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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축복 2(2)
신 33:18-29
18 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19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
20 갓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갓을 광대하게 하시는 이에게 찬송을 부를지어다 갓이 암사자 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는도다
21 그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 곧 입법자의 분깃으로 준비된 것이로다 그가 백성의 수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
22 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
23 납달리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3)서쪽과 남쪽을 차지할지로다
24 아셀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아셀은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25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26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27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28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신 33:18-29 / 스불론 지파와 잇사갈 지파에게는 이렇게 축복하였다. `스불론 지파는 지중해로 진출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고 잇사갈 지파는 정착생활을 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아라! 19) 이 두 지파는 해변에서 사귄 이웃 백성들을 초대하여 함께 다볼 성산으로 올라가 흠 없이 온전한 짐승들을 잡아 주께 제물로 바칠 것이다. 그들은 해상무역으로 재물을 모으고 모래 속에서 연지조개를 캐어 자주색 옷감을 만들고 그 귀중한 상품을 대상들에게 팔아 부유하게 될 것이다.' 20) 갓 지파에게는 이렇게 축복하였다. `갓 지파는 요단강 동쪽 지역에서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였으니 그들에게 넓은 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라! 갓은 사자처럼 웅크리고 약탈물을 노리고 있다가 그 손에 걸려 들기만 하면 팔을 부러뜨리고 머리까지 떼어내 버린다. 21) 열두 지파가 땅을 나눌 때 갓은 ㄱ) 가장 좋은 곳을 맨 먼저 골랐다. 이스라엘 영도자의 무덤이 그곳에 있으니 이스라엘의 두령들이 언제까지나 그곳에 와서 모일 것이다! 갓은 여호와의 의로운 일을 하고 온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주님의 법을 온 세상에 퍼뜨릴 것이다!' (ㄱ. 모세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본래 모세의 몫으로 분배된 땅이라는 뜻이다) 22) 단 지파에게는 이렇게 축복하였다. `단은 이제 막 바산의 숲 속에서 뛰어나오는 젊은 사자와 같다!' 23) 납달리 지파에게는 이렇게 축복하였다. `여호와의 사랑을 만족하게 받고 온갖 복으로 가득 찬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 납달리여! 남쪽으로 갈릴리 호수까지 차지하고 사는 납달리 지파여!' 24) 아셀 지파에게는 이렇게 축복하였다. `아셀은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에서 가장 기름진 땅에서 살도록 복을 받았다. 그는 자기 형제들에게도 귀여움을 받으며 그 땅에서 올리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 발까지 기름으로 닦으리라. 25) 모든 마을이 부유해져서 성문마다 쇠와 놋으로 빗장을 걸어 놓을 것이다. 아셀 지파가 지상에 머물러 있는 한 언제까지나 그렇게 부강할 것이다!' 26) 이어서 모세가 이스라엘 전체에 대하여 축복하였다. `이스라엘을 존귀한 여수룬으로 높여 주신 하나님, 여수룬의 하나님과 같은 신은 하나도 없다. 그분이 하늘에서 찬란하게 구름을 타고 급히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러 오신다. 27) 그 영원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피난처시요 그분이 강한 팔로 이스라엘을 붙잡아 그품에 안아주신다! 이스라엘아, 그분이 원수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들을 전멸시키라고 네게 명령하셨다. 28) 이제는 이스라엘이 안전한 곳에서 살며 홀로 야곱의 샘물을 퍼마시며 살 것이다. 하늘은 이슬과 비를 흡족히 내려 주고 땅은 네게 곡식과 포도주를 풍족하게 내어 줄 것이다! 29) 이스라엘 백성아, 너희는 얼마나 행복한 백성이냐! 여호와께서 해방시켜 주신 백성, 이런 백성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느냐?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방패와 같고, 원수들을 쳐서 이기는 무서운 칼과 같으시니 이스라엘아, 너희는 언제까지나 여호와만 의지하며 살아라! 그러면 네 원수들이 네 앞에 엎드려 살려 달라고 애원할 것이고 너는 그들의 등을 짓밟게 될 것이다!'
< 설 교 >
너는 행복자로다
신 33:29 / 이동휘 목사(평강교회)
(신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1. B.C. 990년경, 다윗 왕이 어느 날 저녁에,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왕궁 옥상에 올라가서 거닐었습니다.
그 때에 그는,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옥상에서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다윗은 신하를 통해 그 여인이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임을 알아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왕궁으로 끌어들여 정을 통했습니다. 통간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얼마 후 다윗 왕은 그 여인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에게 휴가를 주어 자신의 아내와 동침하게 하려 했지만, 우리아가 거절하여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다윗 왕은 밧세바의 뱃속에 있는 자기 아이를 우리아의 자식으로 뒤집어 씌워, 자신의 간통죄를 덮으려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뜻하지 아니한 명령으로 휴가차 집으로 돌아온 우리아가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모두 장막을 치고 지내며, 저의 상관이신 요압 장군과 왕의 모든 신하가 벌판에서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만 홀로 집으로 돌아가서, 먹고 마시고, 나의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왕이 확실히 살아 계심과, 또 왕의 생명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런 일은, 제가 하지 않겠습니다.” 며 귀가를 거절합니다. 참으로 우리아는 충신 중 충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은 자신의 간통죄를 덮으려던 계획이 무산되자, 요압 장군을 시켜 우리아를 전장(戰場) 함정으로 내몰아 죽게 했습니다. 이른바 다윗 왕이 충신 우리아를 간접 살해한 것입니다. 다윗 왕은 이후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와 자기 아내로 삼고 아들을 낳게 했습니다. 이 사건 후 약 1년 정도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하게 하셨습니다. “어떤 성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양과 소를 아주 많이 가진 부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가 사서 기르는 어린 암양 한 마리밖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암양은 온 가족의 애완 동물이 되어 식구들과 함께 같은 상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은 마치 자기 딸처럼 그 양을 부둥켜안고 귀여워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 부자집에 손님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그 부자는 자기의 양과 소는 아까워서 잡지 못하고, 한 마리밖에 없는 그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빼앗아다가, 그것을 잡아서 손님을 대접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던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고 명령합니다. 바로 그때 나단이 다윗 왕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 사울의 손에서 너를 구출해 내었으며, 사울의 궁전과 그의 처들을 너에게 주었고, 또 이스라엘과 유다를 너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였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다면 내가 너에게 더 많은 것을 주었을 것이니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악에 대해 징벌을 선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 사실을 샅샅이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즉시 견책하지 아니하시고, 1년 동안이나 참으신 후 견책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년 동안 다윗으로 하여금 양심의 큰 고통을 겪게 하셨고, 그 가운데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책망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 상태를 준비시킨 것이었습니다.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도록 하여 생명에 이르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회개하지 않고 지낸 1년 동안의 양심의 가책과 심령의 고통, 그리고 회개의 축복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32:1-5)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참으로 하나님은 죄인 하나,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회개시키기 위해 선지자 나단을 보내신 사실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에게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준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겔34:11-1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사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여전히 죄와 절망의 자리에 버려진 상태에 있을 것입니다.(롬 1:28) 찾아오셔서 자신의 죄에 대해 완악하거나 강퍅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유를 통해 자신의 죄악을 기억하고 고백하도록 유도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죄의 실상에 대해 둔감한 다윗에게, 비유를 통해 그 죄의 참담한 실상을 환히 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비유에서 ‘부한 자’는 다윗 왕을, 그리고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사람이 딸처럼 여기는 암양 새끼를 강탈했다.’는 것은 다윗이 많은 아내들을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아니하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 눈길을 돌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 왕은 이 비유를 듣고 ‘그 사람’에 대해 크게 진노했습니다. 다윗의 잠자던 양심이 깨어나는 순간을 말합니다. 분명히 자기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끌에만 민감히 반응한 다윗의 모순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마7:3-4) 그러나 죄악에 둔감했던 그의 양심이 일단 깨어나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다윗은 이 말을 통하여 간음(11:4)과 살인(11:15)을 저지른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스스로 율법에 따른 형벌(레 20:10; 24:17)을 선고한 셈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의 큰 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타인의 적은 죄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엄격한 타락한 인간성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다윗 왕의 선고를 듣고, 나단 선지자가 “당신이 그 사람이라.” 며, 비유 말씀 중 ‘그 사람’, ‘4배나 갚아주어야 하는 그 사람’은 바로 다윗 왕 자신임을 지적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나단의 비유를 남의 일로만 알고 정죄하던 다윗의 무딘 양심을 결정적으로 일깨워 주는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책망이 계속됩니다. 사무엘 하12:7-9입니다.
(삼하12:7-9)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언제든지 부족함 없도록 채워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이 과욕을 부려 범죄한 것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즉 다윗은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탐욕과 정욕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범죄했던 것입니다.(눅12:15)
1970년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던 ‘사무엘슨’(Paul Anthony Samuelson)이란 사람은 경제학자답게 ‘욕구 충족이 곧 행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행복에는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이 충족될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먹고 싶은 것 먹는 것이 행복이고, 가고 싶은 곳 가는 것이 행복이며, 입고 싶은 것 입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얻는 행복은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3번 이상 먹으면 맛이 없어지고, 가고 싶었던 곳도 3번 이상 가보면 별로 가고 싶지 않게 되며, 아무리 멋진 옷도 3번 이상 입으면 그저 그런 옷이 됩니다. 계속 새로운 것으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곧 계속해서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으로 인해 항상 행복하지 못하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은 9만9천원을 가지고도 10만원을 채우려 하고, 100만원이 되면 200만원를 채우려 하고, 200만원이 되면 1,000만원을 채우려 합니다. 사람의 욕구는 끝이 없습니다. 또한 내가 많이 가졌다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내가 1억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웃이 2억원을 가지고 있다면 그 많은 것을 가지고도 행복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조건을 만족시킴으로써 행복을 얻으라는 주장은 결국 행복을 포기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를 두고 지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전2:1-11)
(전6:2-5)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이니 햇빛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나 이가 저보다 평안함이라.
행복은 조건을 충족시킴으로서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조건들을 누림으로써 얻는다는 것이 성경의 행복론입니다. 전도서 6:2에 보면,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고, 자꾸 채움으로써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진 그것을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는 말씀입니다.
2. 오늘 본문은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죽기 직전 이스라엘의 12지파를 하나하나 축복한 후, 마지막으로 선언한 말입니다.
1).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이 말씀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이유를 보겠습니다. 신명기7:6-8입니다.
(신7:6-8)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천하 만민 가운데서 특별히 구별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소유된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고 했습니다. 고대 국가에서 일차적으로 인구가 많은 것은 강력한 국력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민(選民)으로 택정하시고 불러 주신 때는, 이스라엘의 수효가 많고 강성했을 때가 아니라, 오직 갈대아 우르를 떠나 이방의 나그네 된 아브라함 한 사람 뿐이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고 하신 것입니다. ‘가장 적다.’는 것은 능력이나 재능이나 물질 등 모든 면에서 가장 보잘 것 없고 하찮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가장 적은’ 이스라엘을 택하시어 ‘성민’으로 삼으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기뻐하시고 다만 사랑하심을 인하여” 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실만한 다른 이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조건이 없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에, 성민으로 삼으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했는데 자식이 없었습니다. 이에 이삭이 하나님께 간구하자 하나님께서 그 간구를 들으셔서 리브가가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쌍둥이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창 25:21) 이를 두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동생으로 태어나는 야곱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선택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쌍둥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 택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행위에 따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전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고 하신 것입니다. 야곱을 선택하신 이유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다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야곱이 선택된 것뿐입니다.
(롬9:10-13)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행해 ‘너같이 구원얻은 백성이 어디 있느냐?’며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4:32-38입니다.(참조 : 롬4:4-16)
(신4:32-38)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너로 불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 하신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너보다 강대한 열국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과 같으니라.
성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구원받게 된 것은 여러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롬 3:27-28)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4:2-16)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이유는 다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로마서 5: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다만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어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광야 사막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선택받아 구원받은 이스라엘은 행복한 자들입니다. 비록 광야 사막 길을 걷고 있다 해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냐 하면 그 길을 통해 영원히 행복한 삶의 길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아파 본 사람이 건강의 소중함을 압니다. 고난을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고난의 소중함, 그 고난 뒤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섭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사막, 고난의 길을 40년 동안 걷게 하신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8:2입니다.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고난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여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배워 순종하는 삶이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시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신28:1-6)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고백했습니다.
(고후4:17-18)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이스라엘은 이미 고난을 당해보았습니다.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했고,(출 12:40) 그 종살이 끝에 애굽은 이스라엘의 씨를 말리기 위해 출산하지 못하도록 무거운 노동을 시켰고, 심지어 태어난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혹독한 고난과 환난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러니 이 구원의 은총을 충분히 누리라는 말입니다. 이 구원의 은총을 잊지 않고 누리도록 하기 위해 유월절을 기억하여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신 16:3) 유교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속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너의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요즘 뇌사자들의 안락사가 합법화 되려는 움직임이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심장은 뛰고 있지만 뇌가 활동하지 않으니 고통당하지 않도록 의학적으로 죽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전 미국에서 10년 동안 뇌사 상태에 있던 사람이 기적적으로 깨어나서 하는 말이 ‘다 들었다’는 것입니다. ‘의사가 하는 말, 가족들이 하는 말 다 들었는데 다만 말을 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의사는 이미 죽었다고 선언하고 더 이상 치료하지 말자고 했지만, 환자 자신은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포기하는 일은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포기가 없습니다. 특히 자기 백성에 대한 애정은 결코 포기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430년 동안 종살이 하고 있을 때, 그 고난과 환난이 극에 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여 구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그 구원을 이미 받은 너희는 행복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니 다른 조건을 찾아다닐 것 없다고 말합니다. 구원받은 그 은총을 충분히 누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어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의 물과 피를 따 쏟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십자가 보혈의 은총과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구원의 사실을 누리는 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이 구원이 가장 귀한 것이기에 다른 욕구들이 불충분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행복을 빼앗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조건없이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하신 그 구원의 기쁨을 즐기는 행복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이스라엘이 행복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시고 “(창12:1-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고 언약하시고 25년이 되어가는 즈음, 아브람의 나이 99세가 되는 때에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17:4-5)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 증표로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아브라함’으로 개명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살던 땅에 흉년이 들자 하나님께서 이삭을 불러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26:2-4)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삭이 하나님 말씀대로 애굽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그 땅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므로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창26:12-13)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이삭이 거부가 되자 주변 부족들이 시기하여 이삭의 우물들을 모두 메워버리거나 강탈해버렸습니다. 목축업을 하는 이삭에게 우물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삭은 주변 부족들이 자기 우물을 메우거나 강탈할 때마다, 그들과 다투거나 하지 아니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해서 우물을 팠습니다. 그리고 우물을 팔 때마다 물이 터져나왔습니다. 이러한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창26: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그 후 주변 부족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이삭을 찾아와 자기들을 해하지 말고 자기들과 화평 조약을 맺어달라고 사정합니다.
(창26:28-29)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이삭의 주변 부족들은 자기들이 아무리 축복의 근원같은 우물을 메우거나 강탈해도, 이삭이 더욱 더 번성하고 왕성해지는 복을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분명히 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해 그 언약에 따라 아브라함의 자손된 사람들과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 언약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태중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야곱이 외삼촌이 사는 머나먼 하란으로 가는 길에 해가 져서 피곤한 몸을 누이고 돌을 베게 삼아 잠을 청했습니다. 잠에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 꿈은 이렇습니다.(창28:10-15)
사닥다리가 땅에서부터 하늘에까지 닿았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사닥다리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그 사닥다리 위에 서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야곱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그리고 야곱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의 계승자임을 분명히 하시며,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어디로 가든지 야곱을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로부터 20년 후, 야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거부가 되었고, 무려 12아들들을 낳게 되며, 또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개명(改名)해 주시어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12지파를 통해 아브라함에 약속하신대로 번성하고 창대하시게 하셨습니다.
(창 31:1)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창32: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이처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되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여기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데 있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장 행복한 성도 여러분이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행복지수를 높이려면
신 33:29 / 송기성 목사(정동제일교회)
‘오 해피 데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부르는 사람도 행복해 보이고, 듣는 사람들도 약속이라도 한 듯 기쁨으로 박수를 치며 호응하곤 합니다. 찬송가 285장 제목도 ‘Happy Day’입니다.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아멘!
최근에 국민의 삶의 질을 나타내는 ‘행복지수’(BLI:Better Life Index)에서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32위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보건사회연구’에 실린 한성대 이내찬 교수의 ‘OECD 국가 삶의 질 구조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은 10점 만점에 4.2점으로 꼴찌에서 세 번째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행복지수 1위 국가는 덴마크(8.09점)였고, 2위는 오스트레일리아(8.07점), 3위는 노르웨이(7.87점), 4위는 오스트리아(7.76점) 였습니다.
행복지수가 낮다면 행복지수를 높이려고 다양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경제적 안정, 정치적 안정, 사회적 안정, 건강상태, 주거환경, 자연환경, 고용율, 이혼율, 자살율, 범죄율 등등이 개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모든 것의 주체인 사람의 변화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화된 사람이 변화된 사회를 만들고,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1. 행복지수를 높이려면 신앙지수를 높여야 합니다.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서 저는 모세를 행복한 인생의 롤 모델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그의 임종을 맞이하기 전 마지막 축도를 통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모세의 축도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기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신앙의 간증이며 찬양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자신을 포함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행복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행복한’(아쉬레)이란 말은 ‘충만한 행복’, ‘완전한 행복’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그의 백성의 행복은 충만하고 완전한 행복으로서 그들이야 말로 ‘지극히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모세가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There is no one like you, a nation saved by the Lord.)라고 고백한 바와 같이 그들의 행복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신앙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지수를 높이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지수를 높여야 합니다. 신앙지수가 높은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행복지수도 높은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서방 신비주의의 아버지라 일컬음 받는 성 버나드(St. Bernard, 1091-1153)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그가 세운 수도원 원장으로서 깊은 명상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의 명상은 자기 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활동적이며 창의적인 관계를 맺게 하는 명상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연합된 생활은 반드시 창조적인 것이어야 된다고 주장한 그는 자신이 설교한 대로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62세로 세상을 떠나기 수일 전에 찬송시를 썼습니다. 그의 몸은 쇠약해져서 죽을 처지에 있었지만 그의 심령에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찬송가 85장이 바로 그의 기쁨, 그의 행복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주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로부터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아멘!
고린도후서 12:9의 말씀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실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아멘!
우환질고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성도 곧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우환질고 중에 더욱 온전해짐을 믿는 성도는 그의 신앙지수 만큼 행복지수도 높아지는 것을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2. 행복지수를 높이려면 봉사지수를 높여야 합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세 가지 행복을 말했습니다. 첫째, 할 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둘째, 사랑할 사람이 있으면 행복하다. 셋째, 무언가 앞을 내다 볼 수 있는 희망이 있으면 행복하다. 그리고 셋째 행복, 곧 희망을 찾은 사람은 첫째 행복인 할 일과 둘째 행복인 사랑할 사람도 반드시 찾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살아온 세월은 참으로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그는 사실 애굽 공주의 아들로서 부귀영화를 얼마든지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히11:24-25) 그것은 그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으며, 그가 해야 할 일과 사랑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그 험난한 세월을 살았음에도 그토록 지극히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앙지수도 높았지만 봉사지수도 높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광야 40년 동안의 봉사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돕는 방패’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신앙에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섬기는 봉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지수를 높이려면 하나님께 대한 신앙지수를 높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봉사지수도 늘여야 합니다. 봉사지수가 높은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체험과 더불어 행복지수도 높은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구두닦이 김정하(53, 성남샬롬교회)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부모가 이혼해 갓난아기 때부터 조부모의 손에서 자란 그는 삼척에서 무작정 상경, 17세부터 공장 근로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9년만에 고등학교 야간부를, 8년만에 방송통신대를 졸업했습니다. 교통사고와 감전, 폐결핵 등 7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예수님을 영접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서울장신대를 나온 목사가 되어 2006년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알코올중독자와 극빈층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그는 그들과 동화되며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폐지를 줍고 구두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NGO 컴패션을 통해 해외 어린이 8명 후원금으로 매달 40만원까지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2010 루게릭병에 걸려 말과 거동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눔과 섬김의 삶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내와 두 자녀까지 합세해 후원금을 마련했습니다. 그에게 구두를 맡겼던 손님들이 감동을 받아 김목사가 후원하던 아이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에는 지인들의 후원금 2500만원을 해외 아동들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탤런트 차인표씨는 최근 TV에 나와 김목사를 자기의 멘토로 칭하기도 했습니다. 국민추천포상 수상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은 김정하 목사, 그는 그의 자서전 제목을「지금 행복합니다」로 정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지금 행복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의 높은 행복지수는 바로 그의 신앙과 함께 봉사에서 비롯된 행복지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34-36,40의 말씀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아멘!
이기적인 인간관계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나눔과 섬김으로 봉사하는 성도는 그의 봉사지수 만큼 행복지수도 높아지는 것을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3. 행복지수를 높이려면 자족지수를 높여야 합니다.
“행복은 자족에 있다”(Happiness lies in contentment)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외부적인 조건과도 상관되어 있습니다만 자신의 마음 가짐과 태도에 더욱 직결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과 여건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스스로 족한 줄을 모르는 사람은 행복지수가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열악한 환경과 조건에 처해 있을지라도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지수가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의 비전과 사명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그 일념으로 광야 40년 세월을 견디어 왔습니다. 그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그와 그의 백성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며, 돕는 방패이실 뿐만 아니라 영광의 칼이십니다. 여기서 ‘영광의 칼’ 이란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영광의 칼이 되셔서 그와 그의 백성에게 승리를 주실 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고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그만 해도 족하니 이 일로 내게 다시 말하지 말라” (That's enough! Don't mention that again!, 신3:26) 라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모세에게 있어서 매우 불만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만 해도 족하니라’ 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제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것과 요단 저쪽의 땅 가나안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족하게 여겼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그와 그의 백성이 지극히 행복한 행복자라고 찬양하면서 그의 생을 마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사람들에 대한 봉사와 더불어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족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지수를 높이려면 신앙지수와 봉사지수를 높일 뿐만 아니라 자족지수도 높여야 합니다. 자족지수가 높은 사람은 삶의 어떤 형편에서든지 ‘그만 해도 족하다’ 하신 하나님의 말씀 대로 행복지수도 높은 삶을 찬송하게 될 줄 믿습니다.
덴마크의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1875)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구두 고치는 가난한 아버지와 남의 집 빨래를 하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11살 때 병사한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여서 매일 밤 술에 취해 돌아와 아들의 뺨을 때리곤 했습니다. 안데르센은 늦깍이 학생으로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였지만 그전에는 단 한 시간의 문학 수업도 받지 못한 초등학교 중퇴생이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으면서 어떻게 그리도 아름다운 동화를 쓸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불편한 환경 속에서도 나에게 베풀어진 축복을 붙들기로 했습니다. 비록 아버지가 무서운 때도 많았지만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고, 초라한 다락방에 누워 상상하기를 즐거워 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여전히 좋은 분이라고 믿었고, 가난한 집을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역경은 나의 축복이었습니다. 나는 가난했기에 「성냥팔이 소녀」를 쓸 수 있었고, 내가 못생겼다고 놀림 받았기에 「미운 오리 새끼」를 쓸 수 있었으니까요, 내가 살아온 인생사가 바로 내 작품에 대한 최상의 주석이 될 것입니다.”
70평생을 독신으로 산 안데르센, 그의 행복지수는 불편한 환경 속에서도 축복을 붙들기로 하며 자족할 줄 알았기에 높아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6-8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아멘!
자족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경건은 큰 이익이 되지 못하며 불평과 불만으로 불행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경건은 큰 이익이 되며, 그의 자족지수 만큼 행복지수도 높아지는 것을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미국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입소스(Ipsos)가 최근 한국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느냐? ”는 질문에 2%가 ‘매우 그렇다’, 17%가 ‘어느 정도 그렇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체의 81%가 현재의 삶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매경 이코노미가 창간 33주년을 맞아 「우리는 행복한가」에 대해 집중 취재 했습니다. 설문조사 결과 행복의 조건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화목한 가족관계’(29.9%), ‘긍정적인 마음가짐’(22.5%), ‘건강’(20.8%), ‘재산’(15%)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은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종교생활 등 믿음’에 대해선 4.4%, ‘외모에 대한 자신감’은 2.9%로 답했습니다. 그리고 “누구와 있을 때 가장 행복한가” 라는 질문에 ‘가족’이라 답한 사람이 단연 많았습니다.(55.8%) 반면에 가족관계 중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주는 대상을 묻는 질문에 ‘배우자’가 40.5%로 1위를 차지했고, 자녀는 23.8%로 2위로 나타났습니다. ‘행복과 종교’에 대한 결론은 종교생활에 충실할수록 행복지수도 높아진다고 했습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생활에 더 만족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다들 ‘그렇다’고 인식해 온 내용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지수와 봉사지수와 자족지수를 높임으로써 불만족스럽게 살아가는 81%의 사람이 되지 말고 현재의 생활에 ‘매우 만족하다’(2%)고 대답할 수 있는 지극히 행복한 행복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광야에서 체득한 행복
신 33:29 / 송기성 목사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인간 최고의 상태”라고 했습니다. 인간 최고의 상태인 행복에 대한 관심과 추구는 당연하고 바람직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행복의 근원이시며 행복의 목적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환경이 좋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행복이 환경과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상의 환경에서 최악의 불행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의 동산 에덴에서 타락하지 않았습니까. 반면에 최악의 환경에서 인간 최고의 상태인 행복을 체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바로 산 증인입니다.
모세는 그 인생을 마무리 짓는 유언에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Israel, how happy you are! 신33:29)라며 그 백성을 축복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언적인 축복은 사실 자기 자신의 간증적인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는 적어도 지난 40년 동안 광야에서 숱한 고난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을 많이 터뜨리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험난한 광야에서 행복을 체득하였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체득한 행복, 거기에는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인생의 지혜가 있고 신앙의 교훈도 있습니다.
1. 광야에서 체득한 행복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의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임박해 오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곤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의 죽음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의 행복을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하였습니다. 그가 그토록 행복해 한 최대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고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There is no one like you, a nation saved by the Lord.)라고 함과 같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수 없이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악을 범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적이 많았습니다. 모세가 그토록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모세만큼 절실하게 체험한 사람은 이스라엘 중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그저 덤덤하게 받아들였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이 인간의 공로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그 구원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감격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느낄 수 없는 것이란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모세는 그 험난한 광야에서나 죽음 앞에서도 행복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체득한 행복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의 행복입니다.
2016년 제11회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국무총리상을 받은 박관태(47) 의료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고려대 의대 입학 동기인 심재학씨와 ‟의사가 되면 함께 몽골에 가서 의료 봉사 활동을 하자”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1999년 11월 악성림프종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 교수는 ‛내 몫까지 해달라’는 친구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2001년 몽골로 떠났습니다. 산부인과 의사인 그의 아내도 흔쾌히 그의 뜻을 따랐습니다.
2003년 8월 그는 아버지와 짧은 시간을 보내고 다시 몽골로 돌아가려는데, ‛이게 마지막이겠구나!’ 싶어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3주 만인 8월 29일 아버지는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소천 소식을 듣고 비행기표를 알아보았지만,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외아들에 상주인 그가 이틀 동안이나 빈소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앉아 울면서 넋두리를 늘어놓았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네게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느냐? 네게 정말 믿음이 있다면,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뭘 그리 가슴 아파하느냐?”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하나님께로부터 독한(?)소리를 들은 그는 참 많은 생각을 했다며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내게 믿음은 있는가, 천국에 대한 확신은 있는가, 천국을 소망하는가…. 수 많은 질문에 스스로 답해 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흐뭇한 얼굴로 나를, 우리 모두를 지켜보실 것이다.” 아멘!
몽골 아가페기독병원 원장 박관태 선교사, 그는 ‟선교는 힘들거나 거창하거나 결연한 헌신 같은 것이 필요한 무거운 주제가 아닌 재미있고 행복하고 영화로운 한마디로 즐거운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박관태,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
기존 선교의 인식을 바꾸어 놓은 박관태 선교사의 선교 행복론, 그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과 즐겁게 동행하는 사역에서 실감되는 행복인줄 믿습니다.
시편128:1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을 갖고 하나님을 순종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그의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부지간의 복을 주시고, 자손의 복을 주시며, 장수의 복도 주신다고 했습니다. (시128:2-6)
톨스토이는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의 삶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에서 행복을 체득한 모세처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으로 불평불만의 불행자가 되지 말고 감사찬송의 행복자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광야에서 체득한 행복은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의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그 뜻한 바를 끝까지 이루지 못하면 실망하고 실패감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의 죽음을 앞에 두고 하나님의 축복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 하였습니다. 그가 그토록 행복해 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도움이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고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라고 함과 같이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수 없이 불평과 원망의 죄악을 범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배은망덕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대적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돕는 방패와 영광의 칼이시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적이 그들에게 복종하도록 대적의 높은 곳을 밟는 승리자가 되게 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품고 있었습니다. 모세, 그는 비록 그가 그토록 원하였던 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결코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있었기에 모세는 그 험난한 광야에서나 죽음 앞에서도 행복을 고백하며 그 백성을 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체득한 행복은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의 행복입니다.
던킨 도너츠의 창업자 윌리엄 로젠버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초등학교도 못나왔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하나님을 먼저 섬기며 살겠다며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한 주에 주급 20달러씩 벌어 부모님을 모시고 생활했던 때부터 꼬박꼬박 십일조를 드리고 철저히 주일성수를 했습니다. 30세에 트럭 한 대를 구입해 보스톤 외곽에서 노동자들에게 도너츠와 커피를 팔기 시작한 그는 1955년부터는 체인 사업까지 펼쳐 전 세계 도너츠의 대명사인 ‛던킨 도너츠’라는 상표를 개발했습니다. 그는 72세 생일 축하 자리에서 성공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가난하고 못 배웠습니다. 초등학교도 못 나왔고 그리 좋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늘 내 짐을 맡아주셨습니다. 내가 성공한 것은 내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한 것입니다. 나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은 내게 이런 복을 주셨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지식’보다는 ‛태도’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실로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멘!
기존 성공의 이해를 바꾸어 놓은 윌리엄 로젠버그의 성공 행복론, 그것은 곧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겸손과 감사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서 실현되는 행복인 줄 믿습니다.
시편121:1-2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도움을 대망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실족하지 않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일거수 일투족을 감찰하시고 보호해 주셔서 모든 위험과 환난을 면하게 해 주시며 그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주신다고 했습니다. (시121:3-8)
빅토르 위고는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에서 행복을 체득한 모세처럼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로 불평불만의 불행자가 되지 말고 감사찬송의 행복자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유종의 미,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 (독일격언)고 했습니다. 모세의 일생은 참으로 파란만장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임종시 그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던 이스라엘을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광야에서 체득한 행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체득한 행복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의 행복이며,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의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과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심으로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불평불만의 불행자가 되지 말고 감사찬송의 행복자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 나라 우리나라
신 33:29 / 이정익 목사
6,25 54돌 맞았습니다. 벌써 54년이나 되었습니다. 6,25는 이미 54년이나 지났지만 이 6,25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근래에 와서 다시 염려스런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나라를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보수층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나라의 장래에 대해서 걱정하면 분명 보수주의자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나라의 현재와 미래가 참 염려됩니다. 지금 염려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심각한 세대간의 갈등”
한 나라를 위협하고 병들게 하는 요인 중에 가장 큰 것은 민족간의 갈등이고 분열입니다. 갈등과 분열은 그 사회나 국가나 단체를 무력화 시키고 약화시킵니다. 그래서 이 갈등이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부부가 갈등하면 가정전체가 흔들립니다. 교회가 갈등하면 교회전체가 흔들립니다. 나라가 흔들리면 경제가, 정치가, 안정이 흔들리고 적이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나서서 보수, 진보로 갈등을 조장하고 있으니 이 나라꼴이 어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나라가 흔들리고 경제가 흔들리고 국제사회에서 나라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참으로 걱정입니다.
역사를 보면 우리민족은 이 갈등과 분열과 파벌이 난무했습니다. 그래서 임금들이 별 정책을 다 써 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비빔밥의 역사를 아십니까. 이 비빔밥이 이 갈등 해소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제사지내고 올렸던 음식을 한데 비벼 자손들에게 주워 먹게 했습니다. 조상과 일심동체를 이루게 해서 한마음으로 살게 하기 위한 뜻에서 입니다. 그러던 것이 영조 때는 사색당파가 너무 강해지니까 4색의 음식 즉 빨간 육회, 파란 미나리, 검은 바다 김, 노란 녹두묵을 반드시 넣게 해서 밥을 비벼 먹게 했습니다. 이 음식을 사색음식이라 했고 또 이 음식을 탕평반(蕩平飯)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갈등과 분열, 파벌, 사색당파, 지연, 학연, 이 뿌리가 아주 깊습니다. 이 갈등은 이 지연 학연을 넘어서 이제는 세대간의 갈등으로 증폭되고 있습니다. 386세대와 구세대가 갈등하고 보수와 진보가 갈등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적입니다.
북한은 지금도 오로지 남한을 갈등하게 하고 분열시켜서 약화시키는 것이 최대의 전술이고 목적입니다. 북한은 지금 그 목적을 아주 잘 성공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 남한은 북한에 대해서 장밋빛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미국보다 북한에 더 친근감을 느낀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북한을 욕하면 보수, 구세대, 수구세력이라고 몰아붙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군인들이 누가 적인가 하고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일의 적이 미국이고 일본입니다.
이것을 짝사랑이라고 합니다. 북한은 6,25때 가지고 있던 정책이나 목표 그리고 사상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만 통일이 다된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그래서 적 개념도 스스로 삭제해 버리고 북한 일변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감성주의가 문제입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무서운 사상, 목적은 잊어버리고 형제애와 동포애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가지고 있는 핵은 통일되면 우리 것이 되는데 미국이 왜 저 난리냐고 말합니다. 남한은 이 장밋빛 감상주의가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북한의 김정일이 웃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발행된 타임지의 커버스토리에 배 내놓고 웃고 있는 김정일의 사진이 실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웃는 사람은 김정일뿐이라는 해설을 붙였습니다. 김정일이 지금 웃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을 한번 불러 회담에 응해주고 나서 김정일은 몇 십 년 동안 수만 명의 간첩을 보내도 이루지 못할 일을 일거에 해결해 냈습니다. 그러니 웃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우선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갔다 온 후에 간첩 잡았다는 뉴스가 없습니다. 그리고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무서웠던 인식을 일신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김일성, 김정일을 욕하거나 그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이제는 북한을 더 이상 적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미국이 최대의 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정도면 북한이 얻을 것 다 얻은 것 아닙니까. 그리고 결국 북한의 소원대로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남한은 지금 심각한 갈등에 빠져있습니다. 정부 내에서는 더 이상 북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면 문제가 됩니다. 사회에서도 북한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면 별놈의 수구 보수주의자라고 돌려놓습니다. 대학의 교수들도 학생들이 무서워서 속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보수파라는 낙인이 찍힐까봐 말을 안 합니다. 원로들은 수구세력이라고 인터넷에서 비판받을까 봐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김정일이 지금 웃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 차려야
미국은 버려서는 안 되는 나라입니다. 그들이 좋아서가 아니고 우리들에게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우리가 가장 어려울 때 우리를 도와준 나라입니다. 6,25때 미군이 이 땅을 지키느라 30만 명이 와서 그중 36,940명이 죽었고 3,734명이 실종되어 모두 4만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들을 그렇게 쉽게 잊고 배반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쉽게 잊고 배반하면 국제사회로부터 한국이 버림을 받습니다.
또 우리는 미국에 경제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나라입니다. 우리 GNP가 만 불 넘고 이제는 살만하다고 거드름을 피우지만 그것 가지고 거드름 떨 때가 아닙니다. 좀 살게 되었다고 사람을 버리고 옛적 일을 잊으면 그 민족은 미래가 없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보십시오. 일본은 미국을 얼마나 잘 활용하며 이득을 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나라에서 미군이 철수하니까 일본은 재빨리 기지를 내 주고 미군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거기다 미국이 한창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일본은 주저하지 않고 이라크에 병력을 파병했습니다. 미국이 곤경에 처했을 때 힘이 되어주고 신뢰를 보냈습니다. 일본인들이 미군이 좋아서가 아니고 이익 때문입니다. 이점이 국제적 상황을 보는 일본의 시야와 우리의 시야의 차이입니다. 일본은 넓고 멀리 보고 우리는 당장을 봅니다.
일본은 경제적으로 우리보다 월등하지만 아직도 미국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대해서 아쉬움이 많지만 그래도 미국의 강력한 동맹자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이 일본을 대접해 주는 것입니다. 비자 면제를 해주고 입국 때 지문도 찍지 않습니다. 일본인이 미국에 살겠다고 하면 그 자리서 영주권을 내 줍니다.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나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면 또 돌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동포가 미국사회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무비자 협정을 원하지만 미국이 무슨 감동을 받아 그 주장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우리나라 정치가 이렇게 낙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겨우 이라크에 파병한다고 하는데 그 시기도 질질 끌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파병지도 가나마나한 곳을 택해서 갑니다. 그곳은 포탄 한방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 가서 무슨 재건을 한다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기왕 파병하면서도 미국에 공감도 주지 못하고 실익도 없고 아랍사회나 이라크에 별로 하는 일도 없고 비용은 비용대로 지출하고 명분도 잃고 아랍세계에 미움만 당하고 말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가 하고 있는 정치의 현실입니다.
차라리 이런 때 기왕 파병하려면 이라크 내 변두리 말고 마지못해 파병하지 말고 아주 명분 있게 이라크 내에서 가장 어려운 지역으로 파병해서 몇 명 희생을 각오하고 용맹성을 떨치며 진압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면 미국도, 이라크도, 아랍세계도, 이북도 우리민족을 무섭게 볼 것입니다. 아랍세계에는 중심 있는 나라로 인식되고 북한에는 무언으로 까불지 말라는 메시지도 보내는 효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뭡니까. 파병은 하면서도 적기도 놓치고 명분도 잃고 돈은 돈대로 들고 미군은 철수하고 이것이 오늘 우리나라가 처신하는 정치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미국이 우리나라에 대해서 참 생각이 많을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미군을 이 땅에서 빼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이런 상황에 빠져있는데도 누구하나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교수들도, 지식인들도, 원로들도 봉변당할 까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습니다.
이런 때 용기 있게 입을 열어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이 육군사관학교 교장(김충배 장군)입니다. 이 시대를 보다가 하도 답답하고 비참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들이여! 여러분들은 5,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지난날 5,60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5.16혁명 직후 미군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박정희 소장은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갔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대통령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겨우 서독으로부터 1억 4천만 마르크를 빌리는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져 처음 그들에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굳어버린 사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하루 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속에서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서독 방송과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간호사와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몇 년 뒤 서독 뤼프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대통령이 방문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었는데 서독정부는 국빈용 항공기를 보내주어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은 뤼프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모두 강단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프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 땅속 천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린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합시다.” 목멘 소리로 계속 일하자는 말만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 땅 지하에서 고생하는 광부들, 굳어버린 시체를 닦으며 일하는 어린 간호사들, 고국에서 배곯고 있는 가난한 내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 소리 내어 눈물을 흘리자 광부들과 간호사들 모두 울면서 육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가 붙잡고 늘어지며 울었다. 광부들은 뤼프케 대통령 앞에 큰 절을 하며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 대통령을 도와주세요.“를 수 없이 반복했다. 그 모습에 뤼프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 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뤼프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건네주며 ”우리가 도와주겠습니다. 서독 국민들이 도와주겠습니다.”라고 격려해 주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할 때 박 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발려주세요. 여러분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줌 빌려주세요.”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한 나라 수는l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일 때 한국은 76불이었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l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부터 무려 4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그때 전국에 쥐잡기 운동이 벌어졌다. 쥐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기 위해서였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해서 1965년 수출1억 달러를 달성하니 세계가 놀랐다.”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해?” 하며 ‘한강의 기적’ 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 세력으로 폄하하는 그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윌남전 세대, 그리고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렸던 우리 국군장병들, 작열하는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5,6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 평화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하할 자격이 있는가. 그대들이 그때 땀 흘리며 일한 오늘의 5,60대들을 보수 수구세력으로 폄하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라. 보다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소득 4만 불대의 고지를 달성 때까지 우리들 신, 구세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해 주면서 함께 가보자.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에 더욱 밝은 빛이 비추어 지리니!!.
어떤 생각 어떤 느낌이 듭니까.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우리의 나라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그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사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해서 그렇게 염려하지 않습니다. 지난날 역사를 보면 지금 보다 더 어렵고 위태로울 때도 하나님은 이 나라를 지켜주셨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한 우리나라는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기도하고 나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신 33:29 / 이수영 목사
시장통 작은 분식점에서 찐빵과 만두를 만들어 파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오후, 아침부터 꾸물꾸물하던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나기였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그치기는커녕 빗발이 점점 더 굵어지자 어머니는 서둘러 가게를 정리한 뒤 큰길로 나와 우산 두 개를 샀습니다. 그 길로 딸이 다니는 미술학원 앞으로 달려간 어머니는 학원 문을 열려다 말고 깜짝 놀라며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습니다. 작업복에 낡은 슬리퍼, 앞치마엔 밀가루 반죽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감수성 예민한 여고생 딸이 상처를 입을까 걱정된 어머니는 건물 아래층에서 학원이 파하기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한참을 서성대던 어머니가 문득 3층 학원 창가를 올려다봤을 때, 마침 아래쪽의 어머니를 내려다보고 있던 딸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어머니는 반갑게 손짓을 했지만 딸은 못 본 척 얼른 몸을 숨겼다가 다시 삐죽 고개를 내밀고, 숨겼다가 얼굴을 내밀곤 할 뿐 초라한 엄마가 기다리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슬픔에 잠긴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그냥 돌아섰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어머니는 딸의 미술학원에서 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한다는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딸이 부끄러워할 것만 같아 한나절을 망설이던 어머니는 저녁에야 이웃집에 잠시 가게를 맡긴 뒤 부랴부랴 딸의 미술학원으로 갔습니다. "끝나 버렸으면 어쩌지......" 다행히 전시장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벽에 가득 걸린 그림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어머니는 한 그림 앞에서 그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 비, 우산, 밀가루 반죽이 허옇게 묻은 앞치마, 그리고 낡은 신발. 그림 속엔 어머니가 학원 앞에서 딸을 기다리던 날의 초라한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습니다. 그날 딸은 창문 뒤에 숨어서 우산을 들고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가슴에 담았던 것입니다. 어느새 어머니 곁으로 다가온 딸이 곁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모녀는 그 그림을 오래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모습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서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 그 마음이 전해져서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세상을 사는 것이 험하고 지쳐가다가도 이러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힘을 낼 수 있게 해줍니다. 살아가는 이유를 다시금 새기며 삶의 가치를 새롭게 해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으로 우리를 도우시며 바라보고 계신 분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시고 그 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시라면 우리들은 험한 세상에서도 담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를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스럽게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 엄마의 눈빛을 그려보십시오.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감동의 눈물을 떨구는 엄마의 모습을... 아기는 그냥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잠잠히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엄마와 눈을 맞추며 세상 모든 것을 갖고 있는 평안을 누립니다. 그리고, 엄마는 아기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누가 그들에게 가르쳐 준 것도 아닙니다. 엄마와 아기는 그렇게 마음을 나눠야 된다고 강요하고 연습을 시켜준 것도 아닙니다. 그냥 좋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그 마음 그 감동으로 나를 보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아기는 그 눈빛만으로 세상에 걱정 근심 두려움 없이 그 품에서 잠이 듭니다.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뿌듯한 감동일 것입니다. 또한 아무도 돕는 이 없는 것 같고 홀로 있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묵묵히 그 자리에서 사랑을 베풀고 있었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었을 때의 감동은 어떨까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 바로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과연 신명기 말씀의 배경이 되는 당시 이스라엘은 과연 행복한 환경이었을까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은 길르앗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기에는 메마르고 그리 넓지 않은 땅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비하면 앗수르나 바벨론 혹은 애굽 사람들이 살던 땅은 광활한 평야에다가 하천이 잘 발달한 관계로 치수사업만 잘해 주면 비가 장기간 내리지 않아도 잘 버틸 수 있는 좋은 자연 조건을 갖춘 비옥하며 풍요로운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땅과 주변 민족들과 비교하면 그리 복을 받았다고 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가정을 해봅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광야를 걸으면서도 우리에게 약속하신 곳은 어떨 곳일까? 그곳에 들어가면 풍족하게 채워질 것이다 하며 잔뜩 기대하면서 가나안에 들어갔는데 주변에 사는 사람들과 비교해보니 참으로 보잘 것 없어 보였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할만하지 않았겠습니까? 게다가 신명기 33장 6절에서 알 수 있듯이 야곱의 맏아들인 르우벤 지파는 사라질 위기에 까지 놓여 있었습니다. 33장6절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가나안에 들어와서 이스라엘이 처한 현실입니다. 한지파가 사라질 정도로 녹녹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복인가 싶었을 것 같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곳 그들이 기대하던 곳과 다른 것 같고 주변 민족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한숨 나오는 현실이었습니다. 이 정도가 복입니까? 이정도 갖고 있으면서 행복자라구요?
가나안 이라는 곳에 도달하여 보니 눈에 보이는 것은 황량하고 척박한 땅과 낯선 사람들 그리고 자신들을 경계하는 이들에게 둘러 싸여 있습니다. 척박한 곳에 이스라엘만 덩그러니 놓여진 것 같습니다. 이제는 자신들이 수고해서 결실을 먹어야 하고 원래 거주하던 이들을 물리치고 자리를 잡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합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를 돕는 방패이다. 내가 너의 영광의 칼이다. 그러므로 너의 모든 대적이 너에게 복종하고 너는 그들의 높은 곳을 밟을 것이다. 광야를 지나면서 이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시고 그로 인하여 구원을 누리는 행복자로 세워가신 것입니다. 광야를 걸으며 외롭고 힘든 여정이어야 했는데 지나고 보니 하나님께서 의식주를 해결해 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셨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몰랐는데 나의 힘으로 극복하고 이겨내어 여기까지 온 줄 알았는데 주님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몰래 엄마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던 딸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에 은혜로 채워주심을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큰 산과 같은 삶의 역경도 거뜬히 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당당하게 주 안에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회에서 지위가 높고 많은 사람들이 내 앞에서 머리를 숙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뤄가게 하셨기에 더 겸손히 그들을 섬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은혜가 고마워 낮아지고 엎드렸는데 승리케 하시고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척박하고 간간한 땅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아 하나님의 은혜에서 배제된 것 같았는데 주님은 나를 보고 계셨습니다. 하루하루 내가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 교만한데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으로 기쁨에 겨워 하셨습니다. 내 죄는 밉지만 나를 사랑하셔서 끝까지 기대하시며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시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는 삶입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공평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으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르는 신실한 백성들만이 누리는 바로 그것으로 인해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가진 것의 많고 적음과 세상에서 높고 낮음으로 자신의 삶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는 그래서 주안에서 복된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백성의 복인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고 있지만 과연 삶 속에서 얼마나 복된 인생을 이뤄가고 있습니까?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은 세상의 기준으로 이해하면 도저히 누릴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그 은혜를 경험한 이들에게는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얻으려고 하는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직역하면 이스라엘이여 복이 네게 있도다입니다. 여기서 복은 물질적인 복과는 달리 행복, 복 그 자체를 뜻합니다. 즉 복의 근원되시는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기에 행복자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돌아보니 사랑스런 눈으로 나를 보고 계신 분이 계셨습니다. 나 혼자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나의 아픔과 곤란한 마음을 더 깊이 공감하시고 그 짐을 지고 계셨습니다. 주변사람들과 자꾸 비교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참으로 초라한 것 같은데 그것을 이겨보려고 하고 숨겨보려고 하는데 그게 맘먹은 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보다 좀 많이 갖고 있고 잘 풀려가는 것 같아지면서 점점 교만해 져 가는 듯합니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도 나의 중심을 살펴보면 교만해져 가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위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분이 계셨습니다. 아기를 바라보며 사랑에 겨워 눈가가 촉촉해지며 아기의 한번 배냇짓에 모든 피로와 슬픔을 날려 버릴 수 있는 마음과 눈빛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나를 지켜주고 계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느 병원장 겪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이른 아침 유난히 바쁜 날이었습니다. 어느 병원에 원장에게 80대의 노신사가 엄지손가락의 상처를 꿰맸던 실밥을 제거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9시에 약속이 있어서 매우 바쁘다고 하며 병원장을 다그칩니다. 병원장은 노신사의 실밥만 제거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외에 몇 가지를 더 검사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몇가지 검사를 먼저 하고 의자에 앉으시라고 권했습니다. 아직 다른 의사들이 출근하기 전이어서 그를 돌보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시계를 연신 들여다보며 초조해 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본인이 담당하는 환자는 아니지만 직접 돌봐 드리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다행히 노신사의 상처는 잘 아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의사를 불러, `노신사의 봉합사를 제거하고 드레싱을 갈아 드려야 하니 관련 장비와 소모품 일체를 챙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노신사의 상처를 치료하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렇게 서두르시는 걸 보니, 혹시 다른 병원에 진료 예약이 되어 있으신가 보죠?" 라고 물으니, 노신사는 "요양원에 수용되어 있는 아내와 아침 식사를 해야 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부인의 건강상태를 물으니, 노신사는 "아내는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부인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으며, "어르신이 약속 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시면, 부인께서 언짢아하시나 보죠?"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노신사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아뇨, 아내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지 5년이나 됐는걸요." 나는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부인이 선생님을 알아보시지 못하는데도 매일 아침마다 요양원에 가신단 말입니까?" 노신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녀는 나를 몰라보지만, 난 아직 그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노신사가 치료를 받고 병원을 떠난 뒤, 병원장은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아야 했습니다. 병원장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내 인생을 걸고 찾아 왔던 사랑의 모델을 드디어 발견했다는 기쁨에, 팔뚝에서는 소름마저 돋았다.
비록 남편이 자신을 알아주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느끼는지 모르고 또한 전혀 반응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 어르신은 그의 사랑을 늘 줄 수 있는 것으로도 행복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그 사랑에 반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에서 멀리 떠나 전혀 상관없는 듯 살아가는 것 같아 보여도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고 계시는 그 사실로 행복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랑을 알고 믿으며 그에 합당하게 반응하고 있다면 얼마나 더 복되고 행복해 하실까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그 가운데 그 마음을 나누고 함께 할 수 있는 그 사람은 행복자입니다. 매일매일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감사하고 계십니까?
사순절을 보내며 과연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로 인해 영원토록 즐거워 하실 수 있으십니까? 멀찍이서 우리를 보시며 흐믓해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우리들 참으로 멋진 그림 아닙니까? 너무 멀리 가버렸던 것 같아 머뭇거리고 있었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신도 신지 않고 달려와서 맞아주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방패가 되어 도우시고 영광의 칼이 되셔서 대적을 물리치시기 전에도 우리는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백성이라 행복자입니다. 일마다 때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외면하고 계시지 않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도 예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아침에 아들에게 입혀주려고 열심히 뜨개질을 하고 있는 어머니는 밤을 꼬박 지새우면서도 피곤한 줄 모릅니다. 이미 엄마의 마음에는 예쁘게 입고 행복해 하는 아들의 모습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은혜와 사랑으로 행복자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더 나은 삶으로 도전하게 하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 세상의 기준으로 설명할 수 있는 행복과는 차원이 다른 그것을 우리들이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뭔가 결심을 하고 극기하듯 금하며 고난에 동참하고 있으십니까? 그러면서도 이 고난에 동참하면서 하나님께서 풀리지 않는 그것을 풀어주시고 이뤄주실거라는 기대로 동참하고 있습니까? 혹은 아무 생각없이 반복되는 절기로 지나치고 계십니까?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에 무감각해져가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며 행복해 하십니다.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넉넉히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넘어진 것 같아도 아주 엎드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감격케 하고 이기게 하십니다. 주변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그리 좋은 형편도 아니고 그리 자랑할만한 신앙이 아닌 것 같은데 주를 바라보니 세상에 부딪쳐 볼만 합니다. 많은 이들이 나를 존경하고 따르고 많은 것을 가졌는데 나를 도우시는 방패되시고 칼이 되신 주께서 베푸신 것이라 겸손하게 감사와 영광을 돌릴 뿐인 것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다시금 새겨보니 내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더욱 겸손하게 더 많은 이들과 더불어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뭔가 더 나아져야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할 것 같고 더 넓고 좋은 곳에 살고 더 높은 무엇인가를 얻어야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 것은 우리의 삶을 좀더 편하게 해주고 성취감을 얻게 해줄 수 있지만 진정한 행복은 나게에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있었습니다. 비록 척박하고 황량한 곳 같고 열매도 없고 외양간에 소도 없지만 여호와로 인하여 행복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이시고 그 사랑이 나를 숨쉬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보다 열정을 다하여 의미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의 구원의 은총을 다시금 새기고 감격해 하여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삶을 건설해 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신 33:28-29 / 김용국 목사
여러분! 진정한 행복이 뭘까요? 행복하십니까?
영국의 방랑시인 데이비스가 쓴 이런 내용의 시가 있습니다. "인생은 어부 / 시간은 강물 / 하지만 인간이 그곳에서 낚는 것은 / 오직 한줌의 연기뿐..."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어부가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 속에서 행복을 낚아보려고 했지만 결국 낚게 된 것은 허무와 죽음뿐이라고 하는 절망적인 고백입니다.
사실 인생은 끊임없이 행복을 찾으려고 애를 쓰지만 마지막에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1:14에 보면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또 12:8에 보면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시인 칼 부츠의 "산 너머 저쪽" 이라는 시도 있습니다.
"산 너머 저쪽 하늘 먼 곳에 / 행복이 있다고 사람들이 말하기에
난 벗과 더불어 찾아갔지만 / 눈물만 흘리고 돌아 왔노라."
어떤 사람들은 물질에 행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벤자민 플랭크린(B.Franklin)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돈은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고, 앞으로도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또 돈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 올 줄 알지만 어떤 행복의 요소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또 록펠러(J. D. Rockefeller)는 말하기를 “가장 가난한 사람은 돈 밖에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것이 축복이다. 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물질의 부요함이 축복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어느 가정이 여름에 바닷가에 가서 재미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아이들에게 계속 “얘들아, 깊은 데 들어가지 마라.” 이렇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심리가 좀 더 멀리 좀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물에 빠지게 됩니까? 얕은데서 놀면 괜찮은데 좀 더 좀 더 하다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물가에 데리고 간 부모들의 마음은 늘 불안합니다. 그리고 항상 하는 소리가 "깊은 데로 가지 마라... 조심해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것을 잔소리로 생각하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가 “얘들아 더 들어가지 마라. 위험해.”라고... 자꾸 주의를 주니까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아들이 하는 말이 “그러면 아빠는 깊은 데 들어가도 야단을 왜 안치는 거예요?” 라고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뭐라고 대답해야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엄마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아빠는 생명보험에 들었잖니.”
물론 누가 지어낸 이야기이겠지만 아내보다 남편보다 자식보다 물질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면 그 가정을 어떻게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명예에 행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출세하려고 애를 씁니다. / 어떤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행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얼굴에 칠하고 바르고 가꾸는 일에 많은 시간들을 투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학문에 행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훌륭한 학자가 되기 위해서 평생 책과 씨름을 합니다. / 어떤 사람은 삶을 즐기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취미생활에 열중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어떤 곳에도 진정한 행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잠깐 동안의 행복에 도취되어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거기에 속아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인간 최고의 상태’라고 정의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위대한 철학자가 말했다는 것뿐이지, 전혀 특별한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최고의 상태가 행복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고민은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행복이 뭔지는 알지만 그런데도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고민이고, 그것이 인생의 괴로움 아니겠습니까?
가끔 저희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은 행복하니?" 특히 제가 꾸중했을 때 혹시라도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까봐 물어보면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이 행복하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저는 또 묻습니다. ‘내가 이렇게 야단을 치고 혼을 내고 잔소리를 하는데 뭐가 행복해?’라고 물으면 아빠가 그렇게 하는 이유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인 줄 알아요. 라고 대답합니다. 그럴 때 마음에 안심이 되고 오히려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겠습니까?
가장 행복한 사람도 자신이고 가장 불행한 사람도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살아가면서 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순간 그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요, 나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행복과 불행은 전적으로 내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행복하십니까?
오늘 본문 29절에 보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하는 말씀이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권리가 있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명분이 뭐였습니까? '유럽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칼 막스는 행복을 추구한다고 공산주의를 내세웠지만 공산주의가 인류의 행복을 책임졌습니까? 1세기도 못가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행복이 뭘까요? 행복에 대해서 국어사전을 찾아보니까 '운수대통'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운수대통하면 무조건 행복한 것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내용을 찾아보니까 '삶의 보람과 만족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대로 괜찮은 내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참된 행복의 정의는 오늘 말씀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흔히 지식론자들은 불행의 이유를 무지함에서 찾고 있습니다. 무식해서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조금 모순이 있습니다. 무식해서 불행하면 유식한 자들은 행복해야 되는데 똑똑해도 불행한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유식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사회학자들은 불행을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환경이 좋아지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많이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아픈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게 편리해졌다고는 말할 수 있어도 우리가 과거보다 더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각종 범죄들을 보십시오. 이혼율과 자살율을 보십시오. 왜 사람들이 이혼을 하고 자살을 합니까?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심리학자들은 사람의 인체 속에 불행이라는 유전인자를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다 불행해야 되는데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볼 때에 '아마 저 사람은 틀림없이 불행할거야!'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헬렌켈러 여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눈으로 볼 수도 귀로 들을 수도 입으로 말할 수도 없는 참으로 인간적으로 보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실제로 불행했습니까? 우리 같으면 불행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헬렌켈러는 3개의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와 여행을 하면서 행복하다는 말을 곧잘 했다고 합니다.
또 크로스비 여사를 보십시오. 우리가 부르고 있는 찬송가에도 그녀가 작사한 곡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려 8000여 곡을 썼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맹인이었습니다. 주사를 잘 못 맞았는데 그로 인해 맹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얼마나 화가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한 번은 기자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그 돌팔이 의사를 만나면 그에게 무어라고 말하고 싶습니까?' 그러자 크로스비 여사는 '감사하다고 말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불행할 것 같던 사람이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심리학자나 정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불행론도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 인간이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마음이 얼마나 불안합니까? 마음이 불안하면 절대로 행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이 무서워서 동산에 숨지 않았습니까?
아담 이후로 사람들은 죄로 인해 이런 불행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죄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불행해진 인간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는 슬픈 마음을 달래면서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해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불평으로 말미암아 반석에서 물을 내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한 일입니까? '나는 이제 너희들 때문에 가나안 땅에도 못 들어가고 여기서 죽게 되었다. 너무나 원통하고 분하다. 나는 모르겠다. 내가 죽고 나면 너희들 일이니 너희들이 다 알아서 해라.'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모세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사람"으로 불리워진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꿈꾸고 소망하는 것이 "행복" 아니겠습니까?
창세기 30장에 보면 야곱의 아내 레아가 아셀을 낳은 후에 고백하기를 "나는 행복하다."라고 했습니다. 야곱의 가정은 두 아내 레아와 라헬 때문에 평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야곱이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지만, 라헬은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덜 사랑받는 레아에게는 하나님께서 네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참으로 공평하시다. 하는 생각이 들어지지 않습니까? 이것을 질투하게 된 라헬이 여종 빌하를 통해서 단과 납달리를 낳았습니다. 이에 질세라 레아도 여종 실바를 통해서 갓과 아셀을 낳은 후에 "나는 기쁘고 행복하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참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무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인간의 노력과 경쟁에서 이긴 다음에 찾아온 행복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행복한" 하는 말은 [에쉐르]인데 "복이 있다, 복되다, 얼마나 행복한지!"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편 1편에도 보면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복 있는]이라는 단어가 바로 행복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편의 ‘복 있는 사람’은 곧 오늘 본문의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10:13절 말씀에도 보면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토브]라고 하는데 "선한, 좋은, 아름다운, 기쁜, 즐거운, 평안한, 형통한"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행복"은 선한 것이요, 좋은 것이요, 아름다운 것이요, 기쁜 것이요, 즐거운 것이요, 평안한 것이요, 형통한 것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또 창세기 1:4절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고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좋았더라’ 하는 단어도 역시 [행복]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주목해야 할 중요한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의 행복은 내가 창조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될 때에,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행복해하실 때에 비로소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이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시면 그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내 자신이 행복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ㅣ 자신이 행복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행복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29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확실하게 다가오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바로 행복한 성도들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함한 우리를 가리켜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까?
첫 번째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은 백성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복한 사람인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잘 먹고 잘 살아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똑똑하고 능력이 많아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강대국이라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은 백성이기 때문에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한 때 세계를 제패했던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는 많이 듣고 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영웅들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행복한 사람들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구원이 뭔지를 알고 싶어서 성경을 한 마디로 요약해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 라는 진리의 말씀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후에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큰 충격에 빠져서 고뇌했다고 합니다. 그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한 신하가 "폐하, 폐하의 생애 중에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습니까?"라고 묻자 나폴레옹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한 참 후에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고 첫 성만찬에 참석했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었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나폴레옹의 고백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손에 쥐어도 거기에 참된 행복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된 행복은 나하고 예수님이 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시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엄청난 자격을 가졌는데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솔로몬 왕이 전무후무한 지혜를 가졌기 때문에, 부귀영화를 누렸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솔로몬의 모든 영광은 들에 핀 한송이 백합화보다도 못하다."라고 했습니다.(마 6:28-29)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행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로마서 4장 말씀에 보면 일한 것이 없어도, 내 공로나 노력이 없어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참된 "행복"이 뭔지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에, 포도나무에,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곡식이 없고, 외양간에 가축이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라고 하면서 "인생의 행복"을 노래했습니다(합3:17-18).
여러분!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 비록 힘들고, 고달프고, 괴로울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이 행복한 사람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도우심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게 되는 행복이 뭐라고 했습니까? 29절 하반절 말씀에 나옵니다.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방패시요 영광의 칼이시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절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독불장군은 없다는 뜻입니다. 자녀는 반드시 부모님의 격려가 필요하고, 남편은 아내의 내조가 필요하고, 아내는 남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 것도 이렇게 힘이 되고 좋은데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는 행복에 대해서 '하나님이 나를 돕는 방패가 되어주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전지전능하시고, 세세토록 영원무궁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든든하고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사람의 도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은 끝이 없습니다. 무궁무진합니다. 잘 도와주다가도 마음이 상하면 금방 돌아서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끝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라고 말씀합니다. 잠 25:19에 보면 “사람을 의뢰하는 것은 위골된 발 같고, 부러진 이 같고(잠25:19), 거미줄 같다(욥8:14)라고 했습니다. 불편하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또 히브리서에도 보면 뭐라고 말씀합니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라."(히4:16)고 했습니다. 또 시편 기자 역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 우편에서 나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그분의 능력 안에서 내가 안전하고, 평안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분명하게 해야 될 신앙의 자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면 나는 항상 행복한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처럼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터넷에 보니까 행복한 사람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살펴보면
① 누가 나에게 섭섭하게 해도 그 동안 그가 나에게 베풀어 주었던 고마움을 생각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했습니다.
② 밥을 먹다가 돌이 씹혀도 돌보다는 밥이 더 많다고 하면서 껄껄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했습니다.
③ 밥이 타거나 질어서 아내가 미안해 할 때 누룽지도 먹고 죽도 먹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했습니다.
④ 또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않는가를 미리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했습니다.
⑤ 좋았던 추억을 되살리고 앞날을 희망차게 바라보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했습니다.
⑥ 받을 것은 금방 잊어버리고 줄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행복은 돈으로는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만 바꾸면 그 순간부터 행복한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금고기와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어느 바닷가 오두막 집에 노부부가 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고기를 잡아서 할머니와 단 둘이서 가난하게 살아가는데, 어느 날 할아버지의 그물에 용왕의 왕자라고 하는 금물고기가 잡혔습니다. 할아버지는 살려달라고 눈물을 흘리는 금물고기가 불쌍해서 그냥 놓아줍니다. 집에 돌아와서 그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들려주자 할머니는 "왜 그냥 살려줬나요. 깨진 물동이라도 새 걸로 바꿔달라고 하지 않고." 하면서 할아버지를 나무랬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다시 바다에 나가 금물고기에게 부탁해서 새 물동이를 얻고, 다시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새 집을 얻고, 하인들과 온갖 살림살이, 금은보화를 얻었습니다.
그런데도 욕심이 많은 할머니는 그것도 모자라서 나중에는 자기가 여왕이 되고 금물고기도 자기 신하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는 수없이 할아버지가 그 말을 금물고기에게 전했더니 금물고기가 아무 말 없이 물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집에 돌아와서 보니 으리으리하던 기와집도 하인들도 다 사라져버리고 원래의 초라한 오두막 집에 할머니가 불쌍하게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끝없는 욕심으로 인해 결국 나에게 주어진 행복도 누리지 못하게 됨을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어쩌면 이 할머니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나에게 주어져 있는 행복을 깨닫지 못하고 할머니처럼 또 다른 행복을 찾아 헤매이고 있지는 않는지.... 철학자「칼 힐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 최대의 행복은 하나님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시편기자도 똑같은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다."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축복해주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내가 행복한 성도임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행복해질 때 내가 사는 가정이, 내가 일하는 직장이, 내가 섬기는 교회가 행복해집니다. 더 나아가 나로 인해 세상이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행복하게 살아야지 구질구질하게 불행하게 살면 세상이 뭘 보고 우리를 부러워하겠습니까?
아무리 건강하고 가진 것이 많아도 마음이 불행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특별하게 바라볼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건강하지 못해도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날마다 웃고 행복해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런 우리를 궁금해하고 부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나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나에게 이미 주어진 "구원"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나의 방패와 영광의 칼이 되어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이런 "행복"을 날마다 누리면서 누군가가 불렀던 노래의 가사처럼 "하나님! 저는 행복해요. 정말 정말 행복해요." 이렇게 매일 매일 행복을 노래하면서 살아가는 축복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명기 33:27-29, 베드로전서 2:9-10 / 이성희목사
지난 주간은 동계올림픽 때문에 참 행복한 주간이었습니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은 우리 젊은이들의 축제였습니다. 국내에서 어른들이 혼탁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밴쿠버에서는 젊은이들이 아름다운 싸움을 싸웠습니다. 김연아, 이승훈, 이정수, 모태범, 이상화, 모두 20-21살 젊은이들입니다. 이들에게서 대한민국은 희망을 캤습니다. 특히 김연아선수가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부문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이번 동계올림픽에서는 빙속과 쇼트트랙과 피겨에서 금메달을 따서 빙상강국으로 부상했습니다. 김연아는 자신은 ‘행복한 스케이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행복한 스케이터 때문에 ‘행복한 국민’이 되었고, 우리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정말 설교제목을 오래 전에 ‘대한민국이여 너는 행복하도다’라고 했는데 정말 대한민국은 행복합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연아선수가 세운 여자 싱글 228.56점은 당분간 깨기 힘든 점수일 것 같습니다. 우리는 소트트랙은 잘 하지만 스피드 스케이팅은 아예 우리의 체력이나 체격으로는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젊은이들은 서양의 젊은이들과 비교해볼 때에 조금도 뒤지지 않습니다. 정말 대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이 모두가 국력과 경제력이 신장된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피원조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원조국으로 올라섰습니다. 한국전쟁 후에 가난한 나라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세계 일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최근 일본은 일본의 공룡 같은 기업인 일본항공(JAL)이 완전히 파산했습니다. 전자제품의 대명사이던 소니도 삼성에서 뒤졌습니다. 토요다는 완전히 기술이나 신용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오사다 마오도 김연아에게 완패하였습니다. 일본이 한국에게 줄줄이 패배하자 일본은 ‘삼성에게 배우자’고 합니다.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한 일본은 ‘한국에게 배우자’고 합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 교육을 배우자’고 합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경제규모에서 세계 11위이고, 교육수준이 세계 최고이고, 문화개발기술도 발달하여 한류를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1884년 알렌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126년 동안 한국교회는 엄청난 성장을 하였습니다. 삼일운동 당시 우리나라 전체 2,500만 인구 중에 기독교 인구는 30만이었습니다. 전 국민의 1.2%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60년대부터 90년대 까지 매 10년마다 교인의 수가 배가되었습니다. 현재는 4,800만 인구 중 기독교인구가 1,000만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교단은 지난해에 ‘예장 300만 성도운동’으로 미국장로교회(PCUSA)의 교인 수 289만 보다 더 커졌습니다. 이제는 선교사 파송 2만 명 시대를 열었습니다. 2010년 1월 현재 169개국에 2만 455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지난해에 비해 1,032명이 증가하였습니다. 우리 교단인 예장 통합에서는 84개국에 1,068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31운동 당시에 기독교 인구는 1.2%에 불과했지만 민족 대표 33인 중에는 목사, 장로 등 16인 즉 절반 가까운 대표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숫자는 적었지만 사회를 주도하던 시대였습니다. 최근에 ‘한국교회의 사회적 섬김 보고서’를 보면 사회복지사업 현황이 나와 있습니다. 전체 372개의 사회복지법인 가운데 52.2%인 194개가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법인입니다. 종합사회복지관 414개 가운데 45.4%인 188개가 기독교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노숙인 시설 86개중 62.8%인 54개가 기독교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역아동센터 3,013개 가운데 53.1%인 1,601개가 기독교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종교 법인이 운영하는 사립학교 362개 중 무려 71.7%인 259개가 기독교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 전 세계 한인교회가 5,000개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참 복 받은 나라입니다. 우리 백성은 행복한 백성입니다. 우리를 즐겁게 하려고 스피드 스케이팅에서는 세계기록보유자인 크라머 선수가 아마추어 같은 실수를 해서 이승훈선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29절에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고 합니다. 성경의 ‘행복한’이란 단어는 ‘아쉬레’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은 충만한 행복, 완전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너는 완전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아쉬레 코리아’입니다. 내일은 삼일절 91주년입니다. 나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날입니다. 우리교회는 광복절보다 삼일절이 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삼일절을 하루 앞두고 행복한 대한민국을 감사하고 하나님께 바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여호와의 영원하신 팔이 있어 승리하므로 행복합니다.
신명기 33:27에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고 합니다. 20세기에 경제와 민주화가 동시에 성취된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합니다. 국가가 발전했습니다. 경제도 사회도 엄청난 발전을 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국가의 행복은 여호와의 영원하신 팔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팔 때문에, 하나님의 팔에 안겨 있으니까 행복한 것입니다.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름 ‘엘’은 힘이란 말입니다. 힘이 있는 하나님의 팔은 이스라엘의 안전한 처소입니다. 하나님의 팔은 힘이 있는 팔입니다. 사랑의 팔입니다. 품으시는 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길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안아서 옮겨놓으신 팔입니다. 물에 빠진 자를 건지시는 팔입니다. 쓰러진 자를 일으키시는 팔입니다. 위험에 처한 자를 날개 아래 품으시는 팔입니다. 하나님의 팔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 결코 힘이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를 껴안을 만큼 하나님의 팔은 넓습니다.
어머니 품에 안겨 편히 잠든 아기를 상상해 보세요. 절대 평안과 행복이 그 안에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딸네 아이들을 데리고 대구에 간 적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출발했습니다. 큰 손자는 좀 컸다고 일어났지만 작은 아이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자는 아이를 안고 나와 차 뒷자리에서 제가 2시간이나 꼼짝도 않고 제 팔에 안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깰까봐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더니 팔이 저리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손자를 안고 있는 제 마음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만 그랬을까요? 손자 아이도 잠들어 있었지만 행복한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팔은 할아버지의 팔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팔은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내가 물었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십니까?” “‘이만큼’ 하시며 양 팔을 벌리시고 죽으셨다”. 예수님의 팔은 우리를 살리시는 팔입니다. 예수님이 팔을 벌리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성 시릴은 “하나님은 지구를 최대한 끌어안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팔을 뻗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33:2에는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팔이 되시면 넉넉하게 이깁니다.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팔이 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면 우리는 행복합니다. 하나님 없이 승리가 있습니까? 성공이 있습니까? 행복이 있습니까? 하나님 없는 행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1911년 노벨문학상 작가인 마테르링크의 대표작은 ‘파랑새’입니다. 소설에 나오는 틸틸과 미틸은 파랑새를 잡으러 갑니다. 온 세상을 다 다녔지만 파랑새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1년 만에 그들은 집에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틸틸과 미틸은 처마 밑에서 파랑새를 발견합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팔이 우리와 함께 있으면 이것이 곧 행복입니다. 행복은 우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단테는 “네 발 밑을 보라, 거기에 생수가 흐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행복은 하나님의 팔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나라별 행복지수가 있습니다. 영국의 신경제학재단에서 삶의 만족도, 평균수명, 생존에 필요한 면적, 에너지 소비량 등을 바탕으로 계산한 지수입니다. 그런데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오세아니아의 작은 섬나라 바누아투라고 합니다. 둘째가 콜롬비아, 그 다음이 코스타리카, 도미니카, 파나마의 순입니다. 돈이 많고 교육수준이 높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아시아인의 행복지수는 중하위권입니다. 아시아인들은 생산방식은 변했지만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가치가 그대로인 문화적 지체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개인이 집단을 위해 지나치게 희생하면 행복지수가 낮다는 말입니다.
‘다행증’(euphoria)란 말이 있습니다. 근거가 없는 병적인 행복감을 말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행복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근거 없는 행복이 아니라 근거 있는 행복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 때문에 우리는 항상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풍랑 일어도 안전한 포구, 폭풍까지고 다스리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주의 영원하신 팔 함께 하사 항상 나를 붙드시니 어느 곳에 가든지 요동하지 않음은 주의 팔을 의지함이라”. 참 좋은 찬송입니다. 하나님의 팔에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팔에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팔에 안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팔에 승리가 있습니다.
27절에는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고 합니다. 29절에는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고 합니다. 영원하신 팔로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항상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대한민국은 행복합니다. 우리나라를 독립하게 하시고 해방을 주시고 이제 통일도 주실 하나님의 팔이므로 우리는 행복합니다.
둘째, 후손이 번성하고 소산이 풍성하므로 행복합니다.
신명기 33:28에는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라고 합니다. ‘야곱의 샘’이란 야곱으로부터 나온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와 후손들을 말합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이란 소산이 풍성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때를 따라 내리는 땅 가나안을 의미합니다. 후손들이 번성하고, 소산이 풍성해야 행복한 나라입니다. 대체로 소산이 풍성하지 못하면 후손이 줄어듭니다. 행복의 조건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문에 보니 ‘작년에는 아기 울음소리는 줄고, 부부 고함소리가 커졌다’고 합니다. ‘2009년 출생통계’에 의하면 지난 해 출생 아동 수는 44만 5,000명으로 작년 대비 4.4%인 2만 1,000명이 줄었습니다. 경제적인 불황 탓에 출산율이 한 가정 당 1.15%명으로 줄었습니다. 혼인건수는 30만 9,800건으로 전년보다 5.5%인 1만 7,900건이 줄어든 반면, 이혼건수는 12만 6,900건으로 전년보다 8.9%인 1만 400건이 늘었습니다. 이게 민심입니다. 생산이 줄면 출산이 줄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인구를 유지하려면 한 가정에서 2.1명 수준으로 출생해야 합니다. 현재 4,840만 명인 우리나라 인구가 2015년에 4,904만 명을 정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한답니다. 2040년에는 4,287만 명으로, 2300년에는 31만 4,262명만 남게 되고, 2954년에는 한민족은 지구상에서 멸종될 것이라고 합니다.
한 가지 멸종되지 않는 변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슬람화하면 절대로 줄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도 이슬람 국가들을 보세요. 일부다처인 그들은 굉장히 많이 낳습니다. 생기는 대로 낳으니까 자녀가 많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자녀가 없어 작아지는 것보다 더 큰 비극입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라는 가족계획 구호들을 들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너무 낳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출산을 장려한다고 하지만 대책 없이 낳기만 하라고 한다고 낳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아이를 낳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교육개혁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요즘과 같은 사교육비를 가지고는 절대 낳지 못합니다. 젊은 부부들과 그들 가정에만 부담을 줄 것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과 대책이 필요합니다.
끼니걱정을 하고,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 고아와 입양의 나라이던 우리나라입니다. 외국의 원조 없이는 못 살았던 때가 있었고, 고무신에 양말 없이 맨발로 다니던 때가 있었고, 비가 와도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다니던 때가 있었고, 비닐우산도 귀하던 때가 있었지만 요즘은 일회용 우산도 베 우산입니다. 우리 시대가 얼마나 풍성한 시대인지 모릅니다.
체력보다 강단으로 하는 운동만 하던 시절이 있습니다. 흔히 ‘헝거리 스포츠’라고 하여 매일 코피나면서 하던 권투와 같은 운동을 했습니다. 이제는 고급 운동인 테니스, 야구, 골프, 피겨 스케이팅, 스피드 스케이팅까지 세계를 재패하고 있습니다. 쇼트 트랙은 새치기를 잘해서 잘 한다고 하지만 이제는 체력에서도 서양 선수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모릅니다.
러시아로부터 미국이 알래스카를 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단돈 720만 달러에 알래스카를 사들였습니다. 당시 의회에서는 의원들 대부분이 반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재무장관이었던 윌리엄 시워드는 의원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여러분, 나는 눈 덮인 알래스카를 보고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 안 감추어 있는 무한한 보고를 바라보고 사자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자는 것입니다”. 다음세대의 풍요함을 볼 줄 아는 눈이 지금의 풍요한 알래스카를 만든 것입니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약속하신 후손들이 차지할 땅입니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러나 그 땅에 가보니 가나안의 일곱 족속이 살고 있습니다. 철옹성 같은 여리고를 무너뜨려야 했습니다. 아이성에서는 패배하였습니다. 그들과 후손의 땅이라고 하지만 모진 고난 끝에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약속하신 땅, 약속하신 복, 약속하신 구원이지만 아무런 수고 없이는 대가가 없습니다. 성취도 없습니다.
“미국인의 행복지수는 한 세대 이상 동안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특징이 뭡니까? ‘네가 일함으로 나는 논다’, ‘일하기 싫으면 웰패어(사회보장제도) 받으라’는 것입니다. 사회보장제도를 악용하여 일하지 않고 먹는 사람, 쉽게 돈 벌려고 하는 사람, 착취하여 쌓아두는 자가 너무 많습니다. 일하는 행복을 잃은 자들이 너무 많은 나라로 전락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던 나라가 하나님을 멀리하는 나라도 전락하니 행복지수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후손이 번성하고, 일하기를 즐겨하고, 손이 수고한대로 얻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가 진정 행복합니다.
결 론
한국여성계의 지도자이신 주선애교수님이 지난 주간에 생신을 맞았습니다. 이번 생신은 북한에서 고위직에 계시다가 대한민국으로 오신 황장엽선생께서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저도 초대를 받아 가서 감사예배 시간에 기도를 했습니다. 황장엽선생님께서 주선애교수님을 “북한을 떠나온지 14년이 되었는데 대한민국에 와서 마음을 세탁해준 스승”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그 분은 한국전쟁이 났을 때 삼척에 있었는데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 몰랐지만 바른길로 간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소련을 따라 가면 좋을 것이라고 하여 따라 갔는데 결과적으로는 잘못됐다고 했습니다. 미국을 따라가서 잘 된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행복의 조건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에는 행복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사는 나라는 행복한 나라입니다.
베드로전서 2:10에는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비로소 참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팔 때문에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풍요하심에 우리 후손이 번성하고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자로다
신 33:26-32 / 지태일 목사
사람들이 쓰는 말 가운데 환상적인 설렘을 가져다 주는 말이 있다면 다름 아닌 '행복'이란 단어입니다. 행복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고, 누구나 소유하기 좋아하고 그것을 한없이 누리길 소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행복의 정체성을 바르게 파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행복이란 말 자체가 지니고 있는 그 의미가 너무나도 여러 가지 내용과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현재 살고 있는 삶에 '만족하느냐 만족하지 못하느냐'의 정도를 '행복도'라고 말합니다. 한 10여년 전에, 한국 갤럽에서 전세계 주요 국가 18개국을 선정하여 행복도를 조사하여 발표했는데, 그 중에 한국 사람의 행복도는 가장 꼴찌로 10점 만점에 5.34점밖에 안 되었다고 합니다. 학교 성적으로 따지자면, 행복 측면에서 낙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또 20여년전에도 국제 가치회의 기관이라는 곳에서 주요 국가 13개 나라를 대상으로 행복도를 조사했는데, 그 때에도 역시 우리나라 사람의 행복도는 가장 꼴찌인 39%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잘사는 선진국들과의 대비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지만, 우리보다 지식 수준도 낮고 잘 살지도 못하는 인도나 멕시코, 또는 브라질이나 필리핀 등의 나라에 비해서도 그 행복도가 현저하게 낮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불행하기 때문에... 즉 예를 들자면, 경제적으로 어렵고 문화적인 혜택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부족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행복도가 낮은 것이 아니라, 행복을 판단하는 주관적 척도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조사기관에서 돈 많은 재벌 100명과 박사 학위를 가진 지식인 100명을 대상으로 삶의 만족도에 대해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뜻밖에도 돈많고 지식이 많은 사람들 87%가 "아니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수십 억, 수백 억을 가진 돈 많은 부자들도 현재 삶에 만족하지를 못하고, 남들보다 많은 것을 배우고 학문적 업적을 쌓아서 남들로부터 칭송을 듣는 내노라하는 석학들도 만족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과연...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길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불행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불행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왜 당신은 불행하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으면,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남들보다 배운 것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불행합니다." 또는 "나는 남들에 비해서 가진 것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불행합니다" 이렇게 쉽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서서 말씀을 드렸듯이, 행복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라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해서 최고로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그전에 지하에서 지상으로, 월세에서 전세로, 작은 8평의 집에 살다가 15평으로 옮겨가면, 마치 방안에서 축구라도 할 것 같은 넓은 느낌을 가지고 행복해 합니다. 하지만 그 행복감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맙니다.
요즘은 칼라 텔레비젼에다가 디지털에다가 LCD 고화질 대형 칼라 텔레비젼이 보기에 너무 좋습니다만 예전에 텔레비젼이 처음 나왔을 때, 흑백 텔레비젼 조그만 14인치 조차 얼마나 귀했습니까? 지금은 줘도 안가져가지만, 그 때는 없어서 못 봤쟎습니까? 동네마다 한두 대씩 있으면, 아이들이 몰려가서 저녁 드라마나 축구 권투를 보곤 했습니다.
어렸을 때 이 텔레비젼을 보기 위해서 빨리 저녁만 먹으면 이웃집으로 마실을 간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미닫이 있는 흑백 텔레비젼을 하나 생겼는데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텔레비젼을 이리 저리 만져보며 좌우를 살피면서, 흐뭇해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24-5년전, 1980년 겨울 새롭게 칼라 텔레비젼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흑백을 보다고 칼라를 보면, 그 선명도와 실감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그 때 당시는, 정말 칼라 텔레비젼이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로, 마냥 기쁘고 행복해했습니다. 요즘에는, 디지털 위성방송이라고 하면서, 크고 생생한 고화질을 뽐내는 디지털 텔레비젼이 등장하고 최첨단을 달리고 있지만, 흑백 텔레비젼을 앞에 놓고 즐거워했던 그 행복감을 찾을 길은 없습니다. 점차, 황홀했던 그 때의 기억들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행복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라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가난하다고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해야만이 행복을 이끄는 지름길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신33장은 모세가 비스가산에 올라가서 가나안을 바라보고 난 후에 그 곳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내용의 일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어 마시게 하라 하셨으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으로 인해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내게 한 연고로, 즉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함으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너무나 애석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나는 이제 이렇게 너희들 때문에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이 못된 자들아 원통하고 분하다. 그러니 이제 나는 모른다. 내가 죽고 나면 너희들 멋대로 해라' 이렇게 말하지 않고, 모세는 외혈 그들을 축복했습니다. 야곱이 죽음을 앞두고 열 두 아들을 축복한 것과 같이(창49장) 모세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이름을 부르며 각 지파를 축복했습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느보산에 올라 자기 생을 마감하기 직전 모세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각각의 이름을 부르며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축복기도를 드림니다. 그 축복은 한마디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여수룬이여" 하고 이스라엘의 애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 여수룬이란 '계약'이라는 의미와 '의'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진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의로운 백성이 된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곧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여수룬을 향해 축복했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향해 마무리 축복을 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행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축복에서 한마디로 "너는 행복자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행복자"로 불리워진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소망하고 꿈꾸는 게 "행복"일 것입니다.
창세기30:13절을 보면 야곱의 아내 레아가 말하기를 "나는 행복하도다. 이는 딸들이 나를 축복받았다고 부를 것임이라"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불렀더라"
"나는 행복하도다" 즉 나는 기쁘도다. 나는 행복해요. 하고 고백하고 노래하는 레아입니다.
원래 야곱의 가정은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로 인하여 평온한 날이 없는 사랑 싸움으로 연속된 나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예쁜 동생 라헬을 더 사랑하였지만, 자식은 못낳았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차별 대우로 미움받는 레아에게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의 네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를 투기한 라헬이 여종 빌하를 야곱에게 첩으로 주어 단, 납달리의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에 레아도 여종 실바를 야곱에게 첩으로 주어 갓, 아셀의 두 아들을 얻고.... "나는 행복해요"라는 뜻으로 "아셀"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레아는 두 아들을 얻고서 "행복하다" 고백합니다.
그러나, 레아의 행복하다는 고백속에는 너무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냄새가 너무도 풍기고 있습니다. 남편 야곱에게 받는 차별 대우, 경쟁이라도 하듯이 라헬이 몸종 빌하를 야곱에게 주자 질새라 자기 몸종 실바를 주어 갓, 아셀이라는 두 아들을 또 낳고 그제야 나는 행복하다 그랬으니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은 아니고 너무 인간적인 노력, 몸부림, 경쟁에서 이긴 후에 온 그런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오직 유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행복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에서 말하는 "행복"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본문 29절에서 말하는 "행복자"는 에쉐르란 단어로 "행복, 복된, 복이 있다, 복되다, 얼마나 행복한지!"를 뜻합니다. 이 에쉐르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편에서 "복 있는"이 좋은 예입니다. "복 있는 사람".... 그가 바로 "행복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복한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바로 이런 사람이 "행복자"라는 것입니다.
신명기10:13절을 보면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여기에서의 "행복"은 토브란 단어로 "선한, 좋은, 아름다운, 기쁜, 즐거운, 평안한, 형통한"을 뜻합니다.
이 말씀을 종합해 보면 "행복"은 선한 것이요, 좋은 것이요, 아름다운 것이요, 기쁜 것이요, 즐거운 것이요, 평안한 것이요, 형통한 것입니다.
특별히 창세기1:4절을 보면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말씀하심니다. 여기서 "좋았더라"는 토브인데 이 단어가 성경에서 처음 사용된 곳입니다. 다시 말해서, "행복"이란 말이 창1:4절에서 빛을 창조하시고 처음 사용되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입니다. 내가, 사람이, 어떤 피조물이 보기에 좋았더라가 아닙니다. 이는 우리 피조물의 "행복"은 창조자의 뜻대로 잘 사용되어질 때 비로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세상 사람들이 어떤 무엇이, 어떤 것이, 이렇게 하는 것이 행복이라 말해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행복자라고 부르셨다면, 그 결과 이스라엘은 행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주 자신이 행복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고, 말들을 합니다. 또 인간 자신이 행복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결코 행복의 주인은 인간 자신이 아니고, 또 인간 자신이 행복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산물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행복이 우연의 산물일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행복의 정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인생은 하나님 자신께로부터 행복을 받아 누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생 행복의 근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인생들이 받아 누릴 행복의 법칙들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인생이 행복하게 되는 비결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행복의 법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29절을 보실까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자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여러분들의 눈에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는 말씀이 환히 들어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이, 이 축복이 여러분들의 것이 될줄 믿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왜 이스라엘백성들이 행복자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1.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백성이기 때문에 행복자입니다.
본문 29절을 보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이 말씀은 바로 이스라엘이 행복자인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백성이기 때문에 "너는 행복자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 살아서 행복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너 이스라엘이 재주가 많아서 행복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너 이스라엘이 강대국이라서 행복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호와의 "구원"을 얻었기에 "너는 행복자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행복한 자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는 세계를 한 때 정복했던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들은 진정 위대한 영웅이었으나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구원에 대해 알고 싶어서 성경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들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쟁에서 패한 후에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어 충격속에 고뇌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곁에서 그를 시중들던 한 신하가 "폐하, 폐하의 생애중에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라고 묻자 나폴레옹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한 참 후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고 첫 번 성만찬에 참석했던 때가 가장 행복했었네..."
우리는 나폴레옹의 고백 속에서 모든 것을 손에 쥐어보았어도 거기에는 진실된 행복이 없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결국 진정한 행복은 예수님께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만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행복자입니까? 행복자이심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행복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구원받은 자라면 여러분들은 행복을 누리는 분들이어야 합니다. 자격이 있으면서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은 더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구원받은 분들이라면 행복한 자들로 사시기 바람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무엇이 구원받은 증표일까요? 그것은 여러분들 마음속에서 고백되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구세주라고 고백할 수 있으면 여러분들은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주님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실 수 있으시다면 여러분들은 구원받은 분들이고,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행복자들입니다. 가슴 펴고 사셔도 됩니다.
성경은 무슨 전무후무한 지혜를 가졌다하여 솔로몬을 "행복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최고의 전성기로 태평성대를 누린다하여 솔로몬을 "행복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들에 핀 백합화 한 송이 보다 못하다고 했습니다(마6:28-29). 다시 말해서,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속에도 진정한 "행복"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말하는 "행복자"는 예수님 믿고 그 피로 의롭다하심을 받아 하나님께 구원을 얻은 자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무슨 공로나 노력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그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우리를 가리켜 "행복자"라고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진정한 "행복"을 알았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에, 포도나무에,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곡식이 없고, 외양간에 가축이 없어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감사하며 "행복"을 노래했습니다(합3:17-18).
오늘에 처한 나의 현실이 비록 힘들고, 고달프고, 괴로울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감사하며. 저 하늘, 저 천국을 바라보며 "나는 행복해요"를 노래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행복한 자입니다.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릴 행복이 어떤 행복이길래 너는 행복자라고 말씀하심니까?
29절을 보면 "그 하나님은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라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언제나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독불장군이 없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내조가 필요하고, 아내는 남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세는 행복자에 대해 축복하면서 '하나님이 돕는 방패가 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전능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기 때문에 언제든지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자는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움은 다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을 의지하기보다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합니다. 사람의 도움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심히 감정적으로 도움을 줍니다. 잘 도와주다가도 마음이 틀어지면 그냥 내팽개치고, 막 재를 뿌립니다. 떠나 갑니다. 손을 놓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위골된 발 같고, 부러진 이 같고(잠25:19), 거미줄 같다(욥8:14)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자"(히4:16)고 합니다. 또 시인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2)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신앙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늘 나의 우편에서 나의 그늘이 되시며 나를 지키시는 자시기에 나는 그분의 능력 안에서 안전하고, 평안하다고 고백하실 수 있습니까? 조심하실 것은 자기 형편을 가지고 하나님을 제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 분이 나를 지키시마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겼다면 비록 일시적으로 어려움이 생기는 것까지도 감수하며 행복의 조건으로 여길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나쁜 것으로 주기를 원치 않듯이 전능자 하나님이 그 자녀된 백성에게 악한 것으로 대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 가지고 살 때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도 "나는 행복자"라는 자세가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분명히 거머쥐고 사셔야 할 진리는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의 행복의 요건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도우시면 우리는 늘 행복합니다.
모세의 축복기도, 말씀처럼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너는 행복자라"고 고백 하십시다.
3.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행복자입니다.(롬4:6-8)
롬4:6-8절을 보면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다윗의 선언을 인용하여(시32:1-2)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가 "행복자"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이 바로 "행복자"라고 했습니다. "일한 것(어떤 공로나 노력)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입니다"
사람이 왜 그토록 "행복"한가? 나의 일한 대가나 공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으니 우리는 행복한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한 것도 없이, 무슨 공로나 내 인간의 힘이나 의지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이 바로 "행복자"라고 했습니다. 곧 믿음으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는 이 놀라운 사실이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아브라함(롬4:2)을,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죄의 은총을 고백하는 다윗을 "행복자"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가지게 된(롬3:22) 우리 성도들이 "행복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을 얻고, 죄의 형벌을 면하게 된 것은 그 어느 것보다 놀라운 특권입니다. 또한 이 특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로 영광을 누리는 특권입니다(롬8:17). 그 영광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우리 성도들 모두가 기뻐 찬양하며 소망하는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누리는 우리가 바로 "행복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금고기와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마치려 합니다.
어느 바닷가 오두막에 노부부가 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고기를 잡아다 할머니와 둘이서 가난하게 살아가는데, 어느 날 할아버지의 그물에 용왕의 왕자라고 하는 금고기가 잡혔습니다. 할아버지는 살려달라고 우는 금고기가 불쌍해서 놓아줍니다. 집에 돌아와 그 이야기를 할머니께 들려주자 할머니는 "왜 그냥 살려줬나요. 깨진 물동이라도 새걸로 바꿔달래잖고." 그렇게 할아버지를 나무랬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다시 바다에 나가 금고기에 부탁해서 새 물동이를 얻고, 다시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새 집을 얻고, 하인들과 온갖 살림살이, 금은보화를 얻습니다.
그런데 욕심 많은 할머니는 그것도 모자라서 나중엔 자신이 여왕이 되어 금고기까지 신하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는 수없이 할아버지가 그 말을 금고기에게 전하자 금고기는 아무 말 없이 물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으리으리하던 기와집도 하인들도 다 없어지고 원래의 오두막과 깨진 물동이와 함께 할머니가 초라하게 앉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끝없는 욕심으로 가득한 할머니가 이미 주어져 있는 "행복"을 깨닫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어리석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할머니입니다. 어쩌면 이 할머니의 모습이 바로 우리, 나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이미 주어져 있는 "여호와의 구원" 그 "행복"을 깨닫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나 자신은 아닌지.... 그러면서 아직도 그 할머님처럼 "행복"을 찾아 헤매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 보시기 바람니다.
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아직도 주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럴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요14:1이하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믿으시기 바람니다. 상황이나, 현실,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 십자가에 달리신 에수 그리스도만을 믿으시기 바람니다.
또 요14:27에서 는"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까?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평안은 두 가지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이 주는 평안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란 어떤 것입니까? 지극히 상대적이고 한계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주는 평안은- 칭찬 받으면 기분이 좋으나 욕하면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작년의 기쁨이 금년에도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하면 세상이 주는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평안은 지극히 피상적이고 추상적입니다. 변덕스럽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세상의 평안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루의 행복은 이발소, 미용실에서 누릴 수 있고, 한 주 의행복은 자동차를 사고 누릴 수 있으며, 한 달의 행복은 집을 장만하고 누리는 것이고, 일 년의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면 결혼을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들입니까? 이런 행복들은 모두 일시적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 행복을 믿음의 마음으로 받아 누리면서 사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의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야할 길이 아직 남은 사람들이고 감당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은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적당한 거처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건너야 할 요단강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견고한 성읍 여리고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인같은 가나안 7족속이, 험한 산지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모세는 "너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은총을 누리고 있으며, 방패요 칼이신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승리케 하시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은혜와 복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오늘 여기 모여 예배하는 우리들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들은 행복자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을 여시고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행복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남은 생애 동안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백성으로써 하나님께서 방패 되어주시고, 영광의 칼이 되어 주셔서 여러분들의 대적들이 여러분들에게 복종하고, 그 대적들의 높은 곳을 밟으시면서, 정복 승리하면서 "하나님!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고백을 드리면서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너는 행복자로다
신 33:26-29 / 김상수 목사
금번 제가 종교개혁지를 방문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예비해주신 교회와 당회, 성도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금번 여행은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주관해서 유럽에 있는 종교개혁의 현지를 세밀하게 돌아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어서 그 일행에 동참해서 함께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지는 바로 우리 신앙의 뿌리가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금번 제가 그 현지들을 돌아보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옛날 말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번 듣는 것 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정말로 이번에 다녀와서 그동안 공부했던 종교개혁사와 모든 알고 있는 지식들을 산 경험으로 다시 한 번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가 가 보았던 곳은 14세기 때에 맨 처음 종교개혁의 불씨를 일으켰던 존 후스라는 분이 활동했던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지역을 먼저 돌아보고, 마틴 루터가 활동했던 독일의 유적지를 다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스위스에 와서는 취리히에서 츠빙글리가 종교개혁으로 활동했던 지역을 돌아보고, 또한 장로교의 창시자인 존 칼빈이 일생동안 수고했던 제네바를 돌아보고, 파리에 가서는 존 칼빈의 고향을 둘러보았고, 파리에서 종교개혁을 하다가 많이 죽었는데 그들이 활동했던 그 무대를 돌아보고 왔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밤마다 지도교수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일행은 30여명이 함께 움직였는데 하나님의 축복으로 참 좋은 분위기였고 유럽의 날씨는 늘 굳은 날씨인데 날씨도 청명해서 잘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일행 중에 아픈 사람도 없었고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첫날 갈 때에 지도교수님 한분이 허리를 삐끗해서 프라하에 가서는 하루 종일 호텔에 계셔서 걱정을 했는데 그 다음날부터는 회복이 되어서 끝까지 잘 다니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후에 기도가 참 많았구나 하고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맥추 감사주일입니다.
우리가 감사주일을 맞을 때마다 얼마나 감사할 일들이 많은지 다시 한 번 되새김할 수 있는 시간으로 드려야할 줄로 생각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모세의 최후 기도입니다. 모세는 지금 나이가 120세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앞에 두고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한 지파 한 지파에게 복을 빌어 기도해주고, 맨 마지막 결론적인 말씀이 “너는 참 행복하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라고 합니다.
이 고백은 모세가 120년의 생애를 다 보내고 마지막으로 얻은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릴 때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감사하지만 나이가 많아지면 진짜 감사할 것이 무엇이며, 정말로 감사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원숙해졌을 때 느끼는 감사,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이것에 대한 감격이 있고, 이것에 대한 기쁨의 고백이 있을 때에 참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 행복한가? 무엇을 감사하게 생각해야할 것인가? 하는 부분을 몇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구원받는 하나님의 선민된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26절은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수룬은 이스라엘의 애칭이며, ‘사랑을 받는자, 옳은 자’의 의미로 택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너를 도우시려고 궁창에서 하늘을 타시고 위엄을 나타내신다”고 하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은 애굽에서는 천사를 통해서 해방시켜주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하늘에서는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도와주시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면서 호보해주신 그 하나님의 도우심은 아무도 대적할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절대 전능의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을 보호해주셨으니 너같이 행복한 자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은혜는 참으로 큽니다. 우리가 건강한 것만 해도 큰 복이며, 우리가 받은 환경의 축복, 가정의 축복, 그리고 영원한 나라에 갈 약속의 축복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나를 보호해주시는데 이것을 알면 우리가 불평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번 여행 중에 호주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젊은 목사님 부부가 중학생 1학년 딸 아이를 데리고 참석하였습니다. 이 아이가 독일 호텔에서 밤새도록 울었다고 해서 왜 울었느냐고 물었더니 이 아이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신간 영어책을 보고 싶은데 독일에서 영어책을 구하기가 힘들어 그 책을 구하지 못해서 그 아이가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침시간에 제가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아버지 어머니 덕에 이렇게 유럽여행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미국에 가서도 구경을 다 할 것인데 너같이 복을 받은 아이가 대한민국에 몇 명이나 되겠냐? 너 나이 또래에 너처럼 부모님 덕분으로 많은 곳을 여행하고, 공부하고 특권을 누리는 아이들이 얼마나 되겠냐? 극소수일 것이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아이도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는 그 책 한권 가지고 울었느냐”고 했더니 알아들었습니다.
여러분,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받은 것이 많은데 사실 불평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조그마한 것을 가지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모습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우리 하나님께 받은 큰 것에 대해서 늘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자 누구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를 깨달으면 감사할 것 밖에 없으며, 이 큰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믿음을 가질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헌신도 할 수 있고, 봉사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생각해봅시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서 죽게 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여러분 그보다 세상에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보다 더 소중하고, 그보다 더 사랑스러운 존재가 없는데 그 아들을 대신 죽게 하고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하나님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서 우리를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이렇게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어서 다 지옥가야 하지만 우리는 구원받아서 예수 믿고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목사가 되어서 이렇게 영생의 약속아래 살고 있으니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이 특권을 우리가 생각하면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고, 이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만 헌신할 수 있고 봉사할 수 있습니다.
이번 여행에 안양에 계시는 목사님이 동행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영등포 모 교회에서 신학생으로부터 부목사로서 사임할 때까지 한 교회에서 14년을 일하시고 그 후 담임목사로 오셨습니다. 이 목사님이 이야기 가운데에 전에 있던 교회 이야기를 하는데 그 교회는 예산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교회 재정이 모자라는 듯 싶으면 그 교회에 사업하시는 장로님 한분이 무명으로 헌금을 해서 보충 한다고 했습니다. 80억원을 들여 교육관을 지었는데 그 목사님 말씀이 아마 그 장로님이 절반은 부담했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돈이 많다고 헌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헌신할 수 있고, 봉사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학위 논문을 쓰면서 통계를 내보았는데 한국 목사님들이 제일 좋아하는 찬송이 405장이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영생을 얻었네”라는 찬송을 목사님들이 제일 많이 부른다고 했습니다. 왜 이 찬송을 많이 부를까요?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감격을 가지고, 날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부탁합니다.
둘째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이 이 복음과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희생하고 죽었기에 이 복음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번에 종교개혁지를 돌아보면서 느낀 점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복음을 전수해주려고 참 많은 사람이 죽었구나!” 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사를 공부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시지만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찬송가에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라는 찬송이 있는 것입니다. 그냥된 것이 아닙니다.
체코 프라하에서 제일 큰 ‘바츨라프 광장’ 앞에 존 후스의 제자들 12명이 처형당해 묻혀 있는 기념비를 보았습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했을 때에 생명을 걸고 했습니다. 신성 로마황제 찰스5세가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히여 마틴 루터를 소환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면 죽는다고 했지만 마틴 루터는 “보름스에 있는 모든 기와장이 마귀라고 해도 나는 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믿고 개혁을 위해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운 결과가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해준 것입니다.
칼빈 같은 개혁자들은 몸을 피해 조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 당시 개신교도가 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되는 일이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성경대로 살아보겠다고 숨어서 예배를 드리며, 피해 다니면서 예배를 드리고 지켰는데 이 종교전쟁이 길게는 100년이 걸렸습니다. 그중에도 30년 종교전쟁은, 이 전쟁 때문에 독일 국민은 3분의 일이 죽었습니다. 국토의 절반이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남자들이 전쟁에서 많이 죽어서 나중에는 여자들이 남장을 해서 전쟁터에 나가 싸운 긴 전쟁이 있은 후에 우리들이 자유를 획득하게 된 것입니다.
독일의 북쪽은 거의 천주교이며, 남쪽은 신교인데, 불란서에는 거의 신교가 없고 다 천주교입니다. 왜냐하면 불란서에서는 종교개혁 활동을 하다가 많은 신교도들이 죽었기때문입니다.
불란서에서는 1572년 8월 23일 신교도들을 성 바돌로미오 추도일에 다 모이게 해서 다 학살을 했는데 그때 죽은 숫자가 하루에 3천명이었고, 그 시체를 세느강에 던졌습니다. 그 시체들이 지금의 에펠탑 자리에 다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종교개혁자들이 남아서 비밀한 장소에 모여 총회를 하는데 그 정보가 세어나가서 사람들이 비밀 통로로 나가고 아버지와 딸은 잡혀 처형을 당했던 현장을 우리가 가보고 왔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고, 자유롭게 성경을 볼 수 있고, 자유롭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이 모든 것이 그저 되어진 것이 아니라 이런 많은 역사의 과정에서 희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내가 누리는 자유가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아십시오. 여러분이 성경을 볼 때에도 그냥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성경을 바로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마음대로 드릴 수 있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이 땅 위에는 마음대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파리에서 칼빈의 고향인 누아용에 가 보니 칼빈의 생가를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조립식 의자가 한개 있는데 그 의자는 피난을 다니면서 예배를 드리던 강대상이었습니다. 그때의 피난 교회를 광야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그 광야교회는 서로 서로 비밀리에 연락해서 광야에서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그때 사용한 강대상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정보가 세어나가 알려지면 빨리 그 의자를 분리해서 접어 피했다고 합니다.
그런 후에도 그들은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앙리 4세가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신교들의 자유를 보호한 후에 신교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렸는데 그후 신교도를 박해한 루이14세가 이 법을 철회합니다.
그래서 낭트칙령으로 신분이 드러났던 사람들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독일과 네덜란드, 영국,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이들은 ‘청교도’라고 합니다. 그 신앙을 오늘 우리가 물려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 위에 많은 선교사들이 와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나 한사람을 구원하려고 내 주위의 많은 희생과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에 내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받은 구원이 그저 받은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의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받은 구원을 소중히 여기시고, 받은 구원에 대해 감사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는 그분의 팔이 나의 처소가 된다고 했습니다.
27절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기를 때에 팔로 안아주고 받쳐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아이가 엄마 품에서 자라는 것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보호하시고 안아주시고 받쳐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보호아래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팔의 보호를 늘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밖에 나가면 안양일심교회 목사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저를 세워주셨기 때문이며, 여러분들이 저를 일심교회 담임목사로 세워주었기 때문에 사랑받고 사는 것입니다. 모든 이치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가 힘이 주어졌을 때 반드시 누군가가 나를 받들어 주었고, 누군가가 옆에서 보호해 주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시고 누군가가 나를 받들어 주었기 때문에 내가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복 받았을 때를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받드시고 내 이웃을 통해서 이렇게 나를 돌봐주시는구나, 그래서 내가 이렇게 서 있구나’ 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자동차가 아무리 좋아도 도로가 울퉁불퉁하면 속력을 낼 수 없습니다. 도로가 좋아야 속력을 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처소가 되어주시고 그분의 팔로 나를 받들어 주시기 때문에 내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정하시고 매사에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가 교육관을 짓고 있지만 돈이 있어서 짓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고없이, 어려운 일 없이 순적하게 여기까지 도와주시니 짓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훌륭한 왕이 된 것은 다윗 왕을 도와준 수많은 장군들과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 왕이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았고, 큰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축복받았을 때에 꼭 잊지 마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내 주위에 나를 도와주는 많은 분들에게 감사할 줄 아는 성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감사절의 우리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적을 쫓으시고 멸하라 하시도다”라는 말은 평안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대적을 쫓아버려야 편안하겠지요?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병이라는 대적을 쫓아버려야 평안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평안 주신 것도 늘 감사하기 바랍니다.
이번에 제가 여행을 하다가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첫날 교수님이 허리를 다쳐 다시 한국으로 가나 어쩌나 염려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시고 끝가지 잘 다닌 것을 보면서, 또 4살짜리 어린아이가 한명 따라왔는데 끝까지 잘 따라오는 것을 보고 참 예사 일이 아니다, 또 78세 목사님도 오셔서 그 목사님을 걱정했는데 저보다 밥도 잘 잡수시고 더 건강하게 잘 다녀왔습니다. 또 날씨도 정말 좋아 ‘아 진짜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하게 도와주셨구나’하고 감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 산업을 지켜주신다고 했습니다.
28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야곱의 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데 샘에서 나오는 물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복을 받는 것을 말하며,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은 가나안땅을 말하는데 그 땅은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그 땅에서 곡식이 자라라면 이슬이 필요합니다. 이슬이 내려야 이슬을 맞으면서 곡식이 자랍니다. 이슬은 위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유럽은 살기 좋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석회질 땅이어서, 물에 석회가 섞여 있어 그 물을 그냥 먹을 수 없습니다. 또 날씨는 춥습니다. 여름이라서 우리는 이렇게 덥지만 거기는 선선하며, 30도 이상 올라간 일이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곡식은 밀과 감자 또 옥수수 같은 작물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악한 환경을 그들은 개척했습니다. 이번에 버스를 타고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어느 곳을 가도 초라한 집이 없고 깨끗하며, 잘 다듬어져 있었고, 동네마다 아름다운 예배당이 서 있었습니다.
제가 꿈에 그리던 그 아름다움 그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 사람들은 100년 전에 지하철이 있었고, 100년 전에 에펠탑세우고 했는데 우리는 100년 전에 무엇했습니까?
우리는 미개인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우리가 사는 삶이나 독일 사람들이 사는 삶이나 겉모양을 보아서는 잘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도 고속도로 잘 되어있고, 우리도 모두 자동차를 다 가지고 있으며, 거기는 모두 소형차를 타고 다니는데 우리는 중형차를 타고 다니지 않습니까?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 얼마나 축복받았습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위에서 주신 축복입니다.
결론의 말씀은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민족만큼 이렇게 축복받고 이 짧은 기간에 축복받고 구원받은 민족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감사하고, 모든 삶의 현장에서 감사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감격이 사라지지 않도록 새롭게 믿음생활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