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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항지 추천 선택관광(영어 가이드)◑로마 시대의 오데온 극장, 나우마키아(저수지) 유적, BC395년에 세운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풍의 원형극장(입장), 아름다운 이오니아해와 웅대한 활화산 에트나산 전경 감상 등 관광 |
지중해에 있는 섬들 가운데 가장 크고 인구가 많은 이탈리아의 섬.
에가디·리파리·펠라지에·판텔레리아 섬들과 함께 이탈리아 자치지역(지방)의 하나를 형성한다. 이 섬은 이탈리아 본토와 메시나 해협(너비 16㎞)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다. 주도는 팔레르모이다.
BC 8세기에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의 지배를 받은 식민지였던 시칠리아는 BC 3세기에 이르러 로마 제국 최초의 속주가 되었다. 중세 초기에 반달족·동(東)고트족·비잔틴인·아랍인 등에게 차례로 점령되었고 11세기에는 노르만족에게 정복당했다. 12~13세기에 시칠리아 왕국의 일부가 된 섬은 18세기에는 부르봉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19세기에 혁명운동의 중심지가 되어, 가리발디가 일으킨 반란의 결과 1860년에 부르봉 왕가에서 해방되었고 다음해에 통일된 이탈리아 왕국과 합병했다. 1947년 시칠리아는 지방자치권을 얻었다.
이 섬은 대부분이 산악지대로서 지진과 화산활동이 매우 격렬하며,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인 에트나 산(3,261m)이 있다. 동쪽에 있는 비옥한 칸탈리나 평야가 유일하게 넓은 평지이다. 아열대성 지중해기후인 시칠리아는 연평균강수량이 평야에서는 400~600㎜, 산간지방에서는 1,175~1,375㎜이다. 자연식생이 인간의 영향을 받아 크게 감소하고 있으며 삼림은 전영토의 4%에 불과하다. 시칠리아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만 년 전이었고 이곳의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사람들이 옮겨왔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의 남부지방들 가운데 가장 도시화되어 있으며, 시라쿠사·메시나·카타니아·팔레르모 등 4개 도시에 10만 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상당한 자연증가율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대체로 감소하고 있는데, 이는 주민들이 이탈리아의 산업지대로 직장을 찾아서 계속 이주해나가기 때문이다. 출생률(1,000명당 15.6명)과 영아사망률(1,000명당 6.7명)은 이탈리아 전체평균보다 높으며, 사망률(1,000명당 8.9명)은 낮은 편이다. 인구의 자연증가율은 연평균 약 0.7%이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어 개발이 비교적 낙후되었다. 그러나 정유업과 화학산업에 기반을 둔 중공업이 눈에 띄게 확장되고 있고, 황의 생산량이 감소추세에 있기는 하나 천연 가스와 더불어 상당량이 생산되고 있다. 다른 산업으로는 식품가공업·염전업·포도주제조업·섬유업·조선업 등이 있다. 이 지역은 농업이 지배적이어서 밀·보리·옥수수·올리브·감귤류·아몬드·포도·목화 등을 생산하며, 소·노새·당나귀·양 등을 사육한다. 섬의 고립된 생활로 인해 정치·사회 세력과 조직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마피아 세력이 잔존하고 있다. 18세기부터 있어온 마피아의 사회적 영향력이 시간이 흐르면서 상당 부분 상실되었으나 이 조직과 연루된 범죄활동은 줄지 않고 있다. 가족이 시칠리아 사회의 기본 구성요소로 남아 있다. 시칠리아의 오랜 전통은 이탈리아의 예술과 문학에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민속 예술과 대중적 종교축제에도 잘 표현되고 있다. 면적 25,709㎢, 인구 4,866,202(2001 추계).
*이탈리아 시칠리아 - 팔레르모 (Palermo)
시칠리아의 중심 도시이다. 팔레르모는 넓은 편이지만 볼거리는 대부분 중앙역 근처에 몰려 있다.
이 곳의 상징인 프레토리아 광장(Piazza Pretoria)의 분수 주위로 스페인 바로크풍의
집들이 펼쳐져 있다. 서쪽에 있는 노르만 왕궁(Palazzo dei Normanni)은 아랍풍의
천장과 비잔틴식 모자이크가 조화를 이룬 멋진 건물이다. 중앙역에서 로마 거리를 따라
북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 있는 국립 고고학박물관(Museo Archiologico)에서는 고대
그리스 조각 및 시칠리아 내의 출토품을 전시하고 있다.
요금 : 무료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교통 시칠리아의 대부분을 커버하는 버스가 가장 편리한 교통 수단이다. 많은 버스들이 시칠리아의
주도 팔레르모는 물론 아그리젠토, 시라쿠스, 카타니아 등을 연결하고 있다.
또한 해안을 달리는 기차가 메시나에서 팔레르모와 시라쿠스를 연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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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시칠리아의 명소 - 타오르미나 (Taormina)
그리스 식민도시로 만들어진 구시가의 그리스 극장(Greek Theatre)이다. 이 곳에서는 아직도 여름이면 연극과 콘서트가 올려진다. 입장료 4.13유로이다. 활화산인 에트나(Etna) 산에도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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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나와 카타니아 사이의 타우로 산 기슭에 바다에서 거의 수직으로 솟아오른 가파른 구릉 위에 있다. 옛 이름은 타우로 산에서 유래한 타우로메니움이다. 이곳에는 원래 시칠리아의 고대 부족인 시쿨리족이 살고 있었지만, BC 392년경에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오스 1세가 이 지역을 다시 점령했다. BC 358년에 바로 남쪽의 낙소스에서 온 피난민들을 받아들인 뒤, 역사가 티마이우스의 아버지인 안드로마쿠스의 너그러운 통치를 받으며 번영을 누렸다. BC 210년경 로마로 넘어가 그 동맹 도시가 되었다. 이 도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하에서 식민지가 되었지만,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차츰 쇠퇴하기 시작했다. 902년 아랍인들이 이 도시를 파괴한 후 시칠리아 섬 북부에 사는 데모네 골짜기의 그리스도교도들이 다시 건설했지만, 962년에 알 무이즈가 이끄는 아랍인들이 다시 점령하고 이름도 무이지야로 바꾸었다. 1078년에 노르만족에게 점령되어 약간의 번영을 누렸다. 로마 시대에 재건된 유명한 그리스 극장은 타우로 산의 전망 좋은 곳에 서 있어서, 남서쪽으로는 에트나 산의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바라다보이고 북쪽 바다 건너편에는 칼라브리아 산맥이 보인다. 이곳에는 또한 1892년의 발굴 때 발견된 로마 시대의 오데온 극장과 이른바 나우마키아(저수지)의 유적도 있다. 대성당, 코르바자 궁전, 산토스테파노 궁전, 참폴리 궁전은 중세에 지은 건축물이다. 도로와 철도를 통해 메시나 및 카타니아와 이어져 있는 타오르미나는 시칠리아 섬에서 가장 인기있는 겨울휴양지의 하나이다. 인구 9,979(1991).
지중해에서 서쪽의 시칠리아와 동쪽의 이탈리아를 가르며 티레니아 해와 이오니아 해를 이어주는 해협.
이 해협은 길이가 32㎞, 너비가 북쪽(푼타델파로와 스킬라 바위 사이)에서 3.2㎞, 남쪽(알리 곶과 펠라로 곶 사이)에서 16㎞이며 깊이는 북쪽 끝에서 90m이다.
옛날에 뱃사람들은 주로 그리스 신화에서 여자 괴물들로 의인화된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라는 바위 및 소용돌이들 때문에 이 해협을 건너기를 매우 두려워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곳의 해류들은 항해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주고 있다. 주(主)해류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며 반대 방향으로 일종의 보조 해류가 흐른다. 이 해류들은 보통 6시간마다 교차하며 주해류가 흐를 때는 수위가 150~200㎜ 낮아진다. 그리고 특히 해류가 강할 때는 바다 밑의 해초가 물 위로 뜨고, 가끔 퇴화되었거나 비정상적인 눈과 인광을 내는 기관을 가진 물고기들이 뛰어오르기도 한다. 종종 요정 모르가나(→ 모건 )로 불리는 신기루가 보이는데, 이는 해변의 물체가 외관상 수직으로 연장되어 보이는 것으로 이 해협의 전설적인 두려움을 더해주고 있다(→ 색인 :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경치좋은 둑을 따라 있는 주요항구로는 항만시설을 잘 갖춘 메시나와 레조디칼라브리아가 있다. 해안 지역은 고고학적 유적과 행락지로 유명하며, 해협에는 물고기와 플랑크톤이 풍부하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메시나 주의 주도.
펠로리타니 산의 아래쪽 기슭에 자리해 메시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레조디칼라브리아와 마주보고 있다. BC 730년경 처음 문헌에 등장하는 고대 시쿨리족(族)의 식민지로, 칼키스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건설한 뒤 항만의 형상을 따서 창클레('낫'이라는 뜻)로 명명했다.
BC 5세기초 페르시아가 점령한 밀레투스와 사모스에서 도망나온 그리스인들이 이곳을 점령했다. 이들은 당시 레기움과 창클레를 통치하던 레기움(레조디칼라브리아)의 참주 아낙실라스의 도움을 받았는데, 아낙실라스는 이곳의 이름을 자신이 태어난 펠로폰네소스의 메시니아 지역을 기려 메시나로 바꾸었다. 이 도시는 독립을 회복했다가 BC 396년 카르타고의 히밀코에게 파괴되었다.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오스가 또다시 정복해 재건했으며 뒤에는 카르타고인들과 시라쿠사의 참주 아가토클레스와의 전쟁에 말려들었다. BC 289년에 아가토클레스를 위해 고용된 캄파니아의 용병들인 마메르티니에게 넘어갔으며, 그 용병들은 시칠리아 섬을 지배하기 위해 이곳을 자신들의 본거지로 삼았다. 시라쿠사와 카르타고 사람들의 압력을 받은 마메르티니는 BC 264년에 로마와 동맹을 맺었으나 로마의 간섭으로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났으며 이 전쟁이 끝날 무렵 메시나는 자유도시이자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 메시나는 잇따라 고트족, 동로마 제국(535), 아랍족(842)에 점령당했고 동로마 제국이 다시 정복하려고 침략했을 때 많이 파손되었다. 1061년 노르만족의 지도자 로베르 기스카르(뒤에 시칠리아 백작 루지에로 1세가 됨)가 독립시킨 뒤 노르만족의 통치하에서 상업과 문화 중심지로 번성했다. 1197년 슈바벤 출신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하인리히 6세가 이곳에서 죽었다. 1266년 만프레디가 죽으면서 슈바벤 왕조가 끝이 나자 메시나는 프랑스의 앙주 가(家)로 넘어갔고 뒤이어 시칠리아의 다른 곳과 함께 스페인의 부르봉가로 넘어갔다. 1821, 1847, 1848년에는 이탈리아의 정치적 통일운동인 리소르지멘토 봉기에 참여했고, 1860년에는 양 시칠리아 왕국의 나머지와 함께 해방되었다.
1783년 지진으로 크게 손상을 입었고 1908년 지진으로 거의 완전히 파괴된 메시나는 그후 현대식으로 재건되면서 도로가 넓어졌으며 낮은 철근 콘크리트 건물들이 들어섰다. 잔존했거나 복원된 기념비적 건물로는 비잔틴 제국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주교좌 대성당과 안눈치아타데이카탈라니 교회가 있는데, 둘 다 12세기에 노르만인에 의해 재건되었다. 국립박물관에는 지진 때 건진 미술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볼 만한 현대식 건물도 많은데, 그중의 하나는 주교좌 대성당 근처에 있는 종루(鐘樓)이다. 그밖에도 1548년에 세운 대학교, 해양생물연구소, 식물원 등이 있다.
이 도시는 중요한 항구로서 1943년에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추축국이 군사와 물자를 증원한 요지였다. 해협 건너 레조디칼라브리아 및 빌라산조반니와의 사이를 왕복하는 정기연락선(열차운반선과 水中翼船 포함)으로 이탈리아 본토와 연결되며, 팔레르모와 시라쿠사로 가는 철도편도 있다. 교역, 감귤류 농업, 화학제품·약품·식량·잼 제조, 항구·조선소 운영을 주로 한다. 과일, 포도주, 올리브 기름, 화학제품, 약품, 의약품, 건축자재 등을 수출한다. 인구 248,616(2004 추계).
에트나 화산
이탈리아 시칠리아 동부 카타니아 주의 주도.
에트나 산 남쪽, 이오니아 해에 면한 넓은 카타니아 평야에 있다. BC 729년 북쪽으로 80㎞ 떨어져 있는 낙소스에서 온 칼키스인들(그리스 에우보이아 섬의 칼키스에서 온 정착민들)에 의해 세워졌다.
BC 5세기에 시라쿠사의 참주인 히에론 1세와 그의 아들 데이노메네스가 이 섬을 정복하고 이름을 화산에서 따온 아이트나로 바꾸었는데, 이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섬은 중요한 지위를 얻었다. 주민들이 데이노메네스의 추종자들을 몰아낸 뒤 다시 옛 이름을 회복했다. 시칠리아 도시들 가운데 가장 먼저 로마에 함락되었으며(BC 263), 옥타비아누스(뒤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식민지가 되었다. 데시우스 황제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도들을 박해하던 시기에 이곳에서도 이 시의 수호성인인 성 아가타를 비롯한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은 뒤 카타니아는 비잔틴·아랍인·노르만인에게 차례로 함락되었다. 슈바벤의 황제들을 적대하여 하인리히 6세와 프리드리히 2세의 침략을 받았으며, 시칠리아 왕국의 아라곤 군주들이 이곳에서 종종 머물기도 했다. 16~17세기에 내란, 해적의 침략, 전염병, 기아 및 에트나 화산폭발(1669), 지진(1693)을 비롯한 자연재해 등을 겪었다. 그후 카타니아는 나폴리의 부르봉 왕가의 지배하에 있었고, 1837년 콜레라의 만연 속에서 일어난 시민 소요사태가 강제적으로 진압당했으며 1848년 다른 도시들과 연합하여 시칠리아의 자치권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이다 또 한번 무력으로 진압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3년 폭격과 치열한 전투로 크게 파괴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여러 번 분출된 용암으로 이루어졌으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면서 경사가 완만히 낮아진다. 건축에 주로 화산 응회암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옛 시가지는 전반적으로 짙은 회색을 띠고 있다. 1693년의 지진 이후 거의 새로이 건설되었으므로 도심부는 18세기 양식의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고대 유적으로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극장 유적지들과 로마 시대의 원형투기장·바실리카·목욕탕·송수로 등이 있다. 프리드리히 2세를 기념하여 지은 4개의 뾰족한 탑이 있는 카스텔로 우르시노(1239~50)는 오랫동안 대표적인 군사건축물로 알려졌으며, 지금은 일부가 상당량의 미술작품과 고대 유물들이 소장된 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민들의 생활 중심지인 두오모 광장은 18세기의 궁전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넓은 거리들과 이어져 있다. 1091년에 노르만의 백작 루제로 1세가 세웠던 대성당 가운데 검은 용암으로 만든 3개의 앱스(後陣)와 트랜셉트(翼廊)의 일부가 남아 있다. 1693년의 지진 이후 건축가 프라 피올라모 팔라초토와 조반니 바티스타 바카리니(1702~68)가 새로 세웠던 이 대성당에는 성 아가타의 유물과 이곳 태생의 작곡가 빈센초 벨리니의 무덤이 있다. 시칠리아에서 가장 큰 교회인 산니콜로 교회(1693~1735)는 같은 이름의 옛 베네딕투스회 수도원(14~17세기)과 연결되어 있다. 1434년에 아라곤의 알폰소가 세운 대학교는 시칠리아에서 가장 유서 깊은 대학교이며 도서관(1755)에는 중세의 귀중한 필사본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그밖에 주요유적으로는 바로크 양식의 산타아가타 교회, 바카리니가 세운 시청사, 두오모 광장에 있는 코끼리 분수대(1736), 콜레자타(왕실 예배당), 천문대, 지금은 박물관으로 개조된 벨리니의 생가 등이 있다.
시칠리아에서 2번째로 큰 이 시는 공업·교통 중심지이며 이탈리아에서 가장 교역이 활발한 항구를 보유하고 있다. 팔레르모·메시나·시라쿠사와 철도로 연결된다. 기계·화학제품 제조업, 식품가공업, 어업 등 다양한 산업이 이루어지며, 특히 유황 정제업은 시칠리아 전체생산량의 1/2을 담당하고 있다. 주변 농촌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유통 중심지로서 아몬드·귤 및 금속·목재·호박(琥珀) 등으로 만든 수공예품을 수출한다.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 유명한 겨울 휴양지이기도 하다. 인구 307,774(2004 추계).
유럽 중남부의 산지가 많은 나라.
공식 이름은 이탈리아 공화국(Repubblica Italiana/Italian Republic). 영어로는 Italy라고 표기한다. 지중해를 향해 뻗어 있는 장화 모양의 반도와 시칠리아 섬과 사르데냐 섬, 그밖에 수많은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으로 프랑스·스위스·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 등과 이웃하고 있다. 동쪽으로 아드리아 해를 사이에 두고 발칸 반도와, 남쪽으로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북아프리카와 마주보고 있다. 면적은 301,336㎢이고, 인구는 60,325,000명(2009 추계), 수도는 로마이다. 국민은 이탈리아계가 대부분이다. 공식 언어는 이탈리아어이다.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가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화폐 단위는 유로(#128/?)이다. 75% 이상의 국토가 산악지대와 구릉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알프스 산맥이 이탈리아의 북부 국경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아펜니노 산맥이 이탈리아 반도를 남쪽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다. 평지의 대부분은 이탈리아의 주요 강인 포 강 유역에 위치한다. 강력한 지질 활동으로 만들어진 3개의 지괴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 섬을 덮고 있다. 한편 베수비오 산과 에트나 산은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4개의 활화산 가운데 일부이다.
크게 발달된 서비스업과 제조업이 경제의 근간을 이룬다. 주요 수출 품목에는 기계류, 운송 장비, 화학제품, 섬유, 의류, 신발, 식품류(올리브 기름, 포도주, 과일, 토마토 등)가 포함된다. 이탈리아는 양원제를 가진 공화국이다. 국가의 수반은 대통령이고, 정부 수반은 수상이다. 이탈리아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해왔다. BC 9세기에 에트루리아 문명이 꽃피었으나, 로마인들을 BC 3~4세기에 그들을 몰아내고 로마 공화정을 세웠다. AD 4~5세기에는 이민족이 침략하여 서로마 제국을 붕괴시켰다. 이탈리아의 정치적 분열은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유럽 문화에 대한 영향이 약화된 것은 아니었고,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럽 예술 발전의 전진기지로 자리하였다.
15~18세기 이탈리아 영토는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오스트리아에 의한 지배를 받았다. 나폴레옹의 점령이 1815년으로 종말을 맞았을 때, 이탈리아는 또 다시 여러 군소 독립 국가들로 분열되었다.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 이탈리아 통합운동)는 이탈리아 대부분의 영토를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1861년까지 시칠리와 사르데냐를 통합하였고, 1870년에 이르러서는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이 완성되었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연합국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1920년대의 사회적 불안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을 낳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 되었다. 1943년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패배하였고, 1946년에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그 후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NATO)와 유럽 공동체(European Community/EU)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1970년대 이탈리아는 제한적 자치권을 갖기는 하지만, 입법기능과 과세권을 갖는 지방자치제도를 완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련의 정치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