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믿음과 용서
공동체 생활은 어렵다. 피를 나눈 가족도 그런데 어른이 돼서 만나 함께 살려고 하니 어쩌면 힘든 게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예수님 제자 공동체도 지금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던 걸(마태 8,21) 생각하면 제자들에게도 공동체 생활이 어려웠던 게 분명하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죄를 짓는 그와 맞서지 않고 예수님께 갔다. 질문 자체는 조언이나 답을 요구하는 내용이지만 그 이면에 하소연하고 그를 고발하는 마음이 보인다. 이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동감하고 그를 꾸짖어주시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그는 예수님에게서 절망적인 대답을 듣는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8,21).”
서운하고 정말 따르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그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공동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웃을 용서한 만큼 하느님께 내 죄를 용서하시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참으로 용서하셨고 좋아하고 사랑하신다는 걸 알게 된다. 바오로 사도가 티토에게 써 보낸 거처럼 남을 꾸짖고 교정시키려면 참으로 높은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흠잡을 데가 없고 가정에 충실하고 평판이 좋고 하느님 뜻에 순종하고 거만하지 않고 쉽게 화내지 않고 술을 즐기지 않고 온유하고 탐욕을 부리지 않고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하고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가르침을 받은 대로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한다(티토 1,6-9). 이런 사람이 되는 거보다 그냥 용서하는 게 더 쉬울 거 같다.
예수님 정도는 돼야 그를 꾸짖고 교정할 수 있을 거다. 예수님은 그 당시 지도층이었던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맞서고 대놓고 그들의 잘못을 고발하고 나무라셨다. 진보적인 사람에게는 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 그래서 개혁과 혁신을 주장하는 사람의 작은 비리가 밝혀지면 사람들이 더 실망하고 더 심하게 비난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꾸짖고 교정하실 수 있다. 그분은 온 인류의 죄를 끝까지 용서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희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무죄한 당신의 죽음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으셨다. 그 믿음은 산이 들려 바다에 빠지고(마르 11,23), 돌무화나무가 뽑혀 바다에 심기게(루카 17,6) 하고도 남았다. 산을 옮기고 나무를 거꾸로 심는 거보다 죄인을 구하시기 위해 외아들이 희생되기를 바라시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게 백 배는 어려울 거다. 우리에게 용서가 그렇게 어렵다. 예수님께 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대답은 늘 똑같겠지만 그분에게 하소연하고 고자질하면서 위로받고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러면서 자신 눈 속에 박혀 있는 들보도 발견한다(루카 6,41).
예수님, 한 사람은 한 우주란 말에 동감합니다. 수십 년 동안 쌓여 견고해진 그를 무너뜨리고 바꾸는 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를 바꾸지 못하지만 저는 바뀌고 싶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도전받고 상처받으며 제 마음이 더 넓어지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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