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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같은 나의 형님, 문규현 신부 |
[사람 안에 스며있는 하느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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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고동주 |
2주일 전에 심장마비로 쓰러졌던 문규현 신부께서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지만, 아직은 자유롭게 사람을 만날 상태는 아니라고 하여 가보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인터뷰하러 가는 편집국장과 기자를 따라 병실로 찾아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우리의 육신은 물론 정신까지 이끌어 준다는 사실을. 참된 삶이라면 더욱 그렇다.
처음 그분이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바로 단언했다.
“그 형님 소생하시기 힘들 거야. 아니 소생하시더라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실 거야. 잦은 삼보일배와 오체투지로 젊은 사람도 견뎌내지 못할 텐데, 해방되던 해에 나셨으니 칠순을 바라보는 연세인데 또 다시 단식이라니. 당신 몸을 그토록 혹사하셨으니 당연한 결과지 뭐.”
그런데 그분이 살아나셨고 일어나셨다. 마치 예수께서 죽었다 살아나신 것처럼. 내가 그렇게 예언에 가까운 단언을 하게 된 데는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8년전, 2001년 초가을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한 김정식의 노래마당>을 명동성당 뒤 성모동산에서 갖게 되었다. 신부, 수녀, 수사, 평신도 등 십여 명으로 결성된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한 천주교 모임>은 기존의 어떤 사회운동에서도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운영패러다임을 보여주었다. 그 하나는 투쟁일변도의 거친 운동방식을 넘어서서 생태영성으로 접근하여 민중들의 감성을 깨워 스스로 동참하게 하였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표 없이도 모두가 하나 되어 눈앞에 놓인 일에 따라 분야별로 전문성과 능력을 발휘하여 가족 같은 형제애를 간직함으로써, 아무도 낙오되지 않고 모두가 끝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날도 음향기 대여비를 아끼느라고 전주에서부터 당신 차로 손수 싣고 오신 앰프며 스피커를 내려놓을 때, 문규현 신부 아니 규현 형님은 이미 가벼운 수전증세로 손을 떨고 있었다. 그 때 내가 모질게 말씀드렸다.
“형님. 건강 잘 챙기세요. 지금 기운이 바닥이 난 상태라구요. 그러다가 한 번 쓰러지면 그대로 끝입니다. 하느님은 땅과 하늘 어디에나 계시니 예수를 따라 옳은 일에 그렇게 한 목숨 다하면 된다고 생각하시겠지만, 형님이 쓰러지시면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치명타가 되는지 잘 생각하셔야 해요.” “내 걱정 말고 동생 건강이나 잘 챙기라구. 이래 보여도 얼마나 강골인지 알어?”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내가 먼저 쓰러졌다. 직접적인 원인은 시차적응을 못한 채 미주와 유럽을 몇 차례 오간 것이었지만, 실제적인 원인은 새만금 갯벌을 살리자는 염원을 간직한 채 갯벌을 따라 한여름 땡볕을 받으며 하루 종일 걸었던 것이었다.
그로부터 꼭 한 해 전에 <인권회복을 위한 김정식의 노래마당>이 같은 장소인 명동성당 뒤 성모동산에서 있었다.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에 억울하게 범인으로 지목된 피해자의 남편이자 아빠였던 이도행 형제가 사형과 무죄를 오간 끝에 생의 막바지에 이른 것처럼 보이자,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을 얻어 ‘이도행을 살리기 위한 모임’이 생겼다.
이미 다섯 차례나 사형과 무죄판결을 받았고 이제 마지막 공판을 앞둔 상황에서 내가 노래마당을 하자고 제안을 했다. 죽은 모녀의 외가 쪽 가족이 이웃에 살고 있었고,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린 이도행 형제의 가족들도 같은 본당 이웃이었다. 아무 일도 안한 채 억울한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해보고 싶었고 그것이 노래였다.
사형폐지를 비롯하여 국가보안법 폐지, 비전향 장기수를 포함한 정치수배자 문제, 조작간첩과 북파간첩을 포함한 인혁당과 민혁당 사건, 군의문사, 윤금이 양 살해사건이 보여준 소파(SOFA)에 의한 주권침해 등 이 땅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있는 인권을 회복하자는 내용을 노래와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 나누었다.
이후 열렸던 마지막 공판에서 이도행 형제는 천행으로 무죄판결을 받아 살아났고, 당시 투쟁일변도와 거친 노래 일색이었던 사회운동 판에 우리가 진행했던 비폭력방식의 감성적인 저항운동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결과 이곳저곳 전국 투어콘서트가 1년 이상 이어졌고, 기존의 초청일정에 더해진 행사들로 내 몸과 목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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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역앞 우중집회2001.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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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비를 맞으며 2001.7.11 |
그런 상황에서 <새만금 갯벌 살리기 운동>을 만났다. 앞선 인권회복운동의 새로운 방식을 따라 이번에 우리는 생태보전 운동을 시작한 셈이었다. 과로에 지친 몸을 끌고 땡볕을 받으며 종일 걸었던 결과로 기관지가 헐어 천식을 얻었고, 병을 안고 떠난 북미 가족여행에서 돌아온 후 쓰러지고 말았다. 다시는 살아날 수 없을 것처럼 생각되었던 악몽 같은 8년간의 고통을 뚫고 마침내 올해 초, 나는 기적처럼 다시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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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01.7.11 | 그러나 그렇게 죽어가면서도 운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새만금 갯벌 살리기 운동>을 시작했던 동지들은 너무 힘들어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나를 보듬고, 죽어가는 갯벌을 살리러 다녔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질질 끌려 다니다시피 하면서도, 죽어가는 갯벌과 그것을 살리자고 안간힘을 다하는 동지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과 애처러움에 자주 눈물이 났다.
서울, 전주, 부안 계화도, 내초도 등지에서 진행된 노래마당을 통해 우리의 정신이 먼저 살아났다. 탈진에 이어 오는 심한 불면증으로 그 후로 4년간이나 신경정신과 신세를 지게 되었지만 그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약 그 때 멈추었다면 다시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결코 뒤를 돌아보지도 멈추어 서지도 않았다. 죽을 만큼 힘든 두통과 불면증을 안고 계속 나아갔다. 앞으로 앞으로만. 그 맨 앞 선봉에 그분, 최 연장자인 나의 형님 문규현 신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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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계회도 공연 |
단독대면을 통해 간결하게 새만금 갯벌의 위기를 알려주면서 함께 해야 함을 일깨워 주었을 때 알아차렸다. 무슨 끈 같은 것이 있어서 그분과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그것은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의 연결이 아니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다는 운명 같은 연결이었다. 그래서 나보다 20여 살이나 더 위인 그분이 아저씨보다 형님으로 여겨졌다. 사안의 급박함에 따라 동지들을 소집하여 즉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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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전라도 닷컴에서 |
노래마당을 계획하였고, 뒷일을 맡겨둔 채 나는 이미 예정되어 있던 미국행 비행 기에 올랐다. 캐나다의 토론토에 사시는 한인성당 주임신부께서 우리 가족을 위해 4년 전부터 준비하셨고, 당신의 회갑잔치 비용으로 우리 가족을 위한 북미여행을 계획하셨기에 꼭 가야만 했던 이 여행은, 수많은 기쁨과 슬픔 그리고 아픔과 고통을 간직한 채 영원히 내 가슴속에 간직되어 있다. 그 때 떠나면서 형님과 동지들에게 함께 보낸 이메일 내용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
듬직한 맏형 규현 형님 2001년 7월 15일 13:45
저는 살아오면서 한 분 형님을 모시고 살았고 동생은 무척 많았습니다. 제가 모신 딱 한 분이신 형님은 생일이 12월 25일이어서 그 형님 생일 날 눈이 오네 마네를 가지고 내기를 벌이는 청춘남녀들도 많지요. 그런데 살아오다 두 번째 형님을 만났는데 그 형님이 바로 규현 형님입니다. 이 급박한 시기에 한가하게 놀러가는 철없는 동생에게 그토록 우리를 힘들게 하는 미국이라는 나라로 가족여행을 간다는데도 기쁘게 잘 다녀오라고 전화를 해주신 오늘 아침 사람을 보듬는 그분의 자상함을 가슴 깊이 새겨둡니다.
‘그래도 개년(그랜드 캐년)’에 올라 따끈한 한 줄기 온도 있는 물줄기를 한 방 갈기고 오고 싶은데 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요. 언젠가 불란서 파리에 살던 시절 푸니쿨라 타고 몽마르뜨 언덕에 오를 때 까지는 너무나 좋았는데 예수성심 성당(사크르 쾨르)에 들어가려 하니 유럽에서 가장 큰 종이 있다고 입장료를 내라하여 ‘내 형님네 집이니 돈을 안 내도 된다’고 따지다가 끝내 안 들어갔고 밤에 다시 가서 성당 앞 잘 가꾸어 놓은 잔디밭에... 뭘 어쨌게요??? 순결함으로 속 도배 된 나의 내부기관에서 특수 제조된 조선 된장(?)을 이쁘게 납품허고 오지 않았겠어요. 아마도 ‘어떤 성인후보 지명순위 1위이신 분인지 찾아 모셔서 교회법을 바꾸어서라도 살아생전에 꼭 시성시켜야한다’고 지금까지 그쪽 교회에서 찾고 있는지 모르지용. 절대 알려주지 마시길... 저는 죽기 전 시성만큼은 절대 사절이니까요.
그런데 사랑하는 형님께 섭섭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형님께서는 저보다 새만금을 더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몇 년 째 이 귀여운 동생에게 안부 전화 한 번도 안 하시더니 새만금 모임 이후 놀랍게 쇄신된 모습을 보여 주고 계시니까요. 사랑하는 형님. 우리 졸개들은 형님만 믿고 밀고 나갑니다. 그러니 형님 쓰러지면 안 됩니다. 우리도 모두 다 쓰러질 테니까요.
20년 전 그분이 미국에서 돌아와 첫 본당사목을 하셨던 김제 요촌성당에 초대되어 갔다. 내가 만든 생활성가를 함께 부르면서 복음을 나누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였는데, 예정된 시각에 온 참석자는 두 사람이었다. 본당신부로써 너무나 민망한 나머지 ‘그토록 정성들여 공지했는데 이럴 수가 있는가? 다시는 이런 행사 안 하겠다’고 말씀하시고는 들어가 버리셨다. 아무 일 없는 듯 시작하고 있으니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여 오륙십 명이 되었다. 강의가 끝날 무렵 다시 나오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애써 오신 손님에게 볼 낯이 없습니다. 이삼 주 공지사항 시간을 통해 정성들여 말씀드리면 많이 오실 줄 알았는데, 내 생각대로만 한 것 같아 후회도 됩니다. 그래서 이런 일 다시는 안하려고 했는데 김정식형제가 그럴수록 더 자주 이런 일을 해야 진정성이 살아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두 사람이나 이십 사람이나 이백 사람이나, 숫자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도 했습니다. 아까는 화가 많이 나서 그 말이 전혀 안 들어 왔었는데, 여러분의 진지한 눈빛을 보니 그 말이 맞네요. 그의 고마운 충고를 따라 앞으로 이런 일을 더 자주 하기로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알게 되었다. 겸손하고 온유한 그분의 심성을.
내가 가족과 함께 다녀온 얼마 후 미국의 무역센터 건물이 테러를 당해 무너졌다.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한 노래마당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나는 매일 밤 탈진상태가 되어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텔레비전에서 거듭거듭 보여주는 참사동영상을 보다가 노래 두 곡이 떠올랐다. 오지 않는 임을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간절한 심정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도종환 시인의 시에 떠오른 곡이었다. 운동에 지치셨을 형님 생각이 나서 전주까지 기타를 들고 내려가 불러드렸다. 희망을 드리려는 나의 의지를 담아 온 맘과 정성을 다해서.
장다리 꽃밭에 앉아 재 너머를 바라봅니다.
자갈밭에 앉아서 강 건너 빈 배를 바라봅니다.
올 해도 그리운 사람 아니 오는 보리 팰 무렵.
어쩌면 영영 못 만날 사람을 그리다가 옵니다.
(도종환 시/김정식 곡 「보리 팰 무렵」)
진지하게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긍께(그러니까). 믓 땀시(뭣 때문에) 기다려. 지가 배를 타고 건너가면 될 것 아니여~”
아! 압권이었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부안 핵폐기장 반대운동>을 위한 대중 집회를 계획해 놓고 나를 부르셨다. 그 날 밤 죽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내 수명은 무척 길 것 같다. 읍내 한 복판에 세워놓은 가설무대에서 초대가수로 노래하게 되어 있었다.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싸우느라고 너무 정신이 없어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두 곡을 부르고 세 곡 째 부를 무렵부터 주먹보다 더 큰 돌멩이가 날아왔다. 앞 쪽에서 날아온 돌멩이는 대강 피할 수 있었지만 무대 뒤쪽에서 날아와 휘장을 찢는 돌멩이는 그야말로 극한공포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나는 형님만을 믿고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갑자기 무대에 조명이 한꺼번에 꺼지면서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 형님은 무대로 뛰어오르시어 나를 감싸 안으셨다.
“동생! 이러다 돌에 맞아 죽겄네.”
공포에 질린 나를 당신의 고물차에 태워 사제관에 쉬게 한 다음, 당신은 다시 나가 운동을 저지하는 경찰과 밤을 새운 몸싸움 끝에 큰 부상을 입으셨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사람을 돌보는 따뜻한 가슴을 만난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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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고동주 |
오늘 병실에서 그렇게 따뜻한 그분을 다시 만났다.
“요즘 새롭게 우리 동생이 불렀던 ‘담쟁이’를 하나하나 자주 새기고 있어. 위로가 많이 되었어. 그런데 내가 다른 일들에 정신이 팔려서 그렇게 오래 동안 힘들게 고통 받은 동생을 돌보지 못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형님. 만약 그 때 형님과 함께 운동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살아나지 못했을 거예요. 수경 스님이 그러셨잖아요. 모든 일을 접고 당신 절에 와서 일이 년 쉬어야 한다구요.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못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하셨지만 이렇게 저도 형님을 닮아 기적처럼 다시 살아났어요. 그리고 새만금 갯벌을 살리지는 못했지만 후회는 없어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 끝까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에요.”
“나는 새만금 싸움에서 완전히 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언젠가 막혔던 곳이 반드시 트이고 말 것이라고 확신해. 이번 일을 겪은 후에 누군가 나에게 천국을 보고 왔느냐고 묻길래 지금 여기가 천국이라고 말했지. 내가 다시 살아난 것을 하느님의 응답이라고 믿어.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살거야. 그곳이 어디든 그분이 함께 하는 곳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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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고동주 |
참사람의 참삶을 향한 놀라운 의지. 2주일 전에 심장이 마비되어 거의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되살아나신 분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심장마비로 쓰러질 때 타격이 간 척추를 수술하고 지지대를 한 상태에서도 문병 온 사람의 가슴을 달래주는 착한 심성. 그렇게 병상에 누워서도 용산의 이웃들에게 미안하다고 눈시울을 붉히는 여린 심성.
임수경양을 동반하고 분단의 아픔을 가로질러 오신 시대의 선구자. 미군주둔에 관한 불평등조약으로 희생되고 고통 받는 민중들의 방패. 새만금 갯벌 살리기, 부안 핵폐기장 반대, 대운하계획을 포함한 4대강 개발사업 반대 등 환경과 생태파괴에 노출된 우리나라 지금여기의 파수꾼. 구릿빛으로 그을린 시골 농부 같은 작고 마른 체구로 쓰러질듯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만 걸어가는 행동하는 양심. 그분은 과연 오뚜기인가? 인동초인가? 늘 혼자 앞서가지 않고 수천수만의 이파리들과 함께 나란히 절망의 벽을 넘어서고야 마는 담쟁이. 그렇다. 그는 담쟁이 한 잎이다.
(글 내용중에 나오는 노래들을 아래에 실어 놓았습니다. 선택하여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병실에서 부른 회복축하노래를 문규현 신부께서 따라 부르신 것도 있습니다.)
「담쟁이」- 도종환시/김정식곡/노래 김정식과 딸들
「보리팰 무렵」- 도종환시/김정식곡/노래 김정식
「병실에서 부르는 짧은 해」-노래 김정식+문규현신부
「짧은 해」- 김용택시/김정식곡/노래 김정식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김정식/가수 겸 작곡가로 생활성가의 개척자이며, 파리국립음악원에서 그레고리안과 지휘법을 공부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위한 자선음악회와 환경보전과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와 예술가요 및 연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우리신학연구소>의 연구위원이며, 가톨릭뉴스<지금여기>의 편집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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