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23일. 삼성 라이온스와 SK 와이번스의 시즌 5차전이 열리는 인천 문학구장. 앞선 두 경기에서 연달아 삼성에게 패한 SK가 선발 김영수를 앞세워 설욕을 다짐한다. 그러나 이날도 9회까지 삼성에 4대 9로 뒤지며 홈 3연패를 눈앞에 두는데. 이때 패색이 짙은 SK가 한 투수를 마운드에 올렸다. 이 정도 점수 차면 패전처리 투수로 봐도 무방할 터.
“어, 이상훈 아니야?” 관중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젠 마무리가 아니라 패전처리로 나서네.” 어느 관중의 말대로 이상훈은 전날에도 팀이 1대 3으로 뒤지는 8회에 출전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상훈에게 ‘마운드에 몇 번째로 오르는 투수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투수의 보직이란 ‘직무’에 해당하는 것이지 ‘직급’이 아니었다. 33살의 왼손투수에게 야구란 자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묵묵히 마운드에 오른 이상훈이 3타자를 상대로 삼진 1개를 잡으며 이닝을 마무리했다. 시즌 초반 블론세이브를 3개나 기록하며 주변의 우려를 샀던 이상훈은 5월 중순이 지나며 서서히 제 기량을 되찾고 있었다.
하지만 마운드를 내려오는 이상훈의 표정에서 기쁜 기색이란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량은 회복되고 있지만 가슴에 생긴 도넛 구멍만한 상실감은 되레 커지고 있었다. 관중석을 쭉 훑어본 이상훈의 입에서 외마디 말이 새어나왔다.
“여기까지.”
그리고 열흘 뒤. 이상훈은 충격적인 은퇴 선언을 한다. 공 1개 던지지 않고서도 연봉 6억 원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련 없이 시즌 중 은퇴를 선언하며 조용히 그라운드에서 사라졌다.
당시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이 “역시 야생마”다운 선택이라고 입을 모았다. ‘야생마’ 이상훈(39).
1993년 LG 트윈스에 입단한 이상훈은 가장 성공한 왼손 선발투수와 마무리로 1990년대 LG 신바람 야구를 이끌었다. 1994년 LG의 마지막 우승도 그해 18승을 올리며 호투한 이상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이후 이상훈은 야생마처럼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한국선수로는 최초로 일본과 미국프로야구를 밟는 신기원을 이뤘다. 2002년 기적 같던 LG의 한국시리즈행을 이끈 이도 다름 아닌 이상훈이었다.
그러나 이상훈은 야구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야구선수임과 동시에 가장 비밀에 싸인 투수이기도 하다. 그의 야구인생을 관통하는 방황과 도전. 그리고 갑작스런 은퇴를 둘러싼 논란들에 대해 그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입을 연 적이 없다.
<박동희의 Mr.베이스볼>에서는 한국프로야구사에서 전설로 기억될, 현역시절보다 은퇴 뒤가 더 아름다운 이상훈의 야구인생을 돌아보고자 한다. 야구선수 이상훈을 넘어 인간 이상훈과 만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전설이 된 그라운드의 야생마, LG 투수 이상훈’편은 3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요즘 근황을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록그룹 ‘WHAT’ 활동 계속하고, 뷰티샵 ‘클로저 47’ 운영하면서 바쁘게 살고 있다.
당신의 친청 팀 LG가 올 시즌 비록 시즌초반이지만 꾸준히 4강권에 들며 2002년 이후 첫 포스트시즌 진출을 노리고 있다.일전 모 스포츠전문지에서 연재 중인 인터뷰 때문에 김재박 LG 감독님을 뵌 적이 있다. 올시즌은 예년에 비해 선수들의 ‘하겠다’는 의지가 강해 4강 진출을 기대해도 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과거를 회상하며 혼잣말을 하듯) 참, 1990년대 중·후반만 해도 LG가 한국시리즈에 못 올라가는 게 이상할 정도였는데….
당신이 보기에는 어떤가. LG의 포스트시즌 진출이 가능해 보이나.은퇴한지 햇수로 6년이 지났다. 뭔가를 예상하기엔 야구 감각이 많이 떨어졌다. 하지만 LG가 잘했으면 하는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해진다. 왜냐? 내 마음의 영원한 팀이니까. (고개를 끄덕이며)정말 잘 했으면 좋겠다.
목숨보다 소중한 공놀이
초등학교 시절의 이상훈. 눈망울만은 이때도 또렷하다
야구를 다소 늦게 시작한 걸로 안다.신길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야구를)했으니 조금 늦었다고 볼 수 있다. 원래는 태권도와 축구를 먼저 했다. 축구는 5학년 때 학교대표 골키퍼를 볼 만큼 잘 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정식으로 운동부에 든 건 아니었고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수준이었다.
신길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있었나.(고개를 흔들며) 내가 뛴 팀은 학교 야구부가 아니라 ‘신길화랑’이라는 리틀야구클럽이었다. 사실 말이 좋아 리틀야구클럽이지 서울 대방동과 신길동 사이에 사는 가난한 동네 꼬마들이 모인 팀이었다. 정식 유니폼도 없었으니까. 하루는 그 팀이 신길초교에서 연습을 했는데 한편에서 캐치볼을 하고 있는 날 감독님이 불러서는 “야구해볼 생각 없느냐”고 물었다. 그래 “뭐, 알겠다”고. “하겠다”고 대답한 다음 자연스럽게 그 팀의 일원이 됐다. (입술을 매만지며 혼잣말로) 참,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내가 야구로 밥 먹고 살지.
그때 감독님이 떡잎을 잘 본 것 같다. 그랬을 수도. 그때 감독님이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고 3?그래도 초등학생에겐 그 나이면 어른 아닌가. (잠시 생각하다가)그분을 통해 야구에 대한 집념을 배웠다.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중학교로 진학하고 얼마 있다가 그 감독님이 입대를 해야 했다. 입대 날짜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리틀야구클럽의 아이들은 많지. 아이들이 죄다 자기만 쳐다보지. 감독님이 무척 괴로워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나와 신길화랑 1년 선배를 부르셨다. 가보니까 오른팔을 베니어판으로 감싸고 계셨다. ‘이게 뭐지’ 했는데 내 선배보고 배트로 팔을 내리치라고 하셨다.
군 면제를 받으려고 했던 건가.(손을 가로 저으며) 군 면제를 받으려고 꼼수를 쓸 분은 아니었다. 다만, 갑작스런 자신의 입대로 ‘신길화랑’ 부원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을까봐. 자신이 입대하고 나면 팀이 ‘붕’ 뜰까봐 그게 걱정되셨던 모양이다. 팀을 잘 정리한 다음 입대하고 싶다는 마음이 얼마나 강하셨는지 멀쩡한 팔을 부러트리며 결국 입대를 연기하셨다.
어쩌면 어린 감독의 치기처럼 보이기도 한다.내가 고 2때였나. 그 감독님이 제대를 하시고 우리 집에 오셨다. 날 보자마자 첫 마디가 “상훈아, 나 다시 시작할 거다”였다. “네? 뭘 다시 시작해요?”했더니 “다시 아이들 모아 야구팀 만들 거다”라고 하셨다. 참, 대단한 분이었다. 그분 지금 뭐하시는지 아나?
글쎄.지금도 리틀야구팀 감독하신다. 얼마 전에는 리틀야구 국가대표 감독도 하셨다. 야구는 그런 분들이 하는 거다.
리틀야구 시절 이상훈은 외야수와 투수를 함께 봤다
서울 강남중으로 진학했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서 중학교마다 야구부원으로 넘쳐났다. 당시 강남중만 해도 야구부원이 60명 정도 했다. 입학해서 보니까 2, 3년 선배들은 죄다 나보다 머리 하나가 컸다. 속으로 ‘이야,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개 중학교쯤이면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부모와 운동을 반대하는 부모로 나뉘게 마련이다. 당신은 어땠나. 난 후자였다(웃음). 아버지께서 내가 운동하는 걸 반대하셨다. “왜 애가 운동하러 나가는 걸 못 막았느냐”며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화를 내시곤 했다. 나 때문에 아버지한테 어머니가 정말 많이 혼나셨다.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지 않나.지금도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 하루는 어머니가 “더 이상 야구부에 나가지 말라”며 외출을 금지시키셨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는데, 그때 또 집에서 학교 담벼락이 보였다는 거 아닌가. 담장 너머로 야구부 모자를 쓴 아이들이 왔다갔다 하는 게 보였다. 당시 우리 집에 야구용품들이 보관돼 있었기 때문에 내가 운동장에 나가지 않으면 훈련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아나.
?야구용품을 가마니에 싸서 어깨에 맨 채 옥상에 설치된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때 난 정말 왜소한 소년이었다. 그 무거운 가마니를 들기엔 역부족이었다. 사다리도 흔들흔들 거려 자칫 떨어지면 바로 하늘나라로 가는 상황이었다. (물 한 모금을 마신 뒤)그래서 야구란 게 무서운 거다. 목숨보다 소중할 수 있는 공놀이니까.
강남중 때는 특별히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다.사실이다. 투구폼은 깨끗한데 볼넷이 많은 투수였다. 뭐랄까. 너무 여린 투수였다고나 할까. 마운드에서 타자를 압도하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없었다.
강남중 시절 잠실구장에서 역투하는 이상훈
여린 투수라, 서울고 때부터 당신은 ‘강심장’으로 통했다. 그런 당신이 스스로를 가리켜 ‘여리다’라고 하니 다소 기분이 묘하다.여린 투수에서 지금의 나로 바뀐 계기가 있었다. 아버지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폐암….아버지 살아계실 땐 가족들도 화목하고, 나야 하고 싶은 야구만 하면 됐으니 아무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모든 게 바뀌었다. 못 볼 걸 너무 많이 봤다.
그게 뭔가.(한숨을 내쉬며) 넘어가자.
슬픈 ‘고려대 빠삐용’
강남중 졸업 뒤 서울고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는 강남중을 졸업하면 서울고로 진학하는 게 일상이었다. 서울고 야구부 80% 가량이 죄다 강남중 출신이었다. 하지만 내가 입학한 해는 수원 유신고 출신들도 많이 들어왔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이가 전 OB 투수 이용호(현 한화 코치)다.
서울고 때는 성적이 어땠나.
1, 2학년 때는 중학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울고 왼손잡이 투수 정도로 알려졌지 ‘초고교급 투수’ 이런 수식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3학년 때 서울고가 봉황대기대회 결승까지 오르면서 조금 이름을 알리게 됐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그저 그런’ 투수였다.
지나친 겸손이 아닌가. 그저 그런 투수가 어떻게 고려대에 입학할 수 있었을까.
그게 다 (임)수혁이 형 아버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당신이 알지 모르겠지만 수혁이 형이 내 중학교, 고등학교 1년 선배다. 수혁이 형 아버님이 날 누구보다 잘 아실 수밖에. 한 번은 고대에서 왼손 투수를 한 명 구하려고 휘문고와 서울고 경기를 붙였다. 그때 휘문고엔 이광섭이라는 공이 정말 좋은 투수가 있었다.
당신보다?
몇 번이나 말하지 않나. 난 그저 그런 투수였다고(웃음). 어쨌든 그 경기가 끝나고 나서 고 최남수 고대 감독님한테서 생각지도 않은 전화가 왔다. 대뜸 최 감독님께서 “나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편모슬하에 자랐다. 누구보다 네 마음을 잘 안다”라고 하셨다. 생각해보라. 내 집안사정을 어떻게 아셨겠나.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 수혁이 형 아버님이 최 감독님께 다 말씀드린 거다. 수혁이 형 아버님 덕분에 최 감독님이 날 좋게 보셨는지 그때 인연으로 고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서울고 시절 이상훈은 강속구 투수는 아니었다. 그저
투구폼이 좋은 왼손투수로만 알려졌다
고대 재학 시절 당신은 대학야구계의 스타였다. 얼마나 스타였으면 별명도 영화제목과 같았다. ‘빠삐용’이라고.(빙그레 웃으며) 도망을 좀 많이 다녔나.
대학시절 14번이나 야구부에서 이탈했다. 그 정도면 ‘좀’이라는 부사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유가 있었나. 혹여 야구부의 규율이 너무 셌다거나 여자친구 문제라거나 왜 그런 문제들로 그 나이 때는 많이들 고민하지 않나.(혼잣말을 하듯) 그때 일이 밀려온 거지.
그때 일?그전에. 대학교 1학년 때 내 일주일 용돈이 얼마였는지 아나? (“5만 원?”하고 대답하자) 그보다 10배나 적은 5천 원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어머니가 통장으로 5천 원을 송금해주셨다. 그 돈도 못 보내주실 때도 있고. 자, 5천 원으로 일주일을 생활해야 하는데…. 대학교 1학년이면 나도 머리가 컸다고 주변을 둘러보게 되지 않나. 자신의 처지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나. 그때 뒤늦게 사춘기가 밀려왔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여기다 중학교 때 못 볼 걸 봤던 기억이 더해지면서 긴 방황이 시작됐다.
흔히 ‘빠삐용’ 이상훈의 방황을 떠올리면 ‘가난’만 연상하게 마련이다. 어머니가 고생을 무척 많이 하셨다. 파출부부터 시작해 식당, 보험 일 등 안 해본 일이 없으시다. (짧게 숨을 토해낸 뒤) 지금은 고대 야구부 구장과 숙소가 경기도 송추에 있지만 내가 재학 중일 때만 해도 야구부 기숙사는 따로 없고 서울 안암캠퍼스 이공대 후문에 ‘연수관’이란 곳이 있었다. 연수관은 교내 5개 운동부가 생활하는 곳이었는데 당시 원칙이 집이 서울인 선수들은 집에서 다니고 지방 출신 선수들만 기숙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바로 나다. 집이 서울인데 연수관에서 숙소 생활한 선수는 내가 유일했다(웃음). 하지만 가난 때문에 방황? 그건 아니고 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다시 물컵을 손에 쥐며) 개인사다. 넘어가자.
첫 야구부 이탈이 1990년 대학 2학년 때로 알고 있다.앞에서도 말했지만 ‘왜 난 이렇게 가난할까’ ‘왜 나만 이럴까’하는 의문이 쏟아지면서 뒤늦은 사춘기에 빠졌다. 하루는 야구가방 안에 콜라병 하나 넣고 무작정 서울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콜라병?누가 가방이라도 훔쳐가면 어떻게 하나. 혹시나 그럴 때를 대비해 호신용으로 넣어 뒀다(웃음). 그렇게 시작한 방황이 그 뒤로 13번이나 더했다. 돌아보면 나도 참 징한 녀석이었다.
방황할 때 주로 어디를 갔나.말이 방황이지 별 게 아니었다. 일단 어떻게 해서든 차비 정도를 구하면 부산으로 가기 일쑤였다. 광안리 백사장에 도착하면 거기서 3일이고 4일이고 자고 먹고 했다. 왜 광안리 주변에 호객행위하는 분들이 많지 않나. 그 분들이 날 다 알아봤다는 게 아닌가. 야구선수로? 그때 누가 야구선수 이상훈을 알겠나. 며칠이고 백사장에서 기숙하니까 거지인 줄 알았지. 그러면 이번에는 또 해운대 백사장으로 옮겨가서 기숙하고.
돈이 떨어지면?인력시장 나가서 노가다(일용직 노동일)하는 거지. 생각보다 일용직 노동일은 괜찮았다. 왜냐? 잘 곳이 있었으니까. 스티로폼을 바닥에 깔고 자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언제쯤 서울로 올라왔나.잡혀오기도 하고, 엄마 말 듣고 오기도 하고, 지쳐서 제 발로 돌아오기도 하고. 줄곧 그랬다.
어머님 걱정이 크셨겠다.어느 날 역시 숙소 이탈하고 지방에 있을 때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그때 어머니가 무슨 레스토랑에서 숙식을 하며 일하고 계셨을 땐데, 보통 엄마들 같으면 자식에게 돌아오라고 애원을 하거나 크게 야단을 치시지 않나.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달랐다. 그냥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 톤으로 “잘 지내고 있니” “밥은 먹었니” “너무 오래 방황하지 마라” 이 정도만 말씀하셨다. 왜 우리 엄마라고 자식 걱정이 안 됐겠나. 내가 어렸을 때 원체 가슴앓이를 한 걸 잘 아시니까 그냥 지켜보신 거다. (뭔가 생각난 듯) 아, 한 번은 방황하다가 지쳐서 돌아온 적이 있는데, 진짜 거짓말처럼 어머니를 보자마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적이 있다.
이런.얼마나 놀랬는지 주변 분들이 날 업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단다. 그런데 정작 놀란 건 그 다음이었다. 간호사가 내 눈꺼풀을 ‘딱’ 뒤집어 보고는 이런 말을 하지 뭔가.
무슨 말?“병원 어디 어디에 신경정신과가 있는데, 그쪽에서 외래진료 신청하고 진료 받으세요”라고. 순간 속으로 ‘뭐, 신경정신과? 이거 뭐야. 나보고 정신병원 가란 소리 아니야’하는 생각을 하면서 어머니 쪽을 바라봤다. 세상에, 아들이 도망다니는 건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는 분이 ‘신경정신과’란 이야기를 들으니까 깜짝 놀라시지 뭔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나.아니었다. 단순한 영양실조였다. 참,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니까(웃음).
어머님도 어머님이지만, 당신의 방황으로 최남수 감독도 무척 힘들었을 것 같다.왜 아니었겠나. 학교에서 최 감독님께 “무조건 이상훈 자르라”라고 몇 번이고 지시를 했다고 한다. 14번이나 숙소를 이탈했으니 당연한 지시 아닌가. 하지만 그때마다 최 감독님이 학교를 설득하시면 제명을 막아주셨다. 물론 수혁이 형 아버님도 많이 도와주셨고.
동기생들의 피해상황은 안 봐도 눈앞에 선하다.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동기들한테는 미안하다. 내가 사라지면 위 선배서부터 동기들에게로 얼차려가 내려왔다. 지금도 동기들 만나면 그런다. “에이, 너 때문에 임마 우리가 얼마나 선배들한테 터진 줄 알아.”(웃음).
‘야생마’가 방황하게 된 이유묘한 선수였다
14번이나 팀을 이탈하고도 전국대회에는 꼬박꼬박 출전했다.그랬다. 대회란 대회에는 다 참가했다. 고연전도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방황하면서도 할 건 다 했던 셈이다.
사실 당신의 방황은 대학 때로 끝난 게 아니었다. 1993년 프로에 입단해 2004년 은퇴할 때까지 당신의 방황은 계속 됐다. 방황의 무대가 광안리와 해운대에서 일본과 미국으로 옮겨지고, 방황의 이유가 가난과 처지 비관에서 꿈과 이상을 향한 도전으로 바뀌었을 뿐 당신의 방황은 여전했다. 당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당신이 어째서 ‘방황’을 시작하게 됐는지, 그것이 단순히 가난 때문이었는지, 당신이 말한 ‘못 볼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만약 야구 기록이나 데이터만으로 당신을 표현하고, 그저 당신이 하는 말만을 그대로 받아쓸 요량이었다면 처음부터 인터뷰는 시작하지도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때 처음으로 내 형이 친형이 아니고 내 큰누나가 친누나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됐다.
….두 살 터울의 작은 누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내게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물론 그전에도 이상하긴 했다. 형과 큰누나와 내 나이 차이가 워낙 많이 난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형이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때는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형의 행패가 더 심해졌다. 집에 올 때마다 집안 가재도구를 모두 때려 부셨다. 그리곤 늘 어머니께 “몰래 숨겨놓은 아버지 재산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어디서 돈을 구해와 형을 줬고 형은 그 돈을 받고 사라졌다. 아버지 생전에 살던 대방동 집도 형 때문에 팔고 방 두 칸짜리 집으로 옮겼다. 그것도 돈이 없어서 방 한 칸은 세를 줬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교에 진학하기 1, 2년간 엄마와 작은 누나 그리고 나는 형의 행패에 계속 시달려야 했다. 내가 조금 더 머리가 굵었으면 대항도 했을 텐데 그러기엔 당시 난 너무 여렸다. (스르르 눈을 감으며)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형이 행패를 부릴 때면 작은 누나와 무서움에 벌벌 떨었던 게.
어느 날 새벽에 형이 찾아왔다. 무슨 행패를 부려도 다 참아왔는데 그날은 형이 “돈을 내놓으라”며 어머니를 밀치는 등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행동들을 거듭했다. 그때 어머니가 남아있는 돈을 다 형에게 주고 우리 식구는 도망치듯 동네를 떠나 사글세방을 전전했다.
한 번은 이모네 집 방 한 칸을 얻어 생활하는데 어찌나 미안하고 눈치가 보이는지 있는 거 없는 거 다 팔고 옥탑 방으로 이사 갔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줄곧 거기서 살았다. 사람들은 옥탑방은 기억하지만 내가 어째서 옥탑 방까지 가게 됐는지는 몰랐을 거다.
(잠시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할 무렵. 컴퓨터 화면에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기사가 뜬 걸 보고 혼잣말로) 노 대통령님의 유해가 화장되는구나.화장이라, 화장이라…. (담담한 목소리로) 일전 나도 화장터에 간 일이 있다. 내 방황의 시작을 제공한 사람을 거기에서 마지막으로 보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이라, 그게 누구였나.(길게 한숨을 내쉬며) 형.
형?4, 5년 전 집으로 전화가 왔다. “여기 관리사무실인데 혹시 이상훈 씨 되십니까?”하는 거다. “왜 그러시지요?”했더니 대뜸 형의 이름을 대면서 “아시는 분이세요?”하지 뭔가. ‘아, 올 게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관리사무소를 통해 이런저런 소문이 날까봐 먼저 “아, 네. 제 형인데요”하고 선수를 쳤다. 그랬더니 관리사무소에서 그러더라. “무슨 복지관에서 형이 운명하셨다는 연락이 왔다”고.
복지관….그때 처음 알았다. 형이 쭉 부랑자로 살아왔단 걸. 우리한테 행패를 부리고 돈을 빼앗아간 다음 술로 탕진하면서 부랑자 생활을 했던 거였다. 그 복지관도 부랑자들이 모인 사회복지시설이었다.
복지관에서 당신의 존재는 어떻게 알았을까. 대개의 부랑자들은 무연고자로 세상을 떠나게 마련이다.관리사무소 전화를 끊고 복지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거기 수녀님이 그러셨다. (떨리는 목소리로) “고인께서 여기저기를 떠돌다 지쳐 복지관으로 돌아오시면 항상 절 보고 그러셨어요. ‘내 동생이 이상훈’이라고. ‘우리나라 최고 투수 이상훈’이라고.” 참,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고 증오했던 사람인데.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기억 속에서 면도칼로 도려내 잊고 싶은 사람인데. 그래도 그 말을 들으니까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짠한지….
결국 당신이 형의 장례를 치렀을 듯싶다.예전 기억을 떠올리면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분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길 아닌가. 시신을 보니까 새까만 얼굴에 뼈만 앙상한 상태였다. 사인을 들으니 공동화장실에 급사하셨다고 했다. 허허, 마지막 가는 길인데 어쩌겠나. 친구들을 불러내 함께 장례를 치렀다. 그때 누가 그랬다. “돌아다니시다가 돌아가신 분은 매장보단 화장해 유골을 뿌려드려야 한다”고. 그래 화장하고 안면도 흐르는 물에 유골을 뿌려드렸다.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 뒤로 개인적으로 무척 좋은 생겼다. 그게 다, 형이 도와준 게 아닌가 생각한다.
‘17K’의 주인공, LG 유니폼을 입다
이상훈의 방황은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중단된다.
웨이트트레이닝으로 살을 불린 그는 이후
강속구 투수로 거듭난다
1989년 고려대 입학 뒤 3년간 방황을 거듭했다. 당연한 이유로 당신의 거의 무명에 가까운 투수였다. 하지만 4학년이 되며 그 모든 것이 변했다.3학년 때 고연전에도 출전하고 성적도 괜찮게 나왔다. 하지만 그때도 방황이 계속됐다. 4학년에 올라갈 즈음, 좀 철이 들었는지 동계훈련서부터 전지훈련, 개인훈련을 나름대로 꾀부리지 않고 성실히 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스스로도 반신반의했던 시절이다.
1992년 4학년 때 첫 대회 첫 경기였던 대학춘계리그 성균관대와의 경기에 선발 조성민에 이어 4회 구원투수로 출전했다. 이 경기가 전설이 될지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아마 종전 한경기 연속탈삼진 기록이 11개였을 거다. 사실 11개를 잡을 동안에는 몰랐다. 12개째 삼진을 ‘딱’ 잡았을 때 장내아나운서의 “종전 한경기 연속탈삼진 11개가 깨졌습니다”하는 방송을 듣고서야 알았다.
대기록을 세웠을 때 기분이 어땠나.기분?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그래서 어쩌라고?’였지 뭐. 나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기록이었다. 보자, 아마 내가 14타자 연속탈삼진을 기록하고 15번 타자에게 3루 땅볼을 맞았을 거다. 그리고 나서 (손가락을 세며)16, 17, 18다음 타자들을 다시 삼진으로 처리하며 총 17탈삼진을 기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록에 대한 감정은 그렇다손 쳐도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이전과 달랐을 것 같다.완전 귀신 붙은 거지(웃음). 이상하게 불펜에서 몸을 풀 때는 공이 포수미트까지 제대로 가지도 못했다. ‘아, 이거 첫 대회 첫 경기인데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들었는데 이거 웬걸. 마운드에 올라갔는데 타자들이 연신 삼진으로 물러나는 거다. 거짓말처럼 포수가 사인내면 그쪽으로 공이 ‘팍팍’ 가는데. 와, 그날은 정말 귀신 붙은 날이었다니까.
그 경기 이후로 순식간에 ‘전국구’투수로 이름을 올렸다. 언론에서도 당신이 아마추어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1면 주요기사로 처리했다. 당신에겐 가장 잊을 수 없는 경기였을 텐데.물론 17K를 기록했던 그 경기가 기억에 남는 경기이긴 하지만 내겐 4학년 고연전이 더 각별한 경기다. 그 경기에서 내가 무사사구 완투승을 거두지 않았나.
당시 연세대 선발은 ‘괴물’ 임선동이었다. 게다가 연대 구원투수는 당시 아마추어 최고투수였던 문동환이었다. 내가 왜 기뻤을까 생각해봤다. 임선동과 문동환을 이겨서? 무사사구 완투승이어서? 아니다. 나를 끝까지 감싸주셨던 최남수 감독님과 수혁이 형 아버님을 위해서였다. (강한 어조로) 그리고 무엇보다 팀에 보탬이 됐다는 게 기쁘고 감사했다.
14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할 당시의 이상훈
1993년도 신인지명을 둘러싸고 OB 베어스(두산의 전신)와 LG가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당시 서울팀의 1차 지명은 주사위를 굴려 뽑았다. 두 팀 모두 1차 지명자로 당신을 꼽고 있었다. 당신은 어느 팀에 입단하길 바랐나.솔직히 어느 팀에 가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고교 때 OB가 서울고에서 훈련을 많이 했다. 당시 OB에 박노준 선배가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박노준’하면 모든 고교 왼손투수들의 로망이었다. 거기다 신경식, 양세종 이런 TV에서나 보던 스타들이 학교에 찾아와 운동하지, 김성근 OB 감독님이 투구폼 가르쳐주지, OB 선배들이 가끔 신던 스파이크나 글러브 주고 가시지. 마치 우리팀처럼 친근한 감정을 느꼈다. 반면 LG는.
LG는?1990년 창단하자마자 우승한 팀이었다. 뭔가 신선하고 샤프한 느낌이 있었다. (뭔가가 생각났는지) 이야, 1차 지명할 때 참. 그때 내가 어디 있었는지 아나?
숙소?아니다.
신인드래프트 현장?전혀.
그럼 어디?모 스포츠전문지 기자실에 있었다. 거기서 한번은 OB 모자, 또 한 번은 LG 모자를 쓰면서 사진촬영을 했다. 인터뷰도 OB와 LG걸 따로 했다. 상황이 그렇지 않나. 어느 팀에 지명될지 모르는 상태였으니까(웃음).
가난한 청년시절 이상훈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건
어머니와 야구 그리고 기타였다.
결국 LG가 주사위 승부에서 이기고 당신을 영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입단식은 영 개운치가 않았는데.당시 신문에 ‘이상훈 계약금 2억 원이면 LG 입단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나도 그 정도면 입단을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구단에서 연락이 왔다. “2억 원에 합의할 테니 오라”고 말이지. “정말이요? 네. 알겠습니다”하고 여의도 LG 사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런데?LG 사옥으로 가자마자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지 뭔가. 속으로 ‘어, 이거 뭐지’하고 있는 차에 직원분의 안내로 큰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헉, 이게 뭐야’.
왜 ‘이상훈 선수의 입단을 축하합니다’란 플래카드라도 설치돼 있던가.(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떻게 알았나.
진짜인가?플래카드 밑으로 당시 강정환 LG 트윈스 사장님, 어윤태 단장님, 최종준 단장님이 쫙 앉아 계셨다. 그런데 더 당황스러웠던.
당황스러웠던 건?내 옆에 앉아있던 구단 관계자가 갑자기 강 사장님한테 가더니 “우리 이상훈 선수가 계약금 1억8천8백만 원에 연봉 1천200만원 총 2억 원에 계약을 하겠답니다”하는 게 아닌가. 속으로 ‘아니, 나한테는 계약금 2억 원에 연봉 1천200만 원을 준다더니. 그럼 뭐야. 내 1천200만 원은 어디로 간 거야’하고 어리둥절해했지만 그 자리에선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내 LG 인생의 시작은 그렇게 시작됐다.(계속)
<전설이 된 그라운드의 야생마, LG 투수 이상훈> 2편을 기대해주십시오.
첫댓글 역시 이상훈~ 역시 박동희~ 다음편이 정말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