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는 일본 재일 한국인 가수
미야코 하루미(都はるみ)의
오사카의 가을비
(大阪しぐれ, 오오사카 시구레)이다.
미야코 하루미의 아버지인
이종택(李鐘澤)은
경상도에서 태어나
일본 교토의 비단 명산지인
니시진(西陣)에 이주하여
직물 기술자가 되었다.
당시 그가 운영하던
작은 직물공장에
너무나 성실한 여공이었던
여성 ‘마츠시로’(松代)와 결혼하여
1948년
‘미야코 하루미’를 낳았으며,
하루미의 본명은
‘기타무라 하루미’(北村春美)이며
한국 이름은 이춘미(李春美)다.
하루미는 1964년 27살의 나이로
콜롬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
가요콩쿠르에서 우승하여
‘곤란한 거예요’(困るのことヨ)라는
노래로 데뷔하였고,
같은 해
‘아가씨 동백꽃은 사랑의 꽃’
(アンコ椿は 恋の花)이라는 노래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이후 1965년 발표한
‘눈물의 연락선’(涙の連絡船)이
155만 장의 앨범판매를 기록하는
폭발적인 인기를 가져오면서,
그해 연말 일본 가수의 꿈에 무대인
제16회 NHK 홍백가합전에
나가게 되었다.
1969년
잡지에 미야코 하루미 어머니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내가 조선인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딸 하루미가 어린 시절부터
극심한 차별과 멸시를 받아왔다면서,
이러한 세상을 보면서
재일 한국인 딸을
인기 가수로 키워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당시 하루미 어머니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딸이
재일 한국인임을
주변에서 모두 알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감추고 숨기는 것보다는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인기인의 도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공개한 것에 대하여
이를 비난하는 편지들이 쏟아져,
하루미 어머니는 물론
가수 하루미 본인도
이후 일체의 취재를 거부하며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1976년
‘북쪽의 집에서’(北の 宿から)로
제18회 일본 레코드 대상을 받게 되자,
‘주간 산케이’는
하루미의 아버지는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의 대표적인 상을 줄 수 없다는
기사가 실리면서
이에 동조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하지만 인기는 계속 이어졌고
인기 절정의 상태에 있던
1984년 36살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자,
일본 엔카 가수 중
가장 유명한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みそらひばり,
재일 한국인으로 추정)가,
‘너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니
꼭 행복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무대를 떠난 하루미는
1987년 프로듀서로 활동하였는데,
한국 가수 김연자(金蓮子)의
프로듀서가 되어
일본 가요계에 큰 바람을 일으켰다.
노래 가사는 아래와 같다.
一人で生きてくなんてできないと
히토리데 이키테쿠 난테 데키나이토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고
泣いて縋ればネオンがネオンがしみる
나이테 스가레바 네온가 네온가 시미루
울면서 의지하면 네온이 네온이 스며드네
北の新地は思い出ばかり雨もよう
키타노 신치와 오모이데 바카리 아메모 요우
북의 마을 신지는 추억뿐이네 비가 오네요
夢も濡れますあぁ大阪しぐれ
유메모 누레마스 아아 오사카 시구레
꿈도 젖어요 아아 오사카 가을비에
동영상은
일본의 여체 서예
(Women's body calligraphy)
작가의 작품과
tattoo한 여성의 모습이며,
노래는 '오사카의 가을비'인데
전반부는 우리나라 바이올리니스트
조아람의 연주이고,
후반부는 미야코 하루미가
부르는 것이다.
여체에 새긴 한자는
鏡花水月, 雪月風花, 明鏡止水인데,
그중 명경지수(明鏡止水)란
밝은 거울과 정지된 물이라는 의미로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리킨다.
장자(莊子)란 책에는,
사람은 흘러가는 물에는
비춰 볼 수가 없고
고요한 물에 비춰 보아야 한다.
오직 고요한 것만이
고요하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고요하게 할 수 있다.
(人莫鑑於流水 而鑑於止水
唯止能止衆止)
일본 서예가 고바야시가
요염한 여자 가슴에다
한치의 흔들림 없이
明鏡止水란 글자를
써대는 것을 보면
대단한 경지에 오른
서예가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서예와 그림을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明鏡止水 같은 마음을 가질 수가 있고,
가능성은 제로지만
언젠가 혹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름다운 여체에
멋지게 휘갈길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