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속성 .......................................... 마광수
남녀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처럼 아름답고 거룩한 것은 없다. 이를테면 뒤마 피스의 소설 『춘희』에 나오는 '마르그리트'와 '아르망'의 사랑 같은 것인데, 일생에 그런 사랑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보고 죽을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생애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랑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형태로서 온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랑은 말하자면 '짝사랑'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때 이성의 담임선생님을 연모하는 식의 짝사랑이 아니라 설사 둘이서 데이트를 하고 키스를 하고 페팅을 하는 형태라고 하더라도, 두 사람이 각각 똑같은 중량과 부피를 가지고 상대방을 사랑하는 경우는 드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사랑의 형태는 대개 한쪽은 미칠 듯이 꼬시고 한쪽은 그 꼬심에 적당히 넘어가 주는 척하는 식이기 쉽다.
내가 상대방에게 홀딱 반했는데 저쪽에서 미온적으로 나오는 경우 거기서 '미칠 듯이 꼬시는 행위'가 유발되고, 그것은 결국 '소유욕'의 형태로 발전한다. 그러다 보면 상대방에게 더욱더 지극 정성을 쏟아 부으면서 소유욕을 사랑처럼 가장하게 되고, 상대방은 상대방대로 거기에 적당히 속아넘어가 주는 척하면서 점차 자신의 마음을 '불쌍해서라도 적선을 베풀어 주자'는 쪽으로 바꾸게 되는 것이 바로 범인인 우리가 겪는 사랑의 행로인 것이다.
꼬시는 쪽이 꼬심을 당하는 쪽에 지극 정성을 표시하는 방법은 대개 물질적인 '선물 공세'일 경우가 많다. 거기에는 물론 정신적인 '사랑의 맹세'가 곁다리로 마땅히 따라붙게 되는 법이지만, 꼬심을 당하는 쪽이 그 꼬심에 넘어가 주는 척하게 되는 심리적 동기는 결국 물질적인 애정 표시에 대한 '적당한 감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얼마 전에 나는 어느 잡지사의 주선으로 유명한 역술가 한 분과 대담을 나눈 적이 있다. 그때 내가 외롭다고 투덜거리자 그 역술가는 내게 여성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비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분의 말인즉슨, 여자는 선물에 약한 동물이기 때문에 무조건 선물 공세로 나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웬만큼 나이가 든 다음에 하는 연애에는 '물질적 공략'이 필수조건이라고 하였다. 여자는 상대방 남자가 가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를 따질 때 오로지 자가기 상대방 남자로부터 '얼마나 받았느냐'는 척도를 가지고 재게 된다는 것이다. 너무나 빤한 처방이요 충고였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분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꼭 현금이나 선물이 아니더라도 남자의 학벌이나 직업, 재산 정도 등 여러 가지 외형적 조건이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촉매제가 된다는 사실을 나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사실 여자 쪽에서 남자를 공략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여자의 사랑에 시큰둥하고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는 남자라 할지라도 여자가 아주 아주 돈이 많은 집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 요즘 시속이기 때문이다. 그 여자와의 결혼을 생각하며 '지참금'을 바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냥 연애 행위로만 끝난다고 하더라도 상대방 여자가 부잣집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눈'이 달라지는 것이다. 말하지면 7층에서 떨어진 메주 같은 용모의 여자라 할지라도, 남자 쪽에서 금세 눈이 달라져 가지고 '못생기긴 했지만 어쩐지 귀티가 난다'는 식으로 생각을 수정하게 된다는 얘기다.
나는 사춘기 때부터 지금까지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을 꿈꾸어 왔고 선물공세도 필요 없고 학벌이나 지위도 필요 없는 '발가벗고 뭉치는 사랑'을 꿈꾸어 왔다. 물론 나도 젊은 시절에는 물질적인 선물 공세까지는 안 가더라도 '편지 공세' 같은 것을 많이 시도해 보긴 하였다. 그렇지만 요즘 들어서는 선물 공세만이 아니라 편지 공세까지도 왠지 역겹게 느껴져서, 그저 막연히 서로가 상사상애하는 사랑이 내게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사랑이 '외로움과의 적당한 타협'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되고, '상대방이 베풀어 주는 지극 정성에 대한 적당한 감동'이 되어서도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점점 굳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삐딱한 오기나 자존심이 작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춘희』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뿐만 아니라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코제트'와 '마류스'의 사랑, 그리고 센키비치의 『쿠오바디스』에 나오는 '리디아'와 '마커스' 간의 사랑 등 소설에는 두 사람이 만나자마자 미칠 듯한 상사상애(相思相愛)에 빠져드는 사랑이 그토록 많이 나오건만, 현실에서는 왜 그런 사랑이 좀처럼 이루어지기 힘든 것일까. 아니, 그런 사랑은 고사하고 상대방한테 미칠 듯이 빠져 들어가는 일방적인 짝사랑조차 왜 그리 이루어지기가 힘든 것일까. 사랑은 결국 '상대방의 애정 표시에 대한 적당한 굴복'이거나 '수단방법을 다해 상대방을 굴복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소유욕의 충족' 정도밖에 안 된다는 말인가.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사랑하기가 더 어렵고, 상사상애(相思相愛)하는 사랑만을 꿈꾸다 보니 사랑이 영 실현 불가능한 신기루처럼만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지 이 가을이 더욱더 을씨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