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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으로 퍼갈 수 없습니다.* 모놀식구들과 논산 들녁을 달리다. 글/사진: 이종원
논산 쌍계사의 용마루와 지붕은 우리 아버지의 든든한 어깨였다. 그걸 받치고 있는 기둥은 원목의 가지만 툭툭 쳐서 지붕을 떠받들고 있었다. 대가없는 자식사랑이었다. 너른터에 서 있는 대웅전에서 묵직한 산사의 맛이 풍겨나온다. 풍경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고 ..... 주지스님의 고무신 한 짝이 없어져 절간의 모든 강아지를 동원해서 하얀 고무신 한짝을 찾느라고 정신없었다고 하지만 너무나 편안한 풍경이었다.
문마다 예쁜 꽃을 피어내고 있었다. 겨울에도....꽃은 지지 않고 대웅전을 빛추고 있었다. 꽃문양에 도력이 가미되어 유난히 빛을 잘 받아들인다는 전설, 탱화를 파랑새가 붓을 물고 그렸다는 이야기, 칡덩쿨 기둥을 안고 돌면 병을 오래 앓지 않는다는 이야기...이 조용한 사찰에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득차 있었다. "정말이예요?" 대웅전은 꽃만 화려하게 피운채....아무 말이 없다. 묻는 내가 바보지.
부도밭을 향하는 길은 가을길이다. 낙엽밟는 소리에 가을의 정적이 깨진다. 가끔은 이정도 인원이 절집을 찾아야 생기가 돌지 않을까? 만약 큼직하고 화려한 부도가 입구에 버티고 섰으면 사천왕상처럼 보여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장독대같은 부도가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었다. 하도 예뻐서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로.....
좋은 풍경을 보면 얼굴도 선해지나 보다.
반야사 중턱에 관촉사가 서 있다. 저 멀리 은진미륵이 우람하게 서 있다. 논산평야에 솟은 산이 없어 먼 곳에서도 이곳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절에서는 보기 힘든 돌문이 서 있다. 비록 차가운 돌이지만 단풍에 어우러져 따사롭게 보인다. 아...관촉사란 한글글씨가 온기를 불러 넣어주었구나. 왜 이곳에 돌문과 석벽을 세웠을까?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는 문을 세우고 싶었는지 모른다.
"너 은진미륵보다 얼굴 작아." 이런 말을 들으면 모욕일까? 아이들의 심성이 보인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과감히 생략한다. 은진미륵은 머리와 수인을 강조했다. 은진미륵은 아이들의 심성을 가진 천재 조각가가 만들었으리라. 자세히 뜯어보면 과학과 예술의 절묘한 만남임을 알게 된다. 도넛처럼 뚫긴 귀, 머리칼과 옷주름의 섬헤함, 하부의 2중배수처리.....
황산벌을 응시하고 있는 저 눈빛을 보라. 부드럽게 다음은 돌은 이마 윗부분에 와서 거칠게 다듬으면서 전체적으로 힘이 느껴진다. 계백장군에 이어 왕건 그리고 논산훈련소의 초년병 군바리까지....그 힘은 면면이 이어오고 있었다.
조각하느 분들께 물어봤더니 손이 제일 조각하기 힘들다고 한다. 더구나 화강암을 다룬다는 것이 보통작업이 아니다. 하반신은 마징가처럼 솟아올랐고 허리 이후는 흙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발까락까지 섬세하게 그려내었다.
염원
스르르 무릎을 꿇게 만드는 연꽃배례석
석등은 지금 응급치료를 하고 있다. 모놀식구들 은진미륵의 힘이 전달되기를 ..
모놀답사의 또다른 즐거움은 역시 맛집순례에 있답니다. 조선불고기의 불고기 정식. 논산에 이런 맛집이 있다니....
평양, 대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시장이었던 강경. 100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화려했던 영화는 퇴색된 영화필름처럼 지나간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길을 걸어보았다.
전라도, 충청도 즉 남쪽 제일의 한의원인 남일 한의원. 60년대 풍경이다. 집도 사람도 60년대 사람... 바깥은 일자형인데..
안쪽에서 볼 때는 ㄱ자형 집입니다. 2층 방에서...일제시대때 2층집이면 무척이나 큰 집이다. 이집 머슴과 몸종일지 몰라. ^^
강경천주교회
현지인들은 다 떠나고 외지인들이 만든 젓갈촌이 강경을 차지하고 있다. 한 때 강경을 주름잡았던 근대 유적지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110년 역사의 강경침례교회
한일은행 강경지점. 일제시대부터 삼남의 돈이 다 이곳으로 몰렸다. 입구는 작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엄청 넓다.
천장높이만 7미터 얼마전까지 젓갈창고로 썼다고한다.. 두툼한 금고가 당시의 영화를 말해준다.
녹슨 금고.
유심히 살펴보면 화려한 장식을 볼 수 있다. 6.25때 폭격을 당해 지붕이 날라갔기에 지금은 함석지붕이다. 독서실이었다가 젓갈창고까지...파란만장한 건물이다. 영화 '마지막 황제'를 보는 듯....
조선식산은행-한일은행-충청은행 등많은 은행들이 바뀌어서 상호가 들어간 간판이 지저분해졌어요.
가끔 드라마 촬영을 한다고 한다. 이런 골목길은 한옥마을처럼 오래오래 간직되었으면 좋겠다. 과거로 향한 블랙홀에 빠져들었다.
소주 왕대포를 팔고 있는 정원집. 얼마전 연변에서 봤던 풍경이다. 이런 곳이 여태 남아 있다니....
친구중에 하나는 전국의 다방순례를 하는 놈이 있다. 다방을 가면 그 지역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나...코코다방...이모의 치마폭에 들어간 것처럼 포근하다.
대동전기상회..예전에는 무진장 큰 상점이었을텐데...
근사한 한옥건물인 강경 북옥교회를 찾았다. 팔작지붕의 겹처마집이다.한옥임에도 불구하고 정사각형 건물이다.
천정의 서까레와 거물줄처럼 엉긴 보와 기둥이 볼만하다. 한국식 돔형건물이라고 할까
우리나라 젓갈의 50%을 차지하고 있는 강경젓갈시장. 강경은 금강을 따라 하천 곳곳이 내륙으로 배가 갈 수 있는 수운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운송비를 절감할 수 있어 시장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서해안의 모든 생선이 내륙으로 집결했는데...바로 팔리면 문제 없는데 물산은 재고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렇게 팔다 남은 물건을 오래오래 팔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젓갈이었다. 이곳의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염장법이 발달되었다고 한다. 금강하구둑이 생기면서 배로 움직였던 교통수단은 사라지고 트럭과 기차가 그 역할을 대신해준다. 그래도 과거 강경의 화려한 역사의 마지막 불꽃은 바로 이 젓갈시장이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종교 순례다. 사찰 2군데, 교회 1군데, 성당 12군데....^^ 나바위성지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을 때 겸손과 순명이 떠올랐다.
상해 금가항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김대건신부님은 자신이 직접 명명한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떠나 제주도 해안을 따라 이곳 나바위에 도착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서 첫 사명을 띄고 이땅을 밟았을 때의 심정은 어떨까 ?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상복으로 갈아입고 서울로 간다. 아버지 할아버지는 신앙을 지키며 순교를 했고 어머니는 미치광이가 된 소식을 듣지만 하느님의 소임때문에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다. 인간적으로 가장 가슴아픈 순간이다. 이 땅의 신부가 절실하다고 안 김대건신부님은 신부 입국로 지도를 만들어 연평도까지 갔다가 결국 체포당하고 만다. 서울로 압송당하고 40차례 문초를 당하고 결국은 사학의괴수가 되어 새남터에서 신앙의 칼을 받는다. 라파엘호의 돛대처럼 생긴 순교비가 화산 정상에 서 있다.
지금은 간척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바로 산아래까지 금강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곳에 첫발을 댔다.
야외성당의 제단에 새겨진 최후의 만찬 부조
한국식과 서양식의 퓨전양식이다. 긴 회랑 건물이 보인다. 청나라의 기술자가 채광창은 중국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고딕양식의 종찹
벽돌식 건물의 지붕은 기와을 올렸다.
수녀님의 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마루바닥에는 100년전의 신앙의 온기가 그대로 살아 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있기전에는 신자들을 등지고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 제대다.
제단이 3개나 된다. 예전에는 신부님들이 각자 개인 제단에 두고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맨 왼쪽 제단은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가 있다고 한다.
십자가의 길. 성화도 역시 100년전의 그림 그대로다.
김대건 신부가 첫발을 내딘 나바위는 첫마음의 성지라고 한다.
그 오롯된 마음은 후세에도 이어졌다.1908년 계명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가 폐교가 되고, 신부님은 구속되어 해방후 풀려났다고 한다. 6.25때는 공산군이 점령했다. 미사가 끊어지지 않은 유일한 성당이기도 하다. 김후상신부는 미사를 지내가 죽으면 큰 행복으로 여겼고, 신자들은 인민군 자위대원이 되어 신부님과 성당을 지켜냈다. 1987년까지 시약소가 있어 빈민을 구제했던 성당이기도 하다. 그 의미 있는 곳에 모놀식구들이 서 있습니다.
노을질 때 서천 신성리 갈대밭을 찾았다.
노을 받아 더 힘을 얻고 있는 맵시님. 가시나무새..매번 듣는 노래지만 이번에도 전율이.... 갈대밭 곳곳에 공연 할 수 있는 장소가 나타나면 맵시님이 노래를 불러 주었다.
토깡이님과 레아님. 관광버스 춤을 신성리 갈대밭에 옮겨 놓았습니다. 토깡이님의 표정 보세요.
갈대-신경림
언제부터인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를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이 아닌 것 갈대도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훌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기가 막힌 노을이 갈대를 비추고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본다는 것은 행복한 일....
오늘 답사의 마지막 일정지인 서천 신성리갈대밭. 2미터가 넘는 갈대밭이 7만평이나....식구들과 갈대숲을 거닐었다.
갈대숲에서...
풍악을 울려라. 신영웅님은 마동탁을 쏙 닮았네. 김사랑님은 엄지, 맵시님은 백두산, 사진에 없지만 독고탁은 역시 대장이지요. ^^ 갈대향이 코끝에 스쳐갑니다. 흔들리는 갈대사이로 모놀의 선율이 슬그머니 스며듭니다.
해는 뉘엿뉘엿...이렇게 기나긴 53차 답사도 마감을 합니다.
함께해주신 모놀 식구들께 감사인사 전합니다. 아침에 콩시루 떡을 기증해주신 은사시나무님, 껍질채 먹는 사과 한 박스를 기증해 주신 충주의 권경문님, 귤 한박스를 기증 해주신 계산, 씀바귀님, 저녁 떡을 준비해주신 노자, 조아님 부부, 유기농 야콘 맛을 보게 해주신 달새,보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더욱 풍성한 답사가 되었습니다. 갈대숲 너머로 지는 해를 보았습니다. 그 아름다운 풍경 오래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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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휴~~~~~~~~~~~~ 한숨섞인 감탄이 저절로 나오네요.....행복한 모놀식구들의 얼굴들과 기막힌 풍경들이 아름답습니다.....ㅡ.ㅡ''''
가을이 가고 있군요...각교계를 두루 둘러보고 오셨네요교는 다 라도 마음이 숙연해지는건 같겠죠..^^
남해에 이어 두번째 답사, 그때 비해서는 조촐하지만 더욱 따듯함을 느낀 하루였습니다. 화산 성당의 첫마음의 의미, 망금정에 오르며 이어져있는 작은 聖조각물들, 좀더 오래 머물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그리고 금강하구의 갈대밭... 아직 눈에 션하군요. 특히 대장님의 사진과 글로 오래 간직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의미있는 답사기행.. 저녁노을에 비친 갈대밭 풍경속에 어우러지는 모놀포즈..
발길 닿기가 어려운 작은 마을이 의외로 남는게 많지요....저 코코다방엔 미쓰리가 있겠지요?ㅎㅎㅎ
저요? 저는 이미 그 곳 떠난지가 오래됐는걸요...푸하하하하~~
해 떨어지는 갈대밭에서 모놀인들의 열정은 식을줄도 모르고...조그만 더 비춰 주었으면 좋았을텐데...아쉬운 갈대밭
아, 정말 부럽다느려서 접속도 못하지만 갈 엄두도 못내고 매번 이렇게 사진 글 읽으면서 동참해본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카페에 식구되어서 이렇게 눈으로 다녀올 수 있는 것도 복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랩니다. 카페지기님 화이팅 고맙습니다.
사진 한장 한장마다....글 한줄 한줄마다 모놀 가족들의 정겨움과 따스함이 전해 지는듯 합니다. 시간이 허락치 못해 참석을 못한 그 아쉬움. 대장님의 발자취따라 달래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마음에 남는 답사였습니다. 고맙습니다.
모두가 감동입니다...시간있으면 대포나하고 왔으면 하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