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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오복음 19,16-22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젊은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의 질문에는 영원한 생명마저도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에게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러자 젊은이는 말합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참으로 묘한 질문입니다.
그는 계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신앙생활을 오래 한 우리에게도 익숙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기도도 하고, 미사도 드리고, 해야 할 일도 하고, 죄를 피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묻게 됩니다.
“주님, 이것 말고 제가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젊은이에게 새로운 계명 하나를 더 보태지 않으십니다.
더 많은 일을 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가 붙들고 있는 것 하나를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예수님께서 젊은이에게 요구하신 것은 단순히 재산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의지하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의지하라는 초대였습니다.
젊은이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보니 그가 가진 것이 그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말합니다.
“그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선행이 아니었습니다.
계명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 자신이 의지하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자유였습니다.
우리는 이 젊은이를 보면서 쉽게 생각합니다.
‘나는 재산이 많지 않으니 이 말씀과는 조금 거리가 있겠지.’
그러나 부유함은 재산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놓지 못하는 것, 내가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 내가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나를 지켜 주리라고 믿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나를 붙들고 있다면, 그것 역시 내가 가진 ‘재산’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무조건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나의 주인인가를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겠느냐?”
이 말씀 앞에서 저는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장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은 단순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이며, 자신의 모든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납니다.
젊은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돌아갔지만, 아브라함은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붙들고 있던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길을 걸어갑니다.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이런 순간이 찾아옵니다.
내가 놓아야 할 것을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순간입니다.
그때 우리는 슬퍼할 수도 있습니다.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것까지 내려놓아야 합니까?’ 하고 묻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에는 젊은이에게 아주 중요한 한 장면이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빼앗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더 자유롭게 하여 당신을 따르게 하시려는 사랑의 초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많이 결심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눈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내려놓아야 할 때,
내가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할 때,
내가 아끼는 것을 주님께 맡겨야 할 때,
그때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도란 어쩌면 바로 그 눈길과 마주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이것을 내려놓으면 무엇을 얻게 됩니까?’라고 묻기보다,
‘주님, 제가 이것을 내려놓고 당신을 얻으면 충분합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은 내가 무엇인가를 많이 해내서 얻는 상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나 자신을 맡기는 데서 시작되는 생명이라는 것을.
(천 사비나 수녀님)
8월17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에제키엘 24,15-24 마태오 19,16-22
‘댐’이 되기보다 ‘폭포’가 되리라!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한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선한 일일까요?
이것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자신이 선하다고 정한다고 선해지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선한 일이라고 여기고 하지만 사실 악한 일을 경우도 많습니다.
만약 자기 생각으로 선한 일이라고 여기는 일들을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면 굳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석가모니도 선한 일을 말하고, 공자 맹자도 선한 일을 말합니다.
선한 일로만 구원에 이른다면 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되실 수 없습니다.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어떠한 일을 할 때, 그것이 선해지려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어야 합니다.
개가 죽어가는 주인을 구했다면 이것은 사람 쪽에서 보면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개는 그것이 선한 일인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주인에게 잘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생존본능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으로서 아무리 선해지려고 노력해봐야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라고 하십니다.
계명은 선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일을 하되, 주님께서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생각으로만 하는 선행은 선행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그 일에 개입하셔야 합니다. 주님만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냥 선한 일을 하는 사람과 계명에 있기에 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젊은 사람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주님 때문에 선한 일을 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구원에 길에 다다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단계 더 높은 선함을 요구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자기 능력이나 재산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닌 선함 자체이신 분의 통로가 되라는 뜻입니다.
세계 1위 부자 ‘빌 게이츠’는 어머니의 권유로 2위 부자 ‘워런 버핏’을 처음 만납니다.
처음에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별로 이익이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단 만나고 보니 말이 잘 통했습니다.
‘어떻게 더 많은 돈을 벌 것인가?’만을 생각해오던 빌 게이츠에게 워런 버핏은 ‘어떻게 잘 쓸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선재단을 설립하면 자신도 동참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2010년 설립된 빌 게이츠 재단의 자선단체가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입니다.
빌 게이츠는 자기 재산의 95%를 기부하기로 합니다.
워런 버핏도 재산의 99%를 기부하기로 하고 게이츠 재단에는 83%를 내놓기로 합니다.
이후 수많은 재벌의 기부 릴레이가 이어졌습니다.
빌 게이츠는 오늘 예수님을 만난 젊은 부자 청년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부자 청년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것과 비교하면 빌 게이츠는 그 부자 청년보다는 잘 대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모든 재산을 기부하라고 하면 빌 게이츠라고 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에도 빌 게이츠는 빈곤국 코로나 백신 공급을 위해 1억 5000만 달러를 지원하였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선의 영광은 빌 게이츠와 그 재단에 함께 도움을 주고 있는 워런 버핏에게 돌아갑니다.
물론 그 일도 훌륭하고 주님께서 갚아주시겠지만, 더 완전한 선행은 ‘선하신 분은 주님뿐’임을 입증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볼 때 이런 분들은 마치 ‘댐’과 같은 역할인 것 같습니다.
댐은 홍수 조절도 하지만 가뭄 때 품고 있던 물을 공급하여 그 물줄기가 메마르지 않게 합니다.
이 댐의 역할을 하는 이들도 참으로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더 완전해지려면 ‘폭포’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를 통해 하느님의 선함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아두었다가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흘려보내며 주님의 자비에 나 자신까지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이태석 신부님이 ‘폭포’와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의사가 되어 돈을 많이 벌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가난한 이들에게로 찾아가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분이 돈을 많이 벌어 도왔으면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열매는 그런 도움을 주는 것보다 더 많이 열렸습니다.
그분의 제자들 중 의사가 된 이들이 벌써 40여 명이 넘고 기자, 공무원, 약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이웃을 돕겠다는 제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이태석 신부님을 보며 그분의 능력이나 재산보다는 그분 뒤에서 활동하신 선하신 하느님을 봅니다.
저도 댐과 같은 사람이 될 것인지, 폭포와 같은 사람이 될 것인지에 혼돈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돈을 모았다가 필요한 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의 섭리보다는 나의 의지로 선행을 하려는 것이기에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대한 그때그때 흘려보내 주려 노력합니다.
선하신 분은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마더 데레사가 참으로 큰 선행을 했지만, 그분이 남겨주신 더 큰 선행은 청빈을 보여준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섭리에 맡김으로써 그분의 도움을 받으시는 분들이 주님을 찬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우리가 무언가를 내어놓으며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됩니다.
내가 선해지려 할 때, 그분의 선하심이 가려집니다.
따라서 참으로 완전한 선행은 마치 폭포수처럼 나에게 많은 물이 흘러들어오게 하여, 그것을 거침없이 당장 흘려보내 주는 주님 섭리에 맡기는 삶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강론>
(2026. 8. 17. 월)(마태 19,16-22)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16-22)>
1) 이 이야기를 ‘진주 상인의 비유’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5-46).”
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좋은 진주’를 이미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온 것은 그 진주를 차지하는 방법을 묻기 위해서입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진주 상인의 비유’에 있는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 말씀 그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마태 19,27).
여기서 우리는 “꼭 그렇게 모든 것을 버려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1티모 6,7).” 라고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만 얻을 수 있고, 하느님 나라는 모든 것을 버리고 ‘빈손’이 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라는 말은, 재물뿐만 아니라, 권력, 명예, 지위 같은 것들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어린이’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하늘나라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어린이들만 있는 나라, 그 어린이들이 모든 것을 얻어 누리는 나라입니다.
만일에 하늘나라에 세속의 재산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면?
그래서 그곳에 부유한 사람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다면?
또 세속에서 누리던 지위와 권력과 명예 같은 것들을 다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면?
그래서 그곳에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섞여 있고, 높고 힘 있는 사람도 있고, 낮고 힘없는 사람도 있다면?
그러면 그 나라는 하늘나라가 아니고, 하늘나라가 아니니까 그곳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2) 우리는 예수님께서 “너의 재산을 나에게
가져오너라.” 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고 말씀하셨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모든 것’을 예수님께 바친 것이 아니라, 그냥 놓아두고 따라나섰습니다(마태 4,22).
3) 그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 “무엇이 부족합니까?” 라고 물었는데, 예수님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그의 부족한 점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간절함’이 부족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있었지만,
“그 생명을 얻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 라는 ‘간절한 희망’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어떤 가난한 과부(마르 12,42-44)’처럼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하느님 사랑’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이웃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그 사람은 십계명을 잘 지키고 있었으니(20절)
다른 율법들도 잘 지키고 있었을 것이고,
불우이웃돕기를 실천하는 일도 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마태 22,39) 사랑하지는 못하고, 자신의 부유함이 유지되는 범위 안에서만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냈을 것입니다.
4)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라는 말은, 그 사람의 이야기가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계속 고민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실행하면서 살 것인지, 영원한 생명을 포기할 것인지...
그 고민 끝에 어떤 결심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그런 고민과 갈등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안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부유하고 풍족하게 살다가 죽어서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둘 다 누릴 수는 없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8월17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19,16-22: 하느님 나라와 부자 젊은이
오늘 복음에서 한 부자 젊은이가 예수님께 나아와 묻는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16절) 예수님은 그에게 먼저 계명들을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젊은이는 그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지켜왔다고 대답한다. 그는 겉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경건한 삶을 살았지만, 여전히 내적 결핍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20절)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젊은이는 계명을 지켰지만,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단순한 율법 준수가 아니라, 제자직의 길이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명한다. “주님은 단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더 큰 길, 곧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과 당신을 따르는 길을 제시하셨다. 이것은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길이다.”(Hom. in Matth. 63 요약) 즉, 율법의 준수는 출발점일 뿐, 제자직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복음은 젊은이가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라고 전한다. 왜냐하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22절)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는 계명을 지켰지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재물을 버릴 용기는 없었다. 그는 계명 준수의 기쁨보다 재산 상실의 슬픔을 더 크게 느꼈다.”(Sermones 요약) 재물 자체가 악은 아니지만, 집착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막는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젊은이에게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21절)라고 약속하신다. 이는 재물을 포기하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하늘 나라의 영원한 상급을 얻는 길임을 가르치신다. 성 바실리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네 창고에 가득한 것은 가난한 이들의 것이다. 네가 쌓아 둔 것은 그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할 수 있다. 나누어 주지 않는 것은 도둑질하는 것과 같다.”(Hom. de divit. 7) 즉,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정의의 요구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다.
교리서는 말한다. “재물에 대한 집착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어렵게 한다.”(2547, 2053항 참조) “가난한 이들을 향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자의 필수 조건이다.”(2443-2449, 544항 참조) 따라서 복음적 가난은 단순히 물질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온전히 마음을 두는 것이다. 오늘 젊은이는 영원한 생명을 원했지만, 결국 재물에 묶여 슬프게 떠나갔다. 이는 큰 교훈을 준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단순히 “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따라나서는 것”이다. 바로 그분의 길, 십자가의 길, 사랑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