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슈, 그러는 거 아냐.”
“쳇....”
시아크가 로슈안을 밀치며 내게 다가왔다.
찰랑거리는 은발에도 마음을 뺏겼지만...
시아크의 단정한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숨이 턱하니 막혔다.
그의 미모는 같은 은발을 소유한 나에게 있어서는 부끄러울 정도로
아름답고 존재자체로도 신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신이 내 앞에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하고 생각할 정도.
회색이지만 전혀 탁하지 않는 색을 지닌 눈동자와
뽀얀 피부와는 대조되는 붉은 입술은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고있다.
“......헤에...”
“뭘 그렇게 빤히 봐!”
감탄사를 내뱉기도 전에 시아크의 몸이 휘청이더니 어느새 로슈안의 뒤로 숨겨졌다.
쟤들 연애하냐....
조금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는데
모든 것이 하얗고 남자라는 면에서는 안 어울릴지는 몰라도 순결하게 보이는 시아크와는
정반대인 로슈안의 분위기는 시아크와는 대조를 이루는 것 같아도 왠지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든다.
길어서 바닥에 닿일 듯 말 듯한 은발을 길게 늘여뜨린 시아크.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리본으로 대충 묶어서 등 중간까지 내리고 있는 로슈안.
머리색과 눈동자색이 세트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은발과 회색의 눈인 시아크와 붉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를 가진 로슈안을 보면
머리색과 눈동자색이 세트인 것도 의외로 좋다는 생각이 든다.
“시아크, 조심해. 저 녀석 널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어.”
자신의 뒤에 시아크를 숨기고 나를 노려보는 로슈안이 한 말을 듣고 기가 찼다.
예쁜 것을 본 것도 죄야?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입만 쩍 벌린채로 로슈안을 삿대질하며 뻐끔거릴때
시아크는 난처한 웃음을 짓더니 로슈안의 뒤에서 나왔다.
“로슈....네 걱정은 고맙워. 네 말대로 음흉한 눈으로 날 보긴 했지만 무슨 일 있겠어?”
커헉! 의,의외의 반격....
예상치 못한 반전에 상처입은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떨었다.
로슈안은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리며 항의하려는 듯 했지만
시아크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미소짓자 수그러들었다.
아아...정말 저 둘 연애하는 것인가...
머리를 긁적이며 둘의 묘한 관계를 의심할 때 시아크는 내가 앉아있는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로슈안은 침대옆의 의자에 거꾸로 앉아 등받이에 턱을 괴고 나와 시아크를 번갈아 보았다.
이제...상황을 정리할 여유가 생긴건가?
순서가 뒤죽박죽 되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차마, 부담스레 쳐다보는 로슈안을
쳐다볼 용기가 생기지 않아서 시아크만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았다.
“우선, 여기가 어디이신지는 아시나요?”
“.....안다고 말하고 싶지만 내가 모르는 것을 원해.”
“마계입니다.”
순간의 침묵. 그리고 이어진 절규.
야아아아아 매정한 마족아아아아아!
마음의 안정을 취한 다음에 말해도 늦지 않는데 갑자기 말하면
이 여린 마음에 상처 입는다고오오오오!라고 외칠뻔 했다.
하지만, 이것은 마음의 절규로 끝이났다.
힘이 없는 것은 나였고, 마계라는 현실감 없는 답변에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충격이 크신가 보군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자 시아크는 미소만 지었다.
옛날에 마사아주머니가 벤을 낳을 때 하던 호흡법으로
펄떡펄떡 뛰며 흥분하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시아크를 봤다.
“독특한 호흡법이군요.”
“효과가 의외로 좋아.”
“그렇군요.”
실업는 대화가 잠시 시아크와 나 사이에 오고가고 다시 아까의 진지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여기가 마계라면....후우....마족?”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군요.”
“그건 또 무슨말이야?”
질문에 시아크가 답하려 했지만 로슈안의 입이 더 빨랐다.
“약, 5000년 전에 신들이 협박에 못 이겨서 열린 마계와 천계의 교섭덕분에 몇몇 미친놈들은 천족놈들이랑 연애를 하고 가정을 이루고 살고있지. 그리고 갈 수록 마계에 거주하는 천족들의 숫자도 늘어가고 천계에 거주하는 마족들의 숫자도 늘어가지. 그와 비례해서 사고도 꽤 많이 일어나고말이야. 쳇... 미치지 않고서야.... 마족은 마족다워야 하거늘, 그 맛있는 천족과 연애한다는 것은....그렇지! 인간이 돼지고기랑 연애하는 것이지. 국제화 시대는 얼어죽을. 신들이 하도 시끄럽고 머리 아프니까 억지로 붙혀놓은 것에 불구하면서 작명센스하나는 죽여준다니까. 말이 좋아서 교섭이지 자신의 먹이랑 연애하는 것이 국제화 시대의 지름길이라 하면 인간들은 온갖 동물들이랑 연애하겠다?”
뭔 소리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로슈안을 쳐다보았다.
돼지고기라 하니까...돼지머리가 생각나는군.
그 녀석의 행방도 궁금하긴 하지만 하나하나 풀어보다보면 알 수 있겠지.
궁금증을 눌러참고 로슈안을 외면했다.
네 녀석은 무슨 얘기를 하던지 옆으로 새는구나.
“마.천계 교섭이야기는 나중에 차차해드리겠습니다. 결론은 마계라고 마족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인간도 간혹 있습니다. 인간계에 나갔다가 인간을 자신의 반려자로 삼아서 오는 마족들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주 드물어서 수명이 일정히 정해지지 않은 마족들도 평생 한 번 볼까말까합니다.”
대충 알아들어먹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크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서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것보다 더 궁금한것은...내가 왜 여기있는 것이지? 분명히 난 영주의 방에서 머리를 다치고 쓰러졌는데...”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아니.”
부정하고 싶어서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이였다.
애절함이 내게로 까지 전해질 정도로 슬픈 눈동자를 하고 있던 꼬마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를 이끌어준 여자아이. 그리고 따뜻한 온기의 손.
“그러고보니...그...어두운 곳에서 들린 목소리와 왠지 비슷한걸....”
“그 목소리는 제 목소리가 맞습니다.”
긍정을 하는 시아크. 몸이 떨릴 정도로 날카로운 목소리와 똑같긴 하지만 시아크의 목소리는 왠지 포근함이 느껴지는데 한 사람의 목소리라 하기에는 분위기가 너무나도 다르다.
“하지만, 목소리 분위기가 달랐어.”
“저도 꽤 무서운 마족입니다.”
장난스레 미소짓는 시아크에게 더 이상 캐물을 수도 없기에 로슈안을 보았다.
로슈안은 궁금증이 담긴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이며 시아크의 대답을 뒷받침해주었다.
본인들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그럼, 나 그 때가 마지막으로 죽은...거야?”
“그렇습니다.”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데?!”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여졌다.
죽었다는 것을 알 수는 있지만 인정하기에는 너무 어렵다.
아무리 강한 척 해봤자 나는 시골에서 아는체하고 살던 성격나쁘고 잘난척 하기를 좋아했던
소녀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어느 누가 자신의 어이없는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죽음이라니! 고작 그거때문에? 난....나는 아니야! 잘 못 알았겠지. 그런거 있잖아, 제 수명이 아닌데 죽었다는...”
“그런건 없습니다. 신들은 실수하지 않습니다.”
“싫어....죽고싶지 않다고! 난 아직 17살이었어! 언젠가는 수도로 나가서, 선생님이란 것도 되어보고 싶었고...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어. 나, 나, 이렇게 마계에 있는거 보면 죽은 거 아니지? 세이크님이 그러셨어. 지옥과 천국 따위는 없다고. 천계와 마계는, 마족과 천족의 세계일 뿐, 죽어서 가는 사후세계는 아니라고! 사람이 가더라도 산사람이 갈 수 있는 그런 곳...”
눈물이 흐를 것처럼 목이 턱턱 막혀왔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갑작스레 바뀐 내 행동에 놀랄법한 시아크는 몸을 떨며 애원하는 나를 끌어안고 토닥일 뿐이다.
“죽고싶지 않아....죽고싶지 않다고...”
“약해빠진 녀석.”
로슈안의 살기어린 목소리에 몸이 떨렸다.
말 그대로 경멸의 눈으로 날 보던 로슈안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난 약하지않아...”
“네, 약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은...사람은 다 이렇다고!”
“네.....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들도 있죠. 추하게, 이미 죽은 목숨을 구걸하는 인간보다는 지금 닥친 상황을 이해하고 앞으로를 생각하는 인간이 있으므로 저희는 인간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다정한 말이었지만 나를 질책하는 말이었다.
시아크의 품에 안겨서 살고싶다만 되씹었다.
추하다라....사람은 다 이럴까?
나의 추한 행동을 변호하기 위한 말이지....로슈안이 약하다고 한 것도 이런 것 때문일까....
“죽기전의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로시엔...”
“로슈안과 같은 뜻의 이름이군요.”
“슬픔을..감싸안는 자....”
“네...맞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오빠가 있었다고 했다.
내가 태어날 때 5살이었던 오빠는 내가 태어나는 날에 죽었다고한다.
알 수 없는 병으로.
슬픔과 기쁨을 감당하지 못하던 부모님을 보고 세이크님은 이 이름을 내게 주었다고 한다.
“로시엔....로시엔....당신에게 이름을 준 사람은 꽤나 명망있는 학자쯤은 될 정도로 학식이 깊은가보군요. 로시엔....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합니까? 하지만 당신은 아닙니다.”
“........죽음앞에서 태연한 사람이 있을까?”
“저는 인간이 아니라서 모롭니다.”
“...........만약, 나의 죽음으로 더 안 좋은 상황이 벌어졌다면 나를 죽게한 귀족자식을 용서하지 않을거야!”
시아크의 품에 벗어나서 씩씩거리며 악을 썼다.
아까와는 달리 날카로워진 내 반응에 시아크는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저로서는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말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신만이 아시죠.”
“설명해봐. 네가 말한대로 추한인간 따위는 될 수 없어. 인간이 짧은 수명동안 이만큼이나 발전한건 너희와는 다른 것이 있기 때문이야.”
어찌 생각해보면 마족을 비하하는 말.
하지만 시아크는 그렇다할 반응을 하지않았다.
오히려, “로슈가 없는 것이 다행이군요. 불량하게 보이긴 해도 로슈도 꽤나 애국자입니다.” 이런 말로 안도하는 표정을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