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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축복 2(1)
신 33:18-29
18 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19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
20 갓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갓을 광대하게 하시는 이에게 찬송을 부를지어다 갓이 암사자 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는도다
21 그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 곧 입법자의 분깃으로 준비된 것이로다 그가 백성의 수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
22 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
23 납달리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3)서쪽과 남쪽을 차지할지로다
24 아셀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아셀은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25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26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27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28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신 33:18-29 / 스불론 지파와 잇사갈 지파에게는 이렇게 축복하였다. `스불론 지파는 지중해로 진출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고 잇사갈 지파는 정착생활을 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아라! 19) 이 두 지파는 해변에서 사귄 이웃 백성들을 초대하여 함께 다볼 성산으로 올라가 흠 없이 온전한 짐승들을 잡아 주께 제물로 바칠 것이다. 그들은 해상무역으로 재물을 모으고 모래 속에서 연지조개를 캐어 자주색 옷감을 만들고 그 귀중한 상품을 대상들에게 팔아 부유하게 될 것이다.' 20) 갓 지파에게는 이렇게 축복하였다. `갓 지파는 요단강 동쪽 지역에서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였으니 그들에게 넓은 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라! 갓은 사자처럼 웅크리고 약탈물을 노리고 있다가 그 손에 걸려 들기만 하면 팔을 부러뜨리고 머리까지 떼어내 버린다. 21) 열두 지파가 땅을 나눌 때 갓은 ㄱ) 가장 좋은 곳을 맨 먼저 골랐다. 이스라엘 영도자의 무덤이 그곳에 있으니 이스라엘의 두령들이 언제까지나 그곳에 와서 모일 것이다! 갓은 여호와의 의로운 일을 하고 온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주님의 법을 온 세상에 퍼뜨릴 것이다!' (ㄱ. 모세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본래 모세의 몫으로 분배된 땅이라는 뜻이다) 22) 단 지파에게는 이렇게 축복하였다. `단은 이제 막 바산의 숲 속에서 뛰어나오는 젊은 사자와 같다!' 23) 납달리 지파에게는 이렇게 축복하였다. `여호와의 사랑을 만족하게 받고 온갖 복으로 가득 찬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 납달리여! 남쪽으로 갈릴리 호수까지 차지하고 사는 납달리 지파여!' 24) 아셀 지파에게는 이렇게 축복하였다. `아셀은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에서 가장 기름진 땅에서 살도록 복을 받았다. 그는 자기 형제들에게도 귀여움을 받으며 그 땅에서 올리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 발까지 기름으로 닦으리라. 25) 모든 마을이 부유해져서 성문마다 쇠와 놋으로 빗장을 걸어 놓을 것이다. 아셀 지파가 지상에 머물러 있는 한 언제까지나 그렇게 부강할 것이다!' 26) 이어서 모세가 이스라엘 전체에 대하여 축복하였다. `이스라엘을 존귀한 여수룬으로 높여 주신 하나님, 여수룬의 하나님과 같은 신은 하나도 없다. 그분이 하늘에서 찬란하게 구름을 타고 급히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러 오신다. 27) 그 영원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피난처시요 그분이 강한 팔로 이스라엘을 붙잡아 그품에 안아주신다! 이스라엘아, 그분이 원수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들을 전멸시키라고 네게 명령하셨다. 28) 이제는 이스라엘이 안전한 곳에서 살며 홀로 야곱의 샘물을 퍼마시며 살 것이다. 하늘은 이슬과 비를 흡족히 내려 주고 땅은 네게 곡식과 포도주를 풍족하게 내어 줄 것이다! 29) 이스라엘 백성아, 너희는 얼마나 행복한 백성이냐! 여호와께서 해방시켜 주신 백성, 이런 백성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느냐?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방패와 같고, 원수들을 쳐서 이기는 무서운 칼과 같으시니 이스라엘아, 너희는 언제까지나 여호와만 의지하며 살아라! 그러면 네 원수들이 네 앞에 엎드려 살려 달라고 애원할 것이고 너는 그들의 등을 짓밟게 될 것이다!'
모세는 축복을 결론지으며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스불론, 갓, 단에 대한 축복(18-22) 스불론은 바닷가에 살면서 세계로 멀리 뻗어나가는 행운의 복을 받고, 잇사갈은 장막에 있어서 농사를 짓고 양을 치고 목축을 하는 평화로운 전원의 복을 받습니다. 스불론과 잇사갈은 조화를 잘 이루고 하나가 되어, 바다로 나가서 일을 하고 바다의 풍부한 여러 가지 해산물과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얻습니다. 열국의 백성을 불러들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도록 합니다. 갓 지파는 영토를 넓히고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감격하여 찬송을 부르는 자가 될 것과 암사자같이 힘이 있어 달려드는 자들의 정수리를 찢어 없애는 능력을 주실 것을 축복합니다. 단 지파에게는 간단하게 복을 빌어주는데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라는 말씀처럼 용맹있는 지파가 될 것을 축복합니다. 용맹한 삼손이 단 지파 출신입니다.
납달리, 아셀에 대한 축복(23-25) 납달리 지파는 은혜가 풍성하고 농사를 잘 짓고 복이 가득한 지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셀 지파는 자녀를 많이 낳아서 왕성하여, 농사가 잘되고 올리브 기름이 잘 되어서 그 발이 기름에 잠기도록 하며 축복합니다. 그리고 문빗장이 철과 놋이 되니 사는 날 동안 능력있는 지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행복한 사람, 여수룬(26-29) 여수룬이란 옳은 자, 의로운 자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같은 이가 없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여수룬이 된 것은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여수룬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아무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실 때 하늘에서 번개가 칠 때 말씀을 주셨던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의 팔로 베게 해 주시듯이 안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대적을 쫓으시며 우리에게 멸하라하심으로 함께 승리를 맛보게 하심입니다. 계속해서 솟아나는 은혜로 하늘의 이슬이 내리는 곳에 곡식과 새 포도주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하여 행복한 자가 됩니다. 구원의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구원하게 하시고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적용: 행복은 축복하는 사람도 행복자이고, 복을 받는 사람도 행복자입니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인 것을 감사하고 계십니까?
자기부정은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부정은 우리의 모든 것을 무엇을 위해 쏟아붓느냐의 문제입니다. 자기부정은 “이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고 묻지 않고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 하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실까?”라고 묻는 것을 의미합니다.
< 설 교 >
풍성한 은혜에 감사합시다
신 33:23 / 강성찬 목사(전주동부교회)
(신 33:23) 납달리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쪽과 남쪽을 차지할지로다
어느 나라에 남편감을 파는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합니다. 이 백화점에 가면 마음대로 남편감을 골라 살 수 있었다합니다. 그 대신 규정이 하나 있는데, 이미 거쳐 왔던 층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합니다. 미혼의 두 여성이 꿈에 그리던 남편을 사려고 백화점을 찾았다합니다. 1층에는 직업이 있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남자들이 진열되어 있었다합니다.“괜찮군. 1층이 이 정도면 한층 더 올라가 볼 필요가 있겠어.”2층에는 돈을 잘 벌고, 아이들도 좋아하며, 아주 잘 생긴 남자들이 진열되어 있었다합니다. “흠, 아주 좋아. 더 올라가자.”3층에는 돈 잘 벌고, 아이를 좋아하고, 아주 잘 생겼고, 집안일도 잘 도와주는 남자들이 있었다합니다. “우와, 여기서 멈출 수 없어.”4층에는 돈 잘 벌고, 아이 좋아하고, 잘 생겼고, 집안일 도와주고, 아주 로맨틱한 남자들이 진열되어 있었다합니다. “맙소사! 4층이 이 정도면 5층은 상상을 초월하겠지.” 그러나 5층으로 올라가자, 5층의 안내문은 “5층은 비어 있음. 만족을 모르는 당신, 출구는 왼편에 있으니 계단을 따라 쏜살같이 내려가기 바람.”이라고 적혀 있었다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바다 물과 같아서 만족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은혜로 함께 하십니다.
납달리에 대한 모세의 축복으로서 모세는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자'로 묘사하며 서쪽과 남쪽의 땅을 얻으라고 축복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기 때문임을 말씀합니다.
'납달리'는 야곱이 라헬의 시녀 빌하에게서 난 둘째아들로서 야곱에게는 여섯 번째 아들로 라헬이 레아와 경쟁하여 이겼다 하여 그의 이름은 '납달리',고 지었습니다.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창 30:7-8)고 합니다.
후에 납달리는 네 아들을 두어서 저마다 한 종족을 이루어 광야에서는 단, 아셀과 함께 '단의 진'을 이루었습니다. 가나안 진입 후에는 여섯 번째로 땅을 분배받아서 10 성읍을 얻었습니다.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라고 합니다.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복이 시적으로 예언적으로 납달리 지파에게 내려지고 있는 말씀으로 납달리가 여호와의 복이 가득하게 될 것이라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모든 복이 그러했듯이 이 납달리 지파에게도 복은 희망적이었습니다. 특히 이 지파에는 풍성한 삶을 복의 말씀으로 얻었는데 이것은 모든 이들이 원하는 삶인 만큼 더욱더 눈길이 가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풍성한 삶을 약속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복이며 기쁨인 것입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은 이러한 풍성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자야말로 풍성한 삶을 누리는 자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축복의 말씀만으로도 여호와의 복을 가득히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풍성한 삶을 살게 해줄 다른 이름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납달리는 이 말씀과 같이 여호와의 복을 가득히 받았습니다. 그들의 땅은 비록 북쪽에 위치하였지만 많은 소출을 내어서 제일 먼저 소산을 성전에 바쳤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비록 납달리 지파뿐만 아니라 우리들 삶 속에도 연결되어서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합니다. 풍성한 삶은 여호와의 이름으로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깨달은 심령들은 더욱 더 헌신하며 봉사며 사랑을 나누며 풍성한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해비타트 운동은 전 세계 무주택자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려는 취지로 시작됐다합니다. 창립자는 밀러드 풀러(Millard Fuller)로 법률가이자 사업가로 성공한 백만장자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돈만 추구하다가 가정적인 위기는 물론 영적인 위기를 맞으면서 돈이나 지위가 인생에 성공을 가져다주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합니다. 그와 그의 부인은 부유한 삶이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지는 원인이 된다고 판단하고,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나눠 주자!’라고 결단했다합니다. 이렇게 해서 해비타트가 탄생했으며 그들은 지금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합니다. 이 운동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합니다. 우선 정말 어려운 가정들을 찾아서 그들과 함께 집을 짓는 것이라 합니다. 거저 받는 것이 아니라 직접 건축 자재를 실어 나르고 일하며 값진 땀을 한 동이씩 쏟아 낸 후에야 비로소 자기 집을 갖게 된다합니다. 그렇게 해서 집이 완공되면 입주 가족은 건축비를 상환해야 한다합니다. 집값은 저소득층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 합니다. 또한 모든 입주자는 이후 해비타트의 동역자로 일해야 한다합니다. 입주자들도 받은 만큼 주는 삶을 사는 것이라 합니다. 이처럼 나눠 주는 복된 인생이 해비타트의 진정한 목표라 합니다. 내 집을 마련하고 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내가 남을 위해 집 짓는 수고를 하는 것, 그래서 나누는 삶을 끊임없이 실천해 가는 것이라 합니다.
우리도 풍성한 은혜에 주심에 감사하며 나누며 더 풍성한 은혜와 복을 누리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납달리여 너는 서쪽과 남쪽을 얻을지로다'라고 합니다.
'너는 서쪽과 남쪽을 얻을지로다.'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서쪽'은 '바다 쪽' 곧 지중해 연안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영토는 북으로는 레바논 남쪽에서, 남으로는 갈릴리 바다 남쪽까지 이르렀었습니다. 그런데 '서쪽'은 바다의 풍요함을 '남쪽'은 따뜻함을 뜻하므로 그들의 땅이 자연적인 조건이 좋은 비옥한 땅이 될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합니다.('매튜 헨리')
실제로 그들은 물이 풍족하여 농산물이 아주 넉넉한 게네사렛 호수 주변에서 살았는데 그곳은 아열대성 식물이 잘 자라서 요세푸스의 고대사에서는 지상낙원으로 찬사를 보낸다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사는 삶은 소망이 있는 삶이며, 그러한 삶이 바로 풍성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소망 가운데 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3)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풍성한 삶이 되고자 한다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족한 은혜와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삶과 우리의 장래 거할 처소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면서 선을 실천 할 때 베푼 은혜가 다시 내게로 돌아옴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100년 전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의 두 고학생이 돈이 다 떨어지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파데레우스키를 초청해 음악회를 열어 학비를 벌려고 했다합니다. 매니저는 2천달러를 요구했다합니다. 두 학생은 열심히 음악회를 준비했으나 4백달러의 적자가 났다합니다. 1600달러를 드리며 나머지는 가능한 한 속히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합니다. 그러자 파데레우스키는 “학생들, 그러지 말고 1600달러에서 모든 비용을 다 제하고 남은 돈에서 10%씩 둘이 나눠가지고 나머지를 내게 주시오”라며 돈을 돌려주었다합니다. 1차대전 종료 후 파데레우스키는 폴란드의 수상이 되었고 국민은 기아 상태에 빠져 있었다합니다. 미국 연방 식량국 허버트 후버 국장에게 도움을 청했다합니다. 그 결과 수만톤의 식량지원을 받았다합니다. 수상은 국장을 만나 감사를 드렸다합니다. 그러자 국장은 “괜찮습니다. 기억 못 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수상께서 옛날 제가 대학생 때 저를 한번 도와주신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합니다. 후버는 후에 미국 31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고학생들은 도왔던 선행이 굶주린 백성을 구하는 은혜로 되돌아 왔듯이 받은 은혜에 감사할 때 더 큰 은혜와 복으로 함께 할 줄 믿습니다.
'납달리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은혜가 풍성하'(23절)다고 합니다.
은혜가 풍성한 삶이야말로 풍성한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물질과 돈이 풍족하고 지식이 풍족하며 자녀의 풍부함 등이 있어야 풍족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잠 28:25)는 말씀과 같이 풍족한 삶을 얻고자 하는 자는 물질을 탐하여 그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의뢰해야 합니다.
풍족한 삶은 물질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연유합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보드힐드 다알 여사는 태어날 때부터 한 눈 밖에 없었으며 이 눈마저 시력이 아주 나빠 눈썹을 책에 닿을 정도로 대고 책을 오른쪽, 왼쪽으로 옮기면서 읽어야 했다합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영 시력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는 이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즐겁게 생활하는 태도를 고수했다합니다. 그녀가 52세가 될 때 눈 수술을 받아 이 세상을 밝히 보았을 때 비누 거품이 아롱거리는 무지개와 창밖에 날아다니는 참새를 보고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합니다. 그리고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납달리 지파에게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름대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각기특성에 맞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셨으며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넉넉하고 넘치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고후9:8)라고 하십니다.
다만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얻고도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잘되면 다 자기의 공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무엇이 잘못되면 하나님이 자신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며 우리가 잘못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그룻되게 행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고 도우시지 않으면 우리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족한 줄로 알고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주어집니다. 바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은혜도 그러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 도상을 걷고 있을 때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구원을 받는 것이었기에 그러한 그에게 바로 그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합니다.
납달리 지파에게 내려 주신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거저 값없이 내려 주시는 풍족한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값없이 구원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4세기에 활동한 사막의 수도사 벨로스의 압바 미오스(Abba Mios of Belos)에게 한 군인이 질문을 던졌다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죄인을 용서하실까요?" 이 늙은 수사는 한참 동안 용서에 대해 설명한 뒤 그 젊은이에게 되물었다합니다. "자네의 외투가 찢어졌을 때 자네는 그 옷을 금방 버리는가?" "아닙니다. 깁거나 꿰매서 다시 입지요." 이때 미오스가 조용히 말했다합니다. "자네가 찢어진 옷도 버리지 않고 소중히 여긴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자녀를 얼마나 아끼시겠는가?”
그렇습니다. 헤지거나 뚫어진 옷도 깁거나 꿰매어 다시 쓸 수 있다고 할진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은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죄로 인해 일시적인 손상을 입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기어코 용서하시고, 다시 귀중히 쓰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사 42:3)하십니다.
바울이 어떤 질병으로 고통을 겪게 되자 그는 하나님께 고쳐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그의 병을 직접 고쳐 주시지 않으셨으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가장 필요한 만큼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울에게는 가장 족한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지금 처해 있는 삶의 현실이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가장 풍성한 은혜의 삶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과 같이 도리어 그 환경, 즉 그가 병의 고통을 기뻐하였듯이 우리의 환경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풍성한 삶을 누려야겠습니다.
노련한 기독교 용사인 웹 페플로우 목사를 승리의 삶으로 이끈 것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말씀이었다 합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엄청난 슬픔을 겪은 후, 그는 이 말씀을 주제로 하여 설교를 준비하려 했다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짐을 주께 맡길 수 없었다합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외쳤다합니다. “오 하나님, 나에게 닥친 이 큰 슬픔을 감당하기에 흡족한 은혜를 나는 찾지 못하겠나이다. 부디 흡족하게 해주소서.” 그는 무릎을 꿇고 이 기도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합니다. 그러다가 그는 눈물어린 눈으로 벽난로 위에 있는 빛나는 장식판을 보게 되었다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순간 그는 자기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외쳤다합니다. “나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구나. 이미 나에게 있는 것을 하나님께 요구하다니!”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주를 의지했다합니다. 성도들이야말로 모두가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자'들입니다.
납달리는 여호와의 복이 가득하며 서쪽과 남쪽을 차지하며 은혜가 풍성하다고 한 그 풍성한 은혜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누리기를 원함이 하나님의 뜻인 줄 믿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교회설립 80주년을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한 해를 사는 가운데 이달은 풍성한 은혜에 감사하는 달입니다. 납달리 족속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신 하나님 우리에게도 풍성한 은혜 주심에 감사하며 풍성한 수확의 달을 허락하신 은총에 감사하며 오는 추수감사주일에 동참하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복을 받으라!
신 33:24-25 / 심삼철 목사
야곱의 아내 레아가 아들을 낳고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창30:13)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셀이라는 말은 “기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셀은 그 이름 자체에 큰 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아들 아셀에게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창49:20)라고 축복했습니다. 아셀이 왕은 되지 못하지만 왕의 수라상을 차릴 정도로 기름진 복을 받으리라는 축복입니다.
모세는 더 발전적으로 아셀 지파에게 더 많은 축복을 예언했습니다. 형제지파보다 “더 많은 복을 받으리라”는 축복의 메시지였습니다. 절망은 패망을 낳습니다. 희망은 소망을 낳습니다. 더 많은 복을 받으리라는 희망은 반드시 그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왕하2:9)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왕하2:9)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성령으로 하늘에서 불까지 끌어내렸습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❶다메섹으로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했고 ❷이스라엘로 가서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했고 ❸엘리사의 고향인 아벨므홀라로 가서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자기의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엘리사는 이렇게 위대한 선지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 갑절의 능력을 구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욕심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엘리야는 엘리사가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소망적인 비전을 가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 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왕하2:10)고 일러 주었습니다.
이 대화는 두 사람이 길을 가며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나타나서 두 사람을 갈라놓았습니다.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바라 보았습니다. 순간 엘리야의 겉옷이 떨어졌습니다. 엘리사가 자기의 겉옷을 찢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가지고 돌아와 엘리야의 겉옷으로 요단 물을 치며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왕하2:14)라고 외치자 요단강물이 갈라졌습니다. 그로부터 엘리사의 사역에는 이적과 기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사의 간구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갑절의 축복을 구하는 것이 “욕심이 아니라 비전”이라면 하나님은 반드시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욕심은 물거품이 되지만 비전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모세는 아셀 지파에게 “아셀은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신33:24)라고 축복했습니다. 복에 복을 더해 받으리라는 축복의 예언이었습니다.
아셀 지파는 모세의 축복대로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금의 갈멜산과 가아사랴 항구에서 북쪽의 두로 지역 전체를 차지했습니다. 해변의 풍부한 자원을 축복으로 차지했습니다.
1. 형제에게 기쁨이 되리라!
모세는 “아셀은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신33:24)라고 축복했습니다. 형제에게 괴로움과 고통이 되는 것은 비극입니다. 형제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97:11절에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 도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려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뿌려 주시는 기쁨의 은혜를 받으면 아셀과 같이 형제에게 기쁨을 뿌려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 기쁨의 5단계가 있습니다. 인생의 참된 기쁨은 사랑의 꽃에서 얻어지는 향기입니다. 꽃의 향기에도 진하고 약한 것이 있듯이 사랑의 기쁨도 차원이 있습니다.
❶사랑을 받는 기쁨입니다. ❷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기쁨입니다. ❸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쁨입니다. ❹자기를 해롭게 하는 자도 사랑하는 기쁨입니다. ❺죽을 수밖에 없는 자를 구하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기쁨입니다. 더욱 더 차원이 높은 기쁨을 가진 자만이 모든 형제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형제들에게, 교우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험악한 인상으로 부담을 주기도하고, 어떤 이들은 표독스러운 말로 부담을 주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거친 행동으로 부담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좋은 인상으로 기쁨을 주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부드러운 말로 기쁨을 주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조심스러운 행동으로 기쁨을 함께 하기도 합니다.
2. 발이 기름에 잠길지라!
모세는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라”(신33:24)고 축복했습니다. 야곱은 입으로 먹을 것이 기름질지라고 했고, 모세는 발이 기름에 잠길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셀 지파의 땅이 비옥한 옥토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먼 훗날 솔로몬 왕은 아셀 지파의 기업인 갈멜 평원에서 나는 곡식을 두로 왕 히람에게 공급한 적이 있었습니다(왕상5:11). 발이 기름에 잠긴다는 말은 윤택한 생활을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❶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❷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❸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❹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❺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❻주의 은택으로 핸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시65:9-12)라고 즐거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을 따라 가는 길에는 기름방울이 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나의 길이 아니라 주의 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주의 길에는 핏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주의 길에는 기름방울이 떨어집니다.
3. 사는 날 동안 능력이 있으리라 !
모세는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33:25)라고 축복했습니다. 문빗장이 철과 놋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철통같이 지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문빗장은 히브리어 “미느알”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나알(매다. 꼭 잠그다, 둘러싸다)”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문빗장은 “요새나 성채”를 가리키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워하는 예레미야에게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건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렘1:18-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말씀에 매달려 평생을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모세는 “아셀에게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33:25)라고 말했습니다. 능력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도베”라는 말인데 이 말은 “평온”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길이길이 태평성대를 누리어라”라고 번역했습니다.
안소니 로빈스의 “무한 능력(Unlimited Power)”중에 “우리의 삶을 위대한 꿈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마술 같은 힘은 항상 우리 안에서 잠자며 기다리고 있다. 이 세상에 정열을 가진 사람은 많다. 그들은 전략도 있고, 또 가치관과도 조화를 이룬다. 하지만, 이들 중 아는 바를 행동에 옮길 신체적 활력이 없는 사람이 적지 않다. 위대한 성공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신체적, 지적, 정신적 에너지와 분리될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마술 같은 힘이 우리 안에 있는데도 단지 깨우지 못했을 뿐입니다. 깨우긴 했는데도 행동에 옮기지 못했을 뿐입니다. 행동에 옮기려해도 몸이 안 따라 줄 뿐입니다. 몸의 활력, 마음의 에너지가 충만한 것이 무한능력을 키워가는 첫걸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란 꼭 위대하고 큰 것을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3:12)고 말했습니다.
끝맺는 말
더 많은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모든 형제에게 기쁨이 되십시오. 그러면 발에 기름에 잘길 정도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 사는 날 동안 능력이 쇠하지 않고 승승장구하리라 믿습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신 33:24-29 / 최종원 목사
◇ 목회기도
새로운 해를 은혜로 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금년에도 하나님 은혜로 더욱 충만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첫 주일 예배를 시작으로 일년 52주를 은혜로 함께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 말씀으로 무장하여 일면 365일을 행복한 사람으로 살 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은 모세가 비스가 산에 올라가서 가나안을 바라보고 난 후에 그 곳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내용의 일부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으로 인해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내게 한 연고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너무나 애석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나는 이제 이렇게 너희들 때문에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이 못된 자들아 원통하고 분하다. 그러니 이제 나는 모른다. 내가 죽고 나면 너희들 멋대로 해라' 이렇게 말하지 않고, 모세는 그들을 축복했습니다. 그 내용이 앞에서부터 계속되어 이제는 그 축복이 '여수룬'이라는 호칭으로 계속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여수룬이란 '계약'이라는 의미와 '의'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진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의로운 백성이 된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곧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여수룬을 향해 축복했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향해 마무리 축복을 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행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너는 행복 자로다."라는 선언에 뒤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얻었기에, 이전에 그 같은 구원을 얻은 백성이 없기에 너희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보는 행복의 조건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느냐'는 질문의 해답은 '하나님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역시 구원받은 자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을 '여수룬'이라고도 하고, '야곱의 샘'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제는 우리가 여수룬이요 야곱의 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행복해야 합니다.
본문은 '구원받은 자인 우리가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진정으로 내가 행복한 자임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선언대로, 우리는 행복해질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행복 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26).
26절은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수룬'은 '의로운 백성'이라는 뜻의 이스라엘을 부르는 애칭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수룬을 돕기 위해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는 분이시랍니다.
성경에서 '하늘을 타고 오신다'든지 또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표현은 보통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천지를 지으신 바로 하나님이 여수룬인 너를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너를 가로막을 수 있느냐'는 모세의 반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힘이 들 때는 하늘을 보십시오.
끝없는 하늘을 지으신 분이 나를 돕고 계십니다.
저 산을 지어 흔들리지 않게 하시는 분이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27절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도 우리를 이처럼 보호하시고 돌보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이 우리 아래에 있어서 우리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십니다. '하나님의 팔이 영원하시다'는 것은 '결코 그 힘이 다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 패배할 수 없습니다. 사망이 삼키지 못합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망했다는 것은 망하는 것으로 끝이 나야 망한 것입니다. 패배했다는 것은 패배하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해야 패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망한 데서 더 크게 일어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패한 데서 더 강한 힘으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죽은 우리로 다시 살게 하는 분입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백성인 것입니다.
어려운 자리에 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코앞에 죽음이 닥쳐도 평안을 잃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결국은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나를 돕기 위해 하늘을 타고 오셔서 영원하신 팔로 내 기초를 든든히 하시고 일으켜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행복 자가 아닐 수 있습니까? 현재를 보고 불행하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미래를 만드시는 분입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밝히기를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언제나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독불장군이 없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내조가 필요하고, 아내는 남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니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29절에서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라"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세는 행복자에 대해 축복하면서 '하나님이 돕는 방패가 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전능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기 때문에 언제든지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자는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움은 다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을 의지하기보다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합니다. 사람의 도움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심히 감정적으로 도움을 줍니다. 잘 도와주다가도 마음이 틀어지면 그냥 내팽개치고, 막 재를 뿌립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위골된 발 같고, 부러진 이 같고, 거미줄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자"고 합니다.
또 시인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신앙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늘 나의 우편에서 나의 그늘이 되시며 나를 지키시는 자시기에 나는 그분의 능력 안에서 안전하고, 평안하다고 고백하실 수 있습니까?
조심하실 것은 자기 형편을 가지고 하나님을 제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 분이 나를 지키시마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겼다면 비록 일시적으로 어려움이 생기는 것까지도 감수하며 행복의 조건으로 여길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나쁜 것으로 주기를 원치 않듯이 전능자 하나님이 그 자녀된 백성에게 악한 것으로 대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 가지고 살 때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도 "나는 행복자"라는 자세가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분명히 거머쥐고 사셔야 할 진리는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의 행복의 요건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도우시면 우리는 늘 행복합니다.
2. 영원한 하나님이 나의 처소가 되시기 때문입니다(27).
이 말씀을 쉽게 바꾸어 말씀을 드리면 천국을 소유한 자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내세에 대해서 늘 불안할 수 있습니다. 덴마크의 실존주의자 키엘케골은 '인생이란 불안한 열차를 타고 절망이란 터널을 지나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하는 실존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정의 앞에서 인간 어느 누가 행복론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천국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천국을 소유한 자가 행복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천막을 치고 살았던 것을 봅니다. 동서남북을 다 준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건만, 실제로 아브라함은 아내의 매장지가 없어서 겨우 돈 몇 푼을 주고 그 매장지를 구입할 정도였고, 거기에 온 가족이 묻힐 만큼 그에게는 소유가 없었습니다 왜 그가 그런 삶을 살았습니까? 그는 한 때 소돔 왕이 모든 전리품을 다 그에게 주겠다고 한 적이 있었으나 그는 그것마져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면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본향이란 천국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살았기 때문에 나온바 그 땅을 바라보지 않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행복에 겨워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살아간 아브라함을 평하면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을 떠나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가서 천국을 예비하고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으로 영접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렇게 천국이 예비된 사람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러므로 천국을 소유한 자는 세상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영원토록 누릴 처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소유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 백성을 위하여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사실 때 공평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나의 나됨 답게 행복하게 살도록 나를 책임지실 것입니다.
이것 깨달은 송명희씨의 시를 들어보십시오. "나 가진 제물 없으나 나 가진 지식 없으나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 갖게 하셨네" 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남들과 비교하면서 사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들과 비교하면 남들에게 주신 좋은 것만 모두 내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못된 욕심이 생깁니다. 그러다 보면 갑자기 자기가 미워지고 남편이 미워지고 아내가 미워지고 자식이 미워지고 이웃이 시기나며 미워지게 됩니다. 거기에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으면 거기에는 틀림없이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이 세상 존재의미를 가지면서 사십시오.
요14장 1이하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또 요14:27에서 는"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까?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평안은 두 가지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이 주는 평안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란 어떤 것입니까? 지극히 상대적이고 한계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주는 평안은 칭찬 받으면 기분이 좋으나 욕하면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작년의 기쁨이 금년에도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하면 세상이 주는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평안은 지극히 피상적이고 추상적입니다. 변덕스럽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세상의 평안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1일 행복은 이발소에서 누릴 수 있고, 1주 행복은 자동차를 사고 누릴 수 있으며, 1달 행복은 집을 장만하고 누리는 것이고, 1년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면 결혼을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이고 영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 행복을 믿음의 마음으로 받아 누리면서 사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축복의 이슬을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28-29).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 있었습니다. 가야할 길이 아직 남은 사람들이고 감당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은 사람들입니다. 그런가하면 그들은 적당한 거처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모세는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으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 장차 천국을 그들의 거처로 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은혜와 복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오늘 여기 모여 예배하는 우리들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들은 행복자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을 여시고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남은 생애 동안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백성으로써 하나님께서 방패 되어주시고, 영광의 칼이 되어주셔서 여러분들의 대적들이 여러분들에게 복종하고 그 대적들의 높은 곳을 밟으시면서 "하나님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고백을 드리면서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인간 최고의 상태'라고 정의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위대한 철학자가 말했다는 것뿐이지, 별스러운 말은 아닙니다. 자신의 최고의 상태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람들의 고민은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고민이요, 괴로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이슬을 먹고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이슬은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의 이슬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완벽하게 채워주십니다.
본문 28절과 29절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축복의 이슬들이 어떤 것들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28절은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에 필요한 기본적인 축복'들을 약속하시는 내용입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삶의 터전을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곡식과 새 포도주로 먹여주시고 늘 새 이슬로 입히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식·주를 세세히 신경 쓰시고 축복의 이슬로 촉촉이 적셔 주시는 것입니다.
29절은 그런 기본적인 은혜 위에다 '대적의 높은 곳을 얻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들어보십시오.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할렐루야!
싸움에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은 승리의 관건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연이어 계속되는 인생의 싸움에서 우리로 결국은 그 고지를 밟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행복을 믿어야 합니다. 이 약속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를 연단 하시기 위해 어려움을 주시기도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나를 축복하시기 위해 만들어 가시는 과정일 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인 자신의 행복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행복한 사람이로다
신 33:24-29 / 최종원 목사
오늘 성경은 모세가 죽기 전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그중 막내 아셀지파에 대한 축복의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모세는 인생의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입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귀한 일군으로 부름 받아 충성한 사람입니다. 이 시간 그는 죽기전, 비스가 산에 오르기 전 성령에 감동되어서 백성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말은 진심으로 꼭 주고 싶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 살기 원하는 기대도 이 축복 속에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셀 지파를 향해 "너는 행복자라" 고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광야 생활입니다. 이들 앞에 놓인 것은 요단강이며 가나안 땅입니다. 이들 앞에 놓인 것은 정복해야 할 엄청난 일들이었습니다. 이처럼 가진 것 없는데 모세는 이스라엘 지파에게 행복자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니 행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느껴야 하고, 누려야 하고, 자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내 행복이 어디 있는 줄 모르고 찾아야 한다면 문제가 있다고 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저는 그 사실을 얘기하려고 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합니까? 행복이 무엇인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외부의 조건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외부에서 찾다보니 자꾸 비교의식이 생깁니다. 그러면 행복할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면 행복의 조건을 물질에서 찾게됩니다. 물질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결코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행복을 찾아서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의 마지막 말입니다.
동시에 모세의 유언이며, 예언적인 것입니다.
그 한마디가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 자로다" 한 것입니다.
그는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아놓고 고별 설교하며 각 지파별로 축복을 하고 마지막에 모든 이스라엘에게 선언하는 말씀이 바로 "너는 행복자로다" 한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여 있으나 가장 행복한 사람임을 알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1. 마음대로 되지 안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성경은 특별히 우리에게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다섯 가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①자녀문제입니다.
"아셀은 다자(多子)한 복을 받으며.."(24)
자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낳는 것은 물론이고 기르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생각대로 자라주면 좋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녀는 우리가 기르는 것이 아니라 자라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에게 대한 기대가 있지만 그 기대가 무너지더라도 '하나님 그래도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자녀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고 생각합니다. 자식의 문제는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믿음의 자녀로 키우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들이 이만큼 자란 것은 내가 잘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②형제문제입니다.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24)
아버지 없이 크는 형제 지간은 형이 아버지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동생들은 형에 대해서 고맙다는 느낌을 잘 갖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형 밑에서 클때 얼마나 힘들었는가 만을 생각하고 형이 아버지 노릇하느라 그렇게 애를 써도 동생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형제사이라고 해도 동생이 알아주지 않아도 형제사이에 그만큼 지내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인줄로 믿습니다.
③사역의 문제입니다.
"그 발이 기름에 잠길 지로다"(24)
구약 이스라엘의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들은 기름을 머리에 부어 세우게 됩니다. 이 기름이 조금 많으면 발까지 흘려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일군 되는 의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일을 맡겨 주셨는데 이만큼 감당하게 된 것이 우리가 잘나서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인줄로 믿습니다.
④가정의 문제입니다.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25)
부부가 다 잘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에는 결혼한 2쌍 가운데 한 쌍이 이혼한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도 4쌍 가운데 1쌍이 이혼한다고 하는데 요즘에는 3쌍 가운데 1쌍이 이혼한다고 합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잘 먹는 이 세상에서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 부부가 이렇게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줄로 믿습니다.
⑤인생의 수한 문제입니다.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25)
생노병사, 마음대로 못합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내 마음대로 될 수 없습니다. 특히 성경은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라고 했습니다. 사는 햇수나 달수가 아니라 하루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인생의 말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주신 이 하루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대상으로서의 자녀, 아내, 일할 수 있는 일터 그리고 오늘 이 하루를 주신 인생의 수한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때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하루를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놀라운 기쁨과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26절에 "여수룬이여 하나님과 같은 자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수룬'이란 말은 계약이나 의로움, 하나님과의 약속에 의해 사는 사람,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란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행복은 하나님과의 약속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불쌍하지만 잊혀지는 것 보다 불쌍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젖먹이 어머니가 혹시 아이를 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꼭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행2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에 갑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도바울은 앞으로 어떤 위기가 닥칠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배의 지도자인 백부장에게 "우리가 항해를 계속하면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라고 얘기했습니다. 백부장은 이 얘기를 듣고 그냥 흘려 버릴 수 없어서 선장과 선주를 찾아서 얘기했습니다. 선장과 선주는 그들의 경험을 내세워 사도바울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랬더니 백부장은 사도바울의 말보다, 하나님의 사람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배를 항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유라글로' 라는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모든 짐을 다 버립니다. 그래도 살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말씀했습니다. "너희 생명은 안전하리라" 사도바울은 그대로 얘기했습니다. 사람들과 백부장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배는 다 부서졌지만 276명의 생명은 죽은 사람 없이 다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우리에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내가 한 말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말에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이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입니다. 내 것은 귀한 줄 모르고 남의 것만 귀한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 것 귀한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이것을 아는 사람이 이 세상을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불행은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행불행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불망과 원망의 마음으로 대하면 모든 것은 다 불행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나쁜 것이라도 감사와 기쁨의 마음으로 대하면 행복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살고 있던 집을 팔려고 했습니다. 이유는 그 집에 너무 오래 살아서 지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자신의 집을 내놓았습니다. 과거에는 집을 사려면 이리저리 다리품 팔아 가면서 직접 눈으로 봐야 하지만 요즘은 인터넷의 발달로 그 사람은 어느 집이 좋은지를 하나하나 체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한 집이 눈에 확 띄었습니다. 그 집의 소개 첫 글은"언덕 위에 있는 집"이었습니다.
"언덕 위의 아름다운 집입니다. 멀리 평야가 보이고 그 평야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고 있노라면 하루일과를 시작하는 힘이 나는것 같습니다. 또한 아름다운 정원이 있습니다. 작은 정원이지만 사시사철 갖가지 꽃들이 피어납니다. 이 정원을 거니노라면 마치 천국에 온 기분을 느낄 것입니다. 이 집의 방의 구조는 편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부는 사랑을, 자녀들을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참 좋은 집입니다. 이 집에는 이웃이 참 좋습니다. 법 없이도 살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좋은 일 뿐 아니라 나쁜 일도 서로 나누기 때문에 바로 이 동네는 가족과 같습니다."
이런 소개의 글을 읽은 이 사람은 마음속으로 '아 이 집을 사야겠다'는 결정으로 하고 그 집을 찾아가려고 주소를 확인하니 그 집은 바로 자신의 집이었습니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자신의 집을 팔려고 내놓은 아름다운 글귀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살펴보면서 자신의 집을 보았더니 자신의 집이 그렇게 좋은 집이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집을 팔았겠습니까? 그는 팔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것은 귀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팔려고 했던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의 사는 이 세상의 앞날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망망대해 속에 있고 노도광풍이 분다해도, 험산준령이 있다고 해도 이것을 알고 감당할 만한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다 이루어 가시는 능력의 말씀인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배당에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왔을지라도 그의 앞에는 천국이 예비 되어진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좋은 차를 타고 가는 사장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예수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면 그의 앞에 남은 것은 심판이요, 지옥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천사와 같은 아기라 할지라도 그 아이가 예수를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 아기의 앞날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지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뻐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꼭 우리에게 이루어 질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하늘에서 땅에서, 지옥의 공포에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너를 지키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 도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 처소가 되시나니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네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게 하신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이로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은 하나님의 약속하심 때문에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감사하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비로소 '나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런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러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라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29)
자그마한 냉장고를 하나 사도 애프터서비스를 잘 해줍니다. 하물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실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고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뿐 아니라 애프터서비스의 구원의 역사도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는 다 실족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져 주시고 온전케 하시는 은혜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금문교가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해엽에서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다리인데 이 다리를 건설할 때 여러 사람이 밑으로 떨어져 죽기도 하고 다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위해 다리 밑에 그물을 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그물을 치고 난 후에는 그 밑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한 건도 없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실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언제든지 뒤에서 구원의 손길로, 구원의 그물로 우리를 지키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를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하루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대답했습니다. "오늘은 십자가를 바라봐도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감격이 잘 나오지 않아." 이런 이유를 가지고 눈물을 흘리고 가슴 아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고, 감격하고 살아갑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시고 우리의 영광의 칼이십니다. 오늘도 구원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행복은 밖에서부터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이 기쁨을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에 드러내므로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가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구원받은 성도로서 가장 행복한 사람임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비록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산적한 세상에서도 하나님을 줌심으로 가장 행복한 성도로 살 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네 앞날에 능력이 있으리로다
신 33:24-29 / 박조준 목사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 모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이 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하신 말씀입니다. 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으며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네 문빗장 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오늘 아침 우리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 다. 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으며 라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많은 자녀를 두는 것을 큰 축복으로 생 각했습니다. 그래서 수십 명의 자녀를 둔 가정도 있었습니다. 시편 128편에 보아도 하나님이 축 복하는 사람에게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다 고 했는데, 이것 역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라고 했는데 이는 자손 대대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나만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 람에게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다 고 표현하 고 있는데 이것 역시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흔히 세 가지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은 해치지 않 으나 유익을 주는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덕을 끼치 는 사람입니다. 즉, 어떤 사람은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 고, 또 어떤 사람은 꼭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형제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요,꼭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형제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 이하에 보 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 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고 했습니다.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라고 했습니다. 기름은 풍성한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시편 23 편에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기름은 또한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 발이 기름에 잠겼다는 말은 성령으로 충만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했 습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능력 있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 주변에서부터 먼 데 이르 기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화평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라 고 했습니다. 철과 놋은 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철과 놋으 로 문빗장을 했다는 것은 안전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지켜 주시기 때문에 악한 가가 건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산성이시오, 요새시요, 반 석이시요, 피난처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 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 느니라. 그렇습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은 절대 안전합니다.
요한 1서 5장 18절에는 이런 말씀 이 있어요.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여러 분 이 말씀을 믿습니까?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와 같은 놀라운 약 속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능력으로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범죄했기 때문에 주님의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 요, 죄인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허물이 있기 때문에 성령이 교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기 때문에 선한 목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밤을 좋아하지 않지만, 연약한 가운데서 우리를 감싸주시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약속 은 좋아합니다. 우리는 추운 겨울을 좋아하지 않지만 반짝이는 흰 눈은 좋아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연약함까지도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연약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 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 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고후 12:9- 10)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우리는 모두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의 별을 보세요. 우리는 해가 빛나는 낮에는 별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변 이 어두워져야 별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환경이 환난과 고통이 없이 대낮과 같 이 밝기만 하면 자만하게 되고, 하나님의 이 놀라운 약속의 별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 요하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며,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놀라운 약속을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바로 감당하기 위해서도 우리 자신의 연약한 것 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사명을 바로 수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 인지 모릅니다. 나의 연약함을 절감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게 됩니다. 하나님, 저에게 능력을 주세요. 제 힘만 가지고는 도저히 이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 나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느끼고 하나님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는 간증 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무능함을 느끼게 되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맡겨진 일 을 감당했을 때 놀라움과 감격을 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내 자신의 연약함을 느낍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그렇고, 이 단에 서면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단에 설 때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아니하시면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증거할 수가 없습니다. 연약한 저를 온전한 기구로 사용해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게 해 주세요. 내 마음이 용광로처럼 뜨거워져야 할 때 얼음처럼 차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 입에서 말씀이 나가고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달될 때 뜨겁고 강렬한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 하고 말라죽어 가는 모습이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우리 모두가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해 나가는 동안에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 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내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렇습니다. 주님을 떠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 몸이 건강하고, 하는 일이 뜻대로 잘 될 때 사람은 강해 보 입니다. 무엇이나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몸에 중한 병이 들어 신음하게 되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처지에 이르고, 만사가 뜻하는 대로 되는 것이 없이 앞이 캄캄해질 때, 대개의 사람들은 탄식하며,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죽어 버리고 싶은 생각까지 하 게 됩니다. 사람이 이렇게 연약합니다. 우리는 종종 지금보다 더 큰 믿음을 가져 보겠다고 힘을 씁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 운가를 스스로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을 이전보다 더욱 사랑해야겠다 고 마음에 다짐할 때가 있 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의 다짐으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전진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실은 후퇴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가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새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우리 스스로의 연약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 가운 데는 강하고 확신에 찬 신앙으로써 아무도 그를 움직이거나 넘어뜨릴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믿음이 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핍박과, 환난의 시험과, 유혹의 태풍이 불고 나서 그가 그 만 변절하여 믿음을 떠났다는 소문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다 쓰러지고 만 사람들 틈에 쓰러져 있는 처량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다 약합니다. 병에 강한 장사 없고, 시험에 강한 사람 없습 니다. 우리 중에 나는 어떤 시험이나 유혹도 이길 수 있다 라고 자신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스 스로 섰다고 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 하신 성경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중에 나는 괜찮다 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아니하시면 시 험의 창에 찔리고,유혹의 올무에 다 걸려들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술을 약으로 조금씩 먹다가 이제는 그만 술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몸이 너무 아파서 진통제를 쓰다가 그만 아편 중독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이렇게 약합니다. 바울이 말씀한 대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육신으로는 죄 의 법을 따르면서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갈등을 느끼는 것이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귀가 우리를 아는 것만큼 우리를 모릅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속에는 마귀가 들어올 수 있는 틈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삼손을 보세요. 그렇게 초인간적인 힘을 가졌던 삼 손의 마음에도 허점이 있었습니다. 원수 나라 블레셋의 간첩 들릴라에게 그만 정복을 당했습니 다. 그래서 그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했던가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라고 해서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습니까? 두려운 일입니다. 하 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지 않으시고 우리 혼자 있게 하신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나약한 존 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시인해 야 합니다. 자신 만만한 자세는 시정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떤 모양으로 넘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어제 장애자 올림픽이 개회됐습니다. 육신의 장애를 딛고 일어서는 그 장한 모습을 눈물 없이 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체 장애자 가운데 75%가 후천성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오늘 정상인이라고 해서 내일 장애자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능력을 그만큼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 을 의지하는 만큼 우리는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입니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이 놀라운 약속은 보장된 약속입니다. 약속이란 지 켜지지 않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만큼 그 약속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할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때 능력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무슨 일을 당해도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 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행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이상 하나님의 약속은 지극히 완전하고 믿을 만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약속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에 하신 일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세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화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을 지으시고 영원하신 목적을 가지시며 섭리하시고 계십니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피곤하시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하 신 약속을 지킬 수가 없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약속을 했다가 능력이 부족해서 본의 아니게 약속을 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지 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도우실 수가 없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이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꼭 그대로 믿고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함이 없으십니다. 그러 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이 약속은 보장된 약속입니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여러분, 이것 보세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약속은 네 사는 주간 이나 네 사는 달 이 아니라 네 사는 날 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그날의 은혜는 그날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월요일에 받을 은혜는 월요일 아침 일 어나자마자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많이 받게도 아니하시고, 적게 받게도 아니하시는 것이 하나님 이 그날에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매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은혜를 받을 때 우리가 어떤 환난을 당한다 해도 능히 이겨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욥은 사람으로서는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겪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그 많은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10남매의 훌륭한 자녀들이 몰사 당했습니다. 그는 동방에서 재산 많고, 덕망 있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이 돈독해서 하나님이 사단에게 내놓고 자랑할 정도의 사람이었습니 다. 그런데 이처럼 갑자기 뜻밖의 재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욥이 뭐라고 외쳤습니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재난의 날은 놀라운 은혜가 임하는 날입니다. 그러고 보면 마귀는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시련의 날이 짧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의 심령에 많은 상처 를 줍니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생각할 때 그러한 날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날이 되기도 합니 다. 그러므로 재난의 날이 닥치더라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의 사는 날을 따라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이가 들면 우리 육신의 힘 은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단풍이 든 나뭇잎 같아서 조금만 건드려도 떨어집니다. 늙으면 젊은 때와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변하지 아니합니다. 나이 들면 창문에 비치는 것이 우 울하게 보입니다. 메뚜기도 짐이 됩니다. 세상을 떠날 때도 혼자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사람은 이 세상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이처럼 연약하고 부족한 나를 능력으로 함께 하여 승리하게 하셨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며 감격의 눈물을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연약한 우리를 향해서 우리의 사는 날을 따라 능력이 있겠다고 하셨는데, 오늘 우리 하나 하나에게 이 약속이 이루어져서 이 세상에서도 승리하며 살고, 저 세상에 갈 때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놀라운 약속
신 33:24-29 / 박조준 목사
오늘 말씀은 옛날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 모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하여 축복하신 말씀입니다. 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으며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라운 약속을 하신 것은 우리가 연약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 말씀이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범한 죄는 주님께서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허물은 성령께 서 교정시킬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방황하는 모습은 선한 목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유리 방황하는 우리를 찾으시어 다시 우리 안으로 인 도하여 들이십니다. 우리는 밤을 좋아하지 않지만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연약한 것을 좋아하 지 않지만 연약한 상태에서 우리를 감싸주시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약속은 좋아합니다. 우리는 겨울을 좋아하지 않지만 반짝이는 눈은 좋아합니다.따라서 우리는 연약함을 감사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에게 한없이 베풀어주실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가 있기 때 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첫째 진리는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여러분, 하늘의 별 을 보세요. 우리는 햇빛이 빛나는 낮에는 별을 볼 수가 없습니다. 별을 찾기 위해서는 깊은 곳 에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의 주변이 어두워야 별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대낮과 같이 고통과 환란을 알지 못하며 자만이 넘치는 사람은 하 나님의 이 놀라운 약속의 별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위대한 약속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러기에 이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가치를 알지도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이 놀라운 약속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바로 감당하게 위해서도 자신이 연약한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바로 수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 인지 모릅니다. 나의 연약함을 절감할 때 하나님을 향하여 도우심을 바라는 간구가 있어야 합니 다. 하나님 저에게 능력을 주세요. 주시는 능력이 없을 때는 이 일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 니다. 저 스스로는 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 하면 하나님은 자기 스스 로 연약함을 느끼고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을 도와주십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는 간증 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 자신이 연약함을 깨닫고 무능함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도 우심으로 맡겨진 일을 감당했을 때 놀라움과 감격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하루에도 내 자신의 연약함을 수십 번 느끼게 됩니다. 말 씀을 준비할 때도 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절실히 깨닫습니다. 성경 말씀이 내 자신의 연 약함을 내게 보여주고 그로 인해서 나 자신의 약점을 만들어 줍니다. 저는 이 단에 서기 직전까 지도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증거할 수가 없습니다. 이 연약한 사 람을 하나님의 능력의 장중에 붙드셔서 사용해 주세요. 하나님의 말씀만 증거하게 해주세요. 왜 요?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용광로와 같이 뜨거워야 할 때 차디찬 마음으로 식어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저는 이 강단에서도 나 자신의 연약함을 느낄 때가 너무 많습니다. 내 입에서 말씀이 나가고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달될 때 뜨겁고 강렬한 것이 되어야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말라 죽어가는 모습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아마 여러분께서도 맡은 일을 감당해 나아가는 동안에 이와 같은 생각을 하실 때가 많으실 것 입니다. 주님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우리는 이렇게 연약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자신의 연약함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건강할 때, 모든 일이 뜻대로 잘될 때 사람은 강해 보입니다. 무엇이나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중한 병에 걸려 신음하게 되고 만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앞이 캄캄할 때 대개의 사람들은 탄식하며 낙심하고 절망하며 심지어는 죽고 싶은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사 람은 이렇게 연약합니다. 우리는 종종 지금보다 더 좋은 신앙을 가져보겠다고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 마나 어려운가를 스스로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해야겠다 고 마음에 다짐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전진한다고 생각할 때 실은 후퇴하고 있는 자신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 자신이 얼마나 나약함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우리 스스로의 연약함을 더욱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는 강하고 확신에 찬 신앙으로써 아무도 그를 움직이거나 넘어뜨릴 수 없다고 생각할 정 도로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핍박과 유혹의 태풍이 불고 나서 그만 그가 변절하 여 믿음을 떠났다 하는 소문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과 땅 위에 쓰러져 있는 처량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란 누구나 유혹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가운데 나는 어떤 시험이 나 유혹도 이길 수 있다 고 자신하시는 분계십니까? 그것이 꼭 바른 생각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스스로 섰다고 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 경고하였습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나는 절대로 시험에 들지 않고 나는 절대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고 장담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아니하면 시험의 창에 찔리고 유혹의 올무에 다 걸릴 사 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분은 약으로 술을 조금씩 하다가 술 없이 살 수 없는 상태에 빠진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몸이 하도 아파서 진통제를 쓰다가 그만 아편 중독자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육 신이란 이렇게 약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육신으로는 죄 악의 법을 따르면서 괴로워하고 고민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사람을 아는 것만큼 사람은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 속에는 악마가 들어올 수 있는 샛길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삼손을 보세요. 그렇게 강했던 하나님의 사람 삼손의 마음에도 허점이 있었습니다. 그 허점이 드러나기 전에는 얼마나 강했는지 모릅니다. 삼손 하면 블레셋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무서워하였습니다. 한참 삼손의 능력이 발휘될 때는 썩은 당나귀 뼈 하나로 블레셋 군인 일 천 명을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삼손 앞에서는 블레셋 군인들은 전혀 상대가 되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강했고 담대했고 용감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삼손을 대적할 사람이 세상에는 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손이 블레셋 여자 간첩 들릴라 앞에서 그만 그의 마음이 변해 버렸습니다. 그의 말로가 얼마 나 비참했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라고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습니까?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지 않으시고 우리 홀로 있게 하신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나약한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연약한 피조물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 리는 이 사실을 시인해야 합니다. 자신만만한 자세는 시정되어야 합니다. 언제 어떤 모양으로 넘어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위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가 연약하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능력을 그만큼 의지하게 됩니 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만큼 우리는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둘째 진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입니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이 놀라운 약속은 보장된 약속입니다. 약속이란 성취에 대 한 보장이 없을 때 전혀 무익한 것이 되고 맙니다. 성취될 가능성이 없는 약속이란 아무런 의미 가 없습니다. 약속은 하였지만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것은 사람을 속이는 결과밖에는 안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매사가 신실하고 약속의 성취가 보장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신 만큼 자신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약 속하신 것을 언제나 이루시기 위해 준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완전히 의지하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동안 우리는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 이 하나님이 우 리에게 능력을 베푸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행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이상 하나님의 약속은 지극히 완전하고 믿을만 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약속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에 하신 일을 생 각해 보세요. 그리고 지금 하시는 일을 보세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전혀 변화가 없으십 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을 지으시고 영원하신 목적을 가지시고 섭리하시고 계십니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피곤하시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해서 그의 하신 약속을 지킬 수가 없으십니까? 그렇지 않습 니다. 사람은 약속을 했다가도 내 능력이 부족해서 본의 아니게 약속을 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을 지으시고 달과 별과 해를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 나님이 자기 백성을 도우실 수가 없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능력을 가 지신 분이시고 언제나 그의 백성을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을 능력이 부족하거나 의지가 약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 있게 하신다고 약속하시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이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그의 자녀인 우리를 버리시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순간이라도 시험에 빠지지 아니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주관하십니 다. 하나님이 구원치 않으시는 것은 그의 팔이 짧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 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자기 백성을 위하여 모든 것을 능히 행하실 수가 있으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약속을 꼭 그대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함이 없으십니다. 원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요한복음 10장 28 - 2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 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 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보장된 약속입니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여러분, 이것 보세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약속은 네 사는 주간 이나 네 사는 달 이 아니라 네 사는 날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 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월요일에 받은 은혜를 주일에 받을 수 없고 목요일에 받은 은혜를 금요 일에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월요일에 받은 은혜는 월요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받게 되는 것 입니다. 은혜는 그 날에 받게 됩니다. 많이 받게도 아니하시고 적게 받게도 아니하시는 것이 하 나님이 그 날에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매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은혜를 받을 때 우리가 어떤 환난을 당한다 해도 능히 이겨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에 욥이 갑자기 정말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사자가 욥에게 와서 말하기를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 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습니다. 이 보고가 끝나자마자 다른 사람이 와서 말합니다. 하나님 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습니다. 조금 있노라니 또 다른 사람이 와서 거친 들에서 태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므로 그 소년 들 위에 무너져 주인댁 아드님들이 그만 몰사하였습니다. 청천 벽력같은 보고들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욥이 무엇이라고 외쳤습니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욥이 한 말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여러분, 재난의 날은 놀라운 은혜가 임하는 날입니다. 그러고 보면 결국 마 귀는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시련은 그 날이 짧다 해도 우리의 심령에 많은 상처를 줍니다. 그 러나 다른 편에서 생각할 때 그러한 날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날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를 감 싸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한량없으심을 보여주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재난의 날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하 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면 어떤 어려움도 다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방패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므로 염려할 것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아니 합니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언제나 변함없이 대하여 주십 니다. 끝으로 이 놀라운 약속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의심을 버리고 근심과 걱정을 버려야 합니 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가는 앞길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맙시다. 여러분이 사는 날을 따라 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분을 생각해 보세요. 나이가 들면서 여러분의 능력 은 쇠진해지기 시작합니다. 노인이 되면 젊을 때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변하지 아니합니다. 그 은혜를 잘못 사용하는 것은 사탄의 간교에 빠진 것을 말해줍니다.
나이가 늙어 지면 창문에 비치는 모든 것이 우울하게만 보입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고 메 뚜기도 여러분에게 짐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능력도 젊어서와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세 상을 떠날 때도 홀로 떠나셔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부활의 날에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있는 사람은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 대해서 두려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한 나를 능력으로 함께 하여 승리하게 했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며 감격의 눈물을 금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지키시 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무서운 재난이 임하 게 됩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를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 라 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재난이 닥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당하는 슬픔이 크고 환난과 곤고가 많았다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 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오, 하나님께서 우리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의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겠다고 하셨는데 오늘 우리 하나 하나에게 이 약속이 이루어져서 이 세상에서도 승리하며 살고 저 세상 에 갈 때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 행복합니까?
신 33:24-29 / 박조준 목사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세상을 떠나기 전 그 의 백성을 위해서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부르심에 의해서 그의 백성, 이스 라엘 민족을 위해서 나서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베푸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 서 인도하여낸 후 광야 생활 40년을 하는 동안 자기 민족에 대한 모세의 관심은 그칠 날이 없었 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에게 얼마나 큰 부담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민족이 노예 생활에서 풀려나고 약속의 땅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지만 어려움 이 부딪칠 때마다 하나님을 의심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 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놀라운 인내와 온유의 자세로 그들을 대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노하게 해서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있을 때 모세는 생명을 내걸고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만일 모세의 이와 같은 노력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은 벌써 멸망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모세는 그가 누릴 수 있는 지극히 영광스러운 바로 왕 공주의 양자 지 위를 포기하고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고난의 길에 나선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그 의 민족을 사랑했기 때문에 은혜를 잊어버리고 배은망덕한 길을 걷는 이스라엘 민족을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듯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목이 곧고 완악한 그의 백성을 계속 가르치며 인도하고 지도하였습니다. 모 세의 마음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 다. 이러한 모세가 세상을 떠날 날이 임박한 것을 느끼게 될 때 자기 백성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컸으리라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세에게 오직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그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모세는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렸을는지도 모 르겠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거동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 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랑하는 이 백성이 하나님이 약속 한 땅에 들어가게만 된다면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모세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습 니다. 그러면서 그의 백성을 향하여 하나 하나 축복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모세는 위대한 입법자입니다. 이와 같은 모세가 이런 입장을 표명했다 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입니다. 모세는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며 감격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 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자로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 앞에서 이 말씀 외에 무슨 말씀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마 모세의 눈에는 자기의 대를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도하게 될 새로운 얼굴이 떠올랐 으리라 생각됩니다. 여호수아의 지휘 밑에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가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야 만 했었습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아말렉과 바산족과 싸워 이긴 경험도 가지고 있지 만 대개의 경우는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생활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이제는 군인이 되어야 만 했습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에 이르게 될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면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 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라. 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그의 백성이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이와 같은 위안의 말씀을 미 리 했습니다. 오늘 영적인 면에서 이스라엘인인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축복이 되시기 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지고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자로다. 누가 행복합니까? 1.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행복합니까? 이스라엘은 은총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모세 자 신도 이들을 생각할 때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모세는 이 백성이 비길 데 없이 은총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했습니다. 그 당시 애굽 사람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강대국의 사람들로서 교양을 갖추고 있었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살았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노예 생활이 몸에 배어 있는 이스라엘 백 성은 초라해 보이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배운 것도 없었고, 가진 것도 없었고, 교양미도 없 었고 그러니까 세련되지도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육신의 눈으로 겉모양만 본 것이 아니 라 다른 측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특별히 택해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선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 믿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는 선택된 백성입니다. 우리가 거듭 나서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뽑힌 자, 선택된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돈으로 이 행복을 살 수 있습니까? 물건은 돈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행 복은 권력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영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 세 상적인 것보다 얼마나 귀한지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행복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시고 우리 찬양의 분깃과 영광의 대상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마 음 속에 깃든 행복은 이 세상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죄사함 받은 사실을 알고, 구원 받은 사실을 알고, 영생 얻은 사실을 알 때 이 세 상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놀라운 행복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이 세상의 기쁨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원하는 기쁨은 세상적인 데 있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진실하며 그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참 기쁨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리스 도 안에서 누리는 이 기쁨은 참 기쁨입니다. 심령의 기쁨입니다. 참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형편없어 보일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 혹시 낙심하신 분이 계십니까? 불안해 하시는 분이 계십 니까?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속죄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 니다. 주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그 능력의 오른 팔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을 믿으시 기 바랍니다. 2. 우리가 행복하려면 주님이 주신 특권을 알아야 합니다.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백성 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 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고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구원은 미래의 일 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에게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과 팔로 그들을 건져 내신 것입니다. 우리도 사실 무서운 죄의 권세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를 사탄이 지배할 수도 없고 묶어 놓을 수 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좇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악의 속박에서 구원을 받았고 우리를 지배하던 정욕의 용광로에서 건져 냄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떠나기 전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하나님의 사자의 손에서 건짐을 받았습 니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라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했더니 이스라엘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 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사람보다 의로워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 자가 문설주에 바른 양의 피를 보고 넘어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의로워서가 결코 아 닙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바로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추적하고 이스라엘은 기적적으로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습니다. 그 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구원하고 바로의 군대는 홍해에 수장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힘 입어서 하나님의 속죄함을 받은 사람들은 홍해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다시 그들의 원수인 애굽 사람을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이스라엘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유혹의 강에서 이처럼 건져 주십니다.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주변의 죄악과 무서운 마귀의 추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십니 다.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갔을 때 물이 없어 목이 말라 죽을 뻔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 님께서는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셔서 그들의 기갈을 면케 하시고 굶주림으로 고생할 때도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리시어 그들을 먹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원수 아말렉에게 공격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이 되어서 아말렉을 물 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는 여호수아가 나가 싸울 때 뒤에서 기도 했습니다. 그의 팔이 이스라엘이 완전히 승리를 거두기까지 내려오지 아니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 다.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영적인 축복을 받은 사람 들입니다. 하늘의 떡 만나로 양식을 삼고 영원한 반석에서 흘러 나오는 생수를 마셨습니다. 따 라서 우리의 원수들이 사방에 우겨 싸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의 손 안에 있는, 그의 백성된 우리를 절대로 해칠 수가 없습니다. 사자가 길가에 웅크리고 있 는 게 사실이요 으르렁대는 소리를 듣고 무서운 광경을 볼 수 있지만 그 사자는 쇠고랑에 묶여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백성 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의미가 있습니 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자유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면 그것은 값없이 주신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늘 드려도 아쉬움만 납습니다. 여 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 아들의 피로 값을 지불하고 사셨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에 많은 사람 중에서도 우리를 특별히 인도하시는 것 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방패시요 영광의 칼이 되십니다.하나님의 백성은 전투하는 백성이지 만 행복한 백성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 므로 우리를 해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경우에 우리를 지켜 주시고 도와 주십 니다. 우리가 때로는 몸에 병이 들어 눕게 되지만 오히려 그 때 우리는 영혼의 건강을 누리게 됩니 다. 사업이 실패로 많은 물질의 손해를 보지만 다른 차원으로 볼 때 그로 인해 우리는 부하게 됩니다. 때로는 원치 않는 비난을 당하지만 우리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호로 인해 우리의 품성은 더욱 밝아집니다. 어떤 때는 유혹의 곤경에 빠지지만 그러나 악이 우리의 영혼에 침투하지 못합 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하나님은 너의 영광의 칼이 로다. 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 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면서 성령의 짐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무기는 없습니다.
이 칼을 차고 다니는 곳마다 승리가 보장됩니다. 그러 므로 우리는 행복합니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한다 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승리의 확신을 의미합니다. 또 사 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7절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 넉히 이기느니라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아 대적 마귀가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이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왜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몰라서 그럽니 다. 세상적인 것에 행복이 있는 줄로 생각해서 그럽니다. 행복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여러분 마음 속에 영접해 보세요. 그 때 하나님의 사랑 을 확신할 수가 있고 천국의 행복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의 마음은 행 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하나 님은 우리를 위해 너무 많은 일을 하셨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 고 기쁨은 또 다른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기쁠 때 다른 축복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 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동안 인자와 긍휼 을 베풀어주십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새로운 어려움이 우 리에게 닥칠 때 능히 이것을 이길 수 있고 그러한 생활 속에서도 또 다른 확신을 가질 수가 있 습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으로 주신 하나님은 앞으로도 우리를 그와 같이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모든 원수를 대적하고 하나님 우편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때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4. 우리가 행복해야 다른 사람이 구원받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여러분, 우리가 믿는 것이 거 짓이라면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사기꾼일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행복하지 못하면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권한다면 그것은 비극일 것입니 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에서 참된 행복을 찾았습니다. 우리의 행복 여부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기도 하지만 우리의 신앙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공중의 새와 같이 행복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이 항상 감사와 찬송의 생활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복에 대한 선택권을 쥐고 있고,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행복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 모두가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주 안에서 누리는 행복을 맛보지 못하신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위하여 예비하신 안식처로 나오 세요.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평화가 강같이 흐르고 기쁨이 샘처럼 솟아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세상의 다른 사람은 알지도 못하고 따라 올 수도 없는 참 행복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것이 좋고 훌륭하다고 해도 우리의 영혼에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 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어찌하여 너희가 양식 아닌 것 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 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누가 행복합니까? 공부 많이 한 사람입니까?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입니까? 인기 있는 사람입 니까? 돈 많은 사람입니까? 주님을 마음 속에 영접하고 주님이 마련하신 포도주와 젖을 마셔서 영혼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주시는 참 행복을 소유하 고 기쁘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영원하신 팔
신 33:24-29 / 박조준 목사
오늘은 우리 영락교회가 창립된지 33주년을 맞는 뜻깊은 주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으 로 우리 교회가 세계적인 교회로 성장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 가 교회 창립 35주년을 바라보며 시작한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예배당을 증축하여 새 예배당에 서 예배드리게 된 것도 거의 1년이 되어 옵니다. 금년은 초대교회 같이 생동하는 교회 되기 위 하여 기도하며 힘쓴 가운데 많은 축복을 받게 된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33년의 우리 한국 역사는 문자 그대로 파란 곡절이 많았습니다. 아울러 우 리 교회도 어려움을 함께 겪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크게 축복해 주셨습 니다.
또 앞으로도 계속하여 주실 것을 말씀을 의지하여 믿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이스라 엘의 위대한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가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 각 지파에게 축복한 말씀 중에 특별히 아셀 지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축복의 절정입니다.얼마나 얼마나 복된 말씀 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은 읽으면서 이것이야말로 꼭 우리 영락교회를 향해 주신 축복 의 말씀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 비하신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세요. 구절 구절이 축복입니다.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으며 많은 하나님 의 자녀를 가지게 되는 축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가 창립 35주년까지 3만 성도를 목표로 힘썼는데 감사한 것은 2년 앞당겨 금년에 우리 목표를 초과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 사한 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교회란 자기 혼자 구원받고 만족해 할 때 실상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는 다른 이를 위해서 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향해 주신 말씀 가운데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교회 자체 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에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에 하시고 우리로 말 미암아 각 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고 하면서 우리는 구 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 고 하였습니다. 향기 는 다른 사람에게 기쁨이 됩니다. 우리 교회가 과거 33년 동안 성장해 오는 가운데 다른 교회 다른 교파와 언제나 연합해서 하는 사업에 동참했고 앞장서 온 것을 자부합니다. 참 축복을 받 은 교회는 믿음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고 나아가서는 썩은 냄새나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어야겠습니다. 그 발이 기름에 잠길찌로다 성경에서 기름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교회의 생명은 성령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아니하는 교회는 그것이 인간들의 모임은 될 수 있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사랑과 기쁨 그리고 평화가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 모임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나 타납니다. 지난 10월에 가졌던 큰 비전을 위한 세계 선교 대회는 성령의 크신 역사로 한국교회 에 새 활력을 갖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 기관 단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뜨거운 열심,감격과 감사 속에서 봉사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성령의 충만한 역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생동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 다음 25절에, 네 문 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하였습니다.
교회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서 누구나 다 들어와 구원의 축복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문턱이 너무 높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문을 단단히 잠글 수 밖에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마귀가 들 어오는 것을 못들어 오게 잠궈야 합니다.죄인은 들어올 수 있으나 죄가 용납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도 죄인을 사랑하시나 죄는 미워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철과 놋으로 문 빗장을 해서 마귀 의 역사가 교회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굳게 지켜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경고한 것처럼 근신하 고 깨어있지 아니하면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마귀가 침입하기 쉽습니 다. 그들은 택한 자라도 미혹하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악은 모 양이라도 버리려고 애쓸 때 하나님의 약속은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하였습니 다. 주의 몸인 교회가 죄와 타협할 때 교회는 교회로써의 능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삼손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종으로써 하나님이 함께 할 때 능력을 얻어서 원수 나라 블레셋 사람들이 감히 덤벼들지도 못했으나 그가 원수 나라 블레셋 여자 드릴라에게 문을 열어 주고 그 와 짝하게 될 때 하나님은 그에게서 떠나 버리셨고 하나님 떠나버린 삼손은 아무런 능력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맛 잃은 소금은 거름에도 못 씁니다. 길가에 내버려서 행인들에 게 짓밟힐 것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철과 놋 빗장 으로 지켜주셔서 지난 33년 동안 한국 교회가 여러 모양으로 마귀의 역사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우리 교회만은 흔들리지 아니하고 계속 부흥 성장하여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 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27절). 하나님은 사방으로 우리 를 지키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그가 너를 도우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 도다 위에서 도우신다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우리 주변에도 계신 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 앞에 계십니다. 그가 내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 며 멸하라 하시도다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 아래에도 계십니다.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영락교회를 사랑하시고 우리 믿음의 식구들을 축복하셔서 이렇게 위 에서, 주변에서, 위에서, 아래서 지켜주시고 함께 하여 주셔서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한 마 디로 말해서 그 영원하신 팔이 우리를 안아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리고 여러분은 그 영원 하신 팔에 안겨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여러분 그 영원하신 팔이 우리 아래에 있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게 된다고 하여도 두려 워하지 아니합니다. 그 영원하신 팔이 우리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 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 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흉하고 뛰놀던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 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왜입니까? 그 영원하신 팔이 우리 아래 있기 때문입니 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편 37편 24절에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을 붙드심이로다 무 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 악한 세상 사는 동안 때로는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합니다. 다시 일어납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그 영원하신 능력의 팔이 우리를 붙들어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 나님의 자녀들도 사방으로 에워쌈을 당해서 빠져나갈 길을 찾기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 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하지 아니합니다. 그 영원하신 팔이 우리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세 상이 하도 악하고 마귀의 세력이 하도 강해서 우리가 거꾸러질 때도 있습니다. 넉다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망하지는 않습니다. 넉 아웃 되지는 않습니다. 다시 일어납니다.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번 일어납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이 우리 아래 있어 새 힘을 주 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영원하신 팔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위안이 됩니다. 왜 성경은 그 영원하신 팔이 우리 아래 있다고 하였을까요? 모든 것은 건전한 기초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래가 튼튼해야 합니다. 터전이 되는 아래가 튼튼치 못할 때 그 위에 있는 건물이 아무리 아름답고 크고 높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제대로 오래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기초를 둔 사람,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은 비가 나리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부딪칠 때 그 화려하던 집은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팔 위에 세운 집은 절대로 무너지는 법이 없습니다. 왜요 그 팔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도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의 소망도 영원한 소망입니다. 우 리의 기쁨도 영원한 기쁨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그 영원하신 팔에 터전을 세우지 아니할 때 어 떻게 된지 아십니까?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 위에 서지 아니 할 때 가시덤불의 불과 같이 꺼짐을 당하였고 오직 연기만 남아 있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심은 것마다 네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영원하신 팔 하나님에게 기초를 세우지 아니한 모든 것들은 주님께서 오실 그 날에 서 있지 못하게 됩니 다. 그 영원하신 팔이 우리 아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승리와 존귀에 대한 약속을 보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이시려고 작정하신 사람은 사람이 아무리 천하게 그 사람을 취급하여도 반드시 높 은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는 영원하신 팔이 그 사람을 보호하기 때문에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 의 팔이 그 사람을 석권할 때 높은 산과 같이 존귀한 위치에 서게 되고 높임을 받게 되는 것입 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높이어지면 질수록 더욱 더 고상한 생각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 닮아 가는 일에 한 걸음씩 더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영원하신 하나님의 팔이 주관하시는 동안 우리가 실족 당하는 것이 아니라 향상되어진다 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전에 청년 요셉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가 얼마나 악조건 가운데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팔에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그 영원하신 팔이 그의 아래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래는 그를 들어 높이 세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터전이 되는 그 팔은 영원하신 팔입니다. 그러면 그 영원하신 팔은 무엇을 의 미합니까? 그 팔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게 될 팔을 의미합니다. 항상 강하 고 끝없이 세상에서 선한 일할 때 피곤치 않게 하는 팔을 의미합니다. 이 팔은 한 번 펼쳐질 때 결코 허무하게 돌아오지 않는 팔이고 실패하지 않는 팔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영원하신 팔이 우리를 지키십니다. 과거 33년 동안 지키시고 도우시고 키워주신 하나님의 팔은 지금도 함께 하시며 축복하고 계십니다. 아니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하여 이 교회를 그 영원하신 팔로 돌보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 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시 당국이나 정부에서는 계획을 변경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그 팔은 사랑의 팔입니다. 성경에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한다 고 하였습니다.이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은 대상입니다. 변함이 없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뿐만 아니라 영원하신 그 팔은 능력 의 팔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는 데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팔은 능력의 팔 이기 때문에 그 팔에 안긴 사람을 누가 감히 해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안전합니다.이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 영원하신 팔이 우리 아래 터전이 되었다면 우리는 그 팔을 전적 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친구는 의지할 수 있을 때 친구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가 온전히 의지할 수 있을 때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하나님도 온전히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이것 이 곧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이 하나님에게 부담이 되지 아니합니다. 여러분, 작은 문제건 큰 문제건 하나님께 다 아뢰세요.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 살아가기가 고되십니까? 힘이 드십니까? 피곤하십니까? 여러분 앞에 영원하 신 그 팔이 있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그 팔에 안기십시오.
그 팔에 안길 때 확신을 가지십시오. 아버지나 어머니 팔에 안긴 어린애가 두려운 마음을 가집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을 부모의 팔 에 맡깁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 속에서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 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의 영원하신 팔로 우리를 감싸주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영원하신 그 팔이 우리 아래 있습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합시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오늘 우리 영락교회에 속한 믿음의 식구 하나 하나에게 이 축복의 말씀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영락의 성도들아,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너는 행복한 자로다.
네 앞날에 능력이 있으리로다
신 33:24-29 / 박조준 목사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 모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이 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하신 말씀입니다. 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으며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네 문빗장 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오늘 아침 우리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 다. 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으며 라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많은 자녀를 두는 것을 큰 축복으로 생 각했습니다. 그래서 수십 명의 자녀를 둔 가정도 있었습니다. 시편 128편에 보아도 하나님이 축 복하는 사람에게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다 고 했는데, 이것 역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라고 했는데 이는 자손 대대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나만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 람에게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다 고 표현하 고 있는데 이것 역시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흔히 세 가지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은 해치지 않 으나 유익을 주는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덕을 끼치 는 사람입니다. 즉, 어떤 사람은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 고, 또 어떤 사람은 꼭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형제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요,꼭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형제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 이하에 보 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 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고 했습니다.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라고 했습니다. 기름은 풍성한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시편 23 편에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기름은 또한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 발이 기름에 잠겼다는 말은 성령으로 충만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했 습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능력 있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 주변에서부터 먼 데 이르 기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화평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라 고 했습니다. 철과 놋은 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철과 놋으 로 문빗장을 했다는 것은 안전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지켜 주시기 때문에 악한 가가 건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산성이시오, 요새시요, 반 석이시요, 피난처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 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 느니라. 그렇습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은 절대 안전합니다.
요한 1서 5장 18절에는 이런 말씀 이 있어요.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여러 분 이 말씀을 믿습니까?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와 같은 놀라운 약 속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능력으로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범죄했기 때문에 주님의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 요, 죄인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허물이 있기 때문에 성령이 교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기 때문에 선한 목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밤을 좋아하지 않지만, 연약한 가운데서 우리를 감싸주시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약속 은 좋아합니다. 우리는 추운 겨울을 좋아하지 않지만 반짝이는 흰 눈은 좋아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연약함까지도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연약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 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 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고후 12:9- 10)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우리는 모두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의 별을 보세요. 우리는 해가 빛나는 낮에는 별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변 이 어두워져야 별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환경이 환난과 고통이 없이 대낮과 같 이 밝기만 하면 자만하게 되고, 하나님의 이 놀라운 약속의 별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 요하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며,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놀라운 약속을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바로 감당하기 위해서도 우리 자신의 연약한 것 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사명을 바로 수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 인지 모릅니다. 나의 연약함을 절감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게 됩니다. 하나님, 저에게 능력을 주세요. 제 힘만 가지고는 도저히 이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 나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느끼고 하나님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는 간증 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무능함을 느끼게 되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맡겨진 일 을 감당했을 때 놀라움과 감격을 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내 자신의 연약함을 느낍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그렇고, 이 단에 서면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단에 설 때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아니하시면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증거할 수가 없습니다. 연약한 저를 온전한 기구로 사용해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게 해 주세요. 내 마음이 용광로처럼 뜨거워져야 할 때 얼음처럼 차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 입에서 말씀이 나가고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달될 때 뜨겁고 강렬한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 하고 말라죽어 가는 모습이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우리 모두가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해 나가는 동안에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 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내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렇습니다. 주님을 떠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 몸이 건강하고, 하는 일이 뜻대로 잘 될 때 사람은 강해 보 입니다. 무엇이나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몸에 중한 병이 들어 신음하게 되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처지에 이르고, 만사가 뜻하는 대로 되는 것이 없이 앞이 캄캄해질 때, 대개의 사람들은 탄식하며,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죽어 버리고 싶은 생각까지 하 게 됩니다. 사람이 이렇게 연약합니다. 우리는 종종 지금보다 더 큰 믿음을 가져 보겠다고 힘을 씁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 운가를 스스로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을 이전보다 더욱 사랑해야겠다 고 마음에 다짐할 때가 있 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의 다짐으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전진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실은 후퇴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가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새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우리 스스로의 연약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 가운 데는 강하고 확신에 찬 신앙으로써 아무도 그를 움직이거나 넘어뜨릴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믿음이 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핍박과, 환난의 시험과, 유혹의 태풍이 불고 나서 그가 그 만 변절하여 믿음을 떠났다는 소문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다 쓰러지고 만 사람들 틈에 쓰러져 있는 처량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다 약합니다. 병에 강한 장사 없고, 시험에 강한 사람 없습 니다. 우리 중에 나는 어떤 시험이나 유혹도 이길 수 있다 라고 자신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스 스로 섰다고 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 하신 성경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중에 나는 괜찮다 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아니하시면 시 험의 창에 찔리고,유혹의 올무에 다 걸려들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술을 약으로 조금씩 먹다가 이제는 그만 술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몸이 너무 아파서 진통제를 쓰다가 그만 아편 중독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이렇게 약합니다. 바울이 말씀한 대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육신으로는 죄 의 법을 따르면서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갈등을 느끼는 것이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귀가 우리를 아는 것만큼 우리를 모릅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속에는 마귀가 들어올 수 있는 틈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삼손을 보세요. 그렇게 초인간적인 힘을 가졌던 삼 손의 마음에도 허점이 있었습니다. 원수 나라 블레셋의 간첩 들릴라에게 그만 정복을 당했습니 다. 그래서 그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했던가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라고 해서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습니까? 두려운 일입니다. 하 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지 않으시고 우리 혼자 있게 하신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나약한 존 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시인해 야 합니다. 자신 만만한 자세는 시정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떤 모양으로 넘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어제 장애자 올림픽이 개회됐습니다. 육신의 장애를 딛고 일어서는 그 장한 모습을 눈물 없이 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체 장애자 가운데 75%가 후천성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오늘 정상인이라고 해서 내일 장애자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능력을 그만큼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 을 의지하는 만큼 우리는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입니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이 놀라운 약속은 보장된 약속입니다. 약속이란 지 켜지지 않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만큼 그 약속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할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때 능력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무슨 일을 당해도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 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행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이상 하나님의 약속은 지극히 완전하고 믿을 만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약속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에 하신 일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세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화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을 지으시고 영원하신 목적을 가지시며 섭리하시고 계십니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피곤하시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하 신 약속을 지킬 수가 없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약속을 했다가 능력이 부족해서 본의 아니게 약속을 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지 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도우실 수가 없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이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꼭 그대로 믿고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함이 없으십니다. 그러 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이 약속은 보장된 약속입니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여러분, 이것 보세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약속은 네 사는 주간 이나 네 사는 달 이 아니라 네 사는 날 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그날의 은혜는 그날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월요일에 받을 은혜는 월요일 아침 일 어나자마자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많이 받게도 아니하시고, 적게 받게도 아니하시는 것이 하나님 이 그날에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매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은혜를 받을 때 우리가 어떤 환난을 당한다 해도 능히 이겨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욥은 사람으로서는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겪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그 많은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10남매의 훌륭한 자녀들이 몰사 당했습니다. 그는 동방에서 재산 많고, 덕망 있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이 돈독해서 하나님이 사단에게 내놓고 자랑할 정도의 사람이었습니 다. 그런데 이처럼 갑자기 뜻밖의 재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욥이 뭐라고 외쳤습니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재난의 날은 놀라운 은혜가 임하는 날입니다. 그러고 보면 마귀는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시련의 날이 짧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의 심령에 많은 상처 를 줍니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생각할 때 그러한 날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날이 되기도 합니 다. 그러므로 재난의 날이 닥치더라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의 사는 날을 따라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이가 들면 우리 육신의 힘 은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단풍이 든 나뭇잎 같아서 조금만 건드려도 떨어집니다. 늙으면 젊은 때와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변하지 아니합니다. 나이 들면 창문에 비치는 것이 우 울하게 보입니다. 메뚜기도 짐이 됩니다. 세상을 떠날 때도 혼자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사람은 이 세상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이처럼 연약하고 부족한 나를 능력으로 함께 하여 승리하게 하셨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며 감격의 눈물을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연약한 우리를 향해서 우리의 사는 날을 따라 능력이 있겠다고 하셨는데, 오늘 우리 하나 하나에게 이 약속이 이루어져서 이 세상에서도 승리하며 살고, 저 세상에 갈 때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수룬의 가르침을 지켜 행합시다
신 33:26 / 강성찬 목사
모세는 이스라엘 열두지파에게 복을 빌고 나서 이스라엘을 여수룬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수룬('예수룬')은 곧은 정직한 이란 뜻의 말(야솨르)에서 온 말로 이스라엘 나라가 닮아야할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란 하나님 앞에서 구부려지지 않고 정직한 모습 이어야 함을 보여 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명예롭게 일컫는 시적 표현 또는 별명이기도 합니다.
(신 33:5)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수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 한 때에로다
여수룬은 '사랑 받는 자'(70인 역 LXX) '의로운 자'(델리취 Delitzsch)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의로운 자가 된 이스라엘'(Pulpit Commentary)의 별칭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신 32:15)고 합니다.
모세가 거느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곧고 패역한 족속이라고 표현한 바대로 그들에게는 의로움이 하나도 없었고 마음은 비뚤어져서 원망과 불순종의 생애로 일관해왔습니다. 그러한 백성들을 곧은 자라 곧 여수룬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곧은 자로 인정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이방사람들이나 다름없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실 때는 특별한 사랑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 62:4-5)고 합니다.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는 뜻이고 쁄라는 결혼한 여자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게달의 장막 같은 시골 여인인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사랑은 받으니 왕비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죄를 인정치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보시고 곧은 자 곧 의로운 자, 죄 없는 의인으로 불러 주심을 예표 합니다.
여수룬은 하나님 도와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살아갑니다.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신 33:26-27)고 합니다.
너를 도우시려고...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하늘을 타고 오다', '궁창에서' 등의 표현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입니다(시 18:10;68:33;사 19:1).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권세와 전지전능하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 세상 사람의 도움의 팔의 유한성과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팔은 하루 종일도 들고 있지 못하는 무능함을 르비딤에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이스라엘을 도울 수 있는 힘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 자신은 죽어도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의 팔은 영원하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의지할 데가 없어도, 이 세상에서 나를 도울 자가 없어도 오직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믿고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처소가 되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안식할 곳이 없었습니다. 유리하고 방황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안식과 피난처가 되어주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결코 그 힘이 다하지 않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팔이 항상 이스라엘의 안전한 처소가 되어 그들을 돌보고 붙드실 것이라는 뜻입니다(Keil).
모세는 하나님의 능하신 팔의 권능이 어떠한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한 것도, 홍해를 가른 것도, 반석에 샘물을 낸 것도 다 능하신 하나님의 팔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하기를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팔은 대적을 쫓아내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수많은 대적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서 수많은 대적들이 있었듯이 우리 앞에도 수많은 대적들이 있습니다. 질병과 실패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겁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능하신 팔이 영광의 칼이 되셔서 대적들을 정복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대적들을 담대히 물리칠 수 있는 근거는 이스라엘 군대의 대장 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친히 그들을 지휘하시고 명령하시기를..멸하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천지의 대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신다면 감히 그들을 대적할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고 합니다.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사 44:2)고 합니다.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 군인 20명이 이집트 군대 3개 사단을 물리친 적이 있었다 합니다. 이집트군이 손을 들고 항복하고 나왔다 합니다. 왜 그런가 알아보니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군과 싸우는데 엄청난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와 같이 싸우고 덤벼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안 된다고 생각해서 손을 들고 항복하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나와서 보니까 이스라엘 병사가 20명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 하나님의 군대을 보여주어서 그래서 안 되겠다. 생각하고 손들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킬 때 이와 같은 방법으로 지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23장 10절에는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 했는데 그렇게 지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윤성진 목사 부산영락교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이렇게 지켜주실 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수룬 하나님의 은혜 속에 안전히 거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신 33:28)라고 합니다.
야곱의 샘은 '이스라엘'과 대구가 되는 말로서, 곧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즉 샘에서 물이 흘러나오듯 족장 야곱으로부터 근원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keil).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지어다(시 68:26)라고 합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으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면서도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도다(사 48:1)고 합니다.
하나님은 원수에게는 쫓아내시는 무서운 이시지만 자기 백성에게는 샘과 곡식과 포도주가 풍성한 땅에 안전히 거하게 하도록 하시는 보호하시는 이인 것입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은 곡식과 포도주가 풍성한 땅,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며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때를 따라 내리는 땅 '가나안'을 가리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신 8:7-8)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신 11:11-15)고 합니다.
'하늘이 이슬을 내린다'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수사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창 27:28)고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이 늘 함께 하는 여수룬이 되어야 합니다.
오래 전 영국에서는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설교하는 자는 무조건 벌을 받는다`라며 신앙을 제한한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이 법을 어겨 12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고 합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그의 아내는 거지처럼 구걸하다가 죽게 되었고, 그의 세 자녀들도 졸지에 고아가 되어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그 젊은이는 감옥에서 이런 기도를 드렸다 고 합니다. "하나님, 전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만약 제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저는 절망하지 않겠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그 젊은이의 마음에 감동을 주셨다고 합니다. "너는 글을 쓰거라, 나는 너에게 글을 쓸 수 있는 달란트를 주었노라."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그 젊은이에게 이런 환상을 보여 주었다 합니다. 주님의 나라를 향하여 걸어가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 젊은이가 바로 그 유명한 존 번연(John Bunyan)이며, 그가 쓴 책이 바로 ‘천로역정’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 되는 줄 믿습니다.
여수룬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라고 합니다.
'행복한'('아쉬레')은 '충만한 행복','완전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극히 행복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아 놓고 고별 설교하며 각 지파별로 복을 빌고 마지막에 선포하는 그 한마디가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입니다.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라는 한 마디 말에 이스라엘이 받은 복에 대하여 함축성 있게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낙관적인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전쟁과 어려움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또한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들이 그들 앞에 가로 놓여 있습니다. 그런대도 하나님의 종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그가 이 땅에서 남길 수 있는 마지막 말 곧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이스라엘의 행복의 조건을 외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멀리 있는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시각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이 행복한 사람들인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참 행복한 사람 참 행복한 여수룬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행복은 모두의 이상이요, 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 행복을 찾아 힘쓰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행복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하지만 막상 행복 하느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합니까? 행복의 조건을 외부에서 찾기 때문이라 하기도 합니다. 외부에서 찾다보니 자꾸 비교의식이 생깁니다. 비교하다 보니 행복의 조건을 결국 물질에서 찾게 됩니다. 물질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행복을 찾아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벨기에의 사람 미테를링크가 쓴 [파랑새]라는 소설에서는 한 소년이 파랑새를 보고 그 새를 잡으러 간다는 것입니다. 그 새를 따르고 따라도 붙잡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파랑새를 쫓던 소년이 파랑새를 따르다 보니 어느덧 노인 되어 갔다는 것입니다. 결국 파랑새를 잡으려 헤매다가 지쳐서 집에 오니 파랑새가 집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파랑새는 행복을 가르치고 있다 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김동리의 소설 무지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라 하기도 합니다.
행복은 외적인 조건과 환경적인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내적인 요인에 있다 하기도 합니다. 행복이란 외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환경에 있는 것만도 아닙니다.
남편이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어 아내의 손에 쥐어주었다 합니다. 요즘 지쳐 보인다며 고기라도 먹고 오라고 말했다 합니다. 아내는 만원을 받아들고, “여보, 나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라고 말했다 합니다. 며칠 뒤 아내는 노인정에 다니는 시아버지에게 남편에게 받았던 만원을 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아버님. 제대로 용돈 한번 못 드려서 죄송해요.” 시아버지는 그날 노인정에서 며느리 자랑에 하루가 갑니다. 그리고 그 돈은 쓰지 않고, 서랍 속 깊숙한 곳에 두었다 합니다. 명절날 손녀의 세배를 받고서 기분이 좋았던 시아버지는 숨겨둔 그 만원을 손녀의 세뱃돈으로 주었다 합니다. 세뱃돈을 받아든 손녀는 상을 차리는 엄마에게 달려가 만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엄마, 이 돈으로 나 책가방 사줘, 응? 엄마.” 그 순간 엄마는 요즘 들어 무척 힘들어 하는 남편이 떠올랐다 합니다. 아내는 조용히 일어나 남편의 호주머니에 쪽지와 함께 만원을 넣어둡니다. “여보, 내일 좋은 것 사드세요” 만원 한 장이 식구들을 거치면서 가족의 사랑을 키워줍니다. 행복의 바구니는 물질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만원 한 장에 가족의 희생과 위로와 사랑이 담겨 있다면, 풍성한 행복으로 차고 넘칠 것입니다. (류중현 지하철사랑의 편지 운영자)
진정한 행복은 내면의 세계에 있는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과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과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능하신 팔이 나와 함께 하심을 느낄 때 진정한 행복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복론의 저자 힐티는 말하기를 "모든 참다운 행복은 우리의 힘닿는 곳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힘이 미치지 않은 먼 곳에 있다고 생각지 마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참된 행복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불신자에게는 참된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수룬이라는 말속에 하나님의 선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잘나서 택한 것이 아니라 숫자가 많고 강해서 택한 것이 아니라 가장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고 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합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격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무한한 행복감에 젖어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위기는 어디에서 옵니까? 구원받은 감격을 잃어버릴 때부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생각해 봐도 감동이 없는 성도들이 아직도 계십니까? 진정한 행복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 만들기 위해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셔서 나를 완전히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확실히 모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행복한 사람이 되실 줄 믿습니다.
여수룬은 이스라엘의 대명사입니다. 여수룬은 하나님 도와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살아갑니다. 여수룬 하나님의 은혜 속에 안전히 거하게 됩니다. 여수룬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 행하며 한 영혼을 전도하되 여수룬의 가르침을 지켜 행하며 사명감당하며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너는 행복자로다
신 33:29-29 / 정원식 목사
전에, 한국 갤럽에서 전세계 주요국가 18개국을 선정하여 행복도를 조사하여 발표했는데, 그중에 한국 사람의 행복도는 가장 꼴찌로 10점 만점에 5.34점밖에 안 되었다고 합니다. 학교 성적으로 따지자면, 행복 측면에서 낙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또 20여년전에도 국제 가치회의기관이라는 곳에서 주요국가 13개 나라를 대상으로 행복도를 조사했는데, 그때에도 우리나라 사람의 행복도는 가장 꼴찌인 39%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잘사는 선진국들과의 대비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지만, 우리보다 지식 수준도 낮고 잘살지도 못하는 인도나 멕시코, 또는 브라질이나 필리핀 등의 나라에 비해서도 그 행복도가 현저하게 낮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불행하기 때문에... 즉 예를 들자면, 경제적으로 어렵고 문화적인 혜택도 다른나라에 비해서 부족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행복도가 낮은 것이 아니라, 행복을 판단하는 주관적 척도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조사기관에서 돈 많은 재벌 100명과 박사 학위를 가진 지식인 100명을 대상으로 삶의 만족도에 대해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뜻밖에도 87%가 "아니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수십억 수백억을 가진 돈 많은 부자들도 현재 삶에 만족하지를 못하고, 남들보다 많은 것을 배우고 학문적 업적을 쌓아서 남들로부터 칭송을 듣는 내노라하는 석학들도 만족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과연...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길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불행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불행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왜 당신은 불행하다고 생각합니까?" 라고 물으면,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남들보다 배운 것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불행합니다." 또는 "나는 남들에 비해서 가진 것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불행합니다" 이렇게 쉽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서서 언급했듯이, 행복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라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해서 최고로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8평의 집에 살다가 15평으로 옮겨가면, 마치 방안에서 축구라도 할 것 같은 넓은 느낌을 가지고 행복해 합니다. 하지만 그 행복감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맙니다.
예전에 텔레비젼이 처음나왔을 때, 흑백 텔레비젼조차 얼마나 귀했습니까? 지금은 줘도 안받지만, 그 때는 없어서 못 봤지요. 동네마다 한 두 대씩 있으면, 아이들이 몰려 들곤 했습니다. 저도 어릴적에 형과 함께 텔레비젼을 보기 위해서 저녁마다 이웃집으로 마실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모습이 처량했던지... 어느날 아버지께서 흑백 텔레비젼을 하나 사가지고 들어오셨습니다. 그 날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텔레비젼을 이리 저리 만져보며 좌우를 살피면서, 흐뭇해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새롭게 칼라 텔레비젼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흑백을 보다고 칼라를 보면, 그 선명도와 실감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칼라 텔레비젼이 처음 나왔을 때, 당장에 칼라를 사가지고 오시지 않고, 모니터 앞에 덮는 보안경 비슷한 덮개를 하나 사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덮개는 눈을 보호해 주는 보안경 덮개가 아니라, 네가지 색깔로 만들어진 소위 칼라 모니터 덮개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노란색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온통 세상이 노란색으로 보이듯이, 텔레비젼은 흑백이지만, 그 흑백 텔레비젼앞에 노랑, 빨강, 파란색을 띈 덮개를 씌우니까, 색깔도 마치 칼라 텔레비젼처럼 빨강, 노랑 파란색으로 비추어 졌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해 놓고, "자 칼라 텔레비젼이다."하고 웃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때 당시는, 정말 칼라 텔레비젼이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로, 마냥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요즘에는, 디지털 위성방송이라고 하면서, 생생한 화질을 뽑내는 디지털 텔레비젼이 등장하고 최첨단을 달리고 있지만, 흑백 텔레비젼을 앞에 놓고 즐거워했던 그 행복감을 찾을길은 없습니다. 점차, 황홀했던 그 때의 기억들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행복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라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가난하다고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문명의 이득만이... 결코 행복을 이끄는 지름길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 주보를 보시면, 첫 머리 표지그림으로... 한 노인이 탁자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기도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 앞에는 빵 한 조각과 죽 한 그릇, 그리고 성경과 그 위에는 안경이 놓여 있고, 옆에는 십자가가 하나 새겨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그림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결코 풍족하지 않은 식탁위에서 기도하는 이 노인의 모습을 보면서, 이 노인은 외롭고 불행한 존재라고 생각드십니까? 그렇지 않으리라 믿어집니다.
도리어, 나도 이 노인처럼 하나님앞에서 경건하고 청빈하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비록 많은 것을 얻지는 못했어도,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처럼, 넉넉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감사하는 이 노인의 모습은, 진정 행복은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스위스의 철학자 칼 힐티라는 사람은, [행복론]이라는 그의 책에서 "인생 최대의 행복은 하나님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만이 가장 완전한 행복자이십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부족한 존재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연약한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인간 스스로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복자이신 하나님 앞에 가까이 하는 사람만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찬송가(495)에도 나와 있듯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세주로 소유하고 믿고 의지하고, 오직 십자가를 바라보고 중심을 가지고 하나님앞에서 살아갈 때,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 저와 여러분은 주 안에서 행복한 자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 신33:29 상반절에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400년인 주전 1406년경에,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죽음을 직전에 두고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축복한 기도입니다.
오늘날에도, 행복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과 그 은혜속에 살면서도, 그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자신들이 행복하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당신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앞에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당신들이야말로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사람이 진정한 행복자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마음에 새기고 순종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늘 행복하게 사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백성이기에, 행복한 사람이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고난과 질병과 기근과 위험과 죄와 사탄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백성은 행복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여러 가지 고난과 역경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430년동안 애굽의 종살이에서 지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출12:41).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셔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도, 많은 고난과 역경이 그들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마다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임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뜻하지 않은 수많은 고난과 역경의 현장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때로는 몸부림을 치며 하나님앞에 엎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의 고통 소리를 틀으시고 권념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간구 소리도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고 응답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근심 걱정이 쌓일 때 부질없이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간구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고,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의 기쁨도 잠시, 순식간에 커다란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 막혀 있었고, 뒤에는 애굽의 전차부대가 그들의 생명을 담보로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앞에서 모세가 말하기를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지팡이를 들어 손을 내미니, 하나님께서 큰 돌풍을 보내서서, 홍해바다를 마른땅으로 갈라 놓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 가운데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말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오늘 성도에게도 이와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이미 임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말씀하셨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고 하였습니다.
죄악속에서 방황하던 우리들이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여, 물 가운데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40년동안 먹을 양식을 위해 씨를 심지도 않고 가꾸지도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하늘에서 일용할 양식을 매일같이 내려 주셨습니다. 또한 신29:5에도 보면,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길에서 인도하시며, 온갖 위험과 고난에서 보호해 주시고 늘 구원의 손길을 펼치셨습니다. 특별한 은총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그들을 대적자들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구원의 손길을 펼쳐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하기 이전에 하나님은 예비해 두시고, 간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채워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는 것은, 다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 왕은 시3:8 말씀에서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의 축복도 함께 받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과 축복을 함께 내려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10:9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아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될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넉넉하게 먹고 마시고 풍족한 삶을 누리는 축복이 약속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온전한 믿음이 되어지고,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영국을 떠날 때, 무리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기왕에 떠날 바에는 잘 살 수 있는 곳으로 가자!"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신앙을 우선적으로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인간적인 생각이 들어간 것입니다. 부둣가에는 '에스더'라는 배와 '메이플라워'라고 하는 두 배가 있었는데, 에스더라는 배는 남미쪽으로 가는 배였고, 메이플라워 호는 오늘날의 미국인 신대륙으로 가는 배였습니다.
당시 남미는, 살기가 좋은 곳이었고, 부요하게 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비해 신대륙은, 그 당시... 미개척지였고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 위험한 곳이었고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갈래길이 생기게 되었는데, 잘 살겠다고 남미로 갔던 사람들은 신앙도 잃어버리고 가난에 찌들게 되고 못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메이프라워호를 타고 신앙을 먼저 생각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많은 희생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심히 창대하여 오늘날 세계 최대의 강국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먼저 신앙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안주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행복은 상황이 바꿔어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극복하고 환경을 이겨내며,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는, 마침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복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를 의지하는 자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외면하고 몰라줘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심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얻은 백성들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더욱 힘써 기도하며 신앙의 경주를 달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어떤 어려움과 역경도 능히 극복해 내고, 구원얻은 하나님의 자녀들답게 담대하며 늘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여호와가 돕는 방패와 영광의 칼이 되어 주시기에, 행복한 사람이다.
신33:29에 보면,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왜 행복한 사람이겠습니까?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는, 첫째로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사람이기에 행복한 사람이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돕는 방패가 되시고 또한 영광의 칼이 되시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돕는 방패가 되시고 영광의 칼이 되신다는 말씀은, 전쟁과 같은 위험속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승리케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돕는 방패로 삼고, 영광의 칼로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갈 때, 진정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쟁과 같은 위험속에서도 도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질병에 걸렸을지라도 도와주시고, 고아와 같이 버림을 당했다 할지라도 도와주십니다. 또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해 주시고, 구원과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부족하고 연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입니다. 흙으로 지음받았기에, 인간은... 부서지기 쉽고 깨어지기 쉽고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잔병치레가 많고, 죄악속에 빠져 방황하기 쉬운 지극히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역경과 문제에 부닥치면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까?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적과 싸워 승리하게 만들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28:7 말씀에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힘이 되시고 방패가 되시고 기쁨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과...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주님을... 돕는 방패로 삼고, 영광의 칼로 삼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히13:6에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돕는 자가 되십니다. 적군의 화살을 막아주는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시고, 원수가 한 길로 쳐들어 왔다가도 일곱 길로 도망가는 영광의 칼이 되십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초대 교회때 그토록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 제국이...
약 120년 전에 우리나라에도, 기독교가 처음 들어올 때... 많이 핍박이 있었습니다. 특히 일제시대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우상앞에 절하지 않겠다고 당당히 신앙의 지조를 지켰던 많은 성도들은 순교자의 반열에... 서기도 했습니다. 3.1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명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들이 흘린 순교의 피가 결국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세우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행복은, 마음과 몸의 욕구가 충족되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돕는 방패로 삼고 영광의 칼로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채워주시기에 부족함이 없는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시23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성도들을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가 되어주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 떨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시34:10에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제 아무리 힘있는 자라도 자신의 지식과 힘만 의지하면, 결국은 궁핍하여 주리게 됩니다. 그러나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는 방패가 되시고 영광의 칼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고, 주안에서 안식하며... 행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대적이 복종하고 그들의 높은 곳을 밟는 자이기에, 행복한 사람이다.
오늘 본문 신33:29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복한 이유는, 여호와의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며, 여호와께서 그들을 돕는 방패가 되시고 영광의 칼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는, 대적하던 무리들이 복종하고 그들의 높은 곳을 밟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적군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창3:15 말씀을 가장 처음에 나타난 복음, 즉 '원시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에 나타나는 '여자의 후손'은 바로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창3:15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발꿈치 정도만 상하게 했을 뿐이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뱀의 머리를 짓밟아... 통쾌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성도들이 행복한 이유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우리 역시,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살아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세주로 믿기 때문에, 영원한 승리자의 반열에 서게 되었고, 이 땅에서도 믿음과 사랑으로 대적자들을 굴복시키고, 머리가 되는 축복이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정...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편에 서 있기만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남들보다 좋은 여건을 가지고 살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실패자'처럼 낙심하고 불행한 인생을 살아갑니까?
그것은, 하나님앞에 헌신하고 않고, 충성하지 않고, 봉사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의 고통받는 흑인들을 위해서 헌신했던 의학자이며 철학자였고 신학자였던, 알버트 슈바이쳐 박사는, "사람이 불행하고 좌절하고 실패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의 가능성과 잠재력과 인격의 힘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편에 있을 때만이, 잠재된 가능성과 힘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으며... 그래서, 승리하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편에 서서, 충성 봉사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행복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보잘 것 없어 보이고 하챦게 생각되는 작은 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소중한 일로 여기고... 작은 일에 만족하며 가치를 부여할 때, 그 사람은 언제나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구원의 감격을 늘 간직하고 언제나 기뻐하면서... 작은 일에 충성하고 복음을 위해서 힘쓰며 살아가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
신 33:29-29 / 김필곤 목사
'파랑새병''파랑새 증후군(症候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복'을 찾아 한 곳에 안정 못하고 이 직장 저 직장 떠돌아 다니는 현대 젊은이들의 심리 현상을 말합니다. 일부 젊은 이들이 애인을 바꾸기를 식은 죽 먹듯한다고 합니다. 결혼하고도 쉽게 실증내어 이혼합니다. 직장 뿐 아니라 교회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회를 108번 옮기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바꾼다고 행복해 지겠습니까? 코미디언 황제라 불리우는 분이 폐암말기의 진단을 받고 의사로부터 주변 정리를 하라는 권고를 받았다는 기사를 보았을 것입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는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입고 다녔던 수백 가지의 옷을 기증할 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는 "남들 눈에는 자신이 행복하게 비쳐졌는지 몰라도 제게는 즐거웠던 시절이 별로 없었고 오히려 슬프고 외로웠던 기억이 더 많았다"고 고백합니다.
파우스트의 작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 1749∼1832)는 좋은 교육을 받고 국가의 재상까지 지냈습니다. 작가로서도 명성을 떨쳤습니다. 당대 가장 존경받던 최고의 인물, 당대에‘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불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다 행운아라고 했습니다. 불행을 모르는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 평생 저 자신이 ‘나는 행복하다’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우리 성도님들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거울 앞에 서서 "거울아 거울아 누가 행복하니?" 앞집 아저씨, 돈 많은 큰형님, 직장 잘 나가는 장로님, "거울아 거울아 누가 가장 불행하니?" "나"라고 말하시지는 않습니까?
1.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본문을 읽어보십시오. 내 이름을 붙여 보십시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한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오늘 모세는 광야 생활 40년을 정리하면서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파별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이스라엘은 행복자라고 말합니다. 행복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최초의 사람을 만들어 놓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도 행복자입니다. 하나님이 모태에서부터 조성하기를 행복자로 만들어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신을 늘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늘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늘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조건이 주어져도 역시 행복을 누리는 것보다는 불행의 조건을 찾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불행을 선택하고 불행을 재생산합니다. 세계적인 심리치료사이자 초 베스트셀러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등 '사소한...' 시리즈를 통해 잘 알려진 리처드 칼슨 박사는 "생각의 집착을 버리면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다"라는 책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 '건강한 심리작용'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쾌활한 감정의 근원이며, 진실과 영원한 행복이 머무르는 곳이며 열악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건강한 심리작용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지 학습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건강하지 못한 심리작용은 학습을 통해서만 습득된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성장하면서 부정적인 생각들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은 16세까지 자신에 관해 17만 3천 개의 부정적인 메시지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긍정적인 메시지는 1만 6천 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29.6개의 부정적인 메시지에 겨우 2.7개의 긍정적인 메시지를 받는 셈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생각의 90%는 부정적인 것들이라고 합니다. 부정적인 정보는 결국 사람을 부정적인 사람이 되게 하여 불행한 삶을 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십시오. "나는 행복자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나를 온 천하보다 귀하게 하나님이 생각하십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며 책임입니다. 어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복음 성가를 한 열 번 들었습니다. 감명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고쳐 불러 보았습니다. 은혜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겐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행복하기 위해 태언나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겐 언제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 당신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
2. 왜 우리는 행복자입니까?
1) 하나님이 죄 용서해주고 구원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자입니다.
구원이란 고난과 질병과 기근과 위험과 죄와 사탄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불행의 출발은 어데서부터 올까요? 돈이 없어서일까요? 건강지 못해서일까요? 모든 불행은 죄로부터 시작됩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습니다. 죄 때문에 양심의 번민 왔습니다. 죄 때문에 고독이 왔습니다. 죄 때문에 두려움이 왔습니다. 죄 때문에 죄책감과 가난, 부끄러움이 왔습니다. 죄 문제 해결 없이는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면 그 누구도 참된 평안과 안식,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시32:1-2절에서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2)"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명예가 있고 돈이 있고 건강하다 할지라도 죄를 짓고 감옥에 가 있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 죄의 처절한 상태를 다윗은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시32:3-4)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죄가 있지만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바울도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6-8)"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은 2절 보니까 어떤 분이십니까? 오시는 분이십니다.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와 그 백성을 찾아 오시는 하나님이시다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 가십니다. 아브라함이 범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 가십니다. 야곱이 범죄하고 도망갑니다. 하나님께서 찾아 가십니다. 모세가 범죄하여 광야에서 도망자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가십니다. 바울이 범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 가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고 도망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 가십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연약하여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그 때 주님이 찾아 오셔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말씀합니다. 너는 참 행복한 사람이야! 너 같이 구원얻은 사람이 누구냐? 생각해 보아라! 건강하지 못해도, 돈이 없어도, 여러 가지 문제로 복잡하여도,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가정 문제와 사업문제로 마음에 아픔이 있어도 우리 주님은 말씀합니다. 그래도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받은 사람이 아니냐? 죄 용서함 받고 사망에서 건짐받아 참자유를 얻은 사람이 아니냐?라는 것입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죄의 공포로부터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탄의 노예로부터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행복을 아브라함이, 모세가, 다윗이, 바울이 누렸습니다. 우리도 이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행복을 얻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고 주어진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행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죄사함 받은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행복을 누리를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행복해요 죄사함 받았으니 아버지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아요"
2)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므로 우리는 행복자 입니다.
여호와가 돕는 방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와 주었습니다. 그저 부르고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방치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기적을 통하여 도와 주십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습니다. 물을 주십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십니다.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를 도우십니까? 여수룬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3)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니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사람도 부모로부터 남편으로부터 아내로부터 스승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인생 내내 도와 주시니 얼마나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까? 이 도움의 일시적인 도움이 아닙니다. 변하는 도움이 아닙니다. 인간의 도움이란 일시적입니다.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셔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서를 통해 말씀합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사 41:8)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사 41:9)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사 41:11)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허무한 것같이 되리니 (사 41:12)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사 41:13)"
사람은 도와 주지 않을 지라도 인생은 도울 힘이 없을 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능력많으신 하나님, 변치 않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호흡이 멈추는 순간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주님께서 도와 주시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평안하게 됩니다. 강건하게 됩니다. 힘이 나게 됩니다.
한국교육방송공사 경영본부장을 지낸 이덕선 장로가 평사원에서 이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간증한 글을 보았습니다. 그는 가난 속에서 자랐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벌써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7남매의 가장으로서 그는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막노동, 학교 급사 등 안 해본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교회에 다녔습니다. 하나님 앞에 새벽 기도를 했습니다.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자 나이 55세가 되어서야 겨우 학업을 끝낼 수 있었기는 하지만, 방송통신학교를 거쳐 석사과정, 박사과정을 모두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새벽 기도를 열심히 한 것은“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일찍 세상을 떠났지요, 동생들은 줄줄이 있지요, 친척도 친지도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는 도움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고 의지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만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 아침마다 가서 새벽 기도를 했습니다. 여행할 때도 어디를 가서나 새벽 기도를 늘 빠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믿음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희망을 주셔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없어도, 재산이 없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자입니다. 히브리서 13장 6절 말씀합니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3) 하나님이 친히 싸워 승리케 하므로 우리는 행복자입니다.
우리 인생이 나 홀로 피흘리는 싸움을 하다가 쓰러지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친히 능력 주시고 결국 승리케 해 주십니다. 3절에 보십시오.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싸우십니다. 신명기 31장 3절에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여호수아가 너를 거느리고 건널 것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네 앞서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너로 그 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신 31:3)"라고 말씀합니다. 광야 40년을 정리하면서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신1장 29절 이하를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이 앞서 행하십니다. 불기둥과 그름기둥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지시대로 가면 홍해를 가르고 요단강을 가르고 가나안 7족을 이기게 하였습니다. 신명기 5장 15절에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 하나님의 주신 행복 그 누가 빼앗가 갈 수가 없습니다. 환난이나 기근이나 핍박이나 적인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끈을 수 없습니다. 확실한 승리를 보장 받은 사람이니 우리는 행복자입니다. 각지파에세 축복을 주고 그 축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르우벤에게는 종족 보존의 축복(6)을, 유다-통치권의 축복(7절), 레위-영적 지도자의 축복(8-11), 베냐민 지파-안전한 보호의 축복(12), 요셉-물질적 축복(13-17), 스불론-진취적 무역업의 축복(18,19), 잇사갈-평온한 농력 생활의 축복(18), 갓-광대한 영토의 축복(20,21), 단-계략과 용맹의 축복(22), 납달리-풍요의 축복(23), 아셀-기름진 옥토의 축복(24,25)을 주시고 그것을 누릴 수 있게 합니다.
3. 우리가 어떻게 이 행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1) 어떤 사람들은 행복을 소유로 누리려고 합니다. 물질이 있으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명예와 권력, 건강을 소유하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슴없이 말합니다. 행복은 욕구에 반비례하고 소유에 비례한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갖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 채우고 싶은 것 등 여러 가지 희망 사항 즉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를 분모로 보았을 때 소유나 성취 수치가 분자가 되어 분자가 분모 수치보다 더 크게 되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남보다 더 시각적으로 아름다우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남들보다 많이 배워 속사람이 꽉 차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에게 꾸러가지 않도록 재물과 부를 누리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한 일을 인정받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적인 배필, 똑똑한 자녀를 두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의 파랑새를 찾기 위해 얼마나 사람들이 불을켜고 살아갑니까? 순간적인 쾌락을 얻기 위해 성, 술과 마약, 도박, 취미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는다고 행복이 보장될까요? 남보다 외모가 아름답다고, 꽉찬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재물이 많다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고, 이상적인 배필을 얻었다고, 똑똑한 자녀가 있다고, 건강하다고 반드시 행복할까요? 물론 어느 정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보다는 잘사는 사람이, 후진국보다는 선진국이, 지위가 낮은 사람보다는 높은 사람이 그리고 추녀보다는 미녀가 자살 비율이 더 높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해 줍니까? 물론 소유를 통하여 잠깐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 존재할 때만 잠깐 행복감을 주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행복을 주는 요소는 아닙니다. 주어진 것들이 살아짐과 동시에 행복도 살아지는 것입니다.
2)어떤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통해 행복을 누리려고 합니다.
조금 고상한 사람들은 외적 조건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냇적 조건인 마음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을 비우며는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소유가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재산도 버리고 머리털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면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득도를 하면, 마음을 다스리면 여인을 보아도 돌보듯이 하면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산으로 들어갑니다. 요가도 해보고 신비 종교에 빠지기도 합니다. 심리학자 마이어스 교수는 1)자긍심 2)절제심 3)낙관적 태도 4)외향적 태도를 행복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4대 심리요소라고 강조했습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행복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프리드만 교수는 행복의 핵심적 3요소를 낙천적 인생관, 사랑, 보람있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행복을 구성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라고 말합니다. 마이어스 교수는 행복해지기 위한 심리구조를 지녔는지 여부가 가장 중요한 행복의 열쇠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하루에도 열두번 변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마음의 통제로 우리는 행복을 지속적으로 보장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4) 인간의 기분과 그것의 섬세한 근원을 연구해 온 과학자들은 인간의 뇌에서 행복을 관장하는 정확한 부위를 집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들의 발견에 의하면 뇌에는 '행복의 정점’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이 행복에 관계된 감정들을 주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행복의 정점 주변에는 우울, 그리움, 설움 등 복잡한 감정들이 용수철처럼 얽혀있는데 바로 이 구조의 차이가 개인의 행복의 정도를 다르게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행복의 정점이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면 주위의 복잡한 감정들을 희석되며 반대로 주위의 감정들이 힘을 발하면 행복한 감정이 사그라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던 사람과의 이별이나 나쁜 기억 등을 잊으려면 행복의 정점이 6개월 간 활동을 해야 하고 가족의 죽음 등 큰 일의 경우엔 1-2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연구자들은 현재 인간의 행복은 선천적인 뇌의 구조와 더불어 성장배경과 기억 등에 좌우된다고 생각합니다.
4)우리는 말씀을 지킴으로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인류의 불행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합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들 딸이 같은 집에 살지만 날마다 부모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산다면 아무리 부모가 부자일지라도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개역 성경에는 행복이라는 말이 4번 나옵니다. 오늘 이 말씀과 로마서에서 죄용서함 받은 행복, 롬4:9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행복이 나옵니다. 그리고 신명기 10:13절에 다시 행복이라는 말이 한 번 더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한 번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10:13)"
이미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행복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행복을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부부가 행복을 누리려면 다른 방법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가정이 행복을 누릴려면, 회사에서, 사회에서 행복자로 살아가려면 바로 주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게이트가 얼마나 사람을 불행하게 하고 있습니까? 분당의 모 교회의 모 장로님이 그 게이트의 주인공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구속되어 얼마나 행복감을 잃었겠습니까? 가수 유승준이 비난받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의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려면 말씀을 준행하면 됩니다. 돈이 없어도, 권력과 명예가 없어도, 건강이 없어도 말씀 준행하면 행복합니다. 말씀 지키고 살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부자도 되고 건강하게 살고 자녀도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긍심, 절제심, 낙관적 태도, 외향적 태도도 갖게 되어 있습니다. 프리드만 교수가 말하는 낙천적 인생관, 사랑, 보람있는 일도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 1절 이하를 보십시오. 물론 때때로 고난의 강을 통과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강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신명기 8장 2-3절을 보십시오. 훈련의 과정입니다. 16절 보세요. 결국 어떻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신정철강주식회사 사장인 박종근 장로님의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분은 80년대에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고급 주택을 건축하며 여러 가지 사업을 해서 수십억의 돈을 모은 재산가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친구의 유혹에 넘어가 증권에 돈을 투자했다가 수십억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되고 살던 집도 빼앗기고 월세 방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죄책감과 절망으로 매일 술만 마셨습니다. 죽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의 전도를 받았다고 합니다.“그러지 말고, 나와 같이 교회에 나가자. 이렇게 하나님이 필요할 때 교회에 나가는 거야.”그래서 그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갔습니다. 교회에 나가니까 비록 재산은 다 빼앗기고 회사도 공장도 다 날아갔지만, 마음에 평강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까 얼굴이 다 환했습니다. 그것이 참 부러웠습니다. ‘저 사람들은 다 행복한 사람들이고, 나만 불행한 것 같아.’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철저히 회개했습니다.‘하나님, 이제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매일 밤마다 교회에서 철야 기도 하고, 새벽에는 새벽 기도 하고, 금식 기도도 했습니다. 그렇게 1년 동안 기도하니까 믿음이 생기고 희망과 용기가 생겼습니다.‘하나님,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그는 결국 사업을 일으며 신정철강주식회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행복자입니다. 말씀을 지킴으로 더욱 큰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행복한 인생
신명기 33:29-34:12 / 박정식 목사
‘메릴 스트립’ 이 사람이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고백을 한 적이 있는데요. 그 유명한 여배우니까 굉장히 멋진 행복을 말할 것 같이 보이는데 상당히 소박한 행복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정말 자신이 빨래를 해서 그 빨래를 깨끗하게 하나하나 접어가지고 개어놓을 때 정말 행복함을 느낀다는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묘하죠 .. 굉장히 큰 행복을 말할 줄 알았는데 그런 적은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다아라 요네꼬'라는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라는 책을 쓴 그 유명한 크리스챤이죠. 이 분이 행복을 어떻게 고백했는지 아세요? 이분은 사춘기 때 자살을 결심했던 여자입니다. 그래서 달리는 전차에 몸을 내던져가지고 결국 죽지는 못하고 불구가 되어버렸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까 두 발은 다 날라가 버렸어요. 그리고 한 팔도 사라졌습니다. 남은 것이라곤 한 손과 세 개의 손가락밖에 안 남았어요. 그렇게 살아남은 이 여성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지요? 그런 가운데 또한 가정을 꾸미게 됩니다. 사랑을 많이 받고 또 주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그런 삶을 사는데 어느 날 가족들이 다 외출해버렸습니다. 비록 불구지만 자신이 가족들을 위한 식탁을 마련해야겠다 싶어서 요리를 합니다. 근데 그 때 마침, 감자를 재료로 요리를 하게 되는데요. 이러면 감자를 까기가 참 힘들잖아요..? 한 손으로 그것도 세 개의 손가락으로 감자를 이렇게 깎는데 깎아지지 않잖아요? 미끌미끌 해서 여기로 삐져나가고 저기로 삐져나가요. 근데 문득 그의 생각속에 지혜가 들어오는 게 뭐냐면 그 감자를 가운데 토막을 탁 낸 것입니다. 그리고 엎어 놓고 그 감자를 도마위에 놓고 깎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 때, 이런 고백을 해요. “하나님, 정말 산다는 것이 황홀합니다.” 여러분 이해되세요? 근데 다아라 요네꼬는 그 때 산다는 게 너무나 황홀한다는 것, 삶은 너무나 행복하다는 고백을 합니다. 묘하죠 .. 우리는 멀쩡한 사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죽고 싶다’고 말할 때가 많고 인생은 불행해 싶을 때가 많이 있는데 그런 가운데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제가 참 좋아했던 소설,, 유명한 알렉산더로 솔재니진이 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정말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수용 생활하는 그 죄수들의 삶을 다루고 있는데 거기 보면 '부이녹스' 라는 사람이 나와요. 이 사람은 25년 형을 받았습니다. 대서양을 주름잡던 유명한 그 함장 이었습니다 흔히 깜삐땅 이라 그러는데 25형을 받았어요 간첩혐의를 받고 말이죠 그런데 하루는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정말 추운날 점심 한 그릇을 더 얻어먹습니다 그것도 귀리죽을 얻어먹어요 귀리죽은 그 귀리 자체를 말들에게 먹이지 않습니까? 그것을 한 그릇 더 얻어먹으면서 책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의 입이 벌어졌다.. 행복한 것이다.. 말들에게나 주는 죽을 한 그릇 먹으면서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그 사람은 그 죽 한 그릇에 행복한 거예요.
여러분, 당신의 행복은 어디 있습니까..? 당신은 언제 '아~ 나는 행복하다' 느낍니까..? 어떤 환경입니까..? 어떤 조건입니까.. 한 번 자문자답 해보세요
오늘 하나님의 종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여러분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라고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까.?
그들의 환경 때문입니까? 그들이 가진 소유 때문입니까.? 그들이 누리고 있는 어떤 토지소의 수확때문 입니까? 그들이 가진 아파트 평수 때문입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세상의 권세와 영광 때문입니까? 그런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광야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향해서 모세는 " 여러분들은 행복자입니다. "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행복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 그 행복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본문 다 같이 보겠습니다. 29절 말씀 입니다. 읽어보죠?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거기까지만 보죠..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행복하다 그렇게 선언하는 근거는 뭐에요? 그것은 여호와의 구원을 여러분같이 얻은 백성이 누굽니까, 하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그들을 부러워하거나 그들에게만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모세 자신이 이런 행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행복을 만끽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런 선언을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그의 가슴속에 담겨 있는 행복에 대한 진정한 느낌이었습니다. 행복에 대한 진정한 개념이었습니다. 자신이 이것 때문에 행복하고 또 이스라엘이 그것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자신이 인생 광야를 걸어오면서 이런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행복감 때문에 그의 가슴은 감격에 젖어있어요. 지금 모세의 나이는 120세 입니다. 약관의 나이가 아니잖아요 120세면 정말 우리의 갑절의 인생을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그의 인생은 3가지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첫번째 부분은 그가 태어나서부터 40세 까지의 삶일거예요. 그는 태어나서 부터 사선을 넘나드는 삶을 삽니다. 그가 태어날 때에는 매우 어두운 때 였잖아요. 히브리 민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의 모든 사내아이들은 태어나면 즉각 죽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너무나 아름다운 아이였기 때문에, 또 하나님의 뜻이 그 아이에게 있었기 때문에 이 아이를 죽이지 못하고 석달동안이나 숨겨서 길러요. 그러나 더이상 방법이 없자, 이 아이를 갈대상자에 만들어서 나일강에 띄워보냅니다.
정말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그와 함께 하셔서 그를 애굽왕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게 하세요. 공주는 이 아이를 나일강에서 건져내서 자기의 아들로 삼습니다. 그리고 공주의 아들로 40년 동안 자라게 됩니다. 이것이 그의 첫번째 인생의 부분이었습니다. 정말 사선을 넘나들면서 멋진 생의 전환을 이루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또 40년 인생이 시작이됩니다. 그의 나이 40세가 되었을때에 자기 백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향해서 뭔가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공주의 아들이 된것은 하나님의 어떤 계획과 섭리가 있다는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행동합니다. 자기가 행동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그러나 그의 생각과 행동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습니다.
그는 졸지에 살인자가 되고 결국은 도망자가 되어서 호렙산 기슭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자기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는 초라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나이 80까지 거기서 살았습니다. 첫번째 인생 40년 인생은 그에게는 멋있는 인생이라면 두번째 인생 40년은 그에게는 정말 힘들고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정말 썩어버리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렇게 내 인생은 썩는가... 매일매일 그는 인생을 곱씹었을것입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움직였는데, 내가 하나님의 비젼을 위해서 뭔가 행동했는데 고작 돌아온 결과는 고작 이것뿐이었는가.. 그는 깊이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초라하게 썩어가는 자신의 인생을 곱씹으면서 하루하루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호렙산 기슭의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소명을 경험합니다. 이제 자신을 보내시고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그는 가슴에 담았습니다. 드디어 그는 명령을 쫓아서 애굽에 내려갑니다. 거기가서 자신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구원해내기 시작합니다. 그들을 출애굽 시킵니다. 그리고 광야길에 접어들어서 지금 40년 동안 광야를 걸어왔습니다. 이제 눈 앞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름다운 가나안 땅이 펼쳐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 정상에서 그 가나안 땅에 이 곳, 저곳을 다 눈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정말 감격스런 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제 한가지만 더 ( )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거부하셨습니다. 모세야.. 너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의 정점에 서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가졌던 그 모든 비젼과 모든 열망의 정점에 서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너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선언하십니다.
여러분 얼마나 감격적인 현장이었겠습니까? 얼마나 그의 가슴속에 환희로 가득찬 현장이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그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의 열망, 일 평생 동안 가졌던 그의 꿈, 비전들은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신명기 3장을 보게 되면 이런 청천 병력같은 하나님의 선언 앞에서 그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다시 한 번 기도드리건데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구하옵 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 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하옵소서.. 그의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응답은 노였습니다. 너는 건너가지 못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지금 그 하나님의 선언이 다시 한 번 재확인 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의 동역자 모세에게 그 땅에 건너가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까.. 왜 그를 거부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 미스테릭 한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민수기 20장 1절부터 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이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서 패역한 행동을 드러내는 현장을 발견합니다. 그들이 가데스에 있었습니다. 가데스에 있으면서 그들은 두 가지 때문에 또 하나님께 반항합니다.
첫번째는 우리가 과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곳은 너무나 척박한 땅이기 때문에 석류가 없다.. 사실 애굽은 많은 과일의 주산지입니다. 특히 석류가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광야를 걸으면서 하나님께 반항하는 이유가 석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들의 먹을 물도 다 떨어졌습니다. 목말랐습니다. 그러니까 또 하나님께 대항합니다. 그럴 때 그 하나님께 대항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더불어 다투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합니다. 모세에게 대항하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비판을 퍼부었습니다. 정말 그들의 구습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전혀 새롭게 갱신되지 못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모세는 가슴속에 분노를 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긍정적인 면이 있어요. 아직도 변하지 않은 그들의 모습 때문에 그의 가슴엔 지금 분노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명령하세요. 모세야, 너는 반석을 향해서 명하라. 예전에 호렙산 반석을 내가 쳐서 물이 흘러나오게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반석을 향해넌 명령을 해라 그랬는데 모세는 이 분노 때문에 이성을 잃고 맙니다. 두 가지 그릇된 고백을 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려 하는 것하고 또 한 가지는 그 반석을 향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이나 쳐버립니다. 물론 반석은 깨져서 거기서 물이 흘러 나왔습니다만은 이것은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르비딤에서 한 번 반석을 깨뜨리고 민수기 20장에서 반석을 또 한 번 이렇게 깨뜨려서 물이 흘러 나오는데 첫번째는 분명히 반석을 치라는 것이였어요. 두 번째는 명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첫번째는 예수의 십자가를 예표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 주님께서 그 치욕과 멸시의 십자가를 그 분의 생명을 깨뜨려서 우리에게 생명이 넘쳐나게 하신다면 두 번째는 또 치는 게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약속이 실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두 번이나 다 쳐버렸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가 가나안 땅에 못들어갑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해요. 너의 혈기와 불성실 때문에 니가 백성들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선언이 분명히 민수기 20장 21절에 나와요. 여기서 우리가 성경을 덮어 버린다면 너무 참혹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기의 전 생명과 자신의 전 인격과 자신의 열정을 불살라서 주님의 동역자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세가 한 번의 분노, 한 번의 혈기, 한 번의 그릇된 잘못때문에 거부하시는가..!! 이게 우리의 딜레머란 말이죠.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런데 이속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번의 실수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동역자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의 열망을 꺾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분의 감춰진 심정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들어가서는 안되는 사람입니다. 왜 안됩니까..? 그는 구원자가 아니라 인도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자는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정말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얼만큼 하나님이 안되라고 했는데도 간구하고, 매달리고 있어요. 하나님은 더 이상 그에게 나름대로 갈등 갖지 않도록 더 이상 미련 갖지 않도록 선언해 버리고 있습니다.
너는 못들어간다..! 마치 그의 허물과 죄인 것 처럼 선언해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켠으로 보면 그것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의 책임의 한계와 사역의 한계를 구분짓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감당하는 책임은 여기까지다. 네가 감당할 모든 사역의 한계는 여기까지다.. 그 이상은 내가 할 일이다. 그가 감당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서 가나안 땅 앞까지 오는 것입니다.
자신이 구원자가 아닙니다. 자신이 그 모든 일을 완성하는 완성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 우리는 지금까지 모세의 삶을 추적해왔습니다. 광야를 지나오면서 곳곳마다 그 모세는 마치 역사의 주인공인 것 처럼 우뚝 섰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모세보다 더중요한 하나님에 구원의 역사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는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모세에게 비춰져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 광야에서 나타난 다양한 예표들 이었습니다. 모세는 인도자일 뿐, 구원자는 아닙니다. 이제는 그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는 모세에게서 살짝 비켜나서 정말 구원자신 그 분에게 맞춰지는 상황입니다. 바로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수많은 예표론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혼히 모형론이라고 합니다. 조금 어려운 얘기지만 한 번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지만 그 구원의 역사속에는 구속의 의미들이 포함되었습니다. 모세가 자기 동족을 구원하는데 제일 첫번째, 출 애굽할때 애굽에 모든 장자가 죽어 넘어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 남는데요. 그 관건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일 년에 흠없는 어린양들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임방에 발라요. 그래서 죽음의 사자가 그 문설주와 임방에 바른 피를 보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입니다. 넘어갔다는 뜻이에요. ( )이렇게 혹평했습니다. 아니 그 하나님은 그만큼 제한 된 하나님이냐. 하나님이면 그런 거 안발라도 자기 동족이 누군지 충분히 알텐데, 꼭 발라야만 자기 백성인 것을 알겠느냐. 그것은 제한 된 연약함이 아니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십니까..? 몰라서 그랬겠어요? 아니지요. 거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피를 바른 사건을 통해서 무엇인 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너희가 생명을 얻는 것은 민족적인 혈통에 의해서 구원 받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발리워진 피때문 입니다. 그것은 예수 피였습니다. 구약에서 나타난 신약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표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모형론이라고 해요. 이스라엘은 단순히 양의 피를 바르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비젼이 담겨 있습니다. 언젠가는 너희를 위해서 누군가가 와서 생명을 바칠 것이다.. 너희는 그 대가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지금 이미 너희의 역사속에 새겨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다양한 예표들을 보여주세요. 그들이
아말렉과 싸웁니다. 아말렉이 그들을 쳐들어와서 그들을 급습했을 때, 모세가 어떻게 행동해요?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잖아요, ? 그 때 지팡이를 손에 잡고 기도합니다. 그 손이 내려오지 않으므로 마지막까지 여호수와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아말렉을 쳐서 격파합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을 여호와닛시라고 그래요. 근데 묘하죠? 이름뜻이 여호와는 승리의 깃발이시다 그런 뜻입니다. 모세는 무엇을 들었죠? 지팡이만 들었어요. 근데 우리는 보통 옆으로 든 것인 줄 알지만 실제로는 위로 들었을 것입니다. 폼은 안나지만 왜 여호와는 승리의 깃발이시다. 모세가 든 것은 깃대의 불과합니다. 거기서 유명한 예표가 나오죠. 정말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를 위해서는 누군가 대신 매달린 다는 것입니다. 깃발이 되세요.. 모세는 깃대를 들었지만 언젠가 거기에 매달리실 예수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그 분이 매달리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타나는 것이 십자가 예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다 불뱀을 만나죽게 되었을때 하나님이 또 어떤 명령하세요.. 너는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높이 매달아라 그리고 그것을 바라본 자마다 구원을 얻을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죄의 독이 퍼지고 불순종의 독이 퍼져서 죽어갈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누구 입니까? 나의 모든 독을 담당하신 예수그리스도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3장14절부터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게될 것이다 하나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결국 광야에서 분명히모세는 구리뱀을 들지만 그것은 골고다의 예표였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죄와 우리의 모든 불순종의 독을 제한단 말이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모세의 스토리를 보았습니다. 어디나 모세 모세 모세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모세 보다 십자가의 예표들 이었습니다
앞으로 자신의 계보를 통해서 오실 그 메시아 그분 이 이 모든 것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세가 주인공 인것처럼 행동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모세는 모압땅에서 가나안땅을 바라봅니다 더이상은 못들어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그에게 분명히 당신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게하시는 것입니다 모세야 너는 지금껏 나의 모든구원의 역사 에서 사환으로 일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내 아들이 그일을 감당할 것이다 ,, 너는 그에게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위탁해라 역사의 바턴을 그에게 물려줘라 그가 이모든것을 이룰것이다. 너는 구원자가 아니다 너는 인도자 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여기에는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습니다. 비록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멀리 바라보고 이제 자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만 그의 가슴에는 벅찬 감격이 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어떤일을 이루셨는가 ?
첫째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고 또 한가지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을 알게하신 것입니다 자기는 그일의 동역자 인것입니다 .. 그는 느보산에서 갈보리 언덕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가나안 땅만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자기의 죄까지도 감당하신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과 모든 전세계 사람들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끄실 영원한 구원자 예수그리스도를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바꿔말하면 광야에 세워진 십자가를 그는 보고있다는 사실 입니다 이것이 그의 인생속에 나타난 놀라운 비밀 입니다. 이 비밀이 명료해진 것입니다 이 비밀이 확연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을 가슴에 품고 그는 하나님께 고백한 것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행복한 사람들 입니다 . 행복은 소유에 있는것만이 아닙니다 환경에 있는것 만이 아닙니다 ..정말 행복은 영원한 것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그것을 향하여 우리의 삶의 한 지경을 넓혀가느냐 어떻게 다음세대..또 그다음세대 에 어떻게 아름다운 바턴을 넒기느냐에 존재한 다는 것도 본문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모세는 여기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는 가슴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담고 행복을 담습니다 그땅을 한뼘도 차지하지 못합니다 그땅을 단 1분도 밟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감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가지 때문이죠 .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자로서 또하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역사를 다음세대에 일궈가는 동역자로서 자신의 삶은 족한것입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나는 내인생 속에서 그횃불을 다 태우고 싶지않다 나는 될수있으면 나의 다음세대에그 찬란한 횃불을 넘겨주고 싶다 아마 모세의 고백과 같은 느낌 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느보산 정상에서 이 비전을 바라보고 있는것 입니다 여러분 당신은 어떻습니까 ? 우리가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면서 어떤 마음의 꿈을 가지고 있을것인데 그 꿈들이 대부분 어떤것들 입니까? 내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누릴 그 무엇? 프러스,알파 요인이 참 많습니다 그것을 소유하면 우린 행복한 것이고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면 우린 불행하다 그런 등식을 우린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안에 그 행복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말씀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
우리가 이 질그릇속에 보배를 가졌다고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질그릇 입니다 우리안에 보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주워졌고 하나님의 꿈이 심겨졌습니다 그만큼 우리 존재가치가 아름답고 영광스런 것입니다 소유만이 아닌 그것은 덤입니다 환경만이 아닌 그것도 덤 입니다. 정말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우리안에 그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비전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 모세는 그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는 구원 받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임받았기 때문에 행복하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떠십니까? 34장 7절 말씀 보겠습니다 읽습니다
모세의 죽을때 나이 120세나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나이는 많지만 너무나 젊은 모세입니다 우린 여기서 노쇠한 크리스찬과 젊은 크리스찬들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 그것은 나이에 있지 않습니다 그가슴에 품은 이상과 꿈에 있습니다 노쇠한 교회와 정말 열정있는 교회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비전을 가슴에 품고 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 노쇠한 크리스찬들은 나이가 많이 먹은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노쇠한 사람은 그속에 꿈이 없습니다 .. 열정도 없습니다 추구할 목적도 없습니다. 그저 무슨 영광을 누릴려고 하는 그런 생각밖에 없습니다 내가 뭔가 주께 헌신하고 희생하면 하나님이 뭔가 내게 돌려주실 뭐가 있어야지 .. 나 자식도 다컸고 ,
시집도 다갔고 자기 신앙 자기가 지켜야지 나 이제 다 끝났어..이러면 노쇠한 사람입니다.
비록 내 인생 끝나가지만 내가 기도하고 내가 헌신하고 내가 희생하는것이 나의 다음대 비록 내자식들 내 계보만이 아니라 얼만큼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증대시킬 것인가 이것을 이해할수 있는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 입니다. 가슴이 젊은사람들 .. 그러나 자기대에서 모든것이 끝났기 때문에 더이상 열망도 없고 비전도 없고 열정도 없다면 이미 노쇠한 사람들 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내가 올한해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내게 어떤복을 주실것인가 단순하게 뭔가 더 누리기 위해서 헌신하고 나름대로 희생할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노쇠한 증세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 정말 건강한 사람들 ,정말 젊음이 가득한 사람들은 주님이 나를 구원하신것 뿐만이 아니라 나를 그분의 목적앞에 사용해 주신다는 것만으로도 감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때문에 정말 주님을 향한 거룩한 반응을 보일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자신의것을 더 넓히고 자신의 것을 더 풍성히 하는 그런 어떤 요소로 그런 조건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릇되진 않았지만 그속에 비전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고통당할떄 하나님은 어디계십니까 ?라는 책입니다 필립얀시가 쓴것입니다 요즘 필립얀시가 쓴책이 많이 나와 있는데요. 내용이 참 아름답습니다 어떤것은 잘못사시면 제목은 다른데 내용은 똑같은것을 사시게 돼요. 그러니까 내용을 보셔야만 서로 다른 책을 살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보면 이런 글이 쓰여져 있습니다. 두사람의 대조적인 삶이 여져있습니다. 한사람은 브라이언 스텐버그 라는 사람인데 이사람은 1963년도에 세계육상선수권 대회에서 장대높이 뛰기에서 금메달을 탄사람이고 세계기록을 세운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사람이 하루는 연습을 하다가 목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고 그다음부터 그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구겨지게 됩니다 머리만 움직이고 나머지 모든기능은 다 장애가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그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 그의 가족들도 다 믿음이 있었습니다 불굴의 정신으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10년 넘게 하나님께서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자기를 치유하실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온갖 집회는 다 쫒아다니고 간절히 갈망합니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는 불굴의 정신으로 하나님의 치유만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 그게 전부 였습니다 그런데 기능은 회복되지 않았고 상황은 더 어려워져 갔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회복에 대해서만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한사람의 사람이 있습니다 존 에릭스라는 여자인데 이사람은 1967년도에 해변에 수영하러 갔다가 다이빙을 해요. 근데 그 바다밑에 있던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서 목뼈가 부러집니다 그리고 전신마비가 되어버립니다. 똑같은 상황이 되어버렸어요 그가 눈을 떴을때는 자기몸을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어요 얼마나 절망했는지 한 동안은 죽기를 원하지만 죽을수도 없는 상황 이었어요. 몸을 움직여야 죽죠. 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통해서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을 갖기 시작합니다. 근데 이 여인은 아까 봤던 브라이언과는 좀 달라요 2년 동안에 방황이 있었지만 그 2년 동안의 방황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고 뭔가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하실일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인생을 새롭게 점검하기 시작합니다.가슴에 비젼을 갖기 시작합니다. 내 몸은 도무지 회복 될 순 없겠지만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실 그 무엇인가가 있다.. 그는 생각한 것입니다. 기대에 동역자를 모으고 그 들을 향해서 자신의 간증을 나누고, 입으로 그림을 그리고, 심지어는 TV토크쇼에 나가서 자신이 만난 하나님에 대한 간증을 하고 무수하게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에 구원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어요. 똑같은 상황입니다.똑같이 믿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요. 한 쪽은 10년 넘게 불굴의 투질을 가지고 오로지 자신에 기능을 해복해달라는 기도를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한 쪽은 2년동안 그런 절망에 현실을 겪어 왔지만 그 다음부터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연약한 육체지만 자신에 제한된 현실에서 하나님에 비젼을 선언하는 삶을 산단 말이죠. 어떤게 정말 비젼있는 삶일까.. 어떤게 고통을 가능성으로 유익으로 바꾼 삶인가.. 제니 엘릭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많은 내용 가운데 잠깐만 읽어드리죠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그러나 나의 촛점은 하나님께 해명을 요구하는 데서 부터 겸손히 그를 의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좋다 나는 마비되었다 그것은 끔찍한 일이다 나는 그것이 싫다 그러나여전히 하나님은 마비된 나를 사용하실수 있으실까 마비된 내가 여전히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분은내가 그렇게 할수있다는 것을 충분히 가르켜 주셨다 진정 가치있는 평안은 내적인 평안이며 하나님은 그 평안을 내게 넘치도록 주셨다 그리고 또한가지 더 있다 나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다 . 성경은 천국에서 영화롭게 될 우리의 몸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도 그것은 낮설고
아련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내가 완전히 나을것을 알고있다 나는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기회를 빼앗긴 것이 아니다. 단지 40년이 지연된 삶을 살고 있을뿐이다 하나님은 그과정에서도 나와 함께 하신다. 영화롭게 되는것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그의미를 나는 알고있다 그것은 내가 이곳에서 죽은후에 진정 내가 나의두발로 서서 춤추게 될 그때가 있다는 것이다 . 끝이 좀 어렵습니까,,, 브라이언은 10년 넘게 하나님 고쳐주십시오 이곳저곳 여전히 그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쪽은 하나님 나를 통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나는 제한된삶 장애인의삶이지만 이것이 완전히 상실된건 아닙니다 40년 이후면 나는 죽음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은 주님의 내게 주신 목적의 된 삶을 살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만난 이 놀라운 행복을 고백하고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향력을 증대 시키는 삶을 살것입니다 어디에 행복이 있습니까 ? 물론 우리는 당연히 후자죠 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렇다면 바꿔보십시다 ! 올한해를 살아가시는데 우린 다 예수 믿었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추구하는게 달라요. 하나님 올 한해 그저 내새끼 복이나 주시고 좋은 대학 들어가게 해주시고 내남편 사업 잘되게 하시고 우리가정 그저 복주시고 넓혀주시고 믿습니다 하는것 하고 내가 가진것 그렇게 많지는 않고 대단하지도 않지만 .. 앞으로 내가 주앞에 가는 그 날은 영광스런 그 나라가 내 것으로 소유되기 때문에 그 떄까지는 이 땅에서 어떻게 주님의 동역자의 삶을 살 것인가..나를 통해 어떻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될 것인가.. 나를 통해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날 것인가..올 한해 내가 누구를 섬겨서 그들을 성하게 만들 것인가.. 어떻게 내가 주님에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인가... 내가 어떻게 더 많이 겸손하게 섬겨서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에 나라를 파급시켜나갈 것인가.. 똑같이 믿는 사람이지만 진정 가슴이 젊은 사람과 노쇠한 사람의 차이는 거기서 드러납니다. 당신은 어떤 경우에 해당되십니까,.. 우리는 생각합니다. 내가 믿고 내가 기도해서 받은 이런 것이 많다. 이것이 믿음이 좋은 걸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단계 더 올라가야만 합니다. 비록 많이 못 가지고 내가 기도한 그것을 많이 누리지 못해도 주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실 비젼이 있다는 것, 나롤 통해 다른 사람 영혼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는 것, 나를 통해 주변에 약한 사람들에게 중보기도의 현장이 있었다는 것, 나를 통해 다른 지체가 섬김을 받았다는 것,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에, 다음 역사에 믿음의 바턴을 이어가겠다는 것.. 얼마나 위대합니까..? 우린 결코 초라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큰 자들입니다. 이런 위대한 비젼이 가슴속에 담겨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은 동역자입니다. 이런면에서... 모세는 이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자기 인생은 거기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여전히 계승 된 것입니다. 하나님에 영광스런 그 나라도 여전히 계승 될 것입니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는 영원한 나라에 이미 발을 딛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주셨다...나를 그에 동역자로 사용해주셨다.. 이것 만큼 가슴 벅찬 삶이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행복의 조건은 어디에 있습니까..? 올 한해 얼마나 더 많이 소유할 것인가.. 그 생각에 얼마나 더 풍성히 하나님이 채우실 것인가.. 이렇게만 산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죠. 그러나 주님이 당신에게 주신 구원에 역사가 비젼가운데 흘러넘친다고는 말할수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너무나 현실적인 부분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연약하고 초라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 만큼 구원의 체격을 넓히셨다. 나를 통해 우리 가족을 구원시키셨다.. 다음 세대의 하나님에 계보를 이어나가셨다..비록 똑같은 처지지만 우리의 가슴속에는 정말 위대한 동역자라는 긍정적인 개념들이 다시 한번 점검될 것입니다.기독교 동화 가운데 이런 말이 있어요.. 우리 예수님꼐서 구속의 사역을 다 마치시고 승천 하셨는데.. 천사 가브리엘이 마중을 나왔답니다. 주님 , 참 수고가 크셨습니다. 정말 고생하셨네요. 주님의 그 사역을 정말 찬양합니다. 주님의 사역을 통해서 정말 멋진 일들이 나타나겠군요 주님은 천당 바깥문을 바라보면서 흐믓한 미소를 짓고 들어오시는데 가브리엘이 이렇게 밑에를 바라봤더니 올려다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브리엘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습니다. 주님, 저런 사람을 남겨놓고 왔습니까? 고작 저런 사람을 위해서 희생과 수고를 다 바치셨습니까? 주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 저들을 남겨놓았지..나는 저들을 믿는다 저들이 아니면 나도 못한다.. 그게 우리들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여전히 불완전하고 여전히 모순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비젼과 그 역사를 교회는 지금껏 이어왔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동안 당신이 예수믿는 것, 그냥 하늘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 한 시대, 시대 마다 비록 초라하고 힘들고 곤고 할 지 모르지만 이 비젼을 가슴에 품고 그래도 하나님의 동역자로 삶을 살았기에 우리에게까지 복음의 역사가 미쳐온 것 입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드러내고 구원의 계보를 이어가야 될 것입니까. 물론 올 한 해 동안에 이렇게 주신 여러가지 축복을 우리가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물질에 지경을 넓혀주시고 환경을 넓히신 그 은혜를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모세처럼 인생의 정점에 섰을 때
'하나님, 저를 구원하심을 감사합니다. 저를 당신의 동역자로 삼으셔서 이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심을 찬송합니다. 저는 당신의 동역자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충분히 인생을 내 걸만한 위대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멋진 삶의 종착점이 아니겠습니까 모세처럼 우리의 삶이 그런 고백과 감격으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행복한 사람
신 33:29 / 남 호 목사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모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12지파에게 축복하고 마지막 결론적으로 한 말이 본문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라" 다른 말로 하면 너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란 말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즉, 성도들을 말합니다. "오늘 주의 몸 된 제단에 모인 성도 여러분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행복이란 말은 몸과 마음의 욕구가 충족이 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옛날 영국 티이 강변에서 가루를 빻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들판의 종달새처럼 "티이 강변에 살고 있는 나는 세계에서 둘도 없는 행운아라"는 내용의 노래를 흥얼대며 기분 좋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새가 울지 않는 날은 있어도 가루 빻는 사람이 노래하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해서 '행복한 가루 빻는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 소식이 퍼져서 국왕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어느 날 국왕이 티이 강변으로 가서 그 남자를 만나서 묻기를 매일 유쾌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 사나이는 계속 황송하옵니다만 연발하다가 국왕이 빨리 말하라고 명령하자 마지못해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식을 사랑합니다. 또한 친구들을 사랑합니다... 역시 아내도 저를 사랑하고 자식들도 친구들도 저를 사랑합니다. 그저 그것뿐입니다"
국왕은 손뼉을 치고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그래. 너의 먼지투성이 모자는 짐의 왕관보다 귀하도다. 과연 부러운 일이로다"
다음날도 행복한 가루 빻는 사나이는 왕관보다 귀한 먼지투성이의 모자를 쓰고 "티이 강변에서 살고 있는 나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 라고 노래했다고 합니다.
행복은 부나 권세나 명예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고, 존경하며 자신의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왜 성도들은 행복한 사람입니까?
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전세계 인구는 60억에 가깝고 아시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숫자가 36억 정도입니다. 이렇게 많이 살고 있는 사람 중에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행복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히9:27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말씀합니다.
시91:10- 인간의 연수가 70이고 건강하면 80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풀과 같고 그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말씀하였으며 야고보서 4장에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말씀의 뜻은 사람은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야되며 세상에서 가졌던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행복하고 부족함 없이 살았어도 이 세상을 떠날 때는 행복도 명예도 부귀도 권세도 다 우리 곁을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누구와도 동행할 수 없고 홀로 떠나야 하니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겠습니까?
죽음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임에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원래는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복을 누리면서 살게 되어 있었는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죄를 지음부터 그 죗값으로 죽음이 온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이 죽음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당황하고 불안해 하다가 떠납니다.
히9:12에 예수님께서 이 죄악을 홀로 짊어지시고 저주를 받아 죽어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죗값을 치러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것입니다.
부모도 할 수 없는 일, 형제·자매·친구도 할 수 없는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지 3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깨뜨리시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요5:24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생이란 말은 의사가 우리 병을 치료해서 몇 년만 생명을 연장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릴 영의 세계는 다시 사망하는 것이 없고, 애통하는 것·곡하는 것·아픈 것이 없는 전연 새로운 세계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곳입니다. 평화가 있고, 화목이 있고, 기쁨과 사랑만 있는 곳입니다. 또한 정의가 강같이 흐르고 생명수 과일이 달마다 탐스럽게 맺어지는 곳입니다. 사람의 언어로는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에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과 같이 아름답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32:1 "사함을 받고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서 복은 행복을 말합니다.
신33:29 "너는 행복자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나그네 살이 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죄에서 씻음 받고 의롭게 되어 영생을 얻은 사람이 이 말씀이 가리키고 있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Ⅱ. 하나님의 도움을 누리므로 우리는 행복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고통과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환경에 다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도울 자가 없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반대로 극한의 절망가운데 외롭고 쓸쓸하게 있을 때, 나를 돕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시28:7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니라" 라고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요1:12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니라"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책임져 주시는 친밀하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인자하신 분입니다.
시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며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니라"
시37:40 다윗은 "내 마음이 주를 의지하여 도움을 입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교회 집사님들 가운데 중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이 당황하고 고통스럽고 외로워해야 될 형편인데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원에 가도 의사 선생님이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음 따라 살아오고 계십니다.
먼저 세상 살다 떠나신 믿음의 선배들을 보면 평생동안 고통과 싸우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승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세군 창설자 케드린 부더는 자신의 지난날을 돌이켜볼 때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소설가 스티븐슨은 결핵이 목청까지 병색이 짙어도 영웅주의를 그리는 소설을 썼습니다. ■헬렌 켈러는 아기 때부터 말못하고 눈멀고 귀가 안 들려도 세상 사람들에게 귀감 되게 살았습니다. ■인디언 선교사 마틴은 폐병과 싸우면서 복음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교열과 마비 증세를 동반하고 두통을 참아내면서 봉사했습니다. ■베토벤은 불치의 귀머거리였지만 불후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파스칼은 18세부터 죽을 때까지 고통을 견디어냈다고 합니다.
위의 사람들이 매일매일 미칠 것 같고 인간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자신들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힘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입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도움을 요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우리를 행복케 합니다.
Ⅲ. 하나님이 승리케 하시므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승리케 하십니다. 신31:3-4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친히 앞서 싸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출14:10-14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왔을 때 바로가 군대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애굽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는 애굽군대가 따라오고 있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으로 뒤로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백성들이 두려워하
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원망하기를 "매장지가 없어서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우리가 애굽 사람들을 섬기면서 살겠다고 했는데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구나" 하고 원망을 했습니다. 이때 모세가 백성들에게 "너희들은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워주시고 승리케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29절을 보면 여호와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영광의 칼이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을 하나님이 대신 싸워서 승리케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워주시고 승리케 해주신다는 약속 하에 우리가 살게 되었으니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행복자입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었으니 우리는 행복자입니다.
수고가 많고 슬픔이 많고 고통과 시련이 많은 나그네 인생살이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성공하며 살고 있으니 행복합니다.
또한 대적을 몸소 물리치시고 승리를 안겨주시니 얼마나 감사하고 복된 일입니까?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외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
신 33:29 / 윤창용 목사
기다리던 그날 그날이 왔어요 즐거운 날이예요
움추렸던 어깨 답답한 가슴을 활짝 펴봐요
가벼운 옷차림에 다정한 벗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들과 산을 뛰며 노래를 불러요 우리 모두 다함께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지금은 서울 포이동에서 예음교회 담임목사님이 되신 윤항기 목사님의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행복에 관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노래가 생각이 나서 얼른 이 윤항기 목사님의 예전 노래가사를 찾아 보았습니다. 목사님은 예전에는 이 노래를 세상적인 행복에 겨워 불렀다면 지금은 전도 집회때 예수님의 사랑에 겨워 행복해 하시면서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누구나 우리들은 노래말처럼 행복하다고 노래하며 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제일 마지막에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생명을 주신 까닭은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전도서 5장 19절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만 바라시니,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 개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즉 행복하게 살도록 행복의 조건을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한평생 질병과 고통, 어려움 속에서 몸부림을 치며 살고 있습니다. 또 절망하기도 하고 슬퍼하며 삽니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이렇게 행복한 사람을 만나 보기 어려운가요? 정말 행복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까?
행복론을 쓴 세계적인 석학이 두명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철학자 쇼펜하우어이고 또 한 사람은 스위스의 철학자 칼 힐티(Karl Hilty ; 1833-1909)입니다. 칼 힐티는 그의 『행복론에서 "인생의 최대의 행복은 하나님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77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자기 모은 수많은 학설과 이론을 통해서 이런 결론을 얻었습니다.
쇼펜 하우어는 그의 『행복론』에서 사람이 기본적으로 네 가지를 가져야만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첫째는 명랑한 정서입니다. 즉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생각할 줄 아는 정서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사에 어둡게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보면 그 사람은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명랑한 정서가 있어야만 됩니다.
두 번째는 건강한 몸입니다. 역시 건강이 제일 중요합니다. 사실 건강하면 불평할 권리가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불행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건강하신데도 불구하고 불평하신다면 그것은 사치입니다. 사치스러운 불평, 사치스러운 불행입니다.
세 번째는 정서적 평온이 있어야 합니다. 만족할 줄 아는 정신적 자세입니다. 만족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한계를 정해 놓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만하면 행복하다, 이만하면 넉넉하다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한계를 모르기 때문에 과욕을 부리는 것이고, 그 과욕이 행복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약간의 외부 자산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 자산이라는 것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당연히 필요한 재산,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여유 있는 자산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에게 베풀 자산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남에게 베풀 수도 있고 주고 싶을 때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빠듯하게 여유가 없는 자신만 가지고 있다면 구제할 수도 없습니다. 쓸 수 있는 여유, 그것이 꼭 필요합니다.
자 그렇다면 철학자들의 이야기는 그렇고 성경은 우리에게 행복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신 10:13 절에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시면서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 즉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행복한 사람이 되는 비결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신명기 33장 29절에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모세가 한 말입니다. 모세가 주전 1406년경 모압 평지에서 죽기 직전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축복한 기도의 내용입니다.
"당신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당신이야말로 세계 어느 민족보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행복한 나라요, 행복한 사람입니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예수 안에 거하는 사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어째서 행복하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행복하다는 것은 먼저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33장 29절 가운데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이란 고난과 질병과 기근과 위험, 죄와 사탄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백성은 행복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행복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여러 가지 고난과 역경을 겪게 하셨지만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광야 40년 생활도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도 원주민들로부터 지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마다, 십자가에 죽음심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기독교 가정 사역 연구소가 최근 수도권에 사는 기혼 남녀를 대상으로 해서 가장 듣고 싶은 말과 듣기 싫은 말은 조사하였습니다. 남편이 아내로부터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1위는 "당신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있느냐?"(18%) "당신 네 집안이 다 그렇지 뭐"(10%) "동네 창피해서 못 살겠어"(7%) 이런 말에 남자들은 기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내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가만히 있기나 해"(13%), "됐어 포기한지 오래야"(11%), "다른 여자들 하는 것 배워봐"(11%) "제발 주제 파악 좀 하고 살아"(9%), "당신도 돈 좀 벌어봐"(8%) 순이었습니다. 이런 말 자주 해서 행복해 지길 원하신다면 욕심입니다. 가정에서 이런 말을 추방해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말부터 행복합니다.
시편 3편 8절에서 다윗은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하늘의 복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셔서 행복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모든 성도의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인정해 주시고 있다는 말입니다. 참 행복을 모르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 살면서도 행복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자신들이 행복하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믿음이 있기에 행복합니다.
『역사의 종말』이란 책을 쓴 일본계 미국의 사회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트러스트"라는 글에서 21세기 국가경쟁력의 척도는 사회적 신뢰도 즉, 믿음이라고 규정합니다. 20세기에서는 산업화 정도, 발전의 속도가 국가 발전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지만 사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며 모든 국가의 경쟁력의 척도는 신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어야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미국의 HP社는 창고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이라는 것이 있어 부품창고를 상시 개방해 두고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부품을 알아서 가져다 쓰게 하고, 리츠 칼튼 호텔에서는 청소부가 2 천 달러 범위 내에서 즉, 240만원 정도는 재량을 가지고 비용지출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3M에서는 15%룰을 적용하고 있는데, 연구원들이 근무시간의 15%는 상사의 지시와 관계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투입해서 쓴다고 합니다. 또 스포츠 용품사로 유명한 나이키사는 제조공장이 없기로 유명합니다. 100% 아웃 소싱, 외주 생산을 하는 기업으로 유명합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신뢰에 바탕을 두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믿음이 있어야 살아남습니다. 사람도 믿음이 있어야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 20절에서 바울은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고,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믿음을 기초로 합니다. 우리의 모든 근간은 믿음이 기초이니까 후쿠야마의 말대로 하면 우리는 성장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즉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15장 13절에서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라고 했습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가 기쁨과 평강을 얻습니다. 즉 믿음 안에서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에 행복한 사람은 여호와가 너를 돕는 방패요 영광의 칼이 되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질병에 걸려도 도와 주시고 버림을 당해도 건져 주시고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구원과 은총을 베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우리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약 없이 살아 갈 수 없는 분들도 있고, 절대 남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분들도 있고 넘어지기 쉽고 깨지기 쉬운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역경을 만나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적과 싸워 승리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시편 28편 7절 말씀을 보면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힘이 되시고 방패가 되시고 기쁨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과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힘이 되시고 방패가 되시고 기쁨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과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6절 말씀에도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종교 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고 방어하는 강한 성이요, 그의 팔은 우리의 방패요, 그의 지팡이는 우리의 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주는 강한 성이라고 찬송가 384장에서 루터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이 어디서 옵니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도날드 W. 맥컬로우는 행복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오는 마음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되고, 그 행복은 기쁜 느낌이나 기쁘지 않은 느낌 모두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한 것이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해 지길 원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진정한 목표를 이룬 것,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맛보는데서 오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넘치는 믿음이 있기에 행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리를 돕는 방패시오 영광의 칼이기에 행복합니다. 이 행복을 젖어 사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진짜 행복을 찾아서
신 33:29 / 김흥규 목사
인간은 누구나 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냐에 대한 기준은 각각 다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을 많이 가지게 되면 거기에 비례해서 행복해질 것으로 흔히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나오는 「DebstSmart」라는 잡지가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좀 더 많은 돈이 생긴다면, 그 돈 때문에 당신은 좀더 행복해지리라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응답자들 중 75%가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돈이 많다고 해서 과연 행복지수도 비례해서 커질까요?
일본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과 비교해서 대략 9배 정도나 더 부유하게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삶에 대한 만족도에 있어서는 오히려 중국인들이 일본인들보다 훨씬 더 높다고 합니다. 과거와 비교할 때 우리는 적어도 물질적으로는 훨씬 더 부유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물질 문명의 급속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미국 한 나라만 해도 이혼율이 두 배나 높아졌고, 십대의 자살율은 세 배, 우울증은 무려 열 배나 더 늘어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행복이 외적인 것, 특히 물질적인 부와 상관없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지 않습니까? 행복은 우리의 마음에 달려있지 외적인 환경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돈으로 좋은 집과 좋은 침대는 살 수 있지만 행복한 가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멋진 물건들을 살 수 있지만 마음의 평안을 살 수는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큰소리 치지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돈으로 안 되는 일들 역시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행복인 것입니다. 행복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외적인 부와 명예가 넘쳐 단다고 해도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마틴 셀리그맨(Martin E. P. Seligman)이라는 펜실베니아 대학의 심리학 교수가 최근에 「진짜 행복」(Authentic Happiness)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셀리그맨은 인간이 진짜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종사하고 있는 직업에 눈을 돌려야만 한다고 충고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직장이나 개인 사업장에서 일을 하게 될 때 크게 세 가지 'work orientation,' 즉 '일에 대한 태도'를 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제일 먼저 'job,' 즉 그냥 '평범한 일'로 생각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자기의 일을 'job'으로 보는 사람은 그 'job'에 종사함으로서 급료를 받는 것 외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남 밑에서 직장 생활을 하든지 아니면 개인적인 사업을 하든지 간에 자기가 현재 하는 일을 'career,' 즉 전문적인 '평생의 직업'으로 여기는 태도가 있습니다. 자기의 일을 'career'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일에 투자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job'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자기 직업에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현재 어떤 종류의 직업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자기의 일을 하나의 'calling,' 즉 '소명'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월급을 얼마나 많이 받느냐 적게 받느냐보다는 일 그 자체를 위해서 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도록 불러 주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셀리그맨은 사람들이 이 세 번째, 즉 'calling'을 바로 찾는데 진정한 행복의 열쇠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현재하고 있는 일이 천한 일이든 귀한 일이든, 힘든 일이든 쉬운 일이든, 돈을 많이 버는 일이든 적게 버는 일이든, 여하한 일이든지 간에 자신이 꼭 이 일을 하도록 거룩하게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셀리그맨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어떤 소명 의식을 가지지 않는 한 사람들은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쉬운 일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100% 만족한 일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일을 하시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도록 여러분들을 불러 주셨기 때문에 일한다는 소명의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렇게 될 때 여러분들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휴스톤 제일 침례교회를 오랫동안 섬겼던 목사님들 중에 잔 비새그노(John Bisagno)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목사님이 나이 스무 살이 되어서 대학을 막 마치려고 했을 때 약혼자의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장차 장인 어른이 될 폴 벡(Paul Beck)이라는 분은 오랫동안 목회를 하신 분이었는데 저녁 식사가 끝난 다음에 사위가 될 비새그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이 21 살에 목회 사역을 시작한 사람이 나이 65세가 되기까지 끝까지 목회자로 남는 경우는 10명 중에 1명에 불과하다네."
비새그노는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날 밤 집에 돌아와서 자기와 동년배로서 장차 자기 세대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가 될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모두 24명의 이름이 쭉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23년이 지난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난지 아십니까? 비새그노가 적었던 장래에 촉망받는 목회자 후보들 24명 가운데 오직 3명만이 끝까지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목회를 하나의 'calling,' 즉 '소명'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하나의 'job'이나 'career'로 여기는 사람들은 결국 도중하차를 하고 말 것입니다. 가시밭길 같은 목회 사역에 어려운 일들이 좀 많겠습니까? 사례비가 충분치 않다고 해서, 교인들과의 갈등 때문에, 무슨 무슨 문제 때문에 목회를 중도에 그만 두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됩니까? 자기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성직'(聖職)이라는 소명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단 목회자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은 다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저 밥벌이나 하기 위해서 마지못해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우리의 마음의 자세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더 분명히 말해서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성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믿음이 없이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본문 말씀은 백전노장 모세가 임종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한 말씀입니다. 120년 동안 온갖 풍상을 다 겪은 불세출의 영도자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남긴 최후의 유언이자 예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복의 말씀이야말로 모세의 일생 동안의 신앙을 총정리 하는 참으로 중대하고 엄숙한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차례로 축복한 모세는 마침내 본문 29절에 단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Happy are you, O Israel! Who is like you?"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이스라엘보다 더 행복한 백성이 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 어디에도 이스라엘 백성들만큼 행복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 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calling,' 즉 소명의식이 있는 한 그들은 위대합니다! 행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가지 점에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은 구원받은 백성들이기 때문에 행복합니다(a people saved by the Lord).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출애굽에서부터 모세의 임종에 이르기까지 숱한 난관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때마다 구원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예수 믿는 이들은 '영적인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행복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행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둘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돕는 방패이기 때문에 행복합니다(the shield of your help). 방패는 군인들을 적군의 창과 칼과 화살로부터 막아주는 호신용(護身用) 무기입니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고생을 겪었습니다. 가지가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은 저들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셨습니다.
오늘 '영적인 이스라엘'된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셔서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온갖 죄악된 풍조가 우리를 공격하고 사탄 마귀가 끝없이 불화살을 쏘아대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든든히 지켜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행복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지켜주시는 방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영광의 칼이 되시기 때문에 행복합니다(the sword of your triumph). 방패가 방어용 무기라면 칼은 공격용 무기입니다. 방패가 우리를 세상 풍조와 사탄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막아주는 호신용 무기라면 칼은 보다 적극적인 공격살상용 무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의 칼이 되어주셔서 모든 원수들을 무찔러 주셨고 앞으로도 또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애굽 군대를 무찔러 주셨습니다. 아말렉 군사들과 가나안 땅에 미리 살고 있었던 여섯 토착부족들을 차례로 이기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오늘 '영적인 이스라엘'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행복합니다. 왜요? 영광의 칼이 되신 하나님께서 이기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악한 세력들을 과감히 물리쳐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영적으로 늘 승리하도록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백성이요, 방패되신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백성이요, 영광의 칼되신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들을 물리쳐주실 선택받은 백성이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본문 29절 끄트머리를 보십시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이 무슨 말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행복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완전한 승리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때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들이 이스라엘에 완전히 순복하게 되어서 철저히 패배 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이스라엘'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최후 승리가 주어질 것입니다. 우울증, 열등감, 패배감, 좌절감, 절망, 상처, 등등, 우리를 괴롭히는 갖가지 원수마귀가 모두 다 주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 나오는 유명한 연재 만화 중에「PEANUTS」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촬스 슐츠(Charles M. Schulz, 1922-2000)가 그린 인기 대중만화입니다. 스누피(Snoopy)라는 귀여운 개와 함께 촬리 브라운(Charlie Brown)이라는 남자아이와 루씨(Lucy)라는 여자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만화이지요.
그런데 한 만화에서 촬리 브라운과 루씨가 이런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루씨가 먼저 촬리 브라운에게 묻습니다. "촬리 브라운, 우리는 왜 이 땅에 보내졌다고 생각하니?" 촬리가 대답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서지 뭐야."
루씨가 또 대꾸합니다. "나는 아무도 매우 행복하게 만들고 있지 않는 것 같아. … 물론 다른 사람 역시 누구도 나를 썩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말이야." 그러면서 만화 맨 마지막 판은 루씨가 큰 목소리로 이렇게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끝납니다. "누군가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지금 안하고 있단 말이야!"--"SOMEBODY'S NOT DOING HIS JOB!"
여러분, 이 만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만화 주인공 촬리 브라운이나 루씨는 모두 사람들을 행복하기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실상에 있어서 그들은 스스로도 행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참으로 행복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모두 연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사람들을 참으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분은 누굴까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에게서 얻는 행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진짜 행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성 어거스틴은 「고백록」(Confessions) 제 1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영적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행복이 보장됩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짜 행복, 시들지 않는 행복을 풍성히 누리며 돌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성도여 행복자로다
신 33:29 / 백장흠 목사
우리는 희망과 새로운 축복을 약속하는 2003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한 해를 어떻게 살려고 계획하셨습니까? 우리교회는 2003년을 “행복한 성도 좋은 교회” 라는 표어를 정하고 한 해를 멋지게 살려고 다짐하여 봅니다. 오늘 주신 본문 신명기33:29절에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라고 하시는 말씀을 드립니다. “독립문 성도여 너는 행복자로다.” 이 말씀을 듣기 전에 여러분 마음에 다짐하고 또 다짐할 게 있습니다.
1) 나는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다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친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우리의 환경이 광야라도, 산골이라도, 대도시의 빈민이라도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2) 행복은 먼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자신 안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내 마음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아동 연구소 소장인 버나드 림랜드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남을 돕는 사람들이다.” 라는 사실을 발견하여 보고 하였습니다. 이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은 제 각기 자기가 잘 아는 사람 열명의 명단을 적고 그 명단에 사람들이 행복한지 그렇지 않는지 표시하도록 요청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명단을 다시 한번 훑어 보고 각 사람에 대해 이기적인지 않은지를 표시하였습니다. 결과를 분류하면서 림랜드가 발견한 바 ‘행복하다’ 라고 표시된 사람은 한결같이 ‘이타적’이라고 표시된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행복은 자기 마음에 있다는 말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행복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친 백성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살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4) 행복은 자신이 만들어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시지만 행복은 자신이 만들어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셨는데 인간이 그 복을 누리지 못하고 불행하게 산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행복하게 삽시다. 행복은 배우는 게 아닙니다. 지식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 세계에서 ‘행운아’라고 말하는 괴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행운아라고 말한다. 사실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을 보아서는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더러 솔직하게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행복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하루도 없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였습니까? 하루라도 행복하다고 생각한 일이 있었습니까? 이제는 계속하여 날마다 날마다 행복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행복해야 합니다. 가정도 행복해야 합니다. 부부간에 행복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행복해야 합니다. 교회 생활에도 행복해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행복해야 합니다. 조각가가 무엇인가를 만들 때에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것을 조각하는 것 같이 인생도 행복의 상을 조각하여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까?
1.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라고 빌립보서4:6에서 말씀합니다. 염려한다면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분들 중에는 교회에 나와도 믿지 아니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놀라운 사건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왕위를 버리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간 모세 지팡이 하나로 기적을 행하여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넌 사람이 모세입니다. 백성들이 원망할 때에도 잘 참고 견딘 사람입니다. 그런데 민수기20:12절을 보면 ‘네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라는 고백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순종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100%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반석을 향해 명하여 물을 내라(민20:8)’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지팡이로 반석을 ‘꽝꽝’ 두 번 쳤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말로 하는 게 쉽습니까, 지팡이로 치는 게 쉽습니까? 쉬운 방법이 있는데 왜 어려운 방법을 택하였습니까? 불순종, 이게 불신앙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신앙생활도 어렵게 하는 분이 계십니다. 자기 의사대로 해야 하고 자기 마음에 맞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거역하기도 하고 반항합니다. 순종이 믿음입니다. 순종하는 게 쉽습니다. 왜 불순종 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믿겠다던 말은 어디 가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까? 그게 더 어려운 게 아닙니까?
믿음은 순종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이 “주여 믿습니다” 라고 말하거나 “할렐루야”, “아멘”을 자주 한 게 아닙니다. 그도 사람인지라 실수도 있었고 허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창세기15:6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무엇을 믿었다는 말입니까? 왜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 하였습니까? 교회에 나갔다는 말입니까? 그는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아들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행위가 거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한 것은 순종입니다. 아들을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모리아에 가서 제물로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믿음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고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순종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겠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런 믿음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순종하면 편안합니다. 순종할 때에 기적입니다. 말 잘 듣는데 무슨 문제입니까? 순종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은혜 안에서 낙관적인 생각으로 사는 겁니다. 낙관은 믿음이 있을 때 생깁니다. 염려하지 않습니다. 가나안으로 향하여 가던 이스라엘에게 홍해가 보입니다. 홍해를 보는 이스라엘이 죽음의 강으로 볼 때에 원망이요, 불평이었습니다. 모세는 그게 고속도로로 보이니까 찬송과 기쁨이었습니다. 안병욱 교수가 지은 생활 에세이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는 3낙을 강조한다. 첫째는 낙천이요, 둘째는 낙생이요, 셋째는 낙업이라. 낙천은 즐기는 것이다. 삶을 즐기고, 직업을 즐기고, 봉사하는 것을 즐긴다.”
안다고 즐기는 게 아니라 모르고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는 낙생이라 하였습니다. 생을 즐긴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애에는 부모가 있고 친구의 우정이 있고 자유의 노래가 있다, 희망과 신념과 용기가 있다는 겁니다. 셋째는 낙업이라 하였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즐겁고 좋더라는 말입니다. 소명감으로 하는 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미래에 소망을 갖고 슬픔과 절망은 사라지고 낙이 있다는 게 믿음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맡기는 겁니다. 맡기니까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맡길 수 있다는 것과 맡길 수 있는 데가 있는 게 믿음입니다. 어떻게 맡깁니까? 기도로 맡깁니다.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룁니다(빌4:6)’ 답답할 때에 찾아가서 하소연이라고 할 데가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예전에 시집살이로 고달플 때에 딸들은 친정어머니가 멘토였습니다. 그러나 친정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 누구를 찾아갑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멘토요 지도자이십니다. 예수 앞에 나옵니다. 그 분에게 모든 것을 아뢰며 간구합니다. 그 때 주께서 들어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럼으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께 아뢰고 기도하면 구한대로 이루어 주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라고 하였습니다. 믿는 데가 있기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행복합니다. 행복합시다.
2. 뜨겁게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빌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하였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으면서 살아야 행복입니다. ‘행복은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혹은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갖는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병들지 아니하고 건강한 게 행복이다’ 라고 하는 이도 있을 겁니다. 그보다는 사랑을 할 때에 행복합니다. 헤르만 헤세의 ‘어거스터스’라는 작품에 나오는 얘기 중에 어떤 집안에 아기가 없어 몹시도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드디어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온 집안에서 기뻐합니다. 그 어머니는 말로 다 할 수 없을만큼 기쁩니다. 그 때 신비한 노인이 산모에게 아들 낳음을 축하하면서 이 아이를 위해 한 가지 소원을 하면 들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산모는 딱 한 가지인데 무엇을 요구할까 하다가 아들은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아이가 되었으면 해서 그렇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이 아이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온통 사랑을 독차지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 노인이 다시 나타나서 묻습니다. 이 아이에 대하여 만족하냐 물으니 이 때에 어머니는 말하기를 “우리아이는 온 집안은 물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고 삽니다.” 그 뒤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게 당연하게 생각하고 버릇도 없고 게으릅니다. 아들은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고 높여주기만을 기다립니다. 모든 것을 당연히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다른 이와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발 부탁하노니 아이의 생각을 바꾸어 주세요.” 이제는 사랑을 받으려고 할 게 아니라 다른 이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다른 이들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했답니다. 사랑은 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주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하기에 불행해졌다는 사람 들었거나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혹 사랑을 받으려고 하다가 불행해질 수는 있습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랍니다. 스텐포드 대학에서 여러 쌍의 부부를 골라 연구해 보았답니다. A그룹과 B그룹으로 나누어서 A그룹은 매일 10차례이상 부부가 같이 허깅도 하고 대화면서 살게 하였고 B그룹은 일체 신체접촉을 금하고 대화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A그룹은 건강 상태도 좋았고 행복하고 수명도 길어지더랍니다.
여러분, 건강하고 장수하고 싶으면 사랑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소재로 행복을 만들어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가족이, 남편이나 아내가 원수입니까?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헌신입니다. 희생이라는 말입니다. 거미는 교미한 후에 수컷이 암컷에게 잡혀 먹힌다고 합니다. 왜? 암컷이 알을 만드는데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하기 위해서랍니다. 자기는 죽고 새끼와 어미가 살아가라고 희생합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이기주의에는 사랑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이타주의가 되어야 사랑이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섬김입니다. 문제는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왕따’라는 말을 아실 겁니다. 왕따가 무엇입니까? 따로 노는 사람입니다. 집단적으로 따돌림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왕따는 성격적으로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왕따가 되지 않으려면 방법이 있습니다. 지혜로와야 합니다. 일을 잘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잘 하는 체 해도 문제입니다. 남을 대접하려고 하고 섬기려고 하면 따돌림 당하지 아니합니다. 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허물을 가리워 주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답니다. 첫째는 완벽주의자들입니다. 다른 이들의 약점도 잘 봐주고 넘어갈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랍니다. 경쟁의식으로 살면 평안함이 없습니다. 셋째는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넷째, 작은 일에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다섯째, 매사를 의심의 눈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믿어주고 믿어줄 만큼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여섯째,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랑하고 살면 행복합니다. 행복합시다.
3.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행복합니다.
빌4:6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감사의 반대말을 대게 원망이라고 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우리의 생각속에 두 개의 주머니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기억의 주머니요, 다른 하나는 망각의 주머니가 있는데 사람들은 기억할 것을 기억의 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려야 할 것을 망각의 주머니에 넣어야 하는데 너무 분주하게 살다 보니까 기억할 것을 망각의 주머니에 넣고 망각해야 할 것을 기억의 주머니에 넣어서 인간세계가 이렇게 혼란하다고 합니다.
감사는 기억할 것만 기억해야 할 수 있습니다. 지난날에 나에게 잘 된 것만 기억해 보세요. 감사가 나옵니다. 왜 불평이 나옵니까? 오늘의 주어진 축복을 잊었기에 나옵니다.
감사는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불만이 있을 때에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성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겁니까?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나 금식하며 산 사람이 아닙니다. 헌금을 많이 드리거나 극기의 사람, 정절을 지킨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감사할 수 없는 중에 감사하면서 만족하게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감사는 믿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을 보세요. 자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는 사람은 범죄하지 않습니다. 감사가 나오는 순간에 이미 행복해진 겁니다. 인생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감사하며 행복하게 삽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해 보세요. “나를 부르시고 구원해 주신 은혜가 감사합니다. 지금도 나를 도와 주심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증거이고 깍아야 할 잔디, 닦아야 할 유리, 고쳐야 할 하수가 있다면 이건 내 집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정부에 대하여 불평불만을 할 수 있다는 건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주차장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면 내게 차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난방비가 많다는 건 내가 지금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겁니다. 온몸이 뻐근하고 좀 피로가 왔다면 열심히 일했다는 겁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한 일들 뿐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면 믿음이 성숙해집니다.
감사하면 의미를 찾게 됩니다. 가정에서도 부부간에도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살아주는 아내가 ‘고맙다, 나를 위해 저렇게 수고하는 남편 감사합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우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 오시는 게 어쩐지 감사하다’ 라는 마음을 가지면 행복합니다. 공부를 잘 못했다고 탓 하기 전에 건강하게 자라는 것, 내 옆에 자식이 있다는 것 자체를 감사하여 보세요. 행복해 집니다. 없는 것 때문에 불만을 갖는 게 아니라 있는 것으로 만족하면 감사가 나옵니다. 감사하다 보면 행복합니다. 가슴 아프고 괴로웠던 예전 일을 잊어버리고 ‘현재에 내가 산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4. 항상 기뻐하면서 살아야 행복입니다.
빌4: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말하다가 강조할 내용은 다시 말하게 됩니다. 바울이 삶의 원리를 말하다가 강조할 말이 생각났습니다. “기뻐하자.” 기뻐하면 행복합니다. 그래서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기쁘게 살면 건강에도 유익합니다. 우리 몸 안에 18개의 신비로운 성분을 생성해 내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게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엔도르핀과 아드레날린이라고 합니다. 엔도르핀은 암세포도 죽이고 심한 고통이 있을 때 무통 효과가 있게 하는 성분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아드레날린은 세균을 생성하게 하고 건강을 해롭게 한다고 합니다. 엔도르핀은 언제 나오는가? 웃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나온답니다. 그래서 우울증이 있는 사람이나 고혈압으로 인하여 쓰러진 사람에게는 절대로 울게 하면 안된답니다. 웃기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기쁨을 찾지 아니하고 쾌락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쾌락은 환경 따라 좌우되지만 기쁨은 변하지 아니합니다. 쾌락은 잠시 주어지지만 기쁨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쾌락은 이후에 괴로움과 불안을 주지만 기쁨은 언제나 평안과 안식을 줍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환경의 열매가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기뻐하게 됩니다. 신앙인들의 기쁨은 세상 사람의 기쁨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육적인 만족에서 얻는 유쾌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고 우리의 기쁨은 영적으로 얻은 감격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천국백성입니다.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우리가 값 없이 공로 없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께서 지금도 동행하여 주십니다. 이게 믿어져야 진정한 기쁨이 생겨납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의무가 아닙니다. 권리입니다. 행복해야 합니다. 2003년만이 아니라 주님 오실 때까지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주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매사를 주께 맡기고 믿음으로 삽시다. 기쁨과 감사로 행복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