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23일. 삼성 라이온스와 SK 와이번스의 시즌 5차전이 열리는 인천 문학구장. 앞선 두 경기에서 연달아 삼성에게 패한 SK가 선발 김영수를 앞세워 설욕을 다짐한다. 그러나 이날도 9회까지 삼성에 4대 9로 뒤지며 홈 3연패를 눈앞에 두는데. 이때 패색이 짙은 SK가 한 투수를 마운드에 올렸다. 이 정도 점수 차면 패전처리 투수로 봐도 무방할 터.
“어, 이상훈 아니야?” 관중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젠 마무리가 아니라 패전처리로 나서네.” 어느 관중의 말대로 이상훈은 전날에도 팀이 1대 3으로 뒤지는 8회에 출전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상훈에게 ‘마운드에 몇 번째로 오르는 투수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투수의 보직이란 ‘직무’에 해당하는 것이지 ‘직급’이 아니었다. 33살의 왼손투수에게 야구란 자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묵묵히 마운드에 오른 이상훈이 3타자를 상대로 삼진 1개를 잡으며 이닝을 마무리했다. 시즌 초반 블론세이브를 3개나 기록하며 주변의 우려를 샀던 이상훈은 5월 중순이 지나며 서서히 제 기량을 되찾고 있었다.
하지만 마운드를 내려오는 이상훈의 표정에서 기쁜 기색이란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량은 회복되고 있지만 가슴에 생긴 도넛 구멍만한 상실감은 되레 커지고 있었다. 관중석을 쭉 훑어본 이상훈의 입에서 외마디 말이 새어나왔다.
“여기까지.”
그리고 열흘 뒤. 이상훈은 충격적인 은퇴 선언을 한다. 공 1개 던지지 않고서도 연봉 6억 원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련 없이 시즌 중 은퇴를 선언하며 조용히 그라운드에서 사라졌다.
당시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이 “역시 야생마”다운 선택이라고 입을 모았다. ‘야생마’ 이상훈(39).
1993년 LG 트윈스에 입단한 이상훈은 가장 성공한 왼손 선발투수와 마무리로 1990년대 LG 신바람 야구를 이끌었다. 1994년 LG의 마지막 우승도 그해 18승을 올리며 호투한 이상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이후 이상훈은 야생마처럼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한국선수로는 최초로 일본과 미국프로야구를 밟는 신기원을 이뤘다. 2002년 기적 같던 LG의 한국시리즈행을 이끈 이도 다름 아닌 이상훈이었다.
그러나 이상훈은 야구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야구선수임과 동시에 가장 비밀에 싸인 투수이기도 하다. 그의 야구인생을 관통하는 방황과 도전. 그리고 갑작스런 은퇴를 둘러싼 논란들에 대해 그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입을 연 적이 없다.
<박동희의 Mr.베이스볼>에서는 한국프로야구사에서 전설로 기억될, 현역시절보다 은퇴 뒤가 더 아름다운 이상훈의 야구인생을 돌아보고자 한다. 야구선수 이상훈을 넘어 인간 이상훈과 만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전설이 된 그라운드의 야생마, LG 투수 이상훈’편은 3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1편에 이어)
1993년 역대 신인선수 최고 대우(계약금 1억 8천800만 원, 연봉 1천200만 원)로 LG에 입단했다. 당시 LG에는 쟁쟁한 선참들이 많았다.
대학 새내기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고 보면 된다. 얼마나 긴장이 되던지(웃음). LG에 입단하고 첫 동계훈련을 할 때였다. 점심을 하는데 내 앞에 이종도 수석코치님이 ‘딱’ 앉으시는 거다. 새까만 얼굴에 몸이 좀 탄탄하신가. 식사하시면서 나지막하게 “어이, 이상훈”하고 부르시지 뭔가. “네?”하고 잔뜩 긴장해서 바라보니까 역시 ‘딱’ 한마디만 하셨다.
뭐라고?
“머리 잘라라.”
머리라, 난감했을 듯싶다.
그때는 지금처럼 머리가 길지 않았다. 그래도 하늘 같은 수석코치님의 말씀이신데 “싫습니다” 할 순 없는 일이고.
그래서 깎았나.
대답은 “네, 알았습니다”했지만 결국 유야무야 넘어갔다(웃음).
1993년 4월 10일 광주 해태(KIA의 전신) 전에 구원투수로 출전해 3타자를 상대로 1피안타, 1볼넷, 2실점을 기록했다. 프로 데뷔전치고는 다소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기억난다. 그해 시즌 개막전이었다. 김태원 선배가 선발이었을 거다. 그때 내가 8회에 나와 좀 좋지 않았다. 프로 데뷔전인 만큼 좀 긴장하지 않았겠나.
하지만, 그로부터 3일 뒤인 4월 13일 전주 쌍방울전에서 선발투수로 출전해 8회까지 4안타, 4볼넷, 3실점 하며 첫 승을 따냈다. 이 경기에서 탈삼진을 무려 14개나 기록하며 ‘역시 닥터 K 이상훈’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당시 LG 선발진이 좋았다. 정삼흠, 김태원, 김기범 선배가 제 몫을 다하던 시절이었다. 자칫 선발 첫 경기에서 부진하면 선발 기회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발 데뷔전과 그다음 태평양전에서 완투승을 거두며 운 좋게 붙박이 선발이 됐다. 결국, 그해 9승을 따냈다.
‘초특급’ 신인투수 이상훈은 1993년 데뷔 때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해 페이스만 본다면 10승 이상도 충분히 가능했다.9승 하던 경기에서 팔꿈치를 다쳤다. 그것도 129구째에서. (한숨을 내쉬며)130구로 경기를 매조지 했으니 참 운도 없던 셈이다.
129구째에 다쳤는데 130구를 던졌다면 부상을 당했는데도 그걸 느끼지 못했다는 뜻인가.(고갤 흔들며) 아니다. 129구째를 던질 때 팔꿈치 인대가 '뚝' 하고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속으로 '아, 이 부상은 한 달 정도 가겠구나' 싶었다.
그럼 130구는 뭔가. 그 상태에서 1구를 더 던졌다는 말인가.얘길 들어봐라. 순간, 고민을 했다. '여기서 던지다 팔꿈치 인대가 또 끊어지면 한 달 갈 부상이 두 달이 될까. 에이, 그렇다고 두 달이나 가겠어.'
고민할 게 따로 있지 그런 걸로 고민하나.한 타자 남겨두고 이대로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게 싫었다. 결국, 130구째를 던졌는데.
던졌는데?(자신감이 넘치는 말투로) 그 공으로 삼진을 잡았다는 거 아니냐.
팔꿈치는?아니나다를까 "뚜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통에 한 달 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다행히 진단은 근육통이었다.
야생마, 팀과 야구를 배워가다
당시 당신의 직구 구속은 시속 145km 이상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단한 강속구였다. 특히나 왼손투수로는 최고의 강속구였다. 대학교 3학년 때 기록을 찾아보면 직구 평균구속이 시속 130km 후반대였다. 어째서 구속이 몰라보게 빨라진 걸까.
대학교 4학년 때부터 구속이 늘었다. 웨이트트레이닝 영향이 컸다. 정말 대학 졸업반 때 다른 건 몰라도 웨이트트레이닝은 열심히 했다. 3학년 때까지 비쩍 말랐던 몸이 꾸준한 운동덕분에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때부터 공에 힘이 붙고 스피드도 빨라졌다. 물론 몸이 단단해지면서 공을 임팩트 있게 던지는 것도 가능해졌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구속이 5km 정도 늘어난 이후 두 번째 변화였다.
서울고 재학시절 구속이 5km나 늘어났다고 했나.
과거 OB가 서울고 운동장에서 연습을 많이 했다. 김성근(현 SK) OB 감독님께서 짬이 나면 우리의 투구자세를 봐주시기도 했는데 한 번은 내게 “이러 이러하게 던져보라”고 조언을 해주셨다. 아무 생각 없이 조언대로 해봤는데 허허, 이게 웬걸. 그때 구속이 5km 정도 늘어났지 뭔가. 김성근 감독님의 조언이 잘 맞지 않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는 줄곧 잘 맞았던 것 같다.
구속도 구속이지만 투구폼도 바뀐 것으로 안다.
(투구동작을 흉내내며) 프로입단 때만 해도 팔 동작이 컸다."더욱 간결한 팔 스윙이 필요하다"는 이광환 감독님의 조언으로 이를 고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이걸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미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비디오를 꼼꼼히 챙겨보면서 이미지 훈련을 했다. 그게 도움이 많이 됐다.
1990년대 LG는 강팀이었다. 포스트 시즌 진출은 일도 아닌데다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2번이나 차지했다. 특히나 ‘신바람 야구’라는 구호를 기치로 한국프로야구에 큰 획을 그었다.
지금이야 LG가 4강에 목말라하지만, 그때는 한국시리즈에 올라가지 못하는 게 이상하던 분위기였다. 당시 언론에서 이광환 감독님의 야구를 ‘신바람 야구’라고도 했지만 ‘자율야구’로도 많이 불렀다. 돌아보면 그때 LG선수들은 ‘자율’과 ‘자유’의 차이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자율야구’가 대세지만 당시는 선수들조차 ‘자율’을 부담스러워 할 때였다.
이광환 감독님께서 1992년 LG 사령탑에 오르시고 1996년 시즌 중반까지 자리를 지키시면서 팀 색깔이 확고해졌다. 선수들도 감독님과 오래 호흡을 맞추면서 팀 색깔을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 그때 선배들 생각하면 정말 연습벌레, 야구 기계들이었다. 사생활이 어떻든 뭐가 어떻든 간에 야구장에 나와서만큼은 다들 자기만의 뭔가가 있었다. 특히나 선참들은 야구장에 출근하기 전 뭘 준비해야 하고, 경기에 나서기 전 어떻게 몸을 풀어야 하는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챙기는 완전 프로들이었다. 그걸 보고 후배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나. (목소리에 힘을 주며) 프로에서 선참들의 모범은 말로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후배의 배움은 들어서 익히는 게 아니라 보면서 몸으로 느끼는 거다.
그래서 선참이 필요하고, 베테랑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내 생각도 같다. 프로야구는 경험 많은 베테랑이 필요하고 팀을 잘 아는 선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팀을 정비할 때 하더라도 인위적으로 베테랑을 자르는 건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LG는 팀 창단 7년 만인 1997년 홈경기 100만(100만 1천680 명)을 돌파하며 최고 인기구단이 됐다.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 이유가 뭘까.
1990년대 중반에는 잠실에서 경기만 했다 하면 우리가 이겼다. 져도 그냥 지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다른 팀에서 ‘LG 유니폼만 봐도 무섭다’고 했겠나. 게다가 우리는 경기를 치사하게 하지 않았다. LG의 심플하고 깨끗한 이미지는 그래서 생긴 거다.
1994년 한대화가 LG로 이적하지 않았다면 그해 LG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없었을지 모른다.
야구계에서 한대화 삼성 수석코치는 차세대
감독 순위 1위로 꼽힌다
흔히들 LG를 가리켜 ‘모래알 팀워크’ ‘선후배 관계가 불분명한 팀’ ‘단체의 기강보다 개인주의가 우선하는 팀’으로 부르게 마련이다. LG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도 그랬는지 궁금하다.좋은 일화가 있다. 1994년 해태에서 해결사로 통했던 한대화 선배가 LG로 오셨다. 나와는 10년 차가 나는 대선배였다. 야구선수들 사이에서 그 정도 차이면 거의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로 보면 된다(웃음). 어쨌거나 그해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어느 선배가 누굴 찾아오라고 시켜서 이방 저방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대화 형님 방을 노크도 하지 않고 열어버렸다. 순간 “헉, 죄송합니다”하고 문을 닫으려는데 대화 형님이 “야, 이상훈. 너 이리와 봐!” 하시고선 “야, 이놈아. 남 방문을 열 땐 노크를 해야 할 거 아니여”하며 야단을 치셨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조심하겠습니다.”하고 용서를 구하고 나오긴 했는데 예감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역시나 그날 이후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지시?그 일이 있기 전까지 10살 위인 김용수 선배를 “형”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몇 살 위까지는 “형님”으로 부르고 몇 살 차이부터는 “형”으로 호칭하라는 지시가 위 선배들로부터 내려왔다.
일종의….군기 잡기였지. 운동세계니까 그런 게 필요하기도 했고. 지금은 모르지만, 예전 LG는 선후배 관계가 그만큼 건전하게 엄격한 팀이었다. 아, 대화 형님과의 추억이 하나 더 있다(웃음).
뭔가.내가 굉장한 실수를 범한 적이 있다. 1995년 20승 5패를 기록했는데 5패 가운데 3패가 롯데, 2패가 해태한테 기록한 거였다. 특히나 롯데전 3패는 잘 던지다 역전패를 하거나 이상하게 경기가 꼬이면서 진 것들이라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았다. 그날도 롯데전이었다. 득점권 위치에서 던졌는데 공이 3루수 대화 형님 쪽으로 갔다. 다이빙 캐치로 잡나 했지만 3루수 겨드랑이 사이로 공이 빠지지 뭔가. 순간, 스스로 화가 나서 로진백을 마운드로 내던지고 말았다.
동료의 오해를 사기 쉬운 행동이었다.누가 아닌가. 이전까지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했던 나였다. 그런 내가 로진백을 내던졌으니 동료, 그 가운데 대화 형님이 얼마나 미안했겠나. 마운드에서 내려가자마자 이광환 감독님이 더그아웃 뒤로 날 불러 혼을 내셨다.
이광환 감독이?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지도자가 이광환 감독님이시다. 내 첫 프로 감독님이시자 대학 선배이신데다 입단 때부터 정말 잘해주신 분이다.
뭐라고 혼을 내시던가.“네가 마운드 위에서 그렇게 행동하면 누가 널 믿겠느냐. 야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팀이 하는 거다. 공 던지는 것보다 중요한 건 야구에 대한 예의다.” 차라리 뺨을 맞는 게 나을 정도로 따끔한 말씀이셨다. 정말 팀의 주축선수라면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다. 결국, 경기도 지고 말았다. 하지만, 패한 것보다 마음에 걸린 건 대화 형님이었다. 다음날 광주로 이동하자마자 대화 형님 방에 찾아가 90도로 인사하며 “선배님. 죄송합니다. 제가 승리욕이 너무 강한 탓에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하고 정중히 사과드렸다.
새까만 후배 때문에 체면이 구겨졌다고 몹시 화가 나 있었을 법도 한데.천하의 한 대화 아닌가. 내 어깨를 다독이시면서 “괜찮아”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활짝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말이야. 상훈아. 우리 꼭 다음엔 이기자.” 그런 선배다운 선배가 있었기에 마운드에서 자신감 있게 투구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꿈의 20승’과 ‘47세이브 포인트’를 거머쥔 사내
이상훈에게 김성근 SK 감독은 존경하는 ‘어른’이다.
이광환 전 히어로즈 감독은 가장 무섭고 감사한 이다
1995년 ‘꿈의 20승’을 달성했다. 그것도 선발승만으로 달성한 기록이라 의미가 깊었다. 기분이 남달랐을 듯싶다.
쌍방울을 상대로 20승째를 올렸을 거다. (담담한 어조로) 하지만, 일전에 말했듯이 내게 기록은 그저 기록일 뿐 아무 의미도 없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야구선수는 은퇴 뒤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야구가 기록의 스포츠인 만큼 기록을 향한 도전은 ‘의미’가 없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도. 물론 나중에 기록은 남고 그걸 보고 사람들은 열광할 것이다. 하지만, 난 기록을 위해 야구를 한 게 아니다. 야구를 위해 야구를 했고, 내 기록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기록은 ‘우승’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해도 20승의 기쁨보다는 되레 팀이 반경기차로 시즌 2위에 머문 것이 분하고 분할 뿐이었다.
20승 투수답게 그해 일본에서 열린 한일 슈퍼게임에 출전해 한국 최고투수다운 활약을 펼쳤다. 도쿄돔에서 열린 1차전에서 6회 2사까지 4피안타 5탈삼진 무실점으로 일본 타선을 꽁꽁 묶으며 1차전 MVP에 올랐는데. 당시 스즈키 이치로(시애틀)와의 3차례 만남에서 내야땅볼 2번, 우익수 플라이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바 있다.
개인적인 성적은 좋았다. 하지만, 이치로는 역시 좋은 타자였다. 현역시절 상대했던 수많은 타자 가운데 내가 인상 깊어하는 타자는 이종범(KIA)과 이치로뿐이다. 이유가 있다. 두 타자 모두 잘 치고, 잘 뛰고, 잘 잡는 타자들이기 때문이다.
1995년 대단한 성공을 이면에는 필살기가 있었다.
반포크볼(스플리터) 말인가? 그전에도 던지긴 했지만 1995년부터 많이 던졌고 재미도 본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직구, 슬라이더의 위력이 없었다면 반포크볼의 효과도 떨어졌을 것이다.
1993년 9승 가운데 완투승이 7번(완봉 2번), 1994년에는 18승 중 완투승이 6번(완봉승 2)이었다. 1995년 20승을 올렸을 때는 무려 완투승이 12번(완봉승 2)에 달했다.
지금이야 투수 분업화가 정착됐지만 어디 그때야 그랬나. 개인적으로 완투, 완봉을 할 상황이라면 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톱클래스의 투수로 성장하는 것이니까.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던질 때의 감정이 궁금하다.
20승 할 때를 기준으로 말하면 일단 5회까지는 2, 3점 내주더라도 어떻게든 간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6회부터 1이닝 싸움에 들어간다. 당시 LG 불펜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여차하면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했으니까. 7, 8회 여차여차 가다가 9회가 됐을 때 코칭스태프를 보면 “나가볼래?” 한다. 그럴 때는 전 경기에 중간계투를 많이 썼을 때나 세이브가 성립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럼 또 ‘쑥’ 나가서 던지는 거지 뭐. 그러다 홈런 ‘띵’ 맞기도 하고(웃음). 어쨌든 내가 경기를 완투하는 바람에 동료 투수가 무리하지 않았다는 게 가장 기쁘다.
20승을 올린 다음해인 1996년 갑자기 불펜과 마무리를 오가기 시작했다. 아니 10승 투수도 아니고 20승 투수를 저렇게 써도 되나 싶었던 게 사실이다. 불펜으로 돌아선 계기가 있나.
잘 알려진 대로 허리다. 난 원래 척추가 좋지 않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자신을 가리키며) 봐라. 거기서 보기에도 자세가 이상하지 않나. 가뜩이나 척추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그해 3번째 경기에서 허리를 다치고 말았다.
진단 결과가 뭐였나.
병원에서 무리해선 안 된다는 진단을 내렸다.
이상훈이 마무리를 맡은 뒤 LG의 뒷문은 더욱 강화됐다.
투구이닝이 길어질수록 허리 부담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마무리로 전향했나.
공교롭게 당시 마무리였던 김용수 선배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팀 성적도 전체적으로 좋지 않았고. 이광환 감독님이 그때 처음으로 “짧게 던져보라”고 하시면서 (김)용수 선배와 날 함께 마무리로 쓰셨다.
마무리를 더블스토퍼로 운용했다는 것인가.
그보단 내가 정식 마무리로 적당한지 시험해보고, 적당하다면 적응기를 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이 감독님의 생각이 있으셨던 것 같다. 더블스토퍼란 말은 한국밖에 없지 싶다. 일본과 미국프로야구에서 뛰었지만 한 번도 그런 소릴 들은 적이 없다. (혀끝을 차며) 더블스토퍼라, 참….
당신이 마무리를 맡기 시작하면서 기존 마무리였던 김용수의 실망감이 컸을지 싶다.
아니다. 선발로 돌아선 이후 좋아하셨다(웃음).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가. 요즘 젊은 마무리 투수들은 선발투수로 뛰길 원한다.
글쎄. 난 선발이든 마무리든 별 상관이 없었다. 왜냐? 던지는 게 목표였으니까. 요즘 젊은 마무리들 마음 이해한다. ‘딱’ 나갔는데 역전 홈런 맞고 적시타 맞으면 아주 죽고 싶지(웃음).
구단의 반기를 든 야생마, 선수협을 주도하다
1996년 시즌 중반 갑자기 이광환 감독이 옷을 벗었다. 세간에는 ‘제 발로 나갔다’와 ‘구단에서 잘랐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는데.
(잠시 생각하다가) 후자가 아니었을까. 당시 이 감독님이 팀을 떠나시는 걸 보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음, 그래. 부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뛴 사람으로서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때 처음으로 구단에 반기를 들었다.
반기를 어떤 식으로 들었나?
선수협을 만들려고 동분서주했다.
사실 지금의 선수협이 만들어지기 전 1988년 최동원과 1996년 당신이 이미 결성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다.
어쩌면 처음부터 역부족 도전이었는지 모른다. 1996년이면 내가 고작 프로 4년 차였던 때다. (혼잣말로) 한참 졸병이었지.
선수협 결성을 위해 어떻게 노력했나.
비시즌 때 혼자 차를 끌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선배들을 만나며 왜 선수협을 결성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혈기 하나로 뛰어다녔다.
선수들의 반응은 어땠나.
반반이었다.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시기상조라는 지적을 하는 이도 있었다. 선수들이 뭉치기만 하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이 현실과 부딪히면서 서서히 꺾이기 시작했다. 참, 혼자 하기엔 역부족인 싸움이었다.
현역시절 이상훈은 구단엔 ‘강성’이었으나 팬들에겐
한없이 부드러운 선수였다.
1997년 20승 선발투수에서 47세이브포인트(37세이브) 투수로 전격 변신했다. 1996시즌이 끝나고 동계훈련부터 스프링캠프 때까지 마무리 훈련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김)용수 형님은 이미 선발 정착을 완료했고, 천보성 신임 감독님도 마무리로써 나를 신뢰했던 터라, 팀의 뒷문을 책임지는 확실한 마무리가 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해 한국시리즈까지 오를 수 있었다.
해태와의 한국시리즈에서 LG는 1승4패로 고배를 마셔야 했다. 시리즈 전적 1승1패에서 열린 광주 3차전은 LG 팬들에겐 뼈아픈 기억이다. 1대 0으로 이기고 있다가 1대 5로 지고 말았으니. 7회 이종범에게 통한의 홈런을 맞은 게 컸다.(담담한 표정으로) 내가 맞지 않았나.
당시 잠실 같았으면 홈런은 고사하고 평범한 외야플라이로 끝났을 것이라는 LG 팬들의 아쉬움이 많았다. 지금이야 광주구장 펜스가 넓어졌지만, 당시는 작긴 작았다.(단호한 음성으로) 그렇지 않다. 내가 못 던지고 (이)종범이가 잘 친 거다. 농부가 연장을 탓하지 않듯 투수도 펜스를 탓해선 안 된다. 구장이 작으면 작은 대로 넓으면 넓은 데로 잘 던지면 된다.
마무리 투수란 그래서 힘든 보직인 듯싶다. 왜 아닌가. 이기면 당연히 이기는 것이고 지면 마무리 때문에 진 셈이 되지 않나. 팬들도 그런다. “저 녀석이 다 된 밥에 재 뿌린다”고. 하지만, 선수들끼린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블론세이브를 기록해도 “괜찮다”며 위로하게 마련이다. 왜냐고? 선수들 모두 그 맛을 아니까. 그게 얼마나 불편한 기분인지 아니까.
그렇다면, 마무리 투수의 참맛은 무엇인가.마무리 투수는 누군가의 승을 챙겨준다. 그와 함께 자기도 세이브를 챙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선발은 어느 팀이나 5명이다. 그러나 마무리는 팀마다 한 명이다. 선발은 5명이 순서대로 던지지만, 마무리는 팀이 이기면 매일같이 마운드에 올라야 한다. 그렇다고 마무리가 선발보다 힘들다는 뜻은 아니다. 나야 선발, 중간, 마무리를 모두 경험해보지 않았나.
프로 5년차의 이상훈, 미국행을 선언하다
마무리 변신 후 이상훈은 선발 때처럼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 시즌을 끝으로 미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다. FA(자유계약선수)가 명문화되기 전이라, 구단의 허락 없인 외국진출은 고사하고 뭐 하나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설령 FA 제도가 있었다손 쳐도 프로 5년 차인 당신이 외국진출을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째서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 것인가.당시 기사를 찾아봐라. 난 “반드시 메이저리거가 되겠다.” “빅리그에 진출해 대한남아의 기상을 떨치겠다.” 이런 식의 거창한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손가락을 세며) 1993, 1994, 1995년 해마다 이광환 감독님은 2군이나 1.5군 선수들을 미 플로리다 교육리그로 보냈다. 그리고 다녀온 선수들에게 발표회를 통해 소감을 밝히도록 했다. 그때마다 선수들은 똑같은 말을 했다.
무슨?“미국 애들은 그라운드 밖에서는 어영부영한 것 같아도 안에만 들어오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운동한다.”
별 내용이 없는데.없긴 왜 없나. 그럼 우리는 쌍심지 켜지 않고 운동한단 말인가. 우리도 죽자 살자 운동하는 데 말이지. 매번 선수들의 발표를 들을 때마다 ‘좋아. 내가 꼭 언젠가는 네 녀석들과 한번 겨뤄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고작 그것 때문에 미국행을’ 하는 이들도 있었을 법하다.우리나라는 일부 팬이나 언론이나 외국에 나간다고 하면 10승, 30세이브 이상 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혹시나 마이너리그에 내려가면 무슨 눈물 젖은 빵을 먹니 마니하고 말이지. 하지만, 그런 게 뭐가 중요하나.
당신의 생각은 이해하지만, 구단에선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일이다.그때부터 내 우격다짐이 시작됐다(웃음). 마침 그때 한국프로야구 선수로는 최초로 해태 선동열 선배가 주니치 드래건스에 임대형식으로 진출해 있었고 (이)종범이도 주니치에 임대가 확정된 상태였다.
선례는 선례일 뿐이다. LG가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소문이 있지 않았나. ‘이상훈이 하도 우격다짐으로 하니까 LG에서 귀찮아서 외국진출에 동의해줬다’고. 또 그런 말도 있지 않았나. ‘저 녀석 가만히 두면 또 선수협 만들지 모른다’고. 그런데 참 이상한 게 내가 비시즌 기간 중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선수협 만들려고 선수들한테 도장, 지장 받고 다녔는데도 그때까지 LG에서 한마디도 안 했다는 거다. 때를 기다린 건가(웃음).
미국 진출은 어떻게 진행했나.중간에 에이전트가 있었다.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사람이 오기도 하고.
당신의 말대로 보스턴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처음 보스턴이 제시한 영입액이 얼마였나.300만 달러였다. LG에 임대료로 얼마 주고 나한테 얼마 주겠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막상 미국에 도착하니까. 난데없이….
포스팅 시스템이란 게 생겼다.누가 아니라나. 다른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보스턴에 “야, 보스턴. 네가 뭔데 아시아 선수를 네 마음대로 영입하고 권리를 독점해” 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입단이 지연됐다. 그때까지 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포스팅시스템을 통해 입단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도 “포스팅시스템 그게 뭔데요?”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게 관심 있는 구단들이 내 투구를 직접 보고 난 뒤 제일 비싼 입찰액을 써낸 구단이 나를 영입하는 제도였다.
갑작스런 포스팅으로 무척 당황했을 텐데.포스팅도 일주일 있다 하겠다고 하니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 처지 바꿔 생각해보라. 그때가 비시즌이었다. 그 추운 겨울에 누가 공을 던지기라도 하나. 게다가 1997시즌 57경기나 출전하며 많은 공을 던진 뒤였다. 전혀 몸을 만들지 못한 상태였다.
“몸이 정상이 아니다”며 포스팅을 거부 혹은 연기하지 그랬나.당연히 “안 된다”고 했지. “이 상태에서 도대체 무슨 공을 던지느냐?”라고. 그런데 포스팅을 준비하는 쪽에서 뭐라고 했는지 아나.
?“그냥 캐치볼만 해라.” 그런데, 프로에서 5년 동안 뛰며 배운 게 있다면 만약 내가 캐치볼만 했을 때 미디어는 날 완전 바보 취급할 거란 것이었다. “그게 말이 되느냐?”라고 했더니 그래도 “하라”지 뭔가. 난 그렇게 말하기에 어느 정도 다 이야기가 끝난 상태인 줄 알았다. 아니 정말 포스팅이 별거 아닌 요식행위인 줄 알았다. 그래서 미국 어느 대학야구장에서 캐치볼을 했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내 그러면 그렇지.
각 구단 스카우트들의 표정이 어땠기에.선글라스 너머로 스카우트들을 바라보는데, 어허 죄다 스피드건을 들고 있지 뭔가.
스카우트들도 황당했겠다.당연히 “이거 뭐하자는 플레이야”하지. 주변에서도 전후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준비부족이네 어쩌네”하고. 결국, 이걸론 판단할 수 없다는 스카우트들의 요구로 한 달 후 애리조나에서 다시 포스팅을 하기로 했다.
투수가 공을 던지려면 한 달도 부족한 시간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온 힘을 다해 몸을 만들어 한 달 뒤 투구를 선보였다.
당신의 투구를 보고 역시 보스턴이 가장 많은 입찰액을 썼다. 그래 봤자 30만 달러였다. 애초 300만 달러와 비교하면 10분 1 수준이었다. 시기적으로 내 몸이 100%가 아니란 걸 알았을 테고, 비디오나 직접 찾아와 날 봤기에 어느 정도 검증이 끝났을 텐데 어째서 그렇게 몸값을 후려쳤는지 지금도 다소 이해가 안 된다.
미국행에서 3일 만에 진행된 일본프로야구 주니치행
미국진출에 좌절했지만 이상훈의 도전의식마저 좌절한
건 아니었다
LG는 뭐라고 했나.나야 그거라도 받고 미국진출을 하려 했지만, LG는 요지부동이었다. 구단으로선 당연한 자세가 아니었나 싶다. 어디 그 돈 받고 날 보낼 수 있었겠나. LG도 자존심이 있지.
포스팅이 실패로 끝나고 어떻게 했나.LG 직원들과 정삼흠 투수코치, 트레이너 등은 다 한국으로 철수하고 나만 남았다. 내 기억에 20일 정도 혼자 미국에 남았던 것 같다.
왜 같이 귀국하지 않았나.어느 팀에서 입단 제의가 올지도 몰랐다.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이렇게 가버리면 또 언제 미국진출의 기회가 찾아오겠나 싶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혼자 공원에 가 담벼락에 공을 던지고 혼자 러닝을 하면서 몸을 꾸준히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영입 제안은 들어오지 않았다.
일본프로야구 주니치에 진출했던 이상훈
미국행이 좌절되고 LG로 복귀하나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진출이 발표됐다.그랬다. 3일 만에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 진출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간 줄 아시는 분이 많은데 임대액, 계약금, 연봉 다 LG와 주니치, 자기들끼리 알아서 한거다. 솔직히 그땐 돈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었고 그냥 미국만 갈 수 있으면 됐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진출을 위해 일본진출에 동의했다는 건가.주니치에 진출하며 LG와 이면계약을 했다. 주니치 임대기간 2년이 끝나면 날 자유계약선수로 풀어주기로 했다. 대신 한국 복귀 시는 무조건 LG로 돌아오기로 했다.
무조건 LG로 돌아온다라.난 LG 구단의 녹과 LG 팬들의 사랑을 먹고 큰 선수다. LG가 내 영원한 팀이다. 내가 어딜 갈 수 있겠나. 가슴에 그 어떤 영어 이니셜이 찍혀있든 난 그걸 ‘LG’로 발음했다.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몇 년 후 LG에서 쫓겨나 다른 팀으로 갔을 때 가슴에 찍힌 영어 이니셜은 같은 두 글자였지만 난 그걸 ‘LG’로 읽었다. (계속)
<전설이 된 그라운드의 야생마, LG 투수 이상훈> 3편을 기대해주십시오.
첫댓글 몇 년 후 LG에서 쫓겨나 다른 팀으로 갔을 때 가슴에 찍힌 영어 이니셜은 같은 두 글자였지만 난 그걸 ‘LG’로 읽었다..... 눈물난다 진짜
순X이는 정말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데려온 필쭝이 써야하므로 우리의 우상을 말도 안되는 이유로 내쫏다니(아마 키타가 없었스면 머리깍으라고 트집 잡았겠죠.) 개새X ...야구장에서 해설하다 만나면 쌍욕을 해줄겁니다.
눈물ㅠㅠ
진짜 읽으면서 마음이 두근거리고 묵묵히 내려읽게 되네요... 아... ㅠㅠ;;;; 지금까지 엘지에 있었더라면... 2000년대 엘지가 동네 북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