버려야만 중도를 바로 깨칠 수 있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초점을 맞추는 것은 초전법률의 중도라는 것입니다. 중도는 이변을 여읜것이고, 이변을 여읜 것은 깨달음이고, 그 깨달음은 한문으로 하면 정등각(正等覺) 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등각, 깨달음, 중도는 같은 말입니다. 숫타니파타의 「피안도품(彼岸道品)」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7-1)|작성자 다마림
양 극단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여기서의 양 극단은 이변의 다른 말입니다. 이변이나 양변이나 양 극단이나 똑같은 말입니다. ‘양 극단에 집착하지 아니하고’는 이변을 떠난다,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이변을 벗어나면 앞서 율장에서는 중도라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도에도 집착하지 않는 다는 겁니다. 이는 우리가 중생인데, 공부를 해서 부처님 세상에 가기위해서는 무명을 타파해서 그 세상에 들어가버리면, 중생이 사라지고 중생이 사라지면 부처님 세상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일체 경계가 다 사라지는 겁니다. 일체 경계가 다 사라지기 때문에 거기에서 ‘이것이 중도다, 저것이 중도다.’ 이런 분별이 일어나면 정말 일체 경계가 사라진게 아니란 말입니다. 무아의 경계에 들어가면 스스로 알고 보는 것이 있을 뿐이지, 판단하고 가리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모든 경계가 사라진 자리에서 만약에 부처가 있다, 조사스님이 있다 하면 그것은 진정한 중도의 경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록 같은데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부처가 오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가 오면 조사를 죽인다.’
그럼 우리는 살불살조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위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가르침을 주신 부처님, 조사스님을 죽인다 하여 비난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비난을 들었을 때, 거기에 대한 비난 논리를 지금 정리를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서 중도를 체험하고 깨달음을 얻게 되면 일체 경계가 사라져서 무심한 상태이기 때문에 무심한 상태로 오는 인연을 받아들이고, 가는 인연을 보낼 뿐이지 내가 있어서 시비를 일으켜, ‘부처다, 조사다.’ 이런 마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의 내용은 일체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살불살조라고 하는 것도 부처님 앞에 가서 함부로 처신하고 그럴 듯 하게 노는 것이 아니고 정말 마음자체에서 일체 경계가 다 떨어져가지고 아주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그런 도인들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본문을 이어서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학자들이 잘 몰라서 대승불교를 의심하고 소승불교만이 부처님 불교가 아닌가 하고 연구해 보았지만 부처님의 근본불교가 중도사상에 있다는 것이 판명된 뒤에는 대승비불설은 학계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이론은 일본의 명치(明治) 말엽에서 대정(大正) 초기인 20세기 초엽에 성행했습니다.
그러면 인도에 있어서 용수(龍樹)보살이나 마명(馬鳴)보살이 주창한 대승불교운동(大乘佛敎運動)이란 무엇인가? 대승비불설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대승불교는 용수보살 자신의 불교이지 부처님 불교는 아니라고 하여 소승불교만이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불교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근본불교가 중도에 있다는 것이 학문적으로 판명됨으로 해서 그런 주장은 다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용수보살이 주창한 대승불교의 근본 뜻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그때까지 있었던 부파불교에서 벗어나 바로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근본불교로의 복구운동이었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세월이 지나면서 제자들이 각지로 흩어져 살게 되면서 각자의 교리를 주장하게 되는데 이 시대를 불교사적으로 부파불교시대(部派佛敎時代)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는 18개 또는 20개 부파의 불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각 파가 각기 자기의 주장을 펴서 이것이 불교다 저것이 불교다 하여 논쟁을 많이 하였지만 모두 어느 한쪽에 집착한 변견이었으니 이것이 소승불교입니다.
그 주장들을 대체로 보면 영원한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유견(有見)과 없다는 무견(無見)으로 갈라졌는데 대중부(大衆部) 계통에서는 무견(無見)을 주장하는 파가 좀 있기는 있어도 상좌부(上座部) 계통에서는 모두가 유견(有見)을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부파불교인 소승불교시대에 있어서는 변견으로 근본을 삼았고 소승경전도 그 당시 자기네들이 편집하였고 또 전해 내려오면서 많이 가필(加筆)하고 개필(改筆)하였습니다. 이것이 저간의 사정이었습니다.
용수보살이 대승불교를 선언하고 나선 것은 ‘삿된 것을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破邪顯正]’는 것이었습니다. 즉 유견(有見)이 아니면 무견(無見)인 소승불교의 삿된 변견을 부숴 버리고 부처님의 바른 견해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나선 것이 용수보살의 근본 목적이며 사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용수보살은 중론(中論)과 대지도론(大智道論)을 저술하여 부처님의 근본사상인 중도를 천양하였습니다. 중도! 이것만이 부처님의 정통사상이라고 주장하여 그의 제자 제바존자(提婆尊者)와 같이 부파불교의 추종자들과 논쟁을 벌여 변견을 부숴 버리고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복구시키기 위해서 활약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승경전이란 시대적으로 봐서는 혹 부처님과 5․6백 년의 차이가 있다 하여도 사상적으로 봐서는 부처님 근본사상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승불교는 정통이 아니며 대승불교가 정통인 것입니다.
하나 덧붙일 것은 시대적으로 보아서 불교를 원시불교(原始佛敎)․부파불교(部派佛敎)․대승불교(大乘佛敎)로 나눕니다. 원시불교를 다시 부처님 당시와 직계 자제들이 있었던 불멸 후 30년까지를 대개 근본불교(根本佛敎)라 하고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후 백 년까지를 협의의 원시불교라 합니다. 부파불교란 곧 소승불교로서 불멸 후 1세기부터 대승불교가 일어나기까지 4․5백 년 사이를 말하고 또 대승불교는 서기전 1세기 무렵부터 일어난 새로운 불교를 말합니다. 근본불교인 원시불교와 부파불교인 소승불교는 근본적으로 틀립니다. 부파불교시대에 있어서는 유견 아니면 무견, 무견 아니면 유견의 변견으로 각기 자기 교설을 주장한 소승불교로서 중도사상이 없는 데 반하여, 근본불교는 중도사상에 입각하여 모든 교설이 설하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소승불교는 부처님 사상을 오해한 변질된 불교이며 정통의 불교는 아니라는 것은, 요즈음 와서 학자들이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 근본불교사상에 대한 연구 공적이 제일 큰 사람은 우정백수(宇井伯壽) 박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7-2)|작성자 다마림
8.백일법문
인제스님이 중도를 표현한 것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如何是眞佛眞法眞道 乞垂聞示하소서. 師云 佛者는 心淸淨是요 法者는 心光明是요 道者는處處無礙淨光是이다. [臨濟錄]
어떤 것이 참된 부처님이고 참된 법이며 참된 도인지 가르쳐 주옵소서.
참된 부처님이란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이요, 참된 法이란 마음의 빛이며, 참된 道란 가는 곳마다 걸림이 없는 맑고 깨끗한 빛이니라.
위는 인제 어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심청정(心淸淨)은 쌍차에 해당이 되는 것이며, 심광명(心光明)은 쌍조에 해당이 됩니다. 부처님의 마음에서 일어난 지혜, 그게 법입니다. 진도는 도 닦는 사람을 말하는데,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승(僧)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불(佛), 법(法), 승(僧) 삼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道者는 處處無礙淨光是이다.
머리 깍고, 장삼 메고 앉아서 한 가지 모습으로 폼잡는 그것이 스님이 아니고, 가는 곳마다 걸림이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 하고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걸림이 없다.’라는 것은 막 행, 막시를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가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어, 모든 것을 받아드리고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아주 조화로운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야 말로 밝은 사람이고, 깨끗한 사람이고 도 닦는 사람입니다.
결국 쌍차를 이야기 하고, 쌍조를 이야기 하고, 쌍차, 쌍조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 도 닦는 사람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그 무엇이 무엇입니까?
임제 스님은 중도를 이렇게 표현 하셨습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오가칠종(五家七宗)의 선종 종파 가운데서도 임제종을 제일로 하는데 그 개조(開祖)인 임제스님은 중도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떤 스님이 임제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참다운 부처이며 참다운 법이며 참다운 도인지 대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부처란 마음이 청정함이요, 법이란 마음이 광명함이요, 도란 어디에서나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이다.
如何是眞佛眞法眞道乞垂聞示하소서. 師云 佛者는 心淸淨是요 法者는 心光明是요 道者는 處處無礙淨光是이다. [臨濟錄]
임제대사가 불, 법, 승(佛法僧) 삼보를 설명하기를 마음 청정함이 부처요, 마음에 광명이 비침이 법이요,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이 도, 즉 승이라 하였습니다.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일체 차별 망견을 다 버리는 것을 말하니, 쌍차로써 망상의 구름이 다 걷혔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광명이 비침이란 망상의 구름이 다 걷히면 거기에 무한한 광명이 비칠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쌍조입니다.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은 청정할 때 광명이 나타나고 광명이 나타날 때 청정하여 청정과 광명이 서로 둘이 아님을 말하며 차조동시(遮照同時)입니다.
도(道)란 승(僧)을 말하며 승이란 본래 화합(和合)을 뜻하니 서로서로 합심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을 말하지만 근본은 청정과 광명이 걸림 없음을 증득한 사람만이 승이라는 자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중도를 깨치지 못하면 승이 아니니 모든 차별, 변견에 집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선종에서도 표현은 다르지만 육조스님의 유촉하신 바대로 중도에 입각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겠습니다.』
임제스님이 설하신 근본적인 가풍(家風)으로 사료간(四料揀)이 있습니다.
有時엔 奪人不奪境이오 有時엔 奪境不奪人이오 有時엔 人境俱奪이오 有時엔 人境俱不奪이니라
어떤 때는 사람만 죽이고 경계를 놓아두고
어떤 때는 경계만 죽이고 사람을 놓아두며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둘 다 죽이고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둘 다 살리니라.
‘어떤 때는 사람은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으며’ 이 말은 쌍차, 쌍조에서 ‘사람만 죽이고’ 가 쌍차만 한다는 뜻입니다. 쌍조는 그대로 놔둔다는 겁니다.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보는 경계가 있습니다. 주객이 둘이 있는데, ‘사람만 죽이고 경계를 놓아둔다.’ 라는 것은 주관적인 것만 철저히 죽이면서 객관은 상관 안한다는 겁니다. 주관만 철저히 죽이면 객관만 살아남니다. 또 객관만 철저히 죽이면, 주관만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 둘 다 죽이고 주객을 같이 없앤다.’합니다. 또,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둘 다 살려야 한다, 또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둘 다 그대로 놓아둔다는 겁니다. 둘 다 살려둔다는 겁니다. 그래서 법을 쓸 때 쌍차만 쓸 것이냐, 쌍조만 쓸 것이냐, 쌍차, 쌍조를 쓸 것이냐, 쌍차, 쌍조 그 자체 까지도 없앨 것이냐, 그래서 그것을 상황에 따라 4가지로 쓰는 것을 사료간(四料揀) 이라고 합니다.
임제 스님의 사료간(四料揀) 이라 하여 공부하는 납자를 제작 할 때, 그 납자의 상대방을 보아 그 납자를 죽이든지, 그 경계를 죽이든지, 납자를 살리고 경계를 죽이든지, 납자를 죽이고 경계를 죽이든지 합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맞추어서 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중도에 입각한 임제 스님입니다. 또한, 중도에 입각한다면 누구든지 임제 스님 못지않게 법을 쓸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사람은 주관으로, 경계는 객관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주관을 버리고 객관은 버리지 않고, 어떤 때는 객관은 버리고 주관은 버리지 않는다. 어찌하기 위해서 그러느냐 하면 주관과 객관을 다 버리기 위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을 다 버리면 또 어찌 되느냐 하면 주관과 객관을 다 버리지 않는다, 즉 주관과 객관이 서로서로 완전히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을 다 빼앗는다는 것은 쌍차이며, 주관과 객관을 다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쌍조이니 주관과 객관이 서로서로 융합, 자재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임제스님의 사료간입니다. 물론 교리적으로 설명하려니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지 진실로 사료간의 법을 호호탕탕하게 쓰려면 중도사상을 알아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을 깨쳐 중도실상(中道實相)을 알아야만 사료간을 알 수 있고 임제정법을 알 수 있고, 거기서 봉(棒)도 쓸 수 있고 할(喝)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변견에 떨어져 집착하게 되면 임제스님과는 영원히 등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도사상은 경전의 교학에서뿐만 아니라 선종에서도 분명하게 중도원리를 천양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중도를 터득키 위해서는 마음을 깨쳐야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쌍차쌍조(雙遮雙照)하고 차조동시(遮照同時)하는 이 중도원리는 어느 종교나 어느 철학에서도 볼 수 없는 불교만의 독특한 입장이니만큼 선과 교를 통해서 또 남전(南傳), 북전(北傳) 할 것 없이 불교의 근본진리는 중도원리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깊이 명심하여야겠습니다. 좀 쉽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얼마나 이해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중도원리를 깨쳐야만 진실한 불교도인만큼 열심히 정진합시다』
이렇게 하여 백일법문의 서문이 끝났습니다.
이로써, 중도라고 하는 것,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고, 이변을 여의고, 중도가 나타나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중도인 것을 이해하셨다면 여태까지 공부한 결실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8)|작성자 다마림
제2장 원시불교사상
1. 중도대선언
이제부터 중도사상을 가지고, 각 종파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입맛에 맞게 가공하고 처리하여 다양한 근기를 접하게 하는 내용들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 30년간을 근본불교라 하여 부처님의 원행을 그대로 설명을 하면서 한 100년간을 그럭저럭 본 모습을 가지고가는 것을 원시 불교라 했습니다. 원시 불교 시대에 통용되는 존재들, 그 당시 부처님 말씀으로 통용되는 것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즉, 원시 불교에서의 중도사상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있음[有]과 없음[無], 생함[生]과 멸함[滅] 등 상대적인 어떤 두 극단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도(道)를 이루고 난 뒤에 비구들에게 최초로 설법한 것이 있는데, 이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합니다.
이 초전법륜의 가르침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불교의 근본교리가 들어 있으며, 중도설도 그 중의 하나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중도설은 극단적인 두 변에 집착하지 말라는 기본적이고도 간단한 형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집착하지 말라는 그 두 변은 이론적인 사항이 아니라 수행의 면에서 지켜야 할 실천적인 사항입니다. 이와 같이 최초의 중도설은 수행자의 실천에 관계하여 제시된 것입니다.그 법문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먼저 팔리어(pāli)로 씌어진 남전장경(南傳藏經)의 번역문을 인용하고 나중에 다시 그에 해당하는 북전(北傳)의 한역(漢譯) 경문을 일부 발췌하여 보겠습니다.
그때에 세존(世尊)은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세상에 두 변[二邊]이 있으니 출가자는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무엇을 (그)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 여러 욕망을 애욕하고 탐착하는 일은 하열하고 비천하여 범부의 소행이요, 현성(賢聖)이 아니고 의(義)에 상응하지 않는다. (둘째는) 스스로 번뇌하고 고뇌하는 일은 괴로움으로서 현성(賢聖)이 아니고 의(義)에 상응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여래(如來)는 이 두 변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바르게 깨달았느니라. [南傳大, 律部 3, p. 18]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친 상대적인 견해를 말하는 두 변[兩邊] 가운데는 선악(善惡), 유무(有無)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여기에서는 고(苦)와 낙(樂)을 예로 들었습니다. 인용한 경문에 있는 두 변 중 첫 번째는 욕망에 탐착하는 욕락(欲樂), 즉 낙(樂)을 말한 것이고, 두 번째는 고행에 집착하는 괴로움, 즉 고(苦)를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고(苦)와 낙(樂)을 예로 든 것은 부처님 당시의 실정에 따라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그 당시 수행자들의 상당수가 고행을 위주로 하는 고행주의자(苦行主義者)였으며, 부처님을 따라서 최초로 출가한 다섯 비구도 세상의 향락을 버리고 고행을 해야만 해탈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고수하였으므로 부처님이 병에 따라 약을 주듯이 고(苦)와 낙(樂)을 예로 든 것입니다. 많은 출가자들이 세간의 향락을 버릴 줄만 알고 고행하는 괴로움, 이것도 병인 줄 모르고 버리지 못하지만 참으로 해탈하려면 고(苦)와 낙(樂)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바로 깨달은 것, 정등각(正等覺)한 내용이 중도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苦)와 낙(樂)을 버린다는 것이 어찌 그다지 어려운 것인가라고 생각하여,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고(苦)와 낙(樂)을 버리라고 한 것은, 평범하게 말씀하신 것이지 철학적으로 깊은 뜻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입니다.
중생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바로 깨쳐서 해탈을 얻기 전에는 무엇을 대하든지 그것은 고(苦)가 아니면 낙(樂)이고 낙(樂)이 아니면 고(苦)라서 항상 양변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설사 열반(涅槃)을 성취하였다 하여도 열반의 낙에 머물면 그것도 병으로서 중도가 아닙니다. 고(苦)와 낙(樂)을 떠난다는 것은 세간의 고(苦), 낙(樂)이라든지 출세간의 낙(樂)이라든지 모든 집착을 완전히 떠나는 것을 말하며, 그 고(苦)와 낙(樂) 등 일체의 양변을 떠난 경계를 중도라 합니다. 이렇게 양변을 버리고 중도를 정등각했다는 이 초전법륜을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부처님의 근본법륜이라는 것은 세계의 어느 학자들 간에도 이견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고하여 말씀하셨다.
“세간에는 두 변이 있으니 응당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첫째는 애욕을 탐하여 욕망은 허물이 없다고 말함이요, 둘째는 사견으로 형체를 괴롭혀 도의 자취가 없음이다. 이 두 변을 버리고 곧 중도를 얻느니라.”
佛復告曰호대 世有二邊하니 不應親近이라. 一者는 貪著愛欲하여 說欲無過요 二者는 邪見苦形하여 無有道迹이라 捨此二邊 便得中道니라. [大正藏 22, p. 104中, 五分律]
“비구여, 출가자는 두 변을 가까이하지 말 것이니, 즐겨 애욕을 익히거나 혹은 스스로 고행하는 것이다. 현성의 법이 아니며 심신을 피로하게 하여 능히 행할 바가 아니다. 비구여, 이 두 변을 제외하고 나서 다시 중도가 있느니라.
比丘出家者는 不得親近二邊이니 樂習愛欲이나 或自苦行이라 非賢聖法이요 勞疲形神하여 不能有所辦이라 比丘 除此二邊已하고 更有中道니라. [大正藏 22, p. 788上 四分律]
이 중도선언은 이와 같이 한역(漢譯)의 오분율(五分律), 사분율(四分律)에도 나오나 팔리어로 씌어진 남전장경의 기록과 같이 명백하고 정확하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깨치신 것이 중도라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남전장경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숫타니파타(Suttanipāta)라는 경(經)이 있는데, 그 가운데 피안도품(彼岸道品)에서 중도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양 극단에 집착하지도 않고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두 극단인 두 변에도 집착하지 말고, 그 가운데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격식을 벗어난 대장부의 행동입니다.
많은 불교학자들은 율장(律藏)에 있는 초전법륜의 중도대선언을 불교의 근본적인 출발점으로 삼는데, 혹 또 논란하기를 그보다 더 앞선 경전인 숫타니파타에도 중도의 내용이 있느냐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기에 여기 「피안도품」을 인용한 것입니다.』
중도와 무위의 차이점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중도와 무위의 차이점은, 무위는 중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인위적인 조작이 없는 것입니다. 무위(無爲)는 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위(爲)자는‘나’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너’라고 하는 생각이 생겨, 어떤 법을 실천 하면, 그것은 유위법입니다. 또한, ‘나’의 어떤 의도가 없다면, ‘나’는 존재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 행위를 하면, 하는 사람도, 한 바도 없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무위입니다. 즉,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어떤 인연을 받아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무아의 상태에서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무위도인이라 합니다. 또한 함도인 이라고 합니다. 함도인은 할 일이 없어 나자빠져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으로 어떤 일을 굳이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일을 방대시 하는 것이 아니며, 해야 할 일은 인연 따라 해나갑니다. 고로, 함도인은 마음속으로 더 이상 추구할 바가 없음을 의미하며, 이는 깨달음을 얻고 아상(我相)이 사라져버린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한다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일에 있어서 ‘나’라고 하는 놈이 존재 하지 않기에, 모든 일을 하는데 걸림 없이 그 일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무위는 중도와 같습니다.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9)|작성자 다마림
제2장 원시불교사상
3. 십이연기
본문을 보겠습니다.
『팔정도(八正道)는 원시불교의 중요 교리로서 출가 수행자나 세속인이 바른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지켜야 할 지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팔정도의 의미는 이 정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팔정도는 글자 그대로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이란 뜻이므로 여기서는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바른 길을 뜻하는 중도사상이 드러나 있습니다. 부처님은 확실하게 팔정도는 곧 중도라고 단언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는 남전(南傳)의 율장(律藏)에 있는 초전법륜의 기록을 인용해 봅니다.
비구들이여, 무엇을 여래(如來)가 현등각(現等覺)한 바로서, 눈[眼]을 생하고 지혜[智]를 생하고 적정(寂靜), 증지(證智), 등각(等覺), 열반(涅槃)에 도움이 되는 중도(中道)라 하는가? 그것은 곧 팔성도(八聖道)이다. 말하자면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을 여래가 현등각한 바, 눈을 생하고 지혜를 생하고 적정, 증지, 등각,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라 하느니라. [南傳大藏經, 律部 3, pp. 18~19]
팔정도의 원어는 팔지성도(八支聖道)로 그 의미는 ‘여덟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도’라는 뜻입니다.
먼저 정견(正見)은 바른 견해, 즉 올바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말하는 것이니, 요컨대 불교의 진리인 연기(緣起)와 사제(四諦)나 중도에 대한 지혜를 갖추는 것입니다. 바른 견해를 가지면 모든 법을 바로 보게 되어 바른 마음가짐인 올바른 사유[正思惟]를 하게 되고, 마음가짐이 올바르면 그에 따라 올바른 언어[正語]를 구사하게 되며, 올바른 신체적 행위[正業]를 하게 됩니다.
정명(正命:sammā-jiva)의 명(命:jiva)은 활명(活命)이라는 것, 곧 일상의 생활을 의미하므로 정명이라는 것은 올바른 생활을 가리킵니다. 분수를 넘어서는 행동이나 불규칙적인 생활 등을 시정하여 도리에 맞는 생활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정정진(正精進)은 악을 소멸하고 선을 증대시키는 올바른 노력을 말하며, 정념(正念)은 올바른 생각을 말하는데 보통 바른 진리와 지혜를 잃지 않고 항상 염두에 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정(正定)은 올바른 선정으로 정신집중의 상태를 지속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선정에는 사선(四禪) 등의 선정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정신을 집중하여 노력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렇게 팔정도는 정견에서 시작하여 정정으로 맺어지는데, 무엇보다도 맨 먼저 정견이 거론되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른 견해를 얻어 모든 법을 바로 보기 전에는 정사유(正思惟), 정법(正法), 정각(正覺) 등 팔정도의 나머지가 하나도 성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견은 바로 부처님이 깨치신 진리, 즉 중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이 성도하여 깨달으신 것이 중도이고, 그 중도의 내용이 다름 아닌 팔성도(八聖道), 곧 팔정도(八正道)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 팔정도가 방법론(方法論)이냐 또는 목적론(目的論), 구경론(究竟論)이냐라는 논란이 있습니다. 팔정도는 구경 목표를 향하는 방법론이지 목적론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중도의 근본 뜻을 망각하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확실히 중도를 바르게 깨달았다고 하셨지 중도를 닦아서 바르게 깨달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중도를 바로 깨친 그 사람이 부처이므로 중도의 내용인 팔정도는 목적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이와 같이 목적론적, 구경론적 의미를 내포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전도되고 근본과 지말이 뒤섞인 여기에서는 올바른 삶의 방향의 지침이기도 하므로 방법론적으로 적용하는 것도 일리가 있을 것입니다.』
초전법률, 사제, 팔정도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원시불교에서 사제이야기는 연기법에 포함시켜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위 단락에서는 팔정도에 대해 거론을 하고 있습니다. 팔정도에서 처음 나오는 정견(正見)은 아주 중요합니다. 중생이 쓰는 법은 사법입니까? 정법입니까? 중생은 무명에서 시작 되었고, 중생이 쓰는 법에는 무명이 깔려있습니다. 그 무명이라고 하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며, 거짓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법을 정법이 아니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세계에서 중생들을 보았을 때, 중생들이 쓰는 법은 무명을 깨치기 이전까지는 전부 사법입니다. 우리 중생계에서 보았을 때, 성문, 연각, 보살들이 굉장히 큰 스님이고 공부를 굉장히 많이 한 스님들이지만 부처님이 보았을 때는 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흠이 있기 때문에 그 분들이 법을 써도 전부 흠을 안고 쓰는 것입니다. 단지 흠집이 작아서 안보일 뿐입니다.
절집에서 정법이라고 이야기 할 때는 부처님 세상에서 펼쳐진 법만이 정법이 될 수가 있는 겁니다. 부처님 세상에 들어가서 세상을 바라보는 정견 즉, 바른 안목이 있어야 바른 사유가 가능하게 됩니다. 바른 사유가 가능해야 바른 말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입니다. 또한, 바른 말과 바른 사유를 하게 되면 바른 행동이 드러납니다. 그게 정업(正業) 입니다. 바른 행위는 바른 삶이 구현이 됩니다. 그것을 정명(正命) 이라고 합니다. 이런 삶을 끊임없이 이어 가는 게 정정진(正精進) 입니다.
이런 삶을 끊임없이 사는 사람들은 부처님 세상을 항상 염두해 둡니다. 항상 기억해 둡니다. 그것이 정념(正念) 입니다.
지금 마음자리에서 보아지는 게 념(念) 입니다. 염불도, 지금 내가 염불하는 이 자리에서 부처님을 본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의미는 내가 부처님이 된다라는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정념(正念)은 내가 이어가는 삶 속에서 항상 부처님을 보고 부처님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부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정(正定) 입니다.
진짜 팔정도는 중도에서 나와야하는 것이며, 중생의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팔정도는 근본에서 이야기 했을 때, 중도에서 나와야 진짜 팔정도입니다. 중생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중도에 입각해서 팔정도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을 지금 백일법문에서 스님이 말씀하시고 싶은 바 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짜 팔정도는 중도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중도에서 견에 포인트를 맞추냐, 행에 맞추냐, 선정에 맞추냐를 가지고 8가지 모습으로 드러날 뿐이지, 알고 보면 중도 속에 팔정도가 들어있습니다. 정견속에 팔정도가 전부 들어있고 팔정도 속에 정견이 들어있습니다. 정사속에 나머지 팔정도가 전부 들어있고, 중도가 들어있습니다. 그리하여 진짜 팔정도를 이해하려면, 중도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중도라고 하는 실천적인 삶이 드러날 때, 그자체가 팔정도가 되는 겁니다. 팔정도를 깨달음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소승적 견해입니다.
[출처] 봉암사 백일 법문(10)|작성자 다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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